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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생기 (終生記) ◈

해설본문  1937년 5월
이상
1
극유산호(郤遺珊瑚)— 요 다섯 자(宇) 동안에 나는 두 자(字) 이상(以上)의 오자(誤字)를 범(犯)했는가 싶다. 이것은 나 스스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일이겠으나 인지(人智)가 발달해가는 면목(面目)이 실로 약여(躍如)하다.
 
2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산호(珊瑚) 채찍일랑 꽉 쥐고 죽으리라. 내 폐포파립(廢袍破笠) 우에 퇴색(退色)한 망해(亡骸) 우에 봉황(鳳凰)이 와 앉으리라.
 
3
나는 내「종생기(終生記)」가 천하(天下) 눈 있는 선비들의 간담(肝膽)을 서늘하게 해 놓기를 애틋이 바라는 일념(一念) 아래의만큼 인색(吝嗇)한 내 맵씨의 절약법(節約法)을 피력(披瀝)하여보인다.
 
4
일발포성(一發砲聲)에 부득이 영웅(英雄)이 되고 만 희대(稀代)의 군인(軍人) 모(某)는 아흔에 귀를 단 황송한 일생(一生)을 끝막던 날 이렇다는 유언(遺言) 한 마디를 지껄이지 않고 그 임종(臨終)의 장면(場面)을 곧잘 (무사(無事)히 후― 한숨이 나올 만큼) 넘겼다.
 
5
그런데 우리들의 레우오치카— 애칭(愛稱) 톨스토이— 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나선 데까지는 기껏 그럴 성싶게 꾸며 가지고 마지막 오분(五分)에 가서 그만 잡았다. 자지레한 유언(遺言)나부랭이로 말미암아 70년(七十년) 공든 탑(塔)을 무너뜨렸고 허울 좋은 일생(一生)에 가실 수없는 흠집을 하나 내어놓고 말았다.
 
6
나는 일개(一個) 교활(狡猾)한 옵서버— 의 자격으로 그런 우매(愚昧)한 성인(聖人)들의 생애(生涯)를 방청(傍聽)하여 있으니 내가 그런 따위 실수를 알고도 재범(再犯)할 리가 없는 것이다.
 
7
거울을 향하여 면도질을 한다. 잘못해서 나는 생채기를 내인다. 나는 골을 벌컥 내인다.
 
8
그러나 와글와글 들끓는 여러 「나」와 나는 정면(正面)으로 충돌(衝突)하기 때문에 그들은 제각기 베스트를 다하여 제 자신만을 변호(辯護)하는 때문에 나는 좀처럼 범인(犯人)을 찾아내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9
그리기에 대저(大抵) 어리석은 민중(民衆)들은 「원숭이가 사람흉내를 내이네.」 하고 마음을 놓고 지내는 모양이지만 사실 사람이 원숭이 흉내를 내이고 지내는 바 짜 지당(至當)한 전고(典故)를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탓이리라.
 
10
오호(嗚呼)라.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이미 아담 이브의 그런 충동적(衝動的) 습관(習慣)에서는 탈각(脫却)한 지 오래다. 반사운동(反射運動)과 반사운동(反射運動) 틈사구니에 끼워서 잠시 실로 전광석화(電光石火)만큼 손꾸락이 자의식(自意識)의 포로(捕虜)가 되었을 때 나는 모처럼 내 허무(虛無)한 세월(歲月) 가운데 한각(閑却)되어 있는 기암(奇岩), 내 콧잔등이를 좀 만지작 만지작 했다거나, 고귀(高貴)한 대화(對話)와 대화(對話) 늘어선 쇠사슬 사이에도 정(正)히 간발(間髮)을 허용(許容)하는 들창이 있나니 그 서슬 퍼런 날〔刃〕이 자의식(自意識)을 걷잡을 사이도 없이 양단(兩斷)하는 순간(瞬間) 나는 내 명경(明鏡) 같이 맑아야 할 지보(至寶) 두 눈에 혹(或)시 눈꼽이 끼지나 않았나 하는 듯이 적절(適切)하게 주름살 잡힌 손수건을 꺼내어서는 그 두 눈을 만지작 만지작 했다거나—
 
11
내 혼백(魂魄)과 사대(四大)의 점잖은 태만성(怠慢性)이 그런 사소(些少)한 연화(煙火)들을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보고 와서) 내 통괄(統括)되는 처소(處所)에다 일러 바쳐야만 하는 그런 압도적(壓倒的) 망쇄(忙殺)를 나는 이루 감당(勘當)해 내이는 수가 없다.
 
12
그러나 나는 내 지중(至重)한 산호편(珊瑚鞭)을 자랑하고 싶다.
 
13
「쓰레기」 「우거지」
 
14
이 구지레한 단자(單字)의 분위기(雰圍氣)를 족하(足下)는 족(足)히 이해(理解)하십니까.
 
15
족하(足下)는 족하(足下)가 기독교식(基督敎式)으로 결혼(結婚)하던 날 네이브 · 앤드 · 아일에서 이 「쓰레기」 「우거지」에 근이(近邇)한 감흥(感興)을 맛보았으리라고 생각이 되는데 과연(果然) 그렇지는 않으십니까.
 
16
나는 그런 「쓰레기」나 「우거지」같은 테잎을— 내 종생기(終生記) 처처(處處)에다 가련(可憐)히 심어놓은 자지레한 치레를 위하여— 뿌려 보려는 것인데—
 
17
다행(多幸)히 박수(拍手)하다. 이상(以上).
 

 
18
「치사(侈奢)한 소녀(少女)는」, 「해동기(解凍期)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의 낙화(落花)지듯 좀 파래지면서」, 「박빙(薄氷)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 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운기를 품은 훈풍(薰風)이 불어와서」, 「스커트」, 아니 아니, 「너무나.」 아니 아니, 「좀」 「슬퍼 보이는 홍발(紅髮)을 건드리면」 그만. 더 아니다. 나는 한마디 가련(可憐)한 어휘(語彙)를 첨가(添加)할 성의(誠意)를 보이자.
 
19
「나붓 나붓」.
 
20
이만 하면 완비(完備)된 장치(裝置)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내 종생기(終生記)의 서장(序章)을 꾸밀 그 소문 높은 산호편(珊瑚鞭)을 더 여실히 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실(實)로 나로서는 너무나 과람(過濫)히 치사(侈奢)스럽고 어마어마한 세간살이를 장만한 것이다.
 
21
그런데—
 
22
혹(或) 지나치지나 않았나. 천하(天下)에 형안(炯眼)이 없지 않으니까 너무 금(金)칠을 아니 했다가는 서툴리 들킬 염려가 있다. 허나—
 
23
그냥 어디 이대로 써〔用〕보기로 하자.
 
24
나는 지금 가을바람이 자못 소슬(簫瑟)한 내 구중중한 방에 홀로 누워 종생(終生)하고 있다.
 
25
어머니 아버지의 충고(忠告)에 의하면 나는 추호(秋毫)의 틀림도 없는 만 25세(滿二十五歲)와 11개월(十一個月)의 「홍안 미소년(紅顔美少年)」이라는 것이다. 그렀건만 나는 확실(確實)히 노옹(老翁)이다. 그날 하루 하루가 「인생(人生)은 짧고 예술(藝術)은 길다랗다.」하는 엄청난 평생(平生)이다.
 
26
나는 날마다 운명(殞命)하였다. 나는 자던 잠— 이 잠이야 말로 언제 시작한 잠이더냐.— 을 깨이면 내 통절(痛切)한 생애(生涯)가 개시(開始)되는데 청춘(靑春)이 여지없이 탕진(蕩盡)되는 것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웠지만 역력(歷歷)히 목도(目睹)한다.
 
