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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신문 기사 ◇
해설   목차 (총 : 22권)     이전 6권 다음
1934
현진건
1
그 날 밤 놀음은 새벽 세시나 가까이 되어서 파하였다. 석호는 집에 돌아오는 길로 서재(書齋)로 쓰는 건넌방에 들어갔다. 칸 반밖에 안 되는 방에 큰 책상이 한 칸 이상을 차지하였다. 정연히 치워 놓은 책상 위에는 잉크병 재떨이 담배 서랍 등속이 제 자리에 꼭꼭 들어앉았고, 벽에 닿인 머리에는 여러 층 책꽂이가 거의 천정에 닿았다. 그 책꽂이에는 정치, 경제, 사상 서류 등이 더러 섞이기는 하였으되 대개는 오려붙인 스크랩북이 빽빽이 들어찼다. 그는 학생 시대부터 자기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려 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버릇이 있었다. 몸이 바쁜 이마적에도 그는 털끝만한 시간을 얻으면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제 가방에서 반질반질하게 닳은 가위를 내어들고 잡지와 신문을 오리는 것으로 거의 낙을 삼는 듯하였다. 그의 독서와 취미도 허명을 버리고 언제든지 실사귀를 찾는다.
 
2
그는 책상 앞 회전의자에 걸터앉아서 술 한 잔 입에 대지도 않았던 사람 모양으로 차근차근히 스크랩북을 뒤지어보다가 자기가 찾는 것이 거기에 없었음인지 몸을 일으켜 반침문을 열었다. 반침 속에는 벽을 의지 삼고, 붙박이 책장을 여러 층으로 짜 놓았다. 거기도 역시 스크랩북이 제 자리를 찾아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그는 그 중에서 제일 낡은 스크랩북을 하나 빼내었다.
 
3
미닫이를 열고 책가 위에 앉은 몬지를 툭툭 털고 나서, 책상 위에 펴 놓고 뒤적거려 보았다. 그는 옳게 찾았다. 거기는 병일의 결혼 당야의 참극을 대서 특서한 신문 쪽지들이 오려 붙이어 있었다. 그는 조금 높이 달린 전등을 바싹 나리 켜 놓고, 그 케케묵은 기사를 훑어 보았다.
 
4
'박 사장 결혼야의 혈극(朴社長, 結婚夜의 血劇) 괴청년 신랑을 난자(怪靑年 新郞을 亂刺)' 특호 사단 제목의 주먹 같은 활자가 위협하는 듯이 첫째 석호의 눈을 쏘았다.
 
5
─ ˟˟견직회사 사장, ˟˟토목협회 회장, ˟˟은행 두취 박병일 씨의 결혼식은 재작 십 일에 거행되었는데, 그 식장인 종현 천주교당은 사람의 물결에 파묻히어 왼 장안이 끓어 나온 듯한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식을 마치고 조선호텔에 그 피로연이 열리었는데 여러 십 대 자동차와 여러 백 대 인력거가 꼬리를 맞물고 그야말로 장사진(長蛇陣)을 쳤고, 초대받은 손님들로 말해도 사회의 일류 명사를 거의 망라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족측으로 박 후작을 비롯하여 김 자작, 조 남작, 당국측으로 정무총감, 경무국장까지 출석하였으니, 그 굉장하고 성대한 품이란 왕자의 혼례로도 따를 수 없었다.
 
6
가정의 번잡함을 피하고 새로운 정과 기쁨을 알뜰살뜰히 향락하기 위함이런 지 첫날밤을 호텔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그 날 밤 새로 한 시 가량 되어 이 행복에 싸인 신방의 문을 박차고 난데없는 괴청년 한 명이 뛰어들어와 섬섬한 비수로 신랑을 난자하여 원앙금침에 선혈이 임리(淋漓)하는 불상사가 돌발 하였더라.
 
