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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저녁에는 또다시 일복이 그 우물가에 갔다. 나무와 풀과 그 우물에 놓여 있는 돌맹이까지 어제 같으나 그 아리따운 처녀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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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날이 어둑어둑하여도 양순은 오지 않았다. 눈썹달이 서편 하늘에 기울어져 한적한 옛 읍을 반웃음져 흘겨보며 서산으로 들려 할 때 사랑을 도적하려는 어여쁜 도적놈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쏴 ⎯⎯ 해도 그가 오는가? 나무 끝이 사르륵하여도 그가 오는가? 오는지 안 오는지! 오려거든 온다 하고 오지 않으려거든 오지 않는다 하지, 오는지 안 오는지 알지 못해 속태우는 마음 미친 소년이 있는 줄은 누가 있어서 알아 줄는지!
4
달이 어뒀으매 정조(貞操) 도적맞을까 보아 오지를 않을 터이요, 오지 않으면 외로이 기다리는 나이 젊은 사람의 붉은 피를 바지작바지작 태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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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가 아니 오지는 못하느니라. 물동이 머리에 얹고 누가 있을까 마음 졸여 황망히 오는 사람은 분명히 그 처년데 날이 어두워 그 얼굴은 모르겠으나 그 윤곽은 분명히 양순이요 그 걸음걸음이 분명히 그 처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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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은 우물까지 와서 사면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물 한 두레박 뜨고 뒤를 돌아보고서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입 속에 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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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소리를 할 때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일복의 가슴은 부질없이 뛰었다. 그리고 양순이가 물을 떠놓고 한참이나 서 있다가 긴 한숨을 쉴 때 일복은 슬며시 그의 등 뒤에 나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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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지막하게 부를 때 그 처녀는 두 어깨가 달싹 하도록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일복은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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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서서 정 뭉친 두 눈으로 흘겨보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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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양순은 다만 돌아선 채로 아무 소리가 없이 손가락에 옷고름만 배배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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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째 물을 늦게 길러 왔어?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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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은 한 번 허리를 틀더니 말을 할 듯 할 듯하고 그대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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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여기 와 기다렸는데 너는 아마 그렇지 않지? 나는 너를 날마다 여기서 만나 보았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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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양순은 부끄러워 그랬던지 얼굴이 빨개지며 두 손으로 낯을 가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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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묻는 말에 양순은 아무 대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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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야? 응, 정말야? 대답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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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은 물동이를 이려고 허리를 구부리며 부끄러워 웃음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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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서는 그대로 동이를 이고 가 버리려 하니까, 들려는 물동이를 일복은 붙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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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박이 우물에 빠져 건지느라고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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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말로 의심을 풀었다. 물을 부어 놓고 방으로 뛰어들어가 양순은 얼른 뒷창문을 열고 어저께 저녁에 갈갈이 찢어 버린 그 헝겊을 다시 차곡차곡 모아다가 다시 손에 쥐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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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알고 그랬지! 내가 모르고 그랬지! 이것이 그이의 손가락을 처매었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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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서는 그대로 그것을 똘똘 뭉쳐 반짇고리에 넣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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