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박씨전 (朴氏傳) - 고대본 ◈
카탈로그   본문  
1
박씨전 (朴氏傳) - 고대본
 
 
2
명(明)나라 숭정 연간에 조선국(朝鮮國)에 한 재상(宰相)이 있으니, 성은 이(李)요 이름은 득춘(得春)이라.
 
3
이득춘은 어려서부터 학업을 힘써 문장(文章)을 성공하매 이름이 일국에 진동(振動)하고, 또한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는지라. 이러므로 소년등과(少年登科)하며, 차차 승천(陞遷)하여 외직(外職)으로 경상감사, 물망(物望)으로 함경감사, 내직(內職)으로 좌의정을 지냈다.
 
4
상공이 집으로 돌아와 그 아들 시백(時白)에게 문필(文筆)을 힘써 권하니,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시서백가(詩書百家)를 무불통달하며, 또한 계교(計巧)와 술법(術法)이 장안에 제일이라. 상공이 심히 사랑하니,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뉘 아니 치사(致辭)하리오.
 
5
상공이 또한 바둑․장기와 옥저(玉笛) 불기를 잘하는지라. 꽃을 향하여 불면 꽃이 다 떨어지며, 그 재주가 세상에 비길 데 없더라.
 
6
일일은 외당(外堂)에 홀로 앉았더니, 어떠한 사람이 갈건야복으로 찾거늘, 상공이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의 의복은 비록 남루(襤樓)하나 용모와 거동은 비범한 사람이더라. 급히 일어나 공손히 예(禮)하고 좌정(坐定)한 후에 성명을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7
“나는 금강산(金剛山)의 박처사(朴處士)입니다. 상공이 높으신 덕(德)을 듣고, 한 번 뵈옵기를 원하여 왔나이다.”
 
8
하거늘, 상공이 단정히 예좌(禮坐)하며 사례하기를
 
9
“존객(尊客)은 선관(仙官)이요, 나는 진세간(塵世間) 더러운 사람이라. 선범(仙凡)이 현수(懸殊)한데, 오늘날 말씀이 분수에 지나오니 도리어 황공하나이다.”
 
10
하고 주찬(酒饌)을 성비(盛備)하며 극진히 대접하니, 처사가 가로되
 
11
“듣사오니 상공께옵서 바둑두기와 옥저불기를 세상에 당할 이 없다 하오매, 나도 또한 조박(糟粕)이나 아는 고로 한 번 듣고자 왔나이다.”
 
12
하거늘, 상공이 공순히 답하기를
 
13
“나는 속세의 무지한 사람이라. 바둑과 옥저불기를 조금 안다 하오나 선관에 미칠 바 아니거늘, 오늘날 성문과장(聲聞誇張)의 말씀을 듣사오니 도리어 무안하여이다.”
 
14
처사가
 
15
“너무 겸사(謙辭) 마옵고, 재주를 구경하사이다.”
 
16
하니, 상공이 안마음에 헤아리되
 
17
‘내게 바둑과 옥저를 세상에 당할 이 없더니, 이제 이 사람을 보니 거동이 비범하고 또 바둑과 옥저를 안다 하니, 아무커나 재주를 시험하리라.’
 
18
하고, 바둑을 대하여 수삼차 두니, 상공은 정신을 과히 허비하나 처사는 유념(留念)치 아니하고 예사로 두되, 재주 월등하여 미칠 길이 없더라.
 
19
일변 탄복하며 일변 주찬으로 대접하고, 또한 옥저를 잡아 대하여 부니 과연 꽃이 떨어지더라. 처사가 크게 칭찬하고 옥저를 취하여 꽃나무를 향하여 부니, 소소리바람이 일어나며 꽃나무 뿌리째 빠지거늘, 상공이 보매 신기함을 이기지 못하여 백번 치사하며 속마음 그윽히 탄복하더라.
 
20
이러구러 여러 날 소일하다가, 하루는 처사가 상공께 청하기를
 
21
“듣사오니 귀댁에 귀남자(貴男子)가 있다 하오니, 잠깐 보기를 청하나이다.”
 
22
상공이 고히 여겨 그 아들 시백을 불러 처사에게 뵈이니, 처사 이윽히 보다가 칭찬하되
 
23
“이 아이 진실로 귀남자이라. 봉(鳳)의 머리요 용(龍)의 얼굴이라 반드시 재상을 하리로다.”
 
24
하고, 상공더러
 
25
“내 이곳에 옴은 다름 아니오나, 여식(女息) 하나 두었으되 나이가 이팔이요 재덕(才德)이 남에게 내리지 아니하되, 혼인은 천정(天定)이 아니면 이루지 못할 뿐 아니라, 두루 구하여 귀댁 공자(公子)만한 자가 없사오니, 허락하실까 하나이다.”
 
26
상공이 안마음에
 
27
‘이 사람의 거동이 비범하고 신기한 일이 많으니, 만일 자식을 이 사람의 사위를 삼으면 필연 좋은 일이 있으리라.’
 
28
하고 허락하기를,
 
29
“나는 속세의 더러운 사람인데, 선관의 높은 덕으로 이렇듯 하옵시니, 도리어 감당치 못할까 하나이다.”
 
30
처사가 웃으며,
 
31
“한미(寒微)한 사람의 말을 듣고 이렇듯 관후(寬厚)하시니, 그 덕을 어찌 치사치 아니리까.”
 
32
하고, 즉시 손금을 짚어
 
33
“아무 날이 가장 좋으니 그날로 행례(行禮)하시되, 신행(新行)하는 날에 상공이 상객(上客)이 되고, 절차를 찬란케 말고 부디 단촐케 하여 금강산으로 찾아오옵소서.”
 
34
즉시 하직(下直)하고 떠나니라.
 
35
상공이 처사를 이별하고 집안 사람과 친척을 모아 정혼(定婚)한 말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36
“혼인은 인륜대사(人倫大事)라. 경솔히 할 바가 아니요, 또한 하물며 장안 성중(城中)에 귀한 대신(大臣) 댁이 허다하며 어진 처자(處子)가 많거늘, 구태여 알지 못하는 산중(山中) 사람에게 허락하시며, 또한 문벌(門閥)도 모르옵고 이렇듯이 경솔한 일이 있사오리까?”
 
37
 
38
“퇴혼(退婚)하시오.”
 
39
하고, 혹
 
40
“상공의 의향(意向)대로 하소.”
 
41
하며 시비(是非)가 분분하거늘, 상공이 웃으며
 
42
“사람의 혼인은 인력으로 못할 바요, 또한 그 사람을 보니 범인과 달라 우연한 일이 아니매, 이것이 다 천정이라. 내 또한 허락 하였으니 어찌 고치겠소. 이제는 내 의향대로 할 것이니 다른 의논 하지 마시오.”
 
43
하더라.
 
44
일변 신행 절차(節次)를 차리더니, 상공이
 
45
“처사의 집은 본 사람이 없고, 또한 금강산이 길이 머니 미리 가야겠다.”
 
46
하고, 행장(行裝)을 단속하며 하인을 단촐케 하여 시백을 데리고 길을 떠나리라.
 
47
여러 날 만에 금강산에 다다르니, 아무데도 갈 줄을 모르더라. 첩첩한 산중에 희미한 길을 찾아 점점 들어가니, 길이 끊어지고 또한 석양이 재를 넘으매 어찌 할 길이 없어 여각(旅閣)에 나와 자니라. 이튿날 다른 길을 찾아 점점 들어가니, 천봉만학(千峯萬壑) 높은 곳에 백운이 유유(悠悠)하고, 층암절벽(層岩絶壁) 험한 길에 계수(溪水)는 잔잔하여 경개절승한지라. 구경하며 차차 들어가 반일(半日)이 지나되 사람 하나 보지 못하여 정히 민망하던 차, 초군(樵軍) 수삼인이 마주 나오거늘, 반겨 묻기를
 
48
“박처사댁을 아는가?”
 
49
대답하되,
 
50
“우리는 박처사 마을의 사람이옵거니와, 어떠한 행차(行次)관대 이 깊은 곳에 와 박처사를 묻나이까?”
 
51
상공이 반겨하며,
 
52
“나의 심사(心思)를 묻지 말고, 박처사댁만 가르치라.”
 
53
초군이 웃으며,
 
54
“우리는 박처사를 모르옵고, 박처사 살던 골이 있으되 옛 노인(老人)이 차차 전하기로 말만 들었을 뿐이외다.”
 
55
상공이 이 말을 들으매 어이없이 생각되어,
 
56
‘박처사는 일정 허망한 사람이 아닌즉, 산중에 분명히 있으련마는…….’
 
57
산이 높고 골은 깊은데, 이리저리 배회할 제 서산에 해가 지고, 잘새는 날아들며 원숭이 슬피 울고 두견(杜鵑)은 불여귀(不如歸)를 읊으니, 객회(客懷)에 슬픈 간장 처량한지라. 마지 못하여 도로 객점(客店)에 나와 자고, 이튿날 도로 찾아간들 속객(俗客)이 어찌 선경(仙境)을 알아 찾으리오.
 
58
이리하기를 사오 일 하매, 시백이 부친께 여쭈되
 
59
“아버님이 당초에 허망(虛妄)한 사람의 말을 듣고 이렇듯 낭패하오니, 누굴 원망하오리까. 다만 남이 부끄럽고 우세함을 염려하나이다.”
 
60
상공이 그 말을 옳게 여기되, 일변 생각하니 박처사는 분명 사람 속일 사람이 아니라. 시백더러,
 
61
“내일은 당초 언약(言約)한 날이라. 내일을 보아 진퇴(進退)를 정하리라.”
 
62
하더라.
 
63
이튿날 다시 행장을 차려 산골짜기 깊은 길로 점점 들어가니, 한 사람이 청려장을 짚고 갈건야복으로 풀을 헤치며 나오거늘, 반겨 바삐 보니 과연 박처사라. 급히 맑게 예하고 여러 날 찾음을 말하니, 처사 웃으며,
 
64
“신자라, 상공이 여러 날 근고(勤苦)하시도다.”
 
65
하고 길을 인도하여 찾아 들어가니, 금강산 제일봉의 층암절벽은 좌우에 병풍되고, 청송녹죽(靑松綠竹)은 울밀한데, 기화요초(琪花瑤草)는 향기 가득하고 난봉(難捧)․공작(孔雀)이 넘노는데, 그 가운데 초옥(草屋) 수간이 있으되, 문 앞에 양류(楊柳) 있고, 그 밑에 연못파 연화가 만발하고, 백구(白鷗)는 점점(點點) 범범하여 속객을 보고 놀라는 듯.
 
66
문 앞에 이르니, 처사가 상공더러,
 
67
“내 집이 본디 누추(陋醜)하고 협착(狹窄)하여 주접(住接)할 곳이 없사오니, 이곳에서 머무옵소서.”
 
68
하고, 문 앞 반석(磐石) 위에 앉히며,
 
69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어서 행례(行禮)하사이다.”
 
