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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許生傳 (채만식) ◈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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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1.15
채만식
1
안성장에는 과일이 많이 났다. 감·대추·밤 같은 것은 물론이요, 배·호도·잣·은행 이런 것들이 섬으로 짐으로 그 넓은 장판이 미어지도록 들이 나 쌓였다. 그 과일들을 서울서 내려온 도가들이 흥정을 하느라고 지껄이고, 소리지르고, 다투고, 싸움하고, 세고 하기에 장판은 벌집을 쑤신 것처럼 요란하였다.
 
2
그런 장판에 웬 굴뚝 구멍에서 나온 것 같은 시꺼먼 구척 장신의 총각 녀석 하나가 장판을 위아래로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3
“자아, 과일삽시다, 과일. 값은 달라는 대로 주고, 과일은 있는 대로 다 사고. 자아, 누구든지 값 잘 받고, 과일 쉽게 팔려거든, 물산도 가하는 강선달네 집 앞으로 지고 오시요. 한 접도 사고 열 접도 사고, 한 섬도 사고 열 섬도 사오. 부르는 게 값이요, 있는 대로 몰아 사오. 자아, 강선달네 집 앞으로 오시요 오시요.”
 
4
하고 인경소리 같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었다.
 
5
장사들은 처음에는 웬 미친 놈인고 하였다. 그래도 그중 한 사람이, 바지게에 지고 온 감 한 접을 지고, 허실삼아 물산도가하는 강선달네 집 앞으로 가보았다. 과연 강선달네 집 서두리꾼이 수십 명이, 둘씩 한패가 되어가지고 띄엄띄엄 벌려앉아 과일장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6
“감 팔러 왔소?”
 
7
“네.”
 
8
“몇 접이요?”
 
9
“한 접이오.”
 
10
“값은 얼마요?”
 
11
“한돈이오.”
 
12
“세여서 들여놓고, 돈 받아 가시요.”
 
13
이 날 안성장에서는 감 한 접에, 상이 칠푼이요, 보통 오푼이었다. 그런 것을 감장사는, 값은 달라는 대로 준다고, 그 거먹동이가 외우는 소리를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한 돈이라고 불러본 것이었다. 했더니, 아닌게아니라 부르는 대로 한 돈에 사들이는 것이었다.
 
14
소문은 삽시간에 장판으로 퍼졌다.
 
15
소문을 들은 과일장사들은 너도 나도 하고 앞을 다투어 과일짐을 지고 강선달네 집 앞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바지게에 감을 지고 오는 사람, 호도섬을 말에 싣고 오는 사람, 밤섬을 소 등에 싣고 오는 사람, 대추를 멱서리에 넣어 지고 오는 사람, 광우리에 배를 이고 오는 여인네, 자루에 은행을 넣어 걸메고 오는 꼬마동이……
 
16
거먹동이가 외우던 대로, 그리고 소문을 들은 대로 가지고 와서, 부르는 게 값이요, 물건 호불호 가릴 것 없이 있는 게 한이었다.
 
17
마침내 과일장은 강선달네 집 앞으로 쏠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석양 무렵까지에는 이 날 장에 났던 과일이, 한 톨 남지 않고 죄다 강선달 네 고간으로 들어가 쌓이고 말았다. 서울서 내려온 과일도가들도, 약간 초장에 산 것을 도로 다 팔아버렸다. 이문이 남기는 일반인데, 구태여 서울까지 떠 싣고 갈 며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18
장판에 난 과일을 값은 부르는 대로 내고 싹싹 쓸어 사들이다니, 이건 큰 변괴였다. 안성장이 생긴 이후로 처음 일이었다.
 
19
구석구석이, 둘만 모여도 수군거리고, 셋만 모여도 그 이야기로 판을 짰다. 그러나 아무도, 과일을 그렇게 사들이는 사람이 누구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20
혹이 강선달과 아는 사람이 있어
 
21
“거, 과일은 웬 걸 그렇게 사들이오?”
 
22
하고 물으면, 강선달은
 
23
“나도 모르오. 나는 손님의 심부림을 할 따름이오.”
 
24
하고 대답하였다.
 
25
이날 밤, 허생은 조촐한 술상을 앞에 놓고, 주인 강선달과 마주 앉아 향기있는 약주술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하였다. 허생은 좋은 술이면 십여배 기울이기를 즐겨하던 터이었다.
 
26
“오늘 도합 얼마치나 샀나요?”
 
27
허생이 묻는 말에, 강선달은 공순히
 
28
“한 팔백 냥어치나 샀나 봅니다.”
 
29
하고 대답을 한다.
 
30
“겨우 팔백 냥이요.”
 
31
“팔백 냥 돈이 적습니까?”
 
32
“돈 팔백 냥만 생각하면 크달 수도 있지만, 이 큰 안성장 과일을 죄다 사기에 팔백 냥이라면 너무 허망치 않소.”
 
33
“앞으로 서리가 올 때까지 더 나기는 날 것입니다.”
 