7
그 다음에 다시 컬럼을 나누어 '범인 부지거처(犯人不知去處)' 란 작은 제목 밑에, ─ 박 사장의 혼례식 당야 괴청년이 출현하여 신랑을 난자하였다 함은 별항 보도와 같거니와, 피해자는 왼편 팔에 길이 5촌, 깊이 4푼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요, 그 즉시 입원한 결과 생명에는 별조가 없다 하며 이 급보를 접한 소관 본정서에서는 깊은 밤중이건만 서장까지 총출동하는 일변으로 강전(剛田) 사법계 주임이 수십 명의 정사복 경관을 대동하고 시간을 지체치 않고 현장에 급행하여 범행 현장을 검사하였으며, 또 한편으로 즉시 비상 소집을 하여 범인 체포에 노력하였으나 범인은 범행 직후 바람결같이 자최를 감추었으므로 작일 정오까지 아모런 단서조차 잡지 못하였다더라.
 
8
그 이튿날 신문 기사.
 
9
─ 토목협회 회장 박병일 씨의 결혼 당야에 어떤 청년이 신랑을 난자하였다 함은 작보와 같거니와, 사건 발행 이래로 소관 경찰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활동한 결과 재작일 밤에 이르러 의주통(義州通) 방면에서 피의자 두 명을 체포하였고 또 작일 아침 경성역두에서 피의자 한 명을 검거하였다는 데 그자들 중에 과연 진범이 섞이었는지는 아직 의문이라 하겠으되 동서의 공기는 자못 긴장하여 호텔 뽀이 수명도 호출 취조중인 바 사건 내용은 절대 비밀에 붙이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탐문한 바에 의하건대 신부 되는 홍영애 여사로 말하면 학생 시대에 그 뛰어난 미모를 이르던 터인즉 혹은 그 아름다운 자태에 하염없는 사랑을 보내다가 결혼하게 되매 불 같은 질투를 걷잡지 못하여 화촉동방을 습격하였는지도 모른다는데, 또 일설에 의하면 박병일 씨는 조선에서 손꼽는 부호이기 때문에 상해 가정부와 만주 ○○ 단체로부터 여러 번 협박장을 받았으나, 도모지 응하지 않았으므로 혹은 해외에서 ○○단원이 들어와서 기회를 엿보다가 결혼식 당야를 타서 그와 같은 참극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하며, 하여간 인물이 인물이요 시절이 시절이므로 사건의 전개는 매우 주목된다더라.
 
10
─ 박병일 씨 상해 사건의 혐의자로 체포된 청년 세 명은 그 동안 취조한 결과 제각기 횡설수설을 하는 까닭에 경찰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초조한 모양이며 사건 발생 이래 , 일주일이 가까운 오늘날 대경성 복판에서 일어난 괴사건의 정체를 아직 포착하지 못하였다 함은 경찰의 위신 문제라 하여 당국 측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활동중이나, 별로 신통한 소득은 없는 모양인데, 재작일 세 시경 시내 모처를 습격하여 또 혐의자 두 명을 인치하고 엄중 취조중이라더라.
 
11
그 다음으로 큼직한 초호 삼단의 큰 제목이 나타났다.
 
12
'박 사장 난자 범인(朴社長 亂刺犯人) 돌연 경찰에 자수!(突然 警察에 自首!) ─ 박병일 씨의 결혼식 당야에 일어난 불상사는 누보와 같거니와 사건 발생 이래 경찰은 밤을 낮으로 이어 검거와 취조에 열중하였으나 진범인의 종적은 의연 오리무중에 사라지고 말았던 바, 작일 오전 열 한 시경에 청년 한 명이 돌연히 본정 경찰서에 나타나서 강전(剛田) 사법계 주임을 면회하고 자기야말로 박병일 씨를 찌른 진정한 범인이니 법대로 처벌해 달라 하였는데, 동서에서는 정신병자나 아닌가 하여 여러 가지로 취조해 보았더니, 과연 사건의 진범인 듯한 점을 발견하였다는데, 그가 자현한 것은 자기 때문에 애매한 사람들이 혐의를 입어 까닭 없이 고생을 하는 것을 분개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여 대기염을 토하였으며, 그 범인은 이십 세 밖에 안 된 김여해(金如海)란 청년으로 기골이 몹시 장대하다더라.
 
