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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아츰 경부선에 몸을 실리다. 행리로는 지팽이 하나 손가방 하나. 단출하고 가든하기 훨훨 날아갈 듯, 죽장망혜로 천리강산을 들어간다는 옛 노래의 풍정과 심회도 이러하였으리라. 생각하면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 지도 정말 오래간만이다. 5년이 되었는가, 10년이 되었는가. 헤어나지 못하던 공무(公務)와 속무(俗務)를 비록 일시나마 떨치고 표연히 떠나는 것만 해도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운지. 저번 큰물 진 뒤로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던 일기조차 오늘만은 훨씬 개이었다. 새맑은 하늘가엔 목단송이 같은 흰 구름이 뭉실뭉실 피어 오른다. 한강물이 잠깐 붉은 기운을 띤 것은 지난 번 장마의 흔적인가. 질펀한 뫼와 들은 부신 햇발을 안아 푸른빛이 다시금 새로워, 그 싱싱하고 선명한 품이 펄펄 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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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걸음도 물론 단순한 놀이의 길은 아니다. 고도순례란 무거운 짐이 두 어깨를 누르지 않음도 아니다. 광채 나던 옛날의 서울, 눈물 묻은 오늘날의 폐허를 찾아들 제 그 무궁한 감개야 너와 나를 헤아릴 것이 아니로되, 한줌 흙과 한 조각 돌멩이에도 뜻깊은 지난날의 흔적을 찾아내고, 구부러진 고목과 우거진 쑥대 속에도 옛 자최를 헤쳐 보자면 고고학에 조예가 깊고 역사에 지식이 넉넉한 이라도 오히려 쉬운 일이 아니라 할 것이다. 하물며 고고학엔 별로 취미도 없었고 더군다나 역사의 지식이란 영(零)에 가까운 기자야 생의조차 못할 노릇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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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스스로 물러나고 스스로 앙탈할 까닭은 조금도 없었다. 학문적으 로 캐어내고 밝혀냄은 저절로 그 길의 적임자를 기다릴 것이거니와, 나는 나대로 보고 나대로 듣는 것도 나 자신에겐 또한 그리 뜻없는 일은 아니리 라. 장님도 단청을 구경하려 하지 않느냐. 아니 장님일수록 단청 구경을 더 욱 원하며 더욱 바랄 것이 아니냐. 아모런 준비 지식과 선입관념이 없이 온 전한 흰 종이 같은 마음으로 옛 서울을 대하자. 속임 없는 산하의 모양을 보아 우리 조상의 포부를 내 멋대로 상상해 보고 뚜렷이 나타난 유적을 어 루만지며 내 가슴에 뛰는 피 소리를 고요히 들어보자. 이것이 나의 고도순 례에 대한 준비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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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7시. 대구에서 경주행 가솔린 자동차를 집어탔다. 승객 정원 스 물둘. 두 사람씩 앉는 좌석길이가 두 자가 조금 넘을까 말까. 20세도 채 못 된 듯한 어린 차장. 빼빼! 애기 보채는 듯한 소리를 지르며 까불까불 종종 걸음을 치는 것이며 요 조그마한 물건이 닿을 때마다 금테두리 역장과 조수 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와 제법 큰일이나 하는 것처럼 손을 들고 호각을 불고 둥근 테를 주고받고 하는 광경이 아모리 보아도 어린애 장난 같다. 나 는 이 괴망스럽고도 살가운 탈것에 실리어 옛 얘기로 듣던 고추 나라에나 가지 않는가 싶었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경북평야가 군데군데 열리기는 하 였으되 웅대한 산천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송아지만큼씩한 작은 산들이 올 망졸망하게 꼬리를 맞물고 양가로 뱅뱅 돈다. 지명을 보아도 반야월(半夜 月)이니 청천(淸泉)이니 금호(琴湖)이니 자못 꿈결 같은 시흥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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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악(西岳)을 넘어 얼마 아니 되자 문득 눈앞은 훤하게 열린다. 천공지활 (天空地濶)이란 문자는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쫄쫄거리는 시냇물을 따라오 다가 별안간 큰 바다를 만날 때의 느낌도 이러할 듯. 하늘끝과 지평선이 닿 으려는 데는 마치 병풍을 펼쳐 놓은 듯이 새파란 산들이 둘레둘레 둘렀으되 이 너머로는 넓고 넓은 평야가 어마어마하게 벌어졌는데 그 복판 여기저기 하얀선이 거침없이 쭉쭉 뻗은 것은 아마 강물의 줄기인 듯. 장난감 기차가 가까워 갈수록 기와집도 언뜻언뜻 보이고 새파란 잔디를 인 어여쁜 산들(나 종에 알고 보니 고총)이 떼로 맞이하는 곳은 묻지 않아도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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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 들이닥치는 대로 아츰밥을 마치자마자 구경길을 나섰다. 길 끄는 인력거에 몸을 맡기매, 옛 서울의 서투른 시골뚜기 같아서 스스로 웃었다. 첫걸음은 박물관 경주 분관. 먼저 온고각(溫古閣) 본관에서 석기, 토기시 대, 동철기시대의 유물을 더듬으며 인류의 발달에 기구(器具)가 얼마나 위 대한 소임을 맡은 줄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즉 대강대강 거치기로 하고, 여기에 볼 수 있는 특이점만 추려보자. 기왓장이 엄청나게 크고 튼튼하며 연꽃 모양도 뜨고 귀신 형상도 새겨 그 수법이 자못 능란한 것을 보아, 그 때의 건축이 얼마나 굉장하고 화려했던 것을 얼마쯤 연상할 수 있었고, 토자기(土磁器) 같은 것도 통일시 대 이후의 것은 그 바탕이 견실하면서도 치밀하여 두들기면 쟁연한 쇳소리 가 나고, 그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둥근 놈에 기름한 놈, 아가리 넓적한 축 에 부리가 뾰죽한 축, 다리 높은 것에 낮은 것, 혹은 인형을 그리고 꽃을 그리고 손잡이 모양에도 진기한 의장(意匠)이 많아 혼란하던 당년의 기술을 상상할 만한 것이 없지 않으되, 그러나 이것들은 나 보기엔 그리 큰 경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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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 번 신관에 발을 들여 놓자 나는 황홀하게 넋을 잃었다. 첫째로 찬란한 황금관이 햇발과 같이 번쩍인다. 전체가 순금으로 된 것만 해도 끔 찍한 일이어든 그 치장과 잔손질은 또 얼마나 정교하고 혼란하냐. 관 위엔 반달 모양의 황금 조각이 두 갈래로 뿔같이 뻗쳤는데, 올리브 잎사귀같이 동글동글한 금점이 무수히 발렸고, 관시울과 통에는 거의 빈틈 없이 푸른 옥을 깎아 57개의 아구장한 낚시 모양의 소위 구옥(勾玉)을 달아 놓은 것은 정말 눈이 어찔어찔할 지경이다. 황금 줄기에 송이송이 금꽃이 만발하였고 벽옥의 잎사귀가 파릇파릇이 점친 그 모양은 정말 무에라고 형용할 길이 없 다. 그야말로 인공을 뛰어넘어 신공(神工)이요, 진토에 묻힌 것을 파내었다 느니보담 백운청운을 멍에(駕)하고 길을 잘못 들어 하늘에서 이 세상에 떨 어진 보물이라함이 오히려 상상하기에 쉬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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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 그뿐인가, 그 부속품으로 황금 허리띠며 황금허리 패물이며 어여쁜 방울 달린 귀고리, 오늘날의 유행품을 뺨칠 만한 간드러진 반지들. 