70
신랑을 재촉하여 대례차(大禮次)로 세우고 들어가더니, 이윽고 처사 신부를 단장하여 내시어 대례를 지낸 후에, 신랑을 큰 방으로 인도하고 신부는 협방(夾房)으로 들어가며, 상객(上客)과 하인 등은 그 반석 위에 앉았더라.
 
71
이윽하여 처사가 한 손에 술병 들고, 또 한 손에 작은 소반에 두어 가지 채소를 놓고 나오며, 웃어 가로되
 
72
“산중에 별미(別味) 없사와 대접이 이러하오니 허물치 마옵소서.”
 
73
하니, 상공은 공순히 대답하며 좋게 여기나, 하인들은 비소(鼻笑)하더라. 처사가 친히 술을 부어 상공께 한 잔을 권하고, 하인들도 각각 한 잔씩 권하더라. 그 술이 심히 취하여 더 먹지 못하고 상객과 하인이 다 취하여 잠깐 졸더니, 술이 깨어 일어나 보니, 이미 밤이 다하고 동령(東嶺)에 해가 오르니, 일행이 다 꿈 깬 듯 서로 보며 이상히 여기더라.
 
74
이윽고 조반을 재촉하여 들이니, 대소반에 두어 가지 채소가 정결할 뿐이더라.
 
75
처사가,
 
76
“어제 송화주 한 잔에 그다지 과히 취하셨으니, 오늘은 행역(行役)에 상할까 하여 다시 권치 못하나이다.”
 
77
하고, 조반을 파한 후에
 
78
“이렇듯 먼 길에 후일 기약하기 도리어 폐단(弊端)이라. 오늘 상공이 아주 데리고 가옵소서.”
 
79
하고, 신랑은 보행으로 행하고 신부는 신랑이 탔던 말을 태워 치행(治行)하더라. 처사는 문전 십여 보에 나와 상공을 이별하고 후일 다시 봄을 기약하더라.
 
80
상공이 신부를 데리고 길을 떠나, 날이 저물매 여관에 들어가, 신랑과 신부를 데리고 한 방에 들어가니, 신부 무릎깨를 벗고 앉을새, 그 용모를 보니 형용이 흉칙하여 보기가 염려로운지라. 얽기는 고석(古石) 같고, 붉은 중에, 입과 코가 한 데 닿고, 눈은 달팽이 구멍같고 치불거지고, 입은 크기가 두 주먹을 넣어도 오히려 넉넉하며, 이마는 메뚜기 이마 같고, 머리털은 짧고 심히 부하니, 그 형용을 차마 보지 못하겠더라. 상공과 신랑이 한 번 보매, 다시 볼 수 없어 간담이 떨어지는 듯하고 정신이 없어 두 눈이 어두운지라. 상공이 겨우 정신을 차려, 다시금 생각하되,
 
81
‘사람이 이같이 추비하니 응당 규중에서 늙힐지언정 남의 집에 출가치는 아니할 터이로되, 구태여 나를 보고 허혼하였으니, 이 사람이 필연 아는 일이 있을 터이요, 또한 인물은 이러하나 이 또한 인생이라. 만일 내가 박대하면 더욱 천지간 버린 사람이 될 것이니, 아무커나 내가 중히 여겨야 복이 되리라.’
 
82
하고, 시백더러
 
83
“오늘날 신부를 보니 내 집이 복이 많고, 네 몸에 무궁한 경사(慶事)가 있을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84
하고, 행로에 참참이 신부의 마음을 편케 하며 음식도 각검하더라. 여러 날 만에 집에 들어올새, 일가 친척이며 장안 대신댁 부인들이 신부 구경하러 많이 모였는지라.
 
85
그러구러 신부 들어와 무릎깨를 벗고 중당에 앉으니, 그 형용이 어떻다 하리오. 한 번 보매 침 뱉으며 비소하고 수군수군하다가 일시에 물결같이 헤어지나, 상공은 희색이 만면하여 외당(外堂)에 앉아 손님을 대하여 신부의 덕행(德行)을 자랑하더라.
 
86
상공의 부인이 상공더러,
 
87
“대감께서 한낱 자식을 두어, 허다한 장안규수(長安閨秀)를 다 버리고 허망한 산중 사람의 말을 들어 자식의 일생을 그르치니, 남도 부끄럽고 집안도 낭패할지라. 다시 생각하시어 도로 보내고, 다른 가문에 구혼하여 어진 며느리를 얻으면 어떠하오리까?”
 
88
상공이 대로(大怒)하여 부인을 나무라며,
 
89
“사람이 아무리 절색(絶色)이라도 행실(行實)이 없으면 사람이 공경하지 아니하나니, 이러므로 전하는 말이 ‘양귀비 절색이로되 나라를 망쳤다’하니, 오늘날 신부는 내집의 복이라. 어찌 색만 취하고 덕을 모르시오. 또 우리 부부 만일 불안히 여기면, 자식과 집안을 어떻게 조섭(調攝)하겠소. 이제는 내 집에 빛날 때를 당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오. 이런 말을 다시 내지 말고, 부디 십분 잘 섬기소서.”
 
90
부인이 어찌 사랑하며, 또한 범인이라 그 어찌 소견(所見)이 넉넉하리오.
 
91
이러므로 부인이 미워하고, 시백이 또한 내방(內房)에 거처를 전폐하니, 비복(婢僕)들도 박씨(朴氏)를 또한 박대하더라. 박씨는 독부가 되어 슬픔을 머금고, 매일 밥만 먹고 잠만 자며 매사를 전페하니, 일가가 더욱 미워하며 꾸지람이 집안에 가득하되, 다만 상공을 꺼려 면박(面駁)을 못하는지라.
 
92
상공이 이 기미를 알고, 노복(奴僕)을 꾸짖어 각별 조섭하며 극히 엄하더라.
 
93
또한 시백을 불러 꾸짖기를,
 
94
“대범한 사람이 덕을 모르고 색만 취하면 신상에 복이 없고 집안이 망하니, 네 이제 아내를 얼굴이 곱지 않다 하여 구박하니, 범절(凡節)이 이러하고 어찌 수신제가(修身齊家)하리오. 옛날 제갈양의 처 황씨(黃氏)는 인물이 비록 추비(麤鄙)하나 덕행이 어질고 천지조화(天地造化) 무궁한지라. 이러므로 공명이 화락(和樂)하여 어려운 일을 의논하여 만고에 어진 이름을 유전(遺傳)하였으니, 네 처는 신선(神仙)의 딸이요 덕행이 있으며, 또한 ‘조강지처는 불하당이라’하였으니, 무죄하고 덕있는 사람을 어찌 박대하리오. ‘비록 금수(禽獸)라도 부모 사랑하시면 자식이 또한 사랑한다’하니, 하물며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네 만일 일양(一樣) 박대하면 이는 나를 박대함이라.”
 
95
하니, 시백이 뜰에 내려 사죄하기를,
 
96
“불효하는 자식이 부모의 명을 겨역하였사오니 죄사무석(罪死無惜)이로소이다.”
 
97
하고 물러나오더라.
 
98
그날 밤부터 내방에 들어 거처하려 들어가면, 박씨의 얼굴을 보매 문득 추비한 마음에 과연 동침(同寢)할 뜻이 없어, 한편 구석에 등돌아 앉았다가 나와 다른 방에서 자고, 계명(鷄鳴) 후면 부친 계신 데 문안하니, 상공은 연고를 모르고 내방에 거처하는 양으로 알아 기뻐하더라.
 
99
그러구러 시배의 모부인(母夫人)이 며느리 멀미를 내어, 시비(侍婢)를 불러,
 
100
“밥을 적게 주라.”
 
101
하고 미워하니, 박씨가 아무리 덕이 있은들 어찌 하리오. 견디지 못하여 시비 계화(桂花)로 하여금,
 
102
“할 말씀 있사오니 상공께 여쭈어라.”
 
103
하니, 계화가 상공께 아뢰자, 상공이 즉시 계화를 따라 며느리 있는 방에 들어가더라. 박씨가 추연히 한숨 쉬고 단정히 여쭈되,
 
104
“미부(微婦) 얼굴이 추비하고 덕행이 없어 군자(君子)에게 뜻을 얻지 못하오니, 후원(後苑)에 협실을 창건하여 주옵시어, 일신을 감추어 거처케 하옵소서.”
 
105
상공이 그 형상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개연탄식(慨然歎息)하며,
 
106
“자식이 불초(不肖)하여 아비 말을 듣지 아니하니, 이는 다 나의 훈계치 못함이라. 다시 녀석을 경계할 것이니 안심하여 이후를 보거라.”
 
107
하니, 박씨가 그 말씀에 감격하여 다시 여쭈되
 
108
“아버님 분부 지극하옵거니와, 이는 저의 불민(不敏)함이라 어찌 군자를 원망하오리까. 황공하오되 미부의 말씀대로 후원에 협실을 지어 주옵소서.”
 
109
상공이 마지 못하여,
 
110
“내 종차(從次) 생각하여 하리라.”
 
111
하고 나와, 시백을 불러 크게 꾸짖기를,
 
112
“네 일양 아비 말 듣지 아니하고 덕있는 사람을 거절하고 미색만 원하니, 이러하고 내두(來頭)를 어찌 하리오, 또한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신하(臣下)를 생각하고, 집안이 요란하면 어진 처를 생각한다.’하니, 네 일정 복을 물리치고 화를 구하는도다. 만일 그리하다가는 네 처가 독수공방(獨守空房)에 독한 마음을 두어 슬픔을 품고 죽으면, 집안은 망하고 또한 조정시비(朝廷是非) 있을 뿐 아니라 벼슬을 파직(罷職)당할 것이니, 너는 어떠한 놈으로 미색만 생각하고 덕을 배반하느냐?”
 
113
시백이 복지대죄(伏地待罪)하고, 물러와 생각하되
 
114
‘일후는 다시 그리 아니하리라.’
 
115
하고 아내 있는 방문에 들어가면, 자연 마음이 싫고 눈이 감겨, 아무리 하여도 동침하고 화락하기 어려운지라.
 
116
상공이 이 기미를 알고 홀로 자탄(自歎)하기를,
 
117
“인제는 내 집이 망할 것이로다.”
 
118
하고, 후원에 협식 수삼 간을 정쇄(精灑)히 지어, 시비 계화를 안동하여 각기 살림을 배설하여 주니, 그 경상이 참혹하더라.
 
119
각설(却說). 이때 나라에서 상공을 우의정(右議政)으로 패초하시니, 밤을 지내면 조회입시(朝會入侍)할지라.
 
120
상공이 전지(傳旨)를 받들고, 부인더러
 
121
“내일 조회에 조복(朝服)을 입고 입시하겠소.”
 
122
하니 부인이
 
123
“바느질 잘하는 사람을 많이 얻어 하리다.”
 
124
하고, 장안 일등침재(一等針才)를 많이 청하여 지으려 할 차에, 박씨가 이 말을 듣고 계화로 하여금
 
125
“조복감을 가져오라.”
 
126
한다. 계화 이 말씀을 상공과 부인께 전하니, 부인은 외면하고 상공은 기꺼 하며
 
127
“분명 이 사람이 특별한 재주 있으리라.”
 
