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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해결책 ◇
해설   목차 (총 : 22권)     이전 11권 다음
1934
현진건
1
병일은 십년일득으로 저녁때 집에 일찍이 돌아왔다. 진을 치고 그를 에워싼 듯하던 연회가 오늘만은 비었다. 사무와 술과 기생에게 실실이 피로한 몸을 오늘만은 종용하게 늘어지게 쉬고 싶었던 것이다. 한 옆으로 안해에게 미안스러운 생각도 있었다. 그는 본정신으로 안해를 본 지도 여러 날이 되었다. 여러 날보담 여러 달이 되었는지 모르리라. 그렇게 사랑하던 안해, 그렇게 아름답던 안해, 많은 물질을 희생하고 얻은 안해, 하마하드면 제 생명까지 잃을 뻔하고 얻은 안해! 이렇듯이 고귀하고 중난한 안해를 어쩌면 그렇게 오래도록 아니 보고 견디었던가. 그는 중값을 주고 산 귀중품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가 별안간 생각난 것처럼 안해가 그립고 아쉬웠다. 그는 회사에서 자동차를 불러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도 자동차의 속력이 느린 듯 하였다.
 
2
영애는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남편과 겸상으로 저녁을 먹었다. 영애는 웬일인지 밥이 목에 메이고 잘 넘어가지를 않았다. 숟가락 쥔 손이 이따금 경련을 일으키고 허전거리며 눈물이 쏟아질 듯하여 참을 수 없었다.
 
3
그는 남편이 방탕함을 원망함인가, 그런 것도 아니다. 연회의 술타령은 지금 새삼스럽게 시작된 노릇이 아니다. 여간 풋돈을 쓴들 끄떡도 않을 줄을 잘 안다. 그러면 명화 년에게 미쳐서 점점 부부의 사랑이 식어감을 슬퍼함인가. 이것은 적이 염려가 안 되는 것도 아니로되, 그는 제 남편이 천 계집만 계집을 본다 하더라도 그 때뿐이지, 결코 끝끝내 빠질 사람이 아닌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면 이 살을 에어내는 듯한 슬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 영애는 웬일인지 자기네 부부생활의 끝장이 보이는 듯하였다. 암만해도 길게 이 생활을 누릴 것 같지 않다. 모래로 쌓은 궁전같이 언제 바람이 불어 쓰러질지 모를 것 같다. 며칠이나 좋은 낯으로 남편을 대하게 될 것인가. 몇 번이나 겸상을 하고 밥을 먹게 될 것인가. 며칠이 아니고 몇 번이 아니다.
 
4
당장 이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세찬 폭풍우가 불어닥치어 이 평화로운 밥상을 뒤집을는지도 모른다. 이러고 겸상을 하고 밥을 먹기도 이것이 마지막이나 되지 않을지 누가 보증하랴. 왜? 그 까닭은 꼭 집어내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얼기설기 얽힌 듯도 하나 다시 생각하면 아모 이유가 없는 듯도 하다. 영애는 머리로 이론적으로 자기의 불안의 원인을 캐어내지는 못할망정 왼 몸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새파랗게 개인 하늘 볕은 쨍쨍 쪼이건마는 어데선지 구름장이 일 것 같다. 눈 한번 깜짝일 새에 있는 듯 없는 듯하던 그 구름장은 왼 하늘에 퍼지고 밝은 일광이 금시금시 먹장을 갈아 부은 듯한 구름 속으로 삼켜질 것 같다. 별안간 난데없는 폭풍우가 몰아오고 벼락이 떨어질 것 같다.
 
5
영애는 마른 날에 장차 일 폭풍우를 상상하고 몸을 떨었다. 장마 끝이 아니요 마른 날이기 때문에 그의 불안과 공포는 더욱 컸다.
 
6
이것은 결코 남편의 사랑이 식어 가는 데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남편의 지나친 사랑에서 피어오르는 구름덩이다. 그는 남편의 사랑을 지나치게 믿고 ─ 믿는다느니보담 차라리 지나치게 받아서 지나치게 일을 저질러 놓고 만 것이다.
 
7
지나친 사랑에서 생긴 지나친 과실! 그것은 행복의 옥좌에서 비애의 가시 덩굴 속으로 거꾸로 떨어지고야 말 것 같았다.
 
8
아모 것도 모르는 남편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그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하였다 도리어 자기에게 . 미안해하는 듯한 그 웃음과 표정을 볼 때 그는 더욱 슬펐다.
 
9
비감스러운 한 옆으로, 영애는 또 초조하였다. 그는 이 막연한 불안과 공포를 한시바삐 귀정을 내려고 더욱 조바심을 하였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지 않느냐. 그러나 쉽사리 입이 떨어질 노릇이 아니다. 마른 날에 폭풍우를 제 입으로 불러와야 될 줄이야!
 
10
'어떻게 그 말을 하랴. 어떻게 은주의 얘기를 끄집어내랴.' 이런 생각을 하매, 영애는 남편의 얼굴이 불덩이 같아서 바로 볼 수가 없었다.
 
11
병일은 밥을 다 먹고 숭늉으로 웅얼웅얼 양치를 치고 나서 안해를 보며 무 두무미하게,
 
12
"가 봤수?"
 
13
하고 싱글싱글 웃는다.
 
14
"어델요?"
 
15
"병원에 말야."
 
16
"병원에?"
 
17
"왜 여해 군 입원한 데 말야."
 
