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春園硏究 (춘원연구) ◈
◇ 13. 端宗(단종) 前後(전후) 歷史(역사)와 文獻(문헌) ◇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13권 다음
1938.1~4
김동인
1
春園硏究 (춘원연구)
2
13. 端宗(단종) 前後(전후) 歷史(역사)와 文獻(문헌)
 
 
3
「端宗哀史[단종애사]」의 像備[상비] 智識[지식] 춘원의 「단종애사」를 논평하려면, 그 예비지식으로 역사 즉 실사를 잠깐 뒤적여 볼 필요가 있다.
4
이씨 조선의 창업주 태조대왕이 洪武[홍무] 壬申[임신] 7월 16일에 즉위하였다가 6년 후인 戊寅年[무인년]에 정종대왕께 禪位[선위]하고 당신은 上王[상왕]이 되었다.
5
정종대왕은 재위 2년 후 당신의 아우님 태종대왕께 선위하고 당신은 상왕이 되었다.
6
태종대왕은 즉위 후 원자 讓寧大君[양녕대군]을 세자로 책하였다가 “양녕은 광인이라”誣[무]하여 廢[폐]하고 忠寧大君[충녕대군](후일 세종대왕)을 다시 세자로 책한 뒤에 재위 18년 후 세종대왕께 선위하고 당신은 상왕이 되었다.
7
세종대왕은 그 놀라운 지력으로 치정에 노력하다가 건강을 상하여 임시로 세자(후일의 문종대왕)께 庶務[서무] 參決[참결]케 하였다가 재기할 기회가 없이 승하, 문종대왕이 등극하였다.
8
그런데 세종대왕은 세인이 다 아는 바, 만고에 쉽지 않은 聖[성], 德[덕], 智[지]를 겸한 분이었다. 세종의 妃[비] 되는 분이 또한 억센 성격의 주인이었다. 이러한 두 분 새에 아드님이 여덟 분, 따님이 두 분이요, 서출로 아드님 열 분, 따님 두 분, 합계 22남매였다. 그런 중에 적출 왕자들은 부모가 다 그런 분이니만치, 8왕자가 다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여기서 역사상의 비극은 개막이 된다.
9
맏아드님(문종대왕)은 후일 왕위에 오를 분이니만치 교양(유교적)에 매우 힘썼다. 이것이 첫째로 그분의 건강을 損[손]하였다. 그 뒤 부왕(세종대왕) 이 탈로 누었을 동안, 정무를 代攝[대섭]하고 병석에 侍候[시후]하는 6년간 건강은 상할 대로 상하였다. 이 상한 건강 상태로 등극을 하였다.
10
정무의 번잡과 상중 素食[소식] 등은 더욱 신왕의 건강을 해하였다.
11
그런 중에 심적 苦勞[고로]가 또 하나 있었다. 당신의 동생들이 너무도 걸출인 데 대한 의구였다. 몸이 약하면 마음이 약하여진다. 마음이 약하여지면 의심치 않을 것을 의심하고 무섭지 않은 것을 무서워하게 된다. 왕은 동생네들을 의심하고 무서워하였다. 당신 재세중에는 무슨 근심이 없겠지만 당신만 승하하고 보면 당년 10세의 왕자가 어찌될까.
12
왕위라 하는 것은 무서운 매력을 가진 것이다. 이 왕위라 하는 찬찬한 자리가 무사히 어린 왕자에게 전하여질까. 억센 동생(왕자에게는 叔[숙])들이 너무 많다.
13
이러한 심적 고로는 왕의 건강을 더욱 상하게 하였다.
14
동생 넷 중에도, 가장 맏동생 首陽大君[수양대군]과 그 다음인 安平大君[안평대군]이 가장 무서웠다. 수양대군은 억세고 활달하여 소절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으로서 매양 입궐하여서는 왕께 기름진 음식을 잡숫도록 권하고 단상을 권하고, 왕이 상중이라 하여 돌보지 않는 정무에까지 간섭하여 왕을 떠받고 충동하였다. 이것이 도리어 왕에게는 무슨 야심이나 있지 않은가고 의심되었다.
