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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 (萬歲前) ◈
◇ 만세전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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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8월
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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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전 (萬歲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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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생활을 영위할 수단 방도도 없고 생산화식(生産貨殖)에 어둡거든,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철학에나 철저하다든지, 이도 저도 아닌 비승비속으로 엉거주춤하고 살아온 가난뱅이의 이 민족이, 그 알뜰한 살림이나마 다 내놓고 협포로 물러앉고 나니 열 손가락을 늘이고 앉아서 팔아라, 먹자! 하고 있는 대로 깝살리는 것이 능사라, 그러나 팔고 깝살리는 것도 한이 있지 화수분으로 무작정하고 나올 듯싶은가! 그렇거나 말거나 이 따위 백성을 휘둘러 내고 휩쓸어 내기야 누워서 떡먹기다. 그래도 속임수에 빠진 노름꾼은 깝살릴 대로 깝살리고 두 손 털고 나서면서도 몸은 달건마는, 이 백성은 다 털리고 나서도 몸이 달긴커녕 고작 한다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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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굶어죽으라는 세상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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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한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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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워낙이 구차한 놈이 책상물림으로 세상물정은 모르고, 게다가 유혹은 많은데 안고수비(眼高手卑)하니 씀씀이는 남에 지지 않것다,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는 셈으로 없는 놈이 대돈변을 내서라도 돈푼 만져 보면 조상대부터 걸려 보지 못하던 것이나 얻은 듯이 전후 불각하고 쓸 데 안 쓸 데 함부로 써버려야지, 한푼이라도 까불리지를 못하고 몸에 지녀 두면 병이 되는 것이 구차한 놈의 버릇이다. 구차하기 때문에 이러한 얌전한 버릇이 생긴 것인지 이 따위로 버릇이 얌전하여 구차한 것인지는 별문제로 치고라도, 어떻든 자기도 모르는 중에 흐지부지 까불리고 나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구차한 놈의 갸륵한 팔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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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팔자가 좋고 그른 것은 제이 문제로 하고, 하여간 조선 사람의 팔자를 아무리 비싸게 따져 본대야 이보다 더 나을 것도 없고 더 신기할 것도 없다. 우선 부산이란 데로만 보아도, 부산이라 하면 조선의 항구로는 첫손 꼽을 데요 조선의 중요한 첫 문호라는 것은 소학교에 한 달만 다녀도 알 것이다. 그러니만치 부산만 와봐도 조선을 알 만하다. 조선을 축사(縮寫)한 것, 조선을 상징한 것이 부산이다. 외국의 유람객이 조선을 보고자거든 우선 부산에만 끌고 가서 구경을 시켜 주면 그만일 것이다. 나는 이번에 비로소 부산의 거리를 들어가 보고 새삼스럽게 놀랐고 조선의 현실을 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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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배 속에서 아침을 먹었건마는, 출출한 듯하기도 하고, 차 시간까지는 서너 시간 남았고, 늘 지나다니는 데건마는 이때껏 시가에 들어가서 구경하여 본 일이 없기에, 조선 거리로 들어가 보기로 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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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를 뒤에 두고 서편으로 꼽들어서 전찻길을 끼고 큰길을 암만 가야 좌우편에 이층집이 쭉 늘어섰을 뿐이요, 조선 사람의 집이라고는 하나도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얼마도 채 못 가서 전찻길은 북으로 꼽들이게 되고 맞은편에는 극장인지 활동사진인지 울그데불그데한 그림 조각이며 깃발이 보일 뿐이다. 삼거리에 서서 한참 사면팔방을 돌아다보다 못하여 지나가는 지게꾼더러 조선 사람의 동리를 물어 보았다. 지게꾼은 한참 망설이며 생각을 하더니 남쪽으로 뚫린 해변으로 나가는 길을 가리키면서 그리 들어가면 몇 집 있다 한다. 나는 가리키는 대로 발길을 돌렸다. 비릿하기도 하고 고릿하기도 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해산물 창고가 드문드문 늘어선 샛골짜기를 빠져서 이리저리 휘더듬어 들어가니까, 바닷가로 빠지는 지저분하고 좁다란 골목이 나타났다. 함부로 세운 허술한 일본식 이층집이 좌우로 오륙 채씩 늘어섰는 것이 조선 사람의 집 같지는 않으나 이문 저문에서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조선 사람이다. 이집 저집 기웃기웃하며 빠져나가려니까, 어떤 이층에는 장고를 세워 놓은 것이 유리창으로 비치어 보인다. 그러나 문간에는 대개 여인숙이라는 패를 붙였다. 잠깐 보기에도 이런 항구에 흔히 있는 그러한 너저분한 영업을 하는 데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침결이 돼서 그런지 계집이라고는 씨알머리도 눈에 아니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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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거리를 이리저리 돌다가 그 여인숙이란 데를 한 집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이 불쑥 났으나, 찻시간이 무서워서 발길을 돌쳤다. 다시 큰길로 빠져나와서 정거장으로 향하다가, 그래도 상밥 파는 데라도 있으려니 하고 이골목 저골목 닥치는 대로 들어가 보았다. 서울 음식같이 간도 맞지 않을 것이요 먹음직할 것도 없겠지마는, 무엇보다도 김치가 먹고 싶고 숟가락질이 하여 보고 싶어서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 집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를 않는다. 