34
“그럼. 구월 그믐께까지는 과일이 있겠소이다그려.”
 
35
“그렇지요.”
 
36
“장날 아닌 무시날에도 과일이 들어오나요?”
 
37
“많이 들어옵니다.”
 
38
“그러면, 과일 들어오는 것이 떨어지는 때까지, 감 한 개, 대추 한 개라도 다른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다 사주시요.”
 
39
“오신 손님 물건 사 드리는 것이 영업이니깐, 그야 사 드리기가 어렵겠읍니까마는 과일 따라 상할 것이 있겠으니 정이올시다. 감이 제일 상하고, 배 대추 같은 것도……”
 
40
“상하는 것이야 어떡허겠오. 아무튼 사서 들여 재이기만 하시요.”
 
41
이리하여 구월 그믐까지, 강선달은 허생이 시킨 대로 안성으로 들어오는 과일이라는 과일은 깡그리 사서 곡간에 들여쌓았다. 그러고 나니, 과일도 끊겼거니와 돈도 만 냥 돈이 거진 다 나가고, 강선달네 곡간은 있는 대로 다 차고 하였다.
 
42
시월이 가고 동지달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허생은 과일을 그렇게 사놓고는, 어떻게 처분을 한다는 말이 없이 밤이나 낮이나 강선달네 안사랑 조용한 방에 들어앉아 글만 읽고 있었다.
 
43
먹쇠는 가끔 곡간에 들어가, 상한 과일을 추어 내다가는 버리는 것이 일이었고,
 
44
강선달이 하도 민망하여 허생더러
 
45
“아, 저 많은 과일을 날이 차서 얼고 하기 전에 방을 하시든지 하서야 아니합니까?”
 
46
한다치면, 허생은 태연히
 
47
“다 썩혀도 돈 만 냥 아니오.”
 
48
할 뿐이었다.
 
49
한편, 서울서는
 
50
해마다 서울서 먹히는 과일이 태반은 안성장을 거쳐서 서울로 올라오게 마련이었다.
 
51
강원도·황해도 그리고 경기도에서 나는 과일이 서울로 약간 들어오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다, 초가을에 조금 들어오고 나면 그만이었다. 그러고서 늦은 가을로부터 겨울과 이듬해 봄까지 대는 과일은 역시 안성장을 거쳐 남쪽으로부터 오는 과일이었다.
 
52
이렇게 서울의 과일을 대는 안성으로부터의 과일이 올해는 칼로 자른 듯이 뚝 끊겨버렸다.
 
53
추석 무렵부터 벌써 과일이 귀하기 시작하더니, 구월로 들어서면서는 과일전이 열에 대여섯은 파리를 날렸고, 그러다가 시월 동지달에는 서울 장안에서 감 한 개, 밤 한 톨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54
호강하는 양반들이 잣죽 구경을 못하였다.
 
55
어느 대가집에는 과일 없는 제사를 지냈다.
 
56
대궐에서는 밤·대추·곶감이 없어 약식을 만들지 못하고, 식혜에 실백자를 띄우지 못하였다.
 
57
탕약에 대추 두 알을 넣지 못하고, 생 세 쪽만 넣어 달여먹기는 예사였다.
 
58
서울 장안에 과일이 귀하단 소문을 듣고, 양주 사람 누구는 제 부모 제사에 쓰려고 무어두었던 밤 한 말을 파가지고 와서 한 냥을 받았다. 여느때라면 밤 한 말에 오 푼이 벗지 아니하였다.
 
59
누구는 곶감 한 접을 가지고 와서 큰 수를 보고, 누구는 부자집 환갑 잔치에 대추 서 되를 구해다 주고서 삼동 땔 나무를 장만하고 하였다.
 
60
이렇게 서울 장안에 과일이 씨가 마르자, 과일도가들은 제마다 안성읍의 강선달에게로 내려달았다.
 
61
처음에는 시세의 갑절을 불렀다.
 
62
강선달은 시세가 갑절로 올랐으니 방을 하라고 허생에게 권하였다.
 
63
허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64
그 다음엔 삼곱으로 올랐다. 허생은 그래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65
시월로 들어서서는 시세의 다섯 곱절로 불렀다. 허생은 종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66
동지달이 되자, 마침내 열 곱절을 불렀다. 밤 한 말에 너돈 닷돈이요, 곶감 한 접에 엿 돈이 넘는 시세였다.
 
67
시세가 열 곱이 되는 것을 보고, 허생은 비로소 곡간문을 열었다.
 
68
허생이 과일을 방하자, 지나간 초가을 그가 과일을 긁어 사들일 때보다 더 큰 난리가 났다.
 
69
날마다 수백 명씩 서울서 온 과일장사들이, 돈을 짊어지고 와서는 돈을 풀고 그 대신 과일을 져가기에 눈이 뒤집혀가지고 납뛰었다.
 