15
이 수양보다도 더욱 의심되고 두렵고 꺼리우는 것은 안평대군이었다. 안평은 왕족― 더우기 왕의 同母弟[동모제]로서의 부귀나 누리고 근신하는 생애나 보냈으면 좋을 것인데 무슨 연고인지, 文武士[문무사]를 많이 모으며 도당을 모으는 듯한 모양이 보이며 이러한 無職群[무직군]뿐 아니라 현직 재상들과도 結連[결연]을 모으며 인심을 사는 등 모든 행동이 적지 않게 의심스러웠다.
16
이러한 호랑이들 틈에서 양과 같은 어린 세자가 장차 능히 위를 보지하여 나아갈 수가 있을까. 이것이 왕의 걱정이었다.
17
首陽·安平 兩大君[수양·안평 양대군]과 ‘顧命重臣[고명중신] 이 걱정은 더욱 왕의 건강을 해하여 2년 후에는 임종을 보게 되었다. 이 왕에게는 모후도 승하하고 왕비도 승하하여, 대궐 안에는 嬪[빈] 이하의 궁녀들뿐이지, 어른 될 만한 이가 없었다. 이 왕이 승하하면 당년 12세의 어린 세자가 신왕으로 등극케 된다. 漢地 古例[한지 고례]에 의지하여도 15세 이하의 유군에게는 섭정하는 분이 있어야 하는데 대궐 안에는 그럴 만한 분이 없었다. 이러한 경우에 임하여 왕이 취할 길은 당연히 당신의 동생 중 가장 큰 이 수양대군께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종친 중 가장 연로자인 양녕대군(왕의 백부)께라도 부탁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 부탁이 없이 승하하였으면 대행왕의 가장 근친인 수양대군이 자진하여 유왕 섭정을 선언하든가, 정부에서 수양께 섭정을 청하여야 할 것이다. 啓請[계청], 裁下[재하] 등에 있어서 소년왕이 어떻게 자의로 재단하고 명하고 결하고 할까. 섭정이 없으면 중신들의 자의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왕가의 존재라는 것은 무의미하게 된다.
18
그러나 동생들을 의구하는 왕은, 임종에 있어서 重臣[중신]과 儘臣[진신]들을 불러서 어린 세자의 보우를 부탁하였다.
 
19
위에 말한 양녕대군이란 어떤 이냐 하면 태종대왕의 맏아드님이요, 세종대왕의 맏형님으로 처음에는 태종의 세자로 책되었던 분이다. 그러나 양녕보다도 세종을 더 총애하는 태종은 양녕을 폐사하고 세자로 책립하였다.
20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세종의 신하들은 양녕의 존재를 꺼리어서 매양 세종께,
21
“양녕이 여사여사한 죄가 있사오니 도모하소서.”
22
하고 청하고 하였다. 6진을 建置[건치]하여 그 勇名[용명]을 천하에 날리고 후에 좌상까지 되었던 金宗瑞[김종서]도, 그런 상계를 하였다가, 세종께,
23
“이는 내 뜻을 모름도 심함이니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말라.”
24
는 질책에 가까운 嚴敎[엄교]까지 받은 일이 있다. 즉 왕족 중의 기린아였다.
 
25
문종대왕은 임종에, 대신들에게 고명을 하고 대궐에서는 惠嬪[혜빈] 楊氏[양씨]로 하여금 장차 유주의 준섭정(?)을 부탁하였다. 양씨는 본시 중인 집 딸로 궁녀로 들어왔다가 세종대왕의 고임을 받아 封嬪[봉빈]까지 된 사람으로 격식에 있어서든 가벌로 보든 섭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 못 되었다.
26
이렇게 되어 신왕(소년왕 단종)이 등극하매 이 나라에는 임군은 존재하나 왕권 행사자는 없게 되었다. 대신들이 선왕의 고명을 간판삼아 대신끼리 의논하여 작정하고 결재하고 할 뿐이었다.
27
이렇게 되매 당연한 순서로서 왕숙인 수양이(비공식으로나마) 대궐에 출입하면서 유왕을 대신하여 정치에 容喙[용훼]하였다. 수양이 이러니 안평대군도 대궐 출입이 잦게 되었다.
