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청춘 (靑春) ◈
◇ 17 ◇
해설   목차 (총 : 17권)     이전 17권 ▶마지막
1926년
나도향
 

17

 
2
그날 밤이다. 일복과 동진이 양순의 집에서 나간지 한 시간이 지난 열 한 시이다.
 
3
누구인지 시커먼 옷을 입고 머리에 검은 수건을 두른 사람 하나가 양순의 집 뒤 언덕을 기어오르더니 사면을 둘러보고서 다시 그 집 뒷담을 살금살금 기어간다. 무엇인지 기다란 막대기로 이리저리 위아래를 조사하더니 중턱을 손에 단단히 쥐고서 뒤창을 향하여 걸어가다가 무엇이 부스럭하기만 하여도 멈칫하고 서 있다가 소리가 그친 뒤에야 다시 걸어간다. 사면은 적적 고요한 밤인데 공중 위에서 유성 하나가 비스듬히 공중을 금 긋는 듯이 흐르고 별들까지 속살대는 소리를 그친 듯하다. 영호루 나루에 가로놓인 다리에 물결치는 소리가 차르럭거리며 풀 속에 곤히 자는 벌레를 잠 깨우는 것이 오늘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다.
 
4
그 검은 옷 입은 사람은 뒤창에 와서 가만히 엎드려 한참이나 그 속을 엿듣더니 손가락에 침질을 하여 창구멍을 뚫고서 그 속을 들여다본다. 그러고서는 무엇을 생각하더니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저쪽에는 버드나무 두어 개가 하늘을 꿰뚫을 듯이 정적 속에 서 있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 앞마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루로 올라와 뒷방을 엿보고 안방을 들여다보았다. 처마에 잠자던 제비 새끼가 찌르륵 하는 바람에 그는 멈칫하고서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건넌방으로 소리 없이 건너가서 손에 든 총을 옆에 놓고서 머리에 쓴 것을 벗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복이었다.
 
5
일복은 이불도 덮지 않고 가로 누운 양순을 가만히 흔들었다. 그의 손이 그의 보드라운 살에 닿을 때, 그는 간지러운 불쌍함을 깨달았다. 그러고서 지금 이때부터는 여기 누운 이 여자와 끝없이 갈 것을 생각하매, 공연히 세상 일이 비애로웁고 한스러웠다.
 
6
"일어나!"
 
7
오기를 기다렸는지 양순은 쌍꺼풀진 두 눈을 반짝 뜨더니 꿈꾸는 사람처럼,
 
8
"에구, 오셨네."
 
9
"일어나! 어서!"
 
10
양순의 손을 붙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일복의 손은 떨리었다.
 
11
"가야지!"
 
12
일복의 목소리는 전판(電板)에 구르는 구슬같이 떨리었다.
 
13
"어서! 어서!"
 
14
그러나 양순은 일복의 목을 끼어안으며,
 
15
"여보세요, 정말 가요?"
 
16
하고서 소리 없이 운다.
 
17
"그럼 가야지. 가지 않고 어떻게 해?"
 
18
하고 양순을 달래듯이,
 
19
"울지 말어, 응! 남이 알면은 어떻게 하게."
 
20
양순은 고개를 더욱 일복의 가슴에 비비면서,
 
21
"어디로 가요?"
 
22
양순은 어린애처럼 온몸을 발발 떤다.
 
23
"어디로든지."
 
24
일복은 또 한 번 안방을 건너다보았다.
 
25
양순의 울음은 복받쳐 오르며,
 
26
"여보세요. 저는 할 수가 없어요"
 
27
하고서 침을 한 번 삼키었다.
 
28
일복은 병 앓는 어린애를 안은 어머니가 귀여웁고도 불쌍히 여겨 내려다보는 듯이 양순을 내려다보며 혼자 마음으로 '네가 아직 집을 떠나 보지 못 해서 집을 떠나기가 싫어서 그러는구나?'하였다.
 
29
"그럼 어떻게 해? 어서 가야지? 응?"
 
30
"가기 싫거나 집을 떠나기가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31
"그럼.?"
 
