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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딸 ◈
◇ 짝사랑 ◇
해설   목차 (총 : 6권)     이전 5권 다음
1931년
강경애 (姜敬愛)
 

1. 짝사랑

 
2
모 여학교 이년급 시험을 치르고 난 옥이는 낙제냐 급제냐의 두 의문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3
주인집 학생이 나왔다.
 
4
“어제 같이 오셨던 이가 누구야요?”
 
5
옥의 곁으로 앉았다. 입 속으로,
 
6
“남편이야요.”
 
7
“네.”
 
8
“그 학교서 낙제가 된다면 다른 학교에 가서 시험쳐 볼 수도 있겠지요?”
 
9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10
“붙으시겠지요. 염려 마세요.”
 
11
“저 같은 것이 어찌 붙기를 바라겠습니까?”
 
12
문편을 향하여 바라보았다.
 
13
“왜 일학년 시험을 치루어보시지요, 아무래도 좀……”
 
14
이 말을 듣자 더욱 안타까왔다. 차라리 이 학생의 말과 같이 일년급 시험을 보았더면 하는 후회가 났다.
 
15
“글쎄요.”
 
16
만일 낙제가 되면 무엇보다도 남편 보기가 난처하였다. ‘어쩔까?’ 낙제만 되었다면 두말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한 해 더 배워 가지고 오지!’ 겨우 이렇게 가라앉혔다. 그러나 가슴이 울울하였다.
 
17
“일본 가서 공부하신다지요?”
 
18
“네.”
 
19
“무슨 학교야요?”
 
20
그는 한참 생각하였다.
 
21
“와세다라든지요?”
 
22
옥의 얼굴은 빨개졌다. 얼마나 똑똑하면 남편 다니는 학교 이름도 자세히 모르나 할 것 같았다.
 
23
“네”
 
24
대답하는 소리를 듣자 안심되었다. 어쩐지 자기 입으로 학교명을 부르고 나니 별로 서투르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25
“그의 친구들도 많두먼요.”
 
26
“글쎄요.”
 
27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세 분인가 네 분인가 욱욱 밀려왔더군요.”
 
28
빙그레 웃어 보였다.
 
29
“그 중에 내 동무 숙희 오빠도 오구요.”
 
30
그는 가슴이 찌끈하였다. 벌써 우리 그가 숙희를 따라다니는 줄 이곳서도 아는가? 그리하여 내 속을 떠보느라고 저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는 다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지마는 이 말 끝에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31
“숙희 아셔요?”
 
32
“몰라요.”
 
33
“연희는 아시겠지요? 같은 고향이라지요?”
 
34
“네. 말은 못해 봤어도 낯만은 여러 번 보았지요.”
 
35
“숙희도 늘 놀러가던데요, 방학 때면.”
 
36
“글쎄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37
요리조리 묻는 것이 귀찮았다.
 
38
구둣소리가 나자 방문이 열렸다. 영실은 얼른 일어났다. 그리하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39
봉준이는 마루 구석에 피하여 섰다가 방으로 들어섰다. 옥이는 잠잠히 일어섰다.
 
40
“평안히 주무셨소?”
 
41
이렇게 묻고 나서 신문지 속에 들어 있는 노랑 구두를 꺼냈다.
 
42
“신어 보시오.”
 
43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그리고 발 내놓을 것이 무엇보다도 난처하였다. 그는 포켓에서 살색 양말을 꺼냈다.
 
44
“이것 신고 신어 보시오.”
 
45
그의 얼굴은 빨개졌다.
 
46
“어서 신어 봐요.”
 
47
“후일 신지요.”
 
48
“공연한 소리만 하는구려.”
 
49
봉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속으로 ‘시골 여자는 할 수 없어’하였다.
 
50
그는 남편의 좋지 못한 기색을 보고는 그만 아무 말 없이 돌아앉아서 양말을 신었다. 봉준은 양말 대님을 내어주었다.
 
51
“다 신었소? 자.”
 