128
하고 조복감과 일등침재를 며느리에게 보내더라.
 
129
박씨 촛불을 밝히고 바늘을 잡아 조복을 지을새, 제일침재 선수들이 보니 기묘한 수품(手品)이라 다른 사람은 가리어 침재를 삼지 못할러라.
 
130
하룻밤 사이에 조복을 짓되, 앞에는 봉황(鳳凰)을 새기고 뒤에는 청학(靑鶴)을 수놓았으되, 침선(針線)함이 흠잡을 곳 없어 인간수품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뉘 아니 칭찬하리오. 계화로 하여금 상공께 드리니, 상공이 보고
 
131
“이는 천상수품(天上手品)이요 인간수침(人間繡針)은 아니라.”
 
132
하더라. 내외 상하와 일등침재들이 보매 평생에 보던 바 처음이라. 모두 조복을 보고,
 
133
“박씨를 보면 아무라도 이런 재주가 있음을 생각지 못할러라.”
 
134
하며 말하되,
 
135
“헝겊 주머니에 의송 들고 초막집에 의장(衣欌) 들었다 하는 말이 이를 두고 이른 말이구나.”
 
136
상공이 조복을 입고 숙배(肅拜)하니, 상(上)이 이윽히 보시다가
 
137
“경(卿)의 조복은 누가 지었느뇨?”
 
138
상공이 복지주왈(伏地奏曰),
 
139
“신(臣)의 며느리가 지었나이다.”
 
140
상이 가라사대,
 
141
“그러하면 경은 어찌 며느리를 두고 일생을 고초를 시키며, 독수공방케 하시오?”
 
142
우의정이 말씀을 들으매, 한출첨배하여 복지주왈
 
143
“전하(殿下)께옵서 어찌 그러함을 통촉(洞燭)하시나이까?”
 
144
상왈(上曰),
 
145
“경의 조복을 보니, 앞에 수놓은 봉황은 황(凰)이 봉(鳳)을 여읨이요, 뒤에 수놓은 청학은 백설(白雪)이 산하(山河)에 가득하여 주린 기색이니, 이 어찌한 연고요?”
 
146
우상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147
“신의 며느리가 얼굴이 추비하와 불초한 자식이 실락(室樂)을 잃어 공방을 면치 못하나이다.”
 
148
상이 가라사대,
 
149
“부부간 실락이 없으면 공붕독수 예사려니와, 일생에 기한(飢寒)을 면치 못하기는 어찌한 연고요?”
 
150
우상이 황공하여,
 
151
“소신(小臣)은 외당에 있어 내중 일은 과연 모르나이다.”
 
152
하니, 상왈
 
153
“경의 며느리 얼굴은 보지 못하였으나, 조복 지은 수품을 보니 인간 재주가 아니라. 그 수품을 보건대 그 사람의 여일(如一)함을 알지라. 부디 박대치 말고 후대하시오. 짐(朕)이 박씨를 위하여 매일 서 말 녹(祿)을 제수하나니, 부디 후대하여 각별 조심하시오.”
 
154
승상이 돈수수명하고 집에 나와, 부인과 시백을 불러 전교(傳敎) 사연과 서 말 제수하신 말씀을 숙사(熟思)하고, 시백을 꾸짖기를
 
155
“내 전일(前日)부터 덕있는 사람 박대치 말라 하였더니, 오늘날 전교하시니, 너는 어떠한 놈으로 이같이 불초하냐?”
 
156
하니 송구하여 엎드려 다음에 개과(改過)할 것을 아뢰니, 상공이 다시 조용히 훈계하시며 각별 조심함을 당부하더라.
 
157
이날부터 나라에서 사급(賜給)하신 쌀 서말을 삼시에 한 말씩 지어주니, 박씨 조금도 사양치 아니하고 다 먹되 오히려 부족한 듯 하니, 그 소량과 식량이 하해 같더라. 그 후로는 집안사람이 감히 박대치 못하고, 승상은 더욱 경대(敬待)하더라.
 
158
박씨 계화를 통해 승상께 여쭈오되,
 
159
“아뢸 말씀이 있나이다.”
 
160
하는지라. 상공이 급히 들어가니 박씨 여쭈되
 
161
“가산(家産)이 넉넉지 못하오니, 성재(成財)할 도리를 하옴이 좋을 듯하오이다.”
 
162
하니, 승상이 가로되
 
163
“빈부(貧富)도 또한 수(數)라, 어찌 인력으로 되겠느냐.”
 
164
박씨가
 
165
“내일 종로(鐘路)에 제주(濟州)말이 많이 왔을 것이오니, 노복을 명하옵시어 계마(繫馬) 중 패려하고 비루먹은 망아지를 300냥을 주고 사오라 하옵소서.”
 
166
우상이 이미 그 신기함을 아는지라, 어찌 듣지 아니하리오. 급히 외당에 나와 노복을 불러 300냥을 주며 이리이리 하라 하시니, 비복들이 서로 말하되
 
167
“대감께서 제주말이 온 줄을 어찌 알으시며, 또 그 중에 패려하고 비루먹은 망아지를 300냥을 주고 사오라 하시니, 아무커나 가봐야겠다.”
 
168
하고 300냥을 가지고 가보니, 과연 말이 많이 왔으되, 그 중에 비루 먹은 망아지가 있더라. 비복들이 망아지 값을 물으니, 마주(馬主)가
 
169
“값이 닷 냥이오.”
 
170
하거늘, 노복이
 
171
“우리 대감께옵서 작은 망아지를 사오라 하시며 300냥을 주었노라.”
 
172
하니, 마주가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173
“값이 닷 냥이 차지 못한 말을 300냥이란 말은 어쩐 연고요?”
 
174
하고 굳이 사양하거늘, 종로 사람들도 다 웃으며
 
175
“마주가 안 받는 돈을 어찌 위력(威力)으로 줄까.”
 
176
하는지라. 노복들이 도리어 무안하여, 100냥만 주고 200냥은 감추어 대감 전에 아뢰니, 대감이 며느리에게 들어가 망아지 사온 말을 전하니, 박씨가
 
177
“그 말값이 300냥이온데 100냥만 주었사오니, 남은 돈을 마저 찾아 마주를 주옵소서.”
 
178
우상이 그 말을 들으매 어이없어 즉시 외당에 나와 노복을 엄문(嚴問)하니, 과연 200냥은 아니 주었거늘, 노복을 꾸짖어 300냥을 충수(充數)하여 주고,
 
179
“망아지를 한 끼 쌀 서 되, 보리 서 되, 참깨 서 되씩 먹여 잘 기르라.”
 
180
하더라.
 
181
시백이 부친의 말씀과 전교 있으매, 박대할 마음이 없어 내방에 들어간즉, 자연 얼굴이 보기 싫으면 외면하고 등돌아 앉았다가 나오니라.
 
182
이때 박씨가 계화(桂花)를 시켜 후원 협실 사방에다 나무를 심되, 동방에는 청토(靑土)요, 남방에는 적토(赤土)요, 서방에는 백토(白土)요, 북방에는 흑토(黑土)요, 중앙에는 황토(黃土)요, 나무 나무 북돋아 때때로 물을 주어 무슨 형용같이 기르더니, 그 나무 무성하였는지라.
 
183
일일은 승상이 계화더러 묻기를,
 
184
“이사이는 너의 아씨 무슨 일을 하느냐?”
 
185
“나무를 심으시고, 소비(小婢)는 물주기에 골몰하나이다.”
 
186
승상이 구경코자 계화를 따라 후원 협실에 들어가니, 과연 나무를 심어 무성하였는데, 그 나무가 사면에 뻗어 용과 범이 수미(首尾)를 응하였고, 가지와 잎은 뱀과 각색 짐승이 되어 서로 응하여 보기 엄숙하고 운무(雲霧) 자욱한 듯하여, 오래 서서 이윽히 보니 그 가운데 풍운조화(風雲造化)가 있어 변화무궁한지라. 또한 협방을 보니 문 위에 현판(懸板)을 붙였으되, 호왈(號曰) ‘피화당(避禍堂)’이라 하였거늘, 우상이 박씨를 보고
 
187
“저 나무는 무엇이며, 피화당이란 말은 어찌한 말이냐?”
 
188
박씨가,
 
189
“길흉화복(吉凶禍福)은 세상에 떳떳한 일이요, 이후 불행한 때를 만나면 저 나무로 화를 면하올 터이옵기로 당호(堂號)를 피화당이라 하였나이다.”
 
190
우상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의심내어 길흉을 물으니, 박씨가
 
191
“황송하오나 묻지 마옵소서. 그 때를 당하오면 자연 알으시리이다. 천기(天璣)를 누설치 못하나이다.”
 
192
우상이 그 신기함을 탄복하고, 애연(哀然) 탄식하며,
 
193
“슬프다, 너는 진실로 영웅호걸(英雄豪傑)이라. 남자로 되었던들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나는 남의 아비가 되어 한낱 자식을 불초케 두었다가, 너같은 사람을 박대하니 나의 나이 이미 육십이라. 곧 나 죽으면 너같이 어진 사람이 목숨을 보전치 못하렷다.”
 
194
박씨 흔연(欣然)히 위로 왈,
 
195
“저의 위인이 부족하옵고 팔자 기험(崎險)하오니 어찌 군자를 원망하오리까. 군자가 어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어진 가문에 다시 취처(娶妻)하여 유자(有子)하여 만대에 유전하오면, 천첩(賤妾)같은 인생은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
 
196
우상이 듣고 며느리의 어짊에 탄복하여 애연낙루하며, 나와서 시백을 불러 꾸짖기를
 
197
“너는 내 말을 일양 듣지 아니하고 덕있는 사람을 구박하니, 장차 내 집이 망하리로다.”
 
198
이때 종로에서 사온 망아지를 3년을 기르니, 한 호말마 되었는지라. 용의 몸에 범의 머리요, 걸음은 추천(秋天)의 구름같더라.
 
199
박씨가 상공께 여쭈되,
 
200
“모월 모일(某月某日) 되면 중국(中國)에서 칙사가 나올 것이니, 그 때 이 말을 새문 밖 영은문(迎恩門)에 매어두면, 칙사가 보고 당장에 사자하며 말값을 물을 것이니, 호가(呼價)를 3만 냥이라 하옵소서.”
 
201
승상이 그 신기함을 아나, 말값이 너무 과함을 염려하니, 박씨가
 
202
“이 말은 보통 말이 아니오라 범용(凡庸)에 비하지 못하게 되었삽고, 조선 지방은 불과 수천리요 대국(大國)은 지방이 수만리오니, 중국에서밖에 쓸 곳 없사오니, 값은 다소하고 쓸 터이오니, 가문(價文)이 3만 금은 적으니이다.”
 
203
우상이 탄복하고 기다리더라.
 
204
과연 그 때를 당하매 칙사 오는 패문(牌文)이 있거늘,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다 영은문에 대후(待候)하더라. 우상이 또한 노복을 명하여,
 
205
“말을 영은문에 매어두라.”
 