32
"어제까지는 제가 당신을 따러서 어디까지든지 가려 하였어요. 그러나 오늘은 다만 당신이 죽여 주기만 기다릴 뿐이에요."
 
33
"무어야?"
 
34
일복은 소리가 커졌는가 의심하여 다시 문 밖을 내다보고서,
 
35
"그런 소리 말고 어서 가!"
 
36
일복은 울고 싶도록 섭섭하고 분하였다.
 
37
"그러면 너의 마음이 하룻밤 사이에 변하였구나?"
 
38
하면서 울크러뜨릴 듯이 양순을 끼어안았다. 양순은 일복의 허리를 안고 몸은 어리광처럼 좌우로 흔들며 기막히는 목소리로,
 
39
"아녜요, 아녜요."
 
40
"그러면 어째 그래?"
 
41
양순은 한참이나 주저하다가,
 
42
"저는 장돌뱅이에게로 가는 수밖에 없어요."
 
43
일복은 양순을 몸에 붙은 거머리나 떼는 것처럼 두 손으로 밀치고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44
"무어야? 장돌뱅이에게로?"
 
45
"………"
 
46
일복은 양순을 손에서 뿌리치며,
 
47
"에 ── 더러운 년! 그러면 여태까지 네가 나를 생각한다는 것이 다 거짓말이었구나. 너의 조 새빨간 입으로 같이 가자 한 것도 다 거짓말이었지?"
 
48
하자 개가 다시 킹킹 짖는다.
 
49
안방에서 잠자던 어미가 개소리에 잠을 깨었다가 건넌방에서 인기척이 있는 것을 듣고서,
 
50
"그 누구요?"
 
51
하고 드러누워서 건넌방을 바라본다. 이 소리를 들은 일복은 얼핏 옆에 놓았던 사냥총을 들고 아무 말 없이 안방 동정만 살피었다.
 
52
어미는 그래도 담벼락에 어룽대는 그림자가 이상하므로 옆에서 자는 자기 아들을 깨운다.
 
53
"얘, 얘야."
 
54
코를 골고 자던 엄영록이라는 놈이 부스스 돌아누우며 응응 할 뿐이다.
 
55
"응, 일어나거라, 일어나."
 
56
그래도 대답이 없다. 어미는 혼자 일어나 건넌방에 누가 왔는가 알려고 가만가만히 마루로 건너간다.
 
57
일복은 가슴이 떨리고 손이 떨리고 다리가 떨린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 앞에 선 양순 어미뿐이다. 그리고 그 양순 어미는 여적(女賊)의 괴수나 힘 많은 짐승같이 보이는 동시에 자기의 몸이 지금 당장에 그 여적의 괴수 같고 짐승 같은 양순 어미에게 해를 당할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침착치 못한 마음으로서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가 보신용(保身用)으로 가져온 사냥총을 들었다. 그러나 그 총부리는 떨렸다.
 
58
"이 짐승 같은 년, 꿈적 말어. 끽 소리만 해 보아라. 그대로 쏠 터이니."
 
59
어미는 '에구머니'한 소리에 그대로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떤다. 일복은 이것을 보고서 아까 그 여적의 괴수나 사나운 짐승을 본 듯한 생각은 어디론지 없어지고 땅에서 꿈지럭거리는 지렁이같이 더러웁고 징그러운 중에도 아무 힘도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웬일인지 세계를 정복한 듯한 용기와 자신이 생기었다. 그래서 그가 '꿈적 말어' 소리를 지를 때 자기가 생각지도 못하던 큰 소리가 자기의 폐(肺)와 성대(聲帶)를 과도로 떨리게 하며 나왔다.
 
60
안방에서 자던 엄영록이 이 소리에 깨었다. 굴 속에 잠들었던 사자와 같이 그는 툭툭 털고 일어나 문 밖을 내다보더니 한달음에 마루로 뛰어나와, 채 일복은 보지 못하고 어미의 떠는 것을 보고서,
 
61
"이게 웬일인고?"
 
62
하니까 어미는 그저 덜덜 떨면서 건넌방을 가리키며,
 
63
"저, 저"
 
64
할 뿐이다.
 