28
대신 측으로 보자면 이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이 왕숙들만 없으면, 자의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데, 왕숙들이 감시하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사헌부를 시켜서 ‘禁奔競案[금분경안]’을 제출케 하였다. 금분경이란 왕족들의 분경을 금한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제출시켜 아직 아무 철도 모르는 어린 왕께 한 번 보이고 교서가 내려 놓으면, 이것은 왕명이라 왕숙들의 대궐 출입이 불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왕권은 대신들에게 全屬[전속]되고 專屬[전속]되게 된다. 왕숙으로 보자면, 큰일 난 문제이다. 수양과 안평은 즉시 당시의 수상 皇甫仁[황보인]에게 달려가서 엄중 항의를 하여 이 안을 묵살하여 버렸다.
29
그러나 일정한 섭정이 없으니만치, 아무리 왕숙들이 감시를 한다 하나, 정무는 대개 대신들의 임의로 되었다.
30
당시의 삼공은 영상이 황보인이요, 좌상이 김종서요, 우상 鄭苯[정본]이었다.
31
영상 황보인은 단지 한낱 문사이지, 정치가로서의 업적은 아무것도 없는 사람으로, 문을 숭하는 시대에 오래 살고 오래 벼슬에 있고 큰 흠이 없어서 저절로 영상까지 기어올라갔지, 영상 재목은 못 되었다.
32
좌상 김종서는, 세종대왕의 아래서 6진을 건치한 무공은 있지만, 위에 기록한 양녕 참소로 보아도, 그리 향그럽지 못한 위에, 부하 李澄玉[이징옥]에게 북국 미녀를 뇌물로 받아서 여기 혹한 등― 將材[장재]는 될지언정 相材[상재]는 못되었다.
33
우상 정본 역시 한 개 문사에 지나지 못하였다. 섭정이 없는 유왕의 아래 이러한 대신들이 布列[포열]되어,‘선왕의 고명’을 방패삼아 국정을 좌지우지하는지라, 왕권은 땅에 떨어지고 국정은 보잘 나위가 없이 되었다.
34
세종대왕 6년간은 환후와 그 뒤 문종대왕 2년간의 상중무위의 뒤를 이는 이 세태는 눈 있는 자로 하여금 근심치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35
게다가 왕숙 안평대군은 무엇하려는지 더욱 문사·무사를 모으며 대신들을 사괴며 하여 일대 숙청을 가하지 않으면 나라의 안위가 의심스러웠다.
36
드디어 수양대군이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선왕의 고명을 유일의 정강으로 삼는 무능노물들을 다 처치하여 버리고 스스로 영상 이·병 양조 판서 겸 병마도통사가 되고 자기가 신임하는 사람들로서 내각을 조직하였다. 안평대군의 행사가 의심스럽다 하여 안평 부자도 정배를 보냈다.
37
讓寧大君[양녕대군]을 讒訴[참소] 이런 때에 임하여 가증한 것은 조선 신하들의 참소 심리다. 김종서가 양녕을 세종께 참한 것은 위에도 기록하였거니와 태종, 세종 양조를 통하여 양념을 참한 자 부지기수요, 태조 시에 芳幹[방간]의 난을 꾸며 내고 芳碩[방석]의 난을 꾸며 내고, 대대로 적잖은 逆獄[역옥]을 꾸며 낸 이들이 모두 臣類[신류]다. 이들은 수양께 연방 안평을 제하여 버릴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수양은 이를 힘있게 눌렀다.
38
정치에 대하여 自家見[자가견]을 가지고 있는 수양은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어린 임군은 대궐 안에 평안히 있게 하고, 임군께 위안될 시설을 게을리지 않는 한편으로 국정 쇄신에 노력하였다.
39
이때에 이 수양을 보는 세 가지의 눈이 있었다. 하나는 의혹의 눈이었다. 이제 저러다가 보위까지 엿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40
하나는 수양의 심복들로서, 어린 임금은 상왕으로 높여 모시고 수양이 보위에 오르소서 하는 것이었다.
41
나머지 하나는 수양의 赤誠[적성]을 알아보는 일군이었다.