70
열흘이 못하여 과일 곡간은 텅텅 다 비었다. 그러고는 과일 대신 십만 냥의 돈이 들어와 쌓였다. 허생은 석 달 동안에 십 곱절의 이문을 남 긴 것이었었다.
 
71
과일이 다 나가던 날 밤, 허생은 술상을 앞에 놓고, 주인 강선달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72
“과연 몰라뵈었읍니다.”
 
73
강선달이 새삼스럽게 이런 감탄과 추앙을 하는 것을, 허생은 도리어 폐로운 듯이
 
74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이 좋은 술이 술맛이 없소이다.”
 
75
“선비라면 글이나 읽을 줄 알았지, 세태에는 통히 범연하고 어둔 줄 알았더니, 허생원 같으신 선비도 기섰읍니다그려.”
 
76
“………”
 
77
“선비더러 물꼬를 막으라고 시키니까, 아래께를 막으면 터지고, 막으면 터지고 하드라고요. 그래, 물꼬는 어떻게 막아야 한다는 것을 글로 쓰라고 하니깐, 물은 그 근원을 막아야 하는 법이니라고 써놓았드라지요, 허허.”
 
78
“나라가 상하없이 이학(理學)만 숭상하고 실학(實學)을 업수이 여긴 탓이지요”
 
79
“그래도 선비네는 세태에 어둡고 등한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80
“선비 그 사람의 자랑일는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네가 정사(政治)를 하니, 나라일이 말이 아니지요.”
 
81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 돈 십만 냥으로 이번에는 무얼 사실 생각이신지요?”
 
82
“글쎄, 아직 별로 작정이 없소이다.”
 
83
“그러시거들랑, 쌀을 사 놓시는 게 어떠신가요?”
 
84
“쌀을 사 놓으라고요?”
 
85
“쌀도 서울로 올라가는 쌀이 이 안성을 거쳐 갑니다. 십만 냥에치 몽땅 사 놓시면 한 달이 못가 서울 장안은 쌀이 없어 난리가 나고, 금새는 열 곱절이 더 오를 것입니다.”
 
86
“허어, 딱한 말씀을……”
 
87
선뜻 응할 줄 알았던 허생은 뜻밖에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88
“여보시오, 강선달!”
 
89
“네”
 
90
“과일은 양반이나 부자들이, 주장 입치레로 먹는 게 아니오.”
 
91
“그렇지요.”
 
92
“그러니깐 그런 사람들야 한때 과일을 좀 비싼 값으로 사먹기로서니 별반 관계가 없을 게 아니겠오. 서울 양반들이나 부자들이 밤 한 말에 너푼 하든 것을 너돈이나 닷돈에 사 먹기로서니 거덜이 날 이치야 없지않소?”
 
93
“그렇지요.”
 
94
“서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과일을 먹지 못해 죽지는 아니하니깐, 비싸면 아니 사먹으니 그만이고.”
 
95
“그렇지요.”
 
96
“그렇지만 서민이나 가난한 사람들도 과일은 아니 먹어도 살지만 쌀이 없어서는 당장 죽을 게 아니오.”
 
97
“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98
“양반이나 부자들은 몇 달씩 먹을 양식을 진작에 다 장만해 두었으리다. 그러나 쌀이 아모리 귀하고 값이 아모리 비싸드래도 그 사람네가 밥을 굶거나 답답할 일은 없을 게 아니겠소. 쌀이 귀하고 비싸면 당장 죽어나는 건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99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100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하고서 장사 이문을 보려 들다니, 큰 죄가 아니오?”
 
101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102
“여보, 강선달?”
 
103
“네에.”
 
104
“당신도 보아허니, 돈을 좀 모았나 봅디다마는, 돈도 모을 돈이 있고, 모아서 아니 될 돈이 있고 합넨다.”
 
105
“네.”
 
106
“악한 돈일랑 모으지 마시오. 인자는 불부라는 말이, 세상 사람이 돈을 악하게밖에는 모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난 말이지요. 악하지 않게 모아 악하지 않게 쓰면야 부자가 나뿔 며리야 없는 것이니깐요.”
 
107
마악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잇는데, 그때 별안간 마당에서 여러 사람의 어지러운 발짝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108
종종 겪어본 가늠이 있어, 강선달은 단박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사지를 떨면서
 
109
“화적이 들었읍니다. 얼른 피신을 하십시요.”
 
110
하고 당황히 납뛰었다.
 
111
허생은 그러나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태연히 앉은 채
 
112
“화적이 그대지 두려울 게 무어란 말이지요.”
 
113
“못 당해 보섰으니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만……”
 
114
“화적이면, 저이가 달래는 돈을 주면 그만이 아니요.”
 
115
“그야 그렇지요만.”
 
116
“내가 다 요량이 있으니, 아모 염려 마시오.”
 
117
그러자, 방문을 와락 열어젖히면서 번쩍거리는 장검을 든 자가 앞을 서고, 식칼과 몽둥이와 창을 든 여럿이 앞선 자를 옹위하듯 방으로 척척 들어섰다. 모두들 눈이 붉었고, 살기가 뎅겅뎅겅 듣는 것 같았다.
 
