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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園硏究 (춘원연구) ◈
◇ 14. 春園(춘원)의「端宗哀史(단종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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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4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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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硏究 (춘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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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春園(춘원)의「端宗哀史(단종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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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의「단종애사」는 남씨의「육신전」을 골자로 삼아 쓴 이야기다. 남씨의「육신전」이 가진 바의 모순이며 부자연까지도 모두, 판단과 수정이라는 도정을 過[과]하지 않고 그대로 계승하였는지라, 전체적‘이야기’로서 이 구성에 관하여는 여기 재론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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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단종대왕의 탄생에서 비롯하여 단종대왕의 승하로써 끝을 막은― 한 개인의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전설이지 한 사건의 발단에서부터 종결까지의 譚[담]이 아니다. 담도 아니매 더우기 소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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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온의「육신전」이 육신의 충렬을 표창하기 위하여 적지 않게 세조를 誣[무]한 형식이 있다. 그것을 골자삼아 쓴 이야기인지라 역시 그 譏[기]를 면치 못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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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哀史[단종애사]」도 東亞日報[동아일보] 이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될 때에 이 이야기를 두고, 두 가지의 상반된 독자가 생겼다. 절대적 환호층의 독자와 誹譏層[비기층]의 독자― 이런 두 종류이다. 그 두 종류는 전후자를 다 또한 둘씩에 나눌 수가 있다. 즉 환호층의 독자를 두 종류로 나누자면 하나는, 미지사―옛날의 궁정과 양반 계급을 등장 인물로 하여 역사적 사실을 대중화하여 널리 알려 준 데 대한 환호이요, 나머지 하나는 고사를 보고 늘 단종의 박명한 일생을 서러워하던 사람이든가 그 사건의 단종 측 인물의 후손이 되든가 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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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기층 독자를 나누자면, 하나는 춘원이 그럴듯이 묘사한 궁정 혹은 양반 계급의 생활, 풍속, 습관, 제도 등등이 하나도 정작과는 비슷도 안하여 애당초 읽을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층이요, 또 하나는 남효온의 稗史[패사]에 수긍치 못하든가 혹은 세조 측 인물의 후손 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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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무식(갑자기 다른 용어가 생각나지 않아서 이 용어를 쓰지만)한 독자는 환호하였다. 궁중 사건은 민간에게는 諱之秘之[휘지비지]하여 오던 이 왕조라, 秘[비]하는 자에게는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이 인정으로, 이 백성들은 궁정록이라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 형편이었다. 거기다가 춘원은 ‘궁정 풍속 제도는 이러이러 하였다’는 듯이 보통 풍습과는 다른 풍습을 창작하여 써 넣었다.‘무식’이란 것은 불쌍한 것이다. 무식한 독자들은 춘원의 이 멀쩡한 거짓말―창작 풍습(궁중이며 양반 댁의)에 연방 머리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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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춘원]의 創作[창작] 風習[풍습]·制度[제도] 우리는 「단종애사」를 펴 놓고, 이야기로서의 효과의 善否[선부]를 검키 전에, 지엽적의 일이나마 춘원의 창작 풍습·제도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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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이 다 들추자면 「단종애사」의 첫 頁[혈]에서 끝 頁[혈]까지 모두가 창작 풍습이라 불가능한 일이니, 중요한 자만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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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먼저 한 개의 삽화를 기입할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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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종애사」중에, 경성 남대문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崇禮門[숭례문]’이라는 3자가 세종대왕의 제3왕자 안평대군의 필적이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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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는 춘원에게, “그것은 안평이 아니라 양녕대군(세종대왕의 백형)의 필적이라고 온갖 문헌에 나타나 있다”고 알으켰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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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누가 쓰는 현장을 보았답디까. 어느 전라도 유생이란 말도 있읍디다”고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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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단종애사」를 쓴 춘원의 태도다. 즉 말하자면, 어느 대군의 필적이라는 것은 들은 법한데 안평이 문장이 용하였다 하니까 숭례문의 현판을 안평의 필적이라 속단하여 버린 모양이다. 그런 뒤에 진정한 주의를 들어도 표면 자기의 그릇을 수긍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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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가운데 나오는 임군과 왕비에게는 모두 지문에도 경어를 썼는데 그 경어가 어떤 때는 경어인지 욕인지 구별키 힘들게 되었다. ‘안계시었다’하면 좋을 것을 ‘있지 않으시었다’하는 등의 용어는 둘째 두고, 임군이 이 전편에서 한 번도 ‘용안을 드시지’못하고 ‘얼굴’을 들고 ‘마리’(하다못해 머리)를 돌리시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시는 등, 너무 상스러운 것은 둘째 두고, 웬 ‘놈’이 그리 많이 나오는지 임군, 대신들은 막론이요, 재상가 부인네까지가 모두, “정인지 놈이 여사여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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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놈이 이러저러합디다”… 그 놈이 어떻고 이 놈이 어떻고― 마치 병문친구들의 대화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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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론 궁정 용어라 하는 것은 주를 달지 않고 그대로 쓰면 독자도 모를 것 이고, 독자는커녕 웬만한 재상가에서도 이해치 못하는 말이 많았다 하니, 궁정에서의 대화를 그대로 쓴대야 무의미한 일이지만, 조금 더 한자를 많이 넣어 쓰고 또한 조금 더 점잖게 쓸 필요는 있을지니, 이 「단종애사」의 최초의 대화로 나오는 것이 궁녀들이 세종대왕께 왕 탄생의 희보를 아뢰는 것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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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마마. 세자빈께옵서 시방 순산하시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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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경사가 많구나. 