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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전 (萬歲前) ◈
◇ 만세전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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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8월
염상섭
1
만세전 (萬歲前)
2
7
 
 
3
온밤 새도록 쏟아진 눈은 한 자 길이는 쌓였을 거라. 인력거꾼은 낑낑 매며 끄나 바퀴가 마음대로 돌지를 않는다. 북악산에서 내리지르는 바람은 타고 앉았는 사람의 발끝 코끝을 쏙쏙 쑤시게 하고, 안경을 쓴 눈이 어른어른하도록 눈물을 핑 돌게 한다. 남문 안 ‘신창’으로 나가는 술집 더부살이 같은 것이 굴뚝에서 기어나온 사람처럼 오동이 된 두루마기 위로 치룽을 짊어지고 팔짱을 끼고 충충충 걸어가는 것이 가다가다 눈에 띌 뿐이요, 아직 거리에는 사람 자취도 별로 없다. 불이 나가지 않은 문전의 외등(外燈)은 졸린 듯이 뽀얗게 김이 어리어 보인다. 인력거꾼은 여전히 허연 입김을 헉헉 뿜으며 다져진 눈 위로 꺼불꺼불하며 달아난다.
 
4
나는 일년 반 만에 보는 시가를 반가운 듯이 이리저리 돌려다보고 앉았다가, 어느덧 머릿속에 아내의 가죽만 남은 하얗게 센 얼굴이 떠올랐다.
 
5
‘이래도 남편이라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
 
6
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가엾은 생각이라고는 아니 난다. 도리어 별안간 아까 정거장에서 섭섭한 듯이 바라보고 섰던 대구 기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갸름하고 감숭한 얼굴, 무슨 불안을 호소하려는 듯한 그 눈.
 
7
‘지금쯤 어디를 헤매누? 말을 좀 붙여 보았더라면 좋았을걸!’
 
8
나는 추운 생각도 잊어버리고 멀거니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았다가, 우리집에 들어가는 동리를 지나쳤다. 인력거꾼의 꾸지람을 들어 가며 두어 간통이나 되짚어 내려와서 내렸다.
 
9
집안 식구들은 벌써 일어나서 세수까지 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10
“공부두 중하지만 그렇게도 좀 아니 나온단 말이냐.”
 
11
하며 어머님은 벌써부터 우는 목소리다.
 
12
“그래두 눈을 감기 전에 만나라도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13
하고 또 우신다. 과부가 된 뒤로 본가살이를 하는 큰누이도 훌쩍훌쩍하고 섰다. 작은누이도 덩달아서 눈을 부빈다. 뜰에서 멀거니 바라보고 섰던 큰집 사촌형수도 까닭 없이 돌아서며 행주치마로 콧물을 씻는 눈치다. 그래도 아버지만은 벌써 안방에 들어와 앉으셔서 잠자코 절을 받으셨다.
 
14
“아,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우셔요?”
 
15
나는 모친 앞에서도 여러 아낙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해마다 오면 어머니의 울고 맞아 주는 것이 귀찮다. 그러한 때에는 내 처도 으레히 제 방으로 피해 들어가서 홀짝거리었다. 반갑다고 우는 것이겠지마는, 아내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눈물이 핑 돌 때가 없지 않지만, 남이 우는 것을 보면 도리어 웃어 주고도 싶고 무어라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16
“좀 어떤 셈예요?”
 
17
인사가 끝난 뒤에 어머니에게 물으니까,
 
18
“그저 그렇지. 어서 들어가 보렴.”
 
19
하며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서 건넌방으로 앞장을 서서 들어갔다.
 
20
“아가 아가! 서방님 왔다. 얘, 얘, 일본서 서방님 왔어.”
 
21
혼수상태에 있던 병인은 눈을 슬며시 뜨고 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나서 곁에 앉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까맣게 탄 입술을 벌리고 생그레 웃는 듯하더니, 깔딱 질린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여지며 외면을 한다. 두꺼운 이불을 덮은 가슴이 벌렁거리며 괴로운 듯이 흑흑 느낀다.
 
22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인제 낫는다.”
 
23
어머니는 이렇게 달래면서도 역시 훌쩍거리며 나가 버리신다. 병풍으로 꼭꼭 막고 오줌똥을 받아 내는 오랜 병인의 방이라 퀴퀴한 냄새에 약내가 섞여서, 밤차에 피로한 사람의 비위를 여간 거스르는 게 아니지마는, 그래도 금시로 나가 버릴 수가 없어서 그 옆에 앉았었다.
 
24
“울지 말아요, 병에 해로우니.”
 