42
이 가운데서, 전 양자는 수양에게 매우 불쾌한 것이었다. 자기는 어린 조카님을 위하여 이렇듯 애쓰거늘 세상은 이를 곡해하는구나. 여기서 수양은 이 의심의 눈을 막고 자기의 적성을 알게 하기 위하여, 군신의 반대를 일축하고 어린 왕께 왕비를 간택케 하고, ‘상중근신’에서 벗어나게 하여드리고자 유신들의 예의론을 무시하고 단상을 실시하였다. 어서 왕비에게서 원자가 탄생하여 세자로 책하여 이 임군의 御代[어대]를 든든하게 하여 자기게 향하는 의혹의 눈을 걷게 하려 하였다.
43
그러나 변함 없는 것은 ‘臣心[신심]’이라고 명명할 일종의 심리가 고려조부터 그냥 흘려내려 와서 지금까지 미친 바 小人心[소인심]이었다. 수양이 임군 되기를 바라는 일군은 자기네의 억측으로써 수양도 그려려니 하고, 내부 공작을 많이 하여 어린 임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수양을 즉위케 하려 하였다.
44
수양도 신이 아니다. 야심과 패기가 남보다 더한 사람이다. 그런 위에 자기에 직접 왕권이 없기 때문에 행정상 지장도 많아서 내심 클클하던 차이라,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하여 왔지만 종내 이 유혹에 빠졌다.
45
首陽[수양]이 新王[신왕] 되다 선위가 되었다. 수양이 신왕이 되었다. 어린 왕은 상왕으로 높였다.
46
신, 민에게 이의가 없었다. 상황의 신하이던 사람들은 모두 이 신왕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전통상 위에서 하는 일은 당초에 알려 하지도 않는 것이다. 태조 개국 이래로 선위가 관례가 되어 오니만치, 등한히 보았다.
47
신왕은 상왕으로 하여금 부와 귀에 부족이 없게 하여드리고자, 창덕궁에 모시고 시종, 물품 등을 풍부히 하고, 옛날 왕이 상왕께 대접한 절차를 지켰다.
48
그 뒤 왕이 창덕궁에 상왕께 문안을 갔는데, 마음에 없이 왕위를 떠난 상왕은 왕을 만나지를 않았다. 창덕궁 앞까지 세자와 함께 위의를 갖추고 갔다가 돈화문을 들어서 보지도 못하고 경복궁으로 돌아온 것은 왕에게는 큰 망신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은 다른 방면으로 한 개 사건이 배태되었다. 과거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사로 있는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등은 간간 세종이 친히 어린 손주님(지금 상왕)을 품에 안고,
49
“이 뒤 이 왕손이 성장한 때는 너희들은 노신이 되겠구나 그때 잘 보좌해라.”
50
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성, 박등은 문종의 학우였으니만치 문종 재위 2년간 늘 (아우님들을 꺼리는 문종은) 이 동무 겸 신하에게 장래 보좌 할 것을 부탁하였다.
51
그 어린이가 지금 왕에서 상왕으로 높이우기는 하였다 하나 심중 불평이 있는 것이 확연하여질 때에 양심상 가책이 되었다. 그래서 때때로 당년의 집현전 학사들끼리 모이면, 한탄을 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뿐, 무슨 대책을 취할 줄도 몰랐거니와 지금 왕의 정치적 수완에 感[감]한 그들은 이 어대를 어지러이 하기도 싫었다.
52
이러구러 병자년 여름 明使[명사]가 오게 되었다. 왕은 상왕과 함께 창덕궁에 명사를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베풀게 되었다. 그때 雲劍[운검]으로 뽑힌 사람이 오위도총부 도총관 成勝[성승](성삼문의 아버지)과 훈련도감 兪應孚[유응부]였다.
53
여기서 급격히 모의는 진보되었다. 본시부터 일철한 무인으로서 이 왕위 변동을 재미 없게 보던 성승은 아들을 독려하여 문사 동지들을 모으게 하고 자기는 함께 운검으로 서게 된 유를 설복시키며 일변 무사 동지들을 모았다. 그 계획이란 것은, 잔칫날 왕과 세자의 뒤에 설 운검 성과 유는 왕과 세자를 弑[시]하고, 성과 유의 영솔하는 병사며 동지 무사들의 병사로 상왕을 끼고서 경복궁으로 달려가서 상왕을 복위케 하자는 것이었다. 이만한 폭력을 가졌으면 넉넉히 될 만하였다.