종서(김종서―때의 좌의정)가 육진을 진정하고 돌아오고 또 원손이 났으니, 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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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었다. 임군이 신하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承傳色[승전색](宦官[환관])이 왔다면 모르거니와 궁녀가 나오기가 뚱딴지다. 전편을 통하여 내내 임군 있는 자리에는 반드시 궁녀가 모시었으니, 이것은 작자의 오해이다. 정일품 ‘嬪[빈]’에서 비롯하여 종구품 ‘秦羽[진우]’‘秦變宮[진변궁]’등에 이르기까지의 내명부가 내전 이외― 더우기 남성 재신들이 모시고 있는 자리에까지 나온다는 것은 좀 과한 망발이다. 대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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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마마. 원손 탄강하오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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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 과연 경사가 많구나. 좌당이 육진을 진정하더니 운운”등, 한문을 좀더 많이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때의 점잖은 사람의 용어는 한문에다가 토만 겨우 조선말을 단 것쯤이지 오늘날까지 조선말이 남아 있는 것은 전혀 常人[상인]이나 부녀자의 덕택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는 자초지종으로 양반이거나 常人[상인]이거나 부녀자거나 꼭 동일한 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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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마마’라는 칭호도 일고할 필요가 있다. 대내에서 부인들이나 환관들은 임군께 대해서는 ‘상감마마’라 한 듯하다. 그러나 보통 신하들은 ‘전하’라고 불러 모셨지 상감마마라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전편을 통하여, 전하라 부른 것은 한 군데인가 두 군데 밖에 없고, 그 밖은 다 상감마마라고 되었는데, 이것도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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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군이 삼공에게는 相禮[상례]로 대하는 제도인데 ‘종서’가 운운도 안되었거니와 여기뿐 아니라 이 ‘이야기’에는 대화에서 제삼자를 화제에 올릴 때에, 모두 그 성명을 불렀지 칭호로서 말한 것이 없다. 예컨대 대화 중 ‘김 판서가 여사여사하고’ ‘이 참판이 이러저러’하다는 곳은 없고 모두가 ‘김 아무개’ ‘이 아무개’― 게다가 때때로는 ‘놈’까지 붙여서, 천인들의 대화같이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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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을 통하여 대화며 용어가 천스럽지 않게 된 곳을 찾자면 지난(한군데도 없는지도 모르겠다)한 일이니까, 이런 것은 일일이 집어 낼 수 없고 다른 방면으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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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便[용변]도 ‘매화틀’에서 단종이 즉위 후 경회루에 혼자 배회하며(임군은 재위중‘혼자’라 하는 경우는 단 일 초라도 없다. 심지어 용변도 ‘매화틀’이라는 운반 변기에 내시 부액으로 본다) 어떤 때는 ‘얼음이 얼거든 핑구나 돌릴까’생각하며(임군이 핑구라는 이름은커녕 구경이라도 한 일이 있을까) 임군이 궁녀들과 산보할 적에 대신이 내리까지 혼자서 뛰쳐들어와 임군께 뵈오며, 단종이 상왕이 되어 壽康宮[수강궁]으로 나온 때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초를 못 사오고(돈이 이조에는 효종조에 처음 鑄[주]하였다. 그 전은 楮布[저포]다) 매일 조회를 받고(조회라는 것은 절일이나 혹은 무슨 受稅[수세]할 일이나 그런 등사가 있는 때야 있다) 아무에게나 김 생원 이 진사라 부르며(생진과에 급제한 사람이 아니면 이 칭호를 못 부른다. 지금은 함부로 영감, 진사, 주사 등으로 부르나 당시에는 白面[백면]이면 단지 서방이다) 임군이 당신의 부왕의 생각을 하는데‘아바마마’며― 이런 풍속, 습관, 제도상의 실수를 찾아 내자면― 아니, 도리어 실수 아닌 것을 찾자면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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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대궐에 어떻게 얼컨하게 관련이 있는 사람의 집은 모두 ‘궁’이라 하였다. 수양대군 궁, 안평대군 궁, 무슨 군 궁, 무슨 尉[위] 궁, 심지어 혜빈 양씨 궁이라는 것까지 있다. 하인배들의 간편을 위한 지칭으로 부마궁, 무슨 洞[동] 궁 등으로 불리는 일은 있으나, 정식으로 궁호가 내리기 전에는 궁이 될 까닭이 없다. 더우기 양씨는 중인 집의 딸이라, 제 친정으로 돌아갔으면 솟을대문도 못할 평대문의 민가요, 自家[자가]를 장만하였으면 양씨 댁이다. 이전에 모씨의 모 야담에 ‘상궁마마’라는 것이 있어서 고소를 금치 못하였더니 이것도 거기 그다지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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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비를 매번 ‘顯德嬪[현덕빈]’이라 하였다. 현덕빈이란 것은 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더우기 ‘열네 살에 良娣[양제]로 동궁에 들어와 5년 지나서 良媛[양원]으로 봉하다’하였다는데 양제는 종이품이요, 양원은 종삼품이라 아마 양원으로 동궁에 들어와 양제로 進封[진봉]이 되었달 것을 꺼꾸로 쓴 모양이다.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는 ‘初封承徽[초봉승휘](종사품), 進封良媛[진봉양원], 後遂封世子嬪[후수봉세자빈]’이라 되었다. 그 뒤 세자빈으로 책되었으면 그저 ‘세자빈’이요, 세자가 후일 등극한 때에는 왕비요, 왕의 승하 후에 계왕이 바친 호가 ‘현덕왕후’이다. 왕(문종)의 능이 현릉이기 때문이다. 현덕빈이란 것은 존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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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맨 첫 줄로부터 맨 마지막 줄에 이르기까지“네―이―”라고 길게 뽑아서 하는 대답은 한 군데도 없다. 아랫사람이 웃사람에게 대하여 하는 대답도 모두 금일의 평교끼리의 대답인 ‘예’한 마디로 되었다. 임군이 세자빈을 부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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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듣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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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운은 고소를 지나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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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임군께 자칭하는데, ‘소신이 여사여사’라 하고 하였는데, 이도 과오로서, 蕃邦[번방]으로 자임하는 조선서는 ‘폐하’라 못 부르고 ‘소신’이라 자칭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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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로 보자면 아랫사람이 웃사람께 뵐 때는 반드시 꿇어앉는 것으로 되었으나, 조선의 실풍습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은 웃사람 앞에 반드시 읍하고 서 있어야 하며, 계급의 차가 조금만 벌어지면 楹內[영내]에조차 들어서지를 못하고, 좀더 벌어져서는 臺石[대석](댓돌) 위에도 올라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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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네(소녀)라 할 것이 전부 소인이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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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복이라 할 것이 전부 군복이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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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줄기는 宮廷[궁정] 秘話[비화] 요컨대 ‘이야기’의 줄기는 궁정 비화이면서도 궁정이며 거족들의 생활 습관, 풍속, 제도 등은 시골(시골서도 양반 없는 평안도나 함경도) 토호의 집안 이야기나 다름이 없이 되었다. 대궐이나 顯家[현가]의 습, 속, 제 등은 엿볼 바이 없다. 