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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도 (赤道) ◈
◇ 지난 일 ◇
카탈로그   목차 (총 : 22권)     이전 9권 다음
1934
현진건
1
명화는 부리는 계집애에게 이불을 해 들리고 그 날은 저녁에도 왔다.
 
2
"오늘은 특근예요."
 
3
문을 열기가 바쁘게 명화는 외치었다. 그 목소리는 곡경에 든 동무에게 너를 구해낼 내가 여기 왔으니 염려 말라고 선통을 해줄 때 부르짖는 듯한 소리였다. 그 말 속에는 내 없는 동안에 어찌나 되었나 조바심을 하고 종종걸음을 쳐서 목적지에 득달한 사람과 같이 한숨을 내어 쉬는 듯한 안심과 기쁨도 흘렀다.
 
4
육중한 담요이불은 벗겨내었다. 옥양목 호청을 새로 시친 모본단 솜이불은 가지고 온 주인의 마음과 같이 가볍고 부드럽고 따스하였다.
 
5
여해는 가슴에 지질렸던 바위덩이가 치워진 듯이 시원하였다. 시포와 같이 흉물스럽게 희고 시즙과 같이 약 방울로 얼룩이 진 병원 이불! 그것은 환자의 기분을 구름장과 같이 흐리게 하였던 것이었다. 모란꽃 송이가 둥실둥실 떠도는 듯한 불빛 같은 새 이불은 봄볕을 담쑥 안은 백화난만한 꽃동산을 고대로 떼어온 듯이 번화하고 명랑하고 향기로웠다.
 
6
여해는 훌훌 날 듯이 몸이 가뜬해지며 침울하던 마음은 가벼워졌다.
 
7
"인제 좀 따스하셔요?"
 
8
명화는 이불을 따둑따둑하며 물었다.
 
9
여해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0
"아이 참, 그 고개짓만 제발 하지 마셔요. 남 갑갑하게. 왜 시원스럽게 말씀을 못해요?"
 
11
"따스합니다. 대단히 따스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12
여해는 가볍게 웃을 수 있었다.
 
13
"누가 그런 치하 듣쟤요?"
 
14
하고 명화는 골이 난 것처럼 이불을 따둑거리다가 말고 침대 앞에 와서 앉는다.
 
15
"이 이불이 어떻게 이렇게 가벼운가, 몸이 날 것 같은데!"
 
16
여해는 벙글벙글한다.
 
17
"듣기 싫어요, 듣기 싫대도 그러시네."
 
18
명화는 두 귀를 손가락으로 꼭 틀어막고 고개를 짤레짤레 흔들어 보인다.
 
19
그 얼굴은 웃음에 흔들린다. 그는 환자가 농지거리를 하게 된 것을 기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듯하였다. 기태나 깔깔거리며 침대에 상반신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20
"이 좋은 이불을 한 자락 덮어 드릴까? 정말 혼자 덮기는 아까운데."
 
21
아이 선생님도 " , 아이, 선생님도. 아이, 선생님도 음충스러워라!"
 
22
명화는 낄낄거리며, 머리를 쳐들었다.
 
23
"선생님? 내가 내가 무슨 선생이오? 선생님, 선생님 하게."
 
24
여해는 티를 뜯었다.
 
25
"그럼 뭐라고 불러요. 아주 영감이라고 떠받쳐 드릴까?"
 
26
명화는 또 자지러지게 웃었다.
 
27
"천만에! 영감은 더구나 가장 부당."
 
28
"그럼 뭐라고 말해요? 시쳇말짝으로 '김 상' 할 수도 없고, '여해 씨' 하자니 애숭이 여학생의 애인 부르는 것 같고, '선생님'이 그저 수수하잖아요?"
 
29
"내게 선생님이란 얼토당토않은 말."
 
30
"그예 영감이라고 불러 달라시는 말씀이구먼. 요마적엔 모두들 선생님예요. 손님이면 다 선생님이랍니다. 장사치도 선생님이고, 노름꾼도 선생님이 고, 부랑자도 선생님이고! 선생 아닌 건 기생뿐예요. 그것도 무슨 시변이야. 인제 영감이란 말은 어째 케케 낡아빠진 듯해요."
 
31
"그 흔한 선생님 중에 나도 한몫 끼라는 말이나, 나는 그런 자격이 없소."
 
32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린담?"
 
