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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자를 懷함 ◈

해설본문  1925.8. 9~10
육당 최남선이 쓴 것으로 추측되는 1925년 8월 9일 및 10일자 《동아일보》 칼럼. 1 ~ 3은 9일자, 4 ~ 6은 10일자에 게재되었다. 고산자 김정호의 백두산등정설, 전국답사설, 외동딸존재설, 지도단독제작설, 판목몰수설 등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정보들의 근원지다. 조선은 인재가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망하는 것이 당연한 나라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이병도에 의하면, 1925년 이전 그 어느 자료에도 이런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서는 이후 1934년에 김정호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국가기밀누설죄로 몰려 옥사당하고 목판은 불태웠다는 날조된 거짓 정보를 추가하여 《조선어 독본》에 그대로 실리게 된다.

1. 上 근대 조선의 최대 국보

1.1.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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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려지기만 하면 조선 특히, 요즈음의 조선에도 (이러한) 초인초업(超人超業)이 있었느냐고 반드시 세계가 놀라 감탄하게 될 자는 고산자 김정호 선생과 그가 제작한『대동여지도』의 큰 업적이다. 그렇다. 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누구에게든지 보일만 하고 언제까지든지 전해질 위대한 업적이다. 누구라 말해줘도 무엇을 한 사람인지 얼른 아는 이가 세상에 그리 많지 못할 정도로 그는 아직 알려지지 못한 불운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로든지 조선이나 조선인이 그가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 스스로 심적(心的) 강자(强者)임을 위로도 하고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김정호나『대동여지도』라는 조선의 국보이다. 조선에 어떤 보배가 있느냐고 남이 물을 때에 다만 몇 가지로 한정하더라도 반드시 끼워 넣어도 낭패 보지 아니할 것이 진실로 이 사람(김정호)의 일이다.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 더 한 것이 그 물건(『대동여지도』)이고, 물건도 있지만 그보다도 그 속에 담겨 있는 정신적 감응과 분발의 끝없는 샘은 단지 조선의 보배라고만 하기에 아까운 것이 그 사람의 그 물건이다.
 

1.2. (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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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선생은 고산자(古山者)라는 이름으로 간혹 세상에 알려진『대동여지도』의 제작자이고 각자(刻者)이며 또한 그에 대한 순사자(殉死者)니, 진정한 의미로 국보적 인물이 조선에서 한결같이 밟는 운명의 궤적(軌跡)을 유난히 선명하게 밟아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업적임에도 가장 도리 없고 말할 수 없는 화액(禍厄)을 당한 이가 그이다. 혹 황해도에서 출생했다는 것밖에 세계(世系)도 분명하지 않은 그는 생애에 대한 전기적 자료가 거의 다 소멸되었다. 다만 아무것도 다 없어지더라도 그것(『대동여지도』) 하나만 남아있고, 그것이 그의 손끝에서 나온 한 가지만 알려졌으며, 그로 하여금 조선에서는 물론이요 세계에까지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이게 하기에 넉넉한『대동여지도』만은 다행히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렇다 다행히 남아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들의 큰 공로가 함께 할 수많은 조선가치의 완성자이더라도 그들에 관한 기록이 다 없어지고, 또 한편의 작품이라도 전하기만 하면 반드시 인류의 영원한 정신적 양식이 됨직한 그의 인격 충족적 아름다운 행적이 이제 와서 도무지 미궁에 빠지게 되었지마는, 그 인물의 전적인 표현이요 정신의 표현인『대동여지도』는 갈수록 빛나는 힘으로써 그 권위를 학계에 떨쳐간다. 이것이 있는 곳에 김정호의 생명은 한결 같이 약동(躍動)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이것이 있는 곳에 김정호를 지주(支柱)로 하여 그 위대한 찬란함을 구름 비늘 같이 보여준 조선의 마음이 무엇이랄 수 없는 큰 활기를 우리의 축 쳐진 신경에 전달함을 생각하면 구구한 일생이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음은 별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1.3.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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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때의 사람이 꿈도 꾸지 못하는 마음의 씨앗을 어디선가 얻어가졌다. 무슨 인연으로 말미암아서였는지 그 씨앗이 가장 이상적인 육성을 이루어, 드디어 조국의 완전한 영유(領有)는 그 정확한 도적(圖籍)의 성립에서 비롯한다는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온갖 생활의 무대요, 온갖 문화의 밭인 국토의 현실적 이해가 온갖 경험과 조치의 첫 번째임을 깊이 깨달은 그는 한참 밀려들어오는 세계의 풍조에 면하여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조국에 대해 국토적 자각이 필연적으로 요구하게 될 참되고 올바른 지도를 자기의 손으로 제작하리라는 큰 꿈을 세우게 되었다. 깊은 자각이 큰 결심으로 바뀔 때 이를 위해 온갖 희생을 하리라는 의연한 빛이 그의 눈썹 사이에 가득하였다. 정확한 현황을 알기 위해서는 전국의 산천을 샅샅이 답사함을 사양치 아니하였으며, 진실된 역사를 찾기 위해서는 온갖 서적을 낱낱이 조사하여 검토하기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올라갔으며, 이를 위해 수십 년 동안 과객(過客)이 되었다. 그만큼 하면 삼천리 산하의 형승이 긋지 않아도 지도로 눈앞에 선명해질 때, 어떤 측면에서도 당시의 지식과 기술의 극치를 보인 조선 공전(空前)의 정확한 지도가 한 폭 한 폭씩 그의 손끝으로 만들어져 나왔다. 말하자면 객관적 존재일 따름이던 조선의 국토가 그의 업적으로 말미암아 가장 밝고 확실하게 조선인의 주관적 영토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 국토의 주관적 창조 노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보하고 쌓여서 그 역학적 변화의 산물인 학문적 광휘(光輝)가 거의 포화상태로 저의 내부에 넘쳐나건마는 임자인 조선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배가 곯고 옷을 몸에 걸치지 않아 생기는 것은 멀쩡한 미친놈이라는 조롱뿐이었건만 빛나는 조국의 큰 사명을 스스로 짊어진 그의 뜨거운 손을 멈추게 할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다. 인간의 모든 것인 소유와 욕망 및 사랑하는 처까지 이런 와중에 빼앗겼으나 이 대사(大事)의 앞에는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있지 않았다. 오직 하나 남은 과년한 딸과 함께 안 것은 그림이고, 그린 것은 판각(板刻)으로 차례 차례 한 손 끝에서 알파와 오메가를 이루어 나갔다. 북풍참우(北風慘雨)의 생활을 보낸 지 수십 년에 속으로 쌓이기만 하던 대광명(大光明)이 마침내 겉으로 드러나는 곳에『대동여지(도)』란 위대한 보물이 철종 신유년(1861) 조선의 소반 위에 덩그러니 얹히게 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위대한 보물이었다.
 
