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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文壇) 30년의 자취 ◈
◇ 中學洞(중학동) 時節(시절) ◇
해설   목차 (총 : 39권)   서문     이전 21권 다음
1948.3~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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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文壇) 30년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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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學洞(중학동) 時節(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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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문)은 窮也(궁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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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글과 궁함을 불가분의 것이라는 중국인의 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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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은 한 자루요, 젓가락은 두 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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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한 자루의 붓으로 두 가락의 箸(저)를 당하지 못한다고도 하거니와, 더우기 이 땅의 문사들과 가난과는 숙명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연분인 양하여,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중학동에 하숙하고 들어보니 자라던 신문학은 동면에서 거진 사멸 상태요, 따라서 문사들은 모두 붓을 깊이 감추고 딴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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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최학송은 어는 券番(권번)의 기생잡지 간행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이것이 좋은 부류에 드는 지극 참담한 형편이었고, 안서 김억은 영리한 사람으로서 고향인 郭山(곽산)에는 밭낟알이나 있지만 그것은 처자를 위하여 남겨 두고 단신으로 상경하여 어떤 출판회사에 「위인 와싱톤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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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 그렛스톤전」이니 하는 것을 연해 팔아서 그것으로 그 새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하고 ‘假面’(가면)이라는 개인잡지까지 한 호(두 호이든 가)를 내놓아 보기까지 하였으나, 이 침체기에는 안서까지도 할 수 없이 그의 장기 ‘에스페란토’를 팔아서 그것으로 호구를 하다가 그것으로도 당할 수 없어 시골 논밭을 팔고 가족을 서울로 불러올리어, 서울서 살림을 하면서 처세상 불리한 문우 교제는 아주 끊고 ‘에스페란토’제자들과만 교우를 계속하고 있는 즈음이었고, 주요한은 서대문 안에 ‘태백상점’이라나 하는 고무신 가게를 내고 고무신 장사에 겸 동아일보 기자(조사부장이었다) 노릇 을 하고 있었고, 염상섭은 술값이 없으면 두문불출하는 사람이라 꾹 집에 숨어 생사조차 형편이었고, 임노월은 고향 진남포에 내려가 있었고, 함께 따라갔던 아내( ? ) 김원주는 노월과 이별하고 혼자 서울 올라와 사직골 어떤 하숙집에 하숙하고 새 남편을 물색중이었고, 춘해 방인근은 소식 불명이 었고, 신출이었던 노산 이은상, 상허 이태준, 채만식 기타는 전연 소식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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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月臺(만월대), 善竹橋(선죽교), 慶州(경주)의 시조와 역사대중소설로 뒷 날 이름을 나타낸 월탄 박종화는 그때는 아직 미미한 존재로서 白華(백화) 梁建植(량건식), 염상섭 등의 술친구인 관계와 《백조》 잔당인 관계로 문단에 알리어 있었는데, 그는 서울 商家의 자제로 부호의 둘째 아들로 생활은 안정된 사람이었지만, 아버지와 형의 겹친 시하라 현금은 푼전을 손에 쥐어 보지 못하는 판이라, 역시 불경기에 문사축에 얼굴도 나타내지 않고 집에 박혀서 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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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문사들은 각기 제 입 풀칠하기만 급급한 판국에, 나는 서울로 올라 와서 중학동에 하숙을 잡고 들어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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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이라는 비운을 목도하지 않고자 도피해 온 나인지라, 꺼져들어 가는 암담한 심사를 속이기 위하여 하숙에 마장 상과 마장 쪽을 사다 놓고 보료 방석 화문석을 벌여 놓고 친구들을 청하여 매일 밤을 새면서 마장을 놀았다. 대체 마장이란 유희는 바둑이나 장기와 달라서 돈을 거는 내기가 아니면 싱거운 것이라 돈없는 문사들은 피하고 장사치들을 상대로 돈내기 마장을 놀아서 그날그날의 암담한 심사를 속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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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운이 약한 나는 적잖은 손해를 보고 하였으나 이런 노릇이라도 하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할이만치 마음이 괴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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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로서는 그래도 간간 푼전을 만질 수 있는 김억만이 한두 번 놀아 보고는 손해 보았노라고 발을 끊고 오직 장사치들이 그때에 나의 동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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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어떤 잡지엔가 김원주(一葉(일엽) 여사)의 시― 라기보다는 예삿 글을 짤막짤막이 끊어서 딴 줄로 쓴 것이 발표되었는데, 그 글은 전문이 이성이 그리워 죽겠다는 뜻으로 차 있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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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노월과 헤어져 혼자 사는 과부 김원주였으며 몸이 풍만하고 육감적인 일엽 여사라, 이 글을 보고 그의 심경을 짐작했다. 