33
"내게는 제일 좋은 이름이 붙어 있지요, 알으켜 드릴까?"
 
34
"뭐예요? 뭐예요?"
 
35
명화는 채쳐 물었다.
 
36
"전과자!"
 
37
"아이, 흉해라. 왜 그런 말씀을 하셔요?"
 
38
"오늘은 놀음에 안 가오?"
 
39
여해는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는 무슨 큰일이나 난 듯이 눈을 커다랗게 떠서 명화를 보았다. 그는 명화에게 여러 번 들어서, 기생 속을 대강은 짐작한다. 놀음이란 그들의 생명인 줄 안다. 놀음채도 놀음채려니와, 기생의 치수가 나가고 못 나가는 것도 이 놀음이 잦고 뜬 데 달린 것까지 안다. 놀음에 안 나간다는 것이 여간 큰마음이 아닌 줄 잘 안다.
 
40
과연, 놀음에 간다는 것은 그들에게 여해의 생각 이상으로 더 중대한지 모르리라. 무엇보담도 그것은 그들의 분홍빛 생활에 꿈결 같은 행운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고래등같은 개와집과 기름 흐르는 논과 밭과 혼란한 옷감과, 번쩍이는 패물들! 그들의 원하는 모든 것이 놀음 가는 인력거 채 앞에서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며 둥실둥실 떠도는 것이었다. 손님 한 번만 잘 만나면 쉽사리 일생을 꽃으로 꾸밀 수 있지 않으냐. 한 번 놀음에 안 간다는 것은 이 안타까운 희망을 한 번 단념하는 것이다. 이 아까운 한 차례의 행운을 내버리는 것이다.
 
41
명화는 여해의 묻는 말에 고개만 짤레짤레 흔들어 보이었다.
 
42
"왜 오늘은 안 가오?"
 
43
여해는 채쳐 물었다.
 
44
명화는 간단하게,
 
45
"안 가요."
 
46
"왜?"
 
47
"온 다심도 하시네. 왜는, 그저 안 가지."
 
48
"그저 안 가다니?"
 
49
"안 가면 어때요 뭐!"
 
50
"왜 안 간단 말이오? 이불 가져온다고 못 갔구려. 괜히 나 때문에."
 
51
"왜, 선생님 때문에……."
 
52
"내 때문이 아니고 뭐요? 정말 미안……."
 
53
"에이 쓸데없는 말씀 작작해요. 내가 가기 싫으니 안 갔지, 왜 선생님 탓예요?"
 
54
"그러면 내 탓이 아니고……."
 
55
"하로쯤 안 가면 어때요? 뭐."
 
56
"왜 하로라도 안 간단 말이오?"
 
57
"하로 안 가면 굶어죽을 줄 아세요, 걱정도 팔자시지."
 
58
명화는 떠다 박지르는 듯이 여해의 말을 막아 버렸다. 여해는 휘 한숨을 내어쉬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59
"왜 눈을 감으세요, 왜 또 눈을 감으세요?"
 
60
명화는 질색을 하며 환자의 머리를 짚고 가볍게 흔들었다. 아까 한기로 더 홀쭉해진 듯한 얼굴과 관자놀이에 뛰는 맥을 근심하면서, 여해는 다시 눈을 떠서 물끄러미 명화를 바라보았다. 명화는 그 사나운 듯하던 눈길이 어쩌면 저렇게 부드러운가, 하고 내심으로 놀래었다. 그 눈길은 한없이 부드러운 가운데 뜨거운 김이 서리는 듯하였다. 명화는 애욕에 불타는 눈동자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이런 눈길은 처음 보았다. 그것은 홑으로 사랑에 타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감사의 뜻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슬픔에만 젖은 것도 아니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그 눈길!
 
61
그것도 마치 녹아 나리는 쇠끝과 같이 제 마음을 지지며 스며드는 듯하였다.
 
62
여해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 한 방울이 구을러 떨어졌다.
 
63
명화는 재바르게 손수건을 꺼내어 여해의 눈물을 씻어 주었다.
 
64
"상심 마셔요, 네?"
 
65
명화는 우는 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며 위로하였다.
 
66
웬일인지 제 목도 메이는 것을 느끼었다.
 
67
여해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와 하고 눈시울로 몰려드는 듯하였다.
 
68
"왜 이러셔요? 우지 마셔요. 같잖은 세상에 이루 상심을 하면 무엇해요?"
 
