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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園硏究 (춘원연구) ◈
◇ 2.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 ◇
해설   목차 (총 : 15권)     이전 2권 다음
1938.1~4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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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硏究 (춘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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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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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1892년 춘삼월에 平北[평북] 定州邑[정주읍]에서 남쪽으로 한 사십리 들어가서 있는 산촌의 全州[전주] 李門[이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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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시골서는 내로라고 뽐내는 집안이요, 춘원의 출생 당시에는 가산도 넉넉하였으나, 그가 세상에 나온 지 사오 년 뒤에는 차차 기운이 기울어져서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작은 집에서 오막살이로 걷잡을 새 없이 영락되기 때문에, 지주로서 자작농으로,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이리하여 팔구세 때에는 벌써 어린 몸으로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고 소를 끌고 밖에 나다니는 고역을 맛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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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농촌에서 사는 가난한 집 소년이 맛보는 온갖 고생을 그는 다 맛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소년을 시험하심에 그만 고생으로 끝을 막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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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내가(춘원 자기) 열한 살 적 일이다. 불과 열흘 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괴질로 돌아가시고, 어린 누이동생과 나와 단둘만 남았을 때다. 부모는 다 돌아가셨지만, 그래도 먹고 살겠다고 내가 물을 길어 오고 반찬을 만들고 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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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臺[영대]〉제2호, ‘人生[인생]의 香氣[향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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早失父母[조실부모]한 孤兒[고아] 아직 철부지인 열한 살 적에 그는 고아가 된 것이다. 이 글에는 누이동생과 자기와 단둘이라 했지만 그 밖에 또 아직 젖먹이 어린 누이가 하나 더 있었다. 그 젖먹이 동생은 할 수 없이 남의 집으로 보내고, 남은 누이동생과 함께 부모를 잃은 외로운 집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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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여기서 인생의 가장 고달프고 쓰라린 경우에 직면한 소년은 어떠한 수난의 도정을 밟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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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자기가 쓴, 자서전의 일종이라 할 만한 ‘인생의 향기’에서 한두 토막 그때의 그의 고생을 적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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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구월(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것이 음력 팔월이다) 어떤 날, 이 소년은 저녁밥 지을 나무를 해오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갔다. ‘인생의 향기’에는 ‘나는 서툰 솜씨로 불 잘 붙을 만한 풀을 골라 가면서 베었다’하였지만, 이 서툴다 하는 것은 어른과 대조하여 하는 말이지, 벌써 꽤 숙련된 솜씨였을 것이다. 나무를 좀 베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왕 온 이상에는 내일 땔 것 까지는 베어 가지고 내려가려고 욕심을 부리던 이 소년은 낫질을 잘못해서 왼손 무명지 세째 마디를 꽤 깊이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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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는 피가 솟았다. 이 피를 볼 때에 소년은 자기의 외로운 신세와 장래가 더욱 딱하게 생각되어서 소리를 쳐서 울었다.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산에서 통곡하고 있을 때에 웬 여인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가까이 와서 따뜻이 위로하고 자기의 치마 고름을 찢어 소년의 손을 싸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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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니 어린 누이가 대문 밖에 나와서 울고 섰다.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지금 해온 나무로 밥을 지어 누이와 같이 부뚜막에 앉아 먹으면서 그 여인의 얼굴을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부모가 다 돌아가신 뒤에 처음으로 기운을 얻어서 언제까지든 살리라, 힘있게 살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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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오막살이라 하나 소년의 힘으로서는 그 집을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소년은 하릴없이 어떤 친척의 집에서 눈치밥살이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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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쌍한 소년을 위해서 동네 사람이 돈 삼 원을 주었다. 그 삼 원을 가지고 소년은 담배 장사를 하였다. 무엇이라나 하는 궐련을 평양서 한 통을 사다가 한 갑 한 갑씩을 팔면 근 일 원의 이익이 붙는다. 정주 읍내에서 사오면 이익이 박하다 해서, 이 소년은 멀고먼 길을 평양까지 가서, 사다가는 팔고 팔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구러 일 년을 지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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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침내 어린 누이동생이 있는 곳을 탐지하여 알았다. 어른들이 두고두고 속여 왔지만 나는 마침내 알아 낸 것이다. (略[약]) 거의 일 년 동안이나 있는 곳도 서로 모르고 서로 떠나 있던 그리운 누이동생- 인제 겨우 세 살 잡히는 어린 누이동생- (약) 누이가 있는 곳은 여기서 삼십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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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가을 볕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졌지마는 인제 떠나면 해 지기 전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어린 것을 찾아와야겠다.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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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고개 너머는 작년에 한꺼번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덤이 있다. 쥐통(콜레라)에 돌아가신 까닭으로 동네 사람들도 들여다보지를 않아서, 바로 마당에 묻었던 것을 내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돈 일백 스무 냥(십이 원)을 구걸하여다가, 이 고개 너머다 옮겨 묻었다. 옮겨 묻은 지가 아직 한 달도 못 넘은 무덤은 마치 새 무덤과 같았다. 나는 우두커니 무덤 앞에 서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해골을 옮겨 오던 광경을 생각하였다. 나는 그때에 구걸해 온 돈으로 베와 백지와 칠성판도 사 왔으나, 밀짚 거적으로 싼 것이 아직 썩지 않았으니 구태 송장내 나는 것을 끄를 필요가 없다 하여 그대로 두 사람이 지게에다 져다가 그대로 묻어 버리고 말았다. 그 가슴께는 굵고, 머리와 다리는 가는, 아직도 누런 빛이 그대로 있는 밀짚 거적에 싸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체가 눈에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서 동뚝 틈으로 숨어서 시체를 지고 올 때에 나는 말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어쩌면 내 아버지와 어머니 시체를 저렇게도 초라하게 섬거적에 싸서 묻는담!’하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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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개판조차 아니 덮고 시체 위에다 함부로 흙을 퍼부을 때에 금할 수 없이 눈물이 났으나 곁에 섰던 어른들에게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것이 분해서 가만히 돌아서서 눈물을 씻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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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옛 집터에 다다랐다. 