13
진범인이 나타난 이후로 이 사건에 대한 흥미가 더욱 높아진 듯하여 기사는 연속적으로 날마다 계속되었다.
 
14
─ 기보와 같거니와, 범인은 아모리 심문을 하여도 범행 동기에 대하여는 입을 굳이 닫고 발설을 하지 않으며 "내가 그 진범인 것을 이미 자백한 이상 그 동기를 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도리어 역습하여 취조 경관을 괴롭게 한다는데, 경찰은 각처로 형사를 파견하여 범인의 뒷조사에 눈코를 못 뜨는 모양이며, 범인의 연령으로 보아 혹은 한때의 호기심과 의협심으로 진범인도 아니면서 자현한 것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조차 났다는데 이랬거나 저랬거나 사건은 이 수상한 청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흥미 백 퍼센트라 하겠으며, 작일 오전 아홉 시경에는 형사대가 두 대로 나누어 한 대는 아직도 입원중인 박병일 씨를 임상 심문하였고, 또 한 대는 피해자의 집에 출동하여 그 부인을 면회하고 범행 당시의 경과와 범인의 모습 같은 것을 세밀히 조사해 갔다더라.
 
15
기보와 같거니와 자칭 ─ 진범인 김여해가 과연 적실한지 않은지 그 진부를 판단하기 위함이런지, 작일 오후에는 박병일 씨 부인 홍영애 여사를 사법실로 호출하였는데, 그 어여쁜 모양은 음침한 사법계의 공기에도 한 줄기 봄기운을 돌게 하였으며, 결혼 당야에 그런 끔찍한 변을 겪은 탓인지 그 얼굴은 매우 파리하였고, 양미간에는 수운이 어리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조각 동정을 금할 수 없게 하였는데, 이 부인의 증언 여하로 그 청년의 운명이 좌우될 모양이라더라.
 
16
계속된 기사 밑에, ─ 진범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하여 박병일 씨의 부인이 경찰에 호출되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그 부인과 자칭 진범인 김여해와의 극적 대면은 오후 다섯 시 가량 되어 사법계 밀실에서 거행되었는데, 범인은 부인을 바라보며 대담스럽게, "내가 조선호텔에서 당신 남편을 죽이려던 사람이 아니냐?"하고 얼굴을 번쩍 들어보이매, 부인은 당장에 새파랗게 질리며, '아녜요, 당신이 아녜요.'하고 두어 걸음 물러섰다 한다. 이 기괴한 광경에 입회 경관도 눈이 호동그래졌다 하며, 얼마 만에 부인은 다시 정신을 수습하는 듯하더니 입회 경관에게, "이 사람은 그때의 범인과 얼굴 모습이 아주 틀립니다. 이 사람을 놓아 주셔요."라고 단언하였으므로 단서가 잡힐 듯하던, 그 사건은 또 다시 한 겹의 수수께끼를 더하게 되었다더라.
 
17
그리고 그 밑에 사법 주임의 말로,
 
18
"피해자의 부인이 진범인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첫날밤에 그와 같은 불의의 변을 당하였으니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부인이 무슨 정황이 있었겠습니까. 창황 중에 범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했을는지 의문입니다. 여러 가지로 보아 진정한 범인인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조금 미진한 점이 있기에 형식상으로 대면을 시켰을 따름이니, 부인이 부인한다고 곧 진범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위선 사건 발생 당야 내가 현장에 갔을 때 그 부인을 보고 범인이 복면을 하고 들어왔더냐 물은즉 자세히 알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복면을 하고 안 한 것도 모르는 터이니까, 범인의 얼굴을 분명히 기억했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부인은 어째 아니라고 단언을 했느냐고요 글쎄올시다. 그것은 좀 생각해 볼 문제겠지요 그러나 내 생각 같아서는 인정 많은 여자의 마음이라 범인의 처지에 동정하여 그런 말을 한 줄로 압니다."
 
19
기사만 오려 붙이었으므로 날짜는 잘 알 수 없으나 꽤 동안이 뜬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난 듯하다.
 
