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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록 (西槎錄) ◈
◇ 1902년 7월 ◇
해설   목차 (총 : 6권)   서문     이전 5권 다음
1902. 7
이종응(李鍾應)
1
7월 1일 (5. 26) 흐리다 비
2
오후 11시에 영국 황제가 관병식(觀兵式)을 행한다고 청첩이 왔다. 우리 네 일행은 연병장(鍊武場)에 입장했다. 미리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기다려야하므로 열을 지어 앉아보니 영국 병정과 각 속국의 병정이 대오를 지어 벌여 서고 있다. 이를 지휘할 장령(將領)과 위관(尉官)은 융장(戎裝)을 갖추어 입고, 앞뒤 가슴을 가리는 엄심갑(掩心甲)을 입고서 말을 타고 구령(口令)을 하니 그 군용(軍容)이 정숙하다. 군대가 도열한 가운데 먼저 영국 황후가 마차를 타고 입장했다.
 
3
영국 황제는 병환 때문에 관병식에 친임(親臨)하지 못하고 그 대신 황태자가 대리로 복장을 갖추어 입고 마차를 타고 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구경하던 시민은 빽빽히 늘어서서 일제히 모자를 벗기도 하고 혹은 손수건을 흔들면서 환호했다. 산이 진동하고 바다물이 용솟음치는 듯한 환호성을 지르다가 호각 소리가 한번 울리고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세번 크게 나자 시끄럽던 소리가 그쳤다. 황후와 황태자가 각 장령과 위관 몇사람을 대동하고 각 부대를 사열하고 나서 돌아와 지정된 좌석(信地)에 섰다. 군악이 우뢰처럼 울리면서 분열식(分列式)이 거행되었다. 각 부대는 질서정연한 대오를 지어 행진하다가 황태자 앞을 지나가면서 경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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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식(閱兵式)이 끝난 후 황후와 황태자는 돌아가고 병정들은 비로소 긴장을 풀었다. 우리 일행도 여관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한국공사관에 들렀다가 여관으로 돌아왔다.
 
5
오후 11시에 외부대신 사저에서 어사연(御賜宴)이 개최된다고 청첩이 왔기에 우리 일행은 참석했다. 12시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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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5. 27) 흐림
7
인도의 병정이 조련(操鍊)한다고 청첩이 왔기에 우리 일행은 민 공사를 동반하고 연병장에 입장했다. 인도 병정들은 체구가 장대하고 얼굴이 검고 눈이 푸르렀다. 잡색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맨발로 걸어다니며 혹은 예(銳 : 창의 일종)를 가지고 혹은 칼을 차고 혹은 창을 울러 메고 있다. 창 끝에는 작은 기를 달아 놓았다. 장령과 위관은 영국인이고, 기타 의식 절차는 어제 관병식과 같았다. 황후를 호위하며 따르는 수행원은 불과 5, 60명인데, 황태자 호위병은 백여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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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5. 28) 흐리다 맑음
9
오전 11시에 반접관이 와서 사복시(司僕寺)에 가서 황제가 사용하는 의장(儀仗)을 구경하기를 청했다. 황제가 타고 다니는 마차는 아주 질박한데다 황금으로 장식해 놓고 있다. 이 황금마차는 120년전에 제작했다고 한다. 마차 네 모서리에 금인(金人)을 세워놓고 차안은 비단과 보석으로 꾸몄다. 크고 무거워서 여덟마리의 말이 수레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
 
