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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 (萬歲前) ◈

◇ 만세전 1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8권  9권  1924년 8월
염상섭
1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이다.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어서 세상은 비로소 번해진 듯싶고,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이다. 일본은 참전국이라 하여도 이번 전쟁 덕에 단단히 한밑천 잡아서, 소위 나리킨(成金), 나리킨 하고 졸부가 된 터이라, 전쟁이 끝났다고 별로 어깻바람이 날 일도 없지마는, 그래도 또 한몫 보겠다고 발버둥질을 치는 판이다.
2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 중인 나는 때마침 반쯤이나 보던 연종시험(年終試驗)을 중도에 내던지고 급작스레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해 가을부터 해산 후더침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내가 위독하다는 급전(急電)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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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경에서 떠나오던 날은 마침 시험을 시작한 지 둘째 날이었다. 그날 나는 네 시간 동안이나 시험장에서 추운 데 휘달리다가 새로 한시가 지나서 겨우 하숙으로 허덕지덕 나아오려니까, 시퍼렇게 언 찬밥덩이(생기기도 그렇게 생겼지마는, 밤낮 찬밥덩이만 갖다가 주는 하녀이기에 내가 지어 준 별명이다)가 두 손을 겨드랑이에다 찌르고 뛰어나오는 것하고, 동구 모퉁이에서 딱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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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리상, 지금 오세요? 막 금방 댁에서 전보환(電報換)이 왔던데요. 한턱 내셔야 합넨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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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지나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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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사오 일 전에 김천(金泉)의 큰형님이 부친 편지가 생각나서, 어쩌면 오늘 내일쯤 전보나 오지 않을까? 하는, 근심인지 기대인지 자기도 알 수 없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오던 차에 그런 소리를 듣고 보니,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잘 되었든 못 되었든 하여간 일이 탁방이 난 것 같아서 실없이 마음이 턱 가라앉는 듯도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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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찬밥뎅이를 만났으니 무에 되겠니? 그예 나오라는 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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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하며, 그래도 총총걸음으로 들어갔다. 채 문지방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주인 여편네가 곁방에서 앉은 채 미닫이를 열고 생글 웃어 보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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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 오십니까? 춥지요? 댁에서 전보가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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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전보환 봉투와 함께 하얀 종잇조각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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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김천 형님이 서울 올라가서 편지를 부치시며, 집에서 시급하다는 통기가 왔기로 자기 집 동리의 명의(名醫)라는 자를 데리고 어제 올라왔는데, 아직은 그만하거니와 수일간 차도를 보아서 정 급한 경우면 전보를 놓겠노라고 한 세세한 사연을 볼 때에는, 전보는 쳐서 무얼 하누? 하던 나도 전보를 받고 보니 암만해도 죽으려나? 하는 생각이 나서 손에 든 책보를 내려놓을 새도 없이 당황히 펴보았다. 그러나 일전에 온 편지의 말대로 위독하다는 말은 없고, 다만 어서 나오라는 명령과 전보환을 보낸다는 통지뿐인 것을 보면, 언제라고 그리 걱정을 해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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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죽지는 않은 게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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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안심이 되면서도 도리어 좀 의아한 생각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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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시급히 턱을 까부는 것은 아니라도 죽기 전에 한번 대면이라도 시키려구 그러는 것인지? 죽었다고 하기가 안되어서 이러니저러니 잔사설 할 것 없이 그저 나오라고만 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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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두를 벗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는, 죽었으면 나 안 가기로 장사 지낼 사람이 없어서 시험 보는 사람더러 나오라는 것인가? 하고, 공연히 불뚝하는 심사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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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그 달 학비까지 얼러서 백 원이나 보내 왔다. 병인은 죽었든 살았든 하여간에, 돈 백 원은 반가웠다. 시험 때는 당하여 오고 미구에 과세(過歲)를 하려면 돈 쓸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우환이 있는 집에다 대고 철없이 돈 청구만 할 수도 없어 걱정인 판에 마침 생광스럽다. 사실 돈 아쉰 생각을 하면, 시험 본다는 핑계로 귀국은 그만두고 노자를 잘라 써버리고도 싶으나, 아버님 꾸지람이나 집안의 시비도 시비려니와, 실상 묵은 돈을 얻어 오려면 나가는 것이 상책이기도 한 것이다. 시험도 성이 가신 판에 두 번에 질러 보는 것이 유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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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일어나실 가망이 없으신 게로군요? 얼마나 걱정이 되시구 그립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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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자가 앓는 것을 전부터 아는 주부는, 정중한 인사가 아니라 방 안에서 농인지 인사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해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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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나마나 요새 밥맛이 다 제쳐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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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대답을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책보퉁이를 내어던지고,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 넣고 다시 나왔다. 주부는 내가 문간으로 나오는 기척에 다시 내다보며 역시 농담 진담 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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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점심도 아니 잡숫구 왜 이리 급하슈? 돌아가시기두 전에 진지를 못 잡숫도록 그렇게 설으셔야 몸이 축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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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점심을 먹고 나가라고 권한다. 천생 밥장수란 돈푼 생긴 것을 보면 까닭 없이 금시로 대접이 다른 것이 배냇병 같은 제 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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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실상은 그래야 할 거요. 좀 그래 봤으면 좋겠는데, 주머니 밑천이 든든해지면 계집애한테 문안 갈 생각부터 드니 걱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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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그렇겠에요! 