52
구두를 들어 옥의 발에다 신겨주었다.
 
53
“일어나 보시오”
 
54
그는 아찔해지며 방안이 휭 돌아 겨우 바람벽을 의지하여 일어났다. 한참이나 들여다본 그는 웃음을 띠우고,
 
55
“됐소이다. 제법 여학생이구려.”
 
56
“그러고 학교에 갈 때에나 안 갈 때에나 저 분(粉) 발라요 크림도 베니도 네, 그래야 합니다.”
 
57
책상 위에 벌여 놓아 준 분병들을 가리켰다.
 
58
처음으로 남편의 다정한 말을 듣는 그는 너무 지나쳐서 어쩔 줄을 몰랐다.
 
59
“그러고 저녁에 우리 친구 몇몇을 데리고 올 테야요. 우물쭈물하지 말고 묻는 대답도 얼른얼른 해요, 네? 오늘 분 안 발랐구려. 저녁 먹고 세수하고 분 바르시오, 네.”
 
60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옥은 확확 다는 그의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61
“내 말대로 하시오.”
 
62
이렇게 재삼 다지고 나서 일어섰다. 그는 따라 일어서서 그의 뒷맵시를 바라보며 ‘나도 남편이 있구나!’ 이렇게 부르짖었다.
 
63
뒤이어 영실이가 웃음을 띠우고 들어왔다.
 
64
“무얼 다 사오셌어요?”
 
65
책상 아래 놓인 구두를 들고 들여다보았다.
 
66
“구두 사오셌소, 벌써부터……”
 
67
요리조리 굽어보더니,
 
68
“꼭 맞아요?”
 
69
“네.”
 
70
옥의 기뻐하는 것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영실 어머니도 웃으며 들어왔다.
 
71
“아이구머니, 곱구먼요.”
 
72
딸이 주는 구두를 받아들고 보았다.
 
73
“얼마 주었대요?”
 
74
“글쎄요, 자세히 묻지 못했어요.”
 
75
그들의 부러워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앞에 놓인 구두를 볼 때 눈물이 날 만큼 감격되었다.
 
76
그는 속으로 ‘어머니도 기뻐해 주세요!’ 이렇게 중얼거렸다.
 
77
남편의 말을 외우고 있던 그는 저녁 먹기 전에 새로 사온 향내 나는 비누로 말끔히 얼굴을 씻은 후 곱게곱게 단장을 하고 저녁상을 받았다.
 
78
밥상을 들고 나온 영실이는 피어오르는 듯한 그의 맑고 웃는 듯한 얼굴에 도취되어 몇 번이나 그를 쳐다보고 마음속 깊이 부러워하였다. 과연 남편의 사랑을 받은 만하다 하는 것을 당장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부부의 짝은 기울지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부럽게 생각하였다.
 
79
“같이 잡숩시다.”
 
80
밥깨를 여는 그는 영실이를 쳐다보았다.
 
81
“어서 먼저 자셔요.”
 
82
밥상으로부터 가는 김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83
밥상을 물린 그는 어떤 불안에 잠긴 사람 모양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84
불이 반짝 커졌다. 그는 가슴이 울렁울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만히 일어나서 마루로 나왔다.
 
85
변소간으로 나오는 영실은,
 
86
“우리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87
옥이는 방문턱에서 기웃기웃하여 아무 거리낌없을 것을 알고 들어섰다. 향하여 바른편 쪽으로 책상이 놓이고 왼편으로 고리짝 두 개가 겹놓였을 뿐 별다른 가구를 발견치 못하였다.
 
88
“앉으세요.”
 
89
주인 마누라는 웃음으로 대하여 주었다.
 
90
대문소리가 나자 구둣소리가 거푸 들렸다. 옥이는 숨을 죽이고 두 귀밑이 화끈 달았다. 무엇보다도 그들과 서로 인사할 것이 난처하였다.
 
91
가만히 듣던 영실은,
 
92
“여러 사람이 오나 봐요.”
 
