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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고국의 흙 ◇
카탈로그   목차 (총 : 22권)     이전 19권 다음
1934
현진건
1
봄밤은 선선하게 따뜻하였다.
 
2
명화는 뜰로 향한 장지를 열고 상열이와 나란히 앉았다.
 
3
정원에는 은은한 전등불이 운모 조각처럼 번뜩였지만, 나무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이요, 사람의 자최는 없었다.
 
4
상열은 나무 진과 풀 향기를 실은 눅눅한 공기를 살 것같이 들여마시며, 적이 안심을 하는 모양이다.
 
5
"어때요, 한적하지 않아요?"
 
6
명화는 난쟁이 황양목으로 곱게 선을 두른 화단에 옹기종기 놓인 일찍 피는 꽃들이 밤눈에도 방싯방싯 웃으려는 것을 내다보다가, 상열에게 말을 건네었다.
 
7
"그렇군. 바루 절간에나 들어온 것 같은데."
 
8
상열은 맞장구를 치고 멀리 서울의 불바다를 그리운 듯이 바라다보았다.
 
9
두 애인은 잠깐 말문이 막혔다.
 
10
산같이 쌓이고 쌓이었던 회포가 마주보는 순간에 봄눈 슬듯 사라지고 만 것 같았다.
 
11
명화는 문득, 처음 만날 때부터 상열이가 너무 점잔을 빼던 것을 생각하였다. 그 때에도 제 마음에 쏟는 정을 열에 하나도 드러내지를 못하였었다.
 
12
숫색시같이 남의 눈을 꺼리고 부끄럼을 타고 가슴을 울렁거리고 까닭 없이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이었다.
 
13
상열을 그리는 여러 해 동안 이따금 어린 자기의 안타까웁던 사랑을 돌아보고 우습게 생각하였다. 왜 그 때는 의엿이 할말도 못하였던고. 부여잡고 싶은 두루막 뒷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던고. 상해를 건너갈 때만 해도 왜 말리지 못하였던고. 내가 잡으면 설마 뿌리쳤을까. 죽음으로 매어 달렸으면 그런 슬픈 이별을 안 하고도 말았을 것 아닌가. 이렇게 그릴 것을, 이렇게 안타까울 것을. 어쩌면 그렇게도 병신스러웠던가. 벙어리 놀음을 하였던가.
 
14
이번에 만나고만 보면 세상없어도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을 작정이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한이 있더래도 둘이 얼싸안고 쓰러졌으면 쓰러지리라 하였었다. 두 손목을 마주잡고 한 자리에 거꾸러졌으면 거꾸러지리라 하였었다.
 
15
두 사이에 체면이 있을 리 있느냐, 부끄러워할 까닭이 있느냐. 마음에 있는 대로, 가슴이 원하는 대로 불덩이 같은 사랑의 포옹에 왼몸의 피를 태우리라고, 참고 참았던 정열의 회호리바람에 그를 휘술레를 돌리리라, 높고 높게 막았던 방축이 터져 나오는 물과 같이 그를 둥둥 띄우리라 하였었다.
 
16
그러하였거늘, 그 용맹은 어데로 갔는가, 그 결심은 어데로 사라졌는가.
 
17
한적한 이 자리! 엿보는 것은 나무 그늘밖에 없건마는 단둘이 무릎을 마조 대고 앉았건만, 왜 가슴이 설레기만 하는가. 왜 목이 메이기만 하는가. 왜 쪽진 머리가 그닐그닐하고, 얼굴에 분때가 꾀죄죄하게 흘러나리는 것 같은가. 무슨 까닭으로 고개를 바루 쳐들 수가 없는가. 무슨 까닭으로 데면데면하게 수인사만 하고 있는가.
 
18
명화는 제가 여러 번 비웃던 제 어릴 때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19
애인의 얼굴은 그를 칠팔 년이나 다시 어리게 맨들어 놓은 것이었다. 난잡하고 능란한 기생의 탈을 벗겨 버리고, 숫색시의 순정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 것이었다.
 