27
나는 노래(老來)에 빈한(貧寒)한 식사(食事)를 한다. 12시간(十二時間) 이내(以內)에 종생(終生)을 맞이하고 그리고 할 수 없이 이리 궁리 저리 궁리 유언(遺言)다운 어디 유실(遺失)되어 있지 않나 하고 찾고, 찾아서는 그 중 의젓스러운 놈으로 몇 추린다.
 
28
그러나 고독(孤獨)한 만년(晩年) 가운데 한 구(句)의 에피그람을 얻지 못하고 그대로 처참(悽慘)히 나는 물고(物故)하고 만다.
 
29
일생(一生)의 하루—
 
30
하루의 일생(一生)은 대체(大體) (위선) 이렇게 해서 끝나고 끝나고 하는 것이었다.
 
31
자― 보아라.
 
32
이런 내 분장(粉裝)은 좀 과(過)하게 치사스럽다는 느낌은 없을까 없지 않다.
 
33
그러나 위풍당당(威風堂堂) 일세(一世)를 풍미(風靡)할 만한 참신무비(斬新無比)한 햄릿(망언다사(妄言多謝))을 하나 출세(出世)시키기 위하여는 이만한 출자(出資)는 아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없지 않다.
 
34
나는 가을. 소녀(少女)는 해동기(解凍期).
 
35
어느 제나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즐거운 소꿉장난을 한번 해 보리까.
 
36
나는 그해 봄에도—
 
37
부질없는 세상이 스스러워서 상설(霜雪)같은 위엄(威嚴)을 갖춘 몸으로 한심(寒心)한 불우(不遇)의 일월(日月)을 맞고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38
미문(美文), 미문(美文), 애아(曖呀)! 미문(美文).
 
39
미문(美文)이라는 것은 저윽이 조처(措處)하기 위험(危險)한 수작이니라.
 
40
나는 내 감상(感傷)의 꿀방구리 속에 청산(靑山) 가던 나비처럼 마취(痲醉) 혼사(昏死)하기 자칫 쉬운 것이다. 조심 조심 나는 내 맵시를 고쳐야 할 것을 안다.
 
41
나는 그날 아침에 무슨 생각에서 그랬던지 이를 닦으면서 내 작성(作成) 중(中)에 있는 유서(遺書) 때문에 끙 끙 앓았다.
 
42
열세 벌의 유서(遺書)가 거의 완성(完成)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을 집어내 보아도 다 같이 서른 여섯 살에 자수(自殊)한 어느 「천재(天才)」가 머리맡에 놓고 간 개세(蓋世)의 일품(逸品)의 아류(亞流)에서 일보(一步)를 나서지 못했다. 내게 요만 재주 밖에는 없느냐는 것이 다시없이 분하고 억울한 사정(事情)이었고 또 초조(焦燥)의 근원(根元)이었다. 미간(眉間)을 찌푸리되 가장 고매(高邁)한 얼굴은 지속(持續)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리고 계속하여 끙 끙 앓고 있노라니까 (나는 일시일각(一時一刻)을 허송(虛送)하지는 않는다. 나는 없는 지혜(智慧)를 끊치지 않고 쥐어 짠다) 속달(速達) 편지가 왔다. 소녀(少女)에게서다.
 
 
43
선생(先生)님! 어제 저녁 꿈에도 저는 선생(先生)님을 만나뵈었습니다. 꿈 가운데 선생(先生)님은 참 다정(多情)하십니다. 저를 어린애처럼 귀여워해 주십니다.
 
44
그러나 백일(白日) 아래 표표(飄飄)하신 선생(先生)님은 저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45
비굴(卑屈)이라는 것이 무슨 빛으로 되어 있나 보시랴거든 선생(先生)님은 거울을 한번 보아 보십시오. 거기 비치는 선생(先生)님의 얼굴빛이 바로 비굴(卑屈)이라는 것의 빛입니다.
 
46
헤어진 부인(夫人)과 삼년(三年)을 동거(同居)하시는 동안에 너 가거라 소리를 한 마디도 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 선생(先生)님의 유일(唯一)의 자만(自慢)이십디다그려! 그렇게까지 선생(先生)님은 인정(人情)에 구구(苟苟)하신가요.
 
47
R과도 깨끗이 헤어졌습니다. S와도 절연(絶緣)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된다는 것은 선생(先生)님께서도 믿어 주시는 바지요? 다섯 달 동안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청절(淸節)을 인정(認定)해 주시기 바랍니다.
 
48
저의 최후(最後)까지 더럽히지 않은 것을 선생(先生)님께 드리겠습니다. 저의 히멀건 살의 매력(魅力)이 이렇게 다섯 달 동안이나 놀고 없는 것은 참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이 아깝습니다. 저의 잔털 나스르르한 목, 영한 온도가 선생(先生)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생(先生)님이어! 저를 부르십시오. 저더러 영영 오라는 말을 안 하시는 것은 그것 역시(亦是) 가신쩍 경우와 똑 같은 이론(理論)에서 나온 구구(苟苟)한 인생(人生) 변호(辯護)의 치사스러운 수법(手法)이신가요?
 
49
영원(永遠)히 선생(先生)님 「한분」만을 사랑하지요. 어서 어서 저를 전적(全的)으로 선생(先生)님만의 것을 만들어 주십시오. 선생(先生)님의 「전용(專用)」이 되게 하십시오.
 
50
제가 아주 어수룩한 줄 오산(誤算)하고 계신 모양인데 오산(誤算) 치고는 좀 어림없는 큰 오산(誤算)이리다.
 
51
네 딴은 제법 든든한 줄만 믿고 있는 네 그 안전지대(安全地帶)라는 것을 너는 아마 하나 가진 모양인데 그까짓 것쯤 내 말 한 마디에 사태(沙汰)가 나고 말리라, 이렇게 일러 드리고 싶습니다. 또—
 
52
예끼! 구역질 나는 인생(人生) 같으니 이러고도 싶습니다.
 
53
3월(三月) 3일(三日)날 오후(午後) 두 시에 동소문(東小門) 버스 정류장(停留場) 앞으로 꼭 와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요 내 징벌(懲罰)을 안 받지 못하리다.
 
54
만(滿) 19세(十九歲) 2개월(二個月)을 맞이하는
 
55
정희(정희(貞姬)) 올림
 
56
이상(李箱) 선생(先生)님 께
 
 
57
물론(勿論) 이것은 죄다 거짓부렁이다. 그러나 그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아슬아슬한 용심법(用心法)이 특(特)히 그 중(中)에도 결미(結尾)의 비견할 데 없는 청초(淸楚)함이 장(壯)히 질풍신뢰(疾風迅雷)를 품은 듯한 명문(名文)이다.
 
58
나는 까무러칠 번하면서 혀를 내어둘렀다. 나는 깜빡 속기로 한다. 속고 만다.
 
59
여기 이 이상(李箱) 선생(先生)님이라는 허수아비 같은 나는 지난 밤 사이에 내 평생(平生)을 경력(經歷)했다. 나는 드디어 쭈굴쭈굴하게 노쇠(老衰)해 버렸던 차에 아침(이 온 것)을 보고 이키! 남들이 보는 데서는 나는 가급적(可及的) 어쭙지않게(잠을) 자야 되는 것이어늘, 하고 늘 이를 닦고 그리고는 도로 얼른 자 버릇하는 것이었다. 오늘도 또 그럴 세음이었다.
 
60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짐짓 기이(奇異)하기도 해서 그러는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육중한 경륜(經綸)을 품은 사람인가 보다고들 속는다. 그러니까 고렇게 하는 것이 내 시시한 자세(姿勢)나마 유지(維持)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비결(秘訣)이었다. 즉 나는 남들 좀 보라고 낮에 잔다.
 