65
일복은 또 총을 엄영록에게 들이대며,
 
66
"너는 웬 짐승이냐? 이놈! 꿈적 말어. 죽고 싶거든 덤벼라!"
 
67
일복은 으레 그놈도 항복하려니 하였다. 그러고서 그 조그마한 여적의 자식쯤이야 그대로 꼼짝 못하리라 하였더니, 일복의 예상은 틀리었다.
 
68
엄영록이란 담 크기로 동리에 유명한 놈이다. 그는 태연히 나서더니 한참이나 일복의 눈을 바라보다가 재빠르게 옆에 놓여 있는 방칫돌을 들었다.
 
69
양순은 방 한귀퉁이에 서서 일복의 행동만 살핀다.
 
70
엄영록은 일복에게로 덤비어든다. 이것을 본 일복은 자기의 손에 그것을 보호할 만한 무기가 있는 것을 알기는 알면서 황망하고도 무서운 생각이 나서 총부리가 떨리기 시작하였다.
 
71
"어디 놔 봐라! 놔!"
 
72
하고 소리를 지른다.
 
73
일복은 황급한 가운데 그놈의 팔을 향하여 한방 놓았다. 팔에 들렸던 방칫 돌은 쾅 하고 떨어지며, 떨면서 앉아 있는 어미의 가슴을 눌렀다.
 
74
"에구, 사람 살리우"
 
75
소리가 나더니, 어미는 그 자리에 자빠졌다. 이것을 당한 엄영록은 붉은 피가 뚝뚝 듣는 팔로 옆에 찼던 장도를 빼어들었다.
 
76
그러고서는 자기의 용기와 힘을 다하여 일복에게로 덤벼든다.
 
77
일복의 총부리는 떨린다. 그가 사람의 신음하는 소리와 또는 마룻바닥에 떨어져 흐르는 사람의 피를 볼 때 그의 몸이 아니 떨리는 곳이 없고 그의 눈길이 닿는 곳이 떨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입을 벌리고 덤벼드는 엄영록을 볼 때 그는 총을 아니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함부로 자기의 정신을 다 차려 두 방을 놓았으나 밤중에 이슬찬 공기를 울리는 총소리는 다만 담벼락을 뚫고서 지나 나갈 뿐이다.
 
78
일복은 엄영록에게 총부리를 잡혔다. 그러고서는 엄영록의 단도 쥔 손이 일복의 허리를 스치더니 일복은 정신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79
엄영록은 칼을 마루에 내버리는 듯이 휙 던지며,
 
80
"흥, 다 무엇이냐? 되지 않은 녀석! 총? 총이 무슨 일이 있어?"
 
81
양순은 일복이 넘어지는 것을 보더니 그대로 덤벼들어 얼싸안고서,
 
82
"여보세요, 일어나세요"
 
83
하면서 일복의 몸을 흔들어 죽은 데서 깨려 한다. 이것을 본 엄영록은,
 
84
"흥"
 
85
하고 비웃더니,
 
86
"얘, 그 정신 없는 짓 좀 하지 마라. 죽었어, 죽어! 죽은 사람을 붙잡고 네가 암만 그러면 무엇 하니?"
 
87
양순은 죽었다는 말에 실신이 되도록 놀라,
 
88
"에!"
 
89
하고서 자기 오라버니 한 번 보고서 일복의 얼굴 한 번 들여다보았다.
 
90
"오라버니."
 
91
"왜 그래?"
 
92
양순의 눈에서는 애소의 눈물이 떨어지며,
 
93
"이이를 다시 살려 주세요."
 
94
"무어야? 허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 주어?"
 
95
"네! 살려 주세요. 제가 할 말이 있어요."
 
96
엄영록은 핀잔 주듯이,
 
97
"이 어리석은 계집년아! 그따위 생각 말고, 자! 송장이나 치워서 너의 오라비 죄나 벗게 해!"
 
98
"오라버니!"
 