20
지나친 다정이 무정과 흡사하다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21
안타까웁게 오락가락만 하는 눈길. 올올 떨리는 가슴. 손가락 하나 꼼짝달싹 할 수 없이 왼몸이 자지러지는 듯한 순간. 뼈끝까지 녹신녹신 저리는 듯. 숨쉬는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이따금 생각난 듯이 후 하고 내쉬는 한숨…….
 
22
가까이 보면 볼수록 애인의 모양은 가엾게 변하였다. 첫째로 얼굴색이 변하였다. 윤기가 흐르는 그 흰빛이 보송보송하게 시어졌다. 번듯하고 팽팽하던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여러 줄 글리었다. 정거장에서와 같이 사나운 기침은 하지 않았지만, 쿨룩쿨룩 예사 기침을 할 때에도 왼 얼굴이 땅기고 켕기는 것 같고, 새파란 힘줄이 군데군데 일어섰다. 떡 벌어졌던 어깨판이 착 까부러지고, 그 통통하던 손등엔 뼈가 울근불근 드러났다.
 
23
명화는 애인의 변한 점을 한 점 두 점 눈으로 더듬으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끼었다.
 
24
─ 내 몸은 해외 풍상을 겪기에 너무 지치고 약해진 것이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리운 고토로 돌아갈 길뿐이오. 그리운 애인의 품속으로 뛰어들길뿐이오. 그 부드러운 살이 나를 받아주게 못 된다면 그 맑은 공기 가운데서 나 사라진들 어떠하겠소. ─ 수수께끼 같은 편지의 한 구절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다. 골백번이나 그 사연을 읽고 또 읽어 보았지만 암만해도 무슨 뜻인지를 또렷이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편지를 한 . 그이가 마주앉은 이 자리에도 그 뜻을 완전히 짐작은 못할망정 반쯤은 풀린 듯싶었다.
 
25
저 몸으로 과연 해외 풍상을 겪어내지를 못하리라. 그러니 불야불야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애인의 부드러운 살이 받아주지를 않으면 맑은 공기 가운데 사라진다는 말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26
'애인'이란 말이 저를 가리켰을진대 '맑은 공기'란 웬 말인가?
 
27
명화는 별안간 가슴이 덜컥 나려앉았다.
 
28
'조선에 나와서 제 품에 안겨 죽겠다는 뜻이 아닌가?' '사라진다'는 말은 분명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병이 저렇게 깊었으니 아모리 든든한 장부의 마음이라도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였으리라. 만리 타국 외로운 객창에서 중병을 앓는다는 것은 얼마나 호젓한 일이랴, 쓸쓸한 일이랴. 내 땅에 나와 내 품에 안겨 최후를 맞으려 한 것이리라.
 
29
명화는 너무도 애연하였다. 너무도 억색하였다.
 
30
바라고 바라던 애인이 저를 찾아올 때엔 벌써 죽음의 그림자를 띠었을 줄 이야. 죽음을 선물로 마지막 방문을 올 줄이야.
 
31
명화는 다시 상열을 곤쳐 쳐다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32
'설마' 만일 편지의 그 뜻대로 된다면 너무 악착한 일이었다. 참혹한 일이었다.
 
33
자기 말마따나 부드러운 내 살에서 다시 살아나리라. 힘과 정성을 다한 내 구원에서 제 아모리 지독한 병이라도 낫고야 말리라 하였다.
 
34
명화는 슬픈 자신에 스스로 뽐내었다. 그러나 그 사연의 '애인'이란 말이 단순히 자기를 가리킨 것이 아니요, '사라진다'는 것이 오직 병 때문만이 아닌 것을 명화는 몰랐다.
 
35
"늙었구려."
 
36
상열도 요모조모를 뜯는 듯이 물끄러미 명화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어깨를 어루만지며 한 마디를 꺼내었다.
 
37
"왜요? 벌써 늙어요."
 
38
명화는 고개를 뒤로 기우뚱하며 하염없이 웃었다.
 