61
그러나 그 편지를 받고 흔희작약(欣喜雀躍), 나는 개세(蓋世)의 경륜(經綸)과 유서(遺書)의 고민(苦悶)을 깨끗이 씻어버리기 위하여 바로 이발소(理髮所)로 갔다. 나는 여간 아니 호걸(豪傑)답게 입술에다 치분(齒粉)을 허옇게 묻혀가지고는 그 현란한 거울 앞에 가 앉아 이제 호화장려(豪華壯麗)하게 개막(開幕)하려드는 내 종생(終生)을 유유(悠悠)히 즐기기로 거기 해당(該當)하게 내 맵시를 수습(收拾)하는 것이었다.
 
62
위선 그 작소(鵲巢)라는 뇌명(雷名)까지 있는 봉발(蓬髮)을 썰어서 상고머리라는 것을 만들었다. 오각수(五角鬚)는 깨끗이 도태(淘汰)해 버렸다. 귀를 우비고 코털을 다듬었다. 안마(按摩)도 했다. 그리고 비누 세수를 한 다음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니 품(品) 있는 데라고는 한 귀퉁이도 없어 보이는 듯하면서 또한 태생(胎生)을 어찌 어기리오, 좋도록 말해서 라파엘 전파(前派) 일원(一員) 같이 그렇게 청초(淸楚)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고도 보아줄 수 있지 하고 실없이 제 얼굴을 미남자(美男子)거니 고집(固執)하고 싶어 하는 구지레한 욕심을 내심(內心) 탄식(嘆息)하였다.
 
63
아차! 나에게도 모자(帽子)가 있다. 겨울내(乃) 꾸겨박질러 두었던 것을 부득부득 끄집어내어다 15분간(十五分間) 세탁소(洗濯所)로 가지고 가서 멀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흰 바지저고리에 고동색(古銅色) 대님을 다 치고 차림차림이 제법 이색(異色)이 있다. 공단은 못되나마 능직(綾織) 두루마기에 이만하면 고왕금래(古往今來) 모모(某某)한 천재(天才)의 풍모(風貌)에 비겨도 조곰도 손색(遜色)이 없으리라. 나는 내 그런 여간 이만저만 하지 않은 풍모(風貌)를 더욱더욱 이만저만 하지 않게 모디파이어 하기 위하여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고다지 알맞은 단장을 하나 내 손에 쥐어주어야 할 것도 때마침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64
별 수 없이—
 
65
오늘이 즉 3월(三月) 3일(三日)인 것이다.
 
66
나는 점잖게 한 30분(三十分)쯤 지각(遲刻)해서 동소문(東小門) 지정받은 자리에 도착(到着)하였다. 정희(貞姬)는 또 정희(貞姬)대로 아주 정희(貞姬)다웁게 한 30분(三十分)쯤 일찍 와서 있다.
 
67
정희(貞姬)의 입상(立像)은 제정(帝政) 노서아(露西亞)쩍 우표(郵票) 딱지처럼 적잖이 슬프다. 이것은 아직도 얼음을 품은 바람이 해토(解土)머리답게 싸늘해서 말하자면 정희(貞姬)의 모양을 얼마간 침통(沈痛)하게 해 보일 탓이렷다.
 
68
나는 이런 경우(境遇)에 천만(千萬) 뜻밖에도 눈물이 핑 눈에 그뜩 돌아야 하는 것이 꼭 맞는 원칙(原則)으로서의 의표(意表)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저벅저벅 정희(貞姬) 앞으로 다가갔다.
 
69
우리들은 이 땅을 처음 찾아온 제비 한 쌍처럼 잘 앙증스럽게 만보(漫步)하기 시작했다. 걸어가면서도 나는 내 두루마기에 잡히는 주름살 하나에도 단장을 한번 휘저었는 곡절(曲折)에도 세세(細細)히 조심한다. 나는 말하자면 내 우연(偶然)한 종생(終生)을 깜쪽스럽도록 찬란하게 허식(虛飾)하기 위하여 내 박빙(薄氷)을 밟는 듯한 포즈를 아차 실수로 무너뜨리거나 해서는 절대(絶對)로 안 된다는 것을 굳게굳게 명(銘)하고 있는 까닭이다.
 
70
그러면 맨 처음 발언(發言)으로는 나는 어떤 기절처참(奇絶慘絶)한 경구(警句)를 내어놓아야 할 것인가, 이것 때문에 또 잠깐 머뭇머뭇 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대이고 거 어쩌면 그렇게 똑 제정(帝政) 로서아(露西亞)쩍 우표(郵票) 딱지 같이 초초(楚楚)하니 어쩌니 하는 수는 차마 없다.
 
71
나는 선뜻
 
72
「설마가 사람을 죽이느니.」
 
73
하는 소리를 저 배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듯한 그런 까라앉은 목소리에 꽤 명료(明瞭)한 발음(發音)을 얹어서 정희(貞姬) 귀 가까이다 대이고 지껄여 버렸다. 이만하면 아마 그 경우(境遇)의 최초(最初)의 발성(發聲)으로는 무던히 성공(成功)한 편이리라. 뜻인즉, 네가 오라고 그랬다고 그렇게 내가 불쑥 올 줄은 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리라는 꼼꼼한 의도(意圖)다.
 
74
나는 아침 반찬으로 콩나물을 3전(三錢)어치는 안 팔겠다는 것을 교묘(巧妙)히 무사(無事)히 3전(三錢)어치만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미끈한 쾌감(快感)을 맛본다. 내 딴은 다행(多幸)히 노랑돈 한푼도 참 용하게 낭비(浪費)하지는 않은 듯싶었다.
 
75
그러나 그런 내 청천(晴天)에 벽력(霹靂)이 떨어진 것 같은 인사(人事)에 대하여 정희(貞姬)는 실(實)로 대답이 없다. 이것은 참 큰일이다.
 
76
아이들이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하고 노는 그런 암팡진 수단(手段)으로 그냥 단번에 나를 어지러뜨려서는 넘어뜨려버릴 작정인 모양이다.
 
77
정말 그렇다면!
 
78
이 상쾌(爽快)한 정희(貞姬)의 혹호(確乎) 부동자세(不動姿勢)야말로 엔간치 않은 출품(出品)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내어놓은 바 살인촌철(殺人寸鐵)은 그만 즉석(卽席)에서 분쇄(粉碎)되어 가엾은 불작(不作)으로 내려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고 나는 느꼈다.
 
79
나는 나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規模)의 손짓발짓을 한벌 해 보이고 이윽고 낙담(落膽)하였다는 것을 표시(表示)하였다. 일이 여기 이른 바에는 내 포즈 여부(與否)가 문제(問題) 아니다. 표정(表情)도 인제 더 써먹을 것이 남아 있을 성싶지도 않고 해서 나는 겸연쩍게 안색(顔色)을 좀 고쳐가지고 그리고 정희(貞姬)! 그럼 나는 가겠소, 하고 깍듯이 인사(人事)하고 그리고?
 
80
나는 발길을 돌쳐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생애(生涯)가 자지레한 말 한 마디로 하여 그만 회신(灰燼)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나는 세상에도 참혹(慘酷)한 풍채(風采) 아래서 내 종생(終生)을 치룬 것이다 고 생각하면서 그렇다면 그럼 그럴 성싶기도 하게 단장도 한두 번 휘두르고 입도 좀 일기죽일기죽 해보기도 하고 하면서 행차(行次)하는 체해 보인다.
 
