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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수상한 방문객 ◇
해설   목차 (총 : 22권)     이전 7권 다음
1934
현진건
1
여해는 의전병원 본관 '하' 호실에 외로이 누워 있었다. 그 방에는 침대 하나가 또 있었지마는 입원 환자가 없어서 그대로 비어 있었다. 누가 붙이어 주었는지 어멈을 하나 데리기는 하였으되 도토리같이 동글동글하게 생긴 그 어멈은 어디로 구을러 다니는지 좀처럼 병실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밥 먹을 때나 약 먹을 시간이나, 어디선지 톡 튀어 들어와서 어름어름하고 나면 어느 틈으로 새어 버리는지 없어지고 만다. 입원한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위문객이라고는 개아미 한 마리 얼씬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든지 휑하니 찬바람 도는 병실에 혼자 남아서 눈을 감을락 뜰락 하며 낮을 보내고 밤을 새웠다.
 
2
수술하기 전후로는 열이 사십도 가까이 오르나리었으니 본정신을 잃고 혼몽하게 지내었지마는 인제는 열도 나리고 차차 새 정신이 들기 시작하였으되 자기가 어떻게 병이 , 나고 입원을 하고 수술하였는지 도모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과음과 과식과 과로! 맹장염을 일으키는 가장 큰 원인 세 가지를 하로 동안에 모조리 범해 놓았으니 아모리 튼튼한 그의 몸이지만 견디어나지를 못하였고, 지나친 자극과 흥분이 꼬리를 맞물고 뒷덜미를 짚은 까닭에 머리도 얼떨떨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자기에게 당한 일도 아니요, 남의 일이 멀고 먼 꿈나라에서나 생긴 듯하였다. 사단의 테두리는 베일에 가리운 듯이 어슴푸레하고 흐리마리하게 맥락이 닿지 않으나마 그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부분부분은 마치 끊어진 활동사진 필름 모양으로 또렷이 눈앞에 살아왔다.
 
3
흐트러진 여자의 머리카락은 지금도 그의 콧잔등에 남실거린다. 침침한 달 그림자 가운데 푸르게 떠는 어여쁜 뺨은 시방도 그의 턱을 스치는 듯하다.
 
4
더구나 질겁을 한 뚱그런 두 눈! 놀램과 미움과 원한과 분노에 타오르는 듯한 눈! 그 눈은 무시무시하도록 역력하게 그를 흘긴다, 노린다. 그런데 이 머리와 뺨과 눈의 임자는 분명치 않았다. 어찌 보면 영애인 듯도 싶고 어찌 보면 은주인 듯도 싶었다.
 
5
한 줌의 우유 덩이 같은 보얀 젖통도 보인다. 그 발그스럼한 젖꼭지는 샐룩샐룩 떤다. 세루 치마 위에 은어같이 미끄러질 듯한 손목도 보인다. 이 젖과 손목의 임자도 어찌 보면 영애요, 어찌 보면 은주였다.
 
6
이런 기억은 여불없이 잿빛 안개가 잦아진 꽃동산과 같았다. 안개 자락이 살그머니 벗어지는 대로 꽃들은 이슬을 털고 한 송이 두 송이 연연한 얼굴만 치어든다. 잎사귀와 줄기와 가지를 가리운 채로.
 
7
이 꽃동산을 그는 진흙발로 지근지근 밟으며 지나간다. 다친 다리를 절룸 절룸 절고, 시커먼 핏방울을 뚝뚝 떨구 하면서, 가냘픈 꽃 매가지는 뽀각뽀각 나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진다.
 
8
은주의 입을 틀어막는 검은 손등, 벌룽벌룽 터질 것 같은 가슴, 허전거리며 달아나는 그림자, 흘러나린 고의춤.
 
9
여해는 진저리를 치고 감았던 눈을 떴다. 환영은 사라졌다. 그는 퀭하게 들어간 눈으로 두리번두리번 살펴본다. 회칠한 흰 벽을 보고, 천정을 보고, 눈부신 유리창을 본다. 저편 벽에 대어 놓은 빈 침대 위에 시포(屍布)와 같이 깔린 흰 이불을 본다. 제 침대 머리에 당겨 놓은 둥근 테이블을 본다.
 