그외 황 금 팔목찌, 발목찌, 갖은 장식품과 기명 등, 어느 것 하나 눈부시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무수한 주옥! 그 진주로 맨든 목걸이는 오늘날 서양 여 자의 흰 목덜미와 가슴팍을 꾸미는 것과 우열을 다투게 되었다. 더욱 진기 한 것은 옥충(玉蟲) 나래를 아로새긴 말등자(馬鐙)인데 옥충이란 것은 매미 비슷하게 생긴 벌레로 그 새파란 나래는 마치 벽옥과 같이 빛난다. 이 나래 를 등자에까지 새겨 넣었으니 그때 사람의 눈이 얼마나 심미적이요 감식력 이 예민했던 것을 짐작할 것이 아니냐. 일본에서도 갓에 이 옥충을 끼운 것 이 발견되어 큰 국보로 위해 올리다가 신라 시절엔 사람의 갓은 그만 두고 말등자에까지 쓰던 것이 판명되자 요새 와서는 멀쑥해졌다는 일화도 전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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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경이는 유리 곱보이다. 밑받침은 돈짝같이 동글납작하고 아가 리는 벌어졌으며 뱃바닥에 푸른 줄로 선을 두른 것이 요새 우리가 얼음을 담아먹는 유리 그릇과 흡사하다.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만일 이 유리 곱 보가 금관총을 발굴할 때 한데 섞여 나오지 않았던들 근자에 내버린 것인 줄 알고 돌아볼 이도 없었으리라 한다. 그런데 신라 당년에 사용한 그릇에 이 유리 곱보 같은 유형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 그때 구라파의 제품이 당나 라를 거쳐 들어온 것이리라고 학자는 단정한다 하나, 어느 민족의 제품인 것은 고만 두더라도 하여튼 천 수백 년전 옛 사람이 벌써 오늘날 쓰는 것과 꼭 같은 물건을 맨들어 썼다는 것만으로도 놀랠 것이 아니냐. 위에 적은 이 모든 보물은 1921년 신유(辛酉) 9월에 경주읍내 봉황대 서편 반쯤 무너진 무덤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전부 한 무덤에서 나온 것은 물론이며 황금의 중량만으로도 삼백 냥중은 넉넉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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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또 한 가지 남은 진품은 옥통소다. 큰놈은 누른 대를 본떠 황옥으 로 되었는데 길이가 한자 여덟치 한푼, 작은놈은 푸른 대를 본떠 벽옥으로 되었는데 길이가 한자 다섯치 여섯푼, 그 자연스러운 마디와 빛깔조차 천연 죽(天然竹)과 조금도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아니 놀랠 수 없다. 세계 악기 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마는 이렇게 순옥으로 되고 천연물을 영락없이 모 방한 것은 별로 그 예를 찾지 못하리라. 큰놈은 사내가 불고 작은놈은 여자 가 불던 것인가. 옥에 닿은 꽃잎 같은 입술, 옥 위에서 남실남실 춤추는 옥 같은 손이 언뜻 눈앞에 나타나며 이 세상 것 아닌 미묘한 곡조가 요요히 내 귓가에 도는 듯하다. 이 옥적을 아뢸 때야말로 중천에 떠돌던 흰 구름도 머 무르고 난데없는 청학백학이 날아와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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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옥적의 내력에 대하여는 『여지승람(輿地勝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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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척유구촌기성청량속운동해룡소헌력대전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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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였으니 대개 큰 것을 가리킨 모양이며 발견되기는 이조 숙종 32년 이 인징(李鱗徵)이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 전승학(全承鶴)이란 사람의 사랑 담 속에서 파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에 연상되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 타난 만파식적(萬波息笛) 얘기다. 그 요령만 대강 따오면 이러하다. 신문대 왕(神文大王)당년 동해 가의 왜구(倭寇)를 진압하고자 감은사(感恩寺)란 절 을 세웠는데 그 이듬해 오월에 산 하나가 동해에 둥둥 떠서 감은사를 향해 오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기시고 해변에 거동하사 사자를 보내 그 이상한 산을 탐사해 본즉 산 모양은 거북 대가리같이 생겼고 그 위에 대 한 포기가 났는데 야릇하게도 그 대는 낮에는 두 포기가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말에 왕은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날 밤엔 감은사에 쉬시며 그 대의 기적을 보시기로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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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오정 때가 되어 그 대가 하나가 되며 문득 천지가 진동하고 풍 우회명(風雨晦暝)한 지 7일만에야 비로소 바람도 그치고 물결도 고요해지므 로 왕은 그때를 타서 곧 바다를 건너 그 이상한 산에 오르신즉 난데없는 신 룡(神龍)이 나타나 검은 옥대(黑玉帶)를 왕께 올리매 왕은 먼저 대가 하나 가 되고 또는 둘이 되는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으매, 용은 아뢰되 손뼉도 마 주쳐야 소리가 나는 모양으로 이 대도 합한 뒤에야 소리가 있을지니 성왕이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인즉 왕도 이 대로 통소를 만들어 불게만 되면 천하가 반드시 태평해지리라 하였다. 왕은 이 말에 일변 놀래고 일변 기뻐하사 오색 비단과 금옥을 이바지하고 용의 말대로 그 대를 베어 가지고 돌아오신 후 이 대로써 통소를 만들어 월 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감춰 두었는데 이 통소를 불 때에는 병란도 그치고 악역도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 질 때는 날이 개이며 폭풍도 그치 고 물결도 고요해져서 그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국보로 위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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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물론 황당한 전설이라 하겠고 또 만파식적은 분명히 대라 하였는데 이 옥적은 옥으로 된 것이니 만파식적의 전설과 이 옥적과는 아모런 상관이 없을 상도 하다. 그러나 옛날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요 무서운 노릇인 병란과 풍우를 다스리는 데 악기(樂器)를 썼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있는 일 이냐. 다른 민족 같으면 으레 칼이나 창 같은 무기를 들추어낼 것이어늘 한 조각 대에 전설의 살을 붙여 국보로 위한 것을 보아 그때 우리 조상이 얼마 나 평화롭고 운치 있고 풍정 있던 것을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 아니냐. 