54
잔칫날에 이르렀다. 그 날 행인지 불행인지 세자가 갑자기 잔치에 불참하게 되었다.
55
여기서 삼문과 팽년 등의 심경을 잘 볼 수 있다. 그들은(더우기 삼문은 시종의 직으로) 현왕의 恩威[은위]가 구비한 왕자적 기풍을 안다. 일찌기 세종께 뽑히어서 몸소 세종의 위업을 보았고 문종의 무위를 본 그들은 지금의 상왕과 왕과를 대조하여 볼 줄을 알았다. 臣節[신절]로 보자면 상왕께 死仕[사사]하여야겠고 大局[대국]으로 보자면 왕을 시할 수 없었다. 성·박 등은 세자가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사를 중지하고 후사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여 유응부와 정면 충돌까지 하여 중지시켰다. 물론 갑자기 모사하였더니만치 정예 분자만이 아니라, 일이 발각나서 큰 일을 저지를 각오는 하였을 것이다.
56
일을 중지한 이상은 10에 8,9는 발각될 것이다. 더우기 지자가 많은 현정부에게…. 여기서 결사 동지 중 金礩[김질]이란 인물이 어차피 발각될 이상에는 자기가 앞서 밀고하여 자기 죄는 사함을 받고 상까지 타려는 욕심으로 그 장인 鄭昌孫[정창손]과 함께 밀고를 하였다.
57
이 밀고로써 사건의 전면이 드러나고 모두 잡히게 되었다. 여기서, 임군은 그들을 장차 죽이어야 할 것이나, 그 재질이 너무 아까와서 몇 번을 순응을 권하고 형장으로 내보낸 뒤에도, 다시 승지 하나를 따라 보내서 또 다시 순응을 권하여 보았다. 그러나 강개를 위주하는 문사나 一直[일직]한 무사나 모두 상왕께 이미 목숨을 내놓은 이상은 돌이키기를 불긍하였다. 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에 성삼문이 현왕의 총신인 과거의 학우들을 돌아보며,
58
“자네들은 현주를 도와서 태평을 이루게. 나는 지하의 고주께 뵈려 가네” 한 말은 의미 깊은 말로 본다.
59
이 사건은 또 ‘신심’을 움직여 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도 벌써 여러 번을 “상왕을 외지로 보냅소서”라 “강봉합소서”,“서인으로 떨구소서” 야단인 것을 왕은 ‘불윤’의 두 자로 버티어 왔는데, 또 야단들이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불윤하고 단지 상왕을 아직껏의 거소이던 창덕궁에서 금성대군 구택으로 옮기었다.
60
그 뒤 宋玹壽[송현수]와 權完[권완]이 역모를 한다고 고발하는 이가 있었다. 송은 상왕의 장인이요, 권은 상왕의 외숙이었다. 재상들은 또한 상왕 처치 문제를 꺼내었다. 왕도 하릴없었다. 상왕이 그냥 상왕으로 있는 동안은 상왕을 빙자하여 혹은 상왕께 충심으로 현왕께 대항하려는 일이 뒤이어 날 것이다. 한양에 상왕이 그냥 있어도 그런 일이 그냥 날 것이다. 여기서 상왕을 魯山君[노산군]으로 강봉을 하고 영월로 보내게 되었다.
61
魯山君[노산군] 되어 寧越[영월] 왕은 밀지를 강원감사에게 내려서, 상왕― 지금은 노산군에게 물질적 불편이 없도록 하게 하고 노산을 모시던 궁녀, 환시 등을 뒤따라 보냈다.
62
이것으로 노산 문제는 끝난 줄로 알았다. 그랬는데 순흥에 정배 가 있던 금성대군(왕의 同母弟[동모제]요, 노산의 삼촌)이 노산 복위를 도모하느라고 동지와 병사를 모으다가 발각이 되었다.
63
정부에서는 야단을 하였다. 그 새 영월에 가 있는 동안도 연하여 야단 하였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자 더욱 야단하였다. 노산이 생존한 동안은 이런 일은 그냥 있을 터이니 도모합시사고,
64
아직껏 꾸준히 이런 상계에 불윤의 두 자로 대하던 왕은 이번은 하릴없어,
65
“죽이지는 차마 못하겠으니, 서인이나 만들어라.”