2
(동아일보 1925년 10월 8일)
 

2. 下 드러나가는 대잠룡(大潛龍)

2.1. (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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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지도 있은 지도 오래고 또 그 발달도 자못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으로 측량하여 그린 것은 고산자의『대동여지도』로 효시를 삼으니 엄밀한 눈금선(方眼) 속에 정확한 배치를 하되, 온갖 자연․인문적 사항을 가장 인상적으로 실어서 산하의 형세가 마치 부조 같은 느낌으로써 우리의 머리에 박히게 만든 그 수완은 진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적 조사의 미술적 표현에 지나는 지도식(地圖式)이 다시 없을 것이라 할진데, 우리 고산자의『대동여지도』같은 것은 그 선구인 동시에 일품일 것이다. 그런데 홀로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않은 대업(大業)을 아름답게 완성한 학계의 위인에게 조선과 조선인은 무엇으로 보답했는가. 재주는 있는데 과문하여 공부하지 않는 어리석은 놈이라 함과, 가정을 버려가면서 먹을 것 생기지 아니하는 일에 골몰하는 미친놈이라고 욕함은 그에게 도리에 단 꿀 같은 후대(厚待)였다. 그 재주가 암만해도 서양 사람에게서나 왔을 것이라는 혐의는 필경 국가의 험요(險要)를 외국인에게 알릴 장본이 되겠다는 죄를 씌워 반평생의 심혈과 일가의 희생으로서 고심하여 쌓았던 조선 최고의 보탑(寶塔)인『대동여지도』는 그만 몰이해한 관헌에게 그 판목을 몰수당하고, 너무 뛰어나 시비꺼리가 된 그 제작자는 인간의 가장 비참한 운명으로써 그 뜨거운 마음의 불을 끄지 아니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처에 있는 “골고다”(예수가 사형당한 곳)는 그 독한 어금니로 또 한번 이 의인을 씹어버렸다. 그러나 씹어도 없애지 못한『대동여지도』만은 그 짊어진 값을 흐리는 수업서 마음 있는 사람의 탄성을 받음이 날로 깊었었다. 그 중에도 갑오년 일청전쟁이 시작되며, 지금 같은 육지측량부 제작의 지도를 갖지 못한 일청양군은 다 같이 이 지도로 그 군용(軍用)에 쓰니 이 때문에 그 정밀한 구성과 위대한 가치가 비로소 실제로 나타나게 된 것은 혹시 다행일지 모르거니와, 제작자의 본의가 아니게 외국인의 이용물이 되어 도리어 트집 잡던 당시 관헌의 견해가 옮음을 드러낸 듯함이 이 무슨 “패러독스”일까. 어떻게 상처를 위로해야 옳을지 모를 큰 비극이 이것이다.
 