206
하니라. 과연 칙사가 영은문에 당도하여, 그 말을 보고 놀라 말임자를 찾거늘, 우상의 노복이 땅에 엎드리니, 칙사가
 
207
“말을 팔려느냐?”
 
208
하니, 노복이
 
209
“팔려 하오나 임자 없어 팔지 못하였나이다.”
 
210
칙사가 또 묻기를
 
211
“팔려 하면 값이 얼마나 하느뇨?”
 
212
노복이
 
213
“3만 냥이로소이다.”
 
214
칙사가
 
215
“말을 본즉 3만 냥이 오히려 적은지라.”
 
216
장안에 들어와 3만 냥을 주니, 우상이 며느리를 칭사(稱辭)하고 신기함에 탄복하더라.
 
217
이때에 국운(國運)이 태평하여 인재(人材)를 보려 하시고 과거(科擧)를 뵈이시더라.
 
218
이때 박씨 한 꿈을 얻으니, 연못 가운데로부터 청룡(靑龍)을 물고 박씨 있는 방으로 들어와 뵈거늘, 박씨가 꿈을 깨어 괴이히 여겨 연못가에 가보니, 전에 못 보던 연적이 놓였는지라. 가져다 계화를 시켜 서방님께 잠깐 들어오심을 청하니, 시백이 계화를 꾸짖으며,
 
219
“장부의 과거길에 요망한 계집이 무슨 일로 청하느냐?”
 
220
호령이 추상(秋霜) 같거늘, 계화가 이대로 여쭈니, 박씨가 탄식하고 연적을 내어
 
221
“장중(場中)에 쓰시라고 해라.”
 
222
하는지라. 시백이 받아 가지고 장중에 들어가 글제를 보고, 연적을 기울여 먹을 갈아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선장하였더니, 이윽고 전두관(銓頭官)이 호명(呼名)하기를
 
223
“금반 장원급제(壯元及第)는 이시백이라.”
 
224
부르는 소리가 장안에 진동하는지라. 시백이 들어가 탑전에 숙배하니, 상이 칭찬하시고 어주(御酒)를 주시더라.
 
225
시백이 어사화(御史花)를 꽂고 청홍개(靑紅蓋)를 앞세우고, 화동(花童)을 쌍쌍이 세우고, 갖은 풍류(風流)로 장안 대로에 언연(偃然)히 나오니, 이때는 삼촌 호시절(三春好時節)이라. 만화방창(萬化方暢)하여 경개절승(景槪絶勝)한데, 소년급제(少年及第) 얼굴이 옥 같아서 천상선관(天上仙官) 같은지라 뉘 아니 칭찬하며, 장안 인민이 다투어 구경하며 치하가 분분하더라.
 
226
슬프다, 박씨는 피화당 깊은 곳에 홀로 앉아 수심으로 지내는지라. 시비 계화가 그 거동을 슬퍼하며 위로하니, 박씨가
 
227
“사람의 팔자는 길흉화복이 다 천정(天定)이라. 이러므로 탕(湯)임금이 하걸(夏傑)에게 갇힘을 당하고, 문왕(文王)도 유리옥에 갇혔으며, 공자(孔子)같은 성인도 진채에서 욕을 보셨으니, 하물며 나같은 사람이 무슨 한이 있겠느냐.”
 
228
계화가 그 말을 듣고 내심에 혹 좋은 일이 있을까 저으기 바라더라.
 
229
일일은 박씨가 상공께 여쭈되,
 
230
“미부 출가(出家)하온 지 3년이나 친가(親家) 소식을 듣지 못하였사오니, 잠깐 다녀옴을 청하나이다.”
 
231
상공이
 
232
“네 말이 당연(當然)하나, 금강산 길이 머니 여자 행색(行色)이 첩첩 험로(險路)에 극히 어렵겠다.”
 
233
박씨가
 
234
“행장 차릴 것도 없삽고, 이틀 말미만 주옵시면 다녀오리이다.”
 
235
승상이 고이히 여기나, 그 신기한 일을 사람이 본받기 어려운지라 허락하며, 부디 수이 다녀옴을 당부하더라.
 
236
박씨 이튿날 계명 후 승상 전에 하직(下直)하고, 문 밖에 나서 두어 걸음에 간 곳을 모를러라.
 
237
과연 이튿날 박씨가 은연히 들어와 다녀온 말씀을 고하니, 우상이 가중평부(家中平否)와 처사의 하는 일을 묻더라. 박씨가,
 
238
“집안은 무사하옵고, 친정 아버님은 아무날에 오마 하더이다.”
 
239
우상이 기뻐하여 주찬(酒饌)을 많이 장만하고 기다리더라.
 
240
그날이 당하매, 우상이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외당을 소쇄하여 기다리더니, 홀연 옥저소리 차차 가까와오며 채운(彩雲)이 영롱하더니, 처사가 백학(白鶴)을 타고 공중으로부터 내려와 당에 오르는지라. 우상이 반기어 맞아 예하며, 여러 해 그러던 회포를 말씀하다가, 우상이
 
241
“내 팔자 무상(無常)하와 한낱 자식을 두었더니 덕있는 며느리에게 일생 슬픔을 끼치니, 이는 다 나의 불민한 탓이라. 사장(査丈)을 대하여 죄 많사와 부끄럼을 어찌 형언하오리까.”
 
242
처사가 ,
 
243
“자식의 인물이 추비하고 또한 팔자라. 이렇듯 험한 인생이 사장의 덕택으로 이때껏 기탁하였사오니 은혜 감격하옵니다. 내 도리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나이다.”
 
244
주찬을 내어 서로 권하며, 바둑과 옥저를 대하여 즐기더라.
 
245
일일은 처사가 그 딸을 불러,
 
246
“네 이제는 액운(厄運)이 진(盡)하였으니 허물을 고치라.”
 
247
하니, 박씨가 대답하고 피화당으로 들어가니, 시아버지도 그 말을 알지 못하고 고이히 여기더라.
 
248
처사 닷새를 유(留)한 후에 하직을 고하니, 승상이 간곡히 만류하되, 처사가 듣지 아니하는지라. 우상이
 
249
“이제 가시면 어느 때 다시 뵈오리까?”
 
250
“운산(雲山)이 첩첩하고 약수(弱水)가 묘연하니 다시 보기 어렵도다. 인간회환(人間回還)이 정한 수(數)가 있느니 어찌합니까? 부디 백세무양(百歲無恙)하시옵소서.”
 
251
하니, 우상이 애연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별하는 정이 자못 결연(缺然)하되, 며느리는 그 부친을 하직하며 조금도 서러워함이 없더라.
 
252
이윽고 공중에서 구름이 영롱하며, 처사가 당에서 내려 솟아 공중으로 향하더니, 다만 옥저소리만 들리고 간 곳을 알지 못하겠더라.
 
253
이날 밤에 박씨가 목욕하고 뜰에 내려서 하늘을 향하여 축수(祝手)하고 방에 들어가 자더라. 이튿날 평명(平明)에 일어나 계화를 불러,
 
254
“내 간밤에 허물을 벗었으니, 대감께 여쭈어 옥함(玉函)을 짜 주옵소서 하라.”
 
255
할 제, 계화가 보니 추비한 아씨가 허물을 벗고 옥같은 얼굴이며 달같은 태도 사람을 놀래며 향기가 방안에 가득한지라. 계화가 도리어 정신을 진정하여, 보고 또다시 보니 그 아름답고 고운 태도는 옛날 서시(西施)와 양귀비(楊貴妃)라도 미치지 못하겠더라.
 
256
계화가 한 걸음에 나와 우상께 뵈옵고 희색이 만면하여 숨이 가빠하거늘, 상공이 고이하여
 
257
“네 무슨 일이 있어 저다지 좋아하며, 말을 못하느냐?”
 
258
계화가 입을 열어 승상께 아뢰되,
 
 
259
이내 심정 즐겁도다 반갑도다.
260
아름다운 저 봄빛과 어여쁜 저 명월(明月)이 난만(爛漫)하고,
261
고진감래(苦盡甘來) 거룩하다.
262
낙양춘몽(洛陽春夢) 백화(百花) 중에 이 봄빛 저 달이라.
263
분분요요(紛紛擾擾) 저 봉접(蜂蝶)아
264
청산녹수 맑은 곳에 이 봄빛 돌아보소.
 
 
265
상공이 들으매 정신이 쇄락하고 마음이 감동되어, 급히 계화를 따라 피화당에 들어가니 전에 없던 향내가 진동하고, 어떠한 미색(美色)이 일어나 흔연(欣然)히 말하기를
 
266
“미부 간밤에 허물을 벗었사오니, 옥함을 짜 주시면 허물을 싸서 좋은 땅에 묻으려 하나이다.”
 
267
승상이 놀라 자세히 보니 과연 절대가인(絶代佳人)이라. 용모가 화려하고 아리따운 태도는 정정요요하여 월궁(月宮)의 항아 같은지라. 상공이 도리어 정신이 혼미(昏迷)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와, 옥함을 짜 들여보내며, 안으로 들어가 부인과 시백더러 이 말을 전하더라.
 
268
부인이며 일가가 분주히 다투어 피화당으로 들어가 보니, 옥빈홍안(玉鬢紅顔)이며 화용월태(花容月態)는 아무리 보아도 인간 인물은 아니라. 뉘 아니 진기(珍奇)히 여기지 아니 하리오.
 
269
이때 시백은 이 말을 듣고 정신없는 사람같이 되어 피화당에 들어가, 전일 박대하던 일을 생각하여 감히 방문에 들지 못하고 주저하더니, 계화가 문득 나와 시백을 대하여 청가일곡으로 걸음을 인도하며 노래하였으되,
 
 
270
아름다은 저 명월(明月)이 흑운(黑雲) 속에 숨었으니,
271
밝은 날이 그믐 되고,
272
시중천자(時中天子) 이태백은 시중흥미(時中興味) 전혀 없네.
273
적벽강(赤壁江) 소자첨은 선유(船遊) 놀음 할 길이 전혀 없다.
274
천공(天空)은 유유(悠悠)하고 옥태(玉態)가 단정(端正)하여
275
지나간 밤 삼경야(三更夜)에 뜬 구름 벗어나니,
276
천지는 명랑하고 정신도 쇄락하다.
277
좋을시고 좋을시고 월하흥미(月下興味) 좋을시고
278
명월이 놀기 좋은 양류(楊柳)로다.
279
서방님은 백옥루(白玉樓) 저 좋은 곳에 저 월색(月色) 구경하소.
 
 
280
시백이 그 노래를 들으매 마음이 상쾌하고 정신이 헌칠하여, 급히 들어가 방안에 들지 못하고 문 밖에서 엿보니 박씨가 과연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방안이 명랑하고 향내 진동하여 들어가고자 할 때, 박씨가 또한 위엄(威嚴) 씩씩하고 외모를 단정히 하여 눈을 들지 아니하매, 감히 들어가지 못하더라.
 
281
외당에 나와 아버님을 뵈니,
 
282
“네 처를 보았느냐?”
 
283
시백이 황괴(惶愧)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앉았다가 나와, 심신이 산란하여 해 지기를 기다리더라.
 