39
"세월이 얼마나 갔는데 벌써라니?"
 
40
"그까짓 세월이야 암만 가면 무엇해요? 속살 없는 세월이야……."
 
41
"속살 없다구 가는 세월이 멈칫멈칫할라구, 제 갈 길을 가고야 말지."
 
42
"저는 싫어요, 속살 없이 가는 세월이. 세월이 제가 제멋대로 간 게지.
 
43
제게 무슨 상관이야요?"
 
44
"그러면 어릴 때 그대로 남아있는 줄 아는군."
 
45
"그러먼요, 저는 선생님을 뵈오니 그 때 시절이 그대로 안 가고 있는 것 같애요."
 
46
"그래, 지금도 열 일곱이람?"
 
47
"그럼, 열 일곱이지요. 누가 쓸데없이 나이를 먹어요?"
 
48
"눈 가장자리에 잔금이 갔는데."
 
49
"애규 맙시사. 벌써 주름살이 잡혔단 말씀예요?"
 
50
"그럼 그 숱한 눈썹도 준 것 같구……."
 
51
"어느 새 눈썹이 빠져요."
 
52
"빠지지는 안 해도 너무 뽑아버린 게지."
 
53
"왜 눈썹을 뽑아 버려요?"
 
54
"모양을 내노라구."
 
55
"애규 망측해라."
 
56
"그래야 고운 님이 많이 생길 것 아니야?"
 
57
"그 잘난 고운 님이 생기면 무엇해요? 괴롭기만 하지."
 
58
"괴로워도 생앤 걸 어떡하누."
 
59
"정말 그 생애는 인젠 진저리 넌더리가 나요."
 
60
명랑하던 명화의 말씨는 대번에 흐려졌다.
 
61
"벌써 그 생애가 진저리가 나?"
 
62
"그럼 늙어 죽도록 기생 노릇만 하란 말씀예요?"
 
63
명화는 조심스럽게 눈을 살짝 흘겼다.
 
64
"벌써 늙어 죽기는."
 
65
"언제는 늙었다 하시더니."
 
66
"어릴 적보담 늙었단 말이지, 어데 죽도록 늙었단 말인가, 허허……."
 
67
상열은 웃었다. 그리고 명화의 어깨를 힘있게 흔들었다. 명화도 반쯤 상열에게 쓰러지며 웃음을 풍겼다.
 
68
"죽도록 늙는 법도 있어요? 늙으면 죽는 게지. 아이 우스워라."
 
69
"그래, 죽게 늙었단 말이구려."
 
70
"저는 늙기 싫어요. 죽기도 싫구. 인제는 아주 안 죽을 작정이야요."
 
71
"누구는 죽을 작정하구 죽는가, 뭐."
 
72
"그래도 저는 죽지 않을 테야요. 늙지도 않구요. 선생님을 뵈웠으니."
 
73
"내가 뭐 불로초인가 생명수인가?"
 
74
"그럼 제게는 생명수 아니구."
 
75
명화는 날씬한 두 팔을 늘여 상열의 목덜미에 깍지를 끼고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76
두 애인은 이윽히 마주보았다.
 
77
인젤랑은 " 아모 데도 가시지 말아요. 꼭 제 곁에 계셔 주셔요 네?"
 
78
한참 만에 명화는 눈물 소리를 떨었다. 상열은 아모 대꾸가 없다.
 
79
"왜 대답을 않으셔요? 또 어데를 가실 작정이어요? 인제는 안 돼요. 인제는 세상없어도 제가 놓지를 않을 테예요. 그 때만 해도 제가 철이 없어서 가시게 하였지, 지금부터는 무가내하예요. 인젠 아모 데도 못 가셔요. 참말 못 가셔요. 안 가시지요. 네? 그렇다구 해 주셔요. 고개라두 끄덕여 주셔요."
 
80
명화는 벼르고 벼르던 말을 기태나 하고야 말았다.
 
81
말없이 명화의 얼굴을 데미다보는 상열의 얼굴엔 처참한 표정이 움직였다.
 