18
그 말은 영애의 가슴에 칼을 꽂는 듯하였다. 화살을 맞은 꿩이 푸드득거리듯 영애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였다. 만일 남편이 그 일을 알았으면!
 
19
자기의 누이가 여해의 발길에 짓밟힌 줄 알았으면!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처녀의 구실을 빼앗긴 줄 알았으면! 남매간이라도 유만부동이라, 그는 제 누이동생을 유달리 사랑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어린 누이, 동기라고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누이가 아니냐. 그는 제 딸보담도 이 누이를 더 귀애하지 않느냐. 이 어린 누이의 신상에 그런 괴변이 생긴 줄 알았으면! 꿈에도 생각 못한 불행이 일어난 줄 알았으면!
 
20
영애는 무에라고 대척을 할 수도 없었다. 남편에게 알리려던 그 말까지 목구녕에 얼어붙고 말았다. 영애가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병일은 제 안해가 자기를 꺼리는 줄로만 알았다. 저에게 까닭 붙은 남자가 출옥하던 맡에 병이 나서 입원을 하느니 어쩌느니 수선까지 피운 것을 퍽도 미안쩍게 여기는 줄만 알았다.
 
21
"그 사람도 불행야. 그 몹쓸 옥고를 겪고, 또 중병을 치르게 됐으니. 어, 안되었거든. 병원에 혼자 누웠으면 매우 사람이 그리울 건데. 내가 더러 가 보아도 좋겠지만 그야말짝으로 죽을 시간이나 있어야지. 허허, 왜 가끔 둘러 보잖구 그러우."
 
22
영애는 남편의 말이 너그러우면 너그러울수록 마음이 더욱 욱조이었다.
 
23
여해에게 동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가슴이 더욱 나려앉았다. 폭우를 부르는 하늘이 버언하게 밝은 것을 쳐다볼 때처럼.
 
24
병일은 영애의 심중을 알 까닭이 없었다.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띠우고 재우쳤다.
 
25
"그래 한 번도 안 가 봤단 말요?"
 
26
"아녜요."
 
27
영애는 입안말로 속살거리었다.
 
28
"어 그래 쓰나? 아마 한 열흘이나 되었지. 열흘도 더 되겠군. 서울에서 일가도 없고 친척도 없다니 누가 들여다나 볼거요? 그래도 옛날 애인의 얼굴을 보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를 건데, 허허."
 
29
남편은 껄껄 웃다가 말고 바싹 영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면구스럽게 안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30
"왜 안 가보는 거요? 응. 사람이 그렇게 매정해서는 못 쓰는 법이래도."
 
31
영애는 고개를 탁 숙여 버렸다.
 
32
'이런 행복도 몇 분이 남지 않았고나.' 그런 제 콧잔등에 서리는 남편의 더운 숨결을 느끼면서 혼자 생각하였다.
 
33
눈물이 곧 앞을 가릴 것 같아서 저고리 고름을 만지작거려 진정을 시키노라고 무진 애를 썼다.
 
34
병일은 제 안해가 마치 어린 처녀 모양으로 수줍어하는 꼴이 재미있었다.
 
35
그 핼쓱한 뺨엔 발그스름한 흥분까지 떠오른다고 보았다.
 
36
"무에 그렇게 부끄럽단 말요? 거두어 주자던 사람을 못 가 볼 게 뭐요?
 
37
인제 새삼스럽게 내외를 하려 드는 거요? 응."
 
38
남편은 거의 뺨을 한데 부빌 듯하며 자상하게 물었다. 병일은 오늘 따라 안해가 어여삐 보이기는 근래에 드물었다. 이런 안해를 두고, 밤새움을 하며 술타령을 하고 명화를 데불고 다닌 것이 불현듯 후회가 났다. 일찍이 집에 돌아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짓궂게 안해를 놀려먹었다.
 
39
"그래, 안 가 볼 테요?"
 
40
"글쎄요."
 
41
영애는 견디다 못해 모기 같은 소리를 짜내었다.
 
42
"글쎄가 뭐야? 지금 당장이라도 좀 가 보구려. 혼자 가기 싫으면 나하고 같이 가 보려우? 응."
 
43
"……."
 
44
"왜 대답을 않소? 어데 갑갑증이 나서 사람 살겠나. 자 생각난 김에 가 봅시다. 자 옷을 입우 응."
 
45
병일은 서둔다. 영애의 입술은 실룩실룩 떤다. '은주의 사단을 말할까 말 까…….' 동부인하고 여해의 문병을 가자고 서둘러 보았지만 안해의 어떡하는 꼴을 보자는 것뿐이요, 정말 가 볼 생각은 물론 없었다. 모처럼 맛보는 부부의 재미를 퀴퀴한 약 냄새로 흐려 버릴 수는 없었다. 이런 좋은 기분을 여해와의 대면으로 깨쳐 버릴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안해를 괴롭게 한다는 것은 실없는 작난의 정도를 넘어, 악취미가 아닌가.
 
46
병일은 안해를 시달리다가 말고 그대로 아랫목에 쓰러졌다. 그는 밥만 먹고 나면 식곤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푸만한 배를 주체를 못하는 듯이 깔고 엎드려서 씨근씨근하였다.
 