284
그러구러 날이 저물매, 밥 먹을 줄 잊고 피화당에 들어가니, 박씨가 촛불을 밝히고 얼굴이 단정하여 위엄을 돋우고 언연히 앉았더라. 시백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되, 걸음이 자연 뒤로 걸려 들어가지 못하고, 정신을 진정치 못하여 다시금 생각하니 미칠 듯한 욕정을 걷잡지 못하여, 문 밖으로 배회하며 생각하되
 
285
‘아니 들어가진 못하리라’
 
286
하고 들어가려 하면, 자연 얼굴이 붉어지며 말이 꼬질꼬질, 가슴이 답답, 숨을 쉬지 못하고 겨우 한 발만 들여놓고 생각하다 얼풋 들어 앉더라. 박씨는 짐짓 그 눈치를 알고 속마음에 우습되, 외면 더욱 낯빛을 씩씩히 하고 몸을 요동(搖動)치 아니하고 앉았더라. 이때 시백이 방 안에 죽기를 무릅쓰고 앉았으나 입이 무거워 말을 할 수 없어, 다만 두 눈이 박씨 얼굴을 뚫을 듯하되, 박씨는 단정히 앉아 호발(毫髮)을 부동하더라. 시백이 오래 앉아 맥맥히 보고 묵묵히 앉았으니, 가슴 두근거리는 것은 조금 덜하나 부끄러운 마음이 간절하여, 아무리 생각하여도 손 잡고 말하고 동침하기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겠더라.
 
287
그러구러 계명 후 시백이 마지 못하여 일어나, 외당에 나와 우상께 문안하니, 연고 모르고 의색이 만면하더라.
 
288
이튿날이 새매 시백이 피화당 근처를 배회하며, 방에는 감히 들지 못하고 혼자 생각하되
 
289
‘어서 해가 지면, 오늘밤에는 들어가 전일 박대하고 잘못한 말을 먼저 말하리라.’
 
290
하고 기다리더라. 황혼을 당하매, 시백이 의관을 정제하고 피화당에 가 방문을 열고 들어앉으니, 마음 죄이는 증은 어제보다 조금 나으나, 생각하던 말은 입을 열어 할 도리가 없는지라. 박씨는 더욱 단정히 앉아 위엄이 씩씩하니, 이른바 ‘지척(咫尺)이 천리’라. 설마 장부되어 처자에게 박대함이 있다 한들 그다지 말 못할 바가 아니로되, 3,4년 부부간 지낸 일이 참혹할 뿐, 박씨 또한 천지조화를 가졌으니 짐짓 시백으로 말을 붙이지 못하게 위엄을 베푸는 것이라.
 
291
이러하기를 여러 날 거듭하매, 시백일 철석간장(鐵石肝腸)으로 어찌 견디리오. 자연 병이 되어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형용이 초췌(憔悴)하니, 어화 이 병은 편작인들 어이하리오. 우상이 전념(專念)하여 조심하시고 일가 황황(遑遑)한들, 시백이 말을 감히 못하고 박씨 혼자 아는지라.
 
292
일일은 박씨 황혼을 당하매, 계화로 하여금 시백을 청하는지라. 시백이 박씨 청함을 듣고 전지도지(顚之倒之)하여 피화당에 들어가니, 박씨가 안색을 단정히 하고 말씀을 나직히 하여,
 
293
“사람이 세상에 처하여, 어려서는 글공부에 잠심(潛心)하여 부모께 영화(榮華)와 효성(孝誠)으로 섬기며, 처를 얻으면 사람을 현숙히 거느려 만대유전함이 사람의 당당한 일이온데, 군자는 다만 미색만 생각하여 나를 추비하다 하여 인류(人類)로 치지 아니하니, 이러하고 오륜(五倫)에 들며 부모를 효양(孝養)하겠소. 이제는 군자로 하여금 여러 날 근고하게 할 뿐 아니라, 군자의 마음이 염려되어 예전의 노여움을 버리고 당신을 청하여 말씀을 고하나니, 일후는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절차를 전과 같이 마옵소서.”
 
294
하고 말씀이 공순하니, 시백이 이때를 당하여 마음이 어떻다 하리오. 공순이 답하되,
 
295
“소생(小生)이 무지하여 그대에게 슬픔을 끼치니, 이제는 후회막급(後悔莫及)타. 부인이 이렇듯 노여움을 푸시니 무슨 한이 있으리오.”
 
296
하니, 부인이 일어나 금침(衾枕)을 내리며
 
297
“이 금침은 신행 후 처음 펴와요.”
 
298
하고, 이 밤에 동침하니 그 정이 비할 데 없더라.
 
299
이때에 박씨가 변하였다는 소문이 장안에 낭자한지라. 장안 대신댁 부인들이 박씨를 구경코자 각댁을 회문(回文)하되,
 
 
300
이때는 춘삼월 호시절이라. 화류(花柳) 구경차로 각각 주찬(酒饌)을 가지고 아무 날 낙산 숲 이원(梨園) 청루상(靑樓上)으로 모이자.
 
 
301
하였더라.
 
302
장안 각댁이 주찬을 성대하게 갖추어 그날을 당하매 박씨 또한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비자(婢子)를 재촉해서 화교를 타고 청루에 다다르니, 각댁 재상의 부인이 다 모였더라.
 
303
박씨 화교에서 내려 계화를 앞세우고 청루에 올라, 모든 부인과 예필(禮畢) 후 각각 좌정하여 동서로 앉았으니, 각댁 공후부인(公侯夫人)의 고운 얼굴과 선명한 의복 단장이 일대 선녀가 요지(瑤池)에 오른 듯 광채 찬란한지라. 그 중에 박씨 옥같은 얼굴과 달같은 태도로 위의(威儀) 거룩하고 풍채(風采) 정정하니, 아무리 인간 인물인들 선범(仙凡)이 같을소냐. 좌중이 한 번 보매 도리어 경신흠앙(敬信欽仰)하여 감히 언어를 통치 못하겠더라.
 
304
이윽하여 배반(杯盤)이 낭자하더니, 술이 박씨에게 미치매, 박씨 잔을 잡아 짐짓 치마에 기울이니 치마가 젖는지라. 즉시 시비를 명하여 치마를 벗어주며,
 
305
“불에 사르라.”
 
306
하니, 시비가 곧 불에 넣으니 다 타고 재만 남았는지라. 박씨가 시비를 명하여,
 
307
“제를 털고 치마를 가져오라.”
 
308
하여 입으니, 그 치마 빛이 전보다 황홀하여 더 고운지라. 좌중 부인들이 이 일을 보고 놀라며 기이히 여겨 그 연고를 물으니,
 
309
“이 비단 이름은 화한포라. 혹 투색(渝色)하면 물로는 씻지 못하고 불로 씻으며, 이 비단은 불쥐 터럭으로 짠 비단이니 불쥐는 인간에는 없고 선경(仙境)에만 있나이다.”
 
310
부인들이 또 묻기를,
 
311
“입으신 저고리는 무슨 비단이니이까?”
 
312
박씨가
 
313
“이 비단이름은 빙잠단이라. 우리 부친이 용궁(龍宮)에 들어가 얻어온 것이니, 물에 넣어도 젖지 않고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니, 이는 인간 재주가 아니라 용녀(龍女)의 수품입니다.”
 
314
하니, 모든 부인들이 서로 보고 칭찬하며 신기히 여기더라.
 
315
또한 술을 박씨께 권하니, 그녀가 받기를 사양한데, 모든 부인이 일양 권하거늘 박씨 받아가지고 금봉채를 빼어들고 술잔 가운데를 그으니, 술이 절반씩 갈라지는지라. 박씨가 한 편만 마시고 놓으니, 모두 보니 한편은 칼로 베인 듯이 있거늘, 모든 부인이 그 신기함을 흠앙경복(欽仰敬服)하여 종일 즐기더라.
 
316
한 걸음 채쳐 석양이 백말 궁글치고, 잘새는 숲을 향하고, 동령(東嶺)에 달이 돋는지라. 모든 부인이 놀음을 파(罷)하고 각각 돌아가니라.
 
317
각설. 이때 시백이 벼슬을 살고 집에 나와 박씨와 고금사(古今事)를 의논하며 세월을 보내더니, 마침 시백이 한림(翰林)으로 승천하여 평안감사(平安監司)를 제수받았는지라. 탑전에 숙배하고 나와 행장을 차릴새, 장인(匠人)을 불러 화교(花轎)를 만들거늘, 박씨 고하기를
 
318
“화교를 만들어 무엇을 하오리까?”
 
319
시백이
 
320
“국은(國恩)이 망극하여 평안감사를 제수하시니, 당신과 함께 가려 하노라.”
 
321
박씨가
 
322
“첩(妾)은 듣자오니, 대장부(大丈夫)가 입신양명하여 부모께 영화를 뵈고, 나라를 충성으로 섬기며, 또한 옛말에 ‘임금 섬기는 날은 많고 부모 섬기는 날은 적다.’하니, 제가 함께 가면 부모는 뉘가 섬기리이까. 저는 이곳에 있어 부모를 뫼셔 봉양하오리니, 감사는 부디 평안히 도임하여, 정사(政事)를 잘하여 위국보충(爲國報忠)하소서.”
 
323
하니, 감사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사례하기를,
 
324
“부인의 말씀이 어찌 그르겠소. 도리어 부끄럽소. 부디 당신은 집에 평안히 있어 부모를 효양하여, 이 몸의 불효를 면케 해 주시오.”
 
325
하고 즉일로 발행(發行)하니라.
 
326
평양(平壤)에 도임하여, 백성의 질고(疾苦)와 수령의 선불치(善不治)를 염탐하여 다스리니, 일년지간에 평양 일도(一道) 중에 선치하는 소문이 낭자한지라.
 
327
상(上)이 들으시고 기특히 여기사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부르시니, 시백이 조서(詔書)를 보고 바로 경성(京城)에 들어와 숙배하고, 즉시 병조의 공사(公事)를 결단하더라.
 
328
갑자년(甲子年) 8월에 시백이 어명(御名)을 받자와 남경에 사신(使臣)갈 제, 임경업(林慶業)을 데리고 남경에 들어갔더니, 마침 북방 호국(胡國)이 총마가달( 馬可達)의 난을 만나 천자(天子)께 청병을 하였는지라. 천자가
 
329
“조선 사신으로 청병장(請兵將)을 삼아 구원하라.”
 
330
하시는지라.
 
331
시백이 임경업과 더불어 총마가달을 쳐 파(破)하고, 호국을 구원하여 돌아오니라. 천자가 아름답게 여기사 금은보화(金銀寶貨)를 많이 상사(賞賜)하시며 가자(加資)를 주시니, 시백과 경업이 황은(皇恩)을 축사하더라.
 
332
본국에 돌아오니, 상이 아름답게 여기사 시백으로 우의정(右議政)을 삼으시고, 경업으로 도원수(都元帥)를 제수하였더라.
 
333
이때 호국이 점점 강성하여 자주 북방을 침범하매, 임경업으로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제수하여,
 
334
“호적(胡賊)을 막으라.”
 
