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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靑春) ◈
◇ 15 ◇
해설   목차 (총 : 17권)     이전 15권 다음
1926년
나도향
 

15

 
2
그날 밤 한 시나 되었다. 우일은 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웁게 문을 나섰다. 복도로 가만가만 걸어서 옆의 방을 들여다보니까 주지 대리가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시커먼 먼 산에 바람이 쏴 할 때에는 그 무슨 대신(大神)이 달음질하는 듯하다. 우일은 회랑(回廊)을 돌았다. 대웅보전이 점잖게 (大雄寶殿) 앉아 있는 앞뜰을 지났다. 주방을 지나 다시 마당에 나왔다. 이쪽 선방에서는 이야기 소리가 들리더니 뚝 그친다. 우일도 멈칫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 소리가 나기를 기다려 다시 걸어갔다.
 
3
맨끝 방을 돌았다. 그리고 뒷방 문 앞에 와 섰다. 백지로 다시 바른 미닫이에는 머리카락 날신날신 하는 양 머리가 비쳤다 말았다 한다. 우일은 숨소리를 죽이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찬바람이 쏴 ── 불어 잔등이를 으쓱하게 할 제 그는 미닫이 틈에 한 눈을 대고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4
불빛이 어룽대어 그 방안에 앉은 여자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지 않고 윤곽의 곡선이 자주 변한다. 그 여자는 무슨 책인지 펴놓고 앉아서 보는지 마는 지 십분이 지나가도 책장 하나 넘기지 않는다.
 
5
우일은 속으로
 
6
'분명히 정희는 정흰데'
 
7
하며 더욱 똑똑한 증거를 알기 위하여 자기가 삼 년 전에 대구서 만날 때의 기억을 꺼내어 그것과 지금 방안에 앉아 있는 실물과 대조하기를 시작하였다. 댕기를 드렸을 때에 본 정희가 지금 머리를 튼 때와 똑같을 리는 없지마는 어떻든 많이 같은 곳이 있다. 눈초리에 눈썹이 조금 숱해서 사람의 마음을 끌게 된 것, 코가 어여쁜 것, 입이 조그마한 것, 두 뺨이 불룩한 것, 가끔가다가 고개를 까땍까땍하는 버릇까지 꼭 정희다.
 
8
그러면 저 정희가 무엇 하러 자기 부모와 또는 일복까지 내버리고 이런 절에 외로이 와 있는지? 정말 주지 대리의 말과 같이 죽었다 하면 여기에 와 있을 리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죽지 않은 정희를 옆에다 두고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겠는데 내가 아마 잘못 보고 그러지나 않는지? 똑같은 여자가 있는 것을 잘못 보고 그러지! 그렇지만 어떻든 나이 젊은 여자가 여기 혼자 와 있는 것은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다. 아니 한양(閒養)을 하러 와 있는 것인가?
 
9
우일은 한참 의욕에 싸여 멀거니 서 있으려니까 방안에서 가늘게 기침하는 소리가 나더니 부시시 일어나는 소리가 난다. 우일은 깜짝 놀라 담모퉁이에 가서 숨었다.
 
10
방문 소리가 나더니 그 여자는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는 마당 한복판에 한참 섰다가 다시 두어 번 사면을 둘러보고서 샛길로 아래 시내를 향하여 내려간다. 우일도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겨 쫓아 내려갔다.
 
11
저 아래서 차르럭차르럭 손 씻는 소리가 나더니 또 얼굴 씻는 소리가 난다. 우일은 그 여자가 앉아서 수건을 적시는 바로 옆 나무 뒤에 숨어 섰다.
 
12
그 여자는 얼굴을 씻고 손을 씻은 뒤에 다시 일어서 멀거니 섰더니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며 나무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별을 쳐다보고서 그 별을 껴안을 듯이 두 팔을 벌려 한껏 내밀었다가 다시 끌어들이며,
 
13
"아아"
 
14
하고 옆의 사람에게까지 들리도록 소리를 내어,
 
15
"저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또한 아무것도 부끄러울 것이 없읍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저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쳤읍니다"
 
16
하고서 한참 있다가 다시,
 
17
"하나님! 그러나 저는 그이를 사랑합니다. 저의 피와 저의 생명은 그를 위하여 있읍니다. 저는 그를 위하여 그의 제단(祭壇) 위에 저의 흠 없는 사랑을 바치려 합니다."
 
18
그리고서는 고개를 숙이고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린다. 너무 감격함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울게 하였다.
 
19
'<그이>! 그이가 누구일까?'
 
20
우일은 <그이>가 알고 싶었다. '그이가 일복이가 아닌가?'
 