20
─ 한동안 세상의 주목을 끌던 토목협회 회장 박병일 씨를 첫날밤에 습격한 범인 김여해는 작일로 취조를 마치고 마츰내 일건 서류와 함께 검사국으로 넘기었는데, 전기 김여해는 일찍이 시국에 불만을 품고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의 몸으로 이에 참가하여 각 방면으로 출몰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고 그 후 거미줄 같은 경계망을 교묘히 벗어나 중국 상해로 건너가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 이번에 군자금을 모집할 중대 사명을 띠고 경성에 잠입하였다가 몇 번 박병일 씨를 방문하고 군자금 제공을 강청하였으나 종시 응하지 않았으므로, 필경 단도를 품고 결혼 당야에 박병일 씨를 습격한 것이라더라.
 
21
석호는 예까지 보고, '멀쩡한 거짓말이다.'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그는 생각하였다.
 
22
'딴은 궐자가 무던은 하군! 영애와의 관계를 추호만치라도 비치지 않고 군자금 모집원이란 혐의를 뒤집어쓴 것은 과연 무던하군. 그런 애매한 죄로 오 년 징역을 살고 나왔으니, 출옥하는 데 마중도 나가고 집으로 데려도 올 만 하군! 미친놈! 고생을 하면 저만 앵했지 별수가 뭐란 말인구! 아모튼지 어린 놈이 계집에 홀려 놓았으니 그야말로 물인지 불인지 헤아릴 수 있나…….' 그는 문득 작년에 상처한 것을 생각하고 주부 없는 신산한 살림에 지쳐 조만간 장가를 가야 될 것을 생각하였다.
 
23
'나도 병일이 모양으로 재취를 잘못 들었다가는 칼침을 맞겠군!' 하고 혼자 빙그레 웃었다. 웃기는 웃었지만, 어쩐지 병일의 당한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는 다시 신문 쪽지를 나려다보았다.
 
24
─ 박병일 씨를 첫날밤에 단도로 찔른 범인, 상해˟˟정부원 김여해는 필경 예심이 종결되어 살인 미수, 강도 미수, 공갈, 제령 위반의 죄목으로 경성 지방 법원 합의부 공판에 회부되었는데 오는 이십 오륙 일 경에 그 제 일회 공판이 개정되리라더라.
 
25
기보와 ─ 같거니와 그 공판은 마츰내 27일 오전 10시부터 대원(大原) 검사의 입회와, 복전(福田) 재판장의 심리로 제7호 법정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피고는 본래 가세가 구차한 터이요, 서울에서는 친척도 없으므로 일생의 운명을 결정할 법정에 서는 몸이 되었건만, 변호사를 댈 능력도 없던 바 이 소식을 들은 피해자 박병일 씨는 자진하여 비용 전부를 담당하고 법조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윤대영(尹大榮), 이인창(李仁昌) 양씨에게 변호를 의뢰하였다는데, 첫날밤의 꿈같은 행복을 부수고 자기를 죽이려 하던 원수이어늘 도리어 그를 위하여 변호사까지 대어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여 한 아름다운 화제가 되었다더라.
 
26
공판 당일의 기사는 어머어마하게 지면을 차지했던 모양이나, 길고 짧은 제목을 일일이 오려붙이기엔 거북하였던지 모조리 빼어 버리었고, 기사도 중요한 것만 취사 선택을 한 것 같다.
 
27
─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당대의 명사요 실업가인 박병일 씨의 첫날밤에 일어난 사건이요, 또 그 사건의 경과가 자못 세상의 흥미를 끄은 탓인지 개정 전부터 법정으로 쇄도하는 군중은 천으로 헤아리어, 그 공판이 열리는 7호 법정 앞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종로서에서는 경관 수십 명을 파견하여 군중 정리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개정 시간에까지 지장을 주었는데, 이 혼잡한 군중 사이에 어떻게 비비고 들어왔는지 박병일 씨 부인 홍영애 여사가 만록총중에 일점홍 격으로 방청석 한 구석에 참예한 것은 이채를 발하였다.
 