66
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들을 리가 없었다. 私恩[사은]은 사은이고 국법은 국법이니 종사에 득죄한 이를 어찌 그냥 둡니까.
67
少年[소년] 王者[왕자]의 可憐[가련]한 最後[최후] 近言[근언] 亂言者[란언자]는 모두 노산을 핑계하오니 이제도 그냥 두었다가는 결코 안 됩니다고 宗親府[종친부], 議政府[의정부], 忠勳府[충훈부], 六曹[육조]가 함께 상계하여 가련한 소년 왕자는 그 최후를 보게 되었다.
 
68
이것이 史實[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썩 후년 성종조에 南孝溫[남효온]이란 문사(금일의 소설가에 해당할 듯)가 당시 상황께 殉[순]한 成[성], 朴[박] 등 육신의 충렬에 감하여 붓한 기록은 원체 전문에 의지하여 쓴 것 이니만치 誤記[오기]도 많거니와 육신의 충성을 말하자니까 상왕을 폐위, 강봉, 사사한 세조께 대한 곡필도 많았다.
69
일자의 틀리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柳成龍[유성룡]이 지적한 河緯地[하위지](육신 중 1인)의 再仕[재사] 일자 등은 치지하고라도, 병자년 정월에 병사한 신숙주 부인 윤씨를 소설화하여‘성, 박 등은 죽었는데 신숙주는 의기양양히 집으로 돌아오므로 윤 부인은 이를 부끄러이 여겨 목매 죽었다’등, 6월에 자살한 것같이 만들었다.
70
뿐더러, 성, 박, 成 父[성 부], 유 등등이 선위시부터 벌써 상왕 복위를 圖[도]코자 자살치 않았다고 하였으나 만약 그렇다면, 도총관 성승의 군사와 유의 훈련원 군사를 가졌으면 비단 明使[명사] 來朝時[내조시]가 아니라 그 전에라도 언제든 거사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요, 더우기 그런 밀모가 그런 장기간을(연여이다) 발각 안 되었을 까닭도 없고, 김질이 연여를 감추어 오다가 그날 따라 밀고하였을 까닭도 없다. 하물며 황보인, 김종서 등은 誅[주]할 때부터 비분강개하였다 운운은 당치 않기 짝이 없다.
71
요컨대 남효온의 「秋江集[추강집]」「六臣傳[육신전]」은, 육신의 충심을 表揚[표양]키 위하여 저작한 한 개 소설로서 소설인지라 史實[사실]과는 상위 내지 상반되는 점이 많다.
72
그러면 춘원의 「단종애사」는 어떤 것인가.
73
남효온의 「육신전」에서 가장 부자연히 보이는 것은 단종의 諸臣[제신]이 일률로 세조(수양)께 대하여, “나는 그대의 녹을 먹지 않고 따로이 쌓아두었으며 칭신치 않았(박팽년은 계문에 臣[신] 자를 巨[거] 자로 썼다 운운)노라”고 하였다는 점이다. 대저 녹이라는 것은 국록이지 왕록이 아니라는 것도 모를 육신이 아니었을 것이고, 이 임군을 임군으로 섬기기 싫으면 爵[작]을 던지고 낙향하여 주경야독으로 여생을 마침이 온당하겠고, 더 일보를 나아가서 상왕 복위를 위하여 거짓 臣仕[신사]하였다 하면, 어디까지든 표면으로는 순히 종하여 털끝만한 의심도 사지 않았어야 할 것이요, 박팽년의‘巨[거]’자 운운의 모험은 절대로 피하여야 할 것이다. 더우기 시종의 직에 있어서 매일 신왕 면알하는 성삼문이 1년간을 어떻게 칭신하지 않고 지냈으랴.
74
不自然[부자연]한 臆說[억설] 부자연한 억설일 뿐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육신을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오해까지 일으키게 하기 쉬운 망령된 설이다.
【원문】13. 端宗(단종) 前後(전후) 歷史(역사)와 文獻(문헌)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73
- 전체 순위 : 849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36 위 / 1835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춘원연구 [제목]
 
  김동인(金東仁) [저자]
 
  1938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목차 (총 : 15권)     이전 13권 다음 한글 
◈ 春園硏究 (춘원연구)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