2.2. (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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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혹 고산자로서 일본의 이노 다다타카(伊能忠敬)에 비교할는지 모른다. 이노가 근대 일본이 낳은 과학적 한 위인임과 그가 그린 “일본여지전도(日本輿地全圖)”가 근대 일본이 가진 세계적 위업임은 사실이며, 또 그가 오랜 고생을 해가며 십여 년의 공부로 국토의 실측에 종사하여 드디어 자기 국토를 이전에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그린 지도를 제작한 점은 우리 고산자의 업적에 비슷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건의 좋고 나쁨, 재력의 수준, 설비와 도움의 정도로 말하면 이노의 호사에 비해 우리 고산자의 외롭고 가난함은 진실로 같다고 할 수 없다. 이노가 부유하지 않지만 가족을 기르고 남음이 있었으며, 높지는 않지만 벼슬이 오히려 시중드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며, 당시에 있던 가장 고명한 사부에게 비호를 받기도 하고, 가장 진보한 기계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으며, 또 그 업적은 실상 국가의 명령 아래 국가의 힘으로써 성취한 것으로, 일찍이 목숨의 위태함과 재력의 곤란함을 걱정하지 아니하였으니, 다만 가난하고 고생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박해를 받으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평생의 독자적 노력이 그가 믿고 의지한 유일한 자산이었던 고산자를 그에게 견주려한다면 고산자가 원통해 하기 전에 이노 스스로가 질에 겁먹고 겸손하게 물러나지 않지는 못할 것이다. 이노는 할만한 일을 될 만큼 이루었음에 반해 고산자는 못될 일을 억지로 하여 할 수 없는 큰일을 만들어낸 것이다. 관의 힘으로 한 일일망정『일본여지전도』도 물론 불후의 명작이요, 시대를 넘는 뛰어난 일이 아닐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산자의『대동여지도』는 그것 위에 다시 사람의 영혼이 생각하기 어려운 발현임을 겸하였으니 그것이 어떻게 단지 병렬할 수 없는 하나의 작은 공로이겠는가. 그뿐인가. 이노는 생전부터 벗과 이웃의 도움과 보호, 국가의 장려가 있어 물심양면으로 그 노고만큼 보답도 되고, 사후에는 그 업적이 크게 드러나서 우뚝 솟은 동표(銅標)는 그의 큰 공로를 기록하고, 우월한 포상은 그의 영화를 더하고, 찬란한 사적은 국민의 교과서에 실려 길이 후손으로 하여금 감탄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이루게 하며, 제국학사원(帝國學士院)이 그를 위해 상세히 전하는 것을 수집․편찬하니, 즐거이 거금을 들여 이것을 간행하여 배포하는 부자도 있는 등 그 명성과 업적이 점차 세계적인 밝은 빛을 띠게 되었으니 위로와 장려의 도리가 이루어졌다 하기도 할 것이거늘, 오호라 그의 몇 배나 되는 실적과 그를 멀리 뛰어넘는 정신적 교훈이 되는 우리 고산자는 어떠한가. 생전에는 비참이 있었을 뿐이오, 사회에도 오히려 적막(寂寞)이 거치지 아니하니 어느 것보다 먼저 동일한 진리의 용사로서 민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함에 대하여 탄식을 금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묻히니 하늘의 도리가 옳은가 아닌가.
 

2.3. (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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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조선광문회가 조선의 지도로『대동여지도』가 있음을 알고 고심하여 찾아본 결과, 그 제작자가 김정호임과 김정호의 비참한 사적을 약간 조사하여 얻어내서 그 유업을 거듭 빛나게 하는 의미로 22첩 수백 폭의 도판을 번각 준성하고, 남대문 밖에 약현의 유허에 하나의 기념비를 건립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아직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실상 조선인의 민족적 수치로서 말할 일이다. 그러나 국경 없는 학술은 조선인에게 푸대접 받은 고산자와 그의 업적은 차차 세계적으로 알아주게 하는 단서를 지으니 최근 우리에게 보내온 한 외국인 친구의 논저 중에 이것을 논평하여, “22첩으로 이루어진 이 대지도(大地圖)를 대할 때에 참으로 거장의 신공(神功)에 접하는 듯한 감동이 있음은 아마 나 한 사람뿐 아니리라”고 한 것은 오래지 아니하여 세계의 정론일 것일 예상케 하는 말이다. 저 5일의 경성(京城)에 개설된 고지도전람회가 마치『대동여지도』의 한 마리 학을 빛나게 하기 위해 짐짓 여러 마리의 닭을 총집합시켜 놓은 듯한 것을 보고, 아직도 잘 알리지 아니하였지만 마침내 아무개보다도 더 드러나게 될 이 잠룡적(潛龍的) 위인에 대해 사모하고 우러러 보는 것이 새로워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노니 조선이 은인(恩人)을 구박한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깊게 책망할 날이 과연 언제나 오려나.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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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 [저자]
 
1925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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