위에 기록한 것은 그 대범한 자이고, 세소한 一句[일구]까지도 모두 시골 토호의 생활이지 궁중이나 대가의 생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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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론 궁중 풍습의 세소한 자는 대관도 알지 못하는 바요, 내관이라야 비로소 알바이지만 대범한 것까지도 알아보지 않고 상상뿐으로 썼다 하는 것을, 작자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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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에서 그 신문의 편집국장의 직을 가지고 여가에 쓰는 것이라, 참고할 겨를도 없기는 없었겠지. 그러나 너무도 의붓자식 취급한 점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단종애사」중 이런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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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성삼문이 북경 갔던 길에 어떤 사람(중국인)이 조선 문장 온다는 말을 듣고 墨画[묵화] 白鷺圖[백로도] 한 폭을 가지고 와서 화제를 청하였다. 삼문은 그림을 보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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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窺魚蘆渚幾多時[규어노저기다시], 偶然飛過山陰墅[우연비과산음서], 誤落羲之洗硯池[오낙희지세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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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불러서 명나라 사람들을 놀래었다고 한다. 아무리 삼문이 시는 잘 못 짓는다 하더라도 이만큼은 그도 시인이다.(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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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대체 삼문이 시를 잘 짓는다는 칭찬인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稗官雜記[패관잡기]」에 있는 아래와 같은 삽화를 춘원이 誤釋[오석]한 것이다. 즉, 삼문이 북경에 갔는데 그곳 사람이 백로도를(펴 보이지는 않고) 題詩[제시]를 청한다. 그래서 삼문은 “雪作衣裳玉作趾[설작의상옥작지], 窺魚蘆渚幾多時[규어노저기다시]”라고 부르는데 그때야 그 사람은, 백로도를 펴 보인다. 보매 묵화도라, ‘雪作[설작], 玉作[옥작]’은 안 되었다. 여기서 삼문은 頓智[돈지]를 내어 “偶然飛過山陰墅[우연비과산음서], 誤落羲之洗硯池[오낙희지세연지]”라 不句[불구]를 불러서 ‘雪[설]’과 ‘玉[옥]’의 땜을 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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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맛 것을 오석할이만치 한문 지식이 약한 춘원이 아니다. 의붓자식 격으로 대수롭지 않게 붓을 잡았기에 이런 실수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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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기록하니만치 개괄적으로 결점을 들추었으면 인제부터는 逐頁檢討[축혈검토]를 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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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세종 23년 7월 23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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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왕실에 원손이 誕降[탄강]하였다. 지금 임군의 맏아드님인 왕세자의 원자로서 장차 왕세손으로 책봉이 될 분이요, 겸하여 장차에는 이 나라의 임군으로 등극을 할 귀한 영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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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叔舟[신숙주]와 成三問[성삼문]의 忠逆[충역] 마침 집현전에 입직한 두 학사 신숙주와 성삼문(장차 이 왕손이 등극한 뒤에 그분께 申[신]은 역신이 될 사람이요, 成[성]은 충신이 될 사람이다)을 데리고 産報[산보]를 기다리던 임군은 남손 탄강이라는 보도에 매우 기뻐하는 일방 거느린 두 신하에게 원손이 장래 등극하는 날에 잘 보좌하기를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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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는 이야기는 일전하며 이 임군의 가족 상태를 알려 준다. 이 임군께는 元妃[원비] 誕生[탄생]의 왕자가 세자까지 여덟 분이나 되는데, 다른 왕자는 다 건강하고 더우기 제2의 수양이며 제3의 안평 등은 패기만만한 인물임에 반하여 세자는 우애심은 지극하나 건강이 아주 나쁜 분이다. 그러니만치 원손 탄강은 더욱 경사이며 왕가 基業[기업]을 튼튼히 하는 초석인 동시에, 원손의 숙들이 너무 괄괄하므로 근심도 적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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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가련한 원손은 탄강 이튿날 그 생모(세자빈)를 여의어 홀아버지의 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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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초단을 막음하고 사건은 12년을 건너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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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선을 위하여 큰 일을 많이 하신 세종대왕께서 경오년 2월에 승하하신 지 삼 년이 지나서 지난 2월에 대상이 지나고, 그 후 석 달이 못 되어 임신 5월 14일에 우리가 지금껏 세자라고 불러 오던 문종대왕께서 승하하시어 이제 열두 살 되시는 아기께서 왕위에 앉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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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는 이렇게 말하여 12년 전 탄생의 왕손의 등극을 報[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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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서부터 작자는 서술의 순서를 잃었다. 상기와 같이 소년왕의 등극을 보한 직후에는 붓을 돌아서서 다시 3년 전 세종대왕 승하에서 비롯하여 문종대왕 승하까지를 뒷걸음쳐서 보하였다. 그런 뒤에는 다시 또 뒷걸음쳐서 현덕왕후(소년왕의 모후) 승하 이후로 돌아 있다가 또 썩물러서서 문종의 初娶[초취]인 徽嬪[휘빈] 김씨 때부터 문종의 情史[정사]를 기록하기 실로 30數[수][혈](박문서관판 초판)에 亘[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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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교상으로 보든지 효과상으로 보든지 문종의 정사는 원줄기에는 아무 필요가 없는 자로서 1,2頁[혈]쯤으로 간략히 처치하여 버릴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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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서술의 순서가 바뀌어 등극한 신왕이 다시 왕세자로 되고 승하한 선왕이 다시 왕이 되고 과거의 왕(문종)의 정사가 나오고 노신들에게 세자 고명이 내리고 혹은 전혀 이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는 權陽村[권양촌]의 삽화의 5,6頁[혈]을 허비하는 등, 이 순서 바뀐 것이 실로 제18頁[혈]에서 비롯하여 104頁[혈]까지 근 90頁[혈]에 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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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유왕 등극으로 돌아온 뒤의 첫 양면은 權擥[권람]과 수양대군의 밀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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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람의 생각에는 남이 내게 불충불효하더라도 ‘그러면 어떠냐’하고 치지 도외하겠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아니하여 자기의 불충불효는 용서하더라도 남이 내게 대한 불충불효는 수호만큼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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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는 이렇게 써서, 여기서 두 사라의 성격을 갈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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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的[사적] 코스와 人物[인물]의 性格[성격] 그러나(아래서 기회 있는 때에 