81
5초(五秒)— 10초(十秒)— 20초(二十秒)— 30초(三十秒)— 일분(一分)—
 
82
결(決)코 뒤를 돌아다 보거나 해서는 못쓴다. 어디까지든지 사심(私心)없이 패배(敗北)한 체하고 걷는 체한다. 실심(失心)한 체한다.
 
83
나는 사실(事實)은 좀 어지럽다. 내 쇠약(衰弱)한 심장(心臟)으로는 이런 자약(自若)한 체조(體操)를 그렇게 장시간(長時間) 계속(繼續)하기가 썩 어려운 것이다.
 
84
묘지명(墓誌銘)이라. 일세(一世)의 귀재(鬼才) 이상(李箱)은 그통생(通生)의 대작(大作)「종생기(終生記)」일편(一篇)을 남기고 서력(西曆) 기원후(紀元後) 1937년(一千九百三十七年) 정축(丁丑) 3월(三月) 3일(三日) 미시(未時) 여기 백일(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波瀾萬丈)(?)의 생애(生涯)를 끝막고 문득 졸(卒)하다. 향년(享年) 만(滿) 25세(二十五歲)와 11개월(十一個月). 오호(嗚呼)라! 상심(傷心)커다. 허탈(虛脫)이야. 잔존(殘存)하는 또 하나의 이상(李箱) 구천(九天)을 우러러 호곡(號哭)하고 이 한산(寒山) 일편석(一片石)을 세우노라. 애인(愛人) 정희(貞姬)는 그대의 몰후(歿後) 수삼인(數三人)의 비첩(秘妾)된 바 있고 오히려 장수(長壽)하니 지하(地下)의 이상(李箱)아! 바라건댄 명목(瞑目)하라.
 
85
그리 칠칠치는 못하나마 이만큼 해가지고 이 꼴 저 꼴 구지레한 흠집을 살짝 도회(韜晦)하기로 하자. 고만 실수(失手)는 여상(如上)의 묘기(妙技)로 겸(兼)사 겸(兼)사 메꾸고 다시 나는 내 반생(半生)의 진용(陣容) 후일(後日)에 관해 차근차근 고려(考慮)하기로 한다. 이상(以上).
 
86
역대(歷代)의 에피그람과 경국(傾國)의 철칙(鐵則)이 다 내에 있어서는 내 위선(僞善)을 암장(暗葬)하는 한 스무드한 구실(口實)에 지나지 않는다. 실(實)로 나는 내 낙명(落命)의 자리에서도 임종(臨終)의 합리화(合理化)를 위하여 코로처럼 도색(桃色)의 팔렡을 볼 수도 없거니와 톨스토이처럼 탄식(嘆息)해 주고 싶은 쥐꼬리만한 금언(金言)의 추억(追憶)도 가지지 않고 그냥 난데없이 다리를 삐어 넘어지듯이 스르르 죽어 가리라.
 
87
거룩하다는 칭호(稱號)를 휴대(携帶)하고 나를 찾아오는 「연애(戀愛)」라는 것을 응수(應酬)하는 데 있어서도 어디서 어떤 노소간(老少間)의 의뭉스러운 선인(先人)들이 발라먹고 내어버린 그런 유훈(遺訓)을 나는 헐값에 걷어드려다가는 제련(製鍊) 재탕(再湯) 다시 써먹는다.
 
88
는 줄로만 알았다가도 또 내게 혼나는 경우가 있으리라.
 
89
나는 찬밥 한 술 냉수(冷水) 한 모금을 먹고도 넉넉히 일세(一世)를 위압(威壓)할 만한 「고언(苦言)」을 적적(摘摘)할 수 있는 그런 지혜(智慧)의 실력(實力)을 가졌다.
 
90
그러나 자의식(自意識)의 절정(絶頂) 우에 발돋음을 하고 올라선 단말마(斷末魔)의 비결(秘訣)을 보통 야시(夜市) 국수 버섯을팔러오신 시골 아주먼네에게 서너 푼에 그냥 넘겨주고 그만두는 그렇게까지 자신(自信)의 에티켓을 미화(美化)시키는 겸허(謙虛)의 방식(方式)도 또한 나는 무루(無漏)히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당목(瞠目)할지어다. 이상(以上).
 
91
난마(亂麻)와 같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얼마간 비극적(悲劇的)인 자기탐구(自己探求).
 
92
이런 흙발 같은 남루(襤褸)한 주제는 문벌(門閥)이 버젓한 나로서 채택(採擇)할 신세(身勢)가 아니거니와 나는 태서(泰西)의 에티켓으로 차(茶) 한 잔을 마실 적의 포즈에 대하여도 세심(細心)하고 세심(細心)한 용의(用意)가 필요(必要)하다.
 
93
휘파람 한 번을 분다 치더라도 내 극비리(極秘裏)에 정선(精選) 은닉(隱匿)된 절차(節次)를 오곤(溫古)하여야만 한다. 그런 다음이 아니고는 나는 희망(希望) 잃은 황혼(黃昏)에서도 휘파람 한 마디를 마음대로 불 수는 없는 것이다.
 
94
동물(動物)에 대(對)한 고매(高魅)한 지식(智識)?
 
95
사슴, 물오리, 이 밖의 어떤 종류(種類)의 동물(動物)도 내 애니멀 킹돔에서는 탈락(落脫)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 수렵용(狩獵用)으로 귀여이 가엾이 되어 먹어 있는 동물(動物) 외(外)의동물(動物)에 언제든지 무가내하(無可奈何)로 무지(無智)하다.
 
96
또—
 
97
그럼 풍경(風景)에 대(對)한 오만(傲慢)한 처신법(處身法)?
 
98
어떤 풍경(風景)을 묻지 않고 풍경(風景)의 근원(根源), 중심(中心), 초점(焦點)이 말하자면 나 하나 「도련님」다운 소행(素行)에 있어야 할 것을 방약무인(傍若無人)으로 강조(强調)한다. 나는 이 맹목적(盲目的) 신조(信條)를 두 눈을 그대로 딱 부르감고 믿어야 된다.
 
99
자진(自進)한 「우매(愚昧)」, 「몰각(歿覺)」이 참 어렵다.
 
100
보아라. 이 자득(自得)하는 우매(愚昧)의 절기(絶技)를! 몰각(沒覺)의 절기(絶技)를.
 
101
백구(白鷗)는 의백사(宜白沙)하니 막부춘초벽(莫赴春草碧)하라.(이상 355면)
 
102
이태백(李太白). 이 전후만고(前後萬古)의 으리으리한 「화족(華族)」. 나는 이태백(李太白)을 닮기도 해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 오언절구(五言絶句) 한 줄에서도 한 자(字) 가량의 태연자약(泰然自若)한 실수(失手)를 범(犯)해야만 한다. 현란(絢爛)한 문벌(門閥)이 풍기는 가(可)히 범(犯)할 수 없는 기품(氣品)과 세도(勢道)가 넉넉히 고시(古詩) 한 절(節)쯤 서슴지 않고 생채기를 내어놓아도 다들 어수룩한 체들하고 속느니 하는 교만한 미신(迷信)이다.
 
103
곱게 빨아서 곱게 다리미질을 해놓은 한 벌 슈미즈에 꼬빡 속는 청절(淸節)처럼 그렇게 아담(雅淡)하게 나는 어떠한 질차(跌蹉)에서도 거뜬하게 얄미운 미소(微笑)와 함께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니까—
 
104
오늘날 내 한 씨족(氏族)이 분명(分明)치 못한 소녀(少女)에게 섣불리 딴죽을 걸어 넘어진다기로서니 이대로 내 숙망(宿望)의 호화유려(豪華流麗)한 종생(終生)을 한 방울 하잘것없는 오점(汚點)을 내이는 채 투시(投匙)해서야 어찌 초지(初志)의 만일(萬一)에 응답(應答)할 수 있는 면목(面目)이 족(足)히 서겠는가, 하는 허울좋은 구실(口實)이 영일(永日) 밤보다도 오히려 한 뼘 짧은 내 전정(前程)에 대두(擡頭)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05
완만(漫), 착실(着實)한 서술(敍述)!
 