다다미〔疊〕하구 계집은 새롤수록 좋다고, 벌써부터 장가가실 궁리부터 바쁘신 게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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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는 심심파적으로 이런 실없는 소리도 하고 새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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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남자가 다 그렇대도 나만은 예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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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두끈을 매고 일어서며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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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서방님이 그러실 제야, 돌아가는 아씨 마음은 어떨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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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는 또다시 이렇게 감탄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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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리로 나오면서, 주부의 지금 말이 딴은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보았다. 자식이나 주줄이 달린 중년 상처꾼이면 모르겠지마는, 그렇지 않은 젊은 놈이면 계집이 죽어 간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제물 이혼이라고 은근히 잘 된 듯싶이 장가들 궁리부터나 하는 것이 십상팔구일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부터도 어려서 정이 들지 않기 때문이지마는, 아무 통양(痛痒)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직 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큰길로 빠져나와서 우편국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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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원짜리 지폐 열 장을 양복 주머니에 든든히 집어넣고, 우편국에서 나온 나는 우선 W대학 정문을 향하여 총총걸음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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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실에는 마침 H주임교수가 서류가방을 만적거리면서 나오려고 머뭇거리며 있었다. 나는 H교수가 모자까지 쓰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쫓아 나오면서 전보를 내보이고 급자기 귀국하여야 할 사정을 말하였다. H교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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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응, 옳지!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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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듣고 나서 고개를 한참 기울이고 섰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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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겠지. 그러나 추후 시험은 좀 귀찮을걸! 삼사 일간쯤 어떻게 연기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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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그러나 사정도 딱하고, 기위 이렇게 되고 보니 좀처럼 착심이 될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갔다가 곧 오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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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도 그래! 그러면 정식으로 수속을 하게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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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교수는 이같이 허가를 하여 준 후에 몇 가지 주의와 인사를 남겨 놓고, 교무실로 분별을 하여 주러 들어간다. 나도 뒤따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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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에 얼른 승낙을 하여 주기 때문에, 나는 할인권까지 얻어 가지고 나오기는 나왔으나 시험 치르기가 귀찮아서 하는 공연한 구실이라고 오해나 하지 아니할까 하는 자곡지심이 처음부터 앞을 서서, 좀 쭈뼛쭈뼛한 것이 암만하여도 불유쾌하였다. 전차 종점으로 나와서 K정으로 향하는 전차에 올라앉아서도, 아까 H선생더러 얼떨결에 한다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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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병환이……’라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하여 보고, 혼자 더욱이 찌뿌드드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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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왈 어머님의 병환이라 했누? 내 계집이 죽게 되어서 가겠다면 어디가 어때서 어머니를 팔았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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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뇌고 뇌었으나 공연한 신경질로 그러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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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시간은 벌써 세시가 넘었었다. 어차피에 네시 차로는 떠날 꿈도 아니 꾸었었지마는, 인젠 열한시의 야행으로나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하고, 나는 K정에서 전차를 내리는 길로 쓰카다니야(塚谷屋)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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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간 남짓하게나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우선 급한 자켓 한 벌을 사가지고 그 자리에서 양복저고리 밑에 두둑이 입고 나서 몇 가지 여행제구를 사들고 거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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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외에는 또 별로 긴급히 갈 데는 없었다. 인제는 그 카페로 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하다가, 돈푼 가진 바람에 그랬던지 아직 그리 급하지도 않건마는 머리치장이 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근처의 이발소로 찾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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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깎으세요? 아직 괜찮은데요. 면도나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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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 가위를 든 이발장이는 왼손으로 머리 뒤를 살금살금 빗기면서 이렇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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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면도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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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같이 대답을 하고 나서 깎지 않아도 좋을 머리까지 깎으려는 지금의 자기가 별안간 야비하게 생각되는 것을 깨닫고, 앞에 붙은 체경 속을 멀거니 들여다보다가, 혼자 픽 웃어 버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자빠져서도 이처럼 여유 있고 늘어진 자기의 심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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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든 좋든 하여간 근 육칠 년간이나, 소위 부부란 이름을 띠고 지내 왔는데…… 당장 숨을 몬다는 지급전보를 받고 나서도, 아무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고 무사태평인 것은 마음이 악독해 그러하단 말인가. 속담의 상말로, 기가 하두 막혀서 맥힌 둥 만 둥해서 그런가……? 아니, 그러면 누구에게 반해서나 그런다 할까? 그럼 누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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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러면 누구에게……?’냐고 물을 제, 나는 감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만 뱃속 저 뒤에서는 정자! 정자! 