간혹 납작한 조선 가옥이 눈에 띄기에 가까이 가서 보면 화방을 헐고 일본식 창틀을 박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얼마 되지도 않는 좁다란 시가이지마는 큰 길이고 좁은 길이고 거리에 나다니는 사람의 수효로 보면 확실히 조선 사람이 반수 이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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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사람들이 밤이 되면 어디로 기어들어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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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생각을 할 제, 큰 의문이 생기는 동시에 그 불쌍한 흰옷 입은 백성의 운명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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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천 년 동안 그들의 조상이 근기 있는 노력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져 놓은 이 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시외로 쫓겨 나가거나 촌으로 기어들어갈 제, 자기 혼자만 떠나가는 것 같고, 자기 혼자만 촌으로 기어가는 것 같았을 것이다. 땅마지기나 있던 것을 까불려 버리고, 집 한 채 지녔던 것이나마 문서가 이사람 저사람의 손으로 넘어 다니다가 변리에 변리를 쳐서 내놓고 나가게 될 때라도 사람이 살려면 이런 꼴도 보고 저런 꼴도 보는 것이지 하며, 이것도 내 팔자소관이라는 값싼 낙천주의나 단념으로 대대로 지켜 내려오던 제 고향의 제 집, 제 땅을 버리고 문 밖으로 나가고 산으로 기어들 뿐이요, 이것이 어떠한 세력에 밀리기 때문이거나 혹은 자기가 착실치 못하거나 자제력과 인내력이 없어서 깝살리고 만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 가구면 천 가구에서 한 집쯤 줄었어야, 다만 ‘아무개네는 이번에 아무 데로 이사를 간다네’ 하고 그야말로 동릿집 이야기삼아 저녁밥 후의 인사 대신으로 주고받을 뿐이요, 어떠한 사정이 어떻게 되어서 한 가구가 주는지 그 내막이야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천 가구에서 한 가구쯤 줄어진대야 남은 구백구십구 가구에게는 별로 영향이 없을 것이요, 또 한 가구가 줄었는지 늘었는지조차 전연 모르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한 집 줄고 두 집 줄며, 열 집이 바뀌고 백 집이 바뀌어 쓰러져 가는 집은 헐리고 어느 틈에 새 집이 서고, 단층집은 이층으로 변하며, 온돌이 다다미〔疊〕가 되고 석유불이 전등불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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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집이 이번에 도로로 들어간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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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곰방담뱃대에 엽초를 다져 넣고 뻑뻑 빨아 가며 소견삼아 숙덕거리다가, 자고 나면 벌써 곡괭이질 부삽질에 며칠 동안 어수선하다가 전차가 놓이고, 자동차가 진흙덩어리를 튀기며 뿡뿡거리고 달아나가고, 딸꾹 나막신 소리가 날마다 늘어 가고, 우편국이 들어와 앉고, 군아가 헐리고 헌병주재소가 들어와 앉는다. 주막이니 술집이니 하는 것이 파리채를 날리는 동안에 어느덧 한구석에 유곽이 생기어 사미센 (三味線) 소리가 찌링찌링 난다. 매독이니 임질이니 하는 새 손님을 맞아들인 촌서방님네들이, 병원이 없어 불편하다고 짜증을 내면 너무 늦어 미안하였습니다는 듯이 체면 차릴 줄 아는 사기사가 대령을 한다. 세상이 편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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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을엔 전등도 달게 되고 전차도 개통되었네. 구경 오게. 얌전한 요릿집도 두서넛 생겼네. 자네 왜갈보 구경했나? 한번 보여 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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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천 년 몇백 년 동안 가문에 없고 족보에 없던 일이 생기었다. 있는 대로 까불릴 시절이 돌아왔다. 편리해 좋아, 놀기가 좋아서 편해하며 한섬지기 파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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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겐 인젠 이층집도 꽤 늘고 양옥도 몇 채 생겼다네. 아닌게아니라 여름엔 다다미가 편리해. 위생에도 매우 좋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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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두섬지기 깝살릴 수밖에 없게 된다. 누구의 이층이요 누구를 위한 위생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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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쟁이가 문전 야료를 하고, 요리장수가 고소를 한다고 위협을 하고, 전등값에 졸리고, 신문대금이 두달 석달 밀리고, 담배가 있어야 친구 방문을 하지. 원 찻삯이 있어야 출입을 하지 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동안에 집문서는 식산은행의 금고로 돌아 들어가서 새 임자를 만난다. 그리하여 또 백 가구 줄어지고 또 이백 가구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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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살 수가 있어야지. 암만해두 촌살림이 좋아! 땅이라두 파먹는 게 안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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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쫓겨 나가고 새로 들어오며 시가가 나날이 번화하여 가는 동안에 천 가구의 최후의 한 가구까지 쓸려 나가고야 말지만, 천째 집이 쫓겨 나갈 때에는 벌써 첫째로 나간 사람은 오동잎사귀의 무늬를 박은 목배(木杯)를 고리짝에 넣어 가지고 압록강을 건너가 앉아서 먼 길의 노독을 배갈 한잔에 풀고 얼쩍하여 화푸념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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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불리는 백성, 그들은 부지깽이 하나 남기지 않고 들어 내고 집어 낼 때에 자기가 이 거리에서 쫓겨 나갈 줄이야 몰랐으렷다. 구차한 놈이 주머니를 털 적에 내일부터 밥을 굶을지 거리에 나앉을지 저도 모르게 최후의 일 원까지를 말리듯이. 그러나 이 시가의 주인인 주민이 하나씩 둘씩 시름시름 쫓겨 나갈 제, 오늘날 씨알머리도 남지 않고 아주 딴판의 새 주인이 독점을 하리라는 것은 한 사람도 꿈에도 정신을 차리고 생각지는 못하였으렷다. 역시 구차한 놈의 주머니가 털리듯이 부지불식간에 그럭저럭 흐지부지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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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여 볼 제, 잗단 세간 나부랭이를 꾸려 가지고 북으로 북으로 기어나가는 ‘패자의 떼’의 쓸쓸한 뒷모양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나는, 그리 늦을 것은 없으나 쓸쓸한 찬바람이 도는 큰길을 헤매기가 싫어서 단념하고 돌아서는 길에, 어떤 일본 국숫집 문간에서 젊은 계집이 아침 소제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별안간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우뚝 섰다. 