10
이번 대관예식때 사용할 마차는 신식과 구식을 다 참작해서 만들었는데, 금장식을 하고 붉게 칠해서 눈을 황홀하게 했다. 황후와 황태자가 사용할 마차도 별 차이가 없었다. 마구간(馬廐間)에는 황금마차를 끌고갈 말 여덟 마리가 있었는데, 우유빛 백마(서양 말 이름)로서 온 몸에 잡털 한카락 없었다. 말발굽에서 등골까지는 한 길(丈)이 넘었고, 꼬리에서 머리까지도 한 길이 넘었다. 색깔은 추수(秋水)와 같고 아주 준걸찬 말이었다. 마구간 밖으로 끌어내자 한번 웅장한 소리를 울리니 온 세상(八荒)으로 치달아날 기세이다. 손으로 쓰다듬어보니 성질 또한 온순했다. 또 오추마(烏睢馬) 여덟 마리가 있었는데 이 말들도 한가지 모양이었다. 이밖에 다른 준마들은 몇 천필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말들은 옛날 대완(大宛:한나라때 西域國의 하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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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으로 부터 전보 칙서를 받았는데, 영국 후제릉에 헌화 의식을 행해도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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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 (5. 29)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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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 네 사람은 영국 후제릉에 헌화 의식을 행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한 시간 달려서 정거장에 도착했다. 특별 마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윈저왕궁(雲西宮)으로 갔다. 수궁관(守宮官)이 우리 일행을 영접하고 있다. 궁문에 들어가니 사방벽에 각종 병기와 크고 작은 총과 칼을 교차로 꽂아놓았는데 칼날은 서릿발 처럼 번쩍거리며 빛났다. 탁상위에는 신구제의 갑옷과 투구를 섞어놓았고 그 가운데 보도(寶刀) 두 자루가 있었다. 길이는 2척이 넘었고, 은빛으로 반짝이는 섬광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 손에 들고 보니 매우 가볍고 민첩하며, 칼자루를 잡고 흔들어보니 은은한 소리가 났다. 시험삼아 칼을 휘둘러보니 몸을 따라 잘 움직여져서 달리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이것은 천하의 보검이라고 한다. 좌우의 문옆에는 구리로 만든 사람(銅人)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고 구리로 만든 말(銅馬)를 타고 서 있는데 아주 웅장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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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벽에는 사진 또는 금옥으로 만든 소상(塑像)이 있다. 이 사람들은 나라 일에 공을 세운 유공자라고 한다. 궁전은 우뚝 솟아 그 안에 청정실(聽政室) 접객실 연회실 휴게실 무도실 등이 있고, 그밖에 여러 방들이 있었고, 진귀한 완구와 보배스런 기물들이 그 안에 가득 차 있다. 모두가 각국에서 선물로 가져온 것으로 황제가 평소에 사용하고 있는 기구와 그릇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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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는 의자가 한 개 있는데 나무를 옥석처럼 다듬었고, 의자의 후판(後版) 한가운데에 보석 한 개를 밖아놓았는데 그 크기가 거위알만하다. 값을 물어보니 몇만원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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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성 궁문을 나와 후제릉으로 나아가니 십자로된 석각(十字石閣)이 있고 그 안에 들어가니 수릉관(守陵官) 남녀 두 사람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석각안에 사방으로 두칸이나 되어보이는 석단(石壇)이 있는데 높이는 한 길 정도였다. 석단 위에 백옥석으로 조각한 와상(臥像)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완연히 비단 이불속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후제(빅토리아 여왕) 부부로서 살아 있을 때의 형상을 본받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의 시신은 석단안에 안치해 놓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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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5일 (6. 1)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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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에 한국공사관으로 갔다가 곧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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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 (6. 2) 흐리다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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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황궁으로 가서 명함을 전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고하고 여관으로 돌아와서 대궐에 전보를 쳐서 영국 후제릉에서의 헌화의식을 행한 이유와 인도양을 향해 출항한다는 이유 등을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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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6. 3)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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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에 우리 일행 네 사람은 영국을 떠나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정거장에 이르러 기차를 탔다. 영국 궁내부 외부 관원들이 정거장으로 나와 전송해 주고, 고페 영사와 「포선븨」, 민영돈 공사와 이기현이 따라 왔다. 오후 1시에 도버(바, Dover) 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전송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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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네 사람은 배를 타고 도버항을 출항, 오후 2시경에 프랑스 칼레(칼틔, Calais) 항에 도착했다. 이 항구는 영국과 프랑스 양국간의 경계를 이루는 한계 지역이다. 도버해협 동서의 양쪽 해안에 포가(砲架)를 설치하고 대포 수십좌를 걸어두었는데 경비가 아주 삼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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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에서 여관에 들어가 점심을 들고 곧 파리행 기차를 타고 파리(巴里, Paris) 정거장에 도착했다. 주불공사 민영찬(閔泳瓚)이 참서관과 주사와 함께 마중 나왔다. 프랑스 장례원(掌禮院) 소경(少卿)과 외부대신도 영접 나왔다. 여관에 들어가 저녁을 먹은 뒤 함께 기차를 타고 한 정거장에 도착하여 이들과 작별하고 차안에서 하룻밤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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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프랑스(法國) 문물의 번화(사치)함은 영국을 능가했다. 그러므로 영국 노인네들은 어린 소년 자제를 망치려면 파리로 보내라고 입버릇처럼 되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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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6. 4)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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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이탈리아(義太利) 제노바(써노와, Genova) 항구에 도착, 「긔랑도」 여관에서 하룻밤을 잤다. 