82
이윽고 눈을 스르르 감는데 눈시울엔 서리가 번뜩였다.
 
83
명화는 상열의 목덜미에 감았던 제 팔을 풀어 다시 허리 어름을 잡으며 찜부러기하는 어린애 모양으로 제 얼굴을 애인의 가슴에 비비적거리었다.
 
84
"왜 아모 대답을 않으셔요? 그러면 또 가신단 말씀예요? 저를 버리구 또 가실 작정이야? 칠팔 년을 두고 그리웠으면 무던하지 않아요? 인제 또 이별이란 정말 싫어요. 죽어도 싫어요. 네? 선생님 안 가시겠지요. 영영 우리는 다시 떨어지지 않겠지요. 네? 선생님!"
 
85
명화의 등은 그대로 자지러질 것같이 구비를 쳤다. 그는 애인의 침묵이 슬펐다. 불길한 예감이 비수와 같이 그의 창자를 에어내었다. 오래간만에 만난 이 자리어늘 벌써 쓰라린 이별이 자기네의 뒷덜미를 짚은 것을 느끼었던 것이다.
 
86
상열은 물결 치는 명화의 등을 어린애를 달래는 것처럼 따둑따둑 어루만지었다. 이윽고 명화는 눈물 젖은 얼굴을 쳐들었다.
 
87
"그래, 또 가시렵니까? 시원스럽게 말씀이나 하셔요."
 
88
상열은 야속해하는 듯한 애원하는 듯한 명화의 눈물 어린 눈시울을 애연하다는 듯이 손으로 씻어 주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은 더욱 핼쓱해진 것 같았다.
 
89
"마지막으로 왔는데 가기는 어데를 간단 말이어?"
 
90
하고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91
그 웃음은 물을 것 없이 명화 자기를 위로하려는 웃음이리라. 그러나 세상에 저렇게 쓸쓸하고 슬픈 웃음이 또 있을까. 그것은 울음보담도 몇 곱절 더 처량한 웃음이었다.
 
92
명화는 간신히 가라앉히려던 방정맞은 눈물이 또다시 눈시울로 몰려 떨어졌다.
 
93
그게 참말씀이야요 " ? 참 정말 아모 데도 안 가신단 말씀이야요?"
 
94
명화는 상열의 웃음을 보고, 그 말까지 믿기 어려워한다.
 
95
"그럼 참말이지. 가기야 어데를 가?"
 
96
상열은 쾌활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뒤끝은 굴리지 못하고 힘없이 사라졌다.
 
97
"가기야 어데를 가다니요? 그럼 가시지는 않더라두 또 다른 무슨 일이 있단 말씀예요?"
 
98
명화의 가슴에는 무엇이 선뜩하고 지내가는 듯하였다. 독립문 앞을 지나치며 보던 감옥의 번들번들한 벽돌담이 눈앞에 얼른하였다.
 
99
상열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이 순정의 애인을 거짓말로 속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참 사정을 알리기엔 너무 애처롭다는 표정이었다.
 
100
"그렇지요. 어데 가시는 일 말구, 여기 서울에 계셔두 무슨 딴 일이 있단 말씀이지요? 무슨 일이야요 네? 좀 알으켜 주셔요 네? 선생님."
 
101
"그건 명화 씨가 알아선 무얼하우?"
 
102
상열은 무거운 입을 떼어 달래는 듯이 말하였다.
 
103
"제가 알아서 안 될 일이 뭐예요? 만나던 맡에 우리를 또 갈리게 하는 그 일이 무슨 일예요? 알고나 있게 말씀을 좀 해 주셔요. 네?"
 
104
상열은 명화를 끌어안아 어릴 때 하듯 제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야학교 선생 시절처럼 타일르듯 말하였다.
 
105
"그건 명화 씨가 알아서 쓸데도 없는 일이오. 또 알아서는 안 될 일이오.
 
106
다만 이것 하나만 생각하오. 사람이란 제 한 몸의 행복만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구."
 
