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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대》를 집어치운 뒤에 한도안 나는 한가한 몸을 대동강의 낚시질로 소일하며 원고료 받지 않은 처지라, 그야말로 자셋상스럽게 기고를 하며 지내다가 심심풀이로 훌쩍 일로 동경으로 ‘산보'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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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경 산보’라는 말의 유래는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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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 동경까지 잠깐 놀러가느라고 평양을 떠나서 잠시 서울에 들렀는데, 서울 전차에서 문득 오래간만에 춘원을 만나서 어디 가느냐고 묻기에 ‘산보’라고 대답한 위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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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동경 산보요? 과연 東仁式(동인식)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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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그 뒤부터는 동인은 동경을 산보처럼 다닌다는 말이 났고, 친구들을 만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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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서 동경까지 왕복 차표를 사가지고 갔었는데 동경에 한 달쯤 놀고 인젠 귀국하려고 보니, 왕복 차표에 돌아오는 절반 차표가 없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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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 한 달 지내는 동안, 언제 어디서 잃었는지 알 수 없는 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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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 돌아갈 동안 기차에서 쓸 비용 밖에는 다 써버린 뒤라 귀국할 차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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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동경 왕복 차표는 통용 기한 두 달이요, 2할이라는 특전이 있으므로, 이 초라한 특전에 유혹되어 두 달 동안 보관하기 힘든 작다란 왕복을 샀던 자신을 내내 나무라면서, 일변 집으로 편지 띄우고 또 조선문단사와 ‘개벽사’에 원고료를 좀 주겠느냐고 편지를 하였다. 그랬더니, 집(평양)에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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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단》, 《개벽》 두 잡지사(서울)에서 같은 날 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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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 평생 처음 청구하는 원고료에 말 떨어지기 무섭게 곧 보낸 것이 분명하였다. 더우기 내 예상 이외로 많은 금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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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리하여 원고료라느 것을 동경여행 때 처음 받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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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잡지사에서 보낸 액수가 서로 같은 점을 보아서 당시 잡지사로서 작자에게 대접할 수 있는 최고 금액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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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2등차를 타던 내가 예상 이외 필요 이상의 돈이 들어온 덕에 1등차에 푹 박혀 호화로운 기차 여행을 하여, 자기의 땀으로 번 돈을 쓰는 기분을 상쾌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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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게 있어서는 처음 받은 원고료인 동시에 처음 내 노력으로 번 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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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는 쓰되 돈을 받을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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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었다. 원고에 대해서 돈을 받는다면 아무리 해도 심리상의 구속이 생길 것이요, 심리상의 구속이라도 있으면 맑은 맛이 없게 될 것이다. 한껏 자유로운 기분 아래서 붓을 잡기 전에는 아무리 해도 불순성을 띠게 된다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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