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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園硏究 (춘원연구) ◈
◇ 5. 己未(기미) 前後(전후) ◇
해설   목차 (총 : 15권)     이전 5권 다음
1938.1~4
김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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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硏究 (춘원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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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己未(기미) 前後(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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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 지상에 「무정」과 「개척자」를 게재한 뒤에 춘원은 또, 〈매일신보〉의 촉탁으로 남조선 답파를 하였다. 그러나 거기는 「무정」으로서 조선에 말하려던 그 이상의 별것이 없었다. 새로운 관찰이며 의도며가 없었다. 말하자면 이것도 「무정」의 한 연장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러자 무오년이 넘어가고 기미년이 이르렀다.(6행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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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마침 귀향하여 있던 춘원은 이 의논이 한창 무르익은 때에 다시 동경에 발을 들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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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독립선언서-편자 註[주])를 초함에 있어서 그 초안자에 급하였던 유학생 간에서는 이 유학생계 유일의 문필가인 춘원에게 그것을 촉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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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춘원에게 있어서는 달갑고도 또한 무서운 일이었다. 그가 아직 주창하여 오는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보아서는 이 위에 더 명예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글을 초함으로 당연히 받을 법적 제재는 역시 그에게는 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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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園[춘원]의 망명 그는 × × × × × 를 초하였다. 그런 뒤에는 그의 동지이자 또한 위촉자들이 그냥 留東[유동]하여 있는 데 반하여, 그는 황황히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것이 조선문학 사상에 있어서 집필할 만한 기념탑인 〈창조〉지 창간호 발행의 수일 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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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신이라는 것이 춘원의 온갖 방면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바다. 춘원은 어디까지든 문학의 人[인]이지 결코 전선에 나설 실행의 인물이 못 된다. 지금도 춘원은 자기 스스로를 문사라기보다, 오히려 정객으로 보고 싶어 하고, 남이 그렇게 보아 주지 않는 데 대하여 불평까지 품고 있으나, 춘원은 어디까지든 문학의 인이지 정치의 인이 아니며 筆[필]의 인이지 실행의 인이 아니니, 이제라도 누가 만약 ‘위험성을 띤 정치 운동’에 춘원더러 참가하라 하면 춘원은 피신의 여지를 본 뒤에야 승낙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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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이라는 해는 조선에 있어, 온갖 방면으로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눈 것같이 문학 운동에 있어서도 기미 전의 것은 과도기인 것에 반하여 기미년부터 비로소 구체적으로 발전 과정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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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創造[창조]〉와 朝鮮文學[조선문학] 이인직에게서 이광수로, -이리하여 이광수에게서 얼마만치 생장한 문예는 온갖 의미에 있어서 계발기의 문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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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 플로트에 있어서든 묘사에 있어서든 구탈의 흔적이 그냥 남아 있었다. 문장에서까지도 역시 구탈이 그냥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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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구탈이 기미년 2월에 창간된 〈창조〉에서 비로소 일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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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까지의 문예에 있어서는 소설의 흥미를 그대로 ‘이야기의 재미’와 ‘연애 혹은 정사의 재미’로써 빚어 보려 한 데 반하여, 〈창조〉에서는 ‘리얼리즘의 진미’야말로 소설의 최고 흥미라 하고 ‘이야기로서의 흥미’를 거부하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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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아직껏의 소설 내용에 대한 정의를 뒤집어 놓는 한편으로는, 조선문학이 쓸 형태를 비로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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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구어체의 확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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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까지에 있어서는, 그 글투에, ‘이러라’, ‘이더라’, ‘하도다’, ‘이로다’ 등은 그냥 구어체로 사용하였다. 〈창조〉 동인들은 의논하고 이런 정도의 글까지도 모두 일축하고 ‘이다’, ‘이었다’, ‘한다’ 등으로 고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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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에는 존재치 않을 He와 She 등 대명사를 몰몰아 ‘그’라 하여서 지금 조선서 소설 쓰는 사람에게 편리케 한 것도 〈창조〉의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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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많은 춘원이 감히 생각내지 못한 지방 사투리- 특히 평안도 사투리를 지문에 잡아넣으며 일변으로는 전인이 ‘점잖지 못하다’고 일고도 하지 않던 土語[토어]들을 모두 지면상에 부활시키어서, 조선어를 풍부케 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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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문예물뿐 아니라 온갖 글에, 조선어가 아무런 말이라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先鞭[선편]을 붙여서, 오늘날 조선어를 이만치 풍부히 만들어 놓은 점은 〈창조〉에 치하할 밖에는 도리가 없다. 