다시 지적하겠지만) 작자는 이야기의 진전을 기정 코스에 끌어넣기 위해서는 언제든 작중 인물의 성격을 무시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우기 역사물어에 있어서 史的[사적] 코스를 좇아가기 위하여 작중 인물의 성격은 조석으로 변하는 일이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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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頁[혈]에서 작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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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것이 왕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뒤에 몇 번 눈을 뜨시었으나 말씀은 못하시고 운명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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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에 수양대군은 실망이 어떻게 컸던 것은 궁에 돌아오는 길로 사모를 벗어 동댕이를 치어서 모각이 부러진 것을 보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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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왕의 승하를 본 뒤에 수양은 집에 돌아와서 권람과 의논을 하였는데 작가는 이미 쓴 바를 잊어버리고 수양과 권이 상의하는 도중에도 2,3차, ‘왕의 壽[수]가 경각에 있다’는 뜻을 말하여서 독자로 하여금 왕이 승하하였는지 아직 생존중인지 갈피를 차리지 못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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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야기 진전을 독자에게 미리 암시하여 위하여 수양으로 하여금 평범한 우문을 연발케 하고 권을 명쾌히 대답을 하여서 수양을 우인같이 만든 것도 불찰의 하나이라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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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양과 권과의 밀의로써 ‘顧命篇[고명편]’은 끝난다. 고명편은 장차 진전될 이야기의 서두와 및 장래의 암시는 어느 정도까지 되었으나, 작품으로서는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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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편’의 뒤에 ‘失國篇[실국편]’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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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韓[한]의 登場[등장] 이 작자는 어느 작품에 있어서든 반드시 선인(주인공 혹 기타)에 대하여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악인을 대립시킨다. 이 「단종애사」에 있어서도 고명편에서 벌써 지선지성한 왕과 대립시키기 위하여 수양의 가장 평범하고 무의미한 행동에까지 모두 장차 簒位[찬위]를 圖[도]한다는 암시를 보여 주었고, 실국편 첫머리에 韓明澮[한명회]라는 악의 대표를 등장시켰다. 이 한명회를 악의 대표로 만들기 위하여는 한의 외모까지도 붓끝이 능히 사출할 수 있는 최대 능력을 다하여 흉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또한 한의 심리 상태를 그려 가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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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는 열 달을 못 채우고 지레 낳을 때에 선악을 가리는 양심 하나를 잊어버리고는 다른 것은 다 찾아 가지고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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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표리가 상부한 악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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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명회는 松京 敬德宮職[송경 경덕궁직]이란 말직에 있으면서 갖은 악행비행을 다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왕이 승하하면 세자가 襲位[습위]키 전에 수양을 즉위케하여 자기는 佐命元勳[좌명원훈]이 되어 보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선왕 승하, 유왕 승위라는 대사가 실행된다. 그래서 한은 자기가 서울에만 있었다면 이렇게는 안 될 것이라고 내심 이를 갈면서 다시 이번은 도적 괴수가 되어 한 번 설레어 보아서 잘 되면 조선 왕이라도 되어 보고 못 되더라도 도적 괴수로 안락한 일생을 보내 보려고 부하들에게 그 방면에 관한 일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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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여전히 고관대작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아 서울 권람에게, ‘지금 안평이 신기를 엿보는데 왜 수양대군이 일어서지 않느냐. 그대는 수양대군을 가까이 모시거늘 왜 가만 있느냐’는 힐책의 편지를 보낸다. 회답은 곧 왔다. 상경하라는 회답이었다. 한은 즉시 상경하여 수양대군에게 謁[알]하고 노골적으로 簒逆[찬역]을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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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한 작자의 붓은 악책사로서의 한을 여지없이 그려 내어 대가로서의 필력을 자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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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악’을 너무 과장하다가 작자는 그만 자기 함정에 빠진 감이 없지 않다. 한명회 같은 책사가 수양의 내심을 충분히 타진하여 보지도 않고 찬역을 진언할까. 이야말로 일 보 잘못하면 목이 열 개라도 당하지 못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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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수양은 전혀 역심은 없는 듯이 보여서 한으로 하여금 가슴 서늘케 한다. 붓이 미끄러져서 이런 난국을 만들어 놓은 뒤에 작자는 어렵게 이 장면을 전개시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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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頁[혈]에서 149頁[혈]로 계속되는 幾個[기개] 대화는 약간의 무리는 면치 못하나 이 난국을 용하게 타개하였다. 그런 뒤에 한은 수양께 불평객들을 많이 수하에 모으기를 진언하고 도도한 웅변으로써 지금의 정국과 거기 처할 수양의 입장 등을 진언하여 일회에 수양의 신임을 얻어서 그 뒤부터는 首陽邸[수양저]에 무상출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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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이 지나간다. 다섯 달 뒤 禁奔競案[금분경안]으로 조그만 파란이 있고, 거기서 작자는 안평을 선인화하기 위하여 몇 군데 붓을 놀렸으나, 이 대목은 이야기의 원줄기에 그다지 필요치 않으므로 그냥 책장을 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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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國[명국]에 謝禮使[사례사]를 보내기로 다음 대목에는 명국에 사례사를 보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종친 원로들이 제각기 자기가 가려고 경쟁을 한다. 수양도 그 틈에 한몫 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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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수양으로서 무슨 야심이 있다 하면 일각이라도 서울을 떠나지 않고 기회를 엿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사행이 서울 있는 것보다 더 큰 효과를 수양에게 줄 것이므로 이렇듯 힘있게 경쟁하였다 하면, 작자는 수양이 연경에 다녀온 뒤에 이번 사행의 덕으로 어떤 報[보]를 받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수양이 격렬히 경쟁하는 전말은 쓰고도, 다녀온 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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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 다녀온 뒤로 수양대군의 세력은 흔들 수 없이 되었다.’는 지극히 모호한 일구로써 걷어치워 버렸다. 왜, 또는 어떻게 흔들 수 없이 되었는지는 일언반구 없었다.