47
은주의 말을 할까 말까? 영애는 혼자 애를 부등부등 켰다. 벼락이 떨어진다 하여도 이 말을 해야 된다. 집안에 일어난 이런 중대한 변고를 제가 몰랐으면 이어니와, 알고 남편에게 알리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십여 일이 지난 오늘날까지 알리지 않은 것만 해도 잘못이 아닌가, 무서운 일이 아닌가. 영애는 몸을 도사리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48
밥상 물려간 것을 군호로 명희가 또 뛰어들어왔다. 모처럼 아버지가 집에서 진지를 잡숫는 데 부접을 떤다고 멀리하였던 것이다. 명희는 들어오는 길로 쏜살같이 엎드린 아버지의 등허리에 올라앉는다. 그 안상이 같은 두 다리를 벌려 간신히 걸터 타고 펄떡궁질을 한다. 병일은 얼굴이 새빨개 가지고 '어규,어규!'하며 낑낑거리었다. 기태나 그는 일어나 앉고야 말았다. 그는 명희를 제 무릎 위에 올려 앉히고 아버지다운 자애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49
"너 바바 어데서 먹었니?"
 
50
물었다.
 
51
"응, 바바 응."
 
52
하고 명희는 그 총명한 눈을 말똥말똥한다.
 
53
"그래, 바바 말이야. 어데서 먹었니? 아주머니하고 먹었니? 응."
 
54
하고 아버지는 제 뺨을 딸의 뺨에 대고 문질렀다. 그는 늦게야 둔 이 외동딸을 구실같이 귀애하였던 것이다.
 
55
"응, 아주머니. 응."
 
56
애는 어른의 말을 재우친다.
 
57
어머니는 딸의 노는 양도 무심히 볼 수가 없었다.
 
58
'저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지 모른다.' 영애는 눈시울이 서물서물해지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59
"참, 은주가 오늘은 왜 얼씬을 않으우?"
 
60
병일은 안해를 보고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61
"요새 졸업 시험을 치르노라고 바빠서 그러나?"
 
62
이 말을 어떻게 대답해야 옳을 것인가 사 년 동안이나 공들여 다니다가 영광의 졸업 날을 내일 모레로 앞두고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을 알았으면! 그 쾌활하던 머리를 싸매고 누워서 제 방에서 나오지도 않는 것을 알았으면!
 
63
"그래, 졸업을 하고는 기예 동경으로 간다나."
 
64
병일은 잼처 물었다. 은주는 졸업만 하고 나면 곧 동경으로 건너가서 음악 학교에 들겠다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병일은 동경에 가느니보담 차라리 조선에서 이화 전문학교 같은 데나 드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늘 타일러오던 터이었다. 그는 어린 누이를 단 혼자 먼 곳에 보내기를 꺼렸던 것이다. 아모리 제 마음이 단단하다 하더라도 흔들리기 쉬운 애들의 마음이 아닌가.
 
65
못된 놈의 손에 걸리거나 하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닌가. 더구나 요사이 동경 학생들의 풍기가 자못 문란하다고 하지 않는가.
 
66
"기태나 동경까지 갈 게 없다는데 그 애는 기예 가겠다니 걱정이야. 이화 전문학교 음악과 같으면 아주 훌륭하다는데. 여자는 그럭저럭 하다가 좋은데 시집이나 가면 고만이지, 그렇게 기를 쓰고 공부를 하면 무엇 하노? 쭉 해야 학교 선생 노릇이나 할 것밖에."
 
67
영애가 대답 없는 것을 보고 병일은 아주 완고한 노인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68
영애는 대결심을 하고, 남편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거의 남편의 귀에 대다시피 하고 은주의 사단을 얘기하고 말았다.
 
69
"모두 제 잘못예요."
 
70
하고 말끝도 맺기 전에 영애는 울며 쓰러졌다.
 
71
"헉!"
 
72
병일은 물에 빠진 사람 같은 소리를 내었다.
 
73
병일은 눈만 커다랗게 떠서 멀거니 영애를 바라보며 얼빠진 듯이 한동안 말이 없다가,
 
74
"그래, 그게 참말이어?"
 
75
하고 허전허전하는 소리를 떨었다. 그 얼굴은 금시금시 흙빛이 되었다.
 
76
영애는 그 날에 생긴 일을 울음 반 말 반으로 저저히 속살거렸다.
 
77
벼락은 떨어졌다! 어느 모를 어떻게 바수고 깨두드릴 것인가. 영애는 몸을 옹송그릴 대로 옹송그리고, 벌역의 불채쪽이 후려갈기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78
아니나 다를까 , 병일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놈을, 그놈을!" 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영애를 잡아먹을 듯이 흘겨본다.
 
79
"괜히 그런 놈을 집 안에 끌어들여 가지고. 그놈을, 그놈을!"
 
80
제가 동의도 한 일이요 승낙도 한 일이건만, 전수히 안해의 탓만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였다. 영애는 이미 각오한 노릇이로되 그래도 설마! 하는 희망이 없지 않았다. 그는 제 남편의 인금을 너무 높게 평가하였던 것이다.
 
81
제 남편의 태도가 제가 생각한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 것이 도리어 제 기대와는 틀리었다. 세상의 어느 남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영애는 마음 어데인지 야속한 생각도 들며 더욱 설웠다. 그는 흑흑 느끼며 울었다.
 
82
"그놈을! 그놈을!"
 
83
병일은 또 한번 뇌이고, 안절부절못하다가 방문을 박차고 나가려 하였다.
 
84
영애는 본능적으로 남편의 행동에 공포를 느끼었다. 그는 쏜살같이 몸을 일으켜 남편의 마고자 뒷자락을 부여잡았다. 불길 속에 뛰어드는 사람을 잡듯이,
 
85
"어델 가셔요?"
 
86
"어델?"
 