10
그 위에 양철 쟁반이 놓이고 타구 재떨이 겸용으로 쓰는 두꺼운 유리 곱보 속에 집어넣은 담배 끄트머리가 실실이 풀려서 노랗게 떠오르는 것을 본다.
 
11
그것뿐이다 그는 더 . 볼 것이 없다. 핑그르 한 번 돌아본 눈은 다시 천정으로 돌아와 박힌다. 새로 회칠한 천정은 금 하나도 없었다. 빤빤하게 아모 표정 없이 나려다본다.
 
12
그는 다시 눈을 감는 수밖에 없다. 환영의 떼는 다시금 그를 사로잡는다…….
 
13
오늘도 점심 먹는 시간도 지나고 식후 삼십 분에 먹는 약 시간도 지났다.
 
14
그는 역시 환영에 부대끼다가 눈을 번쩍 떴다. 무엇을 찾는 듯이 또 한 번 휘돌아보았건만 파리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쩐지 무시무시한 증이 들었다. 마치 감옥의 독방처럼 흉물스러웠다.
 
15
그 보얀 벽에서는 앓다가 죽은 입원 환자의 귀신들이 빠져 나와서 덤벼들 듯 하였다. 사람이 그리웠다. 생물이 그리웠다. 하다못해 어멈이라도 불러 보려 하였건마는 제 발로 걸어오기 전에는 이 굴속 같은 병실에서 부른다 하여도 들릴 상싶지도 않았다.
 
16
병실 문이 바시시 열리었다.
 
17
"여기가 하 호실예요?"
 
18
여자의 목소리가 묻는다.
 
19
사람의 소리가 반가웠다. 꿈틀하고 몸을 움직이는 서슬에 수술한 자리가 창자를 쥐어뜯는 듯이 켕기지 않았던들, 여해는 침대를 뛰어나려 목소리 나는 편으로 달음박질을 하였는지도 모르리라.
 
20
그러나 그 다음 순간, '영애다!' 하는 생각이 벼락같이 머리를 따리며, 무의식적으로 소스라치었던 몸이 갑자기 천근같이 무거워진다. 그는 눈을 꽉 감아 버렸다. 도대체 영애를 대할 낯이 있는가?
 
21
아모 대답이 없으매, 그 인기척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양이다. 팔신팔신 슬리퍼 끄으는 소리를 내며 그 발자최는 침대 앞 가까이 온다. 물씬한 향기가 여해의 콧속으로 풍긴다.
 
22
"에그 주무시는가베!"
 
23
들어온 사람은 혼잣말로 속살거린다. 그 음성은 암만해도 영애 같지 않았다.
 
24
여해는 눈을 번쩍 떴다. 반들반들하게 쪽진 머리에 또렷한 흰 가르마가 첫눈에 띄였다. 영애는 아니다. 웬 낯 모르는 여자다.
 
25
"이 방이 하 호실예요?"
 
26
그 여자는 정다운 웃음을 머금고, 환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묻는다.
 
27
하 호실? 여해는 얼른 제 병실의 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 뜻밖의 방문객에 그는 적이 당황하였다.
 
28
"저어…… T동 박병일 씨 댁에서 입원하신 어른이 아니세요?"
 
29
여해가 어리둥절하고 미처 대답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여자는 잼처 묻는다.
 
30
여해는 고개를 끄덕여 그렇다는 뜻을 보이었다.
 
31
"입원하신 지 한 일주일 되셨죠?"
 
32
여해는 또 고개를 끄떡였다.
 
33
"옳게 찾았구먼!"
 
34
방문객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안심한 드키 호! 숨길을 내어 쉰다. 찾아 들어 오기에 여간 애를 쓰지 않았다는 눈치였다. 들고 들어온 과실 꾸러미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동근 의자에 걸터앉는 품이 길게 차린다.
 
35
"저어…… 함자가 누구시드라?"
 
36
동근 의자를 앉은 채로 구을리는 드키 당기어 병상 앞으로 바싹 다가든다.
 
37
생글생글 웃는 눈은 끌어당길 듯이 여해를 들여다본다.
 