하는 것 같았으나 죽을힘을 다 들여서 ‘정자’라고 대답하여 본 뒤에는, 또다시 질색을 하며 머리를 내둘렀다. 실상 말하면 정자가 아니라는 것도 정자라고 대답하려니만치 본심에서 나온 대답이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지금 머리를 깎으려고 들어온 동기가 애초에 어디 있었더냐는 것은 분명히 의식도 하고 부인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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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지금 나는 정자를, 내 아내에게 대하는 것처럼 냉연히 내버려둘 수는 없으나, 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니만치 또 다른 의미로 정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한 여자도 사랑하지 못할 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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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생각을 할 제 나는 급작스레 고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생활의 목표가 스러져 버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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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저러나 지금 이다지 시급히 떠나려는 것은 무슨 때문인가. 내가 가기로 죽을 사람이 살아날 리도 없고, 기위 죽었다 할 지경이면 내가 아니 간다고 감장할 사람이야 없을까? 육칠 년이나 같이 살아온 정으로? 참 정말 정이 들었다 할까? 입에 붙은 말이다. 그러면 의리로나 인사치레로? 그렇지 않으면 일가에게 대한 체면에 그럴 수가 없다거나, 남편 된 책임상 피할 수 없어서 나가 봐야 한다는 말인가. 흥! 그런 생각은 염두에도 없거니와 그런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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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와서는 더 생각을 이어 할 용기가 없었다. 만일에 어디까지든지 캐물을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의 명답을 얻었을지 모르나 그것은 잇몸이 근질근질하는 것 같아서 다시 건드리지도 않고 자기 마음을 살짝 덮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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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를 하고 세수를 하고 치장을 차린 뒤에, 어디로 가리라는 결심도 채 하지 못하고 이발소에서 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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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하숙으로 돌아갈까? 정자에게로 가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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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이렇게 또 망설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떼치지 못할 어떠한 그림자를 쫓으면서 길 밖에서 머뭇거리다가 잡지권이나 살까 하고 동경당을 들여다보았다. 공연히 이 책 저책을 한참 뒤적거리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잡지 한 권을 사들고 나와서도 우두커니 길거리를 내다보며 섰다가 아래로 향하고 발길을 떼어 놓았다. 어느덧 ×정 삼거리로 나와 발끝은 M헌(軒) 문전에 와서 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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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손님이 듬성긋한 홀 속은 길거리보다도 음산하게 우중충하고, 한가운데 놓인 난로에도 불기가 스러져 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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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그,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그려! 왜 그리 한 번도 안 오셨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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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들어온 사람의 눈에는 그림자만 얼쑹덜쑹하는 컴컴스레한 주방문 곁에 서서 탁자를 훔치던 손을 쉬고, 하얀 둥근 상(相)만 이리로 돌리며 인사를 하는 것은 P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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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난로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놓고 앉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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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험 안 보고 술 먹으러 다닐까? 그러나 오늘은 P자가 보구 싶어 책이 어디 눈에 들어가던가!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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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그러시겠어요, 흥! 하지만 시험 문제를 내건 칠판 위에는 시즈코상(靜子樣)의 얼굴이 왔다 갔다 했겠죠?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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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P자는 걸레를 내던지고 이리로 오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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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잘 알았어! 그리구 그 뒤에서는 P코상의 이런 눈이 반짝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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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는 눈을 흘기는 흉내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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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애매한 소린 마세요. 두 분이 보따리를 싸시거나, 정사를 하시거나 내게 무슨 상관이나 있게요? 시즈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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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자는 반쯤 웃으면서도 호젓한 표정으로 정자를 목청을 돋워 길게 빼며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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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조선 유학생이라면 돈 있는 집 자질이요, 인물 좋다고 동경바닥서 평판이 좋은데, 문과대학생이 이런 데에서는 장을 치는 ‘태평시대’다. 나는 동창생들에게 끌려 우연히 와본 뒤로 벌써 반년 가까이 드나드는 동안에 이만큼 친숙하여졌다. 이런 자유의 세계에서만도 얼마쯤 무차별이요 노골적 멸시를 안 받는 데에, 감정이 눅어지고 마음이 솔깃하여 내 발길은 자연 잦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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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女優) 머리를 어푸수수하게 쪽찌고, 새로 빨아 다린 에이프런을 뒤로 매며 살금살금 나오는 정자는 우선 시선을 P자에다가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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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웬 야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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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마디 하고 나서, 그 신경질적인 똥그란 눈을 이리로 향하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나는 고개만 끄덕 하고 잠자코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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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상! 이번에 ‘이상’이 성적이 좋지 못하시다면 그 죄는 시즈코상에 있습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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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거동을 한참 건너다보던 P자는 이같이 한마디를 내던지듯이 하고 저리로 다시 가서 탁자를 정돈하고 섰다. 정자는 거기에는 대꾸도 아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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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요새 시험중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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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에게 묻는다. 얼마쯤 반가운 기색이나, 언제나 그러한 자기의 감정을 감추는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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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험 보다가 말구 보러 왔길래 정성이 놀랍다구 P자상이 놀리는 게 아닌가? 