이대 도록 음악을 거룩하게 알아 소중하게 여겼고 진귀한 보물로 악기를 만들기 에 아끼지 않은 탓에 세상에도 진기한 이 옥적을 우리 후생에 끼쳐준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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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에서 내 눈을 멈추게 한 것은 석굴암에서 떼어왔다는 돌조각으로 살아 서 움직이는 듯한 주먹쥔 팔뚝, 백률사(栢栗寺)에서 옮겨 놓았다는 동불(銅 佛)인데 자태의 의젓함과 가슴과 팔뚝이 제법 육체미를 갖춘 것을 보아 범 상한 솜씨가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진기한 것으로는 이차돈의 공양탑이니 불교를 전파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죽게 되매 나 하나 죽는 것은 어렵지 않되 불교는 반드시 흥왕해야 우리 나라에 유익할 터인즉 내 목을 잘라 무슨 기적이 있거든 부디 불교를 신앙하라 하고 종용히 죽음에 나아갔 는데 목을 벤즉 문득 흰 피가 하늘에 솟아 조당(朝堂) 상하가 경동하고 이 공양탑을 지은 것이란 비명(碑銘)까지 있다. 이 공양탑은 육면석당(六面石 幢)으로 그 비명은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라 하건만 풍마우세로 필적을 잘 알아볼 수 없음은 유감 천만이라 하겠으며, 더욱이 귀중한 것은 한편에 이 차돈의 사형집행 광경을 새겼는데 이차돈이 쭈그리고 앉은 모양, 목이 한편 에 떨어지며 흰 피가 솟아오르는 광경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만일 이 새김이 그대로 성하게 남았던들 그 때 사형 집행하던 형식이며 또 는 그때 의복제도 같은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겠거든 함부로 굴리어 이대 도록 소중 소중한 비면(碑面)을 흐려지게 한 것은 열 번 스무 번 한탄할 따 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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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큰 경이(驚異)의 하나는 봉덕사 종이다. 주위 23척 4촌, 직경 7척 5 촌으로 그 안에서 두 활개를 벌리고 돌아다녀도 거치지 않을 만큼 되었다. 그 어마어마하게 큰 것에 나는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인도자 의 말을 들으면 큰 것만으로는 그리 놀라울 것이 없으되 첫째 그 음향이야 말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라 한다. 우연만한 종도 여간 따리어 소리가 잘 나지 않는 법이거든 저대도록 육중한 종이 손가락으로 튀기기만 해도 캥 하며 보통 구리만으로는 그렇게 청아한 소리를 내지 못할 터이매, 아마도 총 근량 12만량 가운데 삼분지 일 이상은 황금이 섞였으리라고 추측한다 하 며 또 한 가지 진기한 것은 네 귀가 다 각기 선녀의 구름 탄 모양을 새겼는 데 그 하늘하늘한 옷맵시가 가는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며 그 얼굴과 목덜미 가 완연히 드러나 조각만으로도 절품이라 하겠다. 이 종은 경덕왕 때에 시 작하여 그 아들 혜공왕(惠恭瓦) 시절에 비로소 준공된 것으로 맨들은 공인 의 고심은 물론 여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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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지하면 이 종을 맡아 만든 공인은 아모리 맨들어 놓아도 소리가 잘 나지 않아 고심참담한 끝에 부부끼리 의론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철탕에 집어 넣어 구리와 반죽을 해 놓고 보니 그 때에야 소리가 청아하게 났다하 고, 또 한 가지 전설은 과부가 복숭아를 먹고 아이를 낳아 귀히 기르는데 봉덕사 중이 와서 동냥을 달라니까 경망한 어미는 “우리 집에 줄 것이 없 으니 우리 아기나 줄까?”하였다가 이것이 말썽이 되어 필경 그 이상한 아 이를 중에게 뺏기고 중은 더리고 온 그 아이를 이 인경 속에 집어 넣어 맨 들은 까닭에 종을 칠 때마다 어미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어밀래!”하고 운다 한다. 두 가지 전설이 우리 안목으로 보면 다 얼른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우되 그 음량을 내는 데 고심했다는 것만을 엿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 는 신라 당년에 예술을 위하여 희생을 아끼지 않는 풍속이 없지 않았던 것 을 추측할 수 있을 듯싶다. 나는 앞길이 바쁘므로 잘 떼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어 박물관을 나왔는데 난생처음으로 이런 시조 한 마디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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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서니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가는 빗발조차 왔다갔다 한다. 옛 서울의 유적 구경엔 너무도 구슬픈 일기다. 먼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올 라 굴불사(掘佛寺) 사면석불(四面石佛)을 구경하였는데 『삼국유사』를 보 면 경덕왕께서 백률사에 거동하사 산밑에 이르시자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 가 들리거늘 파서 본즉 네모 난 큰돌을 얻은지라. 이에 사방에 부처를 새기 게 하시고 절을 이룩하사 굴불사라 하였는데 굴불사는 지금엔 자최조차 찾 을 길이 없으나 불상만은 엄연히 남았다. 정면엔 길이 12자 가량 되는 아미 타불 삼존(三尊)의 입상(立像)을 새겼고 오른편엔 보살의 선 모양을 역시 새겼으되 하늘하늘한 옷자락 속으로 뚜렷이 육체를 나타낸 것도 훌륭한 예 술품이라 하겠다. 나무를 더위잡고 까풀막진 데를 기어올라 백률사를 찾았 으나 별로 보잘것은 없었고 다만 지형이 높은 것을 이용하여 경주 전경을 한 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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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얼른 보기에도 넓은 줄은 알았지만 여기 올라 보니 더욱 그 광활한 데 아니 놀랠 수 없다. 남에는 금오산(金鰲山), 서에는 선도산(仙桃山), 동 에는 명활산(明活山), 그리고 북쪽에는 내가 오른 이 소금강 산줄기가 서로 꼬리를 물고 에둘러서 넓기는 넓으면서도 아늑한 생각이 나게 한다. 그리고 강물이 여기저기 흘러서 남천, 서천, 북천이 제각기 제 방향대로 흐르고 훤 하게 터진 모양이 지금 경성을 산악의 도시라 하면 경주는 분명히 평야의 도시요 물의 도시라 하겠다. 지금은 호수 2천을 넘지 못하고, 그 엉성한 꼴 이 보통 농촌의 대읍에도 오히려 꽁무니를 빼게 되었지만, 한참 당년엔 전 시(全市)가 1300방, 호수 17만 8천 9백을 넘겨 동양에 유수한 큰 도시 노릇 을 하던 당시의 면목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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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의 한양이 산과 산 사이를 부비대고 앉은 것과 비교해 보면 그때 사람 이 얼마나 배포가 넓고 규모가 큰 것을 알 것이 아니냐. 평원 광야에 외적 을 방비할 이렇다 할 잔손질이 없으니 국세(國勢)가 떨친 까닭도 까닭이려 니와 외적을 안중에 안 둔 웅대한 기백도 상당하고 남을 듯하다. 이대도록 외국 방비에 소홀한 까닭으로 경애왕(景哀王) 당년 후백제 견훤(甄萱)이 질 풍같이 짓쳐 들어와 포석정에서 질탕하게 노는 왕을 어렵지 않게 잡아내고 왕후를 능욕하며 꽃 같은 궁녀 희빈은 무지한 군사에게 짓밟히는 일대 비참 한 활극을 연출하게도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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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극의 장소요 또한 당년의 풍류성사의 옛터인 포석정 자리는 지금도 뚜렷이 남았다. 