이때까지 혼자 분개하고 혼자 저주하던 생각은 감쪽같이 스러지고, 눈에 보이는 것은 걷어 올린 옷자락 밑에 늘어진 빨간 고시마기(무지기)하고 그 아래로 하얗게 나타난 추울 듯한 토실토실한 종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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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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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지에만 분때가 허옇게 더께가 앉은 감숭한 상을 쳐들며 언제 본 사람이라고 나를 반갑게 맞는다. 뒤를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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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쇼, 들어옵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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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줄레줄레 나와서 맞아들이는 계집애가 서넛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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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그마한 집에 젊은 계집이 네다섯씩이나 있는 것은 물어 보지 않아도 알조다. 나는 걸려드나 보다 하는 불안이 있으면서도 더러운 호기심을 가지고 구경삼아 이층으로 올라가서, 인도하는 대로 너저분한 다다미방에 들어앉았다. 우선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앉았으려니까, 다른 계집애가 부삽에 화롯불을 담아 가지고 바꾸어 들어왔다. 화로에 불을 쏟아 놓고 화젓가락으로 재를 그러모으며 앉았던 계집애는 젓가락을 든 손을 잠깐 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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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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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를 쳐다본다. 넓은 양미간이 얼크러져서 음침하기도 하고 이맛전이 유난히 넓기 때문에 여무져 보이지는 않으나, 그래도 해끄무레한 이쁘장스런 상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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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까지…… 너는 어디서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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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까지예요? 참 서울 구경을 좀 했으면…… 여기보다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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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말에는 대답을 아니 하고 이런 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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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좋을 것은 없어도 여기보다는 좀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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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수작은 음식이 나오는 바람에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나는 몸이 녹으라고 술을 몇 잔이나 폭배를 하고 나서, 계집애들에게도 권하였더니 별로 사양들도 아니 하고 돌려 가며 잔을 주고받았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애가 갈아 들어오는 술병을 들고 들어왔다. 이 계집애도 판을 차리고 화로 앞에 앉는다. 이쁘든 밉든 세 계집애를 앞에다가 놓고 앉아서 술을 먹는 것은 그리 싫을 것은 없지만, 너무 염치가 없이 무례하고 뻔뻔하게 구는 데에는 밉살맞고 불유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 한잔이라도 얻어 걸린다는 것보다는 주인에게 한 병이라도 더 팔게 하여 주는 것이 저의 공로요, 주인의 따뜻한 웃는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니 그도 그럴 것이나, 내가 조선 사람이기 때문에 한층 더 마음을 놓고 더욱이 체면도 아니 차리고 저희 마음대로 휘두르며, 서넛씩 몰켜 들어와서 바가지를 씌우려고 판을 차리는 것이 못마땅하였다. 그래도 그 중에 화롯불을 가져온 계집애만은 저희들 축에서 좀 쫄려 지내는지 한풀이 죽어서 떠드는 꼴만 웃으며 가만히 바라보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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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바구야, 담바구야, 동래(東萊)나 우루산〔蔚山〕의 담바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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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는구먼. 그러나 너희들은 몇 해나 되었니? 여기 온 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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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년이 담바고타령의 입내를 우습게 내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며 물었다. 이것이 조선에 와 있는 일본 사람에게는 남녀를 물론하고 누구더러든지 물어 보는 나의 첫인사다. 그것은 얼마나 조선 사람에게 대하여 오만한 체를 하며 건방지게 구는가 그 정도를 알아보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량하게 생긴 노가다패(우리 조선 사람은 일본 노동자를 특히 이렇게 부른다)라도, 처음에는 온순할 뿐 아니라 도리어 이국 풍정에 어두우니만치 처음에는 공포를 품는 것이 보통이지만, 반년 있어 다르고, 일년 있어 달라진다. 