그러나 P자상을 찾아왔는지 시즈코상을 보러 왔는지, 술이 그리워서 왔는지, 그것은 내 염통이나 쪼개 보기 전에야 알 수 없는 일이지. P자! 일이 끝나건 올라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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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P자에게 일러 놓고 정자를 따라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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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쯤은 제일 한산한 개시머리지마는 이층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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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 앞에 자리를 만들어 나를 앉혀 놓고, 정자는 저편에 가 서서 영채가 도는 똥그란 눈으로 무슨 기미를 찾아내려는 듯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니까 생긋 웃는다. 이 계집의 정기가 모두 그 눈에 모였다고도 할 만하지마는 항상 모든 것을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혹간은 무심코 고개를 돌릴 만치 차디차고 매정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어느 때든지 생긋 웃는 그 입술에는 젊은 생명이 욕구하는 모든 것을 아무리 하여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소리를 내지 않고 웃는 호젓한 미소에서, 침정(沈靜)과 애수(哀愁)의 그림자를 어느 때든지 볼 수 있었다. 남성이란 남성을 못 믿고 저주하면서도 그래도 내버리고 단념할 수 없는 인간다운 애착이며 성적 요구에서 일어나는 답답한 심정을 그대로 상징한 것이 이 계집애의 그 시선과 미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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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 풀이 죽으셨에요. 너무 공부를 하시느라고 얼이 빠지셨습니다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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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남자가 잠자코 있으니까 좀 어색한 듯이 체경 있는 쪽으로 잠깐 고개를 돌리고 머리를 만적거리며 입을 벌렸다. 이 계집애의 나직나직한 목소리에도 좀더 크게 하였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날 만치 절제하고 압축된 탄력이 있었다. 이 계집은 자기의 목소리에서까지 자기를 억제하고 숨기려 하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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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누가 얼이 빠져? 어서 가서 술이나 갖다 주구려. 벌써 거진 네시나 되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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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계를 꺼내 보며 재촉을 하였다. 정자는 나가려다가 돌쳐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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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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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물으며 가까이 온다. 내가 앉았는 안락의자의 등덜미에 한 손을 걸쳐 놓으며 무릎이 맞닿도록 다가서며 생글 하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애무를 바라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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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긴 어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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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인제 시험을 마쳐 놓고 어디든지 조용한 데루 여행을 하시는 게지! 어디 두고 보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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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저쪽 체경 탁자로 가서 그 위에 놓은, 내가 들고 들어온 봉지를 두 손으로 만적거리며 건너다보고 서 있다. 그 속에는 내가 아까 쓰카다니야에서 사가지고 온 풍침과 여행용 물잔이며, 부친을 위한 여송연상자, 과자상자, 비단 여편네 목도리를 넣은 종잇갑…… 이것저것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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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처럼 먼산을 쳐다보며 한참 만적만적하던 정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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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선사품이 이렇게 많은구? 댁에 가시나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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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체경 속을 들여다보고 생글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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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좀 펴봐야! 뭘 이렇게 많이 무역을 해 가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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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제멋대로 풀기를 시작한다. 나는 웃으며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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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침, 컵, 왜비누, 담뱃갑, 과자상자…… 탁자 위에다가 진열대처럼 벌여놓더니, 맨 밑에 있는 숄갑을 펴들고 생글생글 웃다가 난로 앞으로 와서 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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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아가씨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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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내민다. 그때의 그의 눈과 그 입술에는 시기에 가까운 막연한 감정을 감추려고 애를 써 웃는 빛이 살짝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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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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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나는 홱 뺏으며 정자를 껴안듯이 부둥켜안다가 목도리를 다시 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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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습니다. 누가 줄 사람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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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정자는 좀 어색한 듯이 웃고 섰다. 그러나 기회가 마침 좋다고 생각한 나는 벌떡 일어나는 길로, 손에 든 자주 바탕에 흰 안을 받친 목도리를 눈깜짝 새에 둘둘 말아 가지고 정자의 앞으로 덤벼들며, 목을 껴안으면서 소매 속에 쑥 넣으면서 술취한 사람처럼 장난 비슷이…… 하였다. 불의에 난폭한 습격을 받은 정자는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생글 웃는 낯을 본 법하였다. 일 분쯤 지났을까, 정자는 나의 팔을 뿌리치고 얼굴이 발개서 내려가 버렸다. 뒷모양을 가만히 노려보고 섰던 나는 두세 걸음 쫓아 나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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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지 말아요. 그리구 어서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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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곱게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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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 일은 점잔치는 못하였으나, 다른 손이 올라오기 전에 주고 싶고, P자에게 알리기 싫으니 그 외의 수단을 모르는 나는 그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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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멀거니 섰다가 여기저기 흐트려 놓은 물건을 빈 갑까지 싸서 놓고 자기 자리로 와서 앉았다.
