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청량산을 유람하고자 일찍 풍기군(豐基郡)의 군재(郡齋)에서 출발하니 송별하는 사람은 예천(醴泉)의 서생인 장응문(張應門)과 밀양(密陽)의 이학령(李鶴齡)과 함양(咸陽)의 박승원(朴承元)과 풍기(豐基)의 권숙란(權叔鸞)과 함안(咸安)의 이기(李機)와 칠원(柒原)의 배억(裵億)과 한양(漢陽)의 민종중(閔宗中)과 밀양(密陽)의 유분(柳芬)과 예천(醴泉)의 권태수(權鮐壽)와 권호금(權好金)이었고, 따라오는 사람은 연성(延城)의 이원(李愿)과 천령(天嶺)의 박숙량(朴淑良)과 임영(臨瀛)의 김팔원(金八元)과 아박(阿博) 네 사람이었다.
5
이날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인 박승간(朴承侃)과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인 박승임(朴承任) 형제가 다례를 열었으니 이는 어버이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그 형인 박승건(朴承健), 박승준(朴承俊)도 계묘년(1543년, 중종 38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축하하는 예를 아울러 거행한 것이었다. 모임에 온 사람은 안동 부사(安東府使) 조세영(趙世英)과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홍(金洪)과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정(李楨)과 봉화 현감(奉化縣監) 이의춘(李宜春)과 삼가현감(三嘉縣監) 황사걸(黃士傑)과 예안 현감(禮安縣監) 임내신(任鼐臣)과 안기 찰방(安奇察訪) 반석권(潘碩權)과 창락 찰방(昌樂察訪) 허빙(許砯)과 전 사간(前司諫) 황효공(黃孝恭)과 전 사적(前典籍) 주연(秦淵)과 사향(四鄕)의 부로(父老)들이었고 나도 그 모임에 갔었다.
6
구대(龜臺)의 상류에서 연회를 열어 강의 상류에 자리를 펴니 안과 밖이 모두 축하하고 장막이 구름같이 펼쳐지니 관람하는 사람들이 고을을 기울인 것 같았다. 주서의 부친인 진사(進士) 박형(朴珩)은 나이가 60인데도 수염이 드문드문 희고 풍채와 거동이 단정하여 진실로 참된 어른이었다. 일곱 아들이 모두 문장을 공부하는 선비로 소과와 대과에 연이어서 합격했으니 이 나라의 빛이고 그 복록(福祿)이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7
잔치가 끝나고 말을 달려 객사로 들어가 쌍청당(雙淸堂)에 숙박하려고 하니 이원(李愿)과 아박(阿博)은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고, 박숙량과 김팔원은 어두워져서 묵을 장소에 이르렀다. 매우 기뻐 어린아이를 불러 촛불을 켜게 하니 이원이 소 동파의 ‘봉상팔관시(鳳翔八觀詩)’를 읽으므로, 먼저 이원에게 석고가(石鼓歌)를 읊게 하자 소리가 씩씩하게 조화를 이루어 매우 상쾌하였다. 바로 소 자첨(蘇子瞻)을 평할 때에 그 높은 재주는 창려(昌黎) 한유(韓愈)를 능가하지만 그 입신의 차이가 천리만큼 어그러지니 애석하구나. 스스로 중원(中原)을 향한다고 해놓고 오히려 서구(西甌)와 남월(南越)로 가서 투기하는 남자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슬픈 일이다. 젊은 악사를 시켜 자민루(字民樓)에 올라 피리를 불게 하니 그 소리가 맑고 부드러워 월궁의 계수에 통하는 것 같았다. 나와 동년생〔同乙生〕인 복스러운 기생 탁문아(卓文兒)가 선물로 한 항아리 술을 얻어 안고 와서 말하기를,
8
“오늘밤에 어른들께서 감흥이 되신 것 같은데 늙은 기생도 감흥이 없지 않습니다.”
9
하고는 드디어 술자리를 열어 크게 취하였다.
11
“너가 대학을 송독하지 않으면 유탕해질까 두렵다.”
13
“그 마음이 아름답고 아름다워 의로써 이로움을 삼는다.”
14
라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감탄하니 전고의 일에 강개함이 있었던 것이다.
17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고, 안동, 영천, 예천, 봉화, 예안의 여러 관원들에게 작별하고 안동에 피리부는 귀흔(貴欣)이란 사람에게 길을 인도하게 하고 말을 살피는 일에 종사하는 하인들을 앞서 가게 하고 사천(沙川)을 건너 잠시 소게정(召憩亭)에서 밥을 먹었다.
18
정자가 영천과 예안이 합하는 지점에 있는데,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영천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지은 것으로 그 후에 공이 방백이 되어 또 이곳에서 쉬었었다. 나무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녹음이 가득하여 길 가다가 목마르고 뜨겁게 내리쬐는 더위를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부모에게 가는 것과 같으니 ‘소게(召憩)’라고 이름할만 하였다.
19
용수(龍壽) 고개를 넘어 온계(溫溪)를 지나 진사 오언의(吳彦毅)를 만나 보고는 농암(聾巖)을 분수(汾水)의 집에서 뵈니 공이 문밖에 나와 맞이하였다. 자리에 앉아 바둑을 두다가 밥에 이어서 술을 내어 오도록 하고 대비(大婢)에게 거문고를 퉁기게 하고 소비(小婢)에게 아쟁을 켜게 하니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노래하기도 하고 귀전원부(歸田園賦)를 노래하기도 하며, 이하(李賀)의 장진주사(將進酒辭)를 노래하기도 하고, 소설당(蘇雪堂)의 ‘행화비렴산여춘(杏花飛簾散餘春)’의 구절를 노래하기도 하였다.