99
양순은 두 손을 모으고 신명(神明)께 기도나 하는 듯이 자기 오라버니를 처다보면서,
 
100
"저이를 죽이지 마시고 나를 죽이셨드면 좋았을 것을…"
 
101
할 때 일복은 눈을 떴다. 그는 그때야 자기 옆구리가 아픔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이켜 옆을 볼 때 거기에는 양순이가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102
그는 몸에 칼을 맞고서도 마음속에도 어서어서 양순을 데리고 도망할 생각 뿐이었다. 그래서 힘을 다하여 벌떡 일어서며,
 
103
"가! 어서 가!"
 
104
하고 양순의 손을 잡아 끌려 할 때 그의 신경은 교란(攪亂)하여져서 눈에는 남폿불이 보이기도 하고 마당이 보이기도 하고 자빠진 양순 어미가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양순 어미의, 자빠진 늙은 계집의 히들히들한살이 보일 때 그는 눈을 가리고 싶도록 무서웁게 더러웠었다. 그러고서는 죄 묻은 검은 남루(襤褸)를 누가 자기 몸 위에 씌워 주는 것 같아서 그는 몸서리를 치고 벌벌 떨다가 그 어미가 으스스한 신음 소리를 내고서 뒤쳐 누울 때 그는 미친 사람같이 무서운 웃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서는 다섯 손가락을 벌리고서 그 어미를 뜯어먹을 듯이 들여다보다가 다시,
 
105
"양순! 가! 어서 가! 날이 밝기 전에!"
 
106
하며 연한 양순의 가는 팔을 잡아끈다.
 
107
"가! 가!"
 
108
양순은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끄는 대로 끌려간다.
 
109
이 꼴을 서서 보고 있던 엄영록이라는 놈이 성큼 한 발자국 나서면서 양순을 홱 뺏으면서,
 
110
"어디를 가?"
 
111
하고 가로 나선다.
 
112
"못 가!"
 
113
이 꼴을 당한 일복은 엄영록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114
"엠"
 
115
하고 이를 악물며 덤빌 때 그의 전신을 맹화 같은 분노가 사르는 듯하였다.
 
116
"안 놓을 터이냐?"
 
117
일복은 엄영록의 팔을 잡고 양순을 빼앗으려 할 때 엄영록은 완강한 주먹으로 일복의 가슴을 탁 밀치는 바람에 일복은 그대로 건넌방 구석에 나자빠지자, 머리를 놓여 있던 총대에 맞아 눈앞에 번갯불이 번쩍 하는 것 같고 정신이 없어 온 천지가 팽팽 내돌리며 콧속에서는 쇳내가 난다.
 
118
그는 한참 정신을 차리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려 할 때 그의 방바닥을 짚으려는 손이 총부리를 만지게 되었다.
 
119
그럴 때 그는 무슨 신통한 도리를 발견한 듯이 속마음에 옳지 하는 생각이 났다. 그러고서 그 총을 들고 일어서려 할 때 귓결에 엄영록이란 놈이 양순의 팔을 끌며,
 
120
"가자, 어서 가"
 
121
하며, '어머니를 일으켜야지'하는 소리를 듣고서, 그는 다시 벌컥 분기가 치밀어 올라오며,
 
122
"에 이놈아, 어디를 가?"
 
123
하고 일어서자, 한 방을 놓은 총소리와 함께 엄영록은 마루끝에서 마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124
이것을 본 양순은 일복에게로 달려들었다. 그에게는 일복이 자기 오라버니 죽이는 것을 보고서 얼마나 일복이가 무서웠는지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그 무서움을 없이 할 만큼 안전한 피난처는 일복밖에 없었다.
 
125
그러나 엄영록이 쓰러지는 것을 본 그 찰나에 일복의 머릿속에는,
 
126
"살인!"
 
127
이라는 소리가 들려 오며 그는 혼자 속으로,
 
128
"인제는 정말 사람을 죽이었는가?"
 
129
하면서 덤벼드는 양순도 본체만체 그는 그대로 멀거니 섰다가 엄영록이 자빠진 것을 가까이 와서 들여다보더니,
 
130
"에!"
 