118
두목일시 분명한 그 앞선 자가, 허생과 강선달을 번갈어 보면서
 
119
“둘 중에 누가 허생이냐?”
 
120
하고 을러메듯 묻는다.
 
121
허생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거기 어데 지나가는 사람과 수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122
“허생은 낸데, 너이는 누구며, 무슨 일들이냐?”
 
123
하고 묻는다.
 
124
“보면 몰라. 너 돈 십만 냥 가졌지?”
 
125
“그렇다. 십만 냥 있다.”
 
126
“저놈, 꼼짝 못하게 묶어라.”
 
127
두목이 졸개를 돌어보고 허생을 칼로 가리키면서 그러는 것을 허생은 껄껄 웃으면서
 
128
“못 생긴 놈들이로곤. 그래, 장기까지 지닌 너이 수십 명이 이 약질 하나를 못 당해낼까 바서 묶는단 말이냐, 십만 냥 돈을 몸에 지녔기에 내뺄까 바서 묶는단 말이냐.”
 
129
도적 두목은, 들이단짝 이마빡을 딱 부딪뜨린 맛이었으니, 그래도 기는 앗기지 아니하려고 컬컬히
 
130
“얘, 이놈 봐라. 응. 뚝배기보다 장맛이 낫다드니, 그 생김새허구는 제법이로구나. 그래 돈은 다 내놀 테냐, 순순히.”
 
131
“아니 주면 사람을 궃히고 뺏어갈 테니, 내놓았지 별수가 있는냐.”
 
132
“그럼 내놓아라.”
 
133
허생은 방구석에 처박혀 앉아 벌벌 떨고 있는 강선달더러, 돈 둔 곡간의 열쇠와 그리고 등불을 밝혀오라고 이른다.
 
134
이윽고 열쇠와 등불이 왔다.
 
135
“날 따라오느라.”
 
136
허생은 도적 두목더러 이르고, 손수 열쇠와 등불을 들고 앞을 선다. 도적 두목과 졸개들이 웅기종기 그 뒤를 따랐다.
 
137
허생은 강아지만 자물쇠를 열고, 곡간문을 좌우로 활짝 열면서
 
138
“자아, 이게 십만 냥이니, 너이들 힘껏 마음껏 져가거라.”
 
139
하고 등불을 들여 비춰 준다.
 
140
곡간 안에는 구렁이가 서리고 있는 것 같은 십만 냥의 돈더미가 희미한 불빛에 거무스름히 드러났다. 그것은 세상 사람의 다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귀히 여기고 하는 돈———보배라기보다는 하도 더미가 크고, 하도 수효가 많아 차라리 무슨 괴물같이 무섭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였다.
 
141
도적 두목은 돈에 아바기를 받아 잠깐 멍하니 섰다가, 인하여 뒤를 돌아보면서
 
142
“들어가, 질 수 있는껏 지고 나오느라.”
 
143
하고 영을 내린다.
 
144
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졸개들은 손에 들었던 식칼이며 몽둥이며 창등속의 장기를 내동댕이치고, 우우 한꺼번에 곡간 안으로 몰려들어간다. 한 이십 명 됨직하였다.
 
145
도적들은 제마다 허리에 찬 큼직큼직한 전대를 뽑아가지고, 한 냥씩 한 냥씩 꿴 돈을 집어넣는다. 그러느라고 서로 밀치고 비비대고, 지껄이고 탓하고 나무라고 야단법석이 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흐벅지게 많은 돈과 돈을 마음껏 자져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옆에서 벼락이 떨어진 대도 모를 지경이었다.
 
146
이럴 때에 만일 허생이 곡간문을 닫아버리고 밖에서 자물쇠를 딸꼭 잠가 놓는다면, 도적들은 독 안에 든 쥐요, 관원을 불러 쉽사리 다 붙잡을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147
허생은 그러나, 조용히 등불을 비춰주고 서서, 도적들이 돈을 지고 나오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148
도적들은 이윽고 하나씩 둘씩, 돈전대를 멜빵 걸어 짊어지고, 끙끙하면서 곡간 밖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149
전대에 돈을 넣어 진 외에, 저마다 허리띠에 돈꿰미를 여러 냥씩 찼다. 그 돈꿰미가 중동이 잘라지든지 끝이 풀리든지 하여, 돈이 좌르르 무딘 쇳소리를 내며 쏟아지기도 한다.
 
150
어떤 자는 무거운 돈짐에 눌러, 비척비척하다가 그대로 퍽 쓰러지기도 한다.
 
151
어떤 자는 너무 무거워 지고 일어서지를 못해, 멜빵만 어께에 걸고는 주저앉아 낑낑거리기도 한다.
 
152
어떤 자는 발을 떼어놓기에조차 대견하도록 돈짐을 지고 나오면서도, 그래도 더 많이 못 가져가는 것이 안타까와 연신 뒤를 돌아보다가는 곡간 턱문에 걸려 에쿠 하고 앞으로 넘어박히는 자도 있다.
 