93
방문 여는 소리가 나자 이쪽으로 향하여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94
“여기 안 들어왔나요?”
 
95
영실 어머니는 문을 열었다.
 
96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97
“아니요, 좋습니다. 여보, 어서 나오시오.”
 
98
옥이는 난처하였다. 봉준은 전등불 아래 부끄러움을 먹고 앉았는 그를 바라볼 때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쁨이 흘렀다. 무엇보다도 어서 빨리 그들 앞에 보이어 자랑하고 싶었다. 언제나 아내인 옥이를 대할 때에는 친구나같은 그런 느낌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99
“어서 나와요!”
 
100
그는 마지못하여 일어는 섰지만 건넌방까지 갈 것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맞방망이를 치고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하였다.
 
101
“학생도 같이 가면……”
 
102
영실을 내려다보았다. 영실 어머니는,
 
103
“그럼, 너도 동무해서 잠깐 갔다오너라.”
 
104
말이 끝나자 영실은,
 
105
“그럼 먼저 나가세요.”
 
106
옥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도로 앉았다.
 
107
“같이 가요.”
 
108
이 꼴을 본 봉준이는,
 
109
“그럼, 같이 나오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110
건너방으로 갔다. 영실은 책상을 마주 안고 화장을 시작하였다
 
111
“부끄럽지요?”
 
112
옥이를 바라보며 영실 어머니는 웃었다.
 
113
“처음이니까요.”
 
114
머리를 숙였다.
 
115
화장을 마친 영실은 새 옷을 갈아입고 앞장섰다. 옥이는 죽으러 가는 소 모양으로 안타깝게 떨렸다.
 
116
영실은 조심성스럽게 문을 열었다. 봉준은 벌컥 일어났다.
 
117
“들어오십시오.”
 
118
“오셨습니까.”
 
119
재일을 향하여 머리 숙여 보였다. 그들의 눈은 일시에 옥에게로 쏠렸다.
 
120
옥이는 가만히 영실 옆에 앉았다.
 
121
봉준이는 차례로 소개하였다. 옥이는 머리 숙여 그들에게 보였다.
 
122
“자네들, 왜 이리 점잖은가?”
 
123
이 방안의 인기가 옥에게로 쏠림을 알자 그는 견딜 수 없이 기뻤다. 그는 빙글빙글 웃었다.
 
124
“집 주인부터 점잖으니……”
 
125
재일은 봉준이를 보았다.
 
126
원선이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재일의 어깨로 한쪽 눈을 가리고 옥이를 뜯어 보았다. 눈, 코, 입술, 살빛, 몸집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양미간을 약간 찡긴 것을 보아 그의 쓰라린 과거를 알리웠다.
 
127
몇 해를 두고 의문의 주인공인 옥이는 이름과 같은 옥(玉) 같은 여자였다.
 
128
그는 스르르 눈을 감고 옥이 쓴 편지 일절을 생각해 보았다. 따라서 봉준이가 곧장 부러워졌다.
 
129
“숙희도 데리고 오시지요, 왜?”
 
130
봉준이와 옥이는 일시에 가슴이 찌르르하였다.
 
131
“왜 모시고 오지?”
 
132
봉준이는 동을 달았다.
 
133
“잊었습니다. 후일에는 같이 오지요. 옥씨도 사랑해 주십시오.”
 
134
어느 좌석에서나 빈정대는 그가 갑자기 여기서만은 점잔을 빼었다.
 
135
“당신, 집에 온 손님들을 대접할 줄도 모르시오?”
 
136
봉준은 웃는 눈으로 옥이를 보았다.
 
137
“그런 소리 말게. 우리가 경성 사는 것만큼 주인은 우리들이 아닌가, 여보게.”
 
138
원선이를 돌아보았다.
 
139
“이 사람은 벌써 조으네. 그럼 어디로든지 가십시다.”
 
140
휘 둘러보았다.
 
