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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록 (西槎錄) ◈
◇ 1902년 6월 ◇
카탈로그   목차 (총 : 6권)   서문     이전 4권 다음
1902. 7
이종응(李鍾應)
1
6월 1일 (4. 25) 흐림
2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들까불었다. 270리를 항행했다.
 
3
6월 2일 (4. 26) 흐림
4
풍랑이 크게 일어났다. 235리를 항행했다.
 
5
6월 3일 (4. 27) 흐림
6
풍랑이 매우 심해서 배가 파도에 휩쓸려 들까불었다. 산더미 같은 성난 파도가 몰려와 배에 부딪치면 파도는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가 소나기처럼 배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그래서 타루(갑판) 위로 사람이 올라 갈 수 없다. 245리를 항행했다.
 
7
6월 4일 (4. 28) 맑음
8
바람은 어제보다 조금 약해졌지만 파도는 여전히 사람을 애먹였다. 오후 2시에 비가 지나고 부터 바람은 한결 안정되었다.
 
9
6월 5일 (4. 29) 흐리다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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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2시에 아일랜드(愛一暖, Ireland) 항구를 통과했다.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에게 도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오후 8시에 리버풀(늬버풀, Liverpool) 항구에 도착했다. 주영공사 참서관(參書官) 이한응(李漢膺, 應)과 영국 외부 참서관 「포션븨」가 영접나왔다. 「아들븨」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대내(大內)로 영국 도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11
6월 6일 (5. 1) 맑음
12
오전 9시에 기차를 타고 오후 2시에 런던(倫敦) 정거장에 도착했다. 영국 장례원경(掌禮院卿)이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황실 마차를 이끌고 나와 우리를 영접했다. 매우 정답고 친절하게 악수하면서 「원쓰민씨터필네」(웨스트민스터 궁전호텔) 여관으로 인도한 뒤에 돌아갔다. 주영공사 민영돈과 참서관 오달영(吳達泳, 榮) 주사 이기현(李起鉉) 유학생 윤기익(尹基益)등이 와서 반나절 동안 환담을 나누다가 돌아 갔다. 영국 명예영사 모건(W. Pritchard Morgan, 摩賡)이 내방했다.
 
13
6월 7일 (5. 2) 흐리고 비
14
대개 서양 풍속에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서 각국의 친왕(親王)과 경축사절단이 도착하면 정부에서 큰 호텔을 빌려 빈관(賓館)을 만들어서 음식범절 일체를 공급하는데, 외국 사절단을 위한 연회가 끝나면 철거한다. 영국 해관에서는 우리의 짐(行李)에 대해 통관 면세조치를 취해주니 이는 우리 사절단에 대한 우대하는 예우이다.
 
15
6월 8일 (5. 3) 흐리고 비
16
오후 6시에 우리 일행 네 사람은 공사관으로 가서 저녁을 먹은 후 빈관으로 돌아와서 우거했다. 주아공사(駐俄公使) 이범진(李範晋)의 편지를 받았다.
 
17
6월 9일 (5. 4) 흐리고 비
18
오후 3시에 우리 네 사람은 영국 주재 한국공사 민영돈과 함께 마차를 타고 유람했다. 대로상에 층루고각이 우뚝 솟아 있어서 티끌 세상을 벗어난 것 같다. 수십 길이나 되는 돌절벽이 한치의 오차없이 가지런히 서로 비슷하게 연달아 세워 놓은 것 같다. 여관의 객실(客棧)은 궁궐 규모와 비슷하고 도로에는 반석을 깔아 놓았다. 사람들은 어깨가 서로 부딪치고 수레 바퀴가 서로 닿으니 옛날 임치(臨淄, 전국시대 齊나라 수도)도 이보다 낫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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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도로상에 길을 가는데도 법도가 있고, 큰 도로 한 가운데로 마차가 왕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좌우의 돌계단 위로는 보행하는 사람들이 다니고, 길을 건너가려는 사람들이 길가 표지기둥(標柱) 아래에 서있으면 순사(巡査)가 큰 길을 향해서 손을 들고 손가락으로 마차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앞서가는 마차는 빨리 가게하고 뒤에 오는 마차는 서게 한다. 잠시 마차의 운행이 끊긴 후에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수레바퀴와 말발굽 아래 깔려죽는 사고가 허다하게 발생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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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가서 동물원에 이르렀다. 수목이 빽빽하게 줄을 서서 욱어지고 도로는 반듯반듯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꽃과 풀은 땅에 가득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다. 쇠로 만든 난간 우리와 망(網)안에는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며 갑각류 등 족속들이 모여 있어 한편의 금수부(禽獸簿)를 이루고 있다. 이를테면 영웅호걸같은 호랑이와 표범, 흉포한 사자와 곰, 사나운 무소와 코끼리, 건장한 낙타, 민첩한 원숭이, 그리고 해마(海馬) 돌고래 사슴 노루 여우 이리와 고양이 쥐 개구리 두꺼비에 이르기 까지 온갖 짐승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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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이 한개 달린 짐승이 있었는데 뿔끝에는 살이 달려 있고 꼬리는 소꼬리같고 발굽은 말발굽이요 몸크기는 소만해서 이 짐승을 기린(麒麟)이라 한다. 이 기린은 인도산이라는데 그렇다면 서방에도 성인(聖人)이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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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짐승의 족속으로는 원앙과 공작, 앵무새 물총새(翡翠)와 각 지방의 꿩 닭은 물론 산새와 물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연못 가운데 큰 암석이 있고 각종 물고기와 자라 등이 있었다. 암석을 뚫어 별도로 만든 연못에는 덩치가 큰 물고기 네 마리가 있었다. 이 물고기가 몹시 흉포하고 표독스럽기 때문에 따로 가두어 기른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네개의 발이 있고 눈 빛은 푸르고 붉은데 우리 감시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악어라 한다. 악어를 보고 한문공(韓文公, 韓愈, 韓退之)의 「제악어문(祭鰐魚文)」을 연상케 했다. 이 짐승을 길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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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마리 큰 구렁이가 있었는데 길이가 3,4칸(間)이 넘었고 허리는 기둥처럼 굵어서 몸빛깔은 오색이 찬란하며 눈빛은 횃불과 같았다. 오로지 살코기(肉類)만 먹으며 한번 배부르게 먹으면 6,7일간 잠만 잔다는 것이다. 이 뱀은 열대지방 산물이므로 추위를 타기 때문에 증기를 쐬주며 온도계를 달아 두고 우리 안 기온을 조절한다고 한다.
 