20
그 아들 문량(文樑)의 자는 대성(大成)으로, 모시고 앉았다가 축수곡을 노래하였는데 내가 대성과 함께 일어나 춤을 추니 공도 일어나 춤을 추었다. 공의 나이가 78세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더욱 감동되어 목이 메일 정도였다. 공이 사는 곳이 협소하지만 좌우에는 그림과 책이 있고 당 앞에는 화분을 벌여 두었으며, 담장 밑에는 화초를 심었고 뜰의 모래는 눈과 같이 깨끗하여 신선의 집에 들어온 것 같았다.
21
날이 저물어 부포(夫浦)로 들어갈 때 짐을 실은 말은 먼저 물을 건너게 하고 술취한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뗏목을 타고 어둡고 어지러운 가운데 감흥되어 아득히 세상을 잊어버리는 뜻이 있는 듯 하였다. 물을 건너 태평스럽게 잔디 언덕에 누워있으니 먼저 기다리던 전 만호(前萬戶) 금치소(琴致韶)와 그 조카들 4, 5명이 나를 맞이하여 그 집에서 유숙하려고 달빛과 함께 앞마을에 들어가니, 이 마을은 바로 우리 할머니 권씨의 아버지인 고 목사(故牧使) 권우(權虞)가 옛날에 거처하던 곳으로, 만호는 바로 권 목사 자매의 아들이어서 나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24
비가 조금 내렸다. 금씨 성을 가진 10여 명이 합에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먹고 출발하려고 할 즈음에 걸어서 앞길로 나가서 권씨 할아버지의 옛집을 바라보고 멀리 권간(權簡)의 묘에 배례하니 곧 목사 할아버지의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처음에 목사 조부가 장인인 총제(總制) 이각(李恪)을 따라 합포(合浦)에 진을 설치하였고, 칠원 부원군(柒園府院君)이 되었었다. 맏아들이 집안의 사위가 되어 그곳에 살게 되었으니 내가 칠원에 붙어 산 것도 권씨를 따른 것이다. 추억해 보니 비통한 감정 뿐이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갔다.
25
동쪽으로 가면서 어지러운 산속을 통과하여 푸른 냇물을 건넌 것이 몇번인지 알지 못하였다. 잠깐 비오고 잠깐 개어서 도롱이를 입었다가 벗었다가 하였는데 때때로 산촌이 있어 무릉도원을 방불케 했는데 가래질하고 밭가는 사람은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과 같은 부류이고, 바위를 지나쳐 밭가는 사람은 자진(子眞)과 같은 부류이고, 늙은이 같고 밭매는 사람은 방덕공(龐德公)인가 의심스러웠다. 제생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26
“요순같은 임금을 만나지 못하면 소를 끌고 이곳에 들어와 목피를 먹고 간수를 마시며 일생을 마치는 것도 옳을 것이다.”
28
30여 리를 가니 갈림길이 희미하여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다. 뒤따라 오는 예안 사람에게 의뢰하여 재산가는 길을 물어 배회하며 북쪽으로 큰 고개를 넘으니 처음으로 구름과 안개가 서쪽에 쌓여 있음이 보이니, 바로 청량산 여러 봉우리의 맑은 기운이 맺힌 것이었다. 매우 기뻐서 잠시 쉬었다가 산을 내려가 시냇물을 건너 방향을 바꾸어 다시 서쪽으로 가서 큰재를 넘어 벌처럼 붙어서 오르니 절벽이 첫 번째 고개보다 배나 험준하여 이미 인간의 경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첫 번째 고개 이름은 단속령(斷俗嶺)이라 하고 두 번째 고개 이름은 회선령(懷仙嶺)이라 하는데 복관을 지나서야 청량골로 들어가 말 위에서 도롱이를 헤치고 쳐다보니 기괴한 바위가 웅장하고 절벽이 천길이나 되었다. 연기와 안개 속에 은은히 보이는 높고 높은 것이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은나라 말기에 지조를 세운 것과 같으니 바로 탁립봉(卓立峯)이다. 동쪽 언덕을 돌아 오른쪽으로 돌아드니 돌길이 곁에 비껴 있어 두 다리를 멈추지 못하고, 말도 비탈길이어서 절룩거리며 웅크려 줄지어 가는 것이 매우 위험해 보여 도롱이를 벗고 말자갈을 당기니 등의 옷이 다젖고 걸음마다 조심스러워 몸과 마음이 모두 괴로웠다.
29
해가 저물 무렵에 연대사(蓮臺寺)에 이르니 천봉이 울긋불긋하고 구름은 걷히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여 정해진 것이 없으며, 그 어두움이 밤과 같아서 걷히면 낮이 되었다가 잠시 후 도리어 어두워지고 어둠이 다시 걷혀 열리니, 바라보는 가운데 산악의 경색은 다 드러나기도 하고 반쯤 드러나기도 하였다. 구름 기운은 위에서부터 가리어 덮인 것도 있고 아래로부터 증기가 오르는 것도 있고 혹은 고고하게 바위틈에서 나와서 바람에 헤쳐지고 떨어져서 백설같이 쌓이고 창구(蒼狗)처럼 달아나서 그 맑고 맑음과 성하고 성한 것이 내뿜고 들어마시는 것과 같아서 갑자기 모양이 변하여 잠깐 사이에 만가지 모양을 이루니, 천문을 담론하는 추연(騶衍)과 용을 조각하는 추석(騶奭)일지라도 형용하지 못할 것이다.