107
위스키병을 들고 올라온 정자는 한 잔 따라 놓고 뾰로통하여 섰다가, 체경 앞으로 가서 머리를 고치고 다시 와서는 멈칫멈칫하며 바로 앉지를 않았다. 나의 눈에는 부끄러워하는 그 기색이 도리어 기뻤다. 더구나 노기가 있는 것은 인격적 자각의 반영(反映)이라고 생각할 때, 미안하기도 하고 위로하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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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오늘 밤에 어딜 갈 텐데 섭섭하기에 변변치는 않은 것이나마 사가지고 온 것이야. 조금이라도 어떻게 생각지는 않겠지?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재미 없겠기에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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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객기로 산 것이지마는 참답게 주지 못한 것을 나는 후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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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에요! 되레 미안합니다. 그러나 댁에를 가세요? 지금 떠나실 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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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냉연히 물었으나 흥분한 마음을 무리로 억제하는 양이 역력히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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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집엘 좀 가야 할 일이 있는데 밤에 떠날지?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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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틈에 정숙한 말씨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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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볼일이 계시기에 시험을 보시다가 말구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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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정자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쳐다본다. 그때에 마침 요리가 승강기로 올라오기 때문에 정자는 일어섰다. 나는 그 길에 P자를 부르라고 일렀다. 정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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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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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한참 나를 돌아다보고 섰다가 다시 돌쳐서서 P자를 소리쳐 부른 뒤에 요리 접시를 들어다 놓는다. P자도 뒤따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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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노시는데, 쓸데없이 폐올시다그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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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P자는 내가 가리키는 교의에 털썩 앉으며 식탁에 놓였던 잡지를 들어서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P자의 푸근푸근한 얼굴은 언제 보아도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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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적(暝想的)이요 신경질일 뿐 아니라 아직 순결한 맛이 남아 있는 정자에게 비하면, P자는 이러한 생애에 닳고 닳아서, 되지 않게 약은 체를 하면서도 상스럽고 천한 구석이 있지마는 그래도 나는 이러한 여자에게 흥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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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라니까 왜 그리 우자스러운 거야? 꼭 모시러 가야만 하나?”
122
나는 잡지를 뺏어서 손을 내미는 정자에게 넘겨 주고 P자의 포동포동한 손을 잡아서 만적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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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자하긴 누가 우자해요? 이런 문학가 양반네들만 노시는 데에는 감히 올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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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P자는 손을 슬며시 빼고 정자를 살짝 건너다보고는 나를 다시 향하여 방긋 웃었다.
125
P자에게 대한 정자는, 어떠한 때든지 눈엣가시이었다. 비단 나뿐 아니라 어떠한 손님이든지 P자와 친숙한 사람도 내종에는 정자에게로 빼앗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자가 고등여학교를 졸업하였을 뿐 아니라 문학서적과 소설을 탐독한다는 것이 P자로서는 경앙(景仰)하는 동시에 한손 접히는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어느 때든지 두 계집애를 다 데리고 이야기하지 않는 때가 없었다. P자나 정자가 다른 손님을 맡은 때에라도 밤이 늦도록 기다려서 만나 보고야 나왔다. 더욱이 P자가 없을 때에 그리하였다. 이것이 정자에게는 눈치를 채이면서도 의문인 모양이었다.
126
“참 그런데 언제 떠나세요?”
127
정자는 보던 책을 식탁 위에다가 놓으며 나를 쳐다보고 물었다.
128
“글쎄…….”
129
나는 어정쩡한 대답을 하며 정자의 기색을 유쾌한 듯이 건너다보고 앉았었다.
130
“왜 어딜 가세요?”
131
P자는 일어나서 정자가 앉은 교의 뒤로 가며 물었다.
132
“오늘 밤에 떠나세요?”
133
또다시 잼처 정자가 묻는다. 나는 지금 막 들어온 전등불을 쳐다보며 앉았다가,
134
“실상은 내 마누라가 앓는 모양인데, 턱을 까부니 어서 오라고 야단은 야단이지만 아직도 갈까말까다.”
135
“네, 그래요? 그럼 어서 가보셔야죠. 그 동안에 돌아가셨으면 어떡하나요!”
136
P자는 나를 책망하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본다.
137
“죽으면 죽었지, 어떡하긴 무얼 어떡해.”
138
나는 잠자코 앉았는 정자를 건너다보며 웃었다.
139
“사내는 다 저래! 저런 남편을 믿고 어떻게 사누?”
140
P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혼자 탄식을 하며, 정자의 교의 뒤에 매달려서 정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동의를 구한다.
141
“누가 믿구 살라는 것을 사나……?”
142
하고 나는 실없이 한마디 하다가 다시 정색으로 말을 이었다.
143
“부부간에 서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지만, 사랑한다는 것도 극단에 가서는 남이 나를 사랑하거나 말거나 저 혼자의 일이다. 저 사람이 받지 않더라도 자기가 사랑하고 싶으면, 자기가 만족할 데까지 사랑할 것이다. 외기러기 짝사랑이라고 흉을 본다기로 그거야 알 배 아니거든. 그와 반대로 사랑치 않는 것도 자유다. 사람에게는 사랑할 자유도 있거니와 사랑을 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 부부간이라고 반드시 사랑하여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을까. 없는 사랑을 의무적으로 짜낼 수야 있나? 하하하…….”