전복 모양으로 돌동을 짜 놓고 교묘한 곡선을 그린 유상곡 수(流觴曲水)의 운치 있는 놀음 자리가 아즉도 행인에게 옛일을 설명해 준 다. 함박처럼 넓적한 돌함에 술을 가득히 담아 놓고 그 술을 떠서 흘리면 술담은 잔은 맑은 물이 미는 대로 흐르고 또 흘러 꼬불꼬불한 구비마다 걸 음을 멈추게 되었고 그 잔이 닿는 구비에 앉은 사람이 그 잔을 말리게 되었 다. 청풍에 노래 뜨고 청류에 술잔 뜨고 도도한 시흥은 가슴에 떠오를 제 백만 대병이 문앞을 짓쳐 들어와도 자리를 옮기기 싫기도 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아름드리 수백년 묵은 고목 아래 큼직한 두꺼비 한 마리가 옛일을 비웃는 듯이 입을 비죽거리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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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일대에 널린 고적은 읍내를 중심으로 사방 수십 리에 뻗쳤으니 그 이 름과 유래만 이렁성거려도 어렵지 않게 솔 두터운 책 한 권은 될 것이다. 짧은 시간과 바쁜 걸음, 한정있는 지면과 졸렬한 붓대는 가진 기자는 암만 해도 이 소임을 다할 길이 없다. 눈 딱 감고 함부로 빼 던지고 대모한 것 중에도 대모한 것만 골라 적는 수밖에 없다. 옛날의 왕성 월성을 찾아드니 석축(石築)이라는 옛날 형용은 알아볼 길도 없고 새파란 잔디가 가지고 놀 고 싶다. 문천(蚊川)의 북쪽 두덩을 나리누르며 꼬불꼬불 흐르는 강물을 따 라 초생달 모양을 그린 것은 아름답고 아담하게 그야말로 미인의 눈썹을 생 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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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이름이 되고 오늘날까지 조선의 고호로 우리에게 감개 깊은 회 포를 일으키는 계림은 정작 와서 보니 아모 것도 아니다. 2천평 남짓한 평 지에 고목 몇 주가 우뚝우뚝 서있을 따름. 저 나뭇가지에 금송아지가 걸리 고 흰닭이 울고 그 밑에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아 모리 전설이라 해도 믿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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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에 들어서니 석빙고가 눈앞에 나타난다. 『삼국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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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였으니 신라 때부터 벌써 얼음을 캐어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석빙고도 물론 그 때의 유물로 영조 17년에 이 자리에 옮겨 개축한 것이 라는데 전부가 튼튼한 화강석으로 쌓았고 천장을 또한 돌로 아치 모양으로 지은 것이다. 섣불리 그 안에 들어서매 발아래 미끈하며 지금도 찬 기운이 옷소매를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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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을 나와 북쪽으로 얼마 아니 올라가서 주막집 길 건너 신라 유물의 가 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인 첨성대가 둥글넓적한 머리로 내 발길을 잡아 당 긴다. 신라 27세 선덕왕(善德王) 때 건축한 것으로 서력으로 632년, 동양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천문 관측대라 한다. 원통형(圓筒形)으로 화강석을 쌓 아 올린 것인데 높이가 29척 넘고, 꼭지의 넓이가 8척 5촌, 농업국인 우리 나라에 천문대가 먼저 발달한 것도 어엿한 일이다. 다만 후생이 못난 탓에 정당한 발달을 계속하지 못하고 이 첨성대를 자랑하게 됨은 통곡할 노릇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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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엿뉘엿 선도산(仙桃山)으로 기울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구경에 지친 고달 픈 몸을 안압지 둔덕 풀밭에 쉬었다. 연당 안에 별궁 짓고 돌 모아 산 만들 고 기화요초(琪花瑤草)며 진금기수(珍禽奇獸)며, 절경에 흠씬 인공을 아로 새긴 곳이 당년의 안압지라 한다. 못에 다다라 구름을 헤치고 솟았다는 임 해전(臨海殿)은 얼마나 굉걸하였던고! 아까 금관총 유물에서 본 것과 같은 으리으리한 금관을 쓰신 임금과 신하의 거동. 왼 몸에 은하수와 같이 번쩍 이는 무수한 주옥을 늘인 희빈궁녀의 아름다운 모양이 문득 눈앞에 아련히 나타난다. 못 위에 만발한 연꽃과 궁녀들의 아리따운 그림자가 고움을 다투 고 청학백학도 흥에 겨워 우줄우줄 나래를 벌리어 춤추는 사람의 소매와 한 데 어우러졌으리라. 북같이 넘나드는 옥수에 가득찬 황금잔이 기울기도 하 였으리라. 기름같이 맑은 물얼굴을 스치고 청풍을 따라 반공에 흩어지는 노 랫가락은 또 얼마나 청아하였을까. 얼마 만에 이런 무지개 같은 몽상을 깨 고 보니 현실은 또 얼마나 쓸쓸한가. 임해전 터전엔 군청에서 지었다는 초 라한 기와집이 볼상없이 앙상한 꼴을 내밀었고 못가에는 물풀이 우거질 대 로 우거졌는데 케케 낡은 대패밥 모자를 쓴 친구가 낚싯대를 드리고 있다. 들으니 살찐 붕어가 꽤 많이 잡힌다던가. 낚싯대를 채일 적마다 잔 금을 내 며 수멸수멸하는 물얼굴도 옛일을 그리며 우는 듯 하다. 되지 않으나마 시 조 2수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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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타 파립어옹(破笠漁翁)만 긴 낚시를 드리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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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를 지나 북쪽으로 약 한 마장쯤 하여 질펀한 강가에 황룡사(黃龍寺) 의 옛 자리는 거창한 돌주추가 밭이랑과 집마당 사이에 띄엄띄엄 놓이어 당 년의 장관을 가르쳐 준다. 강변에 나앉은 것으로 보아 황룡의 기적도 그럴 상싶다마는 오늘날엔 그 자리조차 온전히 알 길이 없다. 바루 그 옆에 분황 사 9층탑이 행인의 옷소매를 잡아끈다. 벽돌 만큼씩한 잔돌로 곱게 쌓아 올 렸는데 네 귀에 달린 문이 손으로 밀면 쉽사리 열리고 닫히는 것이 나무로 된 문보담도 더 가볍다. 옛날은 아홉 층이러니 오늘날엔 세 층밖에 남지 않 았다. 15년 전 총독부에서 수선을 할 때 석함 가운데서 금옥과 옛날 돈 등 수십점을 많이 발견했다 하며 간신히 세 층 밖에 수리를 못했는데 전에 새 지 않던 비가 지금은 줄줄 흐른다고. 사천왕 절터엔 두 개의 귀부(龜趺)만 남았고 재매정(財買井)을 찾아드니 김유신의 옛 집터는 말목으로 알아차릴 뿐 박혁거세의 발상지 나정(蘿井), 그의 비 알영 부인의 발상지 알영정(閼英井), 그들이 임금 노릇하시던 숭덕 전(崇德殿), 그들을 위시로 그 자손이 돌아가 묻히신 오릉(五陵)은 전설 이 외에 별로 이렇다 할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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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사(天官寺) 자리도 주추밖에 남지 않았는데『여지승람』에 의지하면 그 절의 유래가 재미있다.