31
“빈도(貧道)가 오래도록 기다렸는데 님들께서는 어찌 이리 늦으셨는지요?”
32
하고, 노숙한 사람이 연기와 안개 속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33
“저기가 김생굴(金生窟)이고, 저기가 치원대(致遠臺)이고, 이 뒤에 원효사(元曉寺)가 있고 서쪽에 의상봉(義相峯)이 있으니, 옛적에 4명의 성인이 이 산에 살면서 도우(道友)를 맺고 오고 가면서 이곳에 유람하며 쉬었다고 합니다.”
35
“원효는 신라 중엽의 승려이고 김생, 의상도 다 신라에서 태어났으나 세대가 다르고 가장 뒤에 태어난 사람은 고운 최치원으로 신라 말에 출생하였으니 어찌 상종할 수 있었겠는가? 그대는 어리석은 말로 나를 속이지 말라.”
36
고 하니, 이로부터 승려들이 허탄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였다. 속언에 이르기를,
37
“옛적에 절에 승려가 있어 이 절을 창건하고자 죽어서 삼각우(三角牛)가 되어 재원을 실어 드려 제공할 즈음에 매우 수고하여 하루아침에 절 아래에서 죽으니 드디어 돌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다.”
38
하니, 이것을 시험삼아 물은 것이니, 이것은 속여서 미혹되게 함을 일침을 가하고자 한 것이었다.
39
젊은 승려가 있어 입을 열어 대답하려 하니 나이든 승려가 눈짓하여 못하게 하니 입을 닫고 말하지 못하였다. 조용히 말하기를,
40
“금씨성을 가진 생원 한 사람이 있어 사문에 삼각우를 그리도록 명하여 절에 오는 사람들에게 모두 인연을 맺은 것을 알게 하였다.”
42
“고운 최치원은 대국인 당나라에 들어가 황소의 격문을 써서 천하에 이름이 떨쳐져 드디어 동방 문장의 비조가 되어 문묘에 배향하는데 이르렀으나 실제는 우리 유가의 죄인이다. 옛적에 왕 이보(王夷甫)가 청담(淸談)을 잘하여 천하창생을 그르쳐 신주(神州)가 오호(五湖)에 빠져 들게 하여 영원히 중원 백대의 죄인이 되었으니 고운같은 이는 도리어 이보다 심하다. 큰 명예를 가지고 동국으로 돌아 왔으니 비록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으나 우리 동국사람들이 신선 가운데 한 사람같이 바라보았으니 그가 평생에 지나온 일수 일석(一水一石)이 지금에 오히려 도를 일컬음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진실로 고운에게 조금이라도 우리 유학의 문호를 알고 창언을 열었다면 고려왕조 5백 년이 이와 같이 심하게 불도에 빠져들어 침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순응(順應) 을 일컬어 대덕(大德)이라 하고, 이정(利貞)을 일컬어 중용이라 하니, 슬프구나. 이 두 요승이 과연 대덕과 중용이 된다면 누구인들 대덕, 중용이 되지 아니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라 걸을 도와 포학하게 만든 것이니 만세토록 유교(儒敎)에 죄를 얻었음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금생(琴生)이란 사람도 고운의 죄인이다.”
46
쾌청하였다. 말모는 종을 돌려 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절을 나설 즈음 절의 승려인 계은(戒誾)이 앞서 길을 인도하였다. 작은 시냇물을 따라 동쪽으로 오를 때 수목을 부여잡고 수십 보마다 한 번씩 쉬었다. 이원과 박숙량은 피리 부는 사람을 인솔하여 먼저 가니 청림(靑林) 사이에 가려졌다가 다시 보이는 것이 새로운 세계를 지나는 것 같았다.
47
가려진 곳으로 나아간 벗들은 치원대에 가 있어 피리 소리가 높이 일어 음향이 층층 절벽을 찢는 것 같았다. 김팔원은 아박과 모두 꽃을 꽂고 뒤에 있었고 지나가면서 별실(別室), 중실(中臺), 보문(普門) 세 사찰을 굽어보니 항아리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골짜기가 아늑하고 깊어 신기한 소리가 저절로 나고 비가 온 뒤에 여러 봉우리가 삐죽삐죽한 것이 걸어 갈수록 더욱 기이한 모습이었다.
48
진불암(眞佛庵)에 들어가니 승려가 없었던 것이 오래된 듯 하였다. 철벽이 뒤에 있고 나는 듯이 떨어지는 폭포가 왼쪽에 있어 역시 좋은 볼거리였다.
49
배회하며 남쪽으로 금탑봉(金㙮峯)을 향해 가니 길이 좁아 위험하고 미끄러워 자주 나무 그늘에 쉬면서 따르는 자에게 나물을 캐도록하였는데, 산이 모두 주름이 진것과 같은 돌이고 흙이 없어서 캔 나물이 매우 적었다. 치원대에 이르니 피리 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니 왕자진(王子晉)이 후(緱)에 오른 듯이 황홀하였다. 피리 부는 사람이 층암 절벽 위에 몸을 숨겼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51
“밖에서 객이 왔다고 하여 물으니 오인원(吳仁遠)이 중대암(中臺庵)에 이르렀다 합니다.”
52
라고 하니, 막대를 들어 멀리서 읍을 하고 바로 말을 놓아두고 등칡을 부여잡고 와서 서로 보니 매우 기뻐서 각각 한 잔 술을 들고 멀리 내산의 11개 사찰을 바라보니 석양이 드리우고 높고 낮은 푸른 벽이 맑고 아름다워 볼만하니 곽희(郭熙)와 이백(李伯)이 때에 다시 태어나도 진실로 모방하여 그리기 어려울 것이다. 하늘이 어두워져 하청량사(下淸凉寺)에 이르러 숙박하였다.