141
봉준은 속으로 ‘이놈이 벌써 미쳤나’ 하면 일종의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
 
142
“나가십시다. 처음이니만큼 구경도 하시구요.”
 
143
재일은 옥이를 보았다.
 
144
재일의 꼴을 본 영실은 더 앉았기가 퍽 괴로웠다. 그리하여 살짝 일어났다. 옥이는 그의 치마 귀를 맘껏 잡았다.
 
145
“놓으세요.”
 
146
그들은 영실을 보았다.
 
147
“앉으셔요.”
 
148
뒤를 이어 이런 말이 거푸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뿌리치고 나갔다. 혼자 된 옥이는 아까보다 더 안타깝고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원선은 재일을 꾹 찔렀다.
 
149
“가세.”
 
150
옥의 모양을 보고 더 앉았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일은 밑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옥의 수줍어하는 것을 볼수록 더한층 아리따웠다.
 
151
“어디로 갈까.”
 
152
재일은 일어나는 원선이를 쳐다보았다.
 
153
“일어나게나, 어디로 가든지.”
 
154
그는 문밖으로 나섰다. 재일과 봉준이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
 
155
“어디 가든지 밑자리는 제일 무거웠는데 오늘은 웬일이야?”
 
156
봉준이는 문밖을 나서자 원선이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157
“글쎄.”
 
158
재일이는 방문을 배움히 열고,
 
159
“안녕히 지무십시오.”
 
160
옥이는 머리를 숙인 채 일어섰다.
 
161
대문 밖을 나서자 재일은 봉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162
“과연 드문 미인인걸!”
 
163
“그럴까? 하지만 숙희씨만은 못하지 않어.”
 
164
“허, 미친 말이야. 못한 게 무언가? 그렇게 미치더람 한 번 말해 볼까, 숙희에게?”
 
165
봉준은 앞이 캄캄하도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때가 그의 다만 한때 인 기회같이 생각되었다.
 
166
“참말인가?”
 
167
“이 사람, 또 귀가 바짝 당기는 모양이지?”
 
168
웃음으로 쓸어쳤다. 자기로서도 오늘에 한하여만 갑자기 전과 달리 말하기가 좀 점직했던 것이다.
 
169
봉준도 이 눈치를 알고 더 채치고 싶지만 원선이가 꺼리어서 잠잠하고 말았다.
 
170
“어째서 이야기가 중단이 되나? 마자 마치지?”
 
171
봉준이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172
“자네 전부터 영실이를 알았던가?”
 
173
“응, 숙희와 동무라네. 그래서 몇 번 우리집에 놀러 왔어. 그 통에 나도 알게 되었지.”
 
174
“누이 있는 사람들은 수 나겠네.”
 
175
“그럴지도 몰라.”
 
176
둘이는 웃었다. 원선이는 멍하니 앞길만 바라보고 수굿수굿 그들의 뒤를 따랐다.
 
177
“여보게, 옥씨가 과연 미인이지! 자네는 어떻게 보았나?”
 
178
재일이는 뒤를 돌아보며 멈칫 섰다. 봉준이도 돌아보았다.
 
179
“글쎄.”
 
180
“똑똑한 대답을 해 버릇하게. 밤낮 글쎄가 무어야!”
 
181
봉준이는 안타까움에 이런 말을 하였다.
 
182
쌀쌀한 바람이 그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183
“어디로들 또 가겠나?”
 
184
둘이는 씩 돌아보았다.
 
185
“무어 좀 먹고 헤지세. 어디로 갈까?”
 
186
언제나 먹는 말은 재일이가 먼저 꺼내었다.
 
187
“그만두지, 가랴면 자네들끼리나 가보게.”
 
188
“얼른 같이 갔다 가세나.”
 
189
“곤해서 못 견디겠네.”
 
190
봉준이를 보았다.
 
191
“늙으니까 다르다니까.”
 
192
전차가 앞으로 지나간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잠잠하였다.
 
193
“자, 난 가겠네.”
 