153
그럭저럭 도적들은 다 한 짐씩을 해 지고 곡간 밖으로 나왔다.
 
154
곡간의 돈은 별로 축나 보이지 않았다.
 
155
허생은 곡간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고 한 후에, 마당으로 늘비하니 주저않은 도적들은 바라다본다. 마당에는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156
곡간에서 마당까지는 이삼십 보에 불과하였다. 도적들은 욕심에 돈을 너무 많이씩 지고는, 겨우 이삼십 보의 마당까지 나와서는 돈 무게에 눌려, 서서 있지도 못하고 제마다 펄씬펄씬 주저앉아 있었다.
 
157
도적들은 돈 무게에 몸을 지탱하지만 못할 뿐 아니라, 돈에 정신 또한 빠져 저희들이 도적이라는 것까지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마당에 내동댕이친 식칼이며 몽동이며 창 동속의 장기————돈보다도 실상 더 소중히 할 것이며, 목숨과 같이 조심하여 건사하고 챙겨야 할, 이 장기들을 그들은 돌아보려고 아니하였다.
 
158
“저 꼬락서니들을 하고서야 어떻게 무사히 돈을 져다 먹을까.”
 
159
딱한 생각이 저도 들었던지, 우두커니 졸개들을 바라다보고 섰는 도적 두목더러 허생이 하는 말이었다.
 
160
도적 두목은 입맛을 다실 뿐 말이 없고.
 
161
허생은 다시
 
162
“모두 해 몇 명인고?”
 
163
“한 이십 명……”
 
164
“그렇다면, 한 명 앞에 많이 졌어야 오십 냥에서 더는 못 졌을 테니, 도합 천 냥이로구나.”
 
165
“………”
 
166
“돈 겨우 천 냥을 져갈 데면서, 십만 냥을 다 내놓라고 큰 소리를 쳐.”
 
167
“………”
 
168
“이왕, 마소라도 몇 바리 끌고 왔으면 그래도 만 냥 하나는 가져갔지.
 
169
요량이 그렇게 없고, 담보가 그렇게 적고서, 두목이 무슨 두목이란 말이냐.”
 
170
고개를 깊이 떨어뜨리고 묵묵히 섰던 도적 두목은, 별안간 손의 장검을 버리고, 접질리듯 끓어앉으면서
 
171
“크신 어른을 몰라뵈었읍니다. 살려주옵시요, 대왕마님.”
 
172
하고 비는 것이었다.
 
173
허생은 피식이 웃으면서
 
174
“실없은 사람이로곤, 내가 도적의 괴수드란 말인가, 대왕마님이란 어데 당한 소린고.”
 
175
“그럼 무어라고 불러 이쭈오.”
 
176
“나는 한낱 선비로세. 남들도 나를 허생원이라 부르니, 그렇게 부르면 그만이 아닌가.”
 
177
“그럼 그대로 불러 올리겠읍니다.”
 
178
도적 두목은, 그러고는 일변 마당의 졸개들을 돌아보면서
 
179
“다들 이 허생원님 앞으로 와 꿇어앉어라.”
 
180
하고 명령을 한다.
 
181
도적들은 처음부터 이 허생의, 저희들에게 대하는 점잖고도 침착한, 그러면서도 위엄있는 태도와, 겸해서 돈이 그렇듯 많은 데에 부지중 경복하는 마음이 나고 있던 터라, 두목의 영이 한번 있자, 그들은 아무 주저도 없이 일제히 허생의 앞으로 와 주욱 꿇어앉아 머리를 조읍는다.
 
182
허생은 한참이나 도적의 무리를 내려다보고 섰다가
 
183
“어째서 도적이 되었는고?”
 
184
하고 묻는다.
 
185
아무도 얼른 대답이 없더니, 이윽고 그중 늙수그레한 도적 하나가 고개를 들면서 대답을 한다.
 
186
“본시야 다 양민이올시다마는, 양민으로는 먹고 살 길이 없어 부득이 도적이 되었읍니다.”
 
187
허생이 만일, 때의 나라 형편과 민정을 짐작치 못하는 위인이었다면, 이 도적의 말도 흔히 도적들이 핑계삼아 입에 붙은 말로 하는 말이거니 하여 신용치 아니하였을는지도 몰랐다.
 
188
그러나 허생은 역시 허생답게 넓고 깊이 아는 바가 있었다.
 
189
이때의 조선의 나라 형편과 민정은 대강 어떠하였던가.
 
190
본조(本朝 : 李朝) 오백 년의 역사를 상고할 때에, 그 어느 시절이고 외적(外敵)의 침노가 없은 적이 드물고 내란이 일지 아니한 적이 드물었다.
 