144
나는 문학청년의 버릇으로 이런 논리를 캐고 깔깔 웃었다.
145
정자와 P자는 나의 입을 똑바로 노려보고 앉아서 들으며, 정자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처럼 가끔가끔 고개를 끄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따라 놓았던 술 한 잔을 들어 마시고 나서 또다시 말을 꺼냈다.
146
“그러나 문제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그 어름에다가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다. 죽거나 살거나 눈 하나 깜짝거리지도 않으면서 하는 공부를 내던지고 보러 간다는 것이 위선이다. 더구나 여기 술 먹으러 오는 것을 무슨 큰 죄나 짓는 것같이 망설이는 것부터 큰 모순이다. 목숨 하나가 없어진다는 것과 내가 술 먹는다는 것과는 별개 문제다. 그러면서도 ‘내 처’가 죽어 가는데 술을 먹다니? 하는 오죽잖은 ‘양심’이 머리를 들지만, 그것이 진정한 양심이라기보다도 관념이란 가면이 목을 매서 끄는 것이다. 사람은 관념의 노예가 되는 수가 많다. 가식의 도덕적 관념에서 해방되는 거기에서 참된 생명을 찾는 것이다. 사랑치 않으면 눈도 떠보지 않을 것이요, 사랑하고 싶으면 이렇게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란다!”
147
하며 나는 벌떡 일어나서, 정자의 어깨를 짚고 꾸부리고 섰는 P자를 껴안으며 키스를 하려는 흉내를 내었다. 무심코 섰던 P자는 질겁을 하며,
148
“에구머니, 사람을 죽이네!”
149
하고 깔깔대며 뛰어 달아나서 저만치 가서 앉는다. 그 사품에 나는, 웃으면서 일어나는 정자와 맞장구를 쳤다. 그대로 얼싸안았다.
150
술이 얼쩍하게 취하여 문간으로 나오는 나를 앞질러서 따라 나오며 정자는 거진 입이 닿도록 내 귀에다 대고,
151
“정말 밤차로 가세요?”
152
하며 소곤거린다.
153
“생각나는 대로 하지…… 그런데 왜?”
154
“글쎄요…….”
155
하고 나서 정자는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P자가 쫓아 나오는 것을 보고 한걸음 물러섰다.
156
“하여간 갈 길이니까 어서 가야지. 그럼, 한 달쯤 있다가 올 테니까 그때 또 만납시다.”
157
나는 이같이 한마디 남겨 놓고 길거리로 나왔다.
158
거리는 아직 초저녁이지마는 첫추위인데다가, 낮부터 음산하였던 일기는 마치 눈이나 오려는 듯이 밤이 들어 갈수록 쌀쌀하여졌다. 사람 자취도 점점 성기어 가고 길바닥에 부딪는 나막신 소리는 한층더 요란히 들린다. 점두에 매달린 전등불빛까지 졸리운 듯 살얼음이 잡히어 가는 듯 보유스름하게 비치는 것이 더욱 쓸쓸하여 보였다.
159
나는 곧 차에 뛰어오르려다가, 사람이 붐비는 갑갑한 차 속으로 기어들어갈 생각을 하니, 얼근한 김에 차마 올라설 용기가 나지를 않아서 그대로 돌쳐서서 O교 방향으로 꼽들었다.
160
화끈화끈 다는 뺨을 살금살금 핥고 달아나는 저녁 바람에 정신이 반짝 날 듯하면서도, 마음은 어찌하여 그렇다고 꼭 집어 말할 수 없이, 조 비비듯 조바심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다. 자기 자신에게 대한 반항인지, 자기 이외의 무엇에 대한 반항인지 그것조차 뚜렷이 알 수 없으면서, 덮어놓고 앞에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해내려는 듯한 터무니없는 울분이 가슴속에서 용심지같이 치밀어 올라왔다. 컴컴한 속에서 열병에나 띄운 놈 모양으로 포켓에 찔렀던 두 손을 꺼내 가지고 뿌리쳐 보기도 하고, 입었던 외투나 윗저고리를 벗어서 O교 다리 밑으로 보기 좋게 던져 버렸으면 하는 객기도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발은 기계적으로 움직이어 O교 정거장을 지나 S교를 향하고 돌쳐서서 여전히 컴컴한 천변가로 헤매며 내려갔다.
161
이러한 공상이 한참 계속된 뒤에는 별안간에 눈물이 비집어 나올 만치 지향할 수 없는 애처로운 생각이 물밀듯 하고 참을 수 없이 허전하고 외로운 생각에 긴 한숨을 뿜어 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에는,
162
‘무슨 때문에 눈물이 필요하단 말이냐. 실상 완전한 자유는 고독에 있고 공허에 있지 않은가?’
163
나는 속으로 이같이 변명하여 보았다.
