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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딸 ◈

◇ 번민 ◇

해설목차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1931년
강경애 (姜敬愛)

1. 번민

 
1
부엌 뒷대문을 활짝 열고 나오는 옥의 얼굴은 푸석푸석하니 부었다.
 
2
그는 사면으로 기웃기웃하여 호미를 찾아들고 울바자 뒤로 돌아가며 기적거린 후 박, 호박, 강냉이 씨를 심는다. 그리고 가볍게 밟는다.
 
3
눈동이 따끈따끈하자 콧잔등에 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누구인지 옆구리를 톡톡 친다. 휘끈 돌아보니 복술이가 꼬리를 치면 그에게로 달려든다. 까만 눈을 껌벅이면서…… 옥은 호미를 던지고,
 
4
“복술이 왔니!”
 
5
복술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멍하니 뒷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 띄는 이끼 돋은 바위 틈에는 파래진 이름 모를 풀포기가 따뜻한 볕과 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그 옆으로 돌아가며 봄맞이 아이들의 손에 다 꺾인 나뭇가지에는 노랑꽃, 빨강꽃이 송이송이 피었다.
 
6
나비 한 마리가 펄펄 날아든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높았다 낮아지는 나비를 따라 시선은 달음질쳤다. 눈 깜빡일 사이에 나비는 벌써 산비탈을 넘어 까뭇거린다.
 
7
그의 눈은 스스로 감겨지며 볼 위로 눈물 흔적이 보인다.
 
8
“무엇 하셔요.”
 
9
사립문 밖에서 건너집 애기 어머니가 자루 같은 젖을 흔들며 발발 기어 달아나는 애기를 잡아 안고 일어선다. 옥은 빙긋 웃으며,
 
10
“호박씨 심으러 나왔어요.”
 
11
그는 손톱 사이에 낀 흙을 파내고 보니 애기 어머니는 어디로 가버리었다.
 
12
그는 방문턱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두 다리를 내려다볼 때 저켠 산너머로 작은 새소리가 그의 가슴을 한두 번 두드리고 잠잠하여진다. 순간에 떠오른 것은 엊저녁에 받은 남편의 편지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며 ‘그가 그렇다니…… 인골(人骨)을 쓰고야 차마…… 그렇게…… 하는 수야 있나! 어머님의 말씀이 오죽이나 잘 알으시고 하신 말씀이랴! “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 몇 번인지 되뇌이고 난 그는 눈물이 그득해졌다.
 
13
‘어머니, 나는 이 일을 어찌 해야 좋아요?’ 향하여 정면 위에 걸린 약간 미소를 띤 남편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틈만 있으면 이렇게 하는 것이었다.
 
14
따라서 일어나는 그의 과거. 시어머니 생전에 자기와 남편이 천진스럽게 놀던 꼴, 그리고 시어머님이 임종시까지도 “봉준을 잘 길러라. 둘이서 싸우지 말고 잘살아야 한다. 옥아!” 어린 옥은 곤한 잠에 들기 전까지는 입 속으로 외우건마는…… 사정없이 잡아뗀 남편의 지독한 편지. 이것이 자기의 정성이 부족함일까, 혹은 남편이 철없는 탓일까를 탓하기 전에 먼저 돌아가신 시어머니에게 대하여는 죄스러웠다. 어쨌든 싸움이었던 것이었다.
 
15
그의 시어머니는 옥에게 무슨 말이든지 부탁할 때에는 두 손을 꼭 잡고 들여다보며,
 
16
“옥아, 너는 내 딸이지, 내 말 잘 듣지?”
 
17
이렇게 묻고 나서야 뒷말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
 
18
옥은 펄썩 주저앉는다. 방바닥은 산뜻한 맛이 있다. 뒤를 이어 보름달 같이 선연히 떠오르는 시어머니의 그 눈, 코, 입모습, 부지런하기로 댈 데 없는 그의 손발,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이다.
 