21
그러면 저 여자는 필연 실연자(失戀者)인 듯한데 그 대상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22
소나무 위에서 이슬이 가끔가끔 머리 위에 떨어질 때마다 척근척근한 것이 흐릿한 감정을 청신하게 하는 동시에 어디선지 자기 몸뚱어리에서 용기가 나는 듯하다.
 
23
그는 혼자 속으로,
 
24
'물어 봐?'
 
25
하다가도 그 냅다 나오는 감정을 참고서,
 
26
'아니지! 만일 말을 꺼냈다가 정말 저 여자가 정희가 아니면 어떻게 하게. 정희라 할지라도 나를 못 알어보면 어찌하노? 그렇지. 내일 자세히 알어본 뒤에 하자!'
 
27
하고서 다시 나무 등뒤로 서 그 여자의 행동만 살펴본다.
 
28
가끔가끔 나뭇잎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가늘게 떨 때 우수수 하는 소리가 너무 고요함을 조금씩 조금씩 깨뜨린다.
 
29
그 여자는 대리석으로 깎아 세운 여신상처럼 한참이나 멀거니 서 있더니 몸을 잠깐 뒤로 틀어 고개를 돌리더니 올라갈까 말까 하는 듯이 주저주저하다가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다. 흰 옷 입은 그의 흐르는 듯한 몸맵시가 새까만 암흑 속에 서 있으니 시내에서 솟아 오른 정령의 화신같이 보인다.
 
30
그러고서 몸짓을 잠깐씩 할 적마다 치마 저고리의 주름살이 살근살근 울멍줄멍 할 때 주름살의 음영이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여 휘둘리는 곡선이 희었다 검었다 한다.
 
31
그 여자는 다시 두 손을 맞잡고서,
 
32
"그만 올라갈까?"
 
33
하고서 내려오던 비탈로 다시 올라갈 때 그는 입 속으로 혼잣말로,
 
34
"나는 살었으나 죽은 사람이지? 그렇지! 언제든지 일복 씨가 나를 생각지 않으시면 나는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35
할 제, 이 소리를 들은 우일은,
 
36
'응? 무엇야? 일복?'
 
37
하고 속으로 놀라면서,
 
38
'그러면 정말 정희인가?'
 
39
할 제, 그 여자는 다시,
 
40
"이이는 나를 여기다 혼자 맡겨 두고 어디를 가서 여태 오지 않는고?"
 
41
하다가,
 
42
"그렇지. 나는 어디로든지 그 여승이 가자는 대로 가겠지만 일복 씨는 이렇게 내가 살어 있는 줄 모르시고 죽은 줄만 믿으시렷다! 그렇지. 그렇게 아시는 것이 일복 씨에게는 도리어 좋으실 터이지!"
 
43
우일은 알았다. 그 여자가 분명히 정희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당장에,
 
44
'정희 씨, 무엇요?'
 
45
하려다가, 그래도 그렇지 않아서 가만히 그 여자의 뒤를 쫓아 너른 마당 한 가운데 왔을 때. 그는 가늘게 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내었다. 별은 공중에 총총히 박히었고 시커먼 숲은 사면에 둘러 있었다.
 
46
'"에고!"
 
47
하고 자지러지는 듯이 놀란 그 여자는 뒤를 한 번 돌아다보고서 누가 자기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더니 한달음에 뛰어서 방으로 들어가려 한다. 우일은 어조를 가다듬어,
 
48
"여보세요! 정희 씨!"
 
49
하고서 그래도 의아하여 시험삼아 불러 본 <정희>라는 이름이 맞았는지 맞지 않았는지 그 여자가,
 
50
"녜?"
 
51
하고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멈칫하고 서서 반갑기도 하고 의심쩍어 흘끔 돌아다보지 않았더면 몰랐었을 것이다.
 
52
"정희 씨를 이런 곳에서 뵈옵기는 참으로 뜻밖입니다"
 
53
하고 돌아서는 정희에게로 가까이 갔다. 정희는 누구인지 몰라서 겁이 나는 듯이 뒤로 물러서며,
 
54
"누구세요?"
 
55
우일은,
 
56
"녜! 저를 몰라 보시겠어요? 저는 김우일이올시다."
 
57
정희는 눈을 번쩍 뜨는 듯이,
 
58
"녜! 김우일 씨요! 이게 웬일이십니까?"
 
59
하고서 일복이나 만난 듯이 가까이 덤벼들려다가 다시 멈칫하고 서면서,
 
60
"참 오래간만이십니다"
 
61
하고서 고개를 숙이고 땅을 내려다보면서 한참 서 있더니,
 
62
"참 오래간만이세요."
 