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같은 위인으로도 타오르는 청춘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연히 꽃거리에 발을 들여 놓게 되고 어여쁜 이성의 품에 서 세월 가는 줄 잊었던 모양이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격으로 필경 그 대 부인에게 들키게 되고, 김유신 같은 아들을 두신 만큼 그 대부인도 매우 엄 격하셨던지, 깊이 훈계하시되 “내가 아비 없이 너를 길러 하로바삐 장성을 하여 나라를 위해 공명을 세워 가정을 빛내기 바랐더니 주사청루에서 헤어 날 줄 모르니 이런 기막힐 노릇이 어데 있느냐!”하시고 울기를 마지 않으 매 유신이 이에 느낀 바 있어 그 계집의 문앞도 지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서 를 하였는데, 하로는 술이 몹시 취하여 말을 타고 돌아갈새 말이 옛날 길을 좇아 그 여자의 집에 이르렀다. 그 여자는 일변 기뻐하고 일변 원망하며 울 면서 유신을 맞아 들였는데 유신이 술이 깨자, 한칼에 탔던 말을 베고 안장 도 버린 채 옷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왔다. 이 절은 곧 그 여자의 집터요, 천 관(天官)이라 함은 그 여자의 호라 하였다. 김유신의 결심도 물론 놀랍다 하겠거니와 당시의 창부로 천대를 받던 여자가 어엿한 부처님이 되고 그 집 터가 절이 된 것은 실로 흥미 있는 사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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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늦게야 여관에서 저녁밥을 마치고 그 자리에 늘어졌다. 몸은 한껏 피로 하지마는 흥분된 신경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다. 잠이야 언제라면 못자 랴, 하고 풀대님한 채로 여관을 나섰다. 마치 천년 고도의 혼이 부르는 사 람 모양으로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겨 놓았다. 얼마를 나왔는지 내 앞에는 칼 등 같은 좁은 밭둑과 쫄쫄거리는 개울물이 길을 막는다. 잔디의 아모 데나 펄썩 주저 앉았다. 개고리가 이따금 적막을 깨칠 뿐이요 사면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그렇다! 정말 모든 것이 죽은 듯하다. 구름이 흐르는 서쪽 하늘 가엔 초생달이 으스레 비친 양도 죽음을 우는 눈동자인 듯. 불꽃을 흩으며 나르는 먼지도 귀화(鬼火)인 듯. 가물가물한 내가 길길이 끼인 사이에 우뚝 우뚝 떠오른 누누한 무덤은 얼마나 쓸쓸한고! 쌓이고 쌓인 죽음 가운데 움 직이는 오직 하나의 산 목숨인 나의 숨길도 질식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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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한 감개가 가슴을 누른다. 한참 당년 삼국을 통일하고 세계에 자랑할만 한 문화와 예술을 창조해 낸 이곳이 이대도록 소리 없이 냄새 없이 죽어 넘 어질 줄이야! 죽었다니 말이 되느냐. 너는 그 찬란한 유적을 보지 못했느냐. 잇대었던 자최를 찾지 못했느냐. 세계에 자랑할 만한 조상을 가진 것을 앙탈하려느 냐. 나는 문득 귓결에 이런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이 소리를 외치는 심정이 더욱 슬펐다. 아모리 아름다운 꽃과 높은 향기와 탐스러운 열매를 한 시절 에 가졌던 나무라도 다시 새싹과 새 움을 트지 못할 때엔 우리는 그 나무를 가리켜 죽었다 할 것이다. 이 묵은 등걸에 새 꽃이 피고 새 열매가 맺어야 만 줄기차게 뻗친 뿌리가 기운 쓴 보람이 있을 것이 아니냐. 이 위대한 죽 음, 냄새 나는 시체를 밟고 새로운 생명이 솟아올라야만 조상 잘 둔 큰소리 도 칠 것이 아니냐. 그런데! 그런데! 그 생명은 어데에서 움직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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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아침 첫 차로 경주를 떠나 불국사로 향하다. 떠날 임시에 봉황대 (鳳凰臺)에 올랐건만, 잔뜩 찌푸린 일기에 짙은 안개는 나의 눈까지 흐리고 말았다. 시포(屍布)를 늘어 놓은 듯한 희미한 강줄기, 몽롱한 무덤의 봉우 리, 쓰러지는 듯한 초가집 추녀가 도모지 눈물겹다. 어젯밤에 나를 부여잡 고 울던 옛 서울은 오늘 아츰에도 눈물을 거두지 않은 듯, 그렇지 않아도 구슬픈 내 가슴이어든 심란한 이 정경에 어찌 견디랴. 지금 떠나면 1년, 10 년, 혹은 20년 후에나 다시 만날지 말지! 기약 없는 이 작별을 앞두고 눈물 에 젖은 임의 얼굴! 내 옷소매가 축축이 젖음은 안개가 녹아 나린 탓만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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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기차는 반 시간이 못 되어 불국사 역까지 실어다 주고, 역에서 등 대(等待)했던 자동차는 10리 길을 단숨에 껑청껑청 뛰어서 불국사에 대었 다. 뒤로 토함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울창한 송림을 끌며 앞으로 광활한 평 야를 내다보는 절의 위치부터 풍수장이가 아닌 나의 눈에도 벌써 범상치 않 았다. 더구나 한 번 돌층층대를 쳐다볼 때 그 굉장한 규모와 섬세한 솜씨에 눈이 어렸다. 초창 당시엔 낭떠러지로 있던 곳을 돌로 쌓아올리고, 그리고 이 돌층층대 를 지었음이리라. 동쪽과 서쪽으로 갈리어 위 아래로 각각 둘씩이니 전부는 4개인데 1개의 층층대가 대개 17,8 계단이요, 길이는 57,8척으로 양가에 놓 인 것과 가운데 뻗친 놈은 돌 한 개로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인력을 들 인 것을 짐작할 것이요, 오늘날 돌로 지은 총독부와 조선은행에도 이렇듯이 대패로 민 듯한 돌은 못 보았다 하면 얼마나 그 때 사람이 돌을 곱게 다룬 것을 깨달을 것이다. 돌층층대의 이름은 동쪽엔 아랫것은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은 백운교(白雲橋)요, 서쪽엔 아랫것은 연화교(蓮花橋), 위의 것은 칠보교(七寶橋)라 한다. 층층대라 하였지만 아래와 위가 연락되는 곳마다 요샛말로 네모 난 ‘발코니’가 되고 그 밑은 ‘아치’가 되었는데 인도자 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못을 팠고 이 ‘아치’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층층 대를 다리라 한 옛 이름의 유래를 터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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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대 상하에는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쇠사실인지 은사실인지 둘러 꿴 흔적이 아즉도 남았다. 귀인이 절을 찾을 때엔 저편 못가에 나려 그림배 를 타고 들어와 다시 보교를 타고 이 돌층층대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기 도 하였단다. 넓은 못에 연꽃이 만발한데 다리 밑으로 돌아드는 맑은 흐름 엔 으리으리한 누각과 석불의 그림자가 용의 모양으로 그리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떠나가는 그림배! 나는 당년의 광경을 머리 속에 그리며 스스로 황홀 하였다. 활동사진에서 본 물의 도시 ‘베니스’의 달빛 긴 바닷가에 그림배 를 저어가는 청춘남녀의 광경이 선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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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층층대를 거쳐 문루(門樓)를 지나 서니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눈 앞에 나타난다. 