오 년, 십 년 내지 이십 년이나 있어서 조선의 이무기가 된 자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군이 생각할 것은 어찌하여 일 년, 이 년, 오 년, 십 년…… 해가 갈수록 그들의 경모(輕侮)하는 눈이 나날이 날카로워 가고, 따라서 십 배, 백 배나 오만무례하도록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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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도 그 중의 중요한 원인들이 되었을 것이다―---조선 사람은 외국인에게 대해서 아무것도 보여 준 것은 없으나, 다만 날만 새면 자릿속에서부터 담배를 피워 문다는 것, 아침부터 술집이 번창한다는 것, 부모를 쳐들어서 내가 네 애비니 네가 내 손자니 하며 농지거리로 세월을 보낸다는 것, 겨우 입을 떼어 놓은 어린애가 엇먹는 말부터 배운다는 것, 주먹 없는 입씨름에 밤을 새고 이튿날에는 대낮에야 일어난다는 것…… 그 대신에 과학지식이라고는 소댕 뚜껑이 무거워야 밥이 잘 무른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을, 외국 사람에게 실물로 교육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기 때문에 그들이 조선에 오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를 경멸할 수 있는 사실을 골고루 보고 많이 안다는 의미밖에 아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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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바구야 담바구야…… 노이구곤 오데기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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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이상하게 뾰족이 내밀었다 오므렸다 하고, 젓가락으로 화롯전을 두들겨 가며 장단을 맞춰서 콧노래를 하다가 뚝 그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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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제일 잘 해요. 우리는 온 지가 삼사 년밖에 아니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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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벙벙히 앉았는 화롯불 가져온 아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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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너는 얼마나 있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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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담도 별로 없이 조용히 앉았는 것이 어디로 보아도 건너온 지 얼마 안 되는 숫보기로만 생각하였던 것이, 조선 소리를 잘 한다니 조선애가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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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 아주 자라났답니다. 제 어머니가 조선 사람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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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담바고타령을 하던 계집애가 이때까지 하고 싶던 이야기를 겨우 하게 되었다는 듯이 입이 재게 즉시 대답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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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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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당자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그 소리가 너무도 커닿기 때문에 조소하는 것같이 들리었다. 일인 애비와 조선인 에미를 가졌다는 계집애는 히스테리컬하게 얼굴이 주홍빛이 되고 눈초리가 샐룩하여졌다. 어쩐지 조선 사람 어머니를 가진 것이 앞이 굽는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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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래? 그럼 어머니는 어디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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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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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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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간신히 쳐들면서 대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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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째 여기 와서 있니? 소식은 듣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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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까지 와서 있느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수작이지만 나는 정색으로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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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집애는 생글생글하며 나를 쳐다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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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러지 않아두 누가 대구 가시는 이나 있으면 좀 부탁을 해서 알아보고 싶어두 그것도 안 되구…… 천생 언문으로 편지를 쓸 줄 알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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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이번에는 자기 신세를 조소하듯이 마음놓고 커닿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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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버지하군 지금 헤져서 사는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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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벌써 헤졌죠. 내가 열 살 적인가, 아홉 살 적에 장기(長崎)로 갔답니다.”
 