 
81
드디어 계유년 10월 10일의 변사가 폭발이 된다. 한명회의 진언으로 불평객을 많이 기르는 수양은 이 날 드디어 거사키로 한다.
82
다른 때는 술 얻어 먹는 맛에 호기를 뽑고 하는 불평객들도 이 날은 의논이 분분하여 귀일치를 않는다. 이것을 아니꼽게 본 수양은 林芸[임운] 한 사람만 데리고 김종서(당면의 巨敵[거적]인)를 타살하러 간다.
83
이 장면의 군중심리를 잘 처리한 붓은 그 다음 순간은 시간적 착오를 일으켰다. 즉 수양이 말을 타고 김종서의 집으로 떠난 뒤에 한명회가 洪允成[홍윤성]을 김종서의 집으로 염탐하여 보냈다― 작자는 이렇게 말한 뒤에 김종서의 집에는 홍윤성이 먼저 도착하여 들어가서 술까지 얻어 먹고 돌아간 뒤, 종서 혼자서 애첩에게 따르라 하여 술을 많이 먹고 취담을 한 뒤 저녁상이 들어온 때야 수양이 도착하였다.
 
84
여기서부터 사건은 차차 긴장되어 간다.
85
만약 제도며 습속에 대한 작자의 세밀한 연구와 주의만 있었다면 하는 감을 금할 수 없도록 붓은 자유로이 흘러서 사건을 차차 긴장시켜 간다. 야화의 삽화는 無用長物[무용장물]이다.
86
首陽[수양]이 金宗瑞[김종서]를 處理[처리] 수양은 김종서를 처리한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히 歸邸[귀저]하여 한명회·권람 등을 인솔하고 왕의 行在所[행재소]인 寧陽尉[녕양위] 鄭悰[정종](왕의 매부)의 집으로 간다. 여기서 선자와 악자는 더욱 분명하여 간다. 수양의 수족인 삼백 군마는 호위 겸 시위 겸으로 이 집을 둘러싼다.
87
이러한 가운데서 수양은 왕께 뵙고 지금 황보인,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끼고 역모를 하기로 일이 급하여 상계치 못하고 김종서부터 죽이고 지금 상계하는 것이니 곧 처분하여 줍시사고 청(위협일까)을 하여 역모를 얻고 재산들을 행재소로 부른다.
88
이 야반에 일어난 참극― 한명회는 生殺簿[생살부]를 가지고 중문 안에 앉았고 대문 안에는 鐵如意[철여의]를 가진 역사들이 지켰다가, 살부에 찍힌 재신이면 타살하는 양은 너무 慘[참]하다는 감이 없지 않도록 작자의 붓은 날카로왔다.
89
이러는 중에도 장래의 암시를 즐기는 작자는 황보인이 행재소로 오는 길에 모에게,
 
90
“나는 군명이라. 사지인 줄 알면서도 가거니와 후사를 성승과 유응부에게 부탁하게.”
 
91
하는 말을 하게 하여, 장차 상왕 복위 운동의 2대 武夫[무부]의 이름을 미리 암시하여 두었다.
92
여기서 악은 더욱 악다이 황보인의 머리를 잘라다가 야반 침침한 燭下[촉하]에 어린 왕의 앞에 이것을 내밀어서 왕을 더욱 놀라게 한다.
93
여기서 수양은 영상, 이병 겸관 내외병마도통사가 되어 왕 한 분 밖에 군국의 최대권자가 되었다.
 
94
악과 선의 대조 강화는 차차 더 심하여 갔다.
95
왕이 수양대군에게 내리는 교서(무론 칭찬하는 뜻이다)를 유성원이가 지은 것인데 유는 장차 사육신의 1인이니만치 그를 두호하기 위하여 “요점은 정인지가 불러 준 것이라”하여 선을 자초지종으로 선으로 하려고도 하였고 수양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을 더욱 과장하여 악답게 하는 일방 許詡[허후] 같은 선인을 강화하여 허로 하여금 滯座[체좌]중에서 수양을 욕하게 한다.
96
그러나 허후의 영웅적 善駕[선가]임을 강조하려는 이 장면은 도리어 수양의 (욕을 먹고도 방임한) 관대한 면을 보여 주기 쉽다.