이 두 탑은 물론 돌로 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만져 보 아도 돌이요, 뚜들겨 보아도 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오히려 고만둘지라도,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모리 하여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야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만일 그 탑을 맨든 원료가 정말 돌이라면, 신라 사람은 돌을 돌같이 쓰지 않고 마치 콩고물이나 팥고물처럼 맘대로 뜻대로 손가락 끝에 휘젓고 주무 르고 하는 신통력을 가졌던 것이다. 귀신조차 놀래고 울리게 하는 재조란 것은 이런 솜씨를 두고 이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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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네 면엔 자그마한 어여쁜 돌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올라서니 가 운데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접어 놓은 듯 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둥과 두 층대의 석반을 받든 어름에는, 나무 로도 오히려 깎아내기가 어려울 만한 소로(小櫨)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 닥을 벌렸다. 지붕 위엔 제2층의 네모 난 돌난간이 둘러 쟁반 같은 이층 지 붕을 받들었고, 그 위엔 8모 난간을 받들었다. 석공이 기절(奇絶)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기상천외의 의장은 또 어데서 얻어온 것인고! 바람과 비에 시달린 지 천여 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 고, 이지러지지 않고, 옛 모양을 변하지 않았으니, 당대의 건축술도 또한 놀랠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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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매 이 탑의 네 귀에는 돌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 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倫敦)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오백만 원을 주 어야 내어놓겠다 한다던가. 소중한 물건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굴리 며 어느 틈에 도적을 맞았는지도 모르니 이런 기막힌 노릇이 또 있느냐.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이 만일 있다 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 아 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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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은 다보탑 서쪽에 있는데 다보탑이 혼란한 잔손질과는 딴판으로 수 법이 매우 간결하나마 또한 정중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미인(盛裝美人)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 게 차린 담장한 미인이라 할까. 높이 27척, 층은 역시 3층으로 한 층마다 수려한 돌병풍을 두르고 병풍 네 귀에 병풍과 한데 얼려 놓은 기둥이 있는 데 설명자의 말을 들으면 이 탑은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되었다 하니 그 웅 장하고 거창한 규모에 놀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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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의 별명은 무영탑, 곧 그림자가 없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랑과 예술에 얽힌 눈물겨운 로맨스가 숨어있다. 그때의 사람이 얼마나 종교와 예술에 몸 을 바쳤고 또는 사랑과 예술을 한 덩어리로 만든 황홀경에서 살았다는 것이 이 아름답고 슬프고 신비로운 전설에 풍겨 있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시절, 당시 재상 김대성(金大成)은 왕의 명을 받들 어 토함산 아래 불국사를 이룩할새, 나라의 힘을 기울이고 천하의 명공(名 工)을 모아들였는데, 그 명공 가운데는 멀리 당나라로부터 불러내온 젊은 석수 하나가 있었다. 이 절의 중심으로 말하면 두 개의 석탑으로, 이 두 탑 의 공사가 가장 거창하고 까다로웠던 것은 물론이다. 젊은 당나라 석수는 그 두 탑 중의 하나인 석가탑을 맡아 짓기로 되었다. 예술의 감격에 뛰는 젊은 가슴의 피는 수륙 수천 리 고국에 남겨두고 온 사랑하는 안해도 잊어 버리고 오즉 맡은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끓고 말았다. 침식도 잊고 세월 가 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는 왼 몸과 왼 마음을 오직 이 공사에 바쳤다. 덧없는 세월은 어느덧 몇 해가 흘러가고 흘러왔다. 수만 리 타국에 남편을 보내고 외로이 공규(空閨)를 지키던 그의 안해 아사녀(阿斯女)는 동으로 흐 르는 구름에 안타까운 회포를 붙이다 못하여 필경 남편을 찾아 신라로 건너 오게 되었다. 머나먼 길에 피곤한 다리를 끌고 불국사 문앞까지 찾아왔으 나, 큰 공역을 마치기도 전이요, 더러운 여인의 몸으로 신성한 절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고 차디찬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절 문을 지키던 사람도 거절을 하기는 하였으되 그 정상에 동정하였음이리 라. 아사녀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얼마 아니 가면 큰 못이 있는데, 그 맑은 물얼굴엔 시방 짓는 절의 그림자가 뚜렷이 비칠지니, 그대 남편이 맡 아 짓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응당 거기 비치리라. 그림자를 보아 공사가 끝 나거든 다시 찾아오라.” 하였다. 아사녀는 그 말대로 그 못가에서 정심정력으로 비치는 절 모양을 들여다 보며 하로바삐, 아니 한시바삐 석가탑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달 빛에 흐르는 구름 조각에도 그는 몇 번이나 석가탑의 그림자로 속았으랴. 하로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지리하고도 조마조마한 찰나 찰나를 지나는 동안에 절 모양이 뚜렷이 비치고, 다보탑이 비치고, 가고오는 사람 의 그림자도 비치건마는, 오즉 자기 남편이 맡은 석가탑의 그림자는 찾을래 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안해가 멀리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당나라 석수 는 밤을 낮에 이어 마츰내 공사를 마치고 창황히 못가로 뛰어왔건만, 안해 의 양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일. 아모리 못얼굴을 디미다보아도 석 가탑의 그림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데 실망한 그의 안해는 남편의 이름 을 부르며 고만 못 가운데 몸을 던진 까닭이다! 