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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 (靑春) ◈
◇ 9 ◇
해설   목차 (총 : 17권)     이전 9권 다음
1926년
나도향
 

9

 
2
일복은 동진의 집 문을 나섰다. 그리고 큰길 거리로 나섰을 때 등에 나무를 진 촌사람들과 지게에 물건을 듬뿍 진 장돌뱅이들이 서문으로 통해서 읍을 향하여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을 본 그는 무엇을 깨닫는 듯이 발을 멈칫하다가 다시 걸어가며,
 
3
"옳지, 가만 있거라. 오늘이 며칠인가? 오늘이 장날이로구나, 오늘이 장날이야. 됐다, 됐어. 그러면 오늘 엄영록이가 이동진의 집에를 들어올 터이지. 그러면 내가 부탁한 말을 하렷다"
 
4
하고서는, 웬일인지 얼굴이 시커멓고 상투꼬부랭이에 땀내 나는 옷을 입은 촌사람 장돌뱅이들이 만나는 족족 반가와 손목을 붙잡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는 엄영록은 양순의 오라비였다, 저렇게 저 사람들처럼 생긴 촌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은행원. 제가 나를 매부를 삼기만 하면 해로울 것은 없지! 사람의 마음이라 알 수 없지만은 제가 나를 매부를 삼아 보아라.
 
5
제 등이 으쓱하여질 터이지.
 
6
일복 앞에는 새로 뜨는 아침 볕이 금색으로 번득거려 새날의 기쁜 새 소식을 전하여 주는 고마운 전령사의 사람 좋은 웃음같이 그의 마음을 즐거움으로 넘치게 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산들산들한 길거리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혼인 잔치 구경가는 사람들처럼 발자취가 가벼웁고 기꺼운 농담이 입 가장 자리에 어린 듯하다.
 
7
그에게는 어린애가 촛불을 잡으려는 듯한 환희와 기대가 있었다. 앞길이 밝고도 붉으며 신묘하고도 즐거운 희망의 서색이 그를 끝없는 장래까지 끌고 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어린애가 다만 그 목전에 휘황한 촛불의 빛만 보고 그 뜨거운 것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일복도 또한 자기 앞길에 전개되는 광채나게 즐거운 것만 볼 줄 알았지만, 그 외에 그 광채 속에 가리어 있는 그 어떤 쓰림과 그 어떤 아픔이 있을 것을 알지 못하였다.
 
8
그가 은행 문을 들어서기는 아홉 시가 십오 분을 지난 뒤였다. 앞서 온 은행원들은 장부들도 뒤적거리고 전표를 가지고 왔다갔다하기도 했다.
 
9
일복은 모자를 벗어 걸고 자기 사무상(事務床)으로 나아가려 할 때 다른 행원 두엇이 자기를 돌아다보고서는 냉정한 눈으로 다만 묵시(默視)를 하고서는 하나는 저쪽 지배인실 모퉁이를 돌아가 버리고 한 사람은 자기 상에 돌아앉아 전표에 도장을 찍을 뿐이다.
 
10
그는 일부러 당좌예금계(當座預金係)에 있는 행원에게 가까이 가서 심심풀이로 말을 붙여 보려 하였다.
 
11
"오늘은 어째 이르구려. 어제는 아마 마시지를 않은 모양이구려."
 
12
술 잘 먹는 당좌예금계는 삐쭉하면서, 그 전 같으면 껄껄 웃고 말 일을 오늘은 어째 유난히 냉정한 태도에 침착한 어조로,
 
13
"내가 술 잘 먹는 것을 언제 보셨든가요?"
 
14
하고서는 장부를 이것저것 꺼내 들고서 쓸데없이 뒤적거린다. 이 말을 들은 일복의 마음은 불쾌하였다. 더구나 <보셨든가요>라 아주 싫었다. 전 같으면
 
15
<보셨소> 하든지 <보았다> 할 것을 오늘에 한하여 <보셨든가요> 경어를 쓰며 그의 표정이 너무 사무적인 데 일복은 불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말 한 마디를 정다웁게 꺼냈다가 도리어 불의(不意)와 분외(分外)에 존경을 받고 보니 도리어 그는 치욕을 받은 것 같고 멸시를 당한 것 같았다.
 
16
그래서 입이 멍멍 하여지며 공연히 얼굴이 홧홧하여졌다. 그러나 그대로 돌아설 것도 없어,
 
17
"아뇨.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유명하시니까 말씀예요."
 
18
"무엇이 유명해요? 나는 그런 불명예스러운 유명은 원치 않아요."
 
19
일복은 기가 막혀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다가,
 
20
"그렇게 말씀할 것은 없지요. 그리고 그렇게 불명예될 것은 없을 듯한데요."
 
21
"일복 씨는 그것을 불명예로 생각지 않으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저는 아주 얼굴 붉어지는 불명예로 알어요. 그리고 저는 언제든지 자기로 말미암아 남에게 불행을 끼치기를 원치 않으므로 이제부터는 술을 끊으려 합니다."
 
22
"술 먹는 것으로 남에게 불행을 끼치게 할 것이 무엇입니까?"
 
23
당좌계는 '흥'하고 한 번 기막힌 듯이 웃더니 그 말 대답을 하지도 않고,
 
24
"사람이란 불쌍한 것이지요. 자기 때문에 생명을 잃은 사람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안연한 태도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것은⋯"
 
25
일복은 속으로 '이 사람이 미쳤나?'하였다. 그래서, '그게 무슨 말씀예요?'하려 할 때 누가 소절수(小切手) 하나를 들이밀므로 그는 그 소절수들이 민 사람의 얼굴 한 번 보고 그것을 받는 당좌계를 한 번 쳐다보고서는 남의 일에 방해가 될까 하여 이쪽 자기 사무상으로 왔다.
 