63
다시 하는 목소리에는 옛날을 생각하여 오늘을 비추어 보는 일종 금치 못한 애수의 회포가 엉키었다.
 
64
"녜. 뵈인 지가 벌써 삼사 년이나 되나 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곳에 와 계십니까?"
 
65
정희는 주저하였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니 할 수도 없었다. 말을 하자니 자기의 비밀을 세상에 알릴 터이요. 아니 말하자니 무슨 핑계가 없었다.
 
66
"녜, 녜. 다니러 왔어요."
 
67
"다니러요?"
 
68
"녜."
 
69
"그러면 혼자 오셨나요?"
 
70
"녜."
 
71
"언제 오셨어요?"
 
72
"온 지 며칠 안 돼요."
 
73
"녜, 그러세요."
 
74
우일은,
 
75
"저도 여기 온 지가 며칠 못 됩니다마는, 일복은 요사이 잘 있나요?"
 
76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서도 정희의 기색을 살피었다. 정희는 일복이란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괴로운 듯이,
 
77
"녜, 안녕하세요"
 
78
하고서는 눈을 위로 흘겨뜨면서 우일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속마음으로 저이가 내가 물가에서 한 소리를 다 듣고서 일부러 저렇게 물어 보는 것이렷다, 하는 생각을 할 때 얼굴이 홧홧하여졌다. 우일은 또다시 어떻게든지 의심나는 것을 알아보고 싶어서,
 
79
"이런 말씀을 여쭈어 보는 것은 실례일는지 알 수 없읍니다마는 밤마다 시냇가에 내려가시나요?"
 
80
정희는 가슴이 달랑 내려앉으며 '에쿠, 저이가 아는구나'하고서,
 
81
"그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82
"날마다 뵈오니까 말씀예요."
 
83
"날마다요?"
 
84
"녜."
 
85
"오늘도 오셨어요?"
 
86
"네. 뵈옵기만 할 뿐 아니라 무엇이라고 하시는 말씀까지 다 들었어요."
 
87
"제 말하는 것까지?"
 
88
"녜."
 
89
정희는 한참 있다가 공중을 쳐다보더니,
 
90
"우일 씨는 우일 씨의 누이동생 같은 이정희의 비애를 알어 주실 수가 있겠지요?"
 
91
입술이 떨리는지 목소리가 가늘어지며 떨린다. 그리고 망연히 서 있는 그의 두 눈에는 무궁한 거리에서 멀리 비추는 별빛을 반사하여 반짝거리는 눈물 방울이 그 별 같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92
우일은 정중한 목소리로,
 
93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94
"저는 죽은 사람예요. 저는 살어 있으나 죽은 사람예요. 저의 목숨은 비록 육체의 피를 돌게 하나 저는 죽은 지 오랜 사람입니다. 그는 저의 최대의 행복을 잃었고 또는 저는 지금 세상을 속이어 이곳에 몸을 감춘 사람입니다. 물에 빠진 나로서 오늘은 잠깐 이곳에 머물렀으나 내일은 또 어디로 갈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를 물에서 구해 낸 여승은 저를 잠깐 이곳에 맡겨 놓고 모레에는 다시 나를 데려다가 어느 곳에 숨겨 줄는지 알 수 없읍니다."
 
95
그러고서는 그대로 서 있는 정희의 두 눈에는 구슬 구슬이 눈물이 떨어진다.
 
96
이 말을 들은 우일은,
 
97
"정희 씨! 제가 일복의 가장 신뢰하는 친구인 것을 알어 주시죠. 그러면 저는 일복 군에게…"
 
98
"고만두세요."
 
99
정희는 우일의 말을 가로끊었다.
 
100
"나는 우정을 의뢰하여 사랑을 이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라, 우정으로써 사랑을 이을 수는 없읍니다. 사랑은 사랑으로야만 이을 수가 있겠지요."
 
101
이때이다. 저편에서 사람이 오는 기척이 났다.
 
102
"에헴."
 
103
기침 소리는 나이 늙은 주지의 소리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삼물 장삼 자락이 어두운 저쪽에서 걸음걸이에 흩날리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정희는 깜짝 놀라면서,
 
104
"에쿠, 우일 씨! 가세요, 어서요."
 
105
우일은,
 
106
"녜? 녜."
 
107
"밤이면 이 절 주지가 가끔가끔 저 있는 곳까지 순회를 하고 가요. 제가 이 절에 맡겨 있을 때까지는."
 
108
정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댓돌 밑까지 쫓아온 우일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109
"이 절 주지가 저를 구한 여승의 법사(法師)이라나요."
 
110
이것이 일복과 동진이 양순의 집을 가려던 전날 밤이었다.
【원문】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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