대개 이탈리아는 토지가 비옥해서 농사에 힘쓴다고 한다. 밀이 누렇게 익었을 때도 산위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돌산과 철로가 많고, 산을 뚫어 굴을 통과하고 있는데 긴 굴을 지나는데는 한시간도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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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6. 5)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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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에 우리 네 사람은 마차를 타고 부두에 이르러 독일 여객선 「이칼보」 호를 탑승했다. 1만6백톤짜리 호화여객선이다. 11시에 군악 연주가 세번 울리면서 출항하려하자 고페 영사(영국 使行中 領事顧問)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6,7삭(朔:60-70일) 동안 밤낮 없이 서로 친밀하게 지내다가 피차 애석한 이별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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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6. 6)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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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에 배가 나폴리(불, Napoli) 항구(이탈리아 地界)에 도착했다. 이 도시는 대단히 부유하고 인구는 50만이나 되지만 도적과 거지떼가 우글거리고 있다. 여객선이 항구에 접안하자마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배나 나무 판대기를 타고 여객선 바로 아래 까지 와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혹은 헤엄치면서 배 위의 선객을 바라보고 동냥질을 벌인다. 배위의 선객이 바다 가운데로 돈을 던져주면 거지들은 몸을 거꾸로 해서 물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가서 돈을 주워서 나온다. 항구의 경찰은 이러한 자맥질해서 돈 찾는 일을 엄금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거지들이 물속 깊숙히 들어갔다가 고기밥이 될까 염려되어 금하고 있는 것 같다. 잠시 하선해서 부두가로 나갔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서 곧 여객선으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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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1일 (6. 7)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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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에 여객선은 스트롬볼리(슛도리옴보리, Stromboli, 지중해 티레니아해에 있는 섬)에 도착했다. 오전 11시에 시칠리아(식시일이, Sicilia, 이탈리아 섬)항을 통과했다. 이 지역은 화산이 많아 밤이면 산 정상에서 분화(噴火)의 불빛이 보이고, 낮이면 연기를 볼 수 있다. 지난번 우리 일행이 태평양항행중 이탈리아 지방에는 화산이 있는데, 산 정상에서 우뢰같은 소리가 4,5일간 계속되면서 산이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이 4만여명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어제 나폴리(납, Napoli)항을 지날때 마침 그곳이(4만여명 압사자) 나폴리항으로부터 몇리 거리이므로 선객들은 다투어 화산폭발지역을 가보았다. 우리 일행도 가볼 마음은 있었으나 항행에 피곤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 일행은 섬라(태국) 친왕과 한배를 타서 자주 만나 교유(交遊)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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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6. 8)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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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계(寒暑表)를 보니 60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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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6. 9)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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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德國) 사관(士官)이 명함을 보냈기로 우리도 답례차 명함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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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6. 10)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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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에 여객선은 이집트(埃及) 항에 정박했다. 우리 일행은 하선해서 유람했는데, 이곳 인물과 주택규모를 보니 서양의 안목으로 보건대 매우 추잡해 보였다. 남녀 모두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이미 시집간 여자는 검은 색 주의(周衣, 차도르)를 입고 다녔는데 우리 나라 장의(長衣:부인이 나들이할 때 입는 소매 없는 옷)와 같이 소매가 없었다. 부인들은 주의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검은 수건으로 입에서 코까지 가리웠고, 대나무 마디(竹節) 세개에 양철로 장식한 불주(佛珠)를 머리 꼭대기에서 코 끝까지 걸치고 있었다. 이곳은 물이 귀해서 양가죽 주머니(羊皮帒)에 물을 담아서 먼 곳에서 물을 길어오는데 한 사람이 한개씩 짊어지기도 하고 노새나 낙타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이곳 생산품으로는 소 양 금은 보화 주석과 연(鉛) 그리고 담배 등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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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에 항구를 출발, 수에즈 운하(䟽鑿海: 蘇彛士河, Suez Canal)에 이르렀다.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인 레셉스(Lesseps, 李習)가 항행에 편리하도록 육지를 파서 바다길을 낸 것이라 한다. 운하의 폭은 큰 배 한 척이 운항할 정도이고 길이는 동양 이수로 2백50리라 한다. 수력은 몇만톤을 실을 수 있고 통과세는 매 1톤에 2원, 한사람당 2원을 징수하고 있다. 운하 개통시에는 프랑스인이 관리하다가 지금은 영국인이 관리하고 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황사(黃沙)가 흰 풀을 휩쓸고 있어서 과연 시골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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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6. 11)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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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계를 보니 70도에 이르렀다. 오전 5시에 우리는 홍해(紅海, Red Sea)에 도착해서 잠시 쉬었다가 출항했다. 날씨가 너무나 더워서 항구 좌우의 산은 불타는듯 붉게 보였고, 기온은 찌는 듯 더웠다. 옛날 예수(耶蘇氏)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전도하던 곳인데 아프리카의 이른바 라스 다샨 산(臘非勒山, Ras Dashan, 에티오피아)이다. 선상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니 언덕 아래에 큰 바위같은 것이 있었다. 뱃사람 말에 의하면 이곳은 17년전에 독일(德國) 배 한척이 이곳에서 부서졌다고 한다. 이 곳 바다 밑에는 암초가 많아서 배가 부서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므로 이를 경계하기 위하여 기념으로 남겨 둔다고 한다.
 