24
6월 10일 (5. 5) 흐림
25
우리 네 사람이 큰 거리로 나갔다. 어떤 보석상점(寶貝店)에 갔더니 금옥과 보석이 말과 되로 될 정도로 많고, 패물과 장난감 노리개(琓器) 수공예품 등 장신구들은 하도 기묘해서 귀신이 아니고서야 글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무릇 이와 같은 상점이 80여 곳이라고 한다.
 
26
오후 7시에 서커스장(觀戱臺)에 갔다. 누각은 굉장히 컸으며 5층이었다. 난간은 둥글기가 반달(半月)이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것과 같다. 금빛과 푸른 빛이며 붉고 파란 빛이 휘황찬란해서 사람의 안목을 아찔하게 했다. 수 천의 관람객들은 난간 안쪽에 단란하게 앉아 있었다. 앞에는 무대(技場)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음악이 번갈아 울려나오는데 웅장하고도 호방하면서도 맑고 밝았다. 수십명의 미녀들이 금은 보석으로 장식하고 쌍쌍이 나와 온갖 묘기를 보인다. 잠깐 앞으로 나왔다가 뒤로 물러가는가 하면, 혹은 몸을 폈다 굽혔다 하며 모여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흩어져도 산만하지 않아 무척 조리(條理)가 있었다. 노래 소리는 간드러져서 마치 천만가지 실버들 위에서 뭇 앵무새가 다투어 노래하는 것 같다. 춤추는 소매는 사뿐사뿐 봄바람에 복숭아와 오얏꽃 위에 나비들이 하늘하늘 어지러이 날아 다니는 것과 같다. 찬란한 은빛은 검광(劒光)이 번뜩이 듯 했는데 마치 배꽃이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지는 것 같다. 쇠소리가 짤랑짤랑 울리더니 이윽고 한 무리의 낭자군(娘子軍)이 무대에 등장했다. 앞뒤로 진퇴하는 군용(軍容)은 질서정연하니 이는 곧 적을 무찔러 이긴 기쁨을 같이 나누기 위한 것이었다.
 
27
얼마 후에 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나와 마주보고 서더니 갑자기 한 사람이 몸을 날려 상대편 사람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 갔다. 또 한 사람이 나와 두세번 왔다 갔다 하더니 불현듯 몸을 날려 뛰어 올랐던 사람의 어깨 위로 올라 섰다. 또다시 12,3세 가량 되어보이는 작은 아이가 나오더니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다가 문득 몸을 날려 맨 꼭대기에 선 사람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 섰다. 앞뒤로 뛰어 오르는 모습이 나는 새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과 같아서 정말 볼 만했다.
 
28
갑자기 무대가 바뀌면서 우뢰같은 바다 소리가 장내에 가득 차고 망망한 창파 위에는 윤선들이 좌우로 오가기도 하고, 혹은 평원 광야, 깊은 산과 긴 골짝을 기차가 번개같이 달리는 것 같다. 혹은 경마장에서 여러 말들이 앞을 다투어 달리는 듯하여 그곳에서 관람객들이 실지로 활동하는 것 같으니, 이는 활동사진의 조화로 전기의 힘으로 조작하는 것이라 한다. 혹은 원숭이가 사람의 지시에 따라 묘기를 부리고 앵무새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 금수를 훈련시키고 길들이는 것이 지극한 이치가 아니라면 이와같은 묘기연출은 불가능하리라.
 
29
마지막으로 영국 황제의 사진이 화면 위로 엄숙하게 나타나자 관람객 모두가 일제히 일어나서 공경스럽게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이것은 아마 영국 군주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뜻일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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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5. 6)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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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5. 7) 흐리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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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에 주영한국공사관으로 갔다가 4시에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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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5. 8)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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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에 영국 장례원경(掌禮院卿)이 황실 마차를 이끌고 와서 왕궁에 들어가 폐현하기를 청했다. 이에 우리 네 사람이 민영돈 공사와 함께 예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 밖에는 여러 관리들이 모여 섰고 장례원은 사중문(四重門)에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잠시 휴게소에 앉아 쉬었는데 조각한 구슬(彫玉)과 금실(縷金) 장식은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했다. 잠시후 장례원경이 들어 오라 하기에 이중문(二重門)으로 나아가니 지나가는 문마다 시위병이 고깔을 쓰고 창을 쥔채 고니처럼 고개를 쳐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鵠立). 마침내 어좌소(御座所)에 이르니 황제께서는 옥좌(玉座) 아래로 내려와 서니 외부대신과 시위하는 사람 4,5명이 배립(排立)하고 있었다. 이에 문안으로 들어가 국궁하고 머리를 조아렸다(鞠躬叩頭). 또 몇 걸음 나아가 처음처럼 예를 행하고, 어전에 나아가 또 예를 행하고 국서(國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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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황제께서 악수를 건네며, “몇 만리 바닷길을 과연 편하게 오셨는지요?”라고 인사하기에 “황령(皇靈)의 덕택에 힘입어 일행이 무사하게 잘 건너왔습니다.”라 대답했다. 황제께서 또 “귀국 대황제께서는 옥체가 태평(太平)하신지요?”라 묻기에 “태평하십니다”라고 대답했다. 또 말씀하기를 “귀국 대황제께서 특파대사를 파견해 멀리 찾아와 안부를 묻게 하시니 감복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양국의 우의가 더욱 돈독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영국 황제는 넉넉한 얼굴에 백발이었고, 얼굴에 덕기가 넘쳐 흘렀다.
 