38
"……."
 
39
여해는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이 수상한 방문객에게 어떻게 수작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40
"용서하셔요 네! 함자도 모르고 찾아와서……."
 
41
친숙하게 착착 달라붙는 듯한 말씨다.
 
42
"난 명화예요, 기생예요. 함자가 누구시라지?"
 
43
방문객은 누가 묻기나 한 드키 제 이름과 근지를 들추어내어 걸고, 통성명하기를 재촉한다.
 
44
사람이 그리운 환자는 나긋나긋하게 덤비는 초면의 방문객에 호감을 가졌다.
 
45
"김여해요."
 
46
무거운 입도 가볍게 열리었다.
 
47
"김여해 씨! 오 옳아. 참 그러셨지"
 
48
예전부터 익히 알던 이름을 깜박 잊어 버렸다가 문득 생각해 내었다는 듯하다. 그 얼굴엔, 정말 잘 아는 사람을 오래간만에 만난 것같이, 반가운 빛이 돌았다. 초인사의 시스런 기색은 털끝만치도 없다. 여해에게는 그 태도가 정다웠다.
 
49
"저어……, 박병일 씨 부인 잘 아시죠?"
 
50
"……."
 
51
"압다, 왜, 홍영애 씨 말씀예요?"
 
52
여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53
"그 부인과는 퍽도 친쪼웠다죠?"
 
54
'퍽도'란 마디에 힘을 주며 그 입모습엔 무간한 듯한 놀리는 듯한 웃음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55
"글쎄……."
 
56
하고 여해는 휑한 눈망울을 꺼먹꺼먹하였다. 묻는 뜻을 잘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57
"글쎄가 뭐야요? 퍽도 친하시다며, 누구는 모르는 줄 아셔요? 세상이 다 아는 노릇인데……. 감옥 나오신 지도 한 주일 되셨죠?"
 
58
명화는 우선 출옥한 날짜 아는 것부터 따진다.
 
59
"그리고 출옥하던 그 날 밤 아니, 그 이튿날 새벽에 입원을 하셨죠?"
 
60
이 수상한 방문객은 정말 자기에게 관한 모든 것을 아는 듯하다.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빛나는 그 눈은 남의 가슴속까지 환하게 들여다보는 듯하다.
 
61
"그것 봐요, 내가 모르나. 그리고 또……."
 
62
명화는 잠깐 말을 끊었다.
 
63
"그리고 또 ……."
 
64
명화는 말끝을 이었다.
 
65
"……출옥하실 때 그 부인이 마중을 나왔죠?"
 
66
여해는 고개를 끄떡였다.
 
67
"그리고 또, 단 두 분이 자동차를 탔죠?"
 
68
여해는 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69
"그것 봐요. 내 모르는 게 뭐 있나. 그래도 그 부인하고 친치 않다고 잡아뗄 테요?"
 
70
달라들면서부터 무간하게 구는 방문객은 제 동무한테나 하듯 눈까지 흘겨 보인다.
 
71
"흥, 옥문 밖까지 쫓아왔으니 친하면 이만저만 친한 게예요. 바루 춘향이와 이 도령의 처지를 뒤집어 흥으로…… 호호호."
 
72
방문객은 빈정거리며 아모 거리낌 없이 종알댄다. 제 말에 저도 재미가 난 듯하였다. 그는 더욱 신이 났다.
 
73
"옥문 밖에 썩 나서니 반가울사! 이 도령 ─ 이 도령이라께, 알뜰한 춘향 아씨가 꼬박이 등대를 합셨죠. 삼문 출도까지 하고 곡절이 붙어 만난 것보담는 대번에 만났으니 좀 반가웠을까? 호호."
 
74
명화는 명랑하게 웃었다 . 그러나 그 웃음에는 쌀쌀하게 개인 겨울날처럼 어덴지 톡톡 쏘는 가락이 있었다. 자지러지게 웃고 나더니 문득 웃음빛을 여미고 종주먹을 댈 듯이 따진다.
 