191
조정에는 외척의 전황과 동서남북 파가 갈려 사색당쟁의 끊일 사이가 없고, 지방에서는 토호와 수령 방백의 토색질이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한 세월이 드물었다. 큰 도적이 생기어 여러 해씩 양민을 괴롭히는가 하면, 흉년이 들고, 흉년이 지나면 모진 병이 퍼져 사람을 무수히 죽게 하고,
 
192
이렇듯 안팎으로 국난과 재장이 연달다시피 한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던 시절이 어는 시절이더냐 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치른 선조대왕(宣祖大王) 중연으로부터 효종대왕(孝宗大王)에 이르는 범 칠십 년 동안일 것이었다.
 
193
선조 이십오년, 임진(壬辰) 사월에 왜병의 선봉 오만 명의 남쪽 부산포롤 침노를 하였고, 이것이 곧 임진왜란의 시초였다.
 
194
임진왜란은 전후 칠 년 동안을 끌었고, 우리 조선이 외적의 침노를 받은 큰 난리 가운데 나중의 병자호란(丙子胡亂)과 더불어 다시 없는 국난이었었다.
 
195
임진왜란 일곱 해 동안에 조선 팔도 방방곡곡이 왜병이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고, 왜병이 지나는 곳에 성곽과 백성의 살림이 짓밟혀 황폐되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성을 무너트리고 인가에 불을 지르고, 양식과 가축을 약탈하여 가고, 재물과 보화를 도적하여 가고, 부녀를 겁탈하고, 백성을 인질로 붙잡아 가고.
 
196
이 왜병이 짓밟고 지나간 뒤를 다시금 짓밟으면서 약탈과 행패를 함부로 한 것이 명아나 군사였다. 우리나라 조장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왜병을 물리칠 힘이 없으매, 명나라에다 청병을 하였었다. 명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준다기보다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영영 망하고 보면, 순망치한———— 입술이 상하면 이빨이 해를 보겠으므로, 겉으로는 우리나라를 돕는 체하고, 군사를 보내어 왜병과 대전을 하였다.
 
197
명나라 군사는 온 바램이 노상 없었던 바는 아니나 크게 신통한 것은 없었고, 차라리 그들의 약탈과 행패로 우리나라가 은근히 해를 입은 것이 더 컸었다.
 
198
왜병으로 하여금 이상 더 조선에 머물러 있어 약탈과 행패를 더 계속치 못하고 칠년 만이나마도 물러가게 한 것은 명나라 군사의 힘보다도 우리 이순신(李純信) 장군이 수전(水戰)에서 일본의 수군을 번번이 이겨 마침내는 적멸을 시킨 그 공이 더 컸었다.
 
199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만들어 수전에 쓰면서, 싸우는마다 일본의 수군을 무찔렀고, 필경은 전멸을 시켰으며, 일본은 수군이 전멸이 되니 본국으로부터 군사와 그 밖에 여러 가지를 조선에 와서 있는 군사에게 뒤댈 길이 없어 그만 스스로 물러가지 아니치 못한 것이었었다.
 
200
임진왜란을 칠년 동안 치르고 난 조선은 마치 죽을 병을 앓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 같았다.
 
201
장정들은 태반이 전장에 나가 죽었다. 왜병에게 사로잡혀 일본으로 간 사람도 많았다.
 
202
성은 무너지고 집들은 불에 탔다.
 
203
논밭은 황폐하고, 황폐한 땅을 갈자 하나 말과 소가 없었다. 먹을 곡식도 없고 입을 옷도 없었다.
 
204
이렇게 중병을 앓고 나서 비척거리는 사람같이 피골이 상접한 조선이, 그 다음에는 조정이 시끄란하였다. 광해주(光海主)의 난정(亂政)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그것이었다.
 
205
임진왜란을 치른 지 십 년 만에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주(光海主)가 위에 오르자, 전대부터 싹이 튼 궁내(宮內) 골육간의 갈등이 마침내 겉으로 퉁겨져 가지고 광해주는 필경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다.
 
206
어머니(母后)를 폐하여 내친다 하는 해거를 저질렀다. 이 틈을 타 조정에서는 사색 봉당의 당파 싸움이 뒤엄부러져 겯고트는 사품에, 나라의 정사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궁중과 조정이 어지러우며 방백수령과 토호들의 행악은 날로 심하였고, 그 폐를 입는 것은 애꿏은 백설들뿐이었다, 가뜩이 임진왜란이라는 중병을 치른 지 겨우 십여 년이요, 미처 기운도 추기 전에.
 
207
광해주 십오 년에 그동안 다른 당파의 득세로 힘을 쓰지 못하던 이서(李曙)·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의 서인(西人)이, 광해주가 골육의 형제를 죽이고 모후를 폐하여 내쳤다는 허물을 탈잡아 가지고 왕 광해주를 폐하고서, 선조대왕의 손자요 광해주의 조카되는 능양군(綾陽君)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것이 소위 인조반정(仁祖反正)이었다.
 