194
원선이는 청진동 골목으로 빠졌다. 전신이 오싹해지며 따뜻한 방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195
“잘 가게.”
 
196
둘이는 말없이 걸었다. 어쩐지 적적함을 느꼈다.
 
197
재일은 옥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따라서 이때까지의 그의 눈으로 본 많은 여자들을 되풀이하여 보았다. 숙희 때문에 여학생들도 퍽이나 알았고 화류계 여자들은 그 수를 헤일 수 없으리 만큼이었다. 그러나 자기로서 흡족히 생각한 여자는 없었다. 그저 그렇고그렇고 하였다.
 
198
하나 오늘 저녁 옥이를 보자 세상에 저런 여자도 있는가 하고 놀랄 만큼이었다. 그럴수록 숙희를 미끼삼아 반드시 옥이는 자기 것으로 만들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처녀, 부인을 가릴 사이 없이 얼굴만 고우면 그만으로 생각되었다.
 
199
“이혼은 집어치우게.”
 
200
그의 심중을 떠보려 하였다. 봉준이 역시 옥이를 미끼삼아 숙희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201
“숙희씨 같은 여자는 없으니까 어쩌겠나. 내 스스로도 이상히 아는 적이 많았네마는…… 물론 옥에게 대하여 동정하지 않는 배는 아니야. 그러나 사랑이 안 가는 데야 어쩌란 말인가?”
 
202
“음, 그렇지. 사랑이 없는 데야 동정한들 어쩌겠나? 나도 전부터 자네 마음을 모르는 배 아니고 따라 숙희를 연모하는 것까지도 대강은 짐작하였네.
203
그래서 그 애를 만나면 자네 말을 늘 하다시피 하였네. 어찌했든 이혼만 하게나.”
 
204
“고맙네.”
 
205
봉준이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206
한참 후에 그는,
 
207
“자네만 믿네!”
 
208
재일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209
“옥씨가 불쌍하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210
봉준이를 보았다.
 
211
옥이는 아침을 먹고 머리를 풀어놓았다. 얼빗으로 슬슬 가리며 면경 속으로 비치는 가지 얼굴을 들여다보고 쫑긋 웃었다. 어젯밤 남편의 좋아하던 꼴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어떻게 붙었을까?’그 많은 사람이 시험쳤는 데 아무래도 선생들이 내 이름을 잘못 불렀지!’이런 생각을 할 때 가슴이 선뜻하였다.
 
212
영실이가 들어왔다.
 
213
“머리도 숱하기는 해요.”
 
214
그는 얼빗을 빼앗아 가지고 몇 번 가리운 후에 두 갈래로 꽁꽁 땋아가지고 곱슬하게 틀어놨다.
 
215
“고운데요, 어쩌면 그리 고울까.”
 
216
앞으로 와서 말똥히 들여다본다. 그는 가쁜함을 느끼며 두 귀밑이 빨개졌다.
 
217
“그런 소리 말아요.”
 
218
얼굴을 돌리며 웃었다.
 
219
“웃으니까 더 곱네. 여자로 태어날 바에는 저렇게 고와야지, 무얼!”
 
220
며칠 전날 밤 재일의 꼴이 나타났다.
 
221
“학생도 그만큼 고왔으면 됐지요,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
 
222
그는 머리칼을 일삼아 주워 뭉쳐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영실 어머니도 부엌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내다본다.
 
223
“꽃송이 같애요.”
 
224
옥이는 이런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리고 내가 참으로 붙었는지? 이런 의문으로 가슴이 꽉 채웠다, 그는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왔다.
 
225
“참으로 붙었을까요?”
 
226
영실은 면경 속으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다가 살짝 비켜 앉았다.
 
227
“그럼 학교서 거짓말할까요?”
 
228
너무 좋아하는 꼴이 밉살스러웠다.
 
229
“거짓말보담도 혹시 이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 또 있는가 해서 하는 말이지요.
 
230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지요.”
 
231
영실은 일어났다.
 