131
소리를 지르고 그 자리에 기절하다시피 놀라 자빠지더니, 다시 일어서서 고개를 돌이켜 양순을 보더니, 양순의 마음을 위로나 하는 듯이 빙긋 웃을 때 감출 수 없이 일어나오는 무서운 마음은 그 웃음을 살인광이 사람의 피를 보고 웃을 때와 같이 음침하고도 으스스한 웃음을 만들었다. 그래도 일복은 두 눈에 피가 올라와 불 같은 빛이 나는 눈망울로 양순을 보며,
 
132
"가야지! 어서 가! 남에게 들키기 전에."
 
133
양순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다가,
 
134
"여보세요"
 
135
하며 일복을 애연(哀然)하고도 떨리는 목소리로 부를 때,
 
136
"어서 가! 어서! 어서."
 
137
일복은 황망히 사면을 둘러보며 재촉을 할 제 그의 다리는 떨리었다.
 
138
그러나 양순은,
 
139
"저는 갈 수가 없어요"
 
140
하며 붙잡으려는 손을 피하여 몸을 이리로 돌이켰다.
 
141
"저는 가고 싶어도 할 수가 없거니와…"
 
142
하면서 속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저이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지! 그러나 나는 저이를 사랑할 수는 없다. 내가 비록 저이를 잊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저이를 따라 갈 수는 없지. 저이는 자기의 사랑하는 이를 죽게 한 이지? 그리고 우리 오라버니를 죽인 이지?'
 
143
한참 있다가 또다시 생각하기를,
 
144
'그렇지만 나는 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지'
 
145
하고서 일복을 한참 또다시 보더니,
 
146
"저는 당신을 따라갈 수는 없어요"
 
147
할 때 피묻은 허리를 한 손으로 쥔 일복은,
 
148
"무어야? 갈 수가 없어?"
 
149
"네! 저를 이 자리에서 저 우리 오라버니처럼 쳐죽여 주세요."
 
150
"안 될 말! 안 될 말이다!"
 
151
그는 미친 사람같이 소리를 지르더니,
 
152
"어서 가자! 어서 가!"
 
153
할 제 양순은 그 옆에 떨어진 일복의 피묻은 칼을 집어 일복을 주며,
 
154
"여보세요, 제가 당신을 생각지 않는 것이 아니며 또는 같이 가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따라감보다도 당신의 칼에 죽기를 바랍니다."
 
155
그의 목소리는 비장하였다. 그리고 다시,
 
156
"나는 남의 사랑을 빼앗어 자기를 복스럽게 하기는 원치 않어요. 당신을 위하여 죽은 이의 사랑을 빼앗으려 하지는 않어요"
 
157
하고는 떨어지는 눈물로써 발등을 적시다가 다시,
 
158
"자"
 
159
하고 칼을 내밀면서 일복을 향하여,
 
160
"당신께서도 무슨 결심이 계시겠지요"
 
161
하고서 속적삼을 풀어헤친 양순의 젖가슴은 백옥같이 희다.
 
162
일복은 무의식하게 그 칼을 받아들을 때 그에게 모든 것이 절망인 것을 알았다. 그러고서는 그래도 맨 마지막 희망, 즉 양순을 데리고 사랑의 나라로 도망을 갈 줄 알았다가, 오늘에 그 사랑인 양순이가 가기를 거절할 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엥' 소리를 치고 온몸을 부르르 떨 때에는 모든 비분이 엉키고 덩지가 되어 나중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저주하고 싶은 동시에 그것을 참지 못하여 일어나는 본능적 잔인성이 그의 칼자루를 단단히 쥐게 하고서 절대의 자유로서 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양순이 자기 팔에 안기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창백한 이마를 어려 덮었고, 다시는 뜨지 않으리라고 결심한 두 눈이 비장하게 감기어 있으며 맺힌 마음으로 악물은 붉은 입술이 하얀 두 이 사이에 을크러지도록 물려 있어 자기의 전 생명을 바치고 있는 양순을 내려다볼 때 그는 자기의 모든 원망을 한꺼번에 몰아다가 한칼 끝에 모아 연약한 양순을 그대로 찌르려 하였다.
 