69
명화는 제 인생관을 한마디 일러 듣기었다. 그는 여해가 이렇게 우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하였다. 그 사나운 눈썹과 쭉 다문 입에서 이렇게 단순하고 천진스러운 울음이 나올 줄은 정말 뜻밖이었다. 좔좔 순탄하게 흐르는 눈물과 삐쭉거리는 입은 여불없이 어린애와 같았다.
 
70
"그러지 말래도 그러시네. 상심을 하면 몸에 해로우세요. 글쎄. 사내 대장부가 울 일이 무에요? 나도 설운 일이 하도 많지만, 이렇게 안 울고 견딘답니다."
 
71
명화는 이 다 큰 아기를 달래었다. 여해는 더욱 느낀다.
 
72
"선생님도, 선생님도 딱도 하시네. 몸에 해로우실 텐데, 제발 고만 끈 치셔요. 네, 선생님."
 
73
명화는 여해의 목을 껴안는 듯이 하고 흔들었다. 솟아오르는 눈물을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74
여해는 꿀꺽꿀꺽 울음을 멈추려고 애를 쓴다.
 
75
"세상에, 세상에."
 
76
하고 여해는 울음을 들여 마신다.
 
77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은 남이 되어버리고, 생면부지한 이에게 이런 지극한 간호를 받을 줄이야 뉘 알았겠소?"
 
78
"지극히 사랑하는 이와 짝이 될 말로야, 세상에 슬픈 일이 왜 있겠어요?
 
79
흥."
 
80
명화도 우는 이의 얼굴을 휩쌌던 팔을 슬며시 풀며, 수건으로 제 눈을 꼭꼭 찍었다. 여린 그의 눈은 눈물이 고인 지 벌써 오래였다. 그는 젖은 눈을 섬벅섬벅하며 멍하니 유리창을 내다본다. 그도 사랑하는 이가 짝이 못 되고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설워함인가. 이윽고 명화는 말그스럼해진 콧잔등을 찡긋찡긋하며 물었다.
 
81
"지극히 사랑하시던 이가 누구예요?"
 
82
"누구는, 홍영애지."
 
83
"입원하신 후 한 번도 안 왔어요?"
 
84
"올 리가 있소?"
 
85
"어쩌면! 매정도스럽군. 참, 첫날밤에 칼부림을 하셨다니 어찌 오기를 바라요?"
 
86
"흥, 첫날밤의 칼부림! 그것도 제 얼굴을 보기 때문에 쑥스럽기만 되었소."
 
87
"그의 얼굴을 보실 테면, 무슨 짝에 첫날밤에 칼을 들고 가셨어요?"
 
88
여해는 상반신을 벌떡 일으킨다. 피가 벌컥 거꾸로 흐르는 듯이, 눈물 젖은 얼굴에 확 불이 이는 것 같았다.
 
89
"그러기에 말이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도 없는 일이오. 차라리 그 때 한칼로 박병일을 죽여 버리고, 그 칼로 나도 죽어 버렸다면 좋을 것을!"
 
90
"그분들은 어데 가만히 있어요?"
 
91
"가만히 안 있자도 별수도 없었소. 내 왼손에 박병일의 멱살은 잡히었소.
 
92
그자는 사내답지도 않게 멱살을 잡힌 채 벌벌 떨고만 있었소. 내 오른손에 번쩍 칼을 들었으니, 그 목숨은 내 손 한 번 움직이는 데 달렸소……."
 
93
명화는 전번 명월관에서 병일에게 들은 것과는 사실이 엄청나게 틀리는데 놀래었다. 같은 사실도 두 입을 거쳐 나오면, 이렇게 정반대로 변해 버리는가. 두 말 중에 어느 것을 믿어야 옳을까? 한다하는 신사의 말을 믿을 것인가, 전과자의 말을 믿을 것인가?
 
94
"그래, 어떡하셨어요?"
 
95
명화는 침을 삼키며 채쳤다. 여해의 흥분된 목소리는 떨리었다.
 
96
"막 칼을 나리치려 할 때요. 그야말로 위기일발이었소. 그 순간에 나는, 나는 아니 볼 것을 보았소……."
 
97
명화는 손에 땀을 쥐었다. 공든 탑은 과연 무너지지 않는다. 그의 공들인 보람은 필경 나타나고야 만 것이다. 이야기는 그가 알아내려고 애쓰던 비밀의 구렁텅이로 깊이 구을러 들어갔다.
 