28
─ 예정보담 한 시간이나 늦어 오전 열 한 시에야 강본(岡本) 영도(永島) 두 판사의 배심과 복전(福田) 재판장의 주심 아래 대원(大原) 검사의 입회와 윤대영(尹大榮) 이인창(李仁昌) 양 변호사 참석으로 마츰내 공판은 열리었다. 재판장으로부터 피고의 이름을 부르자 피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종용 자약한 태도로 재판장 앞 가까이 걸어갔는데 그 훤출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판은 이십 세의 청년으로는 매우 숙성한 편이었으며, 달포의 철창 생활로 말미암아 얼굴빛은 비록 창백하나마 먹으로 그은 듯한 시꺼먼 눈썹에는 자못 꿋꿋한 기운이 넘치었다.
 
29
─ 예에 따라 피고의 원적, 현주, 성명, 직업, 전과 유무를 물은 다음 곧 사실 심리에 들어가서, 피고는 일찍이 시국에 불만을 품고, 만세 소요가 일어나자 당시 고보 사학년에서 ˟˟ 수업하다가 책을 집어던지고 그 운동에 참가하여 인산 날 물 끓듯 하는 군중의 행렬을 따라 만세를 고창하였고, 그 후 ˟˟신문의 배달에 전력하였으며, 경계가 엄중한 탓으로 만사가 뜻같이 되지 않으매, 재작년 구월 경에 표연히 국경을 넘어 만주로 건너가서 표랑 생활을 하다가, 김좌진(金佐鎭)의 부하가 되어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던 중, 작년 칠월 경에 또 다시 국경의 경계망을 돌파하고 경성까지 잠입하여 무교정 칠십 번지 하숙업 김화옥(金花玉)의 집에 잠복하였었다.
 
30
'그러면 김여해는 ○○ 단원이던가?' 석호는 혼자 물어보았다. 아니다, 아니다. 첫째 그럴 겨를이 없다. 스무 살밖에 안 된 어린 놈이 언제 공부를 하고, 연애를 하고, 또 만주로 건너가고, 조선에를 들어오고, 군자금 모집을 하고…….
 
31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32
'거짓말도 이렇게 꾸며 놓고 보니 그럴듯도 한걸. 어린 놈이 엉터리없는 허풍도 제법 늘어놓았군. 흥, 제 고생이지…….' ─ 그후 피고는 박병일 씨가 명망가요 또 재산가란 말을 듣고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이월 십 육 일 오후 세 시경에 박씨를 자택에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또 십 팔 일 역시 동 시각에 찾아갔으되 또한 면회의 거절을 당하였으므로 이에 반감을 품고 그를 살해할 목적으로 이십 이일에 본정통 삼영 철물점(森永鐵物店)에서 길이 칠 촌 가량 되는 단도를 사 가지고 박씨의 문전을 배회하며 기회를 엿보았건만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삼월 십 일, 박병일과 홍영애의 결혼식 날이 당도하자 피고는 단도를 품은 채로 식장에도 참예하였고 필경 많은 손님 가운데 휩쓸리어 조선호텔에 어렵지 않게 잠입하여 원앙금침을 점점의 선혈로 물들이고 만 것이라더라.
 
33
─ 재판장으로부터 별항 사실을 심리할 때에, 피고는 마치 재판장을 조소하는 듯이 싱글벙글 웃어가며 사실 하나도 부인치 않고 변명치 않고 수문수답으로 오직 "그렇소", "그렇소"할 뿐인 까닭에 공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심리는 박병일 씨를 칼질 하던 장면에 들어가, 재판장 : "침실 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갔는가?"
 
34
피고: "손으로 밀치니 저절로 열리었소."
 
35
재판장: "그때 신랑과 신부는 무엇을 하고 있던가?"
 
36
피고: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소."
 
37
재판장 그때 피고는 : " 박병일에게 대하여 군자금을 청구하였던가?"
 
38
피고는 이 말을 듣자 웬일인지 복받치는 웃음을 걷잡지 못하는 것처럼 껄껄 큰 소리로 웃고 고개를 끄덕이어 그렇다는 뜻을 보이었다.
 
39
재판장: "얼마를 청하였던가?"
 