55
아침에 비가 조금 내렸다. 밥 먹은 뒤에 걸어서 상청량사(上淸凉寺)의 앞의 대에 나가니 매우 통쾌하였다. 옛날에는 그 명칭이 없었다. 술잔을 한 순배 돌리고 나서 오인원이 말하기를,
56
“그대는 어찌 대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가?”
58
“‘다른 해에 경유대(景遊臺)라고 지어 부를 지로다’라는 시구가 있다.”
59
라고 하니, 오인원이 크게 웃으며 바로 나한당의 벽에 썼다.
60
지나면서 안중사(安中寺)에 들어가니 송재(松齋) 이우(李堣) 공이 젊을 때에 재상 황맹헌(黃孟獻)과 선생 홍언충(洪彦忠)과 함께 여기서 독서하였다. 그 뒤에 송재의 시 한구절이 있으니,
61
安中寺裏洪黃我 (안중사리홍황아) 안중사(安中寺) 속에 홍(洪)가 황(黃)과 내가 있었는데
62
丙午年中事已遼 (병오년중사이료) 병오년 중의 일은 이미 아득하네
63
存歿人間一惆悵 (존몰인간일추창) 삶과 죽음은 인간의 한 슬픔인데
64
亂松春雨夜蕭蕭 (난공춘우야소소) 송림을 어지럽히는 봄비는 밤에 소소하게 내리네
65
라고 하였다. 이때에 홍 선생은 죽었기 때문에 공의 시가 이와 같았으나, 지금에는 세명의 신선이 다 이미 작고하였다. 내가 그 운에 차운하여 읊기를, “슬프다! 어느 때에 학이 요동에 돌아올까”하니, 오인원이 측은히 여겨 한참만에 두수의 시를 불탑에 썼다.
66
극일암(克一庵)으로 들어갈 때 돌계단을 오르니 천척이나 되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크기가 열아름이나 되었다. 바람굴이 암자 뒤에 있는데 매우 가파르고 험하여 이원의 무리는 먼저 오르고 나는 오인원과 함께 뒤에 오르니 굴입구에 두 개의 판이 있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이르기를,
67
“최치원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인데, 판이 굴속에 있어 비를 맞지 않기 때문에 천년이 되어도 썪지 아니하였다.”
68
라고 하고, 굴 깊이는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고 멀리 푸른 허공에 가까웠다. 오인원이 피리 부는 사람에게 보허자(步虛子)라는 곡을 불게하고 제생에게 노래하게 하기도 하고 춤추게도 하니 노래와 피리가 소리를 다투어 소리가 반공중에 높이 떨어지니 일행들이 매우 즐거워하였다.
69
드디어 치원암을 찾아 총명수를 마시니 물이 바위틈에서 나와 돌의 오목한 부분에 가득한데 거울같이 맑고 얼음과 눈처럼 차니 강왕(康王)의 수렴(水簾)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치원은 열두살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고 하니 어찌 이 물을 마시고 총기를 길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최치원이 마셔서 총명하다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71
“옛날 암자에 승려가 살고 있었는데 불등을 켜려고 하니 홀연히 언덕에서 돌이 떨어져 지붕이 내려 앉았는데 머리를 들고 보니 달과 별만 밝게 보이고 그 몸은 상처 하나 없었습니다.”
72
라고 하니, 바위밑에 서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 암자에 들어가 대를 밟으니 더욱 고운에 대한 감상이 일어, 슬프구나! 그 시대 임금에게 간회(奸回)를 멀리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게 하였다면 신라의 잎은 급하게 누렇게 되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이 몸을 숨긴 것은 가상하지만 이름은 해와 달과 그 공을 다투었는데, 경주의 모든 왕릉이 경작지가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슬프고도 슬픈 일이다.
73
하대승암(下大乘庵)에 도착하니, 앞길에 땅거미가 지고 조금 지나 달이 김생굴의 뒷 봉우리에 떠오르는 것을 보면서 문수사(文殊寺)에 이르렀다. 절이 두 암벽 사이에 있어서 피리 부는 귀흔이가 먼저 문밖에서 기다리니 그 소리가 더욱 부드러워 산을 울리니 골짜기에서 응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방에서 잠을 잘 때 밝은 달빛이 방에 가득하고 비폭(飛瀑)을 베개삼고 두견새의 소리를 들으니 이 몸이 세상밖에 초월했음을 깨닫게 되고 또한 휘파람새 소리를 들으니 매우 기이하였다.