164
그것은 마치 종로에서 뺨맞은 놈이, 행랑 뒷골에서 눈을 흘기다가, 자기의 약한 것을 분개하여 보기도 하고 혼자 변명하기도 하여 보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겁겁증이 나서 몸부림을 하는 일종의 발작적 상태는 자기의 내면에 깊게 파고들어 앉은 ‘결박된 자기’를 해방하려는 욕구가 맹렬하면 맹렬할수록, 그 발작의 정도가 한층 더하였다. 말하자면 유형무형한 모든 기반, 모든 모순, 모든 계루에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지 않으면 질식하겠다는 자각이 분명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할 수 없는 자기의 약점에 대한 분만(憤懣)과 연민과 변명이었다.
165
나는 참을 수 없어서 포병공창 앞으로 달아나는 전차에 뛰어올랐다. 이러한 때에 미인의 얼굴이라도 쳐다보면 캠퍼 주사만한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었으나 나의 이지(理智)는 그것조차 조소하였다.
166
그러나저러나, 노역과 기한에 오그라진 피부가 뒤틀린 얼굴밖에 내 눈에는 비치지 않았다. 그들은 시든 얼굴을 서로 쳐들고 물끄럼말끄럼 마주 건너다보기도 하고, 곁의 사람을 기웃이 들여다보기도 하고 앉았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이사람 저사람 쳐다보다가,
167
‘여러분, 장히 점잖구 무섭소이다그려!’
168
이렇게 한마디 하고 일부러 허허허 하며 웃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 나 혼자 제풀에 빙긋 하여 버렸다.
169
이렇게 안 나오는 거드름을 빼고, 될 수 있는 대로 우자한 태도로 좌우를 돌려다보는 것은 비단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에게만 한한 무의식한 습관이 아니라 사람의 공통한 성질인 동시에 사람이란 동물이 얼마나 약한가를 유감없이 말하는 것이다. 약하기 때문에 조그만 승리와 조그만 자랑을 얻으려 애쓰고, 약하기 때문에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하며, 약하기 때문에 자기의 주위에 경계망을 쳐놓고 다른 사람을 주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상대자의 용모나 옷 입은 것, 행동거지, 말씨…… 이런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음미함으로써, 자기의 비열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본능적 요구가 있는 것도 물론이겠지마는, 저편을 엿보는 데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170
우선은 자기 방어상 저편의 강약과 빈부의 정도를 감정할 필요를 느끼고, 그 다음에는 의복과 말씨와 행동거지가 남에 빠지면 도회생활에 있어서는 큰 고통이요 수치이기 때문에 신경이 여기에 집중된다. 또한 그들에게는 피차에 구하는 것이 있으니 아첨하고 농락하려는 한편에 농락되지 않으려는 우월감(優越感)과 경계와 추세(趨勢)라는 등 잡념으로 말미암아 자연히 저편의 표정이나 비식(鼻息)을 엿보는 데 명민한 것을 서로 자랑한다. 또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의 목숨인 사랑을 얻기에 목이 말라서 그 불순의 도가 한층 더하다. 이런 점으로 보면 제일 순진하고 아름다운 것은 전차 속에서나 거리에서 청춘남녀가 본능적으로 이성의 미(美)를 부산히 찾으면서도 담담히 지나치는 것일지 모른다. 이성(異性)을 꿈꾸는 순진한 청춘남녀에게는 불순한 욕심이 없다. 적어도 물질적 욕심이 없다. 아첨할 필요도 없고 우월감이나 농락하려는 야심도 없고 방어하고 반발하려는 적대심이란 손톱만큼도 없다. 다만 미를 동경하고 감상하며 이에 도취하고 감격한다. 더구나 그러한 생명의 연소가 영원히 흐르는 물결에 뿌려지는 월광의 은박(銀箔)같이 아무 더러운 집착 없이 순간순간에 반짝이며 스러져 버리는 것이 더욱이 향기롭고 깨끗하다. 그러나 위선 없이 살지 못하리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다. 그리하여 인생의 움〔芽〕같은 그들도 미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는 법이 없다. 도적질을 해서 본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고약한 버릇이다.
171
그러나 그보다도 순박하고 순진한 것은 소위 하층사회의 기습(氣習)일 것이다. 노동자에 이르러서는, 자랑할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대신에 적나라한 자기와, 이웃에 대한 동정과, 방위적 단결이 있을 따름이다. 생활의 실질이나 양식이나 제일 진실되고 본질적이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끼리 만날 때에 결코 노려보거나 음미하거나 탐색하지는 않는다. 가식도 필요 없고 자기네끼리 아유구용(阿諛苟容)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들의 병은 무지일 따름이다. 무질서일 따름이다.
172
하고 보면 결국 사람은 제 소위 영리하고 교양이 있으면 있을수록(정도의 차는 있을지 모르나) 허위를 되풀이하여 가면서 비굴한 타협이 아니면 옆사람을 자기에게 동화시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기적 동물이다. 구구한 타협도, 남의 동화도 강요하려 들지 않는 전아(全我)의 생활, 자유로운 생활을 꿈꾼다면 우선 세속적으로는 낙오자에 자적(自適)하겠다는 각오를 필요조건으로 한다…….
173
나는 어느덧 이러한 난데없는 생각에 팔려, 역시 이사람 저사람 쳐다보고 앉았다가, 정자의 지금의 생활을 생각하여 보았다.