97
安平大君[안평대군]의 定配[정배] 이번 수난의 중심 인물이라 지목한 안평대군은 정배를 보낸다. 그러나 제신에게는 맹렬한 반대가 일어난다. 당연히 극형에 처할 것이지 왜 정배쯤으로 끝막느냐는 것이다.
98
수양은 누차 거부한다. 동생을 차마 죽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99
“그렇기로서니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죽인단 말이야?”
100
이렇게까지 말한다. 그러나 제신은 “죄가 없이 지금 정배를 가니 전국 동정이 모이기 전에 죽여야 한다”고 그냥 주장한다.
101
이것은 작자의 과오로 본다. 죄가 없는 줄 마음으로는 알지라도 표면으로는 유죄로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102
이 장면에 있어서 가장 독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수양의 성격변화다. 아직껏의 성격으로 보자면 수양은 목적을 위하여서는 결코 수단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다. 사실 수양이 대위를 엿보는 사람이면 안평은 당연히 제거하여야 할 방해물이다. 왜 이렇듯 보호하나.
103
그 의문은 즉시 풀린다. 수양은 제신들에게 졸리우다 못하여 마지막에,
104
“모두 상감처분이시지.”
105
하여 자기는 殺弟[살제]의 오명에서 벗어 나고서 제신에게 직접 상감께 조르라는 암시를 한다.
106
악은 차차 더 과장된다.
107
그러나 아직도 독자가 미흡히 생각하는 점이 있다. 일찌기 권람, 한명회 등의 신통치도 않은 꾀에 감불복지하던 수양이 어느 틈에 이렇듯 권모술을 배웠는가.
108
직접 상감께 조르라는 수양의 내의를 들은 정인지 이하 제신은 왕을 찾아들어갔다. 그때는 왕은 궁녀들을 거느리고 경회루에 나서 ‘얼음이 얼거든 핑구나 돌릴까’등의 공상을 하며 있을 때였다. 그때 정 이하는 아무 예고도 없이 여기까지 돌입을 한다. 실제에는 존재할 수 없는 무례다. 왕은 단연히, 정 등의 상계에 대하여,
109
“죄 없는 안평 숙을 왜 죽이느냐.”
110
고 거절한다.
111
정 이하의 제신은 무효히 물러 나와서 大諫[대간] 李某[이모]를 수양께 보내서 수양이 직접 윤허를 얻어야겠다고 알리었다. 이 보도를 듣고 수양은 또 “안평을 죽여야 하는가. 그러나 차마 아우를 어떻게 죽이랴”고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다가 마지막에 역시 책임을 왕께 돌리고서
112
“상감 처분에 달렸지 내야 아나.”
113
전과 꼭같은 대답을 한다.
114
이 회보를 듣고 정인지는, 率百官[솔백관] 계청하기로 작정을 한다.
 
115
이날 밤 성삼문의 집에서는 중대한 회합이 있었다. 이 「단종애사」중에 수양의 정치에 반대하는 사람 전부가 모인다. 왜 이야기에 등장을 안하는 사람 ―예컨대 金時習[김시습] 같은 사람들― 도 참가하게 안하였는지, 이것은 작자의 不用意[불용의]로 볼 수 있다.
116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마치 퇴위나 한 듯이 비분강개한다. 왜 이다지도 비분강개해 하는지는 독자는 이해키 곤란하다. 죄 없는 안평을 죽이자는 것이 청백한 선비의 마음에 거슬리기야 하겠지만 정도를 지나쳐서 비분하여 팔을 뽑내며 야단들을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으로는, 밝는 날 만약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안평을 죽이기를 소청하면 자기네는 따로이 나서서 그것을 반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기네들과 같은 미관말직만으로는 힘이 적을 테니 高室[고실] 하나를 수령으로 추대하여야겠다고 하여 허후를 선택하고 그를 방문하여 승낙까지 얻는다.
117
習慣[습관], 風俗[풍속], 制度[제도]에 對[대]한 用意[용의] 이쯤서부터 작자의 붓은 약간 진보되어(습관, 풍속 등까지는 못 미쳐도) 제도 등에 대하여서는 초두와 같은 망발은 차차 적어 나갔다.
 
118
안평도 드디어 사사되었다. 문사들의 조그만 운동이 거대한 권력 아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119
그 뒤부터 작자의 붓은 커다란 과오를 범하였다.
120
한참을 연속하여 수양의 정치를 극력 찬송한 것이었다. 官紀[관기] 振肅[진숙]이며 諸政[제정] 쇄신 등은 무론이요 ‘수양이 조카님 되는 왕께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어 능력이 및는껏 왕의 몸과 마음을 평안케 하고 어서 사직의 후계를 얻기 위하여 諒闇[양암]중임에도 불구하고 제신의 반대를 일축하고 왕비를 맞아 들여서 세종대왕 이후 늘 분요하는 세상이 다시 평안하게 되었다’하였다.
121
이렇게 만드는 것은 이 이야기의 목적으로 보아서 적지 않은 과오이다. 이이야기에서는 지금껏 어린 임군을 동정하여 그 반대되는 ‘악’을 만들고, 誣[무]에 가깝도록 수양 및 그 일당의 하는 일을 나쁘게 들추어 왔다.
122
그런지라 여기 있어서도 이야기의 통일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수양의 모든 좋은 정치도 한낱 인심을 모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행동으로 써야 할 것이다.
123
이것은 전혀 작품 통일을 잃게 하는 과오이다.
124
이 수頁[혈]의 수양 정치 찬송은 작자로서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썼을 바이지만 이야기 전체를 두 토막에 꺾어 놓는 커다란 실수였다.