98
"그 순간에 나는 신부를 보았소."
 
99
여해는 말끝을 이었다.
 
100
"눈빛 같은 흰 너울을 두른 신부를 보았소. 눈 속에 피어난 한 송이 장미화 같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신부를 보았소. 전날 내 사랑을 보았단 말이오.
 
101
생기를 잃고 새파랗게 질린 그 얼굴, 꾸짖는 듯한 원망하는 듯한 그 눈을 보았소. 그 눈을 보는 순간 내가 방금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하려 하는구나, 세상에도 악착한 일을 범하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떠올랐소.
 
102
내 가슴은 곧 터질 것 같았소. 칼 든 내 손은 부들부들 떨리었소. 손아귀 힘이 탁 풀리었소 . 칼은 쟁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소."
 
103
여해는 숨길을 돌린다.
 
104
"무척 반했구만, 그야말로 외기러기 짝사랑, 흥."
 
105
명화는 코웃음을 쳤다.
 
106
"아니오, 아니오. 그렇게 말할 게 아니오."
 
107
명화의 말을 막는 여해의 목소리는 엄숙하다.
 
108
"칼을 떨어뜨리는 그 순간, 내 마음은 무에라 형용할 수가 없었소. 내 생명보담 더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도 하였소. 그 대신 세상에도 거룩한 것, 세상에도 깨끗한 무엇을 얻은 듯도 하였소. 한옆으로 섭섭하고 안타깝고 슬프기는 하였지만, 한옆으로는 아츰 결에 해 떠오르는 것을 볼 때처럼 속이 환해지는 듯하였소."
 
109
"그래, 곧 달아나셨습니까?"
 
110
"달아나기는 왜요? 그 때가 새벽 두 시나 가차이 되었으니, 호텔 안도 괴괴하거니와, 한길에 사람의 발자최도 드물었소. 나를 본 사람은 아모도 없었소. 나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비틀걸음을 쳤소. 아모 의미 없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소. 한동안 길거리를 헤매다가, 날이 밝은 연에야 내 하숙으로 돌아왔소."
 
111
"어쩌면 피신도 않으시고."
 
112
"그때 내 나이 갓스물이었소. 무엇을 아오? 정말 천둥 벌거숭이였소. 내한 짓이 죄가 되리라고는 몰랐구려. 법에는 걸리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구려. 도리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을 해내었다. ─ 속마음으로 기뻐하였소.
 
113
용서 못할 것을 용서한 내 자신이 돋보이고 비장하였소. 마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이 내 자신이 비참하면서 거룩하게 보이었소. 「장한몽」에 나오는 이수일이보담 내가 더 높은 사람 같고, 더구나 베르테르의 번민보담 내 번민이 더 큰 것 같았소. 칼을 가지고 간 것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소.
 
114
그자를 혼떨음을 낸 것이 유쾌해서 그 떨던 꼴을 생각하고 이따금 혼자 웃었소."
 
115
"그럼 그 날로 잡히신 건 아니구먼."
 
116
"그런데 그 이튿날 신문을 보고 나는 놀래었소. 그 어마어마하게 큰 활자를 보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소. 그게 하상 대사라고 이렇게 떠들어놓았을까. 나는 그 전까지 신문에 오르는 사람이면 놀라운 인물이고, 거기 나는 기사는 정말 굉장한 사실인 줄만 알았소. 내 한 일이 이렇게 날 줄은 참으로 뜻밖이었소. 게다가 그게 모두 거짓말이구려. 칼을 슬쩍 병일에게 대다가 말았는데, 입원을 했느니 선혈이 임리했느니, 나는 하숙에 가만히 있어도 잡으러 오지도 않는데 무슨 경찰에서 대활동을 하느니,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놓았구려. 나는 처음엔 코웃음을 치고 그 신문을 동댕이를 쳤소. 그래도 어쩐지 마음이 키어서 내버린 신문을 주워다가 다시 보고 또 보고 하는 동안에 번연히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어쩐지 그 신문이 믿어지는구려. 내가 한 노릇이건만, 그 기사가 정작 참말 같아지는구려. 병일이가 과연 중상을 당해서 죽지나 않았나 염려스럽고 영애가 좀 슬퍼하랴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나는 한걸음에 병일이를 뛰어가 보고 싶었소. 나는 정말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소. 그러나 웬일인지 마음에 선뜩해서 가 보지는 못하였소. 꼼짝을 않고 하숙에 틀어박혀 있었소."
 