25
나는 겨우 한마디 하고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좋을지 몰라서 벙벙히 앉았었다.
 
26
“중기(重基), 중기 보셨소?”
 
27
병인은 눈물을 씻으며 겨우 스러져 가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하고 나를 쳐다본다. 곁에 앉았던 계집애년이 집어 주는 수건을 받는 손을 볼 제, 나는 비로소 가엾은 생각이 났다. 가죽이 착 달라붙고 뼈가 앙상한 손이 바르르 떨리었다.
 
28
‘저 손이, 이 몸에 닿던 포동포동하고 제일 귀여워 보이던 그 손이던가?’
 
29
하는 생각을 하여 보니 어쩐지 마음이 아프고 실쭉하여졌다.
 
30
“……난, 나는 죽는 사람이에요. 하, 하지만 저 중기만은…….”
 
31
하며 또 기운 없이 입을 벌리다가 목이 메고 말았다. 그저 그 소리지마는 시원하게 울고 싶어도 기운이 진하여서 눈물만 쏟아지는 모양이다.
 
32
“그런 소리 말아요, 죽기는 왜 죽어. 마음을 턱 놓고 있으면 나아요.”
 
33
“인제는 더 살구 싶지두 않어요, 어떻든 저것만은 잘 맡으세요.”
 
34
또다시 흑흑 느끼다가,
 
35
“저것을 생각하니까, 하, 하루라두 더 살려는 것이지.”
 
36
하며 엉엉 목을 놓고 우나, 가다가다 목이 메어서 모기 소리만큼 졸아들어 갔다.
 
37
나는 무어라고 대꾸를 하여야 좋을지 망단하였다. 죽어 가면서도 자식 생각을 하는 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부질없는 일 같기도 하다. 오래 앉았으면 점점더 울 것 같고, 또 사실 더 앉았기도 싫기에 나는 울지 말라고 달래면서 안방으로 건너와서, 아랫목에 깔아 놓았던 조선옷과 갈아입었다. 정거장에 나왔던 사촌형이 들어와서,
 
38
“사랑에서 부르시네.”
 
39
하며 이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 형님은 종가(宗家)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에 일평생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사십 년을 지내 왔다. 그러나 이 형님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집안의 또 큰 걱정거리란다.
 
40
사랑에 나가서 깜짝 놀란 것은 김의관이 아버님 옆에 앉았는 것이다.
 
41
‘언제부터 또 와서 있누?’
 
42
하며 어제 차 속에서 보던 금테안경을 생각하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니까,
 
43
“잘 있었나? 내환이 위중해서 얼마나 걱정이 되나?”
 
44
하며 한층더 점잔을 빼고, 양복은 입었으나 장죽을 물고 앉았다. 아랫목에 도사리고 앉으셨던 아버님은,
 
45
“거기 앉어라.”
 
46
하며 그 동안 병세의 경과를 소상히 이야기하며 무슨 탕(湯)을 몇 첩이나 썼더니 어떻게 변하고, 무슨 음(飮)을 몇 첩을 써보니까 얼마나 효험이 있었고, 무엇이 어떻게 걸리어서 얼마나 더치었다는 이야기를 기다랗게 들려 주셨으나 나에게는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 앉았다가,
 
47
“그 유종(乳腫)은 총독부 병원에 가서 얼른 파종을 시켰더면 좋았을걸요?”
 
48
하며 한마디 하니까,
 
49
“요새 양의가 무어 안다던? 형두 그 따위 소리를 하기에 죽여도 내 손으로 죽인다고 하였다만…….”
 
50
하며 역정을 내셨다. 나는 잠자코 말았다.
 
51
안에 들어와서 급히 차려 주는 조반을 먹다가,
 
52
“김의관은 왜 또 와 있에요?”
 
53
하고 어머니께 물어 보았다.
 
54
“집을 뺏기구 첩허구 헤어진 뒤에 벌써부터 와 있단다.”
 
55
“그럼 큰집은 어떡하구요?”
 
56
“큰집은 있기야 있지만, 언제는 안 돌아다니나 보던. 더구나 셋방으로 돌아다니는 터에! 매일 술타령이요, 사람이 죽을 지경이다.”
 
57
하며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리셨다.
 
58
“그, 왜 붙여요?”
 
59
김의관에 대한 숭배심을 잃은 나는 그 반동으로 보기가 싫었다.
 
60
“왜 붙이는 게 뭐냐?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 김의관만한 사람이 없다고, 누가 무어라고만 하면 야단이시구, 꼭 겸상해서 잡숫다시피 하시는데.”
 