87
병일은 씨근벌떡거리며 되려 채쳤다. 실상 그는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88
"진정을 하셔요, 진정을! 나가시면 어델 가셔요?"
 
89
"놓아요, 놓아. 그래, 그놈을 그대로 둔단 말야, 그대로 둔단 말야?"
 
90
이 말에 병일은 제가 가야 될 곳을 불현듯 깨달았다.
 
91
"난 곧 경찰서로 갈 테야, 경찰서요. 그놈을 그놈을 고발, 고발할 테야."
 
92
병일은 흥분에 겨워 집안이 떠나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93
영애는 황급하게 돼지 목 따는 소리를 내는 병일의 입을 손으로 가리우는 시늉을 하였다.
 
94
"아랫것들이 듣지 않아요?"
 
95
나지막하나마 힘있게 타이르듯 하였다. 그 말엔 병일도 풀이 죽고 말았다.
 
96
방안에 다시 들어와 펄쩍 주저앉았다.
 
97
"이 일을 어떡하여야 좋아요?"
 
98
영애는 고민하는 남편을 두려운 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병일은 무슨 생각을 돌리는 듯이 머리를 북북 긁었다.
 
99
"모두가 제 잘못예요. 집에만 안 데리고 와도 좋을걸. 모두 제 잘못예요."
 
100
한참 만에야 병일은 다시 일어섰다.
 
101
"어떻게 하실 테요?"
 
102
"글쎄, 석호 군이나 불러서 의론을 좀 해 봐야……."
 
103
"아모리 친하신 어른이래도 남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해요?"
 
104
"고발을 하면 다 알걸. 그렇게 쉬쉬하면 무슨 소용야."
 
105
"정말 고발을 하실 테예요? 왁자지껄하잖겠어요."
 
106
"그렇다면 그대로 둔단 말야. 안 될 말이어, 안 될 말이어! 아모리 너한테 까닭 붙은 사내래도 안 될 말이어!"
 
107
영애는 입을 닫쳐 버렸다. '너'라까지 할 때엔 남편의 역정이 머리끝까지 치밀린 모양이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을 버르집어낼지 모른다.
 
108
막연하던 불안은 인제 뚜렷한 윤곽을 나타내었다.
 
109
'죽어야! 죽어야!' 영애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110
전화로 석호는 불려 왔다. 들어닥드미로 병일은 허둥지둥 은주의 사단을 말하였다.
 
111
"저런 죽일 놈이! 저런 죽일 놈이!"
 
112
석호는 그 조그마한 눈을 찢어지라고 부릅뜨고 펄펄 뛰었다.
 
113
"그래, 그놈을 어떡할까?"
 
114
병일도 입에 게거품을 풍겼다.
 
115
"저런 죽일 놈이! 저런 죽일 놈이! 글쎄, 내가 뭐라던가? 그런 놈을 왜 집 안에 발그림자를 시킨단 말인가? 용서도 유만부동이고 동정도 분수가 있어야지. 에잇"
 
116
석호는 병일의 묻는 말엔 대답도 않고, 제 선견지명을 자랑하듯 하며 혀를 수없이 찼다.
 
117
"원 세상에 짐승만도 못한 놈도 다 많거든. 은혜를 원수로. 허허, 저런 죽일 놈 같으니. 이런 변이 어데 있더람? 허 그것."
 
118
"그놈을 그놈을 어떡할까?"
 
119
병일은 재우쳤다. 석호는 병일의 흥분된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깜박한다. 분개할 것은 이만 정도로 끈치고 곧 문제의 해결에 착수하려는 듯하였다. 병일은 침을 삼키며 얼마동안 석호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이윽고,
 
120
"그래, 그놈을 어떡할까? 지금 당장이라도 고발을 해야 될 것 아닌가?"
 
121
병일은 또 재우쳤다.
 
122
"고발? 글쎄, 나는 그놈의 처치보담 자네 매씨의 장래가 걱정일세."
 
123
석호는 칼로 비어내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124
"글쎄!"
 
125
하고 병일은 대번에 풀이 죽었다.
 
126
"그래, 자네 매씨가 금년에 몇 살인가?"
 
127
석호는 물을 치는 듯이 종용히 물었다.
 
128
"열 여덟일세."
 
129
"열 여덟!"
 
130
석호는 무엇을 헤는지 손가락을 꼽아본다. 주판질 대신으로 주먹구구를 대는 듯,
 
131
"열 여덟! 꽃 같은 나일세. 한창 피어오를 인생의 꽃 봉오리에 된서리를 맞은 셈일세그려. 저런 죽일 놈 같으니."
 
132
그는 몸을 한 번 비꼬며 갑자기 시인이나 된 듯이 영탄하였다.
 
133
"그래, 어떡할까?"
 
134
"저런 죽일 놈이, 그 아름답고 쾌활하던 규수를. 저런 죽일 놈이. 그래, 금년에 몇 학년인가?"
 
135
"올 봄이 졸업일세."
 
136
"금년이 바루 졸업이야. 세월은 빠르군. 열 여덟, 금년이 졸업! 허, 그것. 자네에게 동기라고는 그 매씨 한 분뿐이지."
 
137
"그러이."
 
138
"허, 그것 참 불행이로군. 좀 분하겠나!"
 
139
"어떡할까?"
 
140
"그래, 그놈은 여전히 팔자 좋게 병원에 자빠졌겠네그려. 별일이어. 아모튼 지 별일이어. 그런 못된 짓을 하고도 시침을 뚝 따고 자네 돈으로 무슨 입원야."
 