26
일복이 자기 사무상으로 가는 뒷그림자를 보는 당좌계는 현금 출납계를 건너다보며 일복을 향하여 입을 삐쭉하더니 빙긋 웃었다. 출납계원도 거기에 따라 웃었다. 일복을 보고서 말 한 마디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전표를 옮기는 하인까지 경멸히 여기는 태도와 또는 가까이 하기에도 무서운 눈으로 일복을 대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자기 일을 보고 앉았는 여러 사람들은 약속한 듯이 말이 없고 은행 안은 근지러운 듯이 적적하여 때때로 문 닫히는 소리와 스탬프 찍는 소리가 가라앉은 신경을 놀라웁게 자극할 뿐이다.
 
27
일복은 자기의 장부를 폈다. 그러고서 주판을 골라 놓고 한 줄기 숫자를 차례로 놓아 본 뒤에 다시 다른 장부를 펴려 하다가 다시 접어 놓고 혼자 멀거니 앉아 유리창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앉았으려니까 또다시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양순이며, 또는 오늘 그의 오라비와 이동진 사이에 체결될 연담(緣談)이 성공되리라는 믿음이 공연히 침울하던 마음을 양기(陽氣) 있게 흥분시켜 당장에 자기가 하늘로 올라갈 듯이 기쁜 생각이 나는 동시에 아까 당좌예금계에게 받은 반 모욕의 핀잔이 지금 와서는 자기의 행복을 장식하는 한 개 쇠못같이 밖에 생각되지 않아 혼자 빙긋 웃었다.
 
28
열 한 시가 되어도 지배인은 들어오지를 않았다. 일복은 지배인실을 돌아다보고 지배인이 들어오지 않음에 얼마간 이상히 여기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여태까지 알지를 못하였더니 모든 사무를 다른 사람들은 지배인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처리하는 것을 그때야 발견하였다. 지배인에게 인(印)을 찍어 받아야 수리될 전표는 그대로 그 다음 계(係)로 돌아가 거기서 임시 처리가 되고, 지배인의 승낙을 받아야 할 만한 일은 내일로 연기가 된다.
 
29
그것을 본 일복은 오늘 지배인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반드시 무슨 긴급한 일이 생기었으며, 또는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구나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인을 불러,
 
30
"오늘 지배인 어른은 안 오셨니?"
 
31
하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태도가 냉정한 듯하므로 하는 수 없이 만만한 하인을 부름이다. 하인은 다만,
 
32
"네, 안 들어오셨어요. 아마 오늘은 못 들어오신다나 보아요. 무슨 일이 계신지요?"
 
33
하고서, 일종 연민히 여기는 눈으로 일복을 보다가 저쪽에서 자기를 부르므로 그리로 가 버렸다.
 
34
조금 있다가 지배인의 집 하인 하나가 은행문에 들어섰다.
 
35
"유일복 씨 계세요?"
 
36
하는 하인의 말을 수부(受付)에 앉았던 행원이 듣고서 조소하듯이 쌍긋 웃더니 얼굴짓을 하여 일복을 가리킨다. 하인의 목소리를 들은 일복은 서슴지 않고 벌떡 일어서며,
 
37
"왜 그러나?"
 
38
하였다. 하인도 일복을 조금 경멸히 여기는 듯이 시원치 않은 말씨로,
 
39
"댁에서 잠깐만 오시라고요."
 
40
즉 지배인이 부른단 말이다.
 
41
"나를?"
 
42
"네."
 
43
"왜?"
 
44
하인은 조금 주저하다가,
 
45
"모르겠어요?"
 
46
"여기 일은 어떻게 하고."
 
47
"곧 오시라고 하시든 걸요. 퍽 급한 일이 있는가 봐요."
 
48
일복은 공연히 의심이 난다. 어제 저녁에 정희가 다녀갔는데 오늘 지배인이 은행에도 들어오지 않고 또 은행사무 시간에 당장 오라는 것은 어떻든 좋은 일이 아닌 것을 예감하였다.
 
49
"가지. 먼저 가게."
 
50
"아뇨. 같이 가세요."
 
51
하인은 구인장(拘引狀)을 가진 형사나 순사 모양으로 의기 양양하고 또는 엄격한 빛을 띠고 그 자리에 서 있다.
 
52
그러나 일복은,
 
53
"먼저 가"
 
54
하고 조금 무례를 책하는 듯이 하인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하인은, 더욱 꿋꿋한 태도로써,
 
55
"같이 가셔야 합니다. 같이 모시고 오라 하셨어요."
 
56
일복은 하는 수 없이 모자를 쓰고 여러 사람에게 인사하고 문 밖으로 나왔다.
 
57
나가자 은행 속에서는,
 
58
"잡혀가는구나!"
 
59
"인제는 저도 이 은행하고는 하직일세."
 
60
"하지만 제 잘못은 아니니까."
 
61
"이 사람아, 그럼 누구 잘못인가? 사람이 인정이 있어야지. 그렇게까지 저를 생각하는 여자를 목숨까지 끊게 하였으니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사람으로서는 너무 냉정한 짓을 하였으니!"
 
62
"말 말게. 그 사람도 하고 싶어했겠나. 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랬지."
 
63
"참 알 수 없어. 글쎄 주막집 계집애가 아무리 인물이 반반하다 하드래도 그래 자기 처지도 생각하고 장래도 생각해야지. 무엇 무엇 할 것 없이 죽은 사람만 불쌍하이. 그러나 저도 잘못이지. 죽을 것까지야 무엇 있나?"
【원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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