232
“어서 학교나 가십시다. 잔 걱정 말고요.”
 
233
옥이는 검정치마 흰 저고리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책상 아래 놓인 구두를 꺼내어 놓고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신었다.
 
234
안방문 소리가 나자 영실은 나왔다.
 
235
“어서 나와요.”
 
236
이러고 나가기가 퍽이나 부끄러웠다. 어쩐지 옛날 자기와는 딴판이 된 듯한 느낌이 생겼다. 그때에 떠오르는 것은 숙희와 연희였다.
 
237
그는 남빛 책보를 들고 영실의 뒤를 따랐다. 다리가 휘청휘청하는 것이 좀 폐로웠다.
 
238
“재미나요, 이렇게 언니와 내가 함께 다니면 오작이나 좋아요.”
 
239
쫑긋 웃어 보였다. 그는 숨이 차도록 답답함을 느꼈다. 지나는 사람들은 자기만 보는 듯싶었다.
 
240
“오늘 저녁, 원선인가 그이는 떠나신댔지요?”
 
241
“네.”
 
242
가까워오는 학교는 빨간 벽돌집으로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243
개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들은 집으로 오자 옷을 벗고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244
옥이는 이때껏 지리쳐 두었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교장선생의 말이 다시금 그의 귀를 울려 주었다. 그리고 뒤를 따라 나타나는 얼굴 흰 여선생들은 하늘같이 높아 보였다.
 
245
점심상을 들고 영실은 들어왔다. 그는 얼른 일어나 받아놓았다.
 
246
“어서 먹읍시다.”
 
247
영실은 저를 들고 마주 앉았다. 권하는 바람에, 더구나 다정스러이 마주 앉는 김에 숟갈을 들었으나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울울하여서 좋은 것도 언짢은 것도 판단할 여지없이 어림터분하였다.
 
248
상을 물린 옥이는 책상 곁으로 다가앉아 ‘나도 이제부터는 여학생인가?
 
249
숙희와 연희와 같은……’ 맘에 떠오르는 것은 영철 선생이었다. ‘그가 이 소식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물 먹고 싶듯이 그리워졌다. 같이 있을 때는 그만그만하여 무던한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뚝 떠나고 보니 돌아가신 어머님이나 못지않게 보고 싶었다. 보다도 자기의 달라진 옷 맵시, 시험 쳐서 입격된 것을 그에게 자랑 겸 친히 눈에 보이고 싶었다.
 
250
그는 붓을 들었다. 영철 선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251
저녁이 되자 옥이는 화장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후 책상 앞에 마주 앉아 갓 사온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모든 잡생각은 잊고 책 속으로 정신이 폭 잦아 들어갔다.
 
252
“여보, 옥씨!”
 
253
깜짝 놀라 휘휘 돌아보며 뒤미쳐 일어났다.
 
254
“나와요.”
 
255
뒤창문 곁에서 남편의 소리가 났다. 그는 몸 돌아볼 여지없이 밖으로 나갔다.
 
256
큰 대문을 나선 옥이는 창문 곁으로 돌아갔다. 희미한 달빛에 그의 시커먼 윤곽만이 보였다.
 
257
“저 새 옷 갈아입고 구두 신고 나오시우, 벌써 자우?”
 
258
“아니오.”
 
259
“그럼 얼른 들어가서 펄쩍 갈아입고 나와요.”
 
260
“왜요?”
 
261
황황히 날치는 남편이 이상해 보였다.
 
262
“글쎄 여러 말 말고 바삐 그리 해요.”
 
263
남편의 말이니 할 수 없이 돌아서서 들어오면서도 마음으로는 불쾌하였다.
 
264
무엇보다도 남자들과 마주 앉기가 거북스럽고 싫었던 것이었다.
 
265
방으로 들어온 옥이는 또다시 나갈 것이 거북하였다. 남편과 가지런히 서서 다니는 것은 기쁘게 생각이 되나 그러나 남편의 친구들과 섭쓸리기는 안타깝게 싫었던 것이다.
 