61
김의관은 합방통에 무슨 대신(大臣)으로 합방에 매우 유공한 서자작(徐子爵)의 일긴(一緊)으로서 그 서씨의 집을 얻어 들었는데, 서씨가 올 여름에 죽은 뒤에는 집까지 뺏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으로 서자작이 하던 사업―---이라야 별다른 게 아니라 귀족들의 초상집 호상차지하는 것이지만, 이것만은 대를 물려받아서 한다는 소문이다.
 
62
“그건 고사하고, 여보, 김의관이 유치장에 들어갔다가 그저께야 나왔다우. 모닝코트를 입구, 하하하.”
 
63
시험이 며칠 아니 남았다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무엇인지를 꼼지락꼼지락하고 앉았던 누이동생이 돌려다보며 말참견을 한다.
 
64
“응? 허허, 그거 걸작이다! 헌데 무슨 일루?”
 
65
나는 김의관이 예전에 두 번이나 붙들려 가는 것을 따라가 본 일이 있느니만큼 유치장이란 말에 커닿게 웃었다.
 
66
“누가 아우. 밤중에 요릿집에서 부랑자 취체에 붙들려 들어갔다가 이 주일 만에 나왔다우, 하하하…….”
 
67
“허허허…….”
 
68
나는 합병통에 헌병사령부에 가던 일을 생각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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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누가 쫓아갔던?”
 
70
하며 또 한번 웃었다.
 
71
“아, 참 너두 밤출입 하지 마라. 요새는 부랑자 취체도 퍽 심한 모양인데…….”
 
72
어머니는 곁에서 주의를 시킨다.
 
73
“왜 내가 부랑잔가요? 그런데 김의관이 유치장에서 나와서 무어라구 해?”
 
74
하며 누이더러 물어 보았다.
 
75
“아버지께서는 누가 먹어 내기 때문에 들어갔다구 하시지만, 큰집 오빠가 그러는데, 요릿집에서 취체를 당하니까, 물론 독립운동자를 잡으려는 것인데, 김의관이 호기 좋게 정무총감(政務總監)에게 전화를 걸 테라구 법석을 하기 때문에 형사들은 더 아니꽈서, 웬 되지 않은 놈이 이 기승이냐고 곯려 주었나 보다던데요.”
 
76
“넌 뭘 안다구 어른들 이야기를 그렇게 하니!”
 
77
어머니는 누이를 잠깐 꾸짖고 나시더니, 아랫방에서 중기가 깨었다고 안고 나오는 것을 받아 가지고 들어오신다.
 
78
“자아, 너 아범 봐라. 너 아범 왔다. 좀 봐라! 왜 인제 오셨소?”
 
79
어머니는 겨우 핏덩어리를 면한 조그만 고깃덩어리를 얼러 가며 나에게로 데미셨다. 처네에 싸인 바짝 마른 아이는 추워서 그러는지 두 팔을 오그라뜨리고 바르르 떨면서, 핏기 없는 앙상한 얼굴을 이리로 향하고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으아 하며 가냘픈 목소리로 운다.
 
80
“그, 왜, 그 모양이에요?”
 
81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82
“왜 어떠냐? 모습이 너 닮아 이쁘지 않으냐? 인제 석 달쯤 된 게 그렇지. 그러나 나면서 어디 에미 젖이라군 변변히 먹어 봤니. 유모를 한 달쯤 댔다가 나가 버린 뒤로는 똑 우유로만 길렀는데.”
 
83
울음을 시작한 어린아이는 좀처럼 그치지를 안고 점점더 발악을 한다. 파랗게 질리어서 두 발을 뻗드딩거리고 배를 발딱발딱 쳐들어 가며 방 안을 발깍 뒤집어놓는다.
 
84
“에그, 이게 웬 야단이야?”
 
85
하며 누이는 보던 책을 덮어 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루로 홱 나가 버렸다. 나도 상을 밀어 놓고 총총히 일어났다. 사랑으로 나가서 건넌방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며 누웠으려니까, 낯 서투른 청년이 하나 찾아왔다. 동경의 소할(所轄)경찰서에서 지금 종로서로 인계를 하여 왔는데 다시 떠날 때까지 자기가 미행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86
“얼마 아니 계실 테지요? 늘 쫓아다니지는 않겠습니다. 가끔가끔 올 테니 그 대신에 문 밖이나 시골을 가시거든 요 앞 교번소로 통기를 좀 해주슈.”
 
87
하며 매우 생색이나 내는 듯이 중언부언하고 가버렸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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