19
책상 앞으로 다가앉아 그는 책을 펼쳐들었다 놓았다. 연필을 쥐고 무엇을 쓰다가 박박 뜯어 두 손으로 꼬깃꼬깃하여 뒷문 밖으로 내쳤다.
 
20
말쑥하니 치워놓은 책상 위를 다시 들어내어 먼지를 떤다.
 
21
이렇게 뒤질 때 남편이 어려서 읽던 뚜껑 없는 책 몇 권이 나왔다. 책장 떨어진 것, 연필로 죽죽 내려그은 것, 먹점이 뚝뚝 박힌 것들이다. 따라 남편의 두둑한 손이 보였다. 언제나 흙장난하는 탓으로 손거스러미는 항상 일고 있었다.
 
22
어린 남편은 학교서 돌아오면 문턱에서 책보를 방안으로 팽개치고 선길로 나가는 것이었다. 옥은 뒤로 따라서며,
 
23
“어디 가?”
 
24
그는 휘끈 돌아보고 두말없이 나가고, 혹간,
 
25
“저기.”
 
26
하고는 도망질치는 것이었다.
 
27
옥은 저녁을 퍼놓고 기다리다 못해 사립문까지 나와서 머리를 배움하고 가고 오는 사람들을 남몰래 살펴보았다.
 
28
아득아득할 때 남편은 사립문으로 뛰어들자,
 
29
“오마이!”
 
30
냅다 치고는 팍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요리조리 궁리하던 옥은 이 소리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며 시어머님이 죽게 보고 싶었다. 자기네들을 남기고 먼저 간 시어머님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나 꾹 참고 남편을 껴안고 방으로 들어가며,
 
31
“왜 그래!”
 
32
남편은 한층 더 느껴 울며 옥의 무릎 위에 탁 실린다.
 
33
“누가 때려?”
 
34
“장손이가 여기를 때리지……”
 
35
볼을 가리켰다. 옥은 바투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며,
 
36
“정 나쁜 놈들! 울지 말라오 후일 내 보면 대신 때려주고 욕해줄게. 어서 밥 먹자오, 응?”
 
37
이렇게 말하여 겨우 울음을 그치게 한 그는 상 옆에 마주 앉아 밥을 물에 말아주고 반찬에 가시를 뽑아가며 불룩이는 그의 두 볼을 바라볼때 대견한 끝에 두 줄기 눈물이 앞을 캄캄케 하는 것이었다.
 
38
이러한 과거를 돌아볼 때 그나마 옛날이 다시 오지 못할 행복한 날이었음에 그의 가슴은 뻐근하여졌다. 따라서 어머니를 잃은 자기네들의 외로운 신세가 눈앞에 선하니 보인다.
 
39
그의 볼은 능금빛으로 타오르고 골치가 들썩들썩 아프기 시작하였다. 그는 횃대에 걸린 수건으로 힘껏 머리를 동인 후 책상 위에 푹 엎드렸다가 벌떡 일어나 아래윗목으로 왔다갔다하며 자기의 장래를 어림하여 보았다.
 
40
남편은 언제나 자기를 버리고 어떤 말쑥한 여학생과 함께 살 때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어쩔까?’ 이혼을 해주어야 옳을까? 이대로 견뎌 배겨야 할까?’ 그는 한참이나 바람벽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꼭 다물고, ‘망설이는 것부터도 벌써 어머니의 유언을 잊은 나다! 견디자! 어머님의 둘도 없는 아들이 아니냐? 그러고 나의 남편인 것이다!’ 이렇게 부르짖으며 책상서랍을 열었다.
 
41
그는 봉투 속으로부터 편지를 꺼내어 몇 번이든지 되읽어 본 후 그의 가슴에 꼭 갖다대었다. 그리고 조심성스러이 남편의 사진을 쳐다보았다.
 
42
밖에서 신발소리가 났다. 그는 손 재게 편지를 서랍 속에 밀어넣고 얼른 일어났다.
 
43
앞문이 열리자 영철 선생이 들어선다.
 
44
“어디 아픈가!”
 
45
옥은 그제야 머리에 동인 수건을 슬그머니 벗어서 뒤로 감추며,
 
46
“아뇨, 언제 오셨나요?”
 