107
상열의 어조는 장중하고도 침통하였다.
 
108
명화는 상열의 무릎에서 털썩 나려앉았다.
 
109
"사람이란 내 한 몸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구요? 전 그런 말은 듣기 싫어요. 전 이날 이때까지 제 한 몸을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110
남의 작난감이 되고, 남의 노리개가 되고 남을 위해 웃음을 웃고, 남을 위해 속을 끓이었습니다. 언제 한 번 성나는 대로 해 보았을까, 언제 한 번 내 울 일에 울어 보았을까,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답니다. 아모리 울화가 치받쳐도, 내색도 못 내었답니다. 아모리 분한 일이 있어도 애꿎이 제 입술만 깨물었답니다. 저야말로 남을 위해 살았어요. 인제 싫어요, 딱 싫어요. 남을 위해 사는 것은……."
 
111
명화는 설움이 일시에 복받치는 듯하였다.
 
112
인제 저도 저를 위해서 " 좀 살아볼 작정이야요. 거짓의 탈을 훨훨 벗어 버리고 알몸뚱이의 본정대로 살아볼 작정이야요. 슬프면 슬퍼하구 기쁘면 기뻐하구. 선생님을 모시고 새 생활로 돌아갈 터이야요. 암만 선생님이 마다 셔두 인제는 안 돼요. 세상없어도 안 돼요. 네? 선생님! 저를 버리지 않으실 테지……."
 
113
상열은 눈물 속에서 정열에 타는 명화의 시선을 차마 바루 쳐다볼 수 없다는 듯이 시선을 떨어트리었다.
 
114
"명화의 말이 일면의 진리가 없는 것두 아니네. 그러나 사람이란 어느 때는 남을 위해 살고, 어느 때는 내 몸을 위해 살겠다고 작정을 할 수가 없는 것이거든. 그렇지 않아. 사람의 한 평생에 선을 그어놓고 이짝 저짝에서 남 위하는 것과 내 위하는 것과 구별을 지을 수야 없는 게 아니야, 응. 더구나 명화는 남이니 나이니 또렷이 구별을 하지마는 크게 생각하면 내 남이 없는 것이어든.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거란 말야. 명화의 경우는 물론 좀 다르지마는……."
 
115
역시 지난날의 선생의 티를 잃지 않고, 순순히 가르치는 듯한 부드러운 말씨였다.
 
116
"그러면 한평생을 남을 위해 산단 말씀이야요? 제 사랑도 버리구, 제 행복도 버리구……."
 
117
"사랑? 행복? 허"
 
118
상열은 쓴웃음을 배앝았다.
 
119
"왜 웃으세요? 그럼 사랑도 버리란 말씀예요? 10년 가까이 건사를 모은 사랑을……."
 
120
"10년! 나도 10년 동안 고생살이에 얻은 것은 병뿐이구려……."
 
121
하다가, 제 말이 너무 센티멘탈에 흐르는 것을 고치는 듯이,
 
122
"해외에 나가 보면 10년이란 세월은 눈 한번 깜짝일 새에 달아나는 거야.
 
123
10년이 아니라 백년이라도 할 노릇은 해야 될 것 아니야? 응."
 
124
"10년 동안 째기발을 딛고 기다리던 행복도 버려야 된단 말씀에요? 아스세요, 아스세요.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아요, 너무 참혹하지 않아요? 네, 선생님!"
 
125
"아모리 참혹하더래두……."
 
126
"그런 말씀이 어데 있어요? 아모리 참혹하더래두, 저를 버리시겠단 말씀예요?"
 
127
"왜 버리기야……."
 
128
"그럼, 어떡하신단 말씀예요? 저를 어떡하신단 말씀예요?……."
 
129
이렇게 만난 것두 " 행복이 아닌가? 만나는 동안이 길든지 짧든지 간에……."
 
130
"왜 짧아요, 왜 짧아요? 평생을 같이 모실 텐데……."
 