266
“안방 학생 데리고 갑시다.”
 
267
“잔소리 말고 어서 나와요!”
 
268
소리치는 바람에 두말도 못하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269
“어디 가요?”
 
270
안방 밀장문 사이로 영실의 외짝 눈이 보였다.
 
271
“저기.”
 
272
옥이가 큰 대문 밖으로 나서자 봉준이는 허방지방 뛰었다. 남편의 황급히 날치는 꼴을 보는 옥이는 무슨 일인가 하여 어리둥절하였다.
 
273
골목쟁이를 돌아서자 눈이 시큼해지도록 빛나는 가스불 앞에 남편은 우뚝 섰다.
 
274
“어서 오르십시오.”
 
275
몇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소리와 함께 휘발유 냄새가 옥의 코를 벗튀었다.
 
276
“이렇게 만나 보니 반갑습니다.”
 
277
옥이는 얼결에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연희와 숙희였다. 순간에 그의 가슴은 선뜻하였다.
 
278
택시는 달음질쳤다. 문득 자기와 남편이 그리운 고향 떠나던 때가 눈앞이 보이는 듯하였다.
 
279
옥의 바른편 무릎 사이로 옮아오는 연희의 따뜻한 체온은 같은 고향 사람임을 더욱 느끼게 하였다.
 
280
숙희는 연희와 무슨 귀엣말을 건네고 있었다.
 
281
“얼마나 기쁘십니까, 옥씨.”
 
282
원선이는 자기 앞에 똑바로 앉은 옥의 목덜미를 보았다. 옥이는 머리를 숙이는 외에 잠잠할 뿐이었다.
 
283
“축하 올립니다, 옥씨.”
 
284
이번에는 재일의 목소리였다. 이마 위에 땀이 나도록 옥이는 부끄러웠다.
 
285
암만 대답을 하려고 하였다가도 목소리가 밖에까지 나가 주지를 않았다.
 
286
어쩐 일일까 ‘ , 내가 벙어리 되려나? 하기까지 의문이 들어갔다.
 
287
“선생님, 이제 가시면 언제쯤 나오시게 되나요?”
 
288
원선이는 무슨 생각을 하다가 얼른 숙희를 보았다.
 
289
“글쎄요, 여름방학 때나 오게 되겠지요.”
 
290
곁에서 듣는 옥이는 한층 떠 부끄러웠다. 자기는 묻는 말도 대답 못하는데 숙희는 말을 건넨다. ‘언제나 나도 저만큼 되어 보려나!’하고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는 자기와 같이 못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남편이 배척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하였다.
 
291
경성역에서 내린 그들은 대합실로 밀려들어갔다.
 
292
옥이는 어쩌다 넘어질세라 겁이 나서 미처 그들의 뒤를 따르지 못하였다.
 
293
그는 한편 구석에 가만히 서서 머리를 숙였다.
 
294
낮같이 밝은 불빛 아래 흔들리는 그 사람의 동작을 따라 까만 눈만이 반들거렸다.
 
295
그들은 의자에 척척 걸어앉아 돌아보니 옥이가 없었다.
 
296
“여보게, 옥씨 어디 가셨나?”
 
297
휘휘 둘러본 재일은 이편으로 뛰어왔다.
 
298
“저리로 가십시다.”
 
299
불빛에 빛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300
“아뇨”
 
301
옆에 의자에 가만히 걸어앉았다. 자칫하면 푹 고꾸라질 것 같았다. 옥의 이마 끝에 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302
재일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옥의 옆에 앉았다.
 
303
이 꼴을 본 옥이는 시재 걷다가 엎으러져서 망신을 톡톡히 할지언정 같이 앉고 있기는 싫었다. 그는 살짝 일어나서 앞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걸어나니 심상하였다.
 
304
눈결에 남편을 보니 그는 자기편으로 외면을 하여 돌아앉고는 얼빠진 놈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에 그의 눈에서는 있는 불이란 다 기어나오는 것 같았다.
 