141
"그놈을! 그놈을!"
 
142
병일의 분길은 바람을 얻은 불꽃처럼 또 활활 타올랐다.
 
143
"그래, 매씨의 성적은 어땠누?"
 
144
"우등이야. 언제든지 첫째 둘째야."
 
145
"허 아까운 일이로군. 기막힐 일이로군. 몸을 버렸으니 허, 옥에라도 티가 있다더니. 진주가 돼지 발에 밟혔네그려, 허."
 
146
석호는 딴전만 한다. 그는 문제의 해결보담 마치 매파와 같이 아름다운 이의 불행을 노래한다. 병일은 갑갑증이 났다.
 
147
"그야 두말 할 것 있나? 이 일을 대관절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148
석호는 눈을 딱 감았다. 뺨을 손바닥으로 괴이고 고개를 배슷이 뉘었다.
 
149
이런 문제는 참으로 중대해서 여간 생각해 가지고는 풀어낼 수가 없다는 듯하다. 한참 만에야 그는 눈을 번쩍 떴다.
 
150
"글쎄, 어떡하면 좋을까? 아모리 생각해도 별수가 없네. 길은 두 길밖에 없는 듯하이."
 
151
"두 길이라니?"
 
152
병일은 석호의 말을 움켜쥘 듯이 채쳐 물었다.
 
153
"한 길은 자네 말마따나 곧 고발을 하는 걸세. 강간죄로 얽어 넣어 또 징역을 살리는 걸세."
 
154
이 점은 석호도 병일의 생각과 다를 것이 없었다.
 
155
"그래, 그놈을 징역을 살려야."
 
156
"그러나 그건 좀 생각해 볼 문젤세. 징역을 살리면 분풀이는 될까 모르지마는 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도는 아닐세. 도리어 문제를 번폐스럽게만 맨들 뿐일세. 첫째 자네 몸에 창피만 돌아올 걸세."
 
157
"창피라니?"
 
158
"생각해 보게. 그놈을 고발을 한다고 하세. 그러면 경찰에서 그놈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잡아다가 쉰길로 감옥에나 보내주면 좋겠지만, 어데 그런가.
 
159
피해자로 물론 자네 매씨를 호출할 게고 증인으로 사실 목격자 자네 부인을 부른다, 자네를 부른다, 왁자지껄하게 해 놓으면 신문에는 좀 좋은 자료인가. 아모 은행 두취, 아모 회사 사장 박 아모개 집에 이러이러한 일이 생겼다고 좀 떠들어 댈 건가. 전번 첫날밤 사단도 그렇게 굉장하게 났었는데 이번에는 몇 갑절 더할 것이 아닌가. 첫날밤에 신랑을 난자한 범인이 출옥하게 되자 그 부인이 옛정을 못 잊고 ─ 사실이야 물론 그렇지 않지만 ─ 그 사내를 집으로 끌어들이고 그자는 불 같은 성욕을 참지 못해서 그 누이동생을 행실을 내었다고 ─ 허 기가 막혀! 자 이렇게 되고 보면 자네 모양은 뭐 이 된단 말인가. 이런 창피가 또 어데 있겠느냐 말야……."
 
160
병일의 부글부글 피어오른 듯이 살찐 얼굴이 금시 할쓱해지는 듯하였다.
 
161
"그러니 말야. 그렇게 되면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도리어 문제를 떠벌리는 거란 말야. 안 그런가? 알아듣겠다?"
 
162
"그럼……그럼……."
 
163
병일은 말도 옳게 못하고 더듬거리며 가위나 눌린 듯이 눈을 멀뚱멀뚱 한다.
 
164
"말하자면, 자네 매씨의 불행을 세상에 광고하는 거나 진배없단 말야. 그러면……."
 
165
석호는 숨이 막힌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166
"그러면 이 일을 어떡한단 말인가?"
 
167
병일은 얼마 만에야 가슴을 쥐어 짜내듯 한 마디 하고 휘 한숨을 내어 쉰다.
 
168
허 그놈 그놈이 " , . 자네 집하고 무슨 악인연이란 말인구. 그놈을 그저, 그놈을 그저."
 
169
석호는 이를 갈며 그 조그마한 얼굴에 있는 힘줄을 모두 일으켜 세워 보이었다.
 
170
"그놈을 그저. 그야말짝으로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아는 듯 모르는 듯 쏘아 죽이거나 했으면!"
 
171
"죽여 버려야, 죽여 버려야!"
 
172
병일도 두 주먹을 쥐고 치를 떤다.
 
173
석호는 제 말의 효과가 여실하게 나타난 것을 보고서야, 다시 말을 끄집어 내었다.
 
174
"길은 또 한 길 있네마는."
 
175
"그 길은?"
 
176
"그 길은 자네를 위하든지, 자네 매씨를 위하든지 그야말로 관무사 민무사할 걸세마는."
 
177
"무슨 길인가?"
 
178
"무사주의에는 그 길이 제일일세마는 말하기가 좀 거북하네."
 
179
"말하기 거북할 게 무엔가?"
 
180
병일은 간원하다시피 채쳤다.
 
181
"병일은 암만해도 자네가 감정상으로 용서를 할 것 같지 않네."
 
182
"감정상으로?"
 
183
"그래 얼른 감정을 돌리기는 어려울 걸세. 자네, 돼지에게 진주 던진다는 얘기 알지?"
 