131
담박하고 간드러진 요릿상이 들어왔다. 껍질 채 구운 소라. 센 머리칼 같은 무채에 연분홍 생선회 갓, 어느새 골패짝 같은 오이나물, 눈깔만한 잔.
 
132
대륙적으로 텁텁하고 질번질번한 청요리만 보던 상열의 눈엔 진기하고도 서툴렀다. 간나위 같고 가려웠다.
 
133
여러 해포를 못 먹어보던 음식이라 눈에도 서툴거니와 입에도 서툴렀다.
 
134
닝닝하고 야릇한 냄새가 비위를 뒤집었다.
 
135
얼마 먹는 체하다가 상열은 젓가락을 던졌다.
 
136
"왜 비위에 받지를 않으셔요? 딴 걸 좀 시켜 올까?"
 
137
명화는 소라구이를 뜯어먹다가 근심스럽게 물었다.
 
138
"뭘, 괜찮아, 술이나 한두 잔 먹지."
 
139
"밤이 늦었으니 시장도 하실 텐데."
 
140
"아니, 찻간에서 저녁을 든든히 먹었어."
 
141
"뭘요. 그까짓 변또가 무슨 배가 불러요?"
 
142
"그래도 해외 있을 적보담은 갑절이나 먹은 셈인걸, 허!"
 
143
"그러면 거기 계실 때엔 노상 굶으신 게지요."
 
144
"그야 굶다가 먹다가 했지만……."
 
145
"아이."
 
146
하고 명화는 목이 메어 말 뒤끝을 잇지 못하였다. 튼튼하던 몸이 이렇게 볼상없이 말르고 중병까지 든 것이 온전히 고생살이 까닭이어니 하매 새삼스럽게 안타까웠다. 해외에 나가면 웬만한 고생이야 짐작 못한 바도 아니지만 끼니를 궐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였던 것이다.
 
147
"그래, 조석도 제때에 못 잡수셨단 말씀예요?"
 
148
하고 명화는 술을 부었다.
 
149
"조석이 제때라니? 그러면 누가 해외 풍상이 고되다 할꺼요?"
 
150
상열은 눈깔만한 잔을 훌쩍 마셨다.
 
151
"그런 고생을 하고, 왜 거기 계셔요? 글쎄 얼른 나오실 게지."
 
152
"허!"
 
153
상열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154
"끼니를 에우니 어떻게 병환이 안 나요?"
 
155
"그까짓 밥 좀 굶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마음의 고통이 몇백 곱을 더하니까……."
 
156
하고 후 한숨을 내어 쉬고 눈을 멍하게 뜬다. 지긋지긋한 지난날의 고생을 눈앞에 그려보는 듯.
 
157
두 잔밖에 안 먹은 술이 벌써 올랐다. 그 핼쓱하던 얼굴은 피를 발라 놓은 듯이 붉었다.
 
158
"술도 그렇게 못하셔요?"
 
159
"본대 잘 먹지도 못하겠지만, 병 때문에 몇 해를 끊어서……."
 
160
"아규, 그럼 왜 술을 잡수셔요?"
 
161
"인제는 먹어도 괜찮아."
 
162
"병환이 나으신 것 같지도 않은데……."
 
163
"병이야 안 나았지만 인제 올 데를 왔으니."
 
164
"올 데를 오시다니?"
 
165
"그리던 고장에를 돌아오고, 또 이렇게 그리던 명화를 만나지 안 했나?
 
166
허허."
 
167
"그럴수록 몸을 더 조섭을 하셔야지."
 
168
하고 명화는 상열이가 또 들려는 술잔을 뺏으려 하였다.
 
169
"뭘, 몇 잔 먹은들 어떨라구?"
 
170
"병환이 더치시지."
 
171
"더치면 대수요? 얼마 남지 않은……."
 
172
하다가 상열은 말을 잘라 버렸다.
 
173
"얼마 남지 않은 게 뭐예요?"
 
174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 아닌가?"
 
175
하고 필경 그 잔을 말려 버렸다. 얼굴은 더욱 연연하게 붉어지고 숨길까지 씨근씨근해 가빠졌다.
 