117
"그럼 순사 오기를 기다린 폭이구려."
 
118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내 하숙에는 순사의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소. 신문만 갈수록 흥캄을 떠는구려. 무슨 혐의자가 셋이 잡혔네, 넷이 잡혔네, 나종에는 진범인이 잡혔다고까지 났구려. 나는 날마다 신문을 보고 마음을 죄었소. 나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고생들을 하는구나 하매 안절부절을 못 하였소. 그래, 견디다 못해 내 발로 경찰서에 걸어갔소. 기가 막혀……."
 
119
하고 여해는 지난날의 제 행동을 어이없다는 듯이 쓸쓸하게 웃었다.
 
120
"저런! 그러면 경찰에 자현을 하셨구려, 그것은 왜……?"
 
121
명화는 눈썹을 모으며 딱해 한다.
 
122
"아까도 말했거니와 그 때 내 나이 갓스물이었소. 제 발 뺄 생각은 꿈에도 없었구려. 그 날 밤에 조선호텔에 들어간 사람은 내로라 하면 경찰이 벌컥 뒤집힐 극적 광경을 생각하고, 까닭 없이 흥분하였소. 제가 지은 죄도 없는데 죄 많은 무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도 있는데, 내 지은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안연히 있으랴! 이런 빙충맞은 생각이 들었소. 하롯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나는 아츰 일찌감치 경찰서엘 갔소."
 
123
"에그머니나! 뒷생각은 조금도 않으셨구료."
 
124
"앞뒤 생각이 있을 리 있소? 더구나 우스운 것은 내 한 일이 그리 큰 죄가 될 줄 모른 것이오. 경찰에 가서 쫙 말만 하면 애꿎은 잡힌 사람들도 다 나오려니와 나도 무사할 줄 어렴풋이 짐작을 했구려."
 
125
"무슨 말을 어떻게 하시려고?"
 
126
"지금 생각하면 그게 더 우습지요. 어떻게, 어떻게 말을 할 것은 생각지 않고 덮어놓고 그저 조선호텔에 들어가서 박병일을 찔르려다가 만 경과를 사실대로 말하면 고만인 줄 알았소. 왜 찔르게 되었느냐, 왜 찔르려다가 말았느냐, 이것은 경찰에서 물으려니 생각도 하지 않았소. 참 어처구니도 없지."
 
127
"물으면 대수예요? 바른 대로 말만 하면 고만 아녜요?"
 
128
"그런데 당하고 보니 바른대로 말하랴 할 수가 없게 되었구려. 첫째, 영애와의 사이를 말을 해야 될 것 아니오?"
 
129
"참 그렇구만, 첫째, 애인이 치이시겠군요."
 
130
"이게 죽어도 말을 하기 싫구려."
 
131
"애인 낯이 깍이실 테니까."
 
132
"낯 깎이는 문제가 아니요, 내게는 정말 생명에 관한 문제이었소. 이 목숨이 끊어질지언정 그의 말을 어찌 입밖에라도 내랴! 턱없는 대결심을 하였소. 내 청춘의 감격과 슬픔과 행복을 고이고이 담아둔 이 거룩한 비밀을 누구에게 발설을 하랴! 안 될 말이었소. 하늘이 무너져도 안 될 말이었소."
 
133
"그래, 어떡하셨어요?"
 
134
"그야말로 혀를 깨물고 말을 하지 않았소."
 
135
"말을 안 하신다고 경찰에서 그 눈치를 모를까요?"
 
136
"왜 모르기는. 대번에 묻는 말이 그 말이었소. 신부와 사랑을 하였느냐, 관계를 하였느냐, 미주알고주알 캐고 물었소."
 
137
"아모리 하긴들 경찰에서 그걸 몰라요?"
 
138
"알다 뿐이오? 뻔히 아는 것을 숨기랴 하니 더욱 우습지요. 허."
 
139
여해는 제 말을 남의 말하듯 하고는 쓴웃음을 뱉았다.
 
140
"그래, 어떻게 되셨어요?"
 
141
"어떻게 되기는 살인 미수, 강도 미수, 제령 위반으로 오 년 징역을 살게 되었지요."
 
142
"에그 저런."
 
143
"그게 내 운명이라 할는지……."
 