106
나는 과(過)히 눈에 띠울 성싶지 않은 한 지점(地點)을 재재바르게 붙들어서 거기서 공중 담배를 한 갑 사(주머니에넣고) 피워물고 정희(貞姬)의 뻔한 걸음을 다시 뒤따랐다.
 
107
나는 그저 일상(日常)의 다반사(茶飯事)를 간과(看過)하듯이 범연(凡然)하게 휘파람을 불고 내 구두 뒤축이 아스팔트를 디디는 템포 음향(音響), 이런 것들의 귀찮은 조절(調節)에도 깔끔히 정신 차리면서 넉넉잡고 3분(三分), 다시 돌친 걸음은 정희(貞姬)와 어깨를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부질없는 세상(世上)에 제 심각(深刻)하면, 침통(沈痛)하면 또 어쩌겠느냐는 듯싶은 서운한 눈의 위치(位置)를 동소문(東小門) 밖 신개지(新開地) 풍경(風景) 어디라고 정(定)치 않은 한 점(點)에 두어두었으니 보라는 듯한 부득부득 지근거리는 자세(姿勢)면서도 또 그렇지도 않을 성싶은 내 묘기(妙技) 중(中)에도 묘기(妙技)를 더 한층 허겁지겁 연마(鍊磨)하기에 골돌하는 것이었다.
 
108
일모(日暮) 창산—
 
109
날은 저물었다. 아차! 저물지 않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을까 보다.
 
110
날은 아직 저물지 않았다.
 
111
그러면 아까 장만해 둔 세간 기구(器具)를 내세워 어디 차근차근 살림살이를 한번 치뤄 볼 천우(天佑)의 호기(好機)가 배 앞으로 다다랐나 보다. 자 —
 
112
태생(胎生)은 어길 수 없어 비천(卑賤)한 「타」를 감추지 못하는 딸— (전기(前記) 치사(侈奢)한 소녀(少女) 운운(云云)은 어디 까지든지 이 바보 이상(李箱)의 호의(好意)에서 나온 곡해(曲解)다. 모파상의「지방(脂肪) 덩어리」를 생각하자. 가족(家族)은 미만(未滿) 14세(十四歲)의 딸에게 매음(賣淫)시켰다. 두 번째는 미만(未滿) 19세(十九歲)의 딸이 자진(自進)했다. 아― 세 번째는 그 나이 스물두 살이 되던 해 봄에 얹은 낭자를 내리우고 게다 다홍댕기를 드려 늘어트려 편발 처자(妻子)를 위조(僞造)하여서는 대거(大擧)하여 강행(强行)으로 매끽(賣喫)하여 벌었다.
 
113
비천(卑賤)한 뉘 집 딸이 해빙기(解氷期)의 시냇가에 서서 입술이 낙화(落花)지듯 좀 파레지면서 박빙(薄氷) 밑으로는 무엇이 저리도 움직이는가 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듯이 숙이고 있는데 봄 방향(芳香)을 품은 훈풍(薰風)이 불어와서 스커트, 아니 너무나 슬퍼 보이는, 아니 좀 슬퍼 보이는 홍발(紅髮)을 건드리면—
 
114
좀 슬퍼 보이는 홍발(紅髮)을 나붓나붓 건드리면—
 
115
여상(如上)이다. 이 개기름 도는 가소(可笑)로운 무대(舞臺)를 앞에 두고 나는 나대로 나다웁게 가문(家門)이라는 자지레한 「투(套)」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채석장(採石場) 희멀건 단층(斷層)을 건너다보면서 탄식(嘆息) 비슷이,
 
116
「지구(地球)를 저며내는 사람들은 필시(必是) 자연파괴자(自然破壞者)리라.」는 둥,
 
117
「개아미 집이야말로 과연(果然) 정연(整然)하구나.」라는 둥,
 
118
「비가 오면, 아― 천하(天下)에 비가 오면,」
 
119
「작년(昨年)에 났던 초목(草木)이 올해에도 또 돋으려누. 귀불귀(歸不歸)란 무엇인가.」라는 둥—
 
120
치레 잘 하면 제법 의젓스러워도 보일 만한 가장 한산(閑散)한 과제(課題)로만 골라서 점잖게 방심(放心)해 보여 놓는다.
 
121
정말일까? 거짓말일까. 정희(貞姬)가 불쑥 말을 한다. 한 소리가 「봄이 이렇게 왔군요.」 하고 웃니는 좀 사이가 벌어져서 보기 흉한 듯하니까 살짝 가리고 곱다고 자처(自處)하는 아랫니를 보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부지불식(不知不識) 간에 그렇게 내어다 보인 것을 또 어쩝니까 하는 듯싶이 가증하게 내어보이면서 또 여간해서 어림이 서지 않는 어중간(於中間) 얼굴을 그 우에 얹어 내세우는 것이었다.
 
122
좋아, 좋아, 좋아, 그만하면 잘 되었어.
 
123
나는 고개 대신에 단장을 끄떡끄떡 해 보이면서 창졸간에 그만 정희(貞姬) 어깨 우에다 손을 얹고 말았다.
 
124
그랬더니 정희(貞姬)는 저윽히 해괴해 하노라는 듯이 잠시(暫時)는 묵묵(黙黙)하더니—
 
125
정희(貞姬)도 문벌(門閥)이라든가 혹(或)은 간편(簡便)히 말해 에티켓이라든가 제법 배워서 짐작하노라고 속삭이는 것이 아닌가.
 
126
꿀꺽!
 
127
넘어가는 내 지지한 종생(終生), 이렇게도 실수(失手)가 허(許)해서야 물화적(物貨的) 전생애(全生涯)를 탕진(蕩盡)해 가면서 사수(死守)하여온 산호편(珊瑚篇)의 본의가 대체 어디 있느냐? 내내(乃乃) 울화가 북받쳐 혼도(昏倒)할 것 같다.
 
128
흥천사(興天寺) 으슥한 구석방에 내 종생(終生)의 갈력(竭力)이 정희(貞姬)를 이끌어 들이기도 전에 나는 밤 쓸쓸히 거짓말깨나 해놓았나 보다.
 
129
나는 내가 그윽히 음모(陰謀)한 바 천고불역(千古不易)의 탕아(蕩兒), 이상(李箱)의 자지레한 문학(文學)의 빈민굴(貧民窟)을 교란(攪亂)시키고자 하던 가지가지 진기(珍奇)한 연장이 어느 겨를에 뻬물르기 시작한 것을 여기서 깨단해야 되나 보다. 사회(社會)는 어떠쿵, 도덕(道德)이 어떠쿵, 내면적(內面的) 성찰(省察), 추구(追求), 적발(摘發), 징벌(懲罰)은 어떠쿵, 자의식과잉(自意識過剩)이 어떠쿵, 제 깜냥에 번지레한 칠(漆)을 해 내어 걸은 치사스러운 간판(看板)들이 미상불(未嘗不)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다.
 
130
「독화(毒花)」
 
131
족하(足下)는 이 꼭두각시 같은 어휘(語彙) 한 마디를 잠시(暫時) 맡아 가지고 계셔 보구려?
 