176
"왜 인생이 얼마를 남지 안 해요?"
 
177
명화는 다시금 항의하였다.
 
178
"명화도 벌써 짐작했을는지 모르지만, 내 병이 이렇게 중하지 않나? 구태여 산다 한들 며칠이나 살거요? 그러니……."
 
179
명화의 항의에 상열은 목소리를 떨어트렸다.
 
180
"뭘요? 무슨 병환이 그렇게 중하시단 말씀예요? 소복만 잘하시면 곧 나을 것 아녜요?"
 
181
상열은 고개를 흔들었다.
 
182
"그렇게 나을 병이 아니야."
 
183
"세상에 아니 낫는 병이 어디 있단 말예요? 해외에서 너무 고생을 하셔셔 난 병환 아녜요? 끼니를 굶으시구 그렇게 난 병이야 조섭을 웬만만하면 쉽사리 나을 거예요. 아예 비관을랑 마셔요. 네? 선생님."
 
184
요리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았던 명화는 상열의 곁으로 맹그적맹그적 무릎으로 걸어서 다가앉았다.
 
185
"네, 선생님. 마음을 단단히 잡수셔요. 그까짓 병이야 걱정을 할 게 뭐예요? 제가 있잖아요? 제가 이렇게 있는 담에야……."
 
186
명화의 뺨은 상열의 뺨에 쓰러졌다.
 
187
"네, 선생님, 우리도 좀 살아봅시다. 하늘이 두 쪽이 나더래도 우리 둘이 살아봅시다. 네 선생님 딴 말씀 마시구, 불길한 말씀 마시구, 남 위하는 생각 마시구, 네, 선생님. 병만 곤치기로 힘을 씁시다. 산수 좋은 데로 전지(轉地)라두 하시구. 네? 선생님. 세상없어도 병을 곤치기로 해요, 네? 선생님!"
 
188
명화는 왼몸이 정열의 덩어리로 화한 듯 입에서 불길이 홀홀 나왔다.
 
189
"아, 아."
 
190
상열은 짤막하게 탄식을 배앝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울림이다.
 
191
"나을 병도 아니구, 곤칠 필요도 없는 병이오."
 
192
"또 저러시네. 또 저런 말씀을 하시네."
 
193
명화는 질색을 하고,
 
194
"네, 선생님. 그러지 마시구. 제발 그러지 마시구. 세상없어도 우리 살아 보아요. 네? 선생님."
 
195
슬픔과 애원에 삐뚤어진 명화의 입술에 상열은 제 입술을 찍었다.
 
196
꼬창이 같은 팔뚝이 똑 부러질 듯이 명화를 쓸어안았다.
 
197
몸과 마음이 바스러지는 듯한 포옹의 한 순간! 상열의 팔은 맥없이 풀리었다.
 
198
명화는 제 애인의 뼈만 남은 딱딱한 안간힘과 아귀힘이 약한 것이 슬펐다.
 
199
가엾었다. 객쩍은 짓을 하였다는 듯이 상열은 가볍게 명화를 밀어내고 자기도 물러앉았다. 명화는 밀려나온 것보담 더 다가들어갔다.
 
200
"선생님, 왜 밀어내셔요? 암만 밀어내셔도 밀려나갈 제가 아녜요. 네 선생님, 아모 다른 생각 마시구 제 말만 들으셔요. 왜 한눈을 파셔요? 왜 다른 데를 보셔요? 또 무슨 딴 생각을 하시는 게로구만. 제 얼굴을 보셔요.
 
201
네? 선생님, 제 얼굴을 좀 보아요. 글쎄."
 
202
명화는 만 가지 생각에 잦아진 듯한 상열의 얼굴을 두 손바닥에 끼어서 제 앞으로 돌려놓았다.
 
203
상열은 앞으로 푹 고꾸라지는 듯이 고개를 숙이자 오른손으로 이마와 머리를 얼싸 잡아서 떠받쳤다. 무거운 머리를 고이기 어렵다는 듯이 가느다란 팔목이 휜 것 같았다.
 