335
하시니라.
 
336
이때에 호왕(胡王)이 조선을 도모(圖謀)하고자 하여, 만조제신(滿朝諸臣)더러 왈
 
337
“우리나라에 조선장수 임경업을 당할 장수가 없으니, 어찌 하면 좋으리오?”
 
338
중전왕비(中殿王妃)는 앉아 천리를 보며 서서 만리를 보는지라. 호왕께 여쭈되,
 
339
“요사이 천기(天璣)를 보니, 조선 장안에 신인(神人)이 있어 비쳤으니, 임경업이 없더라도 도모키 어려운지라. 청컨대 이 신인을 없애면 경업은 두렵지 아니하여이다.”
 
340
호왕이
 
341
“그러하면 어찌 하여야 그 신인을 죽이리오?”
 
342
왕후(王后) 답하기를,
 
343
“다른 묘책이 없사오니, 조선사람은 미색을 가장 좋아하나니, 인물이 어여쁘고, 글이 문장이요, 칼을 잘 쓰며, 용맹있는 계집 자객(刺客)을 보내어, 이 꾀로 그 신인을 죽이면 이는 상책(上策)이오이다.”
 
344
하니, 호왕이 옳게 여겨
 
345
“그러면 뉘가 당하리오?”
 
346
왕후가,
 
347
“궁중(宮中)에 기홍대(奇紅大)라 하는 계집이 가히 당할 만하여이다.”
 
348
왕이 즉시 기홍대를 불러,
 
349
“네 조선에 가 성공하면 천금상(千金賞) 만종록(萬鍾祿)을 주리라.”
 
350
하더라. 기홍대가 수명(受命)하고 발행할새, 왕후가 기홍대를 불러 경계(警戒) 하기를
 
351
“네 조선에 나가 우의정 이시백의 집을 찾아가면 알 도리 있을 것이니, 부디 신인을 죽이고, 오는 길에 의주에 들어가 임경업을 죽이고 부디 공을 이루어 돌아오라. 만일 잘못 주선(周旋)하면 대환(大患)을 당하리라.”
 
352
하고 십분 당부하더라.
 
353
기홍대가 하직하고 나와 제 재주만 믿고 성공함을 기꺼하며, 여러 날 만에 조선에 득달(得達)하니라.
 
354
각설. 이때 박씨가 홀로 피화당에 앉아 천기를 살피더니, 우의정을 청하여
 
355
“모월 모일에 어떠한 미인이 찾을 것이니, 부디 피화당으로 보내소서.”
 
356
우상이
 
357
“그 어떤 여인이니이까?”
 
358
박씨가
 
359
“그때를 당하면 자연 알려니와, 그 여인이 필연 사랑에 머물고자 할 것이니, 만일 사랑에 머물게 하였다가는 대환을 당할 것이니, 부디 내 말을 명심하옵소서.”
 
360
하고, 계화를 불러
 
361
“네 술을 많이 빚되, 독한 술과 순한 술을 절반씩 빚었다가, 아무때라도 내가 어떠한 여인을 데리고 술을 가져오라 하거든 가지고 와서, 그 여인은 독한 술을 권하고 나는 순한 술을 권하며, 안주도 많이 장만하라.”
 
362
하고 각별 단속하더라.
 
363
일일은 우상이 홀로 외당에 앉았더니, 문득 한 여인이 들어와 뜰앞에 납배(納拜)하고 중계(中階)에 오르거늘, 승상이 보니 그 얼굴이 절대가인이라. 극히 아름답게 여겨 불러 가로되,
 
364
“어떠한 여인인고?”
 
365
그 여인이 답하기를,
 
366
“소녀는 시골 기생(妓生)으로 경성에 구경 왔삽다가, 주로 다녀 이 댁을 감히 범하였나이다.”
 
367
우상이 그 수려(秀麗)함을 사랑하여,
 
368
“방으로 들어오라.”
 
369
하여,
 
370
“네 시골 산다 하니 어느 고을에 살며, 성명은 무엇이냐?
 
371
그 여인이
 
372
“소녀는 본디 천마산성(天魔山城)에 사옵더니, 일찍 부모를 잃고 유리걸식(流離乞食)하다가 관비정속(官婢定屬)하였기로, 성은 모르옵고 이름은 풍매(風梅)라 하나이다.”
 
373
우상이
 
374
“더불어 앉거라.”
 
375
하며 거동을 보니 범상(凡常)한 인물이 아닐뿐더러, 얼굴이 절색(絶色)이요, 또한 글을 의논한즉 문장(文章)이요, 오히려 당신에 더한지라. 오래 말하다가 십분 의심하던 중, 부이이 당부하던 말을 생각하고,
 
376
“너는 안으로 들어가 편히 쉬라.”
 
377
하니, 그 여인이
 
378
“어찌 대가댁 안에 가 머물 수 있으리까? 오늘밤에 대감님을 뫼셔 수작(酬酌)하면 좋을 듯하여이다.”
 
379
우상이
 
380
“오늘밤은 내 몸에 연고 있으니, 안으로 들어가라.”
 
381
하고 계화를 불러,
 
382
“이 사람을 피화당에서 편히 쉬게 하라.”
 
383
하니, 그 여인이 마지 못하여 계화를 따라 피화당에 들어가더라. 부인께 문안하니, 부인이
 
384
“오르라”
 
385
하고, 방에 앉히고 성명을 물으니, 그 여인이 우의정과 수작하던 말로 고하는지라. 부인이 가로되
 
386
“그대의 자색(姿色)을 보니 미천한 사람이 아니라. 행역(行役) 허비하여 부질없이 우리 집을 찾았구나.”
 
387
하고 계화를 불러
 
388
“손이 왔으니 주효를 가져오라.”
 
389
계화가 명을 듣고 옥반(玉盤)에 온작 진미(珍味)를 갖추워 술을 많이 들이는지라.
 
390
부인이
 
391
“행역에 곤갈(困竭)할 듯하니, 술을 권하라.”
 
392
하였다. 부인이 그 여인과 같이 순배(巡杯)를 연하여 받으니, 부인 먹은 술은 순한 술이요, 그 여인이 먹는 술은 독한 술이라. 둘이 서로 먹기를 일두주(一斗酒)를 먹은 지라. 피차 다름이 없으니, 사방에서 보는 사람과 우상이 엿보다가, 부인의 그 주효 먹는 양을 보고 아니 놀랄 이 없더라.
 
393
술을 파하매, 그 여인이 부인과 수작할새 말씀이며 문장이 탁월하여 위엄이 솟는지라. 그 여인이 속마음에 헤아리되,
 
394
‘아까 부인의 주효 먹는 양을 보고 또 문장을 의논한 즉 따를 길이 없고, 외당에서 우상을 본즉 불과 재색뿐이요, 부인을 본즉 분명 영웅이요 신인이로다. 우리 황후가 말씀하시기를 우상의 집에 가면 알 일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분명 이 부인을 이름이니, 알괘라 도모하리라.’
 
395
하고, 부인께 청하여
 
396
“노곤(勞困)이 자심하고 또한 술이 취하오니, 황송하오나 조금 눕기를 청하나이다.”
 
397
부인이
 
398
“술 취하고 눕기는 예사라. 편히 자라.”
 
399
하고 베개를 주시니, 그 여인이 눕거늘, 박씨도 또한 비껴 자는 체하고 동정(動靜)을 살피더라. 이윽하여 그 여인이 잠이 깊이 드니, 두 눈을 뜨는데, 뜨는 눈에서 불덩어리가 내달아 방 안에 뒹굴면서 숨소리가 집안에 가득한지라.
 
400
박씨가 일어나 그 행장을 펴보니 아무것도 없고, 다만 비수(匕首)하나 있어 주홍(朱紅)으로 새겼으되, ‘비연도’라 하였더라. 그 칼이 행장 밖에 나와 제비가 되어 방안에 날며 부인을 침범코자 하거늘, 박씨가 매운 재를 뿌리니 변화치 못하고 떨어지거늘, 부인이 그 칼을 들고 그 여인의 배 위에 앉으며, 크게 소리치기를,
 
401
“기홍대야, 너는 잠을 깨어 나를 보라!”
 
402
하는 소리에 기홍대가 놀라 깨어, 눈을 떠보니 부인이 칼을 들고 배위에 앉았는데, 몸을 요동할 길이 없는지라. 기홍대가 놀라 대답하기를,
 
403
“부인이 어찌 소녀를 아시니이까?”
 
404
박씨가 칼로 기홍대의 목을 겨누면서 꾸짖되,
 
405
“네 호왕놈이 가달(可達)의 난을 만나 우리 우상이 구하여 계시매, 은혜 갚기는커녕 도리어 우리나라를 도모코자 하더니, 너 같은 요망한 년을 보내어 나를 시험코자 하니, 이 칼로 너를 먼저 베어 분함을 풀겠다.”
 
406
하고 호통하니 위엄이 추상 같은지라. 기홍대 대겁(大怯)하여 애걸하기를,
 
407
“부인이 이미 아셨으니, 어찌 감히 기망(欺罔)하오리까. 과연 그러하옵거니와 소녀는 왕명으로 올 뿐이라. 신첩(臣妾)이 되어 거역지 못하여 왔사오니, 부인 덕택에 살려주옵소서.”
 
408
무수히 애걸하는지라. 박씨가 칼을 던지고 배에서 내려, 무수히 꾸짖어 보내니 집안사람과 우상이 이 광경을 엿보다가 심혼(心魂)이 날고 구백(九魄)이 흩어지는지라.
 
409
우상이 즉시 탑전에 이 말을 주달(奏達)하니, 전하가 들으시고 놀라시어,
 
410
“만일 박부인(朴夫人) 곧 아니면 나라에 대환을 당할 뻔했도다.”
 
411
하시고, 의주부윤에게 전교하되,
 
412
“부디 수상한 여인을 살피라.”
 
413
하시고, 박씨로 명월부인(明月夫人)을 봉(封)하시며,
 
414
“일후에 무슨 변(變)이 있어도 잘 주선하라.”
 
415
하시니라.
 
416
각설. 기홍대가 부인께 하직하고 나와 생각하되,
 
417
‘이미 일이 발각되었으니 의주에 가서도 쓸데없다.’
 
418
하고 바로 본국에 들어가 복명(復命)하니, 왕이 묻기를
 
419
“네 이번 길에 성공했느냐?”
 
420
기홍대가 전후수말(前後首末)을 다 아뢰고, 도모치 못한 말을 낱낱이 아뢰더라. 호왕이 듣고 또한 놀라서 황후를 청하여 이 일을 말하고 다른 묘책을 물으니, 황후가
 
421
“요사이 천기를 보오니, 조선에 간신(奸臣)이 많아 현인(賢人)을 시기하여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이오니, 바삐 기병(起兵)하여 북으로 가지 말고 동으로 들어가되, 장수를 가리어 북편 길을 막아 임경업의 기병을 통치 못하게 하면, 필연 성공하리이다.”
 