36
영국의 궁궐은 그 규모가 광대하고 화려했다. 옛날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왕의 거처를 보고 감탄해 말하기를 “크도다 거처여!” 라 하였는데 그 옛날 제나라가 바로 오늘의 영국이 아닌가.
 
37
국서 봉정식을 끝내고 여관에 돌아오니 영국 궁내대신 「삼들랑」의 청첩이 와 있었다. 오후 10시에 우리 네 행인은 공복을 갖추어 입고 입궐하니 2층 누각과 82 중문(重門)이 있는데 문마다 비단 휘장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고깔을 쓰고 은장(銀仗)을 든 인접관(引接官)의 앞에서 인도하는대로 따라 영황 영후 어좌소로 가니, 네 벽은 수 놓은 비단으로 장식하고 용마룻대와 추녀끝은 금실로 장식했다. 상탁(床卓)은 화려하고 등촉은 휘황찬란하고 음악 소리는 천둥처럼 울려 퍼지니, 실로 “크도다 거처여!”
 
38
그날 밤 공경대부의 부인으로 폐현한 자는 5, 6백명은 되었는데, 귀부인들은 수 놓은 비단옷에다 보물로 치장해서 향취가 가득했다. 폐현의 예를 행하고 물러나니 인접관의 인도로 어떤 방에 이르니 별도로 탁상을 차려 놓고 술과 음식을 권하고 있다. 술과 음식 대접을 받고나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일본 대사가 어제 입궐 폐현했으나 오늘 밤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청국 대사는 참석했다. 오늘 대내(大內)로 전보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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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5. 9) 흐리다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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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 (5. 10) 흐림
41
오후 2시에 주영 한국 공사관으로 가서 회포를 푼 다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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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5. 11)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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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에 영국 궁내대신(宮內大臣) 「삼들낭」과 그의 부관 「늬쓰」가 여관 문 밖에 명함을 두고 갔다. 오후 3시에 황실 마차를 타고 유람했다. 국립은행에 이르자 병정 30명이 은행문 밖에서 파수(把守)하고 있었다. 철문은 매우 크고 아래 위로 자물쇠 두개가 달려 있었는데 모두 채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 열쇠를 가지고 동시에 문을 열어야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 동굴은 칠흙 같은 밤처럼 캄캄했다.
 
44
잠시후 전등을 켜니 동굴같은 방은 사면이 십여 칸은 됨직 보였다. 3층으로 된 시렁이 있는데 윗 시렁에는 금화(金幣)가, 중간 시렁에는 은화(銀幣), 아랫 시렁에는 지폐(紙幣)가 있었다. 또 금괴(金塊)도 있어서 크기가 목침(木枕)만 했다. 덩치 큰 금괴를 시렁위에 벌여 놓았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좌우 양 곁에는 철궤(鐵櫃)와 목궤(木櫃)가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궤 하나에 들어 있는 돈이 얼마인가 물었더니 2억9천여 만원(圓)이라고 했다.
 
45
저울(天平秤) 두개와 조폐(造幣)기계도 있었다. 기계 위에 ‘도는 침(輪針)’은 화폐의 수량에 따라 도는데 이것으로써 만든 지폐의 수효를 안다고 한다. 또 ‘금을 실어 나르는 수레(駄金車)‘도 있었는데 수레 위에는 24개의 금괴가 있었다. 금괴 하나는 4백냥(兩)이고 이것은 하루에 환전되는 지폐의 어림수라 한다.
 
46
민간에서 지폐를 사용하다가 불의의 수재(水災)나 화재(火災)를 당하여 유실했을 경우 실표증(實表證, 사실증명서)이나 혹은 타다 남은 끄트머리(灰燼) 물 찌끼(渣滓)등 입증할 수 있는 물증만 제시하면 모두 환급해준다는 것이다. 실표증은 유리 그릇안에 넣어 두었다가 훗날 표기(標記)로 삼는다 하니 관민 사이의 신용을 알만하다.
 