204
한참 한참 만에야 상열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205
그 얼굴엔 비창하나마 굳은 결심이 움직였다.
 
206
그는 조끼 단추를 끌르고 조끼 주머니에서 하얀 수건에 싼 무엇을 끄집어 내었다 오랫동안 그리고 . 그리던 애인을 위하여 깊이 감추어둔 선물을 내놓기나 하는 듯이.
 
207
"명화 씨, 이걸 좀 보시오!"
 
208
얼굴빛도 엄숙하거니와 말씨조차 정중하였다.
 
209
"이게 뭐예요?"
 
210
하고 물었다.
 
211
"끌러만 보오!"
 
212
명화는 위에 싼 수건을 끌렀다. 그 속에서는 두꺼운 조선 장지의 봉투가 나왔다. 보실보실한 무엇이 맞히었다.
 
213
명화는 진기한 듯이 겉봉을 떼었다. 가볍게 봉투를 기울이매 명화의 손바닥엔 흙 같은 것이 솔솔 부어졌다.
 
214
"이게 뭐예요? 흙 아녜요?"
 
215
"그렇소. 흙이오. 내 고향의 흙이오. 조선의 흙이오."
 
216
명화는 기대에 어그러진 듯한 고이쩍은 듯한 눈으로 어이없이 상열을 쳐다보았다.
 
217
"흙을 왜 이렇게 심심봉지를 하였을까?"
 
218
명화는 흙을 한 줌이나 되도록 더 쏟아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219
"명화 씨가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것도 용혹무괴한 일이오. 세상에 흙을 싸 두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그에 더한 보물이 없었소. 나의 최후의 동반자가 될 것은 그 흙뿐이었소……."
 
220
명화는 무슨 뜻인지를 잘 몰랐지만 어쩐지 슬펐다. 잠자코 설명을 더 기다렸다.
 
221
"명화 씨는 상상도 못하리라. 해외 객창에서 병을 얻은 몸이 얼마나 쓸쓸한가. 병이라두 유만부동이오?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진배없는 폐병이 든 것을 알 때 그 마음이 어떠할까. 십년 풍상에 아모 것도 이뤄진 것이 없고 하로하로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이 어떠한가. 고국을 떠나 있으면 고국이 얼마나 더 그리운가. 남들이 비웃는 붉은 산이 얼마나 보고 싶은가. 맑은 하늘과 맑은 물이 얼마나 눈앞에 어른거리는가……. 더구나 인제는 죽는다.
 
222
반생에 애쓴 것이 속절없는 물거품으로 사라진다. 인제는 다시 고향의 공기를 마셔 보지도 못하겠구나, 인제는 다시 고향의 흙을 밟아 보지도 못하겠 구나 하며 내 마음은 , 어린애와 같이 센티멘탈해진 것이오. 그래, 이 흙을 구한 것이오. 내 고향의 흙을. 어릴 때 발로 짓밟고 손가락으로 휘젓던 흙을……. 병이 불시에 더치어 조선에 나간다는 조그마한 소원조차 이루지 못할 것 같으면 나는 이 한줌 흙을 품고 고요히 죽을 작정이었소."
 
223
명화는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224
하두 가슴이 억색해져서 위로할 말조차 나오지 안 했다.
 
225
"인제 내 목적은 반은 달해진 셈이오. 아모튼 죽기 전에 조선의 흙을 밟았고 조선의 공기를 마시게 되었으니…… 그리고 또 내 청춘의 감정을 사루 잡았던 명화 씨를 이러구 만났으니 인제는 세상에 원될 것도 없고 한될 것도 없게 되었소. 마음놓고 내 갈 길을 가면 구만이오……."
 
226
명화는 소리를 내어 울다가,
 
227
"갈 길이 또 어데란 말씀예요?"
 
228
울음 반 말 반으로 물었다.
 
229
상열은 대답이 없었다.
【원문】고국의 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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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진건(玄鎭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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