422
호왕이 대희하여, 용골대(龍骨大)와 율대(律大) 형제로 대장(大將)을 삼아 정병(精兵) 30만을 주며,
 
423
“부디 의주로 가지 말고 동으로 돌아 들어가되, 의주 길을 막아 소식을 통치 못하게 하라.”
 
424
하였다. 황후가 또 두 장수를 불러 왈,
 
425
“이번에는 동으로 들어가 장안을 바로 엄살(掩殺)하면 임경업도 몰라 성공할 것이니, 부디 우의정 이시백의 집 후원은 범치 말라. 만일 범하다가는 성공은커녕 목숨을 보전치 못할 것이니 부디 명심불망(銘心不忘)하라.”
 
426
두 장수가 명을 받고 군사를 거느려, 동으로 황해수(黃海水)를 건너 바로 장안으로 향하였더라.
 
427
각설. 이때 박씨가 피화당에서 천기를 보고, 우상을 청하여 이르기를,
 
428
“북방 호적이 금방 들어오는가 싶으니, 급히 탑전에 아뢰어 임경업을 내직(內職)으로 불러, 군사를 조발(早發)하여 막으소서.”
 
429
우상이
 
430
“북방 호적이 들어오면 북으로 올 것이니, 임경업은 북방을 지키는 의주부윤이라. 어찌 오는 길을 내직으로 부르리까?”
 
431
박부인이
 
432
“호적이 북방으로 오지 아니하고 동으로 황해수를 건너 들어올 것이니, 바삐 임경업을 패초(牌招)하옵소서.”
 
433
우상이 크게 놀라, 급히 들어가 부인의 말을 낱낱이 아뢰니, 상이 놀라사 만조백관이 다 경황(驚惶)하여 임경업을 패초하려 의논하시니, 좌의정 원두표가
 
434
“북방 오랑캐는 본디 간계(奸計)가 많사오니 분명 그러하올 듯하오니, 박부인 말씀대로 하여보사이다.”
 
435
하니, 김자점이 발연변색(勃然變色)하고
 
436
“제신(諸臣)의 말이 그르오이다. 북적이 경업에게 여러 번 패한바 되었사오니 기병할 수 없사옵고, 설사 기병하여 온다 하여도 북으로 올 수밖에 없사오니, 만일 임경업을 패초하였다가 호적이 의주를 쳐 항성(降城)하면 그 세(勢)를 당치 못하며, 국가흥망이 경각(頃刻)에 있을지니, 어찌 요망한 계집의 말을 듣고 북방을 비우고 동을 막으리까. 이는 나라를 할 말이니 어찌 지혜 있다하오리까.”
 
437
상이 가라사대,
 
438
“박부인은 신인이라 신명 지감이 있어 여러 번 신기함이 있으니, 그 말대로 하고자 하노라.”
 
439
김자점이 또 아뢰되,
 
440
“시방 시화년풍(時和年豐)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무슨 병란이 있으리까. 박씨는 요망한 계집이어늘, 전하 어찌 요망한 말을 침혹(沈惑)하시며, 국가대사를 아이 희롱같이 하시나이까.”
 
441
하니, 만조백관이 김자점의 말이 그른 줄 알되, 아무 말도 못하더라. 상이 그 일로 유예미결(猶豫未決)하시고 조회(朝會)를 파하시는지라.
 
442
우상이 집에 돌아와 그 연고를 부인더러 말하니, 부인이 앙천탄왈(仰天歎曰)
 
443
“슬프다, 호적이 미구에 도성(都城)을 범하려 하되, 간인(奸人)이 나라의 총명을 가리워 사직(社稷)을 위태케 하니 절통치 않으리오. 이제 급히 임경업을 불러 동편에 복병하였다가 냅다 치면 호적 파하기는 어렵지 아니할지라. 이제는 속절없이 손을 매어 놓고 안연히 도저을 받으려 하니, 이제는 국운(國運)이 불행하니 무가내하(無可奈河)라. 대감이 이미 이 나라에 허신(許身)하였사오니, 불행한 일이 있을지라도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여, 비록 전패지경(全敗之境)을 당하여 죽더라도 신자(臣子)의 도리에 국가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하게 하옵소서. 만일 위급한 때를 당하여 김자점으로 하여금 병권(兵權)을 맡길진댄 망국한 일을 볼 것이니, 부디 어진 사람을 가리어 맡기게 하옵소서.”
 
444
우상이 이 말을 듣고, 강개(慷慨)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수심으로 지내더니,
 
445
‘죽기로써 다시 아뢰리라.’
 
446
하고 궐내(闕內)에 들어가니, 이때는 병자년 10월이라.
 
447
우상이 미처 탑전에 미치지 못하여서 동대문〔興仁之文〕밖에서 방포일성(放砲一聲)에 금고함성(金鼓喊聲)이 천지진동하며, 호병(虎兵)이 동문을 깨치고 장안을 엄살하니, 장안이 불의지변(不意之變)을 만나 모두 분주(奔走)하는지라. 백성들이 도적의 창검에 죽는 자가 무수하여 주검이 태산(泰山)같더라. 장안 인민이 하늘을 우러러 땅을 두드려 살기를 바라는 소리 천지진동하더라.
 
448
상(上)이 망극하여 아모리 할 줄 모르시고, 우상더러
 
449
“이제 장안이 벌써 함몰(陷沒)하고, 구화문에 도적이 들어온지라. 내 장차 어찌 하리오?”
 
450
우상이
 
451
“일이 급하였사오니, 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하사이다.”
 
452
하고 옥교(玉橋)를 재촉하여 성문으로 나오더니, 또한 중로(中路)에서 호적의 복병(伏兵)을 만나, 우상이 칼로 잡고 죽기로 싸워 복병하였던 장수를 베고, 겨우 길을 얻어 남한에 들어가시니라.
 
453
각설. 이때 박씨가 일가 친척을 다 모아 피화당에 피난하는지라.
 
454
호장 용골대(龍骨大)가 제 아우 율대(律大)로 하여금
 
455
“장안을 지키며 물색(物色)을 수습(收拾)하라.”
 
456
하고, 군사를 몰아 남한산성을 에워싸는지라.
 
457
용율대가 장안에 웅거(雄據)하여 물색을 추심(推尋)하니 장안이 물 끓듯 하며, 살기를 도망하여 죽는 사람이 무수한지라. 피화당에 피난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도망코자 하거늘, 박씨가
 
458
“이제 장안 사면을 도적이 다 지키었고, 피난코자 한들 어디로 가겠소. 이곳에 있으면 피화(避禍)할 도리가 있으리니 염려들 마시오.”
 
459
하더라.
 
460
이때 율대가 100여 기(騎)를 거느려 우상의 집을 범하여 인물을 수탐하더니, 내외가 적적하여 빈 집 같거늘, 차차 수탐하여 후원에 들어가 살펴보니, 온갖 기이한 수목이 좌우에 늘어서 무성하였는지라. 율대가 고이히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나무마다 용과 범이 수미를 응하며, 가지마다 뱀과 짐승이 되어 천지풍운(天地風雲)을 이루며, 살기(殺氣) 가득하여 은은한 고각(鼓角)소리 들리는데, 그 가운데 무수한 사람들이 피난하였더라. 율대가 의기양양하여 피화당을 겁칙하려 달려드니, 불의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흑운(黑雲)이 자욱하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진동하며, 좌우 전후에 늘어섰던 나무들이 일시에 변하여 기치 창검(旗幟槍劍)이 되어 상설(霜雪) 같으며, 함성(喊聲)소리가 천지진동하는지라. 율대가 대경하여 급히 내달아 도망치려 한즉, 벌써 칼같은 바위가 높기는 천여 장이나 되어 앞을 가리워 겹겹이 둘러싸이니, 전혀 갈 길이 없는지라.
 
461
율대 혼백(魂魄)을 잃어 어찌 할 줄 모르더니, 방 안에서 한 여인이 칼을 들고 나오면서 꾸짖기를,
 
462
“너는 어떠한 도적인데, 이러한 중지(重地)에 들어와 죽기를 재촉하느냐?”
 
463
율대가 합장배례(合掌拜禮)하며,
 
464
“귀댁 부인이 뉘신지 아지 못하거니와, 덕분에 살려주옵소서.”
 
465
대답하기를,
 
466
“나는 박부인의 시비거니와, 우리 아씨 명월부인(明月夫人)이 조화(造化)를 베풀어 너를 기다린 지 오랜지라. 너는 극악(極惡)한 도적이라. 빨리 목을 늘이어 내 칼을 받아라.”
 
467
율대가 그 말을 듣고 대로하여, 칼을 들어 계화를 치려 하되, 경각에 칼 든 팔이 힘이 없어 놀릴 길이 없는지라. 하는 수 없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468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만리타국(萬里他國)에 대공(大功)을 바라고 왔다가, 오늘날 조그마한 계집의 손에 죽을 줄 어찌 알았으리오.”
 
469
계화가 웃으며,
 
470
“불쌍코 가련하다. 세상에 장부라 위명(爲名)하고 나같은 여자를 당치 못하느냐. 네 왕놈이 천의(天意)를 모르고 예의지국(禮儀之國)을 침범코자 하여 너같은 구상유취를 보냈거니와, 오늘은 네 명이 내 손에 달렸으니, 바삐 목을 늘이어 내 칼을 받아라.”
 
471
하니 율대 앙천탄왈,
 
472
“천수(天數)로다.”
 
473
하고 자결(自決)하더라.
 
474
계화가 율대의 머리를 베어 문밖에 다니, 이윽고 풍운이 그치며 천지가 명랑해지더라.
 
475
각설. 국운이 불행하여, 호적이 강성하여 왕대비(王大妃)와 세자(世子)․대군(大君)을 사로잡고, 국가 위태함은 다 김자점(金自點)이 도적을 인도함이니 어찌 절통치 않으리오. 슬프다, 여러 날 도적에게 에운 바 되어, 세궁역진(細窮力盡)하여 상이 도적에게 강화(講和)하니라.
 
476
용골대가 강화를 받은 후 장안으로 들어오다, 문득 제 아우 율대의 죽음을 듣고 방성통곡하며 이르기를,
 
477
“이미 화친언약(和親言約)을 받았으니 뉘라서 내 아우를 해하리오. 오늘은 원수를 갚으리라.”
 
478
하고, 군사를 몰아 장안에 들어가 피화당에 다다르니, 과연 율대의 머리를 문밖에 달았더라. 용골대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칼을 높이 들고 말을 채쳐 달려들고자 하거늘, 도원수가 나무를 보고 용골대를 만류하기를,
 
479
“그대는 분한 마음을 잠깐 참으라. 저 나무를 보니 옛날 제갈공명의 팔진도법(八陳圖法)이니, 경홀(輕忽)히 말라.”
 
480
하니, 용골대 더욱 분기대발(憤氣大發)하여 칼을 들고 크게 소리치며,
 
481
“그러면 동생의 원수를 어찌 하오리까?”
 
482
도원수가 가로되,
 
483
“아무리 분한들 저런 중지에 들어갔다가는, 원수 갚기는 고사하고 형제가 다 죽을 것이니, 아직 진정하라.”
 