만약 〈창조〉에서 이런 만용을 보이지 않았다면(문예의 내용은 춘원 시대보다 변하였을지 모르나) 형식에 있어서는 얼마한 진보가 있었을는지 심히 의심하는 바이니, ‘이러라’, ‘하도다’ 등도 당년에 있어서 그 구어로 인정되는 바이니, 이 탈에서 벗어났을는지도 의문이어니와, 토어를 무제한으로 문장화한다는 것은, ‘무지하다고 일컬을 만한 만용’이 없이는 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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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표현에 있어서도 춘원은 ‘한다’ ‘이다’ 등으로 족하다 한 데 반하여, 〈창조〉에서는 ‘했다’ ‘이었다’로 모두 과거사로 만들어서, 실감미를 주었으니, 그 이래 지금까지 조선의 문학이 걸어온 것은, 전혀 이형식에 입각하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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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기미년 2월에 창간된 〈창조〉지는, ‘조선문학 개척’의 도끼를 높이 들고 이 황야를 다스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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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의 한소리 만세성에 寺內[사내]와 長谷川[장곡천]의 정치가 깨어지고 齋藤[재등]의 온정주의가 조선의 위에 날개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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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寺內[사내] 시대의 조선이 좀 풀리며 민간에도 신문 잡지 발행을 좀 너그러이 할 때에, 몇 개의 잡지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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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廢墟[폐허]〉도 온정주의의 여덕에 생겨났지만, 불행히도 〈폐허〉지 자체는 조선 문예 계발에는 아무 공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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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人輩出[문인배출] 〈開闢[개벽]〉지도 온정주의 여덕으로 생겨났다. 그리고 〈개벽〉지는 문예 잡지는 아니었지만, 〈창조〉 이후에 문예에 큰 공헌이 있었으니 〈폐허〉의 동인이던 廉想涉[염상섭]이 소설가로 전환하여 成家[성가]한 것도 〈개벽〉이요, 玄鎭健[현진건], 羅彬[나빈], 金素月[김소월] 등도 〈개벽〉을 무대로 생겨난 작가들이다. 그밖에도 많은 문인들이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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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배출 시대에 있어서, 과거 〈창조〉가 쳐 놓았던 선편만 없었다면, 그야말로 군웅난무의 혼란 상태를 이루었을 것이다. 문장이며 용어 범위며 표현이며 ‘리얼의 한계’ 등에 모두 선편이 있었는지라, 이 군웅은 一絲[일사]의 얽힘도 없이, 오로지 문학 건설에 정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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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이러한 때에, 상해 피신해 있던 춘원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때의 조선문학은, 그가 떠날 때와는 비길 수도 없도록 진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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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이 상해 재류중은 安島山[안도산]의 훈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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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하기 쉬우니만치, 또한 감격키도 쉬운 춘원은 비상한 심경으로 비상한 지경에서 비상한 생활을 하는 중에, 감화력이 놀랍게도 강한 도산의 훈도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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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무정」조에서 말한 바 춘원의 이원적 성격에, 여기서 또 한 가지가 첨가되었다. 피신 이후의 춘원이 그 성격상 매우 커 보이는 때는 이상 3자가 잘 융화된 때요, 모순이 보일 때는 이상 3자가 상격이 된 때다. 감수성이 많고 공명성이 많은 춘원은 일시 감격된 감정은 모두 그대로 삼켜 버렸다. 재래의 것과 모순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고찰치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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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라, 파쇼를 찬미하는 한편으로는 톨스토이를 찬미하며, 제국주의를 강조하는 한편으로는, 또한 침략주의를 배격하는 데도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도 이 모순된 二面[이면]을 모두 정당시하고, 결코 부자연타 보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성격이 대단히 단순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공명성이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의 단점인 동시에 또한 그의 장점에 다름없다. 많은 모순을 보이는 이 단점은 또 한편으로는, 객관적으로 새로운 사상에 대하여는 늘 선봉을 선다는 선도자로서의 그의 일면을 보여 준다. 다만 한 가지 붉은 사상뿐에는 한 번도 물들어 보지 않은 것은, 도산의 위대한 감화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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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白山人[장백산인] 귀국 후에 한동안 춘원이 사용한 호 ‘장백산인’은 상해신문 × × 에서 그가 쓰던 호이니, 거기 대한 도산의 설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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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속이 늘 비었으니, 一長白[일장백]이요, 겨울에도 흰 夏洋服[하양복]을 입었으니 二長白[이장백]이요, 마음이 단순하니 三長白[삼장백]이요, 장백산 하의 조선인이니 此亦[차역] 長白[장백]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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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과 같이, 상해에서의 춘원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만약 이 때에 도산의 위대한 감화력만 없었더면 춘원은 빈곤에 못이기어 타락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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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고 굶고, 이런 빈곤과 싸우다 못하여 그는 어떤 기회에 그만 귀국하기로 한 것이다. 단순하고 심약한 춘원이 이 ‘귀국할까’ ‘말까’의 양난의 자리에서 얼마나 번민하였을지는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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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드디어 눈 꾹 감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現[현]부인 許英肅[허영숙] 씨와 사랑의 보금자리를 비로소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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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국한 뒤의 춘원의 거취에 대하여는 그때 갓 형성된 문단은 매우 흥미의 눈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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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길을 밟으려는지. 춘원이 아직껏 산출한 문학은 한 민족의 계몽기의 대중문학이었다. 그러나 수년간 망명 생활을 한 뒤에 귀국한 때의 조선문학은 20세기의 세계문학과 동열의 것이었다. 조선 민중의 문학에 대한 감상안은 어느 정도이건, 문학만은 홀로이 높은 자리에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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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은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따라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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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조선문단〉등에 게재된 「가실」, 「거룩한 이의 죽음」, 「血書[혈서]」등 수편의 단편이 이때의 작품이다.
【원문】5. 己未(기미) 前後(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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