75
“옛적에 원 사종(阮嗣宗)이 휘파람 잘 부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더니 소문산령(蘇門山嶺)에서 손등(孫登)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여 돌아 왔다하니, 이것이 어찌 원적의 혼이 손등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79
서쪽으로 보현암(普賢庵)에 들어가니 당 앞에 두 사람이 앉을 만한 암석이 있었다. 내가 오인원과 바위 위에 앉으니 제생들은 암자 내에 흩어져 앉았다. 백의로 술을 가져 온 사람이 있었으니 선성 현감(宣城縣監)인 임조원(任調元)이 보낸 것이었다. 술자리가 한창일 때 두 젊은이가 왔는데 한 사람은 농암의 조카인 이국량(李國樑)이고, 한 사람은 오인원의 아들인 오수영(吳守盈)이었다. 이생이 소매에서 농암의 편지를 내놓으니 이는 공이 농담으로 노래를 지어 이생에게 노래하게 하여 듣게 한 것이었다. 바로 선성의 술을 마시고 안동의 악기를 연주하고 이생에게 농암의 노래를 부르게 하니 또한 산중의 기이한 흥취였다. 또한 승려 조안(祖安)이 금강산에서 왔는데, 병신년에 나를 따라 가야산에 올랐던 사람이었다. 소매 속에서 내 시를 꺼내니,
80
羣山眼底皺 (군산안저추) 뭇 산은 눈밑에 주름 같고
81
萬仞懸雙屩 (만인현쌍교) 만길 절벽은 두쪽의 짚신을 달아 놓은 듯 하네
82
他年方丈路 (타년방장로) 다른 해 방장산(方丈山)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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携爾躡雲梯 (휴이섭운제) 너를 이끌고 구름 사다리를 밟으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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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의 말이 있었다. 승려의 눈은 여전히 푸르렀으나 내 양볼은 다 희었으니 다시 만난 것은 한편으로는 우습기도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느즈막이 서대에 나아가 한참동안 달맞이 하고 문수사로 돌아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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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문수사에서 보현암과 절벽을 둘러 몽상암(夢想庵)에 이르렀다. 언덕에 올라 길이 끊어져 나무 두 개를 시렁같이 걸쳐 사다리로 통행하는데 아래로 내려다 보니 높고 깊어 헤아릴 수 없었다. 두 발이 시큰시큰하고 털과 뼈가 쭈뼛해져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문원(文園)에서 조갈병(凋渴病)이 들어 목구멍과 입시울에서 연기가 날 정도이고 나는 듯이 떨어지는 폭포수가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물통을 풀어서 두어잔을 마시니 오장의 내부에 신선한 기운이 도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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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의 돌사다리를 붙들고 지나 암자에 들어가니 암자의 서쪽은 천길 높은 절벽이었다. 절벽을 굽어보니 바로 연대사(蓮臺寺)의 윗 부분이었다. 조안은 나이 거의 70이었는데 그 행동이 매우 민첩하여 헤아리지 못한 곳에 있어도 두려운 빛이 없었다. 오인원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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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돌아와 돌사다리에서 나아가 절벽의 틈을 따라 원효암에 오르니 길이 매우 가파르고 위태로워 앞사람은 뒷사람의 이마를 보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을 보니 배와 등이 함께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하였다. 계은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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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암자는 여러번 옮겨서 원효가 옛적에 거처하던 곳이 아니고 암자 동쪽에 쇠를 깎은 듯한 절벽 아래에 옛 터가 있으니 그 터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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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영에게 12봉우리의 이름을 판벽에 써서 나열하게 하고 암자 동쪽에서 절벽의 칡넝쿨을 부여잡고 오르면서 여러번 쉬어서 만월암(滿月庵)에 올랐다. 오인원만이 암자 앞의 석대에 앉으니 이상한 새들이 와서 모이는 곳이 있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평안한 듯 깃촉을 긁으며 모든 생각을 잊은 듯이 하더니 때가 지나자 날아가 버리고 또 두 마리 박쥐가 석축사이로 넘나들며 게걸스러운 듯 하며 깜짝 놀란 듯이 사방을 돌아보고 달아날 때 달아나다가 엎드리고, 엎드렸다가 또 돌아보는 것이 오직 이 굴혈을 찾는 것이었다. 이원이가 잡으려고 하였으나 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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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저녁에는 하늘에 한 점 구름도 없고 달빛이 깨끗하여 야반에 문을 열고 홀로 서 있으니 은하수의 광한전에 있으면서 세계를 굽어 보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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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을 먹고 백운암에 오를 즈음 조금 쉬었다가 붙잡고 오를 때 조금이라도 이르는 곳이 점점 높아 졌지만 더욱 멀게 보였다. 학가산(鶴駕山)과 팔공산(八公山), 속리산(俗離山)의 모든 봉우리가 눈앞에 흩어졌다. 여러번 쉬고 자소봉(紫霄峯) 정상에 이르니 천 길 높이의 푸른 석벽이 붙잡고 오를 수 없고 탁필봉(卓筆峯)도 우뚝 돌출하여 오를 수 없었다. 드디어 연적봉(硯滴峯)에 올라 지팡이를 짚고 한참동안 서북쪽 모든 산을 바라보고 크게 휘파람을 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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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백운암을 탐방할 때 사인(舍人) 이 경호(李景浩) 의 기문을 읽으니 진실로 사랑스러운 부인의 작품이었다. 드디어 만월암을 경유하여 동쪽 개울을 따라 돌면서 내려갈 때 가끔 능수버들 그늘에서 쉬니 좌우가 모두 푸른 석벽이었다. 걸어서 문수사의 뒤에 이르러 골짜기가 점점 넓어지니 바로 자소봉의 동쪽이고, 경일봉(擎日峯)의 서쪽이었다. 개울물이 합쳐져 쏟아져 내려 문수사의 비폭이 되었다. 길 위에 큰 돌이 있고 돌 위에 한그루 소나무가 아름답게 서 있으며, 길 아래에 봉우리가 뾰족하게 솟아 있고 상대승암이 그 터에 있는데, 요사의 주인이 누추하여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구역질을 하고 나와 결국은 들어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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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김생굴에 이를 때 낭떠러지의 사다리가 썩어 끊어져서 손으로 넝쿨을 부여잡고 이끼 낀 언덕을 기어서 오르니 두렵고 조심스러워 바짝 긴장이 되었다. 