더우기 일없이 하숙으로 찾아와서 한참씩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는 돌아가던 그가 생각나서 마음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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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크리스마스날 일본의 대정 천황이 죽었다. 벌써 죽은 것을 감추고 있느니 어쩌니 항간 말썽이 많던 대정이 그 15년의 제왕 생애를 마치고 별세한 것이었다. 일본의 대정 난숙기, 명치가 45년간 쌓아올린 제국에서 15 년간을 무사평온한 임금 노릇을 하다가 세상 버린 그 발표에 호의를 앞에 펴놓고 내 하숙에서는 역시 마장판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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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일째 나는 치통으로 신음하고 있던 차이라 친구들에게 마장을 시키고 나는 보료에 누워서 참예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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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밤도 김원주가 찾아왔다. 마장 친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지금껏 그냥 않아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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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모 전문학교 교수의 영부인이었던 몸으로 임노월과 눈이 맞아 본남편을 버리고 노월의 안해인지 첩인지 애인인지로 노월의 본댁 진남포에 한동안 가 있다가 다시 노월과 헤어져(버렸는지 버리웠는지는 모른다) 홀몸으로 지내는 그였고, 최근 그 성욕에 미칠 듯한 글을 공공연히 내놓은 그에게 동양 도덕적 불쾌감을 품고 있는 나는, 나에게 무릎을 베어줄 듯 가까이― 마장상과는 등지고 있는 그를 외면하여 아까 복용한 강렬한 진통약에 취하여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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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밤을 새던 마장패들이 그 날은 11쯤 끝내고 내게 눈을 끔쩍 하면서들 돌아가는 것은 무슨 딴 뜻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진통제와 치통에 부대낀 나는 그냥 담벽을 향해 누운 채 움직임 없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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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는 얼마나 더 앉아 있었는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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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가 인젠 끊어졌을 텐데 어떻게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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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걱정을 종알거리면서 밤이 꽤 깊어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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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동서 사직골까지 거리는 약간 있으나 전차 탈 곳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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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뉘 입에서 소문 퍼졌는지 연말 가까운 어떤날 서해 최학송이 하숙으로 놀러 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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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엽, 살 푸근푸근하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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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웃는다. 나는 “에이, 여보” 하여 일소에 붙여 버렸지만 그 뒤로 두 세 친구에게서 그런 조롱을 받은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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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 뒤로는 원주는 다시 중학동 하숙에 온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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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가 南(남) 某(모)( ? )라는 出財者(출재자)를 붙들어 가지고 그가 예전 하인처럼 있으면서 조력한 일이 있는 방춘해의 《조선문단》을 속간하겠다고 소설 한 편을 부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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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문단》 복간이 반가워서 오래간만에 붓을 잡고 내 외사촌 누이가 겪은 일을 토대삼아 한 단편을 만들어 서해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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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業(업)을 이으려」라는 단편이다. 그랬더니 이튿날로 몇십 원의 원고료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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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동경서 차표를 잃고 조선문단사와 개벽사에 편지하여 좀 융통받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원고는 거저 주’고, 뒤에 《조선문단》과 《개벽》에서는 또 한 사례의 의미로 보낸 것이지 매수를 세어서 원고료를 받은 것이 아니었고, 이번 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의 첫 원고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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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장 도박으로 잃은 금액에 비기자면 하잘것 없는 적은 돈이었지만 이 돈이 고마워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돈으로 만년필과 잉크 스탠드를 사서 그 만년필로써 그 뒤 적지 않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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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학동 시절에 望洋草(망양초) 金明渟(김명정)(혹은 김탄실 양)이 《매 일신보》 기자로 며칠 들어갔다. 