47
“지금 오는 길일세. 어디 아픈 것 같은데……”
 
48
자세히 들여다보며 묻는다.
 
49
“아니야요.”
 
50
“그새 동경서 편지 왔겠지?”
 
51
“네, 어제 왔습니다.”
 
52
“음, 잘 있다던가?”
 
53
“네.”
 
54
“다른 말 없어?”
 
55
옥은 머리를 숙였다. 갑자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56
“왜? 무어랬던가?”
 
57
“저…… 아니요.”
 
58
그의 입은 굳이 다물어졌다. 그리고 그의 흰 목덜미에 새파란 힘줄이 불끈 일어나는 것이었다. 선생은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의 속을 어림하여 보았을 때 가엾음보다도 감복됨이 앞서는 것이었다.
 
59
“공부에 재미 많지, 어디 얼마나 배웠나 보세.”
 
60
선생은 이렇게 화제를 돌려서 그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려 하였다. 그는 책보를 당겨서 풀어놓았다. 선생은 다가앉아 그의 가리키는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61
“그새 많이 배웠지.”
 
62
선생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63
“열심으로 공부나 하고 모든 괴로움은 하느님께 바치게나. 세상 사람 치고 근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 줄 아나. 원체 괴로운 세상이니까. 먼저 깨닫고 달게 받아야 하네.”
 
64
옥은 잠잠하여 고름 끈을 만지작거렸다.
 
65
“이번 공부시키러 가서 자네 어머님 뵈었지.”
 
66
“네? 어머님!”
 
67
“요새는 영업도 그만두시고 무던한 영감님 얻으셔서 평안히 계시는 모양이야. 장차로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시겠다고 하시데. 어머님 위하여 많은 기도 올리게.”
 
68
“한 번 오시겠다는 말씀 없어요?”
 
69
“오시겠다대.”
 
70
시계는 네 시를 땅땅 친다. 선생은 시계를 바라보며 모자를 들고 일어섰다.
 
71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열심으로 공부하게. 그러고 자조자조 기도해.
72
내일 예배당에 꼭 가지?”
 
73
하고 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옥은 발부리를 굽어보며,
 
74
“네.”
 
75
선생은 댓돌로 내려서며 저편 구석에 석유초롱이 반만큼 눈에 띄었다.
 
76
“무엇 떨어진 것 없나?”
 
77
“아뇨.”
 
78
선생은 햇빛을 안고 집 모퉁이로 돌아갔다.
 
79
옥은 앞이 허전해지며 머리를 갈래갈래 풀어헤친 어머님의 환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80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친정어머니에게 대한 인상이란 남자들의 무릎과 무릎 사이로 옮아다니며 갖은 아양을 다 피우다가도 그들의 발길에 툭툭 채여 질질 울고 다니는 꼴이었다.
 
81
그러나 오늘에 생각키운 어머니 ── 그의 과거를 짐작해볼 때 한번도 보지 못한 자기 아버지란 사나이가 어딘지 모르게 그리우면서도 안타깝게 미워졌다 ── 어머니의 타락된 원인이 아버지의 소위(所爲)인 것을 깊이깊이 깨닫게 되었다.
 
82
그는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자 맨땅에 펄썩 주저앉으며,
 
83
“어머니! 당신도 깨끗한 처녀였겠지요. 아부지를 만나기 전에는…… 아 얼마나 쓰림을 당하시다 못해서 곱고 고운 어머니의 그 깨끗한 마음이 흐리어졌습니까? 이제야 비로소 어머님의 쓰라렸던 가슴을 알겠습니다. 괴로움을 잊기 위하여 술을 마시고 울지 않았습니까! 오 그 쓰림은 나에게도 왔습니다! 왔습니다.”
 
84
그는 일어났다. 해는 산 밭을 타서 뉘엿뉘엿 넘어가고 멀리 들리는 버들피리 소리는 차츰차츰 가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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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딸 [제목]
 
강경애(姜敬愛) [저자]
 
1931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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