163
그러나 그가 눈을 감고 칼을 들어 양순의 가슴을 찌르려 하다가 그는 이런 것을 깨달았다.
 
164
누가 남의 칼날에 ? 말없이 자기 생명을 바치는 자이냐? 할 때 그는 모든 희열과 또는 애인에 대한 경건한 감사의 마음이 생기면서 그는 다시 한번 최후를 기다리는 양순을 안았다. 그러고서는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면서,
 
165
"참사랑을 알 때에는 그 생(生)의 여유가 찰나를 두고 다투지 않지는 못 하는가?"
 
166
그리고는 눈물이 어린 눈으로 자기의 손에 든 칼을 볼 때 멀리서 사람의 기척이 들렸다. 그는 황급한 마음이 다시 나서, 다시 눈을 감고 칼을 들어 양순의 심장을 향하여 힘껏 칼날이 쑥 들어갔을 정도로 찔렀을 때 자기 팔에 안긴 양순은 팔딱 하더니 두 팔 두 다리에 힘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이키고 감히 바로 양순을 보지를 못할 때 자기 손에 피묻은 것을 보았으나 그래도 양순이 어쩐지 참으로 죽은 것 같지가 않아서 또다시 한번 그의 가슴 정중(正中)을 내리찔렀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이 손이 떨리지 않고 아까와 같이 지긋지긋하지가 않고 아까와 같이 감히 손이 내려가지 않지 않고 한번에 내려갔다. 그의 칼이 양순의 가슴에 박혀 잠깐 바르르 떨 때에는 또 한번 양순이가 몸을 팔딱 하고 목구멍 속으로 연적(硯滴)에 들어가는 물방울 소리 같은 소리를 낼 적이다.
 
167
그는 칼을 잡아 빼었다. 흰 옥판(玉板)에 붉은 피를 흘리는 듯이 새어 나온다. 그는 그것을 보고서 그래도 양순이 죽은 것 같지 않아 못 견디겠다.
 
168
이왕 죽여 주면 완전히 죽여 주어야지 하는 생각이 나면서 그는 또 칼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 지긋지긋함이나 애처로움이나 참기 어려운 잔인성이 조금도 없고 대리석상(代理石像)을 쪼아 내는 석공과 같이 아무 감정도 그는 깨닫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그의 허리를 찔렀을 때 양순은 조금도 팔딱 하지 않고 그대로 곤포(昆布)쪽 같이 일복의 팔에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일복은 그제야 양순이 죽은 것을 알은 듯이 마루 위에다 양순의 시체를 놓고서 그래도 연연한 정이 미진한 듯이 그의 팔과 그의 다리를 만져 보았다.
 
169
그러자 또 한번 수군수군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여태까지 잊었던 공포가 다시 일어나며 이리 허둥 저리 허둥 할 제 그는 혼자,
 
170
"살인을 했어! 예끼, 내가 살인을 하다니, 그렇지만 양순을 죽였지!"
 
171
중얼거리면서 부엌으로 툇마루로 왔다갔다하더니,
 
172
"그렇지! 그래!"
 
173
하고서 성냥을 득 긋더니 처마끝과 나무더미에 불을 붙이고서는 미친 사람처럼 집 뒤를 돌았다. 그러자 사람 죽이는 것은 모르고, 달아나는 것만은 개란 놈이 쫓아오며 짖으매 그는 손에 들었던 칼로써 개란 놈의 허구리를 찔러 그대로 쓰러뜨리고 한걸음에 강 다리를 건넜을 때 그 모래톱에 쓰러졌다 그는 다시 . 일어나 물가에 가서 물을 마시고 풍현(風峴 ― 바람뫼)을 올라섰다. 입에서 단내가 나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하다. 땀은 온 전신에 폭포같이 흐른다.
 
174
그가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서 뒤를 돌아다보매 멀리 외로이 서 있는 양순의 집에는 불이 붙어 배암 혀 같은 불길이 이 귀통이 저 귀퉁이를 날름날름하고 있다.
 
