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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 文學(문학)과 나 ◇
카탈로그   목차 (총 : 39권)   서문     처음◀ 1권 다음
1948.3~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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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文壇) 30년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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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學(문학)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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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찌하여 세상에 하고 많은 학문 중에서 문학 ― 문학 가운데서도 소설을 목표로 길을 잡았는가? 그리고 또 어떤 길을 밟아서 1919년 (《창조》 잡지 발간)의 金東仁(김동인)까지 이르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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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가 나를 일본 동경으로 공부하러 보낼 때는 당년의 세상 보통의 어버이가 자식에게 촉망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장차 변호사나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이론 잘 캐고 경우 잘 따지는지라, 용한 변호사가 되리라, 어려서부터 화학, 물리 실험에 능하였으니 의학자로도 용한 수완을 보이리라, 하여서 의사나 변호사 되기를 기대하였다. 열다섯 살의 어린 몸으로 청운의 뜻을 두고 만리 밖 외국에 공부하러 떠나는 나도 장래의 목표를 의학이나 법률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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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서 주요한이 나보다 먼저 와 있었다. 요한은 그의 아버지가 동경 조선인 유학생 선교목사로 동경에 주재하게 된 관계로, 아버지를 따라나보다 1년 전에 동경에 와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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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서도 같은 소학교(중등학교의 전신인 예수교 소학교)에 다녔었다. 동경의 요한을 만나니 요한의 말이 자기는 장차 ‘문학’을 전공하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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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학은 분명 변호사나 판검사가 되는 학문이다. 의학은 분명 의사가 되는 학문이다. 그러나 문학이란 장차 무엇이 되며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 어떻게 생긴 학문인지, 그 윤곽이며 개념조차 짐작할 수 없는 나는 이 주요한이 나보다 앞섰구나 하였다. 소년의 자존심은 요한보다 뒤떨어지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불쾌하고 부끄러워서 학교에 입학하는 데도 明治學院(명치학원)을 피하고 東京學院(동경학원)에 들었다. 요한은 1년 전에 학교에 들었는지라 그때는 벌써 명치학원 중학부 2학년이었다. 나는 새로 입학하려면 1 학년에 입학하게 되는지라 1년 뒤떨어진다. 같은 명치학원에서 요한보다 하급생 노릇하기가 싫어서 동경학원 1학년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듬해 동경학원은 왜인지 폐쇄되며 재학생들은 명치학원과 靑山學院(청산학원)에 각각 분배 전학시키는 바람에 나는 저절로 명치학원으로 배정되어 요한이 3학년 때에 나는 명치학원 2학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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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동경학원 시절, 그러니까 아직 중학 1학년 때에 영작문 시간에 숙제로서, 1년생 정도의 영작문 한 편씩이 과제되었다. 나는 그때 영어에 매우 취미를 붙이던 때라, 내가 아는 영어 지식의 최선을 다하여 영어 노래를 하나 지었다. 지금은 무론 그 내용도 잊었거니와 스펠까지 잊었지만 ‘튕클튕클, 리틀 스타’로 시작하여 몇 줄의 노래를 옥편을 뒤적이고, 참고서를 뒤적이어 만들어서 내놓았더니, 선생이 보고 네가 지은 것이냐 묻기에 내가 지은 것이라고 하였더니 너는 장차 훌륭한 문학자가 되겠다고 칭찬 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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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생의 칭찬을 듣고 이런 것이 문학인가 하여 문학의 윤곽을 짐작했다고 스스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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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학자가 어떤 것인지, 문학자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는 나는 역시 장래 목표는 변호사나 의사에 두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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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학원은 이찌가야(市谷(시곡)) 육군사관학교 근처에 있었다. 하학하고 등에 조그만 가방을 진 학생(나는 열다섯 살 때까지는 유난히 작았다)은, 일부러 걸어서 아오야마(靑山(청산)) 연병장 뒤로 휘돌아서 연병장 어구에 있는 찻집에서 모찌(혹은 야끼이모) 2전어치를 사서 먹으면서 한가로이 나까시부야(中澁谷(중삽곡)) 하숙까지 돌아오고 하였다. 공일날은 빠지지 않고 아사쿠사(淺草(천초))에 영화를 보러 갔다. 그때는 제1차 구주전쟁이 시작된 해요, 아메리카의 영화가 차차 불란서며 이태리 영화를 압도하여 세력을 잡기 시작하는 초기이며, 탐정활극이 영화계의 주조였으며, 몇십 권짜리 연속 대장편이 등장하려는 무렵이요, 채플린의 한 권 두 권짜리 폭소 희극이 영화계에 데뷰하는 무렵이요, 일본은 大正(대정) 난숙기의 꽃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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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조그만 이름 없는 조선 소년은 공일날마다 아사쿠사 영화관(제국관, 전기관 등의 양화 전문관만 다녔지 일본 영화는 보지 않았다. 일본 영화는 아직 무대극의 구투 그대로 오노에《尾上松之助(미상송지조)》 독무대 시절이며, 아직 여배우라는 것은 일본에 없던 태고시절이었다)에서 채플린에게 허리를 끊기며 혹은 하리 핫취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리고 돌아올 때는 나까미세 뒤에서 10전짜리 덴동(てんどん―튀김덮밥)에 혀를 채며 영화의 탐정극에 공명과 고혹을 느낀 소년은 차차 탐정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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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떤 때 소년문학문고로 「비밀의 지하실」이라는 책이 눈에 띄어, 그 제목이 탐정소설 같아서 사다가 읽어 보았다. 탐정소설이 아니었다. 코롤렝코든가 누구든가 잊었지만, 노서아의 어떤 대가의 소설을 번역한 것이 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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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은 아니고, 내용에 그다지 엽기적으로 끌리는 대목은 없지만, 그 작품 전체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맛과 무게와 힘은 분명히 어린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탐정소설은 아니고도, 그 작품에 끌렸다. 소설문학문고 전 7권을 모조리 사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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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소설 아니고도 마음 끌리는 소설이 있구나, 비로소 소설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연애라든가 남녀 관계에는 흥미를 모르는 소년이 었지만, 탐정이야기 아니고 연애이야기 아니고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는 큰 새 지식이었다. 