47
영국 황제와 황후 태자 등 모두의 이름을 적어 두었고, 청국 이홍장(李鴻章), 일본의 소송친왕(小松親王) 및 몇몇 지명인사들이 모두 이름을 기록해 놓고 있다 (방문 기념 서명 사인을 한 방명록을 말한다). 은행을 둘러 보고나서 문을 나오니 은행장이 나와서 예를 하고, 모든 은행 직원들도 출입할 때 경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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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5. 12) 흐리다 맑음
49
영국 황제의 동생 친왕궁(親王宮)과 대외(大外) 대처(大處)에 명함을 보냈다. 오후 2시에 네 사람은 문을 나서 마담 터소(마담 슛소듸)로 갔다. 이는 옛 인각(獜閣)의 종류를 모아둔 박물관이다. 흰 밀랍으로 사람을 만들어 놓았는데, 사람의 모습과 얼굴 생김새, 머리카락과 수염은 물론 심지어 피부색까지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
 
50
수(繡)놓은 비단 옷을 입은 제1반열(班列)의 사람은 지금의 황제와 황후 태자와 태자비이다. 그 외의 반열에는 선대에 공이 있었던 황제와 황후를 비롯하여 각 국의 황제 대통령 영웅 장사 유명인사들이 있었는데, 이홍장(李鴻章)·나폴레옹(羅巴倫)·비스마르크(俾斯麥) 등이 있고, 그 당시의 정부 대신들 모두가 참여하고 있다. 혹은 산골짝에서 전쟁을 하다가 죽거나 부상당한 장병들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 혹은 범죄인에게 형벌을 가하는 모습, 혹은 강도가 부유한 사람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모습, 혹은 전쟁에서 이겨 항복을 받는 모습 등등은 과연 모두가 장관이었다.
 
51
박물관을 나와 돌아서 화원(花園)에 이르니 그 둘레가 몇 리인지 모르겠는데 화원 전체가 철책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입구에 돌기둥문(石柱門)이 있었다. 문은 지극히 높고 장대했으며 문으로 들어가니 도로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절도있게 나 있어서 마치 바둑판처럼 보였다. 온갖 진귀하고 아름다운 나무와 기화요초가 눈을 어지럽게 하고 꽃 향기가 엄습했다. 앉을 의자가 수만 개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모양은 둥글고 색깔은 녹색이여서 연꽃잎이 땅에 가득하게 펼쳐 있는 것 같다. 매일 해질녁이면 이 화원을 찾는 꽃구경꾼(玩覽人)이 남녀노소 몇천명인지 그 수를 헤아릴수 없다하니 실로 ‘별유천지(別有天地)’라 할 만 하다. 화원 한가운데 장대한 돌집(石閣)이 한개 있는데 건물 규모가 아주 우람했다. 네 귀퉁이의 석대(石臺)에는 인간상(像)을 새겨 놓았고 한가운데 돌탑 위에는 금으로 만든 인형(金人)을 올려 놓았는데 그 형체가 아주 장대했다. 이것은 영국 후제(后帝, 영국왕)의 장부상(丈夫像)이라고 한다. 대개 서양 사람은 꽃을 좋아한다. 문미(門楣) 안팎에 모두 화분을 놓아 장식하고, 여자들은 머리 위에 남자들은 옷깃에 모두 신선한 꽃을 꽂고 있다. 식탁 위에도 화초를 놓고 있다.
 
52
오후 9시에 외부참서관 「포선븨」가 와서 국회의사당으로 안내해 구경시켜 주었다. 의사당 중간에 아취형 방이 한 칸 있어서 의장이 앉고 의장석 앞에는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국보(國寶) 한점이 놓여 있고 그 옆에는 국표(國表: 나라의 聖德을 문장으로 새긴 것) 한개가 있는데, 순금으로 주조한 것으로 모양은 절굿공이(舂杵)와 같았다. 그 앞에 또 큰 책상이 있고 그 위에 각종 문서를 쌓아 놓았으며 서기관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정부당(여당)이 나열해 앉아 있고, 왼편쪽에는 반대당(야당)이 나열해 앉아 있다. 발언할 사람이 있으면 한사람씩 일어나서 ‘당시 사정(時宜)’을 진술하고 의원간에 기탄없이 토론을 벌인다. 여야 양당간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결국 투표를 하고 다수표에 따라 시행한다고 한다. 그 옆자리에는 신문 기자석이 있고 의원 발언과 토론 내용을 기록 취재하고 있다. 이날 토론을 벌인 것은 모두 주세(酒稅) 한 항목 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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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5. 13) 흐림
54
민영돈 공사가 내방했고, 영국 명예영사 모건이 명함을 보내면서 안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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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9일 (5. 14)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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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예식원(禮式院)으로 부터 미리 청첩이 왔다. 대관식 때 앉는 좌석이 「제팔좌(第八座)」로 정해졌다고 했다. 영국 육군 대도독 로버쓰와 외부협판 크본이 내방했는데 우리가 마침 외출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모두 명함을 남겨 두고 갔다.
 
57
오후 7시에 우리 일행 네 사람은 기차를 타고 수정궁(水晶宮)에 가서 불꽃놀이(火戱)를 구경했다. 수정궁 둘레가 3천만 평방미터라고 한다. 내외 상하의 전등 불빛은 하늘에 가득찬 별이 반짝이는 것과 같았다. 건물뒤에 큰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흰 돌에 괴이한 무늬를 새긴 돌난간이 연못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에는 괴석으로 산을 만들어 화초를 가득 심어 놓고 있다. 조그만 배가 있어 남녀가 다투어 배를 타고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58
수정궁 관리소장과 인접관(引接官)의 인도를 받아 조그마한 누각에 이르렀다. 이 누각은 8,9명은 수용할 만 하고 바닥에는 홍자색(紅紫色) 비단을 깔아 놓았다. 이곳은 영국 황제가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곳이라 한다. 이 누각 아래가 바로 불꽃놀이 장소이다. 장내에 가득찬 전등은 불숲(火林)을 이루고 있었다.
 