175
이것을 본 일복은 뜯어먹던 미끼의 흐른 피를 입 가장자리에 흘린 짐승처럼 잔인한 웃음을 크게 웃으면서,
 
176
"아! 악마의 전당! 요귀의 소굴! 내가 너를 불지른 것이 아니다! 옛날의 소돔이 불에 탄 것 같이 너의 운명이 너를 불에 타게 한 것이다."
 
177
그는 풍현을 넘어섰다. 굼실굼실한 산그림자가 안동읍을 눈앞에 가려 버렸다. 그는 달아나면서도 혼자 중얼거리기를,
 
178
"고운사로 가야지! 우일에게로!"
 
179
한달음에 송(松)고개를 지나 다랫들(日坪)에 다다랐을 때 그는 다시 엎으러졌다. 그는 개울의 물을 마셔 정신을 차린 후에 다시 노루고개를 넘었다.
 
180
토각골을 지날 때는 아무리 흥분된 그일지라도 요귀의 토굴을 지나는 것 같이 머리끝이 으쓱하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적 많고 제일 무서웁기로 유명한 토각골을 지난 그는 토지동(兎枝洞)을 지나갈 제 먼 동리에서 닭이 울기를 시작하였다. 다시 톡갓재를 지날 때에 그는 그곳이 안동과 의성이 북남(北南)으로 경계되는 곳인 줄을 알고서, 자기 고향 의성을 바라보았다.
 
181
그는 거기에서 잠깐 다리를 쉬었다. 그는 땅 위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았다. 풀냄새는 사면에서 코가 알싸하도록 나고 축축한 이슬은 홧홧 달아 오르는 상처를 시원하게 식힌다. 그는 누워서 먼 창공에서 반짝이는 작고 큰 별들을 보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며,
 
182
"어서 가야지. 어떻든 가고 보아야 한다."
 
183
그는 다시 풀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다시 창공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지는 못하였다.
 
184
그가 다시 힘을 다하여 매기골에 왔을 때에는 멀리서 개가 짖는다. 그는 다시 지동골을 지나 고운사 어귀까지 와서, 안동서 여기가 삼십 리, 겨우 세 시간에 왔다.
 
185
그가 여기가 고운사이지 할 때, 여태까지 참았던 신체의 맥이 풀리며 그대로 길바닥에 쓰러졌다. 땀과 피가 섞이어 붉고 누른 물이 온몸을 적시었다.
 
186
그는 다시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나 의식은 똑똑하나 일어서지를 못하였다 그래 그는 넘어진 어린아이가 . 일으켜 주기를 기다리는 듯이 한참 고래를 숙이고 엎드렸을 때 때없이 약한 마음이 자기 가슴으로 지나갈 때 그는 우일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187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나무가 우거진 틈으로 절집을 살필 때 옆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서 다시 산 듯이 벌떡 일어나려 하다가 다시 쓰러지려 할 때 그는 허리를 짚고서 꿋꿋이 버티고 섰다. 그리고 비슬비슬 걸어서 물소리를 찾아 물을 먹으러 시냇가로 갔다. 그는 그대로 엎드려 물을 마시었다. 두 모금 세 모금 물을 마신 후에 그는 고개를 들고 다시 일어나 양쪽의 나무가 흥예문을 튼 듯한 너른 길을 얼마인지 걸어와서 층계돌을 모은 데 걸려 넘어져 이마가 깨지었다. 그리고 다시 한 층을 오르려다가 무릎을 벗기었다. 그는 또다시 일어서려 하였으나 일어서지를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몸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고통에 신음을 하다가 다시 번듯이 누웠을 때 그는 생각하였다. 자기의 육체가 자기 의식을 행사치 못하니 아마 이제 나의 생명이 끊어질 시간이 가까웠나 보다. 그러면 나의 벗 우일도 만나 보지도 못하고 이 자리에서 죽나 보다 할 때 암흑 속에서 우는 벌레의 소리들과 샘물의 중앙중앙 흐르는 소리가 바람 밑에서 살락살락하는 나뭇잎의 떠는 소리나 자기 손에 만져지는 가슬가슬한 모래들이나 또는 콧속에 맡히는 수기(水氣)있는 흙 냄새. 멀리서 자기의 임종을 못 하는 듯한 뻐꾸기의 소리. 이 모든 것을 그는 이 몇 찰나 사이에 마지막 듣고 보지나 않는가 하였다.
 