484
하니, 용골대가 옳게 여겨, 군사를 호령하여,
 
485
“그 나무를 다 베어 버려라.”
 
486
하니, 문득 미친 바람이 일어나며 운무가 자욱하더라. 나무마다 무성하여 무수한 장졸(將卒)이 되고, 금고함성(金鼓喊聲)은 천지진동하며, 용과 범이며 검은 새와 흰 뱀이 수미를 상접(相接)하며 풍운을 토하고, 기치․창검이 별 같으며, 난데없는 신장이 갑주(甲冑)를 입고 삼척검(三尺劍)을 들어 호병을 엄살하니, 뇌성벽력이 강산이 무너지는 듯하며, 호진(胡陳) 장졸들이 천지를 분별치 못하고, 주검이 구산(丘山) 같더라. 용골대 황겁하여 급히 쟁(錚)을 쳐서 군사를 거두니 이윽고 천지가 명랑한지라. 용골대가 더욱 분기대발하여 칼을 들고 달려든즉, 호진 장졸이 감히 손을 용납지 못하더라. 문득 나무 속으로부터 한 여인이 나와 크게 꾸짖기를,
 
487
“무지한 용골대야, 네 아우가 내 손에 죽었거늘, 너조차 죽기를 재촉하느냐?”
 
488
골대가 대로하여 꾸짖기를,
 
489
“너는 어떠한 계집인데 장부의 마음을 돋우느냐? 내 아우가 불행하여 네 손에 죽었거니와 네 나라의 화친언약을 받았으니 이제는 너희도 다 우리 나라의 신첩(臣妾)이라. 잔말 말고 바삐 내 칼을 받아라.”
 
490
하니 계화가 들은 체 아니하고 대매(大罵) 하기를,
 
491
“네 동생이 내 칼에 죽었거니와, 너 또한 명이 내 손에 달렸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으리오.”
 
492
용골대가 더욱 분기등등(憤氣騰騰)하여 군중에 호령하되,
 
493
“일시에 활을 당겨 쏘라!”
 
494
하니, 살이 무수하되 감히 한 개도 범치 못하는지라. 용골대가 아무리 분할들 어찌 하리오. 마음에 탄복하고, 조선 도원수 김자점을 불러,
 
495
“너희, 이제는 내 나라의 신하라. 내 명령을 어찌 어기리오.”
 
496
김자점이 황공하여,
 
497
“분부대로 거행하오리다.”
 
498
“네 군사를 몰아 박부인과 계화를 사로잡아 들이라.”
 
499
하는지라. 김자점이 황겁하여 방포일성에 군사를 몰아 피화당을 에워싸니, 문득 팔문(八門)이 변하여 100여 길 함정이 되는지라. 용골대가 그 변을 보고 졸연히 파(破)치 못할 줄 알고 한 꾀를 생각하여, 군사로 하여금 피화당 사방 10리를 깊이 파서 화약(火藥)․염초(焰硝)를 많이 붓고, 군사로 하여금 각각 불을 지르게 하고,
 
500
“너희 무리 아무리 천변만화지술(千變萬化之術)이 있은들 어찌 하리오.”
 
501
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일시에 불을 놓는지라. 그 불이 화약․염초를 범하매, 벽력같은 소리가 나며 장안 30리에 화광(火光)이 충천(衝天)하여 죽는 자가 무수하더라.
 
502
박씨가 옥렴을 드리우고, 좌수(左手)에 옥화선을 쥐고 불을 부치니, 화광이 호진을 충돌하여, 호진 장졸이 항오(行伍)을 잃고 타 죽고 밟혀 죽으며, 남은 군사는 살기를 도모하고 다 도망하는지라. 용골대가 할 길 없어,
 
503
“이미 화친을 받았으니 대공을 세웠거늘, 부질없이 조그만 계집을 시험하다가 공연히 장졸만 다 죽였으니, 어찌 분한(憤恨)치 않으리오.”
 
504
하고 회군(回軍)하여 발행할새, 왕대비와 세자․대군이며 장안미색(長安美色)을 데리고 가는지라.
 
505
박씨가 계화를 시켜 외치기를,
 
506
“무지한 오랑캐야, 너희 왕놈이 무식하여 은혜지국(恩惠之局)을 침범하였거니와, 우리 왕대비는 데려가지 못하리라. 만일 그런 뜻을 두면 너희들은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리라.”
 
507
하니, 호장들이 가소롭게 여겨
 
508
“우리 이미 화친언약을 받고, 또한 인물이 나의 장중(掌中)에 매였으니, 그런 말은 생심(生心)도 말라.”
 
509
하며, 혹 질욕(叱辱)하며 듣지 아니하거늘, 박씨가 또 계화를 시켜 외치기를,
 
510
“너희 일양 그러하려거든 내 재주를 구경하라.”
 
511
하더니, 이윽고 공중으로 두 줄기 무지개 일어나며, 모진 비 천지 뒤덮게 오며, 음풍(陰風)이 일어나며, 백설(白雪)이 날리며, 얼음이 얼어 호군중 말 발이 땅에 붙어 촌보(寸步)를 옮기지 못하는지라. 그제야 호장들이 황겁하여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두 함몰할지라. 마지 못하여 호장들이 투구를 벗고 창을 버려, 피화당 앞에 나아가 꿇어 애걸 하기를,
 
512
“오늘날 이미 화친을 받았으니, 왕대비는 아니 모셔갈 것이니, 박부인 덕택에 살려주옵소서.”
 
513
하고 만단애걸(萬端哀乞)하거늘, 박씨 주렴(珠簾)안에서 꾸짖기를,
 
514
“너희들을 씨없이 죽일 것이로되, 천시(天時)를 생각하고 십분 용서하거니와, 너희놈이 본디 간사하여 범람(汎濫)한 죄를 지었으나, 이번은 아는 일이 있어 살려 보내나니 조심하여 들어가며, 우리 세자․대군을 부디 태평히 모셔 가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내 오랑캐를 씨도 없이 멸하리라.”
 
515
하더라. 호장들이 백배 사례하고, 용골대 아뢰되,
 
516
“황공하오나 소장(小將)의 아우 머리를 주옵시면, 덕택이 태산 같을까 바라나이다.”
 
517
박씨가 웃으며 일변 꾸짖기를,
 
518
“그리는 못하리로다. 옛날 조양자(趙襄子)는 지백(知伯)의 머리를 칠하여 술잔을 만들어 진양성(晋陽城)의 분함을 씻어 천추만세(千秋萬歲)에 유전하였으니, 이제 우리는 너의 아우 머리를 칠하여 강화성(江華城)의 분함을 씻으리라.”
 
519
하니, 용골대가 이 말을 듣고 아무리 대성통곡한들 어찌 하리오.
 
520
호장들이 박씨께 하직하고 물러나와, 장안 물색(物色)을 거두어 발행할새, 잡혀가는 부인네들이 박씨를 향하여 울며,
 
521
“슬프다, 박부인은 무슨 복으로 이러하고, 우리는 이제 가면 생사(生死)를 모를지라. 언제나 고국산천을 다시 볼까.”
 
522
하며 대성통곡하는지라. 박씨가 계화로 하여금 위로하여 가로되,
 
523
“흥진비래(興盡悲來)요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니, 이 다 천수(天數)니, 너무 서러워 말고 잘 가 있으면, 3년 후 호국에 들어가 데려올 때 있을 것이니, 부디 세자․대군을 뫼셔 잘 있다가, 때를 기다리시오.”
 
524
하니 모둔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가는 행색(行色)을 차마 보지 못하겠더라.
 
525
각설. 호장이 의기양양하여, 군사를 거느려 의주(義州)로 장로(長路)하여 가더라. 의주 지경을 당하매 난데없는 장수가 내달아 선봉(先鋒)을 베고 군중을 짓치니, 그 형세를 당치 못하여 황황하는지라. 급히 조선국 화친한 전지(傳旨)를 내었더니, 그 장수 간데 없는지라. 이는 곧 임경업이라. 호장들이 박부인의 말을 생각하고 탄복하더라.
 
526
이때 상(上)이 박씨의 말을 듣지 아니함을 백 번 뉘우쳐 하사, 탄식하며,
 
527
“슬프다, 박부인의 말대로 하였으면 오늘날 어찌 이 지경을 당하였으며, 만일 박부인이 남자 되었다면 어찌 호적을 두려워하리오. 이제 박씨는 적수단신(赤手單身)으로 집안에 있어 호적을 승전하며 호장을 꿇리고, 조선 정기(精氣)를 생생케 하니, 이는 고금에 없는 바라.”
 
528
하시고, 무수히 탄복하시며 절충부인(折衝夫人)을 봉하시고 만금을 상사하시며, 조서(詔書)를 내려 ‘박씨 자손을 벼슬 주고 천추만대에 유전하라.’ 하사, 궁녀(宮女)를 박씨께 보내어 말하기를,
 
 
529
오호라, 과인(寡人)이 밝지 못하여 박부인의 위국지충(爲國之忠)을 몰라보고 불의의 이 환난을 당하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황천(皇天)이 명감(明鑑)하사, 박부인 충절 덕행으로 유자유손(有子有孫)하여 세세유전(歲歲遺傳)하라.
 
 
530
하였거늘, 박씨가 전지를 받자와 사배(四拜)하고 천은(天恩)을 축사하더라.
 
531
당초에 박씨 얼굴이 추비하기는 시백이 침혹하여 공부에 방해로울까 혐의(嫌疑)함이라.
 
532
후에 자녀 11남매를 두어, 다 장성하여 명문거족의 집에 남혼여가(男婚女嫁)하여 자손만당하고 부귀겸전하니, 개세(蓋世)한 행락(行樂)이 곽분양을 압두하겠더라. 박씨가 남편과 더불어 백수동락(白首同樂)하여 90세가 되도록 강건하여 무양(無恙)하더라.
 
533
대저 박부인은 천상선녀(天上仙女)로 박처사 집에 적강(謫降)한 여중군자(女中君子)라. 침선(針線)은 소약란의 재질이요, 문장은 이태백의 구법(句法)을 압두(壓頭)하며, 흉중에 만고승패와 풍운조화를 품었으니, 병법은 사마(司馬)․제갈무후(諸葛武候)의 변화지술(變化之術)을 상통하며, 신기한 도량은 육정 육갑(六甲)을 하여 신장을 잠시간 부리고, 통통 묘한 진법은 나무를 심어 팔문검사진(八門劍蛇陣)이 되어 풍운조화와 용호(龍虎) 기치(旗幟)가 벌여 도적이 감히 접주(接住)치 못하게 하니, 그 신기묘법은 이루 측량하지 못하겠더라.
 
 
534
을미년(乙未年) 정월(正月) 염이일(念二日) 등서(謄書)
【원문】박씨전 (고대본)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고대소설〕
▪ 분류 : 고전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230
- 전체 순위 : 289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49 위 / 145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3) 설중매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박씨전(朴氏傳) [제목]
 
  고대 소설(古代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고전 소설 카탈로그   본문   한글 
◈ 박씨전 (朴氏傳) - 고대본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2년 07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