144
하고 여해는 교묘하게 얽힌 지난 일의 실마리를 풀려는 것처럼 눈을 멍하게 뜬다.
 
145
"뻐언히 아는 노릇인데 어째 딴 죄목이 튕겨져 나왔어요?"
 
146
명화는 잼처 물었다.
 
147
"그것도 철부지한 내 탓이지요. 아모튼지 영애와의 관계를 끝까지 잡아뗐으니까요."
 
148
"아모리 잡아뗐다기로서니……"
 
149
"그래 경찰에서도 처음에는 나를 정신병자로 알고 내어보내기까지 하려 하였소. 그러나 호텔에 떨어진 칼이 분명 내 칼이고, 그 칼을 산 상점까지 판명이 되었으니 범인은 적실히 진범인데 범행 동기만 좀 미분명한 점이 있었을 뿐이오. 그래 증거 수집에 형사대가 떠서게 된 모양이오. 그래 내가 기미년에 붙들려갔다가 기소 유예된 사실이 드러나고, ○○신문 배달하던 것까지 다 들추어 나오고, 영애의 결혼하던 전 해 겨울에 봉천에 갔던 것도 비어져 나오고, 내게 관한 나도 모르는 모든 사실이 나타났소. 그래 치정 관계라고 보던 내 사건은 시국 관계의 중대성을 띠이게 되었소. 필경엔 영애하고 대면까지 시키게 되었소."
 
150
"홍영애하고요? 그래, 그이는 무에라고 했어요? 첫날밤에 들어온 사람이 분명하다고 했겠구려, 흥."
 
151
명화는 쌀쌀하게 비웃었다.
 
152
"아니오, 내가 그 범인이 아니라고 잡아떼었소."
 
153
"그러면 그렇겠지. 그러면 놓이시게 되셨구려."
 
154
"말이 되오? 진범인으로는 벌써 점을 찍어둔 지가 오래이었던 모양이오."
 
155
"그러면 왜 새삼스럽게 영애 씨를 대면을 시켜요?"
 
156
"그 때에는 나 역시 웬 속셈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진범인 인지 아닌지 영애에게 감정을 시켰다는 것보담 두 사람의 기색을 살펴보려고 한 짓 같소. 영애가 영절스럽게 부인을 하니까, 경찰도 좀 당황해 하는 눈치였소."
 
157
"왜요? 그래도 기연가미연가해서 그런 게지요?"
 
158
"아니지요. 치정 관계인가, 시국범인가, 두 가지를 의심하게 된 모양인데, 영애가 딱 부인을 하니까, 둘의 관계는 분명히 깊었던 줄 노린 것이오.
 
159
그렇게만 단정을 한다면 시국 관계가 또 미궁으로 들어가게 되어 갈팡질팡한 것 같소."
 
160
"그러면 숨기려던 두 분의 관계를 광고한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구먼요.
 
161
아이 딱해라."
 
162
"그래도 치정 관계는 쑥 빠지게 되었으니 이상치 않소?"
 
163
"그건 또 웬일예요?"
 
164
"일이 공교롭게 되자면, 귀신도 생각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 법이오. 박병일을 여러 번 임상 심문인가 하고 나종에는 경찰에도 여러 차례 불러다가 물어 본 모양인데 거기서 사건을 결정하는 중대한 증거가 나타났소."
 
165
"무슨 증거?"
 
166
명화는 놀랜 듯이 눈을 호동그랗게 떴다.
 
167
"병일이에게는 큰 부자구 하니까 해외 단체로부터 협박장이 여러 장 왔던 모양이오. 이걸 경찰에 숨기고 있다가 이번 통에 자기가 내놓았는지 또는 경찰에서 뒤져내었는지 모조리 드러난 것 같소. 그 중에 한 장이 내 필적과 꼭 같구려 나는 멋모르고 . 쓰이는 대로 글씨를 여러 번 써 보였는데 내 필적과, 그 군자 모집의 협박장 필적이 영락없이 꼭 같구려. 이런 기가 막힐 일이 있소?"
 
168
"아!"
 
169
명화는 가볍게 외마디 소리를 쳤다.
 
170
잠차지게 이야기가 오고 가는 바람에 시간은 날개가 돋친 듯 날아갔다. 문병 온 사람을 내어쫓는 종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었다. 명화는 종소리를 듣고도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원문】지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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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