188
그는 그것을 생각할 때,
 
189
"아니다. 마지막으로라도 우일을 만나야 한다."
 
190
하고서 맨 나중 힘을 다하여 일어섰다. 그러고서 다시 저쪽 가운루가 어두컴컴한 속에 희미하게 보일 때 그는 그쪽을 향하여 달음질하려 하였으나 그의 다리는 힘없이 떨리고 그의 옆구리는 지구를 차고 가는 듯이 무거웠다.
 
191
그러나 그가 한 다리를 내어놓으려 할 때 바로 자기 눈 앞에는 우일과 정희가 와서 섰다. 일복은,
 
192
"아, 우일 군!"
 
193
하고서 그의 가슴에 그대로 안기며 다시 옆에서 자기를 무서운 듯해 하는 정희를 보고서,
 
194
"아! 정희?"
 
195
하고서 꿈이나 아닌가 하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비킬 때,
 
196
"이게 웬일인가?"
 
197
하고 자기의 몸을 잡는 사람은 분명한 우일이었다.
 
198
그러나 너무나 의외 일에 그는 꿈이나 아닌가 하고서 두 사람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볼때 정희도 그때야, 알은 듯이,
 
199
"아! 일복 씨"
 
200
하고서 덤벼들려 하니까 일복은 다시 힘없이 우일의 팔에 힘없이 턱 안기며,
 
201
"아! 정희의 환영이다! 환영이다!"
 
202
하면서 우일을 쳐다보며,
 
203
"우일 군! 정희의 환영! 저기 정희의 환영!"
 
204
하고서 아무 소리 없이 우일의 팔에서 실신을 해 버렸다.
 
205
이 말을 들은 정희는 일복의 가슴에 엎드러지며,
 
206
"일복 씨! 저는 환영이 아니라 정체(正體)입니다. 저는 일복 씨의 아내인 정희입니다!"
 
207
우일은 일복을 무릎에 뉘었다. 그리고서 그의 얼굴과 피를 씻으며,
 
208
"이게 웬일인가?"
 
209
하고서 다시 그의 허리를 만지다가 다시 눈을 크게 뜨며 깜짝 놀라면서,
 
210
"이 사람아 어디서 칼에 맞었으니 도적을 만났는가?"
 
211
하고 십 분이나 넘게 주물렀을 때 일복은 겨우 눈을 떠 우일을 보며 입 속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소리로,
 
212
"여보게 나, 나는 사람을 죽였네!"
 
213
우일은,
 
214
"응? 무어야?"
 
215
하며 사면을 둘러보고서,
 
216
"그래 어떻게, 무슨 일로?"
 
217
"나는 나의 애인을 죽였다! 그러나 나는 죽지를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가까웠다"
 
218
하고서,
 
219
"여보게, 나의 가슴을 좀 문질러 주게"
 
220
하고서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풀이 죽어지며,
 
221
"나의 눈물은 우리 정다운 친구를 마지막으로 작별하는 눈물이다!"
 
222
우일의 눈에서도 눈물이 나왔다. 정희는 또다시 일복을 잡으며,
 
223
"일복 씨! 저에게 다만 한 마디 말씀이라도 아내라고 불러 주세요!"
 
224
할 때 일복은 다시 정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두르며,
 
225
"환영은 언제든지 환영! 죽은 정희의 환영! 죽음을 찰나 앞에 둔 나로서도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못하겠다…"
 
226
하고서 우일의 팔에 힘있게 몸을 비틀 때 심장의 고동은 정지하고 말았다.
【원문】17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271
- 전체 순위 : 284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43 위 / 882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3) 설중매
• (3) 화수분
• (1) 12월 12일
• (1) 고향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청춘 [제목]
 
  나도향(羅稻香) [저자]
 
  1926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나도향의 소설 (1926년)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인용 디렉터리
☞ [인물] 나도향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해설   목차 (총 : 17권)     이전 17권 ▶마지막 한글 
◈ 청춘 (靑春)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