굴이 큰 바위층 밑에 있어 암석이 가장 웅장하고 높아 둘레가 아늑하여 하늘이 이루어 놓은 듯 하였다. 나는 듯이 떨어지는 폭포가 바위 위에서 흩어져 떨어지니 그 소리가 시끄럽게 싸우는 것 같고 환한 대낮에 빗발이 날리는 같았으니 나무가지를 쪼개어 받아 마시도록 하여 놓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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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뒤에 물의 기세가 커지면 그 소리가 웅장하여 은하수가 거꾸로 쏟아지는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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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 석실이 맑고 깨끗하여 윗 방향의 여러 사찰을 덮었는데 밤이 새도록 폭포소리를 들으면 맑고 상쾌하니 신선이 있다면 반드시 먼저 여기에 머물러 쉬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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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김생(金生)의 서첩이 있는데 그 자획이 다 굳세어서 바라보면 여러 바위가 빼어남을 다투는 듯 한데 이제 이 산을 보니 바로 여기서 김생이 글씨 공부를 하여 필법의 정묘함이 입신의 경지에 들어 가만히 겹겹의 자루에 옮긴 것이었다. 옛적에 공손대랑(公孫大娘)이 혼탈무(渾脫舞)란 춤을 추니 장욱(張旭)이 터득하여 초서를 잘 썼다 하니 그 신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진실로 그 신묘함을 터득하면 붓으로 괘를 그어도 할 수 있으니 춤추는 것과 산봉우리 중에 어느 것을 가리겠는가? 다만 이것은 바르고 저것은 기이한 것을 골랐기 때문에 해서와 초서의 구분이 있는 것이다. 세상에 모두 전해 오기를 장욱의 초서는 춤에서 나왔다 하고, 김생의 필법은 산에서 터득하였음을 알지 못하니, 진실로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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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사에 도착하여 잠시 밥을 먹고 소루에 올랐다. 임대(林臺)에 나아가 앉아서 두어 순배의 술을 마시고 여러 승려들과 작별하였다. 걸어서 사자목으로 나아가니 처음으로 말을 타고 갈 때 녹음 속을 뚫고 삼각우묘(三角牛墓)를 지나 푸른 개울에서 조금 쉬었다. 영원(靈源)에서 양치질하고 골짜기 입구를 나와 큰 내를 건너 어지러이 많은 산봉우리를 돌아보니 구름과 연기가 깊이 잠기어 의연한 것이 유신(劉晨)과 원조(阮肇)가 천태산에서 온 것과 같았다. 이대성(李大成)이 나를 어구에서 맞이하고 오인원은 길 왼쪽에 천막을 치니, 이대성의 술에 취하고 오인원의 밥에 배가 불렀다. 오인원과 함께 용수사(龍壽寺)에 묵었다. 절은 전조(前朝)의 거찰인데 회나무와 잦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당우는 반은 무너지고 승려 두 셋이 거처하는데 추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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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학사(高麗學士) 최선(崔詵)의 비문을 읽어 보니 그가 임금을 속이고 불도에 아첨한 죄가 바닷물을 기울여도 씻기 어렵구나. 들불에 태워 끊어 버려야 할 것이다. 아박이 이국량, 오수영, 이원, 박숙량, 김팔원의 다섯 생도와 온계에서 자고 와서 모였고, 농암 이현보는 이대성을 인솔하고 가마를 타고 방문하니 만호 금치소는 나이가 85세인데도 찾아와 북택(佛宅)에서 술자리를 열었다. 각각 예를 행하고 상공이 별도로 산을 유람하는 기구를 내놓으니 매우 간소하면서도 수요를 갖출 수 있었다. 모든 품기를 나열하여 보니 외국에서 구한 것이 아니고 순한 막걸리를 권하여 먹게하니 다 신선주의 맛이었다. 술이 반쯤되어 두아들 이문량과 이국량에게 노래하게 하니 노래소리가 금석(金石)에서 나온 듯 하였다. 제생들이 다 일어나 춤을 추는데 금숙(琴叔)은 나이 90인데도 춤을 출 수 있었으니 역시 인간세상에 드문 일로 매우 즐거워하고서 나왔다. 나는 아박과 이원, 박숙량, 김팔원과 함께 저녁에 풍기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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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은 안동부의 재산현(才山縣)에 있으니 실로 태백산의 한 줄기가 날아와 정기가 모인 것이니 두루 설키고 가득찬 기운이 합쳐져 많은 봉우리가 다투어 빼어나게 솟아 깨끗한 빛은 멀리서 바라보면 푸른 죽순이 어지러이 빼어난 것 같아 늠늠한 것이 공경할만하다. 대천(大川)이 있어 그 기슭을 돌아드니 바로 황지(黃池)의 하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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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은 사납고 물은 급류가 되어 적은 배도 용납되지 않고, 긴 절벽이 긴 연못을 끼고 있는 것 같고, 거울을 닦고 쪽람을 만지는 것 같아 약수(弱水)가 맑고 얕아 풍진의 세상을 막아 끊은 것과 같이 출입을 잊고 스스로 두문불출하는 것에 견줄 수 있으니 반드시 오래도록 가물어 물이 떨어진 후에야 겨우 외부인이 통하여 올 수 있으므로 산은 물을 힘입어 더욱 깊숙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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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이 산은 그 둘레가 백 리에 불과한데 봉우리와 산꼭대기, 층층이 중첩되어 모두 가파른 절벽이다. 가파른 절벽을 이고 안개와 남기(嵐氣)와 수목이 그림같고 누각 같으니 참으로 조물주가 특별히 기량을 베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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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했었고 서쪽으로 천마산(天磨山), 성거산(聖居山)을 답사하여 섭렵했고 남쪽으로 가야, 금산의 여러 정상에 올라 두류산(頭流山)의 동쪽 부분을 자세하게 보았고 그밖에 작은 언덕을 오른 것은 이루 세지 못할 것이다. 