125
이 아래 한참은 수양이 兵[병], 政[정] 양권을 잡은 뒤의 일을 적었다. 그러나 아직껏 수양의 성격과 그 성격에서 우러난 인격을 확립치 못하니만치 여기서도 독자는 수양의 본체를 잡기 힘들다. 수양이 이전 유현들을 모두 자기 산하에 모으고자 공작하는 데 있어서도 어떤 때는 ‘단매에 때려 죽이고 싶었지만 인심을 사기 위하여 감정을 꾹 참고’ 그들을 찾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의와 의리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찾는다. 해서 수양이 과연 ‘악’인지 ‘선’인지― 이것을 다시 뒤채어 말하자면 계유년 사변이 단지 수양의 야심에서 나왔는지 혹은 원대한 계획에서 생겨난 것인지 모호하게 되었다. 만약 수양으로서 의를 사모하는 사람이면 계유사변도 ‘의를 사모하기 때문에 행한 비상 행동’이라 볼 수도 있으므로….
126
禪位[선위]나 한 듯이 悲憤[비분]케 함 대체 이 이야기에는 ‘이야기의 진행’에 대한 작자의 선입관이 있기 때문에 작자는 ‘좀더 이야기가 진행키 전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흔히 적어 넣는다. 계유변란 직후에 성삼문 등 젊은 유생들이 마치 선위나 한 듯이 비분해 하는 것도 ‘장차 선위를 한다’는 작자의 선입관의 산물이다.
127
이런 과오는 아래 또 나온다. 왕(단종)이 내관 女臣[여신]들과 경회루에 산보를 할 때에 정인지가 또 여기 겁적 뛰쳐들어온다. 예통도 없이 政院[정원](史官[사관])의 입회도 없이 정승이 내전까지 뛰쳐든다는 희극을 작자는 또 다시 범한다. 정 相[상]은 임군께 인사의 말씀을 여쭌 뒤에는 ‘은밀히 아뢸 말씀이 있으니 잡인을 물리쳐 주시기’를 청한다. 거기 대하여 임군은,
 
128
“내가 무어 잘못한 것이 있소? 내가 덕이 없어서 날마다 좌상에게 잔소리 ― 아차 잔소리가 아니라 충간이더라, 충간을 듣는 것은 世所共知[세소공지]어든 옆에 사람이 있기로 어떠하오.”
 
129
하고 핀잔을 준다. 이것도 ‘작자가 정 相[상]의 장차 할 말을 예지’하였기에 임군까지도 이런 ‘예감적 역정’을 내게 한 것이다.
130
이 왕의 예감적 역정을 맞추려는 듯이 정 상은 왕께 선위를 면청하는 것이 었다. 이것 또한 독자에게는 부자연키 짝이 없으니 책략과 학식이 과인한 정 상이 이런 졸렬한(실제로는 있지 못할) 수단을 취하였을 수가 없다. 무언의 위협을 가하여 임군으로 자퇴케 하든가 혹은 ‘상왕’이라는 향그러운 미끼로 임군을 속이든가 할 것이지,
131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보위를 수양대군에게 사양하시오.”
132
事實[사실]의 合理化[합리화]에 對[대]하여 이런 무엄한 말은(아무리 수양이라는 배경이 있을지라도) 군신간의 체면상 못할 것이다. 실재의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야기’로서의 진실성이 적으면 소설가는 이를 추려서 소설화할 필요가 있거늘 이 ‘실재치 못한 일’까지도 재검치 않은 것은 작자의 방심으로서 그 책임은 피치 못할 것이다.
133
여러가지의 암투가 있은 뒤에 대세는 거스를 수가 없어서 드디어 단종은 수양에 선위를 한다. 이 선위의 절차 같은 것은 참고할 문헌이 있음직한데 왜 이렇듯 싱거운 式次[식차]를 만들었는지? 의식을 존중하는 조선이라 한편으로는 장엄미가 있었을 것이요, 사건이 사건이라 살기와 비통미는 이 이야기의 진행으로 보아도 다분히 보였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의식 절차가 참고할 곳이 없으면 ‘경회루에서 선위식이 거행되었다’쯤으로 간단히 넘기고 거기 대처한 사람들의 심경을 좀더 확연히 그려서 진실미를 가할 필요가 있다 본다. 너무도 史實[사실]이라는 데 관심키 때문에 소설가로서의 상상의 날개를 봉쇄하려 버린 것이다.
134
이렇게 선위가 되고 전왕(아직 존호를 안 바쳤으니 상왕이 아니다)은 그날 밤으로 경복궁을 나서서 수강궁으로 移御[이어]한다.
135
그 뒤에도 신왕(수양)의 마음은 독자를 霧中[무중]에 끌고 다닌다.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일을 明澮輩[명회배]에게 깨침을 받은 뒤에야 요해하는가하면 어떤 때는 제갈량 이상의 책모를 쓰는 신왕, 어느 것이 진정한 신왕인가.
136
新王[신왕] 登極[등극] 세월은 흘러서 병자년―.
137
신왕 등극에 대한 誥命[고명]과 冕服[면복]을 내리기 위하여 명나라의 사신이 온다.
138
상왕께 충성되기 때문에 신왕께 마음으로 복종치 않는 몇몇 신하들은 이 기회에 신왕과 신왕 세자를 弑[시]하여 버리고, 상왕을 복위케 하고자 꾀한다. 그러나 불행이 일은 사전에 발각이 되어 그 주모자들은 모두 신왕전에 친국을 받게 된다.
139
옛날 성종조의 유생이요, 소설가인 남효온의 저작한 「六臣傳[육신전]」, 「秋江冷話[추강냉화]」등을 그대로 밟은 「단종애사」의 작자는 남효온의 그릇된 관찰이며 細工[세공]까지도 그대로 답습하였다. 신왕이 성삼문에게 대하여,
140
“내 녹을 먹고 어이 나를 배반하느냐”는 힐문에 대하여 성은,
141
“나는 그 녹을 그대로 창고에 쌓아 두었소.”
142
하는 등이며, 박팽년에게 신왕이,
143
“그럼 네 어찌 내게 칭신했느냐?”