43
오후 8시에 선상에서 무도회가 열렸다. 통상하는 각국의 회사 깃발을 내 걸고 군악을 연주하니 남녀 한 쌍이 마주 서서 한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껴안고 한 손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왼쪽으로 돌기도하고 오른쪽으로 발을 구르면서 박자를 맞추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참으로 볼만한 광경이었다. 그 법도를 보니 남녀는 반드시 귀천(貴賤)의 구별이 있어서 천한 사람은 귀족과 감히 춤을 출 수 없다. 이것은 서양의 한 풍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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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6. 12)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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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물빛은 먹물 풀어놓은 것 처럼 시커멓다. 이따금 이끼같은 찌꺼기(渣滓)가 떠도는데 색깔은 아주 누렇다. 어떤 사람은 바다안에 산호가 많아서 바다물빛이 이 모양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물이 산 위에서 흘러내려 왔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열기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도 깊히 믿을 바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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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6. 13)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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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몹시 더워 온도계는 93도를 가리키고 있다. 벨기에(비리시, Belgium) 영사 두 사람이 명함을 보내 인사했으므로 우리도 명함을 보내 답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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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6. 14)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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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계를 보니 94도이다. 연해(沿海)의 해로는 험난해서 해로마다 등대를 설치해 놓고 밤이면 등대를 밝혀 선박의 운항을 편리하게 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이곳 까지의 해로에는 등대가 서로 보일 정도로 잇달아 설치해 놓고 있다. 상어같은 큰 고기가 여객선 가까이에서 노닐고 있었다. 선원들이 이 바다고기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 고기를 잡아 먹지않기 때문에 많은 상어떼가 사람 가까이로 모여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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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9일 (6. 15)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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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4시에 여객선은 아덴(亞丁, Aden, 남 예멘)에 도착했다. 이곳은 바로 아라비아(亞比利 : 옛 大宛)이다. 배가 가는 곳마다 새떼가 날고 있는데 조그마해서 메추라기만 하다. 떼를 지어 해상을 날다가 바다위로 도로 내려 앉는다. 우리들은 처음에 끝없는 바다에 어찌 새떼가 있는가고 의심스러워서 선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이것은 새떼가 아니라 ‘나르는 고기(飛魚)’라고 한다. 이곳은 적도에 가까워서 날씨는 항상 덥고 토지는 검게 타서 흑인이 살고 있다한다. 따라서 이곳은 인도로 가는 목구멍이 되는 관문이기 때문에 영국이 많은 군대를 파견해서 경비하고 있다고 했다. 오전 11시에 인도양을 향해 출항했다. 온도계는 82도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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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6. 16) 맑음
53
풍랑이 크게 일어나서 구토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흐리멍텅한 사람과 같았다. 온도계가 또다시 76도로 내려갔다. 겨울 옷을 입는 사람이 많아졌다.
 