59
구경꾼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윽고 군악 연주가 끝나자 갑자기 화포(火砲) 터지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불화살(火箭)이 평지로 부터 수많은 나뭇배(林船) 모양으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공중에서 포성이 어지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불화살이 갈라지고 흩어지며 내려오니 하늘에서 오색 불비(火雨)가 내리는 것 같고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다. 이와같은 불꽃놀이가 반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60
이 누각앞 좌우에는 10여길이나 되는 쇠시렁(鐵架)이 있고, 쇠시렁에는 큰 철바퀴(鐵輪)가 달려 있었는데, 바퀴안에는 무수한 작은 바퀴가 들어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것이 마치 거위 알과도 같았다. 거위 알 같은 화등(火燈)은 구슬을 던져 두고 콩을 흩뿌려 놓은 것 같다. 흔들거리면서 번쩍번쩍 빛나다가 조금 있으려니 ‘탁탁(坼坼)’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만개의 화등이 갈라지고 쪼개지며 화광이 작열하면서 폭발하는 것이 분수기(噴水器)에서 물을 뿜어내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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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이 그치자 화륜(火輪)은 갑자기 변하여 한마리 큰 코끼리로 화하지 않는가. 긴 코와 늘어뜨린 귀로 어슬렁어슬렁 움직이는 것이 살아 있는 짐승과 똑 같았다. 또 한차례 포성이 울리더니 평지로부터 불화살이 어지러이 날아 오르고 오른쪽 쇠시렁의 큰 바퀴(大輪) 위에서 한송이 모란이 피어났다. 잎은 푸르고 꽃은 붉은데 나비가 날며 꽃을 희롱하고 있다. 또 그 앞에는 높이가 10여장이나 되는 수백칸의 큰 쇠시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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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포성이 울리자 그 쇠시렁 위에 일제히 불이 켜지면서 두 화인(火人)이 산악같이 우뚝 섰다. 자세히 보니 바로 영국의 황제와 황후였다. 잠시도 쉴새 없이 화포가 터지고 수백칸 쇠시렁위에서 ‘一’자형의 긴 불이 터져나왔다. 그 불기운(火勢)은 천길 절벽 위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듯 내리 쏟아졌는데, 반쪽은 흰빛 폭포요 반쪽은 누런빛 폭포였다. 폭포수 소리가 세차게 일어나고 눈발이 공중에 가득하게 날리니 귀신의 글재주로도 이 모양을 방불하게 표현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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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동안 이와같은 상황이 계속되다가 그쳤다. 또한 쇠시렁앞 평지위에 화차(火車) 두대가 있는데 쌍불(雙火)을 싣고 마차 위에 화인이 앉아 있었다. 화차 두대가 앞을 다투어 달리다가 한 대는 나는 듯이 질주하고 다른 한 대는 기계가 불리해서 점점 처지기 시작했다. 뒤처진 화차위의 화인이 내리더니 기계를 수리하는 동작을 하는(變通) 사이 앞 화차는 이미 약속된 결승점(信地)에 도착하자 화인이 수레 위에서 뛰어내려 춤을 추고 있었다. 이는 화차 승부경기라고 한다.
 
64
이윽고 평지를 바라보니 화포 터지는 소리가 나고 불화살이 공중에 가득 찼다. 상하로 터지는 대포소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듯 울려 두 귀가 멍멍했다. 수 많은 구경꾼들은 대포 소리에 압도되어 허수아비(塑人)처럼 멍하니 서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불꽃놀이를 끝낸다는 음악 소리가 울렸다. 오늘밤 불꽃놀이에 든 경비를 물어보니 백여만여원이라고 했다. 경비는 사회단체로부터 지원받아 충족하며 오늘밤의 입장권 판매 수입은 불꽃놀이 경비의 거의 10배나 된다고 한다.
 
65
6월 20일 (5. 15) 흐리고 비
66
영국 육군 도독부(都督部)와 외부협판처(外部協辦處)에 명함을 보내어 답례했다. 오늘 외부참서관 「쓰돈」과 주영 청국공사 장덕이(張德彝)가 명함을 던지고 갔다.
 
67
오전 11시에 영국 감옥서(監獄署)를 시찰했다. 5층 벽돌 건물이고 그 둘레에 높은 담장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중 철문이 있었다. 징역 죄수는 천여명이고 방 한칸에 한사람씩 수용하고 남녀 죄수는 따로 수감하였으며 매우 깨끗했다. 하루에 식사는 세번 주는데 모두 저울에 달아서 준다. 이는 식사량을 일정량으로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68
감옥 서안에는 병을 고치는 의사가 있고, 매일 식사후에는 간수(公人)가 와서 죄수들을 데리고 감옥 서안의 운동장으로 가서 한차례씩 운동도 시킨다. 이는 기분이 울적해서 병이 날까 염려해서이다. 죄수 각자로 하여금 생업(生業)을 닦게 하고 정부에서 죄수의 평일의 업무량을 계산해서 그 반액을 은행에 예금하도록 해서 출소후 생업자금으로 사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69
감옥 서안에 교회가 있어서 공일마다 죄수들에게 예배를 보게 하고 2주일마다 한번씩 목욕을 시키고 있다. ‘백성을 사랑하고 법을 만드는 도(愛民 立法之道)’가 모두 이와 같다.
 