그는 망연히 물얼굴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안해의 이름을 불렀으랴. 그러 나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만 귓가를 스칠 뿐.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이 슬나리는 새벽 달빛 솟는 저녁에도 그는 못가를 돌고 또 돌며 사랑하는 안 해를 그리며 찾았다. 오늘도 못가를 돌 때에 그는 문득 못 옆 물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아련히 나타났다. “아! 저기 있구나!”하며 그는 이 그림자를 향해 뛰어 달려들었 다. 그러나 벌린 그의 팔 안에 안긴 것은 안해가 아니요, 사람이 아니요, 사람만한 바위덩이다. 그는 바위를 잡은 찰나에 문득 제 눈앞에 나타난 안 해의 모양을 길이길이 잊지 않으려고 그 바위를 새기기 시작하였다. 제 환 상에 떠오른 사랑하는 안해의 모양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 했다. 그는 제 예술로 죽은 안해를 살리고 아울러 부처님에까지 천도하려 한 것이다. 이 조각이 완성되면서 자기 역시 못 가운데 몸을 던져 안해의 뒤를 따랐 다. 불국사 남서방에 영지(影池)란 못이 있으니 여기가 곧 아사녀와 당나라 석 수가 빠져 죽은 데다. 내가 찾을 때엔 장마가 막 그친 뒤라 누런 물결이 산 발치의 소나무 가지에 넘실 거리는데, 부처님을 새긴 천연의 돌은 지난 날 의 애화를 다시금 일러 주는 듯. 그 새김의 선(線)이 자못 섬세한 것은 부 처님을 새기면서도 알뜰한 자기 안해의 환영이 머리를 지배한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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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과 석가탑에 무한 경탄과 감개를 마지 않다가 대웅전을 디미다보니 정면에 엄연히 선 삼위불(三位佛)의 입상이 보통 부처님보담은 어마어마하 게 크다마는 신라 당시의 유물은 아니고, 영묘조(英廟朝)에 개축할 때 맨들 어 놓은 것이라 하며 다만 경탄할 것은 개축할 때 천장과 벽에 올린 휘황찬 란한 단청이 3백여 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조금도 빛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 이다. 무슨 물감을 어떻게 풀어서 썼는지 채색 학자의 연구 문제라던가. 앞 길이 바쁘매 아츰도 굶은 채로 석굴암을 향해 또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서 10리 안팎이라니 그리 멀지는 않되, 가는 길이 토함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잿길이요, 날은 흐리어 빗발까지 오락가락하건마는, 이따금 모닥불 을 담아 붓는 듯한 햇발이 구름을 뚫고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두어 모롱이 도 못 접어들어 나는 벌써 숨이 차고 전신에 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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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울한 송림은 볼 수 없건마는 우거진 잡목 사이에 다람쥐가 넘나드는 것 도 또한 버리지 못할 정취다. 거의 상봉을 다 올라와서 동해가로 내다앉은 치술령을 손가락질할 제 장렬하던 박제상(朴堤上)의 의기가 다시금 가슴을 친다. 저 치술령이야말로 박제상의 안해가 남편을 보내며 울던 곳이다. 단 신 홀몸으로 적국에 들어가는 남편을 부르고 또 불렀건만, 박제상은 다만 손을 저어 보이고 의연히 동해에 배를 띄웠다. 물과 하늘이 한데 어우러진 곳에 남편의 탄 배가 가물가물 사라질 제 그의 안타까운 마음은 어떠하였으 리! 피눈물로 울고 울다가 고만 잦아지고 말아, 거기에는 지금에도 그 부인 의 망부석(望夫石)이 그대로 남아 있어 행인의 발길을 멈춘다 하거니와, 천 추에 빛나는 의기를 남기고 왜국 목도(木島)에서 연기로 사라진 박제상의 의혼렬백(毅魂烈魄)도 지금 어디에서 헤매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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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이 신라 17세 눌지왕(訥祗王) 때 사람으로 먼 저 고구려에 들어가 볼모로 잡혀 있는 임금의 동생 보해(寶海)를 빼내어 왔 고 앉은 자리가 덥기도 전에 다시 왜국으로 들어가서 종횡하는 술책으로 역 시 볼모 잡힌 미해(美海)를 감쪽같이 본국으로 돌려 보내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보낸 이의 신상을 염려하여 자기는 발 한 자욱 사지(死地)에 옮기지 않았고, 전후 사실이 발각되자 열화와 같은 왜왕의 분노를 사게 되어 단쇠 로 지지고 다리살을 벗겨내어 갈대 위에 걸렸지만 사색(辭色)조차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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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만 굽혔던들 죽는 목숨이 살아날 뿐인가. 영화와 부귀까지 마음대로 누릴 수 있었거든 모든 것을 물리치고 의연히 죽음에 나아간 그 맵고 뜨겁고 비장한 태도는 동서고금의 찬란한 역사의 책장을 차지한 의인열사가 많다 할지라도 그의 짝만은 찾기가 어려우리라. “차라리 계림의 개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신라의 형벌은 달게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먹지 않겠다!”하고, 부르짖던 그 열렬한 호통이 지금도 우레같이 들려온다. 아아, 무지개같은 그의 기개는 누구에게 전했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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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가 살을 오려도 태연자약(泰然自若)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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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띤 화한 얼굴 봄바람이 넘노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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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 넋이 곧 있으면 님의 뒤를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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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술령 빼난 봉을 묻어 넘은 이 빗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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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에 닿고 왼 몸이 땀에 멱을 감는 한 시간 나마의 길을 허비하여 나는 겨우 석굴암 앞에 섰다. 멀리 오는 순례자를 위하여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석간수는 얼마나 달고 시원한지! 연거푸 두 구기를 들이키매 피로도 잊고 더위도 잊고 상쾌한 맑은 기운이 심신을 엄습하여 표연히 티끌세상을 떠난 듯도 싶다. 돌층층대를 올라서니 입구의 좌우 돌벽에 새긴 인왕과 사천왕이 홉뜬 눈과 부르걷은 팔뚝으로 나를 위협한다. 어깨는 엄청나게 벌어지고 배는 홀쭉하고 사지의 울퉁불퉁한 세찬 근육! 