75
"그래, 점잖으신 댁 아씨께서 아모 까닭 없는 젊은 사내 출옥하는 데 영접을 나오실 듯해요? 구종도 안 데리고 단몸 단신으로 그 흉칙한 감옥을 찾아가실 듯해요? 그래 식전 꼭두에 귀하신 몸에 ─ 귀하시다 뿐야 ─ 찬바람을 쏘이실 듯해요? 그래 그 높으신 어른이 ─ 높으시다 뿐야 ─ 아모하고라도 한 자동차를 타실 듯해요? 천만에, 천만에, 땅이 거꾸로 설 노릇이지."
 
76
방문객은 웬일인지 되우 흥분해 간다. 그 도화색 뺨은 진당홍으로 변하였다.
 
77
"또 봐요. 내가 모르나. 까닭 없는 남자가 하필 남의 첫날밤에 뛰어 듭니까? 왜 남의 원앙금침에 칼자국을 냅니까? 이러고도 박병일 씨 부인 홍영애 씨를 잘 모르신다 하실 테요?"
 
78
여해는 생면부지의 어여쁜 방문객이 세차게 서두는 바람에 더욱 기가 꺾이었다. 과연 제 말마따나 그는 모든 것을 안다. 귀신과 같이 모든 사실을 샅샅이 안다. 그의 앞에서는 아모런 비밀이라도 숨기고 배기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앵도 같은 입술이 달삭거리는 대로 철철 쏟아지는 말의 폭포에 여해는 거의 깔아 눌리는 듯하였다.
 
79
"자, 다시 물어요……."
 
80
엄하고 씩씩하기 재판장과 같다.
 
81
"박병일 씨 부인 홍영애 씨를 잘 아시죠?"
 
82
'웬 여자가 이런 여자가 있는가!' 여해는 속으로 경탄하며 고개를 끄떡였다.
 
83
"친숙하게 아시죠?"
 
84
또 고개를 끄떡였다.
 
85
"두 분이 사랑을 하셨죠?"
 
86
아름다운 재판장의 얼굴은 찢어질 듯이 긴장한다.
 
87
"분명하죠?"
 
88
"……."
 
89
피고가 아모 표시가 없는 것을 보고 재판장의 얼굴은 살짝 풀리었다.
 
90
"그럼 묵인으로 인정합니다. 네?"
 
91
또 한 번 다지다가,
 
92
"제가 무슨 경관이나 되나베, 제법 문초를 하게, 호호호."
 
93
제 말을 남의 말하듯 하고 명화는 유쾌한 듯이 웃어버렸다.
 
94
입때껏 얼씬도 않던 어멈이 어디선지 톡 튀어 들어왔다.
 
95
"오늘은 손님이 다 오시고."
 
96
하며 그 볼통가지 같은 뺨에 생글생글 웃음을 띠운다. 손도(損徒) 맞은 사람처럼 위문객 하나 없던 환자에게 손님 온 것이 이상하기도 반갑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어름어름하다가 다시 나가더니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다.
 
97
명화는 일어났다.
 
98
"적적하실 테니 내일 또 와요."
 
99
뒤끝을 두고 수상한 방문객은 돌아갔다.
 
100
그 이튿날 어제 그맘때 명화는 정말 또 나타났다. 그 다음 날도 그맘때 찾아왔다. 그 다음다음 날도 그맘때 대어섰다. 그는 제 시간에 출근이나 하는 사람 모양으로 또박또박 거의 정확하게 시간을 지켰다. 이 꾸준한 방문으로 말미암아, 이 수상한 방문에 대한 의심이 도리어 봄눈 슬듯 사라지고 말았다. 인제 와서는 아니 오는 것이 도리어 변이다. 조금만 시각이 늦어도 으레 올 사람이 안 오는 것처럼 기다려진다. 여해는 제 병실 앞을 지나가는 슬리퍼 소리를 헤이게까지 되었다.
 
101
'오늘은 안 오나?' 올 때가 너무 지난 듯하여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여해의 가슴은 겨울 바다와 같이 씁쓸하고 한 그믐밤처럼 어두웠다. 그러나 이것은 여해의 시간에 대한 착각이었다. 점심을 먹고, 식후 삼십 분 약을 먹고, 누워서 고시랑거리노라면, 처음 찾던 그 날의 그 시각에 병실 문은 언제든지 바시시 열리었다. 죄이던 여해의 맘은 누그러지며 갑자기 환하게 밝아진다.
 