62
“그래 그 후에는 소식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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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지만 이 설이나 쇠고 나건 찾아가 볼 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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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흑흑 느끼듯이 또 한번 어색하게 웃는다. 그 웃음은 어느 때든지 자기의 기이한 운명을 스스로 조소하면서도 하는 수 없다는 단념에서 나오는, 말하자면 큰일을 저지르고 하도 깃구멍이 막혀서 나오는 웃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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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조선 사람이라두 길러 낸 어머니가 정다울 테지? 너의 아버지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다마는, 지금 찾아간대야 그리 반가워는 아니 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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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 어머니에게 길리어 자라면서도 조선말보다는 일본말을 하고, 조선옷보다는 일본옷을 입고, 딸자식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조선 사람인 어머니보다는 일본 사람인 아버지를 찾아가겠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정리를 지나서 어떠한 이해관계나 일종의 추세라는 타산이 앞을 서기 때문에 이별한 지가 벌써 칠팔 년이나 된다는 애비를 정처도 없이 찾아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할 제, 이 계집애의 팔자가 가엾은 것보다도 그 에미가 한층더 가엾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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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도 불쌍하지만, 아버지두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찾아가면 설마 내쫓기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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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아범을 찾아가면 어떻게 맞아 줄까 하는 그 광경이나 그려 보듯이 멀거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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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어머니가 조선 사람이니까 싫구, 조선이니까 떠나겠다구 하는 게지, 조선이 일본만큼 좋았더면 조선 사람 뱃속에서 나왔다기루서니 불명예 될 것도 없고 아버지를 찾어가려는 생각도 안 났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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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어 보지 않아도 좋을 것까지 짓궂이 물었다. 계집애는 잠자코 웃을 뿐이었다. 나는 찻시간을 생각하고 인제야 들어온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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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이 양반께 대구에 데려다달라구 하렴! 너야말로 후레딸년이다. 어머니를 내버리고 뛰어나오는 망할년이 어디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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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바고타령 하던 계집애가 놀리듯 꾸짖듯 찧고 까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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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그러는 게 좋겠지. 여기 있어야 무슨 신기한 꼴이나 볼 줄 아니? 나 같으면 그런 어머니만 있으면 벌써 쫓아갔겠다!”
 