208
능양군으로 위에 오른 인조대왕은 총명한 임군이었다. 위에 오르면서 재주와 덕이 있는 선비를 널리 뽑아들여 나라의 정사를 맡게 하고, 또 팔도에 어사(御使)를 보내어 민정을 살피며 악정하는 수령 방백을 징계하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피폐한 국정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자취가 있었다.
 
209
그러나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하고 하자면, 한 임군의 총명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총명한 임군도 어진 신하와 좋은 시절을 만나야 하는 법인데, 인조대왕은 임금만 홀로 총명하였지, 좋은 시절도 어진 신하도 다 얻어 만나지 못한 불우한 임군이었다.
 
210
인조대왕은 큰 당파 가운데 하나인 서인(西人)들이 힘으로 왕위에 오른 임군이었다. 그러한만큼 조정에는 그 서인들이 판을 짜고 들어앉어서 권세를 부리었다. 이러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고 다른 당파에서는 갖은 책모를 부리고 죄 없는 사람을 참소하고 하였다.
 
211
무릇 당파들이 싸움을 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기 위하여 싸우면 나라와 백성은 그르쳐지고 괴로움을 당하고 할 따름이지 조금도 이로울 것은 없었다.
 
212
인조대왕이 즉위한 이 년 만에 유명한 이괄(李适)의 난리가 났다.
 
213
이괄은 인조반정에 큰 공이 있는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반정에 성공을 하여 공을 주는 마당에서는 이괄은 조그마한 벼슬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214
이괄은 그것을 매우 불평히 여기던 중에, 다시 자리가 떨어져 평안 병사로 내려가게 되자, 마침내 그는 반심을 품게까지 되었다.
 
215
편안 병사로 밀려내려간 이괄은, 겨울 동안 은밀히 군사를 조련하였다가 이듬해 정월에 군사 일만이천 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짓쳐 올라왔다. 임군의 옆에 간신들이 있어 나라의 정사를 그르치므로 그를 벤다는 것이었었다.
 
216
이괄은 미구에 도원수 장만(腸滿)의 관군과 싸우다 패하여 그의 수하에게 죽고, 그것으로 이괄의 난은 무사히 평정이 되었다.
 
217
이괄은 이군의 옆에 간신이 있어 나라와 정사를 어지럽히니 그를 벤다는 것이 군사를 일으킨 구호라고 하였으나, 실상은 찬역의 뜻이 없지 아니하였던 모양이었다. 이괄이 용상(龍床) 바라듯 한다는 속담은 이때에 생긴 말이었다.
 
218
이괄의 난이 있은 지 열두 해를 지나, 인조대왕 십사년 병자(丙子) 십이월에 병자호란이 났다.
 
219
이보다 앞서 인조대왕 오년 정묘(丁卯) 정월에 벌써 청(淸)나라 태종(太宗) 홍타시(洪多時)가 그의 종제 아민(阿敏)을 시켜 삼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쳐 황해도 평산(平山)까지 들어온 일이 있었다. 이때의 난리는 겨우 두어 달 남짓하였으나, 호병의 약탈과 행패가 어떻게도 흑심하였던지, 청천강(淸川江) 이북은 하마 쓱밭이 되다시피 하였다. 고을들이 황폐하고 백성의 자취가 끊이고 하였다. 그러고서 십 년 만에 다시 병자호란이 난 것이었었다.
 
220
병자호란은 호병이 병자년 십이월 구일 압록강을 건너던 발로부터 이듬해 정축년(丁丑) 정월 그믐날, 인조대왕이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 아래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던 날까지 오십 일 만에 끝이 났었다. 그러나 그 오십 일 동안에 조선이 받은 손해는, 실로 저 칠 년이나 끈 임진왜란 못지 아니하게 큰 것이었었다. 청병은 이른 곳마다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부녀를 능욕하고, 집을 불지르고, 양식과 의복과 육축을 빼앗고 하되, 그들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티검불 하나도 남기지 아니할 지경으로 약탈과 행악은 극심하였다.
 
221
이와같이 자주 이는 난리에 백성들은 마치 위태한 가지에 깃든 새와 같이 불안한 마음으로, 그래도 불탄 자리에 집을 엮고, 병마에 짓밟힌 따을 파 씨앗을 뿌리고 하였다.
 
222
울며불며 그래 논 보람도 없이 또다시 병란이 일기 아니면, 이태 삼년씩 흉년이 들고.
 
223
요행 풍년이 들어 넉넉히 먹을 것을 거두어 놓으면, 양반이라는 ‘관쓴 도적들’들이 노략질을 하여 가고.
 
224
때를 정하고 찾아오는 손님처럼, 모진 병은 몇해만큼씩 돌아, 송장을 쓸어내듯 하고.
 
225
백성들은 이렇게 오랜 도탄에 빠져 마음과 몸을 의탁할 곳이 없건만, 조정에서는 당파 싸움으로 세월만 보내고, 가다가는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함부로 하고.
 
226
마음이 불안하고 먹을 것이 없고 보면, 백성들로서 취하기에 가장 쉬운 두 길이 있으니, 도적과 걸인이 그것이었다.
 