나는 힘의 예술의 표본을 본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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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문안으로 들어서매 석련대(石蓮臺) 위에 올라 앉으신 석가의 석상은 그 의젓하고도 봄바람이 도는 듯한 화한 얼굴로 저절로 보는 이의 불심을 불러일으킨다. 한 군데 빈 곳 없고 빠진 데 없고 어데까지 원만하고 수려한 얼굴, 알맞게 벌어진 어깨, 수려히 내민 가슴, 퉁퉁하고도 점잖은 두 팔의 곡선미, 장중한 그 모양은 정말 천추에 빼어난 걸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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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석벽의 허리는 15간으로 구분되었고 각 간마다 보살과 나한의 입상을 병풍처럼 새겼는데, 그 모양은 다 각기 달라 혹은 어여쁘고 혹은 엉성궂고 늠름한 기상과 온화한 자태는 참으로 성격까지 빈틈 없이 표현하였으니, 신품(神品)이란 말은 이런 예술을 두고 이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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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뒤벽 중앙에 새긴 십일면 관음보살은 더할 나위 없는 여성미와 육체미까지 나타내었다. 어데까지 아름답고 의젓한 얼굴찌는 고만두더라도, 곱고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드리운 왼편 팔, 엄지와 장지 사이로 사붓이 구실줄을 들었는데, 그 어여쁜 손가락은 곰실곰실 움직이는 듯, 병을 치켜쥔 포동포동한 오른 팔뚝! 종교 예술품으로 이렇게 곡선마다 여성미를 영절스럽게도 나타내었다. 그나 그뿐인가, 수없이 늘인 구실 밑에 하늘하늘하는 옷자락은 서양 여자의 야회복을 생각나게 한다. 그 아른아른한 옷자락 밑으로 알맞게 볼록한 젖가슴, 조붓하면서도 슬밋한 허리를 대어 둥그스름하게 떠오른 허벅지, 토실토실한 종아리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는 살아 움직인다. 그의 몸엔 분명히 맥이 뛰고 피가 흐른다. 지금이라도 선뜻 벽을떠나서 지그시 감은 눈을 뜨고 빙그레 웃을 듯. 고금의 예술품을 얼마쯤 더듬어 보았지만, 이 묵묵한 돌부처처럼 나에게 감흥을 주고 법열(法悅)을 자아낸 것은 드물었다. 나는 마치 일생을 두고 그리고 그리던 고운 님(보살님이시어! 그릇된 말씨의 모독을 용서하사이다. 보살님이 내 가슴에 붙여 주신 맑은 불길은 이런 모독쯤은 태우고야 말았습니다.)을 만난 것처럼, 나는그 팔뚝을 만지고 손을 쓰다듬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어린 듯 취한 듯 언제든지 언제든지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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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위에는 돌려 가며 좌우 각각 다섯 곳에 불좌를 만들었고, 왼편엔 네 분 보살님, 오른편엔 두 분 보살님과 지장보살과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좌상(坐像)을 모셨는데 그 솜씨도 또한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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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의 옛 이름은 석불사(石佛寺)로 신라 경덕왕 때 이룩한 절이라 한다. 석굴이라 함은 곧 돌을 파내어 절을 지은 것이매, 부처님을 새기고 모신 것도 모두 돌이요, 땅바닥도 돌이요, 천장도 물론 돌이다. 굴의 구조는 동남으로 향하여 평면 원형(平面圓形)으로 좌우 직경 22척 6촌, 앞 뒤 직경이 11척 7촌 2푼, 입구의 넓이는 11척 1촌 5푼, 옆벽의 두께 약 9척이라 한다. 1천여 년의 바람과 비에 귀중한 옛 솜씨가 더러 이지러지고 무너진 것은 아깝기 한량없지마는, 15년 전에 크게 수리한 탓으로 도리어 옛 것과 이제 것을 분간키 어렵게 된 것은 더욱 한할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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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앞문은 지금 손질이 많았지만 정작 굴속은 별로 수선한 것이 없고 아즉도 옛 윤곽이 뚜렷이 남았음은 불행중 다행이라 할까. 그안에 모신 부처님, 관세음보살, 나한님네들의 좌상과 입상이 어느 것 하나 세상에 뛰어나는 신품이 아님이 없다는 것은 좀된 붓끝이 적이 끄적거린 바이로되, 석가님이 올라앉으신 돌 연대도 거궁하거니와 더구나 천정의 장 치에 이르러서는 정말 찬란하다 할밖에 없다. 하늘 모양으로 궁륭상(穹窿狀)을 지었고, 그 복판에 탐스러운 연꽃 모양을 떠놓은 것은 또 얼마나 그 의장이 빼어나고 솜씨가 능란한가. 온전히 돌이란 한 가지의 원료로 이대도록 공교하고 굉걸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낳아낸 것은 모르면 몰라도 동양 서양의 건축사에 가장 영광스러운 한 장을 점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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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문을 나서니 밖에는 선경이 또한 나를 기다린다.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띄엄띄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쌓였는데, 하늘 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 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 바다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은 날이면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나래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츰 햇발이 둥실 동해를 떠오르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 먹는 나 같은 속인엔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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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을 나려와 괘릉을 둘러보매 문무석인(文武石人)의 웅혼하고 수려한 양자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더구나 그 무신의 위엄 있고도 너그러운 얼굴, 칼 집은 부르걷은 팔뚝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던 기억은 아즉도 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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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경주에 대한 순례기는 마치려 하거니와 총총한 걸음, 바쁜 시간, 좀된 붓끝, 제한 있는 지면은 유적의 몇분지 일, 천분지 일도 구경을 못하였다. 들은 그것뿐 그것이나마 십분지 일을 적지 못한 것은 독자께 지은 죄도 크거니와 내 스스로 더욱 슬퍼한다. 처음 예정은 경주를 거쳐 부여, 개성, 평양, 구월산 등 순례기를 쓰려 하였으나 그 또한 극무와 지면 관계로 뒷 기회에 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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