54
7월 21일 (6. 17) 맑음
55
어제보다 더 큰 풍랑이 일었다. 온도계는 67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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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2일 (6. 18) 맑음
57
여전히 풍랑은 가라앉지 않고 일었다. 오후 4시에 풍랑이 가라앉자 배는 평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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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6. 19) 맑음
59
바람은 고요하고 풍랑은 멎어서 잔잔해졌다. 온도계는 어제와 같다.
 
60
7월 24일 (6. 20)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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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에 조그마한 섬을 통과했다. 섬에는 등대가 있고 수목이 울창해서 경치가 좋았다. 이곳 지명을 물어보니 맥도(麥島 ?)라고 했다.
 
62
7월 25일 (6. 21) 맑음
63
오후 2시에 여객선은 콜롬보(골늠보 : 錫蘭島)에 입항하자 우리 일행 네 사람은 하선해서 부두 밖으로 나갔다. 토인 남녀들은 옷을 입지않고 알몸으로 다니는데, 인간이라기보다는 마치 귀신같이 보였다. 몸은 시커멓고 허리 아래 짧은 치마로 가리거나 보자기로 하체를 가렸을 뿐이다. 염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적삼을 입고 상투를 틀고 머리를 짧게 깍고 있다. 맨발의 여인과 아이들이 길 좌우로 늘어서서 동냥 한푼을 구걸하고 있다. 흙빛은 붉은 흑색이고 가옥은 너무나 초라했다. 간혹 양옥 여관이 있고 공원도 있었는데, 서양의 것과 비슷했다.
 
64
이곳 산물로는 금·은·보패·대모(玳瑁:바다거북)·산호 등과 더불어 계수나무·야자·종려·빈랑(檳榔)·파초 등이 생산되고 있다. 이곳 토인들은 입술과 이 사이가 모두 붉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야자와 빈랑 등을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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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보는 인도령(印度領) 이다. 옛날 서역(西域)인 불국(佛國)은 이곳 항구로부터 5리 떨어져 있고 그곳에는 석가불(釋伽佛)의 불상과 무덤이 있다고 한다.
 
66
우리들은 마차를 세 내었다. 소로 수레를 끄는데, 이 소의 종자는 체구가 작고 뿔은 한자가 넘었고 배와 등뼈가 꾸부정해서 낙타와 같다. 우리는 선원 가운데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을 길 안내인으로 삼아 절(佛寺)에 이르렀다. 이 불당의 건축 설계는 우리나라와 같고, 불당 뒤에 석대(石臺) 위에는 커다란 석탑이 서있고 사면이 3·4칸이나 되었으며 높이는 몇길이나 되어보였다. 석대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돌기둥 위에 계란만한 뾰족한 첨탑을 만들어 놓고 보석을 밖아 놓았으니 햇빛을 받아 찬란한 광채를 내뿜고 있다. 불조(佛祖, 석가모니)의 육신은 이 석탑안에 간직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불총(佛塚)이라 일컫고 있다. 석탑을 보고 법당으로 내려와 불상을 보고자 내려오니 긴 수염에 구랫나루를 단 상투를 튼 한 노인이 나와 우리 일행을 맞이하며 불당문을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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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안으로 들어가니 또 문이 있는데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채워진 문을 열어주는데 너무나 늑장을 피웠다. 이 스님은 문은 열어주지 않고 사방벽에 걸려있는 불가의 그림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려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우리 일행은 문앞의 복전함(樻子口)에 은전 한 푼씩을 넣었다. 그제사 스님은 문을 열고 들어가기를 청했다. 당상에는 불상 세 개가 있는데 오른쪽 부처는 서있고, 왼쪽 부처는 앉아 있고, 중앙에는 비슴듬히 누워있는 와불(臥佛)이였다. 와불의 신체는 장대하고 길이는 두칸이 넘으며 옥색 빛깔을 발하고 있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로 만든 목상(木像)이었다. 그리고 와불의 눈빛이 섬광처럼 반짝이므로 물어보니 눈에 보석을 밖아 놓았다는 것이다.
 
68
석가는 인도에서 탄생했지만 머리 깍고 손톱을 자른 곳은 이곳이라고 했다. 우리들은 동쪽나라에서 나서 어릴때 부터 서역 불조(佛祖)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이제 직접 이곳에 와서 불상을 보니 일찍이 생각도 못했던 일이요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69
구경 후 몸을 돌려 법당문을 나와 마차를 타고 북쪽 해안에 있는 여관으로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차를 마시고 술을 몇잔 마신 뒤 항구의 여관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여객선으로 돌아오니 밤 11시였다. 이윽고 여객선은 동쪽을 향해 출항했다. 산 아래에 수풀이 무성하게 욱어지고 큰 담을 두르고 있는 가운데 집 한 채가 있었다. 물어보니 터키(터국 : 西比利, Turkey)의 포로를 가두어두는 감옥이라 한다. 온도계는 어제와 같다.
 