비록 망녕되게 자장(子張)에게는 비길 수는 없지만 높은 산을 아담하게 구경한 것은 오래전부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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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사로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여러 산중에 웅장하게 쌓인 것은 두류산 보다 못하고, 청절한 것은 금강산 보다 못하고, 기이하고 빼어난 것은 박연폭포(朴淵瀑布)와 가야산의 골짜기 보다 못하고, 단정하고 엄숙하며 시원하고 경개함은 적지만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은 청량산만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중국의 명산을 물으면 반드시 먼저 오악(五嶽)이라 할 것이니 북쪽은 항산(恒山)이고 서쪽은 화산(華山)이며 남쪽은 형산(衡山)이고 중앙은 숭산(嵩山)인데 그 가장 큰 것은 대산(垈山)이라고 하지만 그 작은 산의 선경을 물으면 반드시 천태산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 동국의 명산을 물으면 반드시 먼저 오산(五山)이라 할 것이니 북쪽은 묘향산(妙香山), 서쪽은 구월산(九月山), 동쪽은 금강산, 중앙은 삼각산(三角山)인데 가장 크면서 남쪽에 있는 것은 두류산이라고 하지만, 그 작은 산의 선경을 물으면 반드시 청량산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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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열살때에 안동에 청량산이 있음을 듣고는 한번 올라가 구경하기를 원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지가 37년이 되었는데 풍기 고을에 원으로 부임하면서부터 가서 보려고 뜻을 세웠으나 동서로 다니면서 멀리서 산의 면목만 바라보느라 매번 목만 수고롭게 하였는데 문득 풍진 세상의 번잡하고 바쁜 일에 얽매여 심지어는 청량산 아래에 가서 자고도 발길을 돌린 적이 있으니 마음 조이며 근심하여 배고프고 목마른 것과 같이 창연(悵然)한 생각을 품은 것이 또 4년이 되었다. 이제 50이 되어 파리한 얼굴과 백발로 이제서야 지팡이에 의지하여 연적봉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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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의 내외 여러 봉우리가 옛적에 이름이 없었는데 승려의 전설이 있는 것은 내산의 봉우리로는 보살(菩薩), 의상(義相), 금탑(金塔), 연적봉 뿐이고, 외산의 봉에는 대봉(大峯)인데 금탑봉같은 것은 치원봉이라고도 일컬으니 치원대가 그 아래 있기 때문이고 의상봉도 의상굴이 아래 있어 의상봉이라 명명했으니 그 더러움이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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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佔畢齋)가 두류산에 대하여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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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하고 증거도 없다고 하여 옳게 명명하여야 할 것을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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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모(某)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길래 참람됨을 잊고 이름을 짓을 수 있겠는가마는 주 문공(朱文公)이 여산에서 기이한 곳을 만나면 이름을 지었으니, 아직까지 징빙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명명하지 아니한 적이 없다. 이 산의 모든 봉우리가 백세를 지나도록 이름이 없으니 진실로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부끄러움이다. 만약 반드시 주자같은 성인을 기다려서 명명하려 한다면 그 이름을 얻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우선 명명하여 내세의 철인의 개명을 기다리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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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큰 외봉(外峯)을 명명하기를, ‘장인봉(丈人峯)’이라 하니 바로 대자(大字)의 의의를 풀이한 것이고 멀리 태산(泰山)의 장악(丈嶽)에 적용한 것이며 그 서쪽은 ‘선학봉(仙鶴峯)’이라 하고, 동쪽은 ‘자란봉(紫鸞峯)’이라 하였다. 외산(外山)은 모두 3봉(三峯)인데 다 여가가 없어 가서 보지 못하고 멀리서 이름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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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봉(內峯)의 종주가 되는 것을 이름하기를, ‘자소봉(紫霄峯)’이라 하니 푸른 바위 천길 높이가 공중에 솟아 있는 듯하고, 동쪽 봉을 ‘경일봉(擎日峯)’이라 이름하니 빛나는 태양을 인도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며, 남쪽 봉을 ‘축융봉(祝融峯)’이라 하니 남악형산(南嶽衡山)에 비유한 것이다. 자소봉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50보가 채 못되어 가장 송곳같이 빼어난 것을 ‘탁필봉(卓筆峯)’이라 하였다. 탁필봉에서 서쪽으로 10보도 못가서 돌출한 것을 ‘연적봉’이라 하고 연적의 서쪽에 봉우리가 연꽃처럼 빼어난 것을 ‘연화봉(蓮花峯)’이라 하니, 바로 연대사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불가에서 ‘의상봉’이라 이르는 곳이다. 연화봉 앞에 봉우리가 향로와 같이 절묘한 것을 ‘향로봉(香爐峯)’이라 하였다. 금탑봉은 경일봉의 아래에 있고 탁립봉은 경일봉의 뒷쪽에 있으니 내외봉을 합하면 모두 12봉인데 옛 명칭을 그대로 한 것이 둘이고 옛 명칭을 고친 것이 셋이고, 이름이 없어 명명한 것이 여섯인데 그 하나는 옛이름 때문에 한 글자를 위에 더한 것이니 바로 탁필봉이다. 또한 여산의 탁필봉을 적용한 것으로 참람함을 면하지 못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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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봉은 모두 9층인데 11개의 절이 있으니 백운암이 가장 높은데 있고 다음은 만월암, 다음은 원효암, 다음은 몽상암, 다음은 보현암, 다음은 문수암, 다음은 진불암, 다음은 연대사이다. 다음은 별실, 중대, 보문암이고 경일봉은 3층인데 3사(三寺)가 있으니 김생암과 상대승암과 하대승암이다. 금탑봉은 또한 3층인데 5사(五寺)가 있으니 산의 형세가 탑과 같아서 5개의 절이 모두 중층에 횃대를 두른것과 같으니, 치원암과 극일암과 안중사와 상청량암과 하청량암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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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절들이 가파른 절벽을 등지고 있는 것이 아래에서 우러러 보면 높은 절벽만 보이고 그 위에도 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절의 뒤는 모두 벽이고 절의 앞은 모두 대이니 연대에서 보면 금탑봉은 하나의 3층탑이 되고 치원대에서 보면 자소봉은 또한 하나의 9층탑이니 이 모두 평생에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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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봉우리에 눈길을 돌리면 나약한 사람은 충분히 뜻을 세울 수 있고, 모든 폭포에 귀를 기울이면 탐욕스런 사람은 충분히 청렴해 질 수 있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우면 신선이 아니라고 하나 나는 반드시 신선이라고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괴이한 것은 지지와 국사에 모두 최치원이 청량사에 놀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합천(陜川) 가야산의 월류봉(月留峯) 아래의 청량사다. 