70
6월 21일 (5. 16) 흐리다 맑음
71
영국 외부참서관과 청국공사에게 명함을 보내어 답례했다. 오후 2시에 영국 주재 한국공사관으로 갔다. 오후 11시에 여관으로 돌아오니 순사 1명과 병정 2명이 여관문 밖에 포막(舖幕)을 설치해 놓고 밤낮으로 우리 일행을 보호하기 위하여 파수를 서고 있었다. 우리가 여관문을 나갈때는 순사와 병정들은 모두 공경스럽게 깍듯이 경례하고 ‘수레 모는 사람(御車夫)’에게 우리의 행선지를 물어본다. 순사가 손을 들어 손가락 한 개로 방향을 가리키면 도로상에 늘어서 있는 순사들이 이 모양으로 다음 순사에게 신호를 보내면서 마차의 통행을 인도한다. 출입할 때에 방문에서 여관문 밖까지 홍색 양탄자를 깔아 놓고 우리는 양탄자 위를 걸어간다. ‘수레 모는 사람’은 붉은 모직의 연미복을 입고 머리에는 황금으로 장식한 예모(禮帽)를 착용했다. 마차를 몰고 가다가 연락만하면 도로상의 모든 마차는 정지하고 보행인은 길 옆으로 비켜선다. 이러한 광경을 보니 서양은 귀천(貴賤) 사이에 예모(禮貌)의 구별이 동양보다 심한 것 같다.
 
72
6월 22일 (5. 17) 흐리다가 비
73
영국 궁내부에서 청첩이 왔다. 내일 오후 8시에 영국 황제가 황후와 함께 각국의 친왕과 대사를 맞이해서 만찬(夕餐)을 베푼다는 것이다.
 
74
6월 23일 (5. 18) 흐리다 맑음
75
영국 황태자궁의 사실(私室)을 방문했는데, 악수로 인사를 나눈 다음 앉아서 이야기했다. 황태자의 거처는 부유하고 화려했다. 과연 “삶은 기(氣)를 바꾸고 먹는 것은 몸을 바꾼다” 는 느낌이다. 황태자와 헤어져서 여관에 돌아오니 황태자는 명함(名帖)을 보내면서 우리의 황태자궁 방문에 대해 경의를 표했고, 몸소 나아가서 인사드려야 마땅하나 스스로 바쁜 일정 때문에 성의를 다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 이었다.
 
76
오늘부터 어주(御廚: 수라를 만드는 주방)에서 식사를 제공한다고 했다. 버킹엄(벅킹, Buckingham Palace) 궁전에서 친왕이 연회를 베푼다는 것이다. 영국 황제는 삼가하고 절제함이 있어서 친임(親臨)하지 못하고 황후는 친임했다. 주석인 황태자는 태자비를 동반하고 참석했다. 이날 좌석 차례를 보면 일본 친왕은 제3좌로서 황태자와 같은 식탁에 앉았다. 우리 나라 친왕(특명부영대사 이재각)은 제4좌로서 태자비와 같은 식탁이었다. 청국 친왕은 제6좌였다. 연회를 끝내고 나서 네 행인은 황후를 알현했다. 오후 12시에 여관으로 돌아 왔다.
 
77
6월 24일 (5. 19) 흐림
78
영국 황제의 병환이 위중해서 대관 예식행사를 뒤로 미루었다. 이 일 때문에 본국 대내(大內)로 전보를 쳤다. 벨기에(比利時) 친왕과 정령(正領) 「잉글븨싀」 수원 부위(副尉) 「어로위무리가」, 전권공사 「날」 등이 모두 명함을 주고 갔다.
 
79
오후 2시에 영국 황제의 병문안 차 우리 네 사람은 황궁에 가서 명함을 전하고 돌아왔다. 덴마크(丁抹)·그리스(希臘)·일본·청국 등 친왕 및 영국 황숙(皇叔) 친왕에게 모두 명함을 남기고 돌아왔다.
 
80
돌아오는 길에 대도로를 활보했다. 런던(倫敦)은 본시 대도회지로서 이번 대관식 경축절을 맞이하여 대도로 좌우의 고층 건물 베란다에 꽃을 달아 장식하고 비단을 걸어두어 황금빛과 푸른빛이 찬란하게 반짝이고, 길가 수천칸이나 되는 긴 탁자를 설치 층층이 얽어두고, 홍색이며 자주색 양탄자를 깔아두어 마치 춘풍화도(春風畵圖) 속을 거니는 기분이다.
 
81
이 길은 대관식때 영국 황제께서 어가를 타고 지나갈 도로이다. 각국의 친왕(親王 : 황제의 백․숙부, 형제와 아들들)과 대사 및 본국의 인민들이 앉아서 구경하게 될 곳인데 그 앉는 자리에도 귀천의 차서(次序)가 있었다. 그때 각국 경축 사절단과 이곳 런던 시민들이 운집해서 마차와 보행인이 빽빽히 서서(林立) 대도로를 유성(流星)처럼 달리면 거리의 경치는 더할 수 없이 화려한 장관을 이루리라.
 
82
6월 25일 (5. 20) 맑음
83
섬라(暹羅:泰國) 태자와 벨기에·독일(德國) 친왕이 거처하는 여관에 명함을 보냈다. 영국 궁내대신이 칙서를 받들어 부관을 보내어 경의를 표하면서, “때마침 신병이 있어서 대관예식을 치를 수 없지만 예식관의 접대 범절은 전과 같이 하겠습니다. 오직 원컨대 편안하게 기거하시고 빨리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84
6월 26일 (5. 21) 맑음
85
대관 예식이 이미 연기되자 각국의 경축사절이 차례로 귀국하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도 본국 대내(大內)로 귀국해도 좋은가고 전보를 쳤다. 이는 예식행사가 무기 연기되었기에 귀국 복명을 청하는 전보였다. 전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국 황제의 병환이 한결같이 차도가 없어서 대관 예식이 무기 연기 되었습니다. 궁내대신이 칙서를 받들고 와서 각국 사절들을 위로하고 있지만 실은 구라파의 경축사절단은 각기 귀국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신은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빨리 귀국하라는 칙명을 내리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86
오전 10시에 영국 황궁에 이르러 궁문 밖에서 병문안을 하고 명함을 남기고 돌아 왔다. 한국 황제가 영국 황제에게 선물로 주라고 가지고 온 세가지 물건을 궁내부에 전달했다.
 
