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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이라 고운사다. 울울창창한 대삼림(大森林)이 제철형(蹄鐵形)으로 등을 껴안아 고개를 돌려 쳐다보면은 높이 뜬 솔개가 그 중턱에서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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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옆으로 흐르는 잔잔한 시내 소리는 숲 속에서 울려나오는 자규(子規)의 소리와 이리저리 얼키어 한아(閑雅)한 정조에다 새긴 듯한 무늬를 놓아 놓는다. 가운루(駕雲樓) 옛집이 구름을 꿰뚫지는 못하였으나 천여 재 시일을 구슬 꿰듯 하였고, 최고운(崔孤雲) 선생의 목소리는 들을수 없으나 그의 발자취를 고를 수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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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온 지 며칠이 되지 못한 김우일은 사무실 뒷방에 혼자 누웠다. 너무 고요한 것이 피부를 간지럽게 문지르는 듯하다. 저쪽 선방(禪房)에서 참선하는 소리가 가끔가끔 그 간지러운 정적을 긁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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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는 다시 한번 나가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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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즈음에 그 절 주임(主任)의 대리를 보는 중 하나가 앞 복도를 지나다가 우일을 보고서 합장하고 와 앉는다. 얼굴빛은 자둣빛같이 검붉으나 건강하다는 것을 유감없이 나타내며 미목(眉目)이 청수하여 그의 천분을 읽을 수 있다. 그가 웃음지으며 말을 꺼낼 때에 하얀 이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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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금 무료합니다. 그러나 퍽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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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좋을 거야 있겠읍니까마는 속계(俗界)보다야 조금 한적한 맛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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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뿐이 아니라 퍽 많습니다. 이런 데서 살면은 늙지를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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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헤헤, 그렇습니다. 건강에 관계가 조금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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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절에 모두 몇 분이나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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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사람 안 됩니다. 한 이십여 인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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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서는 멀거니 서 있다. 그러니까 그 중은 할 말이 없어 군 이야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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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어 번 가 보았지요. 거기에는 나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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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지금 은행에 있는 유일복이라는 사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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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고개를 기웃하고 무엇인지 한참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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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일은 이 중도 그러면 혹시 유일복을 짐작하는가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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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알 만한 일이 있어요. 들으니까 그이가 은행 일을 고만두었다나 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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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올시다. 고만두었읍니다. 그럴 사정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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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일은 속마음으로 일복 사정은 나같이 자세히 알 사람이 없는데 내가 모르게 일복이 은행 일을 그만두었다니 네가 잘못 알았다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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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일 씨 아시는 그 어른이 저 아는 그이가 아닌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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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안동은행에는 유성(柳姓) 가진 이가 그 사람밖에 없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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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말고요. 그이가 유일복과 정혼한 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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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은 무슨 가탄한 일이 일복과 정희 사이에 생겼는가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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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할 것까지는 없읍니다마는…가엾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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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은 궁금증이 나서 무슨 일인지 어떻게 해서든지 알아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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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지 가르쳐 주십쇼그려. 궁금합니다. 그렇지 않어도 요사이 그 사람의 소식을 듣지 못해서 궁금하던 차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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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일복 씨하고 그렇게 친하시다 하고 또 우일 씨를 신용하는 까닭에 말씀은 하겠읍니다마는 정희 씨가 일전에 돌아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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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은 우일은 자기의 동생의 죽음을 들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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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서 점잖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며 입속으로 중얼중얼 염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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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은 다시 점잖게 고개를 내흔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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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은 중의 얼굴을 무엇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듯이 한참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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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태까지 민틋한 얼굴에 윤기가 번쩍거리고 그야말로 영광(靈光)이 있는 듯하더니 지금 자기가 속마음에 어제 저녁 자기가 변소에 갔을 때에 이 절에는 여자가 하나도 없다는 데서 여자를 본 것과 또는 그 여자가 정희와 똑같은 것을 본 것을 생각하면서 그 중의 얼굴을 보니까 그 윤기와 영광은 어디로 사라지고 짐승의 털 같은 검은 수염과 사자 입 같은 길게 째진 입과 이리의 욕심 많은 눈 같은 두 눈이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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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신심(信心) 깊다는 승(僧)ㆍ목사(牧師) 등 여러 종교가에게 대하여 착실한 신임을 하지 못하는 우일은 속으로 '너도 사람인 이상에야 죄를 안 짓고는 어디가 가려워서 못 견디는 모양이로구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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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일은 얼굴 빛을 다시 냉정하게 고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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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 유일복 씨 까닭이지요. 그이가 아마 마음을 주지 않었든 모양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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