만약 이 산이라면 지지에 올라 있지만 한 글자도 고운과 김생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없으니, 어찌 후세 사람들이 이 산을 높이려고 그릇되게 고운과 김생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인용했겠는가? 아니면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 전함을 잃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치원이라고 대를 명명하고 절을 명명했으며, 김생이라고 굴을 명명하고 절을 명명하여 천년의 유적이 어찌 그리도 명백하여 먼 새벽과 같겠는가? 아울러 기록하여 아는 사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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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산이 만약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이백, 두보가 읖조리고 희롱한 것과 한유, 유종원이 기록하여 서술한 것과 주자, 장식이 올라 가서 감상한 것이 아니더라도 천하에 크게 이름을 날렸을 것인데 천년동안 고요히 있다가 김생과 고운 두 사람을 빙자하여 일국(一國)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진실로 탄실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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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이 이름이 안동부에 속했으나 그 아래는 모두 예안 땅이다. 송재, 농암 이후로 홍유 석사(鴻儒碩士)들이 무더기로 많이 와서 서로 바라 보았으니 속언에 청량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안동의 산이지만 실은 예안에서 나왔으니 인물은 지령이란 말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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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유람에 잡영(雜詠) 85수와 아울러 전후의 청량산을 위하여 듬성듬성 수시로 읊은 100편에 가까운 것을 기록하여 해상으로 돌아가 누워 아이들과 한 번 펴보면 이번 유람이 적절했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렇지만 경계하여야 할 것은 옛날 회암(晦庵) 주희(朱熹)가 남헌(南軒) 장식과 남악형산을 유람할 때 갑술일부터 경진일까지 7일간 창주(唱酬)해 얻은 것이 149편이었는데 기묘일 밤중에 과감히 남은 편수를 서로 대하여 털어버리니 거친 것을 경계한 것이다. 중요한 약속을 정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후에는 노래할만한 것이 있어도 다시 시에 드러내지 아니하고, 남헌이 서문을 지었으니 저주(櫧州)에서 이별할 때에 경부(敬夫) 가 시로써 회옹(晦翁)에게 주니 회옹은 부로서 답하는데 그치고 ‘남악유산후기(南嶽遊山後記)’를 지어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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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일로부터 병술일까지 4일에 악궁(嶽宮)에서 저주까지는 180리다. 그 사이에 산천과 임야의 풍연경물(風烟景物)을 본 것은 시가 아닌 것이 없었지만 약속이 있어서 서로 토론하고 궁구할 것을 찾고 연구해야 하니 시에 대하여는 진실로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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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짓는 것은 본래 좋지만 우리들이 깊이 징험해야하고 아프게 여기는 것은 시가 유탕하여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여럿이 살때는 보인(輔仁)의 유익함이 있지만 유탕함을 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무리를 떠나 흩어져 산 뒤에는 사물의 변화가 무궁하여 얼마 안되는 잠깐 사이와 털끝만큼의 갑작스러운 즈음에도 이목을 의심나고 미혹되게하여 마음과 뜻을 감동하여 옮기게 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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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으니, 일행은 드디어 그 말을 다 기록하여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의 경계를 삼을 것이다. 내가 늦게 나서 이미 남악설경(南嶽雪景)의 거동을 뫼시지 못하였고 저주의 작별한 서론을 받들지 못하여 어리석고 우둔하고 거친 허물을 줄이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으니 밝은 가르침을 공경히 외워서 모든 벗들에게 알리고 자신을 꾸짖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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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갑진년(1544년) 4월 19일 정해일에 상산(商山) 주세붕은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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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저(長沮)와 걸닉(桀溺) -- 춘추시대 때 은일지사(隱逸之士).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여 밭을 갈다가 마침 공자 일행이 그 곁을 지나게 되었다.공자가 제자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게 했다.자로가 장저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자 장저는 저기 수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되묻고는 수레에 있는 공자는 나룻터를 알 것이라고 한 고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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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응(順應) -- 신라 애장왕 때의 승려. 해인사 창건.
136
* 이 경호(李景浩) -- 경호(景浩)는 이황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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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敬夫) -- 장식(張栻)의 자
138
# 위 주석 가운데 '아박'은 잘못된 것으로 신재의 아들 주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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