집은 벌써 헐려 버리고 그 자리에는 무 배추를 심었다. 그래도 저 오동나무 잎, 살구나무 아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지막 사 년의 생활을 하시다 돌아가신 집이 허깨비 모양으로 보이는 듯하여.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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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고개에 다다랐다. 이 고개는 여우가 나와서 사람을 홀려 간다는 무서운 고개로서, 아이들은 해만 넘어가면 이 고개 밑에서 놀다가도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는 데다. 우리 동네의 봄은 이 고개에 제일 먼저 온다. (약) 나는 다시 달음질을 시작했다. 눈물에 몽롱하여진 눈에는 발밑으로 휙휙 지나가는 길바닥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큰 개, 작은 개들이 콩콩 짖는 촌중을 지나서 내 누이가 잡혀 와 있다는 그 이웃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은 내 먼 일가집이다.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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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갔던 여편네가 웬 아이를 데려다가 내 앞에 세운다. 이것이 내 동생이야? 저 뼈와 껍질만 남은 누더기에 싸인 어린애가 내 동생이야? 그 불그스레하던 뺨은 어디 갔어? 별 같던 눈의 광채는 어디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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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것이 내 동생이야?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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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 한번 “이애, 너 나 알아보니? 야, 아니?”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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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또 알아볼 리도 만무하다.(약) 나는 그 집에서 나왔다. 어스름에 내가 그 집에서 나서서 앞길로 나갈 때에 누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것과 내가 그날 밤 혼자서 그 여우 나는 고개를 넘어오면서 이십 리 동안이나 울고 온 것은 기억되나, 내가 왜 그 누이를 안 데리고 왔는지는 생각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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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후 일 년 동안이나, 이리저리로 동냥글을 얻어 읽고 돌아다니다가 어떤 사내에게 네 누이가 다녀간 후에 한 달이 못 되어서 이질로 죽어 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인생의 향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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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여기저기 동냥글이나 얻어 읽고 눈치밥을 먹으며 다니다가 이 소년은 드디어 자기의 고향을 뒷발로 차고 서울로 뛰어올라왔다. 담배 장사를 하여 번 돈과(그의 어머니가 자기의 아들의 장가들 적에 쓰려고 준비해 두었던) 명주 몇 필, 무명 몇 필을 판 돈 모두의 합계가 삼십원 내외의 大金[대금]을 쥐고, 이 소년은 향학열에 들떠서 서울로 올라왔다. 아직 경의선이 개통되기 전이라, 진남포 가서 화륜선을 타고 인천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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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얼마를 공부하다가 다시 현해탄을 건너서 동경으로- 이리하여 오륙년간을 공부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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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無依無託[무의무탁]하게 돌아다닐 때에 흔히 노인들께서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다.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보는 사람이 되리라”하는 말로 위로하여 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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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대에 그렇게도 박복했던 이 소년이건만 이상히도 그에게는 늘 몇 사람의 후원자가 있었다. 그것은 물론 그의 才分[재분]의 덕이겠지만 진퇴유곡하여 ‘죽어 버릴까 하고 죽을 방법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무슨 일 하나가 생겨서’ 그의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이런 의외의 행운이 그로 하여금 神經的[신경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비교적 낙천적인 오늘날의 그의 성격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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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에 그는 동경서 중학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다가 자기 조부 위독이라는 飛電[비전]에 다시 오래간만에 고향에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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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조부상을 당하고 그 뒤를 이어서 그는 오산중학교의 교편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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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감격되기 쉬운 나이인 열아홉 살의 청년, 다정다한한 그의 공상적 생활은 이 산간 중학의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로 하여금 차차 시인이 되게 하였다. 가슴 속에 충일되고 압축된 감정의 덩어리를 깊이 감추고 산간 소로를 철학자와 같은 기분으로 거닐면서 여러가지의 공상에 잠길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하늘이 그에게 주신 예술적 재분이 차차 높은 소리로 울리어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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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년간을 산간에서 교원 생활을 하였다. 그런 뒤에 표박의 길을 다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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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로 돌아다녔다. 만주로 支那[지나] 본토로 지향없는 그의 방랑 생활은 일 년간을 계속하였다. 해가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지든가, 산에서 뜨지 않으면 산으로 지기라도 하는 산 투성이 조선땅에서 살아서 산을 보지 않재야 않을 수 없는 땅만 돌아다니던 그에게는 해가 지평선에 떠서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벌판은 경이였다. 경이라는 것은 범인에게 있어서도 시를 자아내거든 예술적 천분을 가지고 있는 이 청년에게랴? 진일을 막막한 벌판에 서서, 뜨는 해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소녀와 같이 가슴을 두근거리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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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는 아메리카 유학차로 떠나던 길이지만 일 년간을 표박을 하다가 일년 후에는 그는 다시 오산으로 돌아와서 또 다시 교편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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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벗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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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학생 시대에 그의 후원자요 지기이던 六堂[육당] 崔南善[최남선]이 간행하는 잡지 〈靑春[청춘]〉에 「어린 벗에게」를 기고한 것이, 바로 이 두번째의 오산중학교 교원이 된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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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14년 그 스물네 살 나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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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年[소년]의 悲哀[비애]」도 그와 전후하여 같은 〈청춘〉 지상에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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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수개의 단문의 발표가 없는 바는 아니었지만 춘원이 창작가로서의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 이때이다.
【원문】2. 春園(춘원) 李光洙(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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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6월 0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