87
오후 7시에 접반관(伴接官)이 와서 강점(江店)으로 바람 쐬러 가자고 청했다. 이에 우리 네 사람은 여관문을 나와 마차를 타고 우리 여관에서 약 20리지점에 위치한 강가에 도착했다. 강가의 누각은 지극히 시원스럽게 탁 틔어 있어서 전망이 좋았고 뒤뜰에는 널찍한 운동장이 있었다. 아래 위층 모두 돌로 바닥을 깔았고 돌난간으로 둘러 싸고 있다. 돌난간은 백여칸이요 돌기둥에는 모두 인형(人形)을 조각해 놓고 있었다. 석인(石人)의 머리 위에는 돌화분을 얹어 놓았고, 돌화분에는 화초를 심어 놓았다. 난간 바깥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강위를 떠도는 조그만 배들은 연꽃 잎이 땅에 가득 깔린 듯 했다. 강가를 거닐면서 시구(詩句)를 읊으니 문득 세상 걱정을 잊게 했다. 강가로 유람온 관광객은 남녀 백여명이나 되었는데, 혹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혹은 춤을 추면서 기분대로 질탕하게 놀았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은 뒤에 우리 일행은 마차를 돌렸다. 도로 좌우에는 가로수가 반듯하게 심어져 있었고 전등이 별처럼 반짝이며 늘어져 있었다. 술 취한 몸으로 마차에 오르니 기분은 한껏 상쾌하고 입에서는 저절로 시 한수를 읊조리게 되었다. “마차는 유수(流水)처럼 흘러가고, 말은 용처럼 달리도다(車如流水 馬如龍)” 오후 11시에 여관에 돌아왔다.
 
88
6월 27일 (5. 22) 맑음
89
대궐로 전보를 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 청국의 경축사절이 이달 그믐께 돌아간다니 신도 귀국함이 어떻하온지요? 시베리아(西伯利) 철도로 귀국하기는 매우 어렵고, 오는 1일에 인도양 선편이 있기에 이를 이용하면 편리할 것 같으니 속히 알려주시기 바라나이다.”
 
90
오전 8시에 우리 네 사람은 반접관의 안내로 소방본부(救火總社)를 시찰했다. 이 소방본부는 런던 시내의 화재를 구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이다. 물 뿌리는 소방 호스 기계와 각 층계를 연결해주는 고층 쇠 사다리가 있었다. 우리들이 진화 절차를 관람할 수 있도록 순서대로 구화 작업을 연출했다.
 
91
갑자기 몇 층 건물에서 연기와 화염이 솟구쳐 일어나더니 화재발생경보가 울리자 소방수들이 각기 맡은 소방도구를 들고 출동했다. 먼저 여러 층으로된 쇠 사다리를 걸치더니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불이 난 건물로 올라가서 화상을 입은 사람을 어깨에 메고 그 사다리로 내려왔다. 그런 후에 폭 넓은 보자기를 불이 난 건물 아래에 펼치더니 수십명 사람이 달려들어 사방(四面)으로 빙 둘러서서 이 보자기를 힘껏 잡아 당겨 보자기가 땅바닥으로 부터 몇 자 위로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사람이 불이 난 건물 위에서 보자기 가운데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나서 소방호스(藉水器)로 어떤 소방수는 위에서 아래로 씻어내리고 어떤 소방수는 아래에서 위로 물을 치켜 뿜어 올렸다. 물힘(水力)이 얼마나 센지 소나기가 쏟아져 내리는 듯 하더니 불이 차차 꺼지고 말았다. 이와같은 설비의 규모나 신속한 대응조치를 보면 평소에 소방훈련을 익혀두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92
만약 멀고 가까운 곳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소방서 문앞으로 급히 달려 오거나 혹은 전화로 모처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급보를 전하면, 소방서장은 지도를 살펴보고 불이 난 장소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난 다음 초인종을 눌러 소방수들을 소집해서 지휘한다.
 
93
소방수들은 머리에 철모(鐵冑)를 쓰고 몸에 철갑(鐵甲)을 걸쳐 입고 마차에 소방도구를 싣고 일제히 출동해서 불을 끈다. 소방서장이 인력 보강이 필요하면 소방지사에 전화를 하면 80여 곳의 지사가 일시에 인력을 동원 운집한다고 한다. 런던은 인구가 조밀해서 매일 화재경보가 있는데, 화재경보가 없는 날에는 소방서 안에서 소방수와 말에게 소방훈련을 시킴으로써 안일하게 쉬지 못하게 한다.
 
94
오후 3시에 한국공사관으로 가서 대궐로 전보를 쳤는데, “여러번 전보를 보냈는데 받아 보았는지요. 영국 황제의 병환은 여전히 위중해서 일본·청국·독일 등 3국의 경축사절은 영국 후제릉(后帝陵)에 헌화(獻花) 의식을 행했습니다. 영국 예에 따르는 것이 합당할 듯하나 감히 멋대로 행할 수 없으므로 처분을 기다립니다.”라고 했다. 오후 11시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95
6월 28일 (5. 23) 맑음
96
일행 네 사람은 희마장(戱馬場)에 가서 말 위에서 벌이는 격구(擊毬) 놀이를 관람했다. 말탄 사람은 용감했고 말은 건장해서 박수 갈채를 받았다.
 