102
막막하고 캄캄하던 그의 가슴에 명화의 얼굴은 마치 태양과 같이 떠오른 것이었다. 쓸쓸한 병상의 사막에 그의 향기는 오아시스의 샘물처럼 흘렀다.
 
103
구슬같이 구으는 그의 말낱은 지옥에 잘못 떨어진 선악(仙樂)과 같이 떠돌았다. 방문의 까닭을 물을 겨를이 있느냐, 방문의 목적을 캘 필요가 있느냐!
 
104
명화는 또 결코 빈손을 들고 오지를 않았다. 그는 번번이 과실과 과자의 꾸러미를 잊지 않았거니와, 곰살궂게 갖은 음식도 해 들리고 왔다. 장조림, 볶은 고추장, 김치 깍두기, 생선 찌개 등 환자의 비위에 당길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 들이었다. 홑으로 지나치는 남남끼리의 위문의 정도를 넘어 가족적으로 살뜰하고 정답고 친숙해졌다. 그는 제가 가지고 온 음식을 여해 가 맛나게 먹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그는 안해가 남편을 위하듯, 누이가 오라비를 위하듯, 자상스런 간호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보드랍고 따스한 여자의 간호의 손! 이것이 환자에게 얼마나 위안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은 겪어 보지 못한 , 이의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다. 더구나 여해와 같은 경우에랴.
 
105
그들의 화제(話題)는 가지각색이었다. 첫날에는 그렇게 후벼 파낼 듯이 영애와의 관계를 캐고 물었으되 이마적엔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는다.
 
106
여해와 영애의 야릇한 관계가 그 때 잠시 그의 흥미를 끄을었을 뿐이요, 시방은 씻은 듯이 잊어버리기나 한 듯하였다. 그것보담도 여해의 병이 하로 하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 더 중대하고 재미스러운 듯하였다. 물론 이것이 첫째로 화제에 올랐다. 그 다음으로는 그날 그날 명화의 겪은 긴 사설 잔사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대로 옮기었다.
 
107
그는 숨기고 감출 줄은 꿈에도 모르는 듯하다. 무엇이든지 훨훨 털어 내놓는 듯하다. 속옷까지라도 발가벗고 서라면 설 듯하다. 오장육부라도 내어 보일 듯하다. 이따금 빈정거리고 비꼬는 가락이 섞이기는 하였으되 그의 말은 조금도 찔리지 않고 척척 구격이 맞아떨어졌다. 허튼 사랑 얘기, 흐무러진 잠속 얘기, 멋없이 덤비는 사내, 십년일득으로 어째 요릿집에 한번 와서 기생을 불러 놓으면 아주 제가 젠 체하고 곤댓질을 하는 사내, 얄미운 동무, 망나니 명사, 눈치코치도 모르는 주정뱅이! 가지각색 인물들이 과장된 성격과 쑥스러운 행동으로 만화(漫畵)와 같이 희극과 같이 명화의 입길에 오르나리었다.
 
108
여해는 못난이처럼 입을 헤벌리고 요술쟁이의 보자기같이 폈다 움츠렸다 하는 명화의 입술에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 말은 털끝만치도 뒤에 남는 것은 없었다. 불어 지나치는 봄바람과 같이 스칠 때엔 따스하기도 하고 시원스럽기도 하지마는, 지난 뒤에는 잡아낼 건덕지가 없었다.
 
109
아모튼지 여해와 명화는 흉허물 없이 하로하로 무간해졌다.
 
110
"또 오는구려."
 
111
하고 여해가 빙그레 웃으면서 농담까지 붙이게 되었다.
 
112
"그럼 오지 말아요?"
 
113
하고 명화는 들어오던 발길을 멈추고 토라진다. 몸을 돌쳐 휘적휘적 도로 나가다가 문 손잡이를 잡고 여해를 돌아보며,
 
114
"안녕히 계셔요."
 
115
아주 새침하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나붓이 숙여 보이었다.
 