184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185
"어, 가련한 일이거든! 악착한 일이거든! 그러나 돼지 발에 밟힌 진주니 돼지에게 던져 주는 수밖에 더 있는가?"
 
186
"그게 무슨 말인가?"
 
187
"무사주의의 해결의 길은 자네 매씨와 그 여해란 자와 결혼을 시키는 걸세. 이게 제일 상책일세."
 
188
석호는 차마 못할 말을 한다는 드키 병일의 시선을 피하였다.
 
189
"응? 여해와 결혼?"
 
190
병일은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하다.
 
191
"그러이. 여해와 매씨와 결혼을 시킨단 말일세. 무사타첩하자면, 그 수가 제일 좋은 수일세."
 
192
석호는 냉랭하게 말을 한 마디씩 꼭꼭 끊어가며 떠먹듯이 일렀다.
 
193
"그게, 그게 말이 되나?"
 
194
물론 병일은 펄쩍 뛰었다.
 
195
"그러리, 그야 될 말인가? 감정상으로야 도저히 용서 못할 겐 줄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닐세만은, 그렇다고 그놈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놈이 죽지 않는 담에는 자네 매씨의 해자를 덮어낼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런 일이란 아모리 쉬쉬하더라도 괴상하게 소문이 잘 나는 법이거든. 말이 떡 벌어지고 보면, 자네 꼴만 더 깎일 것 아닌가? 그러게 진작 결혼을 시켜 버리거든. 그러면 그자야 물론 쩍말없을 게고. 자네 매씨인들 어쩌나? 이왕 버린 몸이니 팔자 한탄이나 할 밖에."
 
196
"그놈하고 내 누이하고 될 말인가, 될 말인가?"
 
197
병일은 혼잣말같이 뇌인다.
 
198
"혼인이란 별수 없느니 끼리끼리 짝을 맞추는 수밖에 더 있는가?"
 
199
석호는 '끼리끼리'란 말에 이상한 힘을 주며 타일르듯 하였다.
 
200
"끼리끼리란 말이 웬 말인가?"
 
201
어이없어하던 병일도 벌컥 성을 내었다.
 
202
"글쎄, 뭐라고 하면 적당할까? 끼리끼리란 말은 좀 어폐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 그 ─ 그 여해란 자와 자네 매씨와 경우가 비슷하다고 할까. 그 자도 전과자로 사회상 폐인이 되었고, 자네 매씨도 뭐라고 할까 ─ 버린 여자라고 할밖에 없거든……."
 
203
"그래, 내 누이하고 그놈하고 같단 말인가? 그놈은 죄를 짓고 전과자가 되었지마는 내 누이야……."
 
204
"알아들었네. 물론 그자하고 경우가 다르기는 하네마는, 어데 세상이란 그런가. 그 잘못으로 제 팔을 제가 비여서 병신이 되는 것이나, 도적놈을 만나 칼을 얻어맞아 병신이 되는 것이나 병신은 일반이거든. 세상 사람이 그 원인을 따져 보고 그 결과를 평하지는 않는단 말야. 그 결과만 가지고 절름발이면 절름발이 곰배팔이면 곰배팔이라지, 어데 저 사람은 어떡해서 절름발이가 되고 이 사람은 어떡해서 곰배팔이 되었다고 구별을 해 주던가.
 
205
아모튼지 애석한 일일세. 여자란 그게 안되었거든. 아모리 귀한 몸이라도 한 번 버리면 고만이란 말야."
 
206
"그야! 그야……."
 
207
병일은 석호의 말을 여지없이 반박을 하려고 둘러보았으나, 입술만 뻥긋 뻥긋 할 뿐이고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208
"그야 원인 결과가 모두 다르고 말고."
 
209
석호가 병일의 할말을 대신 해 주듯 넙적 말을 받았다.
 
210
"충분히 동정할 여지도 있고, 동정만이 아니라 듣는 사람마다 분개도 할 노릇이지만, 그게 아모 실속 없는 동정이란 말일세. 신도덕이 어떠니 구도덕이 어떠니 날뛰는 놈들이라도 그놈들더러 헌 계집을 제 평생 정당한 안해로 사랑하겠는가 물어 보게. 다 체머리를 흔들 걸세. 그야 신부의 처지를 잘 알고 특별한 의협심으로 아는 듯 모르는 듯 받아주는 사내가 있다면야 그는 또 모르지. 제 안해의 불의의 불행을 가엾게 생각하고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는지는 모르지만, 어데 그런 사람을 구할 수가 있느냐 말야. 섣불리 구하다가는 괜히 말만 퍼뜨리고 모양만 흉하고 죽도 밥도 안 될 거란 말야.
 
211
그러니 말일세. 감정으로는 아모리 용서를 못한다손 치더래도 그자와 결혼하는 게 제일 상책이란 말일세."
 
212
병일의 고개는 천근 무게의 돌에 나려 눌리듯이 밑으로 밑으로 숙여졌다.
 
213
그는 인제 석호의 말을 반박할 용기조차 없는 듯하였다.
 
214
석호의 그 조그마한 눈에는 야릇한 웃음의 그림자가 반짝하다가 지워졌다.
 
215
그는 다시 탄식조로,
 
216
"딱해, 딱해, 참 딱한 일야. 여자란 그게 큰일야. 백락천의 시가 아니라도 일생 고락이 다른 사람에게 달렸거든. 허 기막힐 일야."
 