132
예술(藝術)이라는 허망(虛妄)한 아궁지 근처(近處)에서 송장 근처(近處)에서보다도 한결 더 썰썰 기고 있는 그들 해반죽룩한 사도(死都)의 혈족(血族)들 땟국내 나는 틈에가 끼어서, 나는—
 
133
내 계집의 치마 단속곳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버선 켤레를 걸레를 만들어 놓았고, 검던 머리에 곱던 양자(樣姿), 영악(獰惡)한 곰의 발자국이 질컥 디디고 지나간 것처럼 얼굴을 망가뜨려 놓았고, 지기(知己) 친척(親戚)의 돈을 뭉청 떼어먹었고, 좌수터 유래(由來) 깊은 상호(商號)를 쑥밭을 만들어 놓았고, 겁쟁이 취라자(取利者)는 고랑때를 먹여 놓았고, 대금업자(貸金業者)의 수금인(收金人)을 졸도(卒倒)시켰고, 사장(社長)과 취체역(取締役)과 사돈과 아범과 애비와 처남(妻男)과 처제(妻弟)와 또 애비와 애비의 딸과 딸, 이 허다중생(許多衆生)으로 하여금 서로 서로 이간을 붙이고 붙이게 하고 얼버무려서 싸움질을 하게 해놓았고, 사글세방(貰房) 새 다다미에 잉크와 요강과 팥죽을 엎질렀고, 누구누구를 임포텐스를 만들어 놓았고—
 
134
「독화(毒花)」라는 말의 콕 찌르는 맛을 그만하면 어렴풋이나마 어떻게 짐작이 서는가 싶소이까.
 
135
잘못 빚은 증(蒸)편 같은 시(詩) 몇 줄, 소설(小說) 서너 편을 꿰어 차고 조촐하게 등장(登場)하는 것을 아 무엇인줄 알고 깜빡 속고 섣불리 손뼉을 한두 번 쳤다는 죄(罪)로 제 계집 간음당한 것보다도 더 큰 망신을 일신(一身)에 짊어지고 그리고는 앙탈 비슷이 시침이를 떼지 않으면 안 되는 어디까지든지 치사스러운 예의절차(禮儀節次)— 마귀(魔鬼)(터주가)의 소행(所行)(덧났다)이라고 돌려버리자?
 
136
「독화(毒花)」
 
137
물론(勿論) 나는 내일(來日) 새벽에 내 길들은 노상(路上)에서 무려(無慮) 내게 필적(匹敵)하는 한 숨은 탕아(蕩兒)를 해후(邂逅)할런지도 마치 모르나, 나는 신바람이 난 무(巫)당처럼 어깨를 치켰다 젖혔다하면서라도 풍마우세(風磨雨洗)의 고행(苦行)을 얼른 그렇게 쉽사리 그만두지는 앓는다.
 
138
아― 어쩐지 전신(全身)이 몹시 가렵다. 나는 무연(無緣)한 중생(衆生)의 뭇 원한(怨恨) 탓으로 악역(惡疫)의 범(犯)함을 입나보다. 나는 은근히 속으로 앓으면서 토일렡 정한 대야에다 양(兩) 손을 정하게 씻은 다음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아 차근차근 나자신(自身)을 반성(反省) 회오(悔悟)— 쉬운 말로 자지레한 세음을 좀 놓아보아야겠다.
 
139
에티켓? 문벌(門閥)? 양식(良識)? 번신술(翻身術)?
 
140
그렇다고 내가 찔끔 정희(貞姬) 어깨 우에 얹었든 손을 뚝 떼인다든지 했다가는 큰 망발이다. 일을 잡치리라. 어디까지든지 내 뺨의 홍조(紅潮)만을 조심하면서 좋아, 좋아, 좋아, 그래만 주면 된다. 그리고 나서 피차(彼此)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어깨를 나란히 흥천사(興天寺) 경내(境內)로 들어갔다. 가서 길을 별안간 잃어버린 것처럼 자분참 산(山) 우으로 올라가버린다. 산(山) 우에서 이번에는 정말 포즈를 할 일 없이 무너뜨렸다는 것처럼 정교(精巧)하게 머뭇머뭇 해준다. 그러나 기실 말짱하다.
 
141
풍경(風磬) 소리가 똑 알맞다. 이런 경우에는 제법 번듯한 식자(識字)가 있는 사람이면—
 
142
아― 나는 왜 늘 항례(恒例)에서 비껴 서려드는 것일까? 잊었느냐? 비싼 월사(月謝)를 바치고 얻은 고매(高邁)한 학문(學問)과 예절(禮節)을,
 
143
현역(現役) 육군중좌(陸軍中佐)에게서 받은 추상열일(秋霜烈日)의 훈육(訓育)을 왜 나는 이 경우에 버젓하게 내세우지를 못하느냐?
 
144
창연(愴然)한 고찰(古刹) 유루(遺漏)없는 장치(裝置)에서 나는 정신차려야 한다. 나는 내 쟁쟁(錚錚)한 이력(履歷)을 솔직(率直)하게 써먹어야 한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도장(屠場)에 들어가는 소, 죽기보다 싫은 서툴고 근질근질한 포즈, 체모(體貌) 독주(獨奏)에 어지간히 성공(成功)해야만 한다.
 
145
그랬더니 그만두 한다. 당신의 그 어림없는 몸치렐랑 그만 두세요. 저는 어지간히 식상(食傷)이 되었습니다 한다.
 
146
그렇다면?
 
147
내 꾸준한 노력(努力)도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수포(水泡)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148
대체(大體) 정희(貞姬)라는 가련(可憐)한 「석녀(石女)」가 제 어떤 재간으로 그런 음흉(陰凶)한 내 간계(奸計)를 요만큼까지 간파(看破)했다는 것이다.
 
149
일시(一時)에 기진(氣盡)한다. 맥(脈)은 탁 풀리고는 앞이 팽 돌다 아찔 하는 것이 이러다가 까무러치려나 보다고 극력(極力) 단장을 의지하여 버텨보노라니까 희(噫)라! 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종생(終生)도 이번만은 회춘(回春)하기 장히 어려울 듯싶다.
 
150
이상(李箱)! 당신은 세상(世上)을 경영(經營)할 줄 모르는 말하자면 병신이오. 그다지도 「미혹(迷惑)」하단 말씀이오? 건너다보니 절터지요? 그렇다 하더라도「카라마조프의 형제(兄弟)」나「사십년(四十年)」을 좀 구경삼아 들러보시지요.
 
151
아니지! 정희(貞姬)! 그게 뭐냐 하면 나도 살고 있어야 하겠으니 너도 살자는 사기(詐欺), 속임수, 일부러 만들어 내어놓은 미신(迷信) 중에도 가장 우수(優秀)한 무서운 주문(呪文)이오.
 
152
이상(李箱)! 그러지 말고 시험(試驗)삼아 한 발만 한 발자국만 저 개흙밭에다 들여놓아 보시지요.
 
153
이 악보(樂譜)같이 스무드한 담소(談笑) 속에서 비철비철 하노라면 나는 내게 필적(匹敵)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탕아(蕩兒)가 이 목첩(目睫) 간에 있는 것을 느낀다. 누구나 제 내어놓았던 헙수룩한 포즈를 걷어치우느라고 허겁지겁들 할 것이다. 나도 그때 내 슬하(膝下)에 이렇게 유산(遺産) 되는 자손(子孫)을 느끼면서 만재(萬載)에 드리우는 이 극흉극비(極凶極秘) 종가(宗家)의 부(符)작을 앞에 놓고서 저윽히 불안(不安)하게 또 한편으로는 저윽히 안일(安逸)하게 운명(殞命)하는 마지막 낙백(落魄)의 이 내 종생(終生)을 애오라지 방불(髣髴)히 하는 것이었다.
 