116
번연히 작난인 줄 알면서도 여해의 심장은 까닭 없이 소리를 내며 뛴다.
 
117
그는 허겁지겁 가지 말라는 뜻을 손을 내어저어 보이었다.
 
118
"언제는 또 오느냐고 핀잔을 주시더니……."
 
119
거슴츠레한 눈을 이윽히 깔아 메치다가,
 
120
"에라 고만둬라. 그만 일을 탄할 내냐!"
 
121
하고 홱 몸을 돌리며 달음박질을 친다. 훌훌 나는 듯한 그 홀가분한 몸은 기름같이 여해의 품속으로 뛰어들 것 같았다. 그러나 명화는 침대 앞 동근 의자에 주저앉고 만다.
 
122
여해의 얼굴 위에 가장 가까운 동안을 띠어놓고, 명희는 제 얼굴을 갸웃이 얹었다.
 
123
"오지 말라신다고 아니 올 내가 아니랍니다. 한번 아시기가 실수시지! 아세요, 진 날에 개 사귀는 것. 인제 진저리 먼저리가 나도록 올 터예요. 알아 차려요."
 
124
살짝 눈을 흘기고 여해 얼굴 위에 디밀었던 제 얼굴을 물리어내며 제 혼자 때굴때굴 웃었다.
 
125
"와요, 자꾸 와요."
 
126
여해도 흐뭇한 듯이 웃었다.
 
127
"자꾸 와도 좋아요?"
 
128
"좋구 말구!"
 
129
"에그머니나! 정분 나셨군! 남 들으면 수상쩍겠네."
 
130
"수상쩍을 게 뭐람?"
 
131
"젊으신 환자가 기생더러 자꾸 오라니까 그렇지요. 병원에 큰 소문 나셨구먼."
 
132
"무슨 소문?"
 
133
"왜 딴전만 해요? 아는 것도 모르는 척, 모르는 것은 모르는 척, 왜 멍청인 척을 하셔요?"
 
134
"멍청인 척이 아니라 정말 멍청인 것을 어떡하오?"
 
135
"말솜씨 느셨네!"
 
136
명화의 말은 다 옳았다. 여해는 인생의 청춘의 싹이 트려는 가장 귀중한 세월인 오 년 동안을 쇠창살 밑에서 보낸 까닭에 정말 멍청이가 되었다. 무덤 속에서 기어 나온 사람 모양으로, 이 세상의 말까지 잊어버린 듯하였다.
 
137
외국 사람이 조선말을 처음 배운 것같이 첫째 '허우'와 '허게'와 '해라'의 구별조차 잘 서지 않았다. 명화는 그에겐 위대한 어학 교사이었다.
 
138
그 능갈스럽고 영절스런 자유자재한 말씨는 제자로 하여금 짧은 동안에 놀랄 만한 진경(進境)을 보이게 하였다.
 
139
과연 여해의 말솜씨는 엄청나게 늘었다.
 
140
"참 정말, 병원에 소문 났겠어. 기생년이 날이 날스금 찾아온다고."
 
141
명화는 그 유달리 숱 많은 눈썹을 찡그려 보인다.
 
142
"소문 나면 걱정인가?"
 
143
"나는 노는년이니 걱정이 없다지만, 선생님이 걱정이시지."
 
144
"내야말로 무슨 걱정?"
 
145
"왜 걱정이 없단 말씀이오? 첫째 신분이 깎이실 테고."
 
146
신분이란 말에 여해는 픽 웃었다. 깎일 신분은 다 깎인 지가 오래가 아니냐.
 
147
"그리고 또 둘째는?"
 
148
"둘째가 아니라, 참 이게 첫째가 되겠군. 첫째 옛날 애인님 귀에 들어갈 양이면 큰일 나지."
 
149
'큰일 나지.'란 마디를 거문고 줄 올리듯 안 목을 빼어 길게 굴린다. 그리고 정말 큰일이나 난 듯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혓바닥을 말아 휘휘 둘러 보이었다. 오래간만에 영애의 얘기가 나왔다.
【원문】수상한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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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기본
  # 적도 [제목]
 
  현진건(玄鎭健) [저자]
 
  1933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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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소설(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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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