217
라고 의미 깊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생각난 듯이 시계를 꺼내 보고,
 
218
"벌써 여덟 시가 지났네, 늦었군. 오늘 저녁에 일곱 시부터 무슨 과장 회의가 또 있다나. 나는 가 봐야겠네. 아모튼지 잘 생각해서 신중히 처사를 하게. 워낙 일이 괴상망칙해 놔서. 회의가 일찍 끝나면 밤이라도 또 옴세.
 
219
자네 어데 나가지는 않겠지?"
 
220
병일은 맥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221
병일의 집을 나오는 석호의 입술에는 쉴 새 없이 미소가 흘렀다. 까닭 없이 입이 뻥긋뻥긋 벌어지는 것을 걷잡으랴 걷잡을 수가 없었다.
 
222
그는 은주를 잘 안다. 어릴 적 코 흘릴 때부터 늘 보아 잘 안다. 그 탐스러운 얼굴과 총명한 눈과 옥같은 손을 잘 안다. 그보담도 은주가 누거만 재산가의 외동딸로 외누이로 얼마나 사랑을 받고 귀염을 받고 자라난 것을 더 잘 안다. 이것은 석호의 은주에 대한 지식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긴요한 점이다. 그 미모와 재주는 이 점에 대면 부속품이요 허접쓰레기다.
 
223
그는 홀아비가 된 뒤, 미래의 안해를 꿈꿀 때 미상불 은주 생각이 아니 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어처구니없는 공상을 물리쳤다. 은주는 높게높게 하늘에 매어 달린 별이었다. 구름 위에 피인 꽃이었다. 그것은 가망 밖이다.
 
224
아모리 바라보고 치어다본들 제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냐. 자기가 아모리 병일과 친하고 병일의 경영하는 모든 은행 회사에 아모리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하더래도 자기는 병일의 한낱 사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옛날 말이면 청지기에 틀리지 않았다. 주인댁 아가씨에게 장가들기는 언감생심이 아니냐. 세상이 변하였다 한들 지체와 근지에 대한 애착심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생활과 아모런 상관이 없는 듯하면서도, 기실 실생활의 등 뒤에서 은근히 실생활을 지배하는 유령이었다. 더구나 혼인에 들어서는 석호 제 말마따나 끼리끼리다. 양반은 양반을 찾고, 부자는 부자를 찾는다.
 
225
낡아빠진 옛 양반은 유령의 말을 들을 근력조차 없이 되었지만, 부자란 새 양반은 뜻대로 마음대로 가릴 것을 가리지 않느냐.
 
226
고양이같이 약은 석호는 결코 안 될 일에 머리를 썩히지 않는다. 제 품에 기어 들어올 파랑새가 아닌 줄 안 다음에 헛침을 삼킬 석호가 아니다. 그는 물론 그런 사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227
그런데! 그런데! 구름 위의 별은 땅 위에 떨어졌다. 달 속에 핀 월계화는 뜻밖의 광풍에 휘날리어 구렁에 떨어졌다. 인제는 자기도 손만 내밀면 부여잡을 수 있게 되었다. 꺾으려면 꺾을 수 있게 되었다. 옥황상제의 후원에서 나 지저귀는 듯하던 파랑새는 부러진 쭉지를 떨면서 어느 사람의 아모 품에라도 안기기를 애원하게 되었다.
 
228
이 꽃을 꺾어 주랴. 꺾는대도 전부터 잔뜩 욕심이나 낸 것처럼 허겁지겁 꺾어서는 꺾는 이의 인품이 깎일 염려가 있다. 본래 원하던 바도 아니요, 싫기는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어 꺾는다는 듯이 꺾어야만 쓴다. 한껏 생색을 낼 대로 내어야 한다. 그러하자면 그 꽃을 무여지하게 하잘것없이 보잘 나 위 없이 더럽게 더럽게 떨어뜨리는 것이 더욱 좋다. 언짢으나마 꺼림칙 하나마 친구를 위하여 주가의 명예를 위하여 그 꽃을 맡는 듯이 되어야 찬연한 생색이 나는 것이다.
 
229
그는 물건 값을 깎는 비결을 여기 이용한 것이다. 제발 팔아지이다, 맡아 지이다, 하고 비두발괄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자기는 사기 싫으니 다른 사람에게 팔라고 내밀어야 한다. 적은 흠절이라도 크게 크게 배집어 내어야 한다.
 
230
이왕지사 버린 사람이 되었으니 헌계집이 되었으니, 여해 같은 자하고나 끼리끼리 혼인을 하라고, 가정적으로 원수요 사회상으로 폐인이 된 전과자 하고 나 짝을 맞추라고, 그가 기를 쓰고 주장한 이유가 실상 여기 있있던 것이다 제가 사려는 물건 . 값 떨구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이런 엉뚱한 수작을 붙여놓으면 쉽사리 제 내심을 들여다볼 수도 없거니와 물건 값은 저절로 더 할 나위 없이 떨어질 것 아니냐. 이야말로 일거양득의 기상천외의 좋은 생각이 아니냐.
 
231
은주를 여해에게 시집 보내라 한 것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제일 좋은 상책이 아니라 기실 자기의 야망을 채우는 데 가장 첩경이요 상책이었던 것이다.
 
232
'내가 말을 너무 박절하게 하였지?' 석호는 인력거 위에서 생각하였다.
 