74
이번에는 곁에 앉았던, 커다란 입귀가 처지고 콧등이 얼크러진 계집애가 역시 놀리는 수작으로 말을 받는다. 저희들끼리도 업신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얼굴이 반반한 것을 시기를 하는 모양이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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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너는 왜 이런 데까지 와서 난봉을 피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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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실없는 말처럼 역성을 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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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부모도 없구 의지할 데가 없으니까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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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좀 분개한 듯이 한마디 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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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린 고만하구 술이나 좀더 먹자. 또 가져올까요.”
 
80
하고 그만두라는 것도 듣지 않고 뛰어내려갔다.
 
81
“그러나 너 아버지를 찾어간대야 얼굴이 저렇게 이쁘니까, 그걸 미끼로 팔아먹으려고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아니? 그것보다는 여기서 돈푼 있는 조선 사람이나 하나 얻어 가지고 제 맘대로 사는 게 좋지 않으냐. 너 같은 계집애를 데려가지 못해하는 사람이 조선 사람 중에도 그득하리라.”
 
82
나는 타이르듯이 이런 소리를 하고, 계집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83
“글쎄요, 하지만 조선 사람은 난 싫여요. 돈 아니라 금을 주어도 싫여요.”
 
84
계집애는 진담으로 이런 소리를 한다.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자기의 운명에 검은 그림자를 던져 준 무슨 주문이나 듣는 것같이 이에서 신물이 나는 모양이다. 이때에 나는 동경의 정자를 생각하면서,
 
85
“그럼 나도 빠질 차례로구나?”
 
86
하며 웃었다. 계집도 웃으며 잠자코 내 얼굴을 익숙히 쳐다본다. 입귀가 처진 밉살맞은 계집이 술병을 들고 올라왔다. 나는 먹고도 싶지 않은 술잔을 받으면서,
 
87
“이거 보게, 이 미인을 데려갈까 하고 잔뜩 장을 대고 연해 비위를 맞춰 드렸더니, 나중에 한다는 소리가 조선 사람은 죽어도 싫다는 데야 눈물이 쨀끔하는 수밖에, 하하하. 너는 그러지 않겠지?”
 
88
“객지에서 매우 궁하신 모양이군요. 글쎄…… 실컷 한턱 내신다면, 히히히.”
 
89
이 계집애는 나의 한 말을 이상스럽게 지레짐작을 하고 딴청을 한다.
 
90
“넌 의외에 값이 싼 모양이로구나?”
 
91
하며 나는 인력거를 부르라 명하고 일어서 버렸다. 계집아이들이 짓궂이 붙들고 승강이를 하는 것을 간신히 뿌리치고 나섰다.
 
92
‘이러기 때문에 시골자들이 빠지는 것이다!’
 
93
나는 일종의 불쾌를 느끼면서 인력거 위에서 이런 생각을 하여 보았다.
 
94
기차는 하마터면 놓칠 뻔하였다. 짐을 맡기고 간 것까지 잔뜩 눈독을 들여 둔 ‘그쪽 사람들’은 은근히 찾아 보았던지, 내가 허둥지둥 인력거를 몰아 오는 것을 아까 만났던 인버네스짜리가 대합실 문 앞에서 힐끗 보고 빙긋 웃는다. 나는 본체만체하고 맡겼던 짐을 찾아 가지고 허둥허둥 폼에 들어와 찻간으로 뛰어올라왔다. 형사도 차창 밖으로 가까이 와서 고개를 끄덕 하며 무어라고 중얼중얼하기에 나는 창을 열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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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루 서울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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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왜 그러는지 커닿게 소리를 지른다. 나는 웃으면서, 내 처가 죽게 되어서 시험을 보다가 말고 가니까 물론 바로 간다고(나중에 생각하고 혼자 웃었지만) 하지 않아도 좋을 말까지 기다랗게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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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는 또 무엇이라고 중얼중얼하는 모양이었으나, 바람이 휙 불고 기차는 움직이기 때문에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웬셈인지 나하고 수작을 하면서도 연해 왼편을 바라보는 게 수상스러웠다. 그러나 차가 움직이자 양복쟁이 하나가 저쪽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나 역시 무심코 보았을 뿐이었다.
【원문】만세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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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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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萬歲前) [제목]
 
  염상섭(廉想涉) [저자]
 
  1924년 [발표]
 
  사실주의(寫實主義) [분류]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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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12월 0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