154
나는 내 분묘(墳墓) 될 만한 조촐한 터전을 찾는 듯한 그런 서글픈 마음으로 정희(貞姬)를 재촉하여 그 언덕을 내려왔다. 등 뒤에 들리는 풍경(風磬) 소리는 진실로 내 심통(心痛)을 돋우는 듯하다고 사자(寫字)하면 정경(情景)을 한층 더 반듯하게 매만져 놓는 한 도움이 되리라. 그럼 진실로 풍경(風磬) 소리는 내 등 뒤에서 내 마지막 심통(心痛)함을 한층 더 들볶아 놓는 듯하더라.
 
155
미문(美文)에 견줄 만큼 위태위태한 것이 절승(絶勝)에 혹사(酷似)한 풍경(風景)이다. 절승(絶勝)에 혹사(酷似)한 풍경(風景)을 미문(美文)으로 번안모사(飜案模寫)해 놓았다면 자칫 실족(失足) 익사(溺死)하기 쉬운 웅덩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첨위(僉位)는 아예 가까이 다가서서는 안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고리키는 미문(美文)을 쓰는 버릇이 없는 체했고 또 황량(荒凉), 아담(雅淡)한 경치(景致)를 「취급(取扱)」하지 않았으되, 이 의뭉스러운 어른들은 직 미문(美文)은 쓸 듯 쓸 듯, 절승경개(絶勝景槪)는 나올 듯 나올 듯, 해만 보이고 끝끝내 아주 활짝 꼬랑지를 내보이지는 않고 그만 둔 구렁이 같은 분들이기 때문에 그 기만술(欺瞞術)은 한층 더 진보(進步)된 것이며, 그런 만큼 효과(効果)가 또 절대(絶大)하여 천년(千年)을 두고 만년(萬年)을 두고 내리내리 부질없는 위무(慰撫)를 바라는 중속(衆俗)들을 잘 속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56
왜 나는 미끈하게 솟아 있는 근대건축(近代建築)의 위용(偉容)을 보면서 먼저 철근철골(鐵筋鐵骨), 시멘트와 세사(細砂), 이것부터 선뜩하니 감응(感應)하느냐는 말이다. 씻어버릴 수 없는 숙명(宿命)의 호곡(號哭), 몽골리언 플렉(蒙古痣), 오뚝이처럼 쓰러져도 일어나고 쓰러져도 일어나고 하니 쓰러지나 섰으나 마찬가지 의지할 얄판한 벽(壁) 한 조각 없는 고독(孤獨), 고고(枯稿), 독개(獨介), 초초(楚楚).
 
157
나는 오늘 대오(大悟)한 바 있어 미문(美文)을 피(避)하고 절승(絶勝)의 풍광(風光)을 격(隔)하여 소조(蕭條)하게 왕생(往生)하는 것이며 숙명(宿命)의 슬픈 투시벽(透視癖)은 깨끗이 벗어놓고 온아종용(溫雅慫慂), 외로우나마 따뜻한 그늘 안에서 실명(失命)하는 것이다.
 
158
의료(意料)하지 못한 이 홀홀(忽忽)한 「종생(終生)」 나는 요절(夭折)인가 보다. 아니 중세최절(中世摧折)인가 보다. 이길 수 없는 육박(肉迫), 눈먼 떼가마귀의 매리(罵詈) 속에서 탕아(蕩兒) 중(中)에도 탕아(蕩兒), 술객(術客) 중(中)에도 술객(術客), 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관문(關門)의 괴멸(壞滅), 구세주(救世主)의 최후연(最後然)히 방방곡곡(坊坊谷谷)이 독도(毒荼)는 삼투(滲透)하는 장식(裝飾) 중(中)에도 허식(虛飾)의 표백(表白)이다. 출색(出色)의 표백(表白)이다.
 
159
내부(乃夫)가 있는 불의(不義). 내부(乃夫)가 없는 불의(不義). 불의(不義)는 즐겁다. 불의(不義)의 주가낙락(酒價落落)한 풍미(風味)를 족하(足下)는 아시나이까. 윗니는 좀 잇새가 벌고 아랫니만이 고흔, 이 한경(漢鏡)같이 결함(缺陷)의 미(美)를 갖춘 깜쪽스럽게 새침미를 뗄 줄 아는 얼굴을 보라. 7세(七歲)까지 옥잠화(玉簪花) 속에 감춰두었던 장분(粉)만을 바르고 그 후 분(粉)을 바른 일도 세수를 한 일도 없는 것이 유일(唯一)의 자랑거리. 정희(貞姬)는 사팔뜨기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대항(對抗)하기 어렵다. 정희(貞姬)는 근시(近視) 6도(六度)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대항(對抗)할 수 없는 선천적(先天的) 훈장(勳章)이다. 좌난시(左亂視) 우색맹(右色盲), 아― 이는 실(實)로 완벽(完璧)이 아니면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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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은 후에 또 속았다. 또 속은 후에 또 속았다. 미만(未滿) 14세(十四歲)에 정희(貞姬)를 그 가족(家族)이 강행(强行)으로 매춘(賣春)시켰다. 나는 그런 줄만 알았다. 한 방울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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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족(家族)이 강행(强行)하였을 때쯤은 정희(貞姬)는 이미 자진(自進)하여 매춘(賣春)한 후 오래오래 후(後)다. 당홍댕기가 늘 정희(貞姬) 등에서 나부꼈다. 가족(家族)들은 불의(不意)에 올 재(災)앙을 막아줄 단 하나 값나가는 다홍댕기를 기탄(忌憚)없이 믿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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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3
불의(不義)는 귀인(貴人)답고 참 즐겁다. 간음한 처녀(處女)— 이는 불의(不義) 중에도 가장 즐겁지 않을 수 없는 영원(永遠)의 밀림(密林)이다.
 
164
그럼 정희(貞姬)는 게서 멈추나?
 
165
나는 자기소개(自己紹介)를 한다. 나는 정희(貞姬)에게 분수(分手)를 지기 싫기 때문에 잔인(殘忍)한 자기소개(自己紹介)를 하는 것이다.
 
166
나는 벼(稻)를 본 일이 없다. 자전거(自轉車)를 탈 줄 모른다. 생년월일(生年月日)을 가끔 잊어버린다. 구십(九十) 노조모(老祖母)가 이팔소부(二八少婦)로 어느 하늘에서 시집온 십대조(十代祖)의 고성(古城)을 내 손으로 헐었고, 녹엽(綠葉) 천년(千年)의 호도나무 아름드리 근간(根幹)을 내 손으로 베었다. 은행(銀杏)나무는 원통한 가문(家門)을 골수(骨髓)에 지니고 찍혀 넘어간 뒤 장장(長長) 4년(四年) 해마다 봄만 되면 독시(毒矢) 같은 싹이 엄 돋는 것이었다.
 
167
나는 그러나 이 모든 것에 견뎠다. 한번 석류(柘榴)나무를 휘어잡고 나는 폐허(廢墟)를 나섰다.
 
168
조숙(早熟), 난숙(爛熟), 감(柿) 썩는 골머리 때리는 내. 생사(生死)의 기로(岐路)에서 완이이소(莞爾而笑), 표한무쌍(剽悍無雙)의 척구(瘠軀) 음지(陰地)에 창백(蒼白)한 꽃이 피었다.
 
169
나는 미만(未滿) 14세(十四歲) 적에 수채화(水彩畵)를 그렸다. 수채화(水彩畵)와 파과(破瓜). 보아라 목저(木箸)같이 야윈 팔목에서는 삼동(三冬)에도 김이 무럭무럭 난다. 김 나는 팔목과 잔털 나스르르한 매춘(賣春)하면서 자라나는 회충(蛔蟲)같이 매혹적(魅惑的)인 살결. 사팔뜨기와 내 흰자위 없는 짝짝이 눈. 옥잠화(玉簪花) 속에서 나오는 기술(奇術) 같은 석일(昔日)의 화장(化粧)과 화장전폐(化粧全廢), 이에 대항(對抗)하는 내 자전거(自轉車) 탈 줄 모르는 아슬아슬한 천품(天稟). 당홍댕기에 불의(不義)와 불의(不義)를 방임(放任)하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의 내 나태( 懶怠).
 