233
'내 말이 너무 심했을까? 헌 계집, 흥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하노! 그야 갈 데 없는 헌계집이 별수가 있나? 몸을 버린 계집애니 헌계집이래지, 새 계집이라고는 할 수 없거든. 사람의 운명이라고는 참 알 수 없는 게야. 그 계집애가 그렇게 될 줄이야, 귀신인들 알았겠느냐 말야, 흥.' '대관절 여해란 놈은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구. 출옥하던 길로 ─ 하롯밤 새에 ─ 허 그놈 ─ 몸기운도 좋거든. 허 고얀 놈! 그 옥 같은 살을 ─ 아모도 손 못 대인 그…….' 석호는 예까지 생각하고 제절치는 듯이 몸을 비꼬았다.
 
234
"죽일 놈! 죽일 놈!" 그는 수없이 중얼거렸다. 질투의 불덩이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오는 듯하였다.
 
235
"죽일 놈! 죽일 놈! 죽일 놈!"
 
236
하고 석호는 마른 침을 연거푸 튀튀 배앝았다.
 
237
'그런데 가만 있거라. 그 고지식한 병일이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으면 어떡할까? 정말 그 여해란 자에게 시집을 보내면 큰일이 아닌가? 설마!
 
238
설마!' 석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239
'저도 사람 놈인 다음에야 그러지야 않겠지. 제 원수에게 제 누이를 내맡기지야 않겠지. 도적놈, 살인 미수범, 전과자, 강간범! 그놈에게 제 누이를, 설마 사람의 가죽을 쓰고야! 될 말인가 될 말인가. 슬슬 기회를 보아 내게로나 보내랄까.' 석호는 웃입술에 하릴없이 붙여놓은 듯한 솔잎 수염을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240
'나이 사십이니 벌써 중늙은이는 된 셈이것다. 그런 아름다운 아가씨의 신랑감이 될까. 아가씨, 흥! 급살을 맞아 뒤어질 아가씨, 흥! 인제야 정조를 잃은 천둥이가 됐지, 흥 그걸 얻어 주어?' 그의 커다란 입은 또 옴질옴질하여 벌어지려 한다.
 
241
얻어 준다면야 감지덕지 ' 하렷다. 헌 계집이 되어서 미상불 꺼림칙하기는 한걸. 꺼림칙해도 눌러 보아 줄까. 뭐 죽 떠 먹은 자리지 뭐. 그 대신 벼 천이나 붙어 보렷다. 가만 있자, 병일의 재산이 얼마나 될꼬? 추수는 한 삼만 석 착실하고, 현금도 돈 백 만원은 되렷다. 부자는 더러운 부자여. 동기라곤 그 누이 하나뿐이니 설마 재산의 십분의 일이야 안 줄라구. 그러면 여러 천 석이 되게. 너무 과한데. 천 석? 이천 석? 얼마나 떼어 주려누?' 석호는 속으로 주판질을 하고 또 해 보았다. 아모리 줄잡고 줄잡아도 천석 하나는 무난히 떼어낼 자신이 생겼다. 천 석! 소 부르주아 생활에 감질이 나는 그는 천 석만 생각해도 마음이 흐뭇하였다. 그 잘난 거마비로 한 이백 원 받는 것 정말 기름을 짤 노릇이다. 뜯기는 데는 왜 그리 많은지.
 
242
시골집으로 궁한 일가와 친구로. 돈은 마치 손으로 움켜쥔 물 모양으로 용하게 새어나가지 않으냐. 그런데 천 석만 덜썩! 한꺼번에 생기면!
 
243
'첫째 초월이를 좀 푼푼히 주어야 해. 빠듯빠듯한 월급에서 저고리 한 감만 끊어 줘도 돈 아귀가 빈단 말야. 그래도 여전히 웃는 얼굴을 보이는 건 제법 야, 참 제법야. 이 판에 집 칸이나 장만해 줄까? 아니지, 아니야. 은주를 얻거든 초월은 버려야 해. 부마가 되시고 함부로 계집 주전부리를 해서 쓰나. 아주 착실하게 얌전하게 보여야만 쓰거든. 그래야 벼천이나 줄지 누가 아나. 그래, 초월이 년은 고만두고 신혼여행이나 한번 굉장하게 해 볼까? 대판으로 동경으로. 이왕 내어 디디는 걸음에 아주 양행(洋行)을 해 버릴까? 이러쿵저러쿵 말 나기 전에 서양을 한 바퀴 둘러온다면 병일 군도 좋아할 거라 꽃의 파리나 보고, 이탈리아에서 곤돌라나 타 보고, 남빛 지중해 나 보고, 북구 미인이나 구경하고.' 석호는 학생 시대에 꿈꾸던 찬란한 공상까지 새삼스럽게 되풀이하였다.
 
244
'그런데 어떻게 그 말을 끄집어낼까. 병일이란 위인은 영리할 때엔 무척 영리하지만, 또 둔할 때는 아주 숙맥같이 둔하니 걱정야. 저편에서 나에게 맡으라면 좋겠지만 얼굴이 바시어서 내 편에서 말하기는 어렵고. 그러면 비위를 너무 긁어 주었게. 너무 나리깎아 놓아서 내게 맡으란 말이 얼른 떨어지지를 않으렷다.' 그러나 석호는 자기에게로 굴러들 이 행복을 어데까지 믿었다.
 
245
"뭐, 인제 한 번만 더 술술 말을 돌려 버리면 고만 될 거야. 그러면 오늘 밤에라도 이 눈치를 보일까? 아니 아니, 그렇게 조급하게 서둘 건 아니야.
 
246
청처지막하게 일을 꾸며야 해. 좀 뜸을 들여야."
 
247
그는 자신 있게 중얼거렸다. 그 손바닥만한 얼굴엔 악마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원문】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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