40
피고는 역시 빙글빙글하며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마치 재판장의 말을 흉내 내듯, 피고: "글쎄요, 얼마를 청구하였던가?"
 
41
재판장: "자기가 청구한 금액도 잊었단 말인가. 피고가 경찰에 와 검사국과 예심정에서 공술한 바에 의하면 삼천 원을 청구하였다 하였으니, 그 액수에 틀림이 없는가?"
 
42
피고: "오 옳지, 참 삼천 원을 청구하였소."
 
43
재판장: "청구할 때에 피고는 품에서 칼을 빼었던가?"
 
44
피고: "아니오, 칼은 들어갈 때부터 손에 들고 있었소."
 
45
재판장: "그때 박병일은 피고의 청구를 거절하였던가?"
 
46
피고: "그렇소."
 
47
재판장: "거절을 당하자 피고는 박병일을 찔렀는가?"
 
48
피고: "그렇소."
 
49
재판장: "몇 번이나 찔렀는가?"
 
50
피고: "그렇소."
 
51
재판장: "몇 번이나 찔렀는가 묻는데 그렇다는 것은 무슨 말인고? 몇 번이나 찔렀는가?"
 
52
피고: "팔을 한 번 찔렀을 뿐이오."
 
53
피고는 피를 보고 그대로 뛰어나와 전기 김화옥의 집에 숨어 있던 중 양심의 가책에 견디지 못하던 차에 나날이 신문지상으로 보도되는 것을 보면 자기로 말미암아 애매한 딴 사람이 고통을 받는 듯하므로 마츰내 자현을 한 것이라는 바 이로써 사실 심리를 끝내고 잠시 휴정한 후, 오후에는 검사의 구형이 있으리라더라.
 
54
─ 오후 한 시 공판은 다시 개정되자, 대원 검사는 일어나 곧 논고에 들어갔는데, 피고는 만세 소요 당시에도 그 주모자의 하나로 학생을 선동하였으며 그 후 계속하여 교묘히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신문'이란 불온문서를 산포하였고, 또다시 만주 방면에 건너가서 군자 모집이란 미명 아래 강도 범행을 하였을 뿐인가, 다시금 경계망을 돌파하고 경성에 잠입하여 박병일을 위협하였으며 , 나중에는 살의를 품고 단도를 준비한 후 다른 때와 다른 날도 많을 것이어늘, 인생의 가장 기쁜 결혼 당야에 흉행을 감행한 것은 그 잔인 포악한 데 놀랄 밖에 없다. 비록 전과를 뉘우치고 자현하였다 하나, 그 죄악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제령 위반, 강도, 미수, 살인 미수, 공갈 협박 등 죄목으로 칠 년 징역에 처함이 상당하다고 준열한 구형을 하였다.
 
55
─ 검사의 구형이 끝나자마자 그 때까지 방청을 하고 있던 박병일 씨의 부인 홍영애 여사는 별안간 외마디 소리를 질르고 그 자리에 기절하여 법정은 일시 혼란하였는데 그 부인은 경관과 원정의 협력으로 법정 밖으로 엇메어다가 종로 병원에 입원시켰으며, 첫날밤에 자기 남편을 찔른 흉한의 공판을 방청하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요, 그 구형을 듣고 기절까지 한 것은 더 한층 호기심을 끄은다 하겠더라.
 
56
오려 붙인 신문지 쪽은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석호는 다 본 스크랩북을 그대로 미진한 듯이 뒤적뒤적하며 중얼거렸다.
 
57
"흥, 기절까지 할 때엔 두 사이는 매우 깊었던 모양이군. 계집이 너무 예쁘게 생기면 그런 앙큼한 것도 곧잘 하는 법이거든! 우스운 것은 병일 군이야, 계집에게 아모리 반했기로 제 계집의 예전 서방놈을 거두어 준다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 칠 년 구형에 오 년 판결! 연애 작난도 값은 호되군!"
 
58
이윽고 석호는 책을 덮고 잘 생각도 잊은 듯이 눈을 깜박깜박한다. 그는 이 기괴한 사실을 자기에게 어떻게 유리하게 전개시킬까 궁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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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도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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