97
6월 29일 (5. 24) 맑음
98
전보 칙서를 받았다. 만약 각국 경축사절이 출발한다면 오는 1일에 출발해도 좋다고 했다.
 
99
6월 30일 (5. 25) 맑음
100
오래 여관에 앉아 있으니 기분도 울적해서 우리 일행 네 사람은 반접관과 함께 한 놀이장(戱場)을 구경했다. 큰 건물 수만칸이 구불구불 구비치는 가운데 전등이 별처럼 열을 지어 비추니 밝기가 대낮과 같았다. 좌판(坐市)과 늘어선 가게에는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흰 밀랍으로 옛 사람의 모습을 본떠 빚은 마네킨에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혀놓았으니 그 형형색색을 이루다 말할 수 없다.
 
101
놀이장 한가운데 널찍한 곳에 쇠시렁을 세워 두었는데 그 높이가 몇 백척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쇠시렁위에 큰 쇠바퀴를 달아 놓았는데 그 크기도 헤아릴 수 없었다. 쇠바퀴 바깥에 돌아가면서 ‘쇠로된 가방(假房, 곤돌라)’을 달아 놓았는데 기차의 상등객차와 같이 생겼고, 숫자는 몇 백개인지 모른다. 사람을 이 곤돌라 안에 앉게 해 놓고 전기의 힘으로 쇠바퀴를 돌려서 올라가게 한다. 빙 돌며 올라갔다가 쇠시렁 꼭대기에 이르면 몸은 구름가운데 두둥실 떠있게 된다. 쇠시렁 꼭대기에서 아래쪽 사람을 내려다보면 마치 개미떼가 맷돌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같아 참으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102
또 한 곳에 이르니 몇 척의 작은 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올라 타고 있기에 나도 배에 올라타 보았다. 배는 전기로 움직였는데 수로를 따라 저절로 석벽 동굴가운데로 들어갔다. 물길(水道)은 배 한 척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지만 들어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석벽 좌우에는 산천초목과 인물과 금수를 만들어 새겨놓았는데 전기를 비추면 영낙없이 진짜와 같았다. 그 설계가 참으로 기묘하다.
 

 
103
19) Daily Express, London, June 6, 1902.
104
이재각 부영대사 일행은 캐나다 퀘벡-영국 리버풀간 정기 여객선편으로 이날 영국 항구도시 리버풀에 도착했다. 여기서 기차로 런던 시내로 향발했다.
105
20) Daily Express, London, June 6, 1902.
106
이재각 일행은 6월 5일 기차를 타고 런던 시내의 유스턴(Euston)역에 도착했는데 이때 영국의 의전장관(King's Master of Ceremonies)이 한국대사 일행을 영접했다. 이재각 사절단은 이날 웨스트민스터 궁전호텔(Westminster Palace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107
21) 성인(聖人)이 이 세상에 나기전에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아프리카 일대의 기린과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작자는 영국의 문명을 찬탄한 나머지 뿔 하나 달린 짐승을 보고 이같이 『古今圖書集成』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 기린에 비유하고 있다.
108
22) 『舊韓國外交文書』 권14(英案), p. 443.
109
특명부영대사 이재각 일행은 영국 에드워드 7세에 국서를 봉정할때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한 셈이다.
110
戴冠式祝賀大使派送國書
111
敬白 英國君主兼膺海外所有屬國 皇帝陛下皇后陛下 戴冠大禮之辰 不勝懽喜 玆命
112
皇族從二品 義陽君李載覺 充任大使 齎呈親書 隨參慶禮 庸伸賀祝之忱 冀賜延見
113
領此至意 幷祈兩陛下 壽祿無彊
114
光武六年四月六日 在漢城慶雲宮
115
23) 『孟子』 권 13, 「盡心」 上, “孟子 望見齊王之子 喟然嘆曰 大哉 居乎“
116
24) 여기서 저자는 저울을 ‘천평칭(天秤稱)'이라 잘못 기록하고 있다. ‘천평칭(天平秤)'이라 바로 잡는다.
117
25) 터소 납인형관(Madame Tussaud's). 인각(獜閣)이란 동물의 박제(剝製)나 밀랍으로 만든 인간상 등을 모아둔 박물관이다. 마담 터소는 1833년에 창설되었는데, 대영제국의 국왕 여왕 유명인사를 비롯하여 영화 텔레비 스타 가수 스포츠 선수뿐만아니라 세계 각국의 역사상 인물을 실물 크기로 밀랍으로 주조해 놓고 있다.
118
26) 여기서 후제(后帝)란 ‘여왕’을 의미한다. 곧 빅토리아(Alexandrina Victoria, 1819-1901) 여왕이다. 에드워드 7세의 모후이며 인도제국의 황제를 겸한 재위 64년(1837-1901)으로서 이른바 빅토리아시대의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119
27) 『孟子』 권 13, 盡心 上, “居移氣養移體”
120
28) 『明治編年史』(명치편년사편찬회, 1936), 권 11, p. 406. 「1902. 4. 20, 時事」.
121
일본은 영국 황제 대관식에 小松宮彰仁 친왕을 파견했다.
122
29) The Korea Review, vol. 1, p.73, News, Calendar, February 1901.
123
빅토리아 여왕릉은 윈저성(Windsor Castle) 근처 프로그모어(Frogmore)에 있다.
124
30) 말 위에서 공치기하는 폴로(Polo) 경기이다.
【원문】19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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