174
정자는 저의 집에서 뛰어나왔다 한다. 사정을 들어 보면 그도 그럴 것이다.
175
나는 그 애가 반역자라는 점은 찬성이다. 그러나 자기의 생활을 자율하여 나갈 길이 있을까 의문이다. 자기 생활의 중류(中流)에 뛰어들어갈 용기가 있을까? 자각도 있고 영리는 하지만…… 그러나 허영심이 앞을 서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176
전차는 종일 노역에 기진하여, 허덕허덕 다리를 끌면서 잠이 들어가는 집집의 적막을 깨뜨리려는 듯이, 빽빽 기를 쓰는 듯한 외마디 소리를 치며, 에도가와 가도의 컴컴한 길을 겨우 기어나와서 대낮같이 전등이 환한 차고 앞에 와서 한숨을 휘 쉬며 우뚝 선다. 졸음 졸듯이 고요하던 찻간 안은 급작스레 왁자하여지면서 우중우중 내린다.
177
나도 검은 양복바지에 푸른 저고리를 입고 벤또갑을 든 사오 인의 직공 뒤를 따라 내려왔다. 쌀쌀한 바람이 확 끼치었다.
178
“아, 요새도 밤일을 하슈? 오늘은 제법 춥지요?”
179
“예, 인제 참 겨울인데요.”
180
“이리 들어와 좀 녹여 가시구려.”
181
차고 문간에 섰던 차장과 이런 수작을 하며, 따뜻하여 보이는 차장 휴게실로 끌려 들어가는 직공들의 뒤를 부러운 듯이 건너다보며 나는 그 사잇골짜기로 들어섰다.
182
하숙으로 휘돌아 들어가는 길에 뒷집에 있는 ×군을 들여다볼까 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들어가 보았다. 알리면 정거장에를 나와 주고 하여 폐가 되겠기 때문에 망설인 것이다. ×군은 내가 이 밤으로 귀국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당자인 나보다도 놀라며 진정으로 가엾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람 좋은 ×군을 도리어 웃으면서 하숙으로 함께 돌아왔다.
183
×군과 같이 짐을 수습하여 주인에게 맡긴 뒤에 인사받을 새도 없이 총총히 가방을 들고 우리 둘이서 동경역으로 향한 것은 그럭저럭 열시 가까워서였다. ×군이 재촉을 하는 대로 나는,
184
“늦으면 내일 떠났지, 하는 수 있나!”
185
하면서도 허둥허둥 동경역에 나와 보니까, 내 시계가 틀리었던지 그래도 십 분 가량이나 여유가 있었다.
186
가방을 뒤에 섰는 ×군에게 맡겨 놓고 차표를 사려고 출찰구 앞에 가서 섰으려니까, 곁에서 누가 살짝 건드리며,
187
“리상!”
188
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린다. 나는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역시 정자다. 노르끄레한 곱다란 보자에다가 네모진 것을 싸서 들고, 옆에 선 ×군의 시선을 꺼리는 듯이 힐끔힐끔 흘겨보고 섰다.
189
“웬일이야? 이 춘 밤에.”
190
나는 의외인 데에 놀라며, 나무라듯 위무하는 듯이 한마디 하였다.
191
“난 안 가시는 줄 알았지!”
192
“한참 기다렸어?”
193
“아뇨, 난 늦을까 봐 허둥지둥 나왔더니…….”
194
“미안하구려, 어서 들어가지. 그럼…….”
195
정자는 거기에는 대답도 아니 하고, 맞은편 출찰구로 입장권을 사러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196
×군이 자리를 잡으려고 앞서 들어간 뒤에 정자와 맨 끝으로 둘이 나란히 서서 걸으며 입을 벌렸다.
197
“오래 되실 모양이에요?”
198
“뭘, 고작해야 이 주일쯤이지.”
199
“오래 되시건 편지라도 해주세요. 그 동안에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200
“왜, 어딜 가겠기에?”
201
“글쎄 봐야 하겠지마는…… 밤낮 이 모양으로만 하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202
정자는 말을 끊고 잠깐 고개를 기울이고 걷다가 가까이 와서 매달리듯이 몸을 살짝 실리며,
203
“이렇게 급하지만 않았더면 나도 같이 경도(京都)까지라도 가는 것을…….”
204
하며 나를 쳐다보고 호젓이 웃는다. 나는 잼처 무엇을 물으려다가 ×군이 황망히 손짓을 하며 부르는 바람에, 정자와는 총총히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서 ×군과 바꾸어 앉았다.
205
친구에게 전송을 받거나 물건을 받는 일은 별로 없었기도 하려니와 도리어 귀찮은 일이지만, 정자가 무엇인지 보자에 싼 채 창으로 디밀며 지금 펴볼 것 없다 하기에, 나는 그대로 받아서 선반에 얹을 새도 없이 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206
반 간통쯤 떨어져서, 오도카니 섰던 정자의 똑바로 뜬 방울 같은 두 눈이 힐끗하더니 몰려 나가는 전송인 틈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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