170
심판(審判)이여! 정희(貞姬)에 비교(比較)하여 내게 부족(不足)함이 너무나 많지 않소이까?
 
171
비등비등(比等比等)? 나는 최후(最後)까지 싸워보리라.
 
172
흥천사(興天寺) 으슥한 구석 방(房) 한 간, 방석 두 개, 화로(火爐) 한 개. 밥상 술상—
 
173
도전(接戰) 수십합(數十合). 죄충우돌(左衝右突). 정희(貞姬)의 허전한 관문(關門)을 나는 노사(老死)의 힘으로 들이친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발(反撥)의 흉기(凶器)는 갈 때보다도 몇 배(倍)나 더 큰 힘으로 나 자신(自身)의 손을 시켜 나 자신(自身)을 살상(殺傷)한다.
 
174
지느냐. 나는 그럼 지고 그만 두느냐.
 
175
나는 내 마지막 무장(武裝)을 이 전장(戰場)에 내세우기로 하였다. 그것은 즉 주란(酒亂)이다.
 
176
한 몸을 건사하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게울 것만 같았다. 나는 게웠다. 정희(貞姬) 스커트에다. 정희(貞姬) 스타킹에다.
 
177
그리고도 오히려 나는 부족(不足)했다. 나는 일어나 춤추었다. 그리고 그 방(房) 뒤 쌍창(雙窓) 미닫이를 열어젖히고 나는 예서 떨어져 죽는다고 마지막 한 벌 힘만을 아껴 남기고는 나머지 있는 힘을 다하여 난간을 잡아 흔들었다. 정희(貞姬)는 나를 붙들고 말린다. 말리는데 안 말리는 것도 같았다. 나는 정희(貞姬) 스커트를 잡아 젖혔다. 무엇인가 철석 떨어졌다. 편지나. 내가 집었다. 정희(貞姬)는 모른 체한다.
 
178
속달(速達) (S와도 절연(絶緣)한 지 벌써 다섯 달이나 된다는 것은 선생(先生)님께서도 믿어주시는 바지요? 하던 S에게서다.)
 
 
179
「정희(貞姬)! 노(怒)하였오. 어젯밤 태서관(泰西舘) 별장(別莊)의 일! 그것은 결(決)코 내 본의(本意)는 아니었오. 나는 그 요구(要求)를 하려 정희(貞姬)를 그곳까지 데리고 갔던 것은 아니오. 내 불민(不憫)을 용서하여 주기 바라오. 그러나 정희(貞姬)가 뜻밖에도 그렇게까지 다소곳한 태도(態度)를 보여주었다는 것으로 저윽히 자위(自慰)를 삼겠오.
 
180
정희(貞姬)를 하루라도 바삐 나 혼자만의 것을 만들어 달라는 정희(貞姬)의 열렬(熱烈)한 말을 물론(勿論) 나는 잊어버리지는 않겠소. 그러나 지금 형편으로는 「안해」라는 저 추물(醜物)을 처치(處置)하기가 정희(貞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오.
 
181
오늘(三月三日) 오후(午後) 여덟 시 정각(定刻)에 금화장(金華莊) 주택지(住宅地) 그때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어제 일을 사과(謝過)도 하고 싶고 달이 밝을 듯하니 송림(松林)을 거닙시다. 거닐면서 우리 두 사람만의 생활(生活)에 대(對)한 설계(設)도 의논하여 봅시다.
 
182
3월(三月) 3일(三日) 아침 S」
 
 
183
내게 속달(速達)을 띄우고 나서 곧 뒤이어 받은 속달(速達)이다.
 
184
모든 것은 끝났다. 어젯밤에 정희(貞姬)는—
 
185
그 낯으로 오늘 정희(貞姬)는 내게 이상(李箱) 선생(先生)님께 드리는 속달(速達)을 띄우고 그 낯으로 또 나를 만났다. 공포(恐怖)에 가까운 번신술(翻身術)이다. 이 황홀(惶惚)한 전율(戰慄)을즐기기 위하여 정희(貞姬)는 무고(無辜)의 이상(李箱)을 징발(徵發)했다. 나는 속고 또 속고 또 또 속고 또 또 또 속았다.
 
186
나는 물론(勿論) 그 자리에 혼도(昏倒)하여 버렸다. 나는 죽었다. 나는 황천(黃泉)을 헤매었다. 명부(冥府)에는 달이 밝다. 나는 또다시 눈을 감았다. 태허(太虛)에 소리 있어 가로되, 너는 몇 살이뇨? 만(滿) 25세(二十五歲)와 11개월(十一個月)이올시다. 요사(夭死)로구나. 아니올시다. 노사(老死)올시다.
 
187
눈을 다시 떴을 때에 거기 정희(貞姬)는 없다. 물론(勿論) 여덟 시가 지난 뒤였다. 정희(貞姬)는 그리 갔다. 이리하여 나의 종생(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종생기(終生記)는 끝나지 않는다. 왜?
 
188
정희(貞姬)는 지금도 어느 빌딩 걸상 우에서 뜌로워스의 끈을 풀르는 중(中)이요 지금도 어느 태서관(泰西舘) 별장(別莊) 방석을 베고 뜌로워스의 끈을 풀르는 중(中)이요, 지금도 어느 송림(松林) 속 잔디 벗어 놓은 외투(外套) 우에서 뜌로워스의 끈을 성(盛)히 풀르는 중(中)이니까 다.
 
189
이것은 물론(勿論)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재앙(災殃)이다.
 
190
나는 이를 간다.
 
191
나는 걸핏하면 까무러친다.
 
192
나는 부글부글 끓는다.
 
193
그러나 지금 나는 이 철천(撤天)의 원한(怨恨)에서 슬그머니 좀 비껴서고 싶다. 내 마음의 따뜻한 평화(平和) 따위가 다 그리워졌다.
 
194
즉 나는 시체(屍體)다. 시체(屍體)는 생존(生存)하여 계신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을 향(向)하여 질투(嫉妬)할 자격(資格)도 능력(能力)도 없는 것이리라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195
정희(貞姬), 간혹 정희(貞姬)의 훗훗한 호흡(呼吸)이 내 묘비(墓碑)에 와 슬쩍 부딛는 수가 있다. 그런 때 내 시체(屍體)는 홍당무처럼 확끈 달으면서 구천(九天)을 꿰뚫어 슬피 호곡(號哭)한다.
 
196
그동안에 정희(貞姬)는 여러 번 제(내 때꼽째기도 묻은) 이부자리를 찬란한 일광(日光) 아래 널어 말렸을 것이다. 누루(累累)한 이 내 혼수(昏睡) 덕으로 부디 이 내 시체(屍體)에서도 생전(生前)의 슬픈 기록(記憶)이 창공(蒼穹) 높이 훨훨 날아가나 버렸으면—
 
197
나는 지금 이런 불쌍한 생각도 한다. 그럼—
 
198
— 만(滿) 26세(二十六歲)와 3개월(三個月)을 맞이하는 이상(李箱) 선생(先生)님이여! 허수아비여!
 
199
자네는 노옹(老翁)일세.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骸骨)일세. 아니, 아니.
 
200
자네는 자네의 먼 조상(祖上)일세. 이상(以上)
 
201
十一月二十日 동경(東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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