144
할 때는 박은,
145
“칭신한 일 없소. 계문에 臣[신] 자를 쓰지 않고 巨[거] 자를 썼소.”
146
하는 등은 전혀 옛날 유생의 小[소]세공으로서 성이 ‘국록’과 ‘왕록’을 구별치 못하는 소인이 아닌 이상은 이런 유치한 말로 왕께 항변하였을 리 없고 박이 深謀遠慮[심모원려]의 사람(과연 그러하니 상왕 선위 전에도 후약을 기코자 참지 않았는가)인 이상은 이런 소세공을 하여 자기의 심경을 위험 선상에 폭로치 않았을 것이다.
147
남효온은 꽤 소설가적 소세공이 교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년에 발생된 사건을 모두 검토하여 단종 비극에 부회시킬 수 있는 사건이면 모두 끌어당겨 비극적 가미를 최고도에까지 달케 하였으니, 신숙주 부인 윤시의 죽음이라든지 하위지의 낙향이라든지(윤씨는 병자 사건보다 반 년 앞서서 병사하였고, 하위지는 단종 遜位[손위] 이전에 낙향하였다가 신왕 세조)조에 예조 참판에 취직한 것이 史上[사상] 사실이다) 무엇이나 얼거리가 있기만 하면 모두 비극적으로 소설화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이렇게 사실을 무시하고까지 소설적 가공을 하는 것은 좀 어떨지 모르지만, 이 남씨의 소설에 일자일획을 가감치 못하고 충실히 그를 현대어로 고쳐만 놓는다 하는 것도 찬성키 힘든 일이다.
148
그런지라 소설상 성격의 통일이라든가 순화라든가 하는 수법을 모르는 옛날 소설가 남효온의 범한 과실은 그대로 「단종애사」에도 옮아졌다. 작자는 10여 頁[혈]에 긍하여 이 신왕의 ‘愛士[애사]’하는 사실을 또한 기록하였으니 과연 이 임군이 ‘선’인지 ‘악’인지 더욱 어지러워 간다.
149
이리하여 충의편은 끝나고 혈루편으로 들어선다.
150
血淚篇[혈루편]의 빛남이여 혈루편 80頁[혈]은 아름다운 시다.
151
무론 여기도 작자의 방심의 산물인 차질(예컨대 王都事[왕도사]가 노산을 영월까지 압송하여 도착한 날 저녁 혼자서 비감하여 강변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궁녀가 들었다고 작자는 말하는데, 그때는 아직 궁녀가 도착키 전이다)이며 신왕의 불통일된 언행 등이 있기는 하지만 혈루편 총체의 성과로 보자면 그것쯤은 눈감아도 무관할 줄 안다.
152
일찌기는 한 나라의 임군으로 그 뒤는 상왕으로, 떨어져서는 노산군으로 산촌에 귀양살이하는 이 소년 귀인은 그래도 오직 마음이 착하고 어질기 때문에 역경을 역경으로 보지 않고 당신의 불행을 슳어하지 않고 오로지 왕자다운 자애심으로 좌우를 대하여 적까지도 감복시키고 감화시킨다.
153
이 아름답고 순정적인 시는 대단원으로 향하여 내려간다. 이 혈루편을 본편으로 삼고 그 전의 복잡하고 불순하던 경과를 삽화로 끼여 넣었더라면 도리어 작품 전체를 한 개의 아름다운 비극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을! 가석한 일이다.
154
여음 길게 뽑는 이 혈루편으로써 신문 지상 수백 회를 내려오던 이조 5백년사 중 가장 애처롭고 구슬픈 이야기는 막을 닫친다.
155
王室[왕실]과 庶民[서민] 階級[계급]의 相關性[상관성] 요컨대 이「단종애사」는 남모 씨의 「육신전」의 현대어와에 지나지 못한 것은 작자 스스로 가석히 여기어야 할 것이다. 이조 27대 군주 중에 양반 계급 이하인 서민에게까지 그 업적이 미친 분은 세종대왕 한 분뿐이다. 이 세종의 직후에 생긴 단종 사변을 물어화함에 있어서는 당시의 사회상이며 왕실과 서민 계급의 관계도 좀더 밝히어서 세종 성주의 어장손으로서의 단종께 서민들은 애모의 염을 바쳤기 때문에 그의 선위를 통곡하도록 이야기를 구성할 필요도 있을 것이며, 그런 대사건이 일개 왕족의 야심의 산물이라고 간단히 처리하기 전에 ‘그런 사변이 생길 필연적 원인’이 있을 것을 재고하여 보아서 史實[사실]에 대한 소설로서의 진실성을 더 굳게 고정시킬 필요도 있고 정치 세력에 대한 투쟁보다도 정치 이데올로기의 투쟁도 살펴볼 필요도 있다 본다.
156
소설 구성에 있어서 몰각할 수 없는 이런 여러가지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단지 ‘어린 몸으로 마음에 없이 선위를 하고 마지막에 가련한 최후까지 보았으니’하여 소년왕이니 불쌍하다 하는 단순한 견해로 결말을 지었는지라, 이것은 인생의 일면도 아니요, 당년의 사회상의 검토도 아니고, 단지 소년 왕의 일대기에 지나지 못한다.
157
새로운 소설의 수법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는 옛날 남효온 같은 사람도 역사를 소설화하여 보려 노력한 흔적이 너무도 뚜렷한데 어찌하여 이 작자는 단지 남씨의 노력을 그대로 재부연하고 자기의 전개를 전혀 할 생각을 않았는지. 사화의 기록자이라는 서기 役[역]에서 ‘史實[사실]의 재생’이라는 소설가의 역으로 躍上[약상]할 노력을 포기한 데 이 「단종애사」의 치명상이 있는 것이다.
【원문】14. 春園(춘원)의「端宗哀史(단종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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