227
이때의 조선 천지는 걸인과 도적으로 차다시피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오늘밤의 이 무리들도 따지고 보면 그렇듯 깊은 곡절이 있는 도적임에 틀림이 없었다.
 
228
그 늙은 도적으로부터
 
229
“본시야 다 양민이올시다마는, 양민으로는 먹고 살 길이 없어 도적이 되었읍니다.”
 
230
하는 대답을 듣는 허생은, 무연히 도적의 무리를 내려다보고 서서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만에야
 
231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가 있고 하다면, 그렇다면 도로 양민이 될 터란 말인가?”
 
232
하고 묻는다.
 
233
여러 입이 한꺼번에
 
234
“그야 일러 무얼 하겠읍니까.”
 
235
“그럴 수만 잇다면 작히 좋겠읍니까.”
 
236
“우리 같은 놈이 언제 그런 세상을 볼 날이 있을까.”
 
237
“나는 제발 한번만 그렇게 살아보다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구면.”
 
238
하면서 좋아들을 한다.
 
239
허생은 너의 생각은 어떠냐고 묻듯이, 도적의 두목을 돌려다본다.
 
240
도적의 두목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241
“전들 별다른 인간이겠읍니까. 저도 본시 농군으로 살 길이 없어 도적이 된 놈이올시다. 처음에는 혼자 다니다가 패가 하나씩 둘씩 늘어가는 동안에, 제가 힘꼴이나 쓴대서 제풀에 두목 노릇을 한 것이지, 달리 무슨 포재나 궁량이 있어서 취당을 한다, 두목질을 한다 한 것은 아니올습니다. 저도 도로 농군이 되기기 소원이올시다. 밝은 날을 피하여 밤으로 다니면서 남의 재물을 빼앗고, 가다오다 인명을 살상하고, 목숨은 언제 희광이(○首人)의 칼끝에 사라질지 모르고, 그런 이 화적질을 무엇이 즐겨 끝끝내 하자고 들겠습니까. 허생원님 말씀대로 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군으로 그보다 더 호강이 어데 있으며, 그보다 더한 것을 바랄 것이 무엇이겠읍니까.”
 
242
두목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허생은 여럿을 향하고 묻는다.
 
243
“다들 이 두목과 한뜻이겠는가?”
 
244
“네에.”
 
245
여럿이 일제히 대답을 한다.
 
246
“그렇다면! 아까 말을 한 대로 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가 있고, 그럴 뿐만 아니라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고, 저 혼자만 편안히 앉어서 남을 부려먹으려 드는 사람도 없고, 난리도 없고 이런 곳으로 여러 사람을 내가 데려다 줄 테니 따라오겠는가?”
 
247
“네에.”
 
248
여럿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누구는
 
249
“그런 별유천지가 있다면야 열 번도 더 갑지요.”
 
250
한다.
 
251
“그러면 여러 사람은 이 길로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거느리고 새 달 보름날까지 충청도 강경(江景) 장터로 모이시요. 홀애비는 마누라를 얻어가지고 오고, 총각은 장가를 들어 색시를 더리고 오시요.”
 
252
네 대답도 하고, 킥킥 웃는 소리도 나고 한다. 예서 강경장터가 몇리나 되는냐고 옆엣사람더러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느라고 좌중은 잠깐 웅성거린다.
 
253
조용하여지기를 기다려, 허생은 다시
 
254
“돈은 각기들 소용될 만치 가지고 가시요. 열 냥이 소용될 사람은 열 냥을, 백 냥이 소용될 사람은 백 냥을 가지고 가시요. 등으로 지고 가기에 무거운 사람은 말을 사서 싣고 가시요.”
 
255
허생의 말끝은 어느덧 하시요, 가시요 하고 공대로 변하였다.
 
256
“또, 여기 왔던 여러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많이들 더리고 오시요.”
 
257
“도적놈도 상관 없습니까?”
 
258
하나가 불쓱 그렇게 묻는 것을 허생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다른 하나가
 
259
“그 녀석, 저는 무척 양민인감.”
 
260
하여서 여럿은 한꺼번에 웃었다.
 
261
“물론 도적도 상관이 없고, 다 상관이 없소. 그러나 저는 편안하고 남이나 부려먹으려 드는 게으름뱅이나 찌부러진 양반 나부랑이는 데려오지 말도록 하시요.”
 
262
허생의 신칙이었다.
 
263
허생은 강선달을 시켜 술과 음실을 나오게 하여 여러 사람을 먹인 후에, 그들이 가지고 온 장기를 거두고, 각기 소용되는 돈을 주어 돌려보냈다.
 
264
돈은 태반이 열 냥씩 가지고 물러섰다.
 
265
바깥사랑에서 자고 있던 먹쇠가 그제서야 눈을 비비면서, 천둥에 개 뛰어들 듯 뛰어들어, 돈을 지고 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승강을 하려다가 허생에게 핀잔을 먹고 물러섰다.
【원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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