이것이 여자 신문기자의 맨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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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초는 ‘남편 많은 처녀’라는 일컬음을 듣던 사람으로서 일찌기 동경 유학 때에 몇 남편을 경유한 것을 비롯하여 귀국해서는 임노월을 경유(김원주 보다 먼저다) 하고 유방 김찬영을 경유하고 그 뒤 서울서 처녀과부로 지내던 터이었다. 따라서 딴 수입 없이 지내노라니 매우 곤핍하였고 들리는 평판에는 안서며 상섭이며 萬壽(만수)들이 식지 움직여 혹은 하숙으로 찾고 혹은 함께 산보를 청하고 했으나 정절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나는 보증치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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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초라는 사람은 뒷날 내 소설(「金姸實傳」(김연실전))의 주인공이라고 세상에서 추정하는 사람으로, 그의 오라비와 내가 소학 1년생 때의 동창생이었던 관계로, 본시부터 지면이 있었고 내가 패밀리 호텔에서 놀아날 때에 곁방에 있던 김유방의 리베로 몇 번 보았고, 그 전에는 임노월의 리베로 대한 일이 있어서 좀 쑥스러운 데도 불구하고 얼굴 붉히지 않고 나를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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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이야기지만 그는 매일신보사에 며칠 있다가 퇴사하여 한때 독일 유학 가겠다고 독일어를 배운다고 김 모(현재 한국민주당의 효장이요 당시 좌익운동의 거물)를 찾아다니다가 사제간 이상한 관계가 생겨, 그때에 그의 또 다른 친구(남자)와의 사이에 삼각관계에 격투까지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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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초는 나보다 연장자인 오라비를 가졌고 역시 나보다 연장자인 리베를 몇 사람 경유한 여인이라 나더러 봇쟝봇쟝 하며 중학동을 가끔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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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와서는 林(임), 金(김) 등과 좋게 지내던 이야기는 하는 일이 없고, 그 대신 안서며 상섭이 자기에게 어떻게 어떻게 구는 것을 자기는 어떻게 땄노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하면서 웃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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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업적 賣女(매녀) 아닌 여인에게는 동양인적의 불감증인 나는 망양초에게 아주 흥미도 느끼지 않고 그의 뜻있는 듯한 자랑에 그저 머리만 끄덕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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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초에 대해서는 또 후일담이 있을테니 그만치 쓰고, 최서해가 출재자를 붙들어서 만든 《조선문단》 속간은 한 호―ㄴ가 두호―ㄴ가 내고 출재자는 또 사라졌다. 그것을 발간하는 동안, 그때 탐정소설의 애독자이던 채만식도 적지 않게 협력하였고 채만식의 문단 진출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최서해의 열성과 문사들의 의지는 그냥 계속되었지만 출재자의 열의가 끊어져서 속간 《조선문단》도 폐간되었다 그것이 폐간된 뒤에 서해는 다시 주선하여 누구를 붙들고 《現代評論(현대 평론)》이라는 종합잡지를 시작하노라 하며 원고를 부탁하기로 「소설가의 詩人評(시인평) 제3 金億論(김억론) 써서 주고 《현대평론》이 발행되는 것을 보지 않고 다시 중학동 하숙을 집어치우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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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재산을 다 정리해 없어지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안해의 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안했다. 하면 무얼 하랴. 한 푼 없는 깍대기라는데도 불구하고 밥상에는 늘 기름진 음식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진솔 새 옷 만 제공되는 수수께끼의 살림에도 나는 한 마디도 없이 오직 침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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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머니가 늘 비어 있을 뿐이지 생활은 지난날과 아무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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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수께끼의 생활이 반 년이나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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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부터 나는 또 낚시질을 시작하였다. 대동강은 나에게는 다시 없는 보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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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아픈 회포도 대동강에 호소하면 씻기어나가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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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너서 첫 멱〔初浴〕(초욕)을 대동강 물에 감고 자란 자, 누구 대동강에 대하여 지극한 애착을 안 느끼는 자 있으랴마는, 나의 감상적이요 정 열적인 성격은 더욱 대동강에 대한 애착이 심하여서, 망연히 대동강물만 굽 어보노라면 모든 수심과 괴로움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었다.
【원문】中學洞(중학동) 時節(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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