70
7월 26일 (6. 22) 맑음
71
오후에 풍랑이 일어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온도계는 어제와 같다.
 
72
7월 27일 (6. 23) 흐림
73
야심후 천둥과 번개가 치고 풍랑이 크게 일어나서 대양의 파도가 큰 산더미같다.
 
74
7월 28일 (6. 24) 맑음
75
풍랑이 여전히 높았다.
 
76
7월 29일 (6. 25) 맑음
77
아침 일찍 갑판에 올라가보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푸른 바다 물결이 우유빛깔처럼 보였다. 남쪽을 바라보니 주먹만한 산봉오리가 우뚝 솟아 있어서 상쾌한 기분이 몰려 온다. 뱃사람들이 이 산봉오리를 가리켜 인도네시아(Indonesia) 수마트라(Sumatra) 섬(荷蘭島, 네덜란드領)라 했다. 한서표는 어제와 같다.
 
78
7월 30일 (6. 26) 흐리다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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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에 말레이시아 피낭항(빈즐항, 檳楖港)에 도착했다. 이곳도 영국의 속지(屬地)이다. 우리는 하선해서 잠시 피낭항을 유람했다. 대개 콜롬보(錫蘭島)와 같이 청국인이 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흑인이 섞여 살고 있었다. 부녀자들은 코를 뚫어 금코걸이를 장식했고 맨발로 다니고 있다. 다리 위에는 은고리를 달고 있어서 또한 볼 만했다. 여기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산골짜기에 이르니 큰 화원이 한개 있었다. 계곡 곳곳에 진귀한 수목과 기이한 화초들이 가득히 풍취를 자아내고 있어서 이루다 기록할 수 없다. 연못과 폭포의 장관은 볼 만했다. 11시에 배에 돌아왔다. 배에 오르자말자 배는 동쪽을 향해 출항했다. (여기서부터 동양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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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6. 27)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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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면에 누른 이끼가 홍해에서와 같다. 오후 4시에 배가 싱가포르(新嘉坡, Singapore)에 도착하자 일행은 배에서 내려 마차를 타고 시내를 유람했다. 한 일본인 여관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8시에 배로 돌아왔다. 이곳 싱가포르도 영국 식민지(屬地)로서 주민은 청국인이 주종이고 서양인 일본인 흑인들이 섞여 살고 있다. 생산물은 콜롬보(錫蘭島)와 같다. 인물이 풍성한 것은 서양에 미치지 못하나 동양 제일의 대도회지로서 동서양을 잇는 요충지이다. 동양 각국의 물자는 반드시 이 항구로 집결했다가 서양으로 수출한다. 항내의 인구는 풍부한데 비해 땅은 좁아서 땅값은 금싸라기로 비싸다. 땅 1척에 70원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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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후제릉이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의 능을 말한다. 윈저성(Windsor Castle) 근처의 프로그모어(Frogmore)에 있다. 윌리엄 1세 이래 영국 국왕의 거성으로 사용해왔고, 성안에 왕실영묘(The Frogmore Royal Mausoleum at Windsor Castle)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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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駐法比來去案』 권 1(규장각 소장);金源模, 『近代韓國外交史年表』, 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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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紮法比公使館(1902년 1월 17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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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權公使 閔泳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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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等參書官 李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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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等參書官 李鍾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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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記生 姜泰顯․李瑋鍾․金明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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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國參書官 살타렐(P. M. Saltarel, 薩泰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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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인천 영국부영사 고페(H. Goffe, 葛福)는 영국에서의 이재각 특사를 안내하다가 이탈리아 제노바 까지 에스코트한후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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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콜롬보(Colombo)는 실론 섬(Ceylon)에 있는 스리랑카(Sri Lanka)의 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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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바타비아(Batavia)는 옛 네덜란드(和蘭)령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있다. 현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Jakarta)이다. 화란은 이곳에 동인도회사를 두어 동양진출의 거점으로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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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말레이시아(Malaysia) 피낭(Pinang)이다.
【원문】19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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