그것이 ‘문학’이라는 것도 어언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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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차차 문학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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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아래 들기 싫어서 서로 좀 소원하게 되었던 요한과 다시 가까이 사괴고, 문학을 토론하고, 차차 문학으로의 정열이 높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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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명치학원이란 학교는 조선 사람과는 매우 인연 깊은 학교다. 명치학원 조선학생 동창회 명부를 보자면 朴泳孝(박영효), 金玉均(김옥균) 등이 그 첫머리에 씌어 있고, 내가 그 학교에 재학할 동안에도 白南薰(백남훈)이 5학년에 재학하였고, 文一平(문일평), 정광수도 명치학원 출신이요, 화백 金觀鎬(김관호)의 그림이나 재학할 때도 그 학교 담벽에(김관호도 명치학 원 출신이다) 장식되어 있었고, 현재의 조선을 짊어지고 많은 일꾼이 명치 학원을 거치어 사회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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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도 시마자끼 도오손(島崎藤村(도기등촌)) 이하의 많은 문학자가 명치학원 출신이라, 따라서 문학풍이 전통적으로 학생들에게 흐르고 있었다 (그 학교의 자랑인 교가는 시마자끼의 지은 것이다). 그러는 만치 3,4학년 쯤부터는 그 학년 학생끼리의 회람잡지가 간행되고 있었다. 3학년 때에 나도 3학년 회람잡지에 소설 한 편을 썼다. 지금은 다만 썼었다는 기억밖에는 무슨 소리를 썼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이 일본문으로 쓴 소설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처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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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하고 교제성 없기 때문에 너 일본말 아느냐, 교수하는 말 알아듣느냐는 주의까지 듣던 소년이 일본글로 소설까지 썼다고 동창(일본애)들은 아직껏 내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시 고쳐 먹고 문학담을 하자고 하숙으로 찾아오는 동창이 꽤 여럿이 생겼다. 그리고 소년다운 열정과 희망으로 너는 장차 조선의 소설가가 되어라, 나는 일본의 소설가가 되마, 그리고 조선과 일본이 서로 문학으로 교류하며 끝까지 문학 교제를 하자고 굳게 손까지 잡았던 동무도 여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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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름까지 잊어버린 그때의 동무들― 과연 그들은 그때의 희망처럼 문학으로 출세를 하였는지? 그때는 일본도 아리시마 다께로오(有島武郎(유 도무낭)), 기꾸찌깡(菊池寬(국지관)), 아꾸다가와 류노스께(芥川龍之介(개 천용지개)) 등도 출세하기 이전이요, 기꾸찌의 스승인 나쓰메(夏目漱石(하 목수석)) 등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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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소년다운 야심이 만만하던 시절이라, 더우기 나의 아버지가 나를 기르실 적에 唯我獨尊(유아독존)의 사상을 나의 어린 머리에 깊이 처박았으니만치 일본문학 따위는 미리부터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작가라 경멸할이만치 유아독존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본 동창 아이들과 문학담을 하면서도 너희 섬나라〔島國(도국)〕인종에게서 무슨 큰 문학생이 나랴 하는 생각은 늘 속에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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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톨스토이야말로 나의 경모하여 마지않는 작가였다. 「전쟁과 평화」 며 「안나 카레니나」등에 나타난 그 귀신 울릴 만한 기묘한 사실 묘사뿐 아니라 ‘全(전) 톨스토이’를 경모하는 것이었다. 《창조》 몇 호엔가에 그런 뜻의 글도 썼거니와 그때의 나의 문학관 내지 예술관은 대략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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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에 쓴 나의 예술관의 대의― ―대체 사람이란 동물은 하느님의 만든 세계에 만족치 않는다. 자연계에 아 름답고 훌륭한 ‘꽃’이라는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손끝으로 제 재간으 로 그림으로든 조각으로든 꽃을 모방하여 만들고(그러니까 따라서 자연계의 꽃과 달라서 빛깔의 아름다움도 부족하거니와 냄새도 없고) 이 초라한 복제 품을 좋아한다. 우수한 ‘자연품’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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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손으로 만든 것이 자연계의 것보다 아무리 너절하고 초라할지라도 자연계만에 만족치 못하고 제 손으로 복제하여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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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즉 예술이다. 자연계를 모방하여 음향으로 복제한 것이 음악이요, 그림이나 조각 등으로 복제한 것이 문학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기가 창조한 세계’―이것이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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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점으로 노서아의 두 큰 작가(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교해 볼 때에 ‘사랑의 천사’며 성자라는 존경을 만인에게 받는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인도주의의 강독자요 폭군이란 평을 받던 톨스토이가 훨씬 더 ‘내 세계’를 명료하게 창조해 가지고 그 ‘자기 세계’를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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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로 톨스토이가 도스토예프스키보다 예술가로 더 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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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미로 우선 톨스토이를 예술가로 경모하고 지엽적으로는 그의 섬세하고 부진한 사실 묘사와 소설의 기술적 수완에 경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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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풍이 톨스토이를 모방하든가 톨스토이의 영향을 얻은 점은 없지만 그것은 민족성이나 환경이나 교양의 차이 때문이지 톨스토이라는 인격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원문】文學(문학)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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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3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