305
원선이는 차표를 타 가지고 옥이 섰는 편으로 왔다.
 
306
“이 사람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십니다.”
 
307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발부리를 굽어보았다.
 
308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
 
309
며칠 동안에 처음으로 듣는 음성이었다. 약간 들리는 듯한 가는 말씨가 원선의 귀에다 귀엣말을 하는 듯이 장그럽게 들렸다.
 
310
“공부 잘하십시오. 그저 배워야 합니다.”
 
311
요란한 소리를 따라 차는 들어왔다. 역부의 고함소리에 놀란 옥이는 입 속으로 ‘게이죠’ 하고 되뇌어 보았다.
 
312
원선이는 숙희 앉은 편으로 뛰어갔다. 서로 손을 잡고 이편으로 뛰어오자,
 
313
“어서들 들어가세요.”
 
314
꾸리 묶어선 듯한 사이로 들어섰다.
 
315
“이번에는 나 혼자 지낼 생각이 난처하네. 이 학기 다 지나기 전에 곧 들어들 오게. 공연히 놀면 뭣하겠나?”
 
316
연희가 옥의 곁으로 왔다.
 
317
“고향서 편지 왔어요?”
 
318
“아직 아니 왔어요?”
 
319
연희를 쳐다보았다. 맞은편에 선 숙희는 새침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320
“안녕히들 계셔요.”
 
321
바라보니 원선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잘 보이지 않았다. 플랫포옴에서 차에 올라선 원선이는 이편을 향하여 모자를 높이 들어 보이고 차안으로 들어가자,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어밀었다.
 
322
이편에서도 모자로 손수건으로 내어흔들기 시작하였다. 원선이는 그들 틈으로 언제까지나 고요히 섰는 옥이를 보았다.
 
323
학교로부터 돌아온 옥이는 옷을 벗고 잠옷 비슷이 만든 통옷을 입은 후 밖으로 나와서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324
창문까지 열어 젖히고 방을 쓸어내었다. 그리고 책보를 책상 위에 풀어헤쳐서 책보는 문밖에 활활 떨어다 네모 반듯이 개어 한편 옆으로 착 놓았다.
 
325
그리고 우선 공부할 책만 따로 놓고는 모두 착착 겹놓았다.
 
326
그는 책상 위를 이렇게 정돈해 놓고는 오늘 온 신문을 들었다. 제 일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보기 시작하였다.
 
327
영실 어머니는 건넌방으로 건너왔다. 자다 나온 모양인지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눈이 빨갛다.
 
328
“영실이는 아직 시간이 남았나?……”
 
329
이렇게 혼자하는 말처럼 하고 나서 되뚝한 파란 곽과 편지를 내어밀었다.
 
330
“옛네. 아까 웬 심부름꾼 애가 가져왔기에 누가 보내더냐고 물어도 대지 않고 가데.”
 
331
그는 달갑지 않게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우선 편지부터 보리라 하고 겉 피봉을 보았다. 주소도 성명도 아무것도 써 있지 않았다. 그는 문득 일어나서 의심과 함께 봉투를 뜯고 보았다.
 
332
영실 어머니는 말똥말똥 눈치만 따기 졸음도 어디로 달아난 모양이었다.
 
333
“무어랬나?”
 
334
다 보고 난 옥은 억지로 웃음을 띠었다.
 
335
“장난감 보낸다는 말입니다.”
 
336
“응.”
 
337
옥이는 곽과 편지를 책상 아래로 밀고 여전히 신문을 들었다.
 
338
영실 어머니는 펴보았으면 하고 바라보다가 보지 못하게 되매 허수하였다.
 
339
“에, 덥다.”
 
340
얼굴에 붙는 파리를 쫓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341
발자취 소리가 멀어지자 그는 신문지에서 눈을 떼어 문밖을 내다보았다.
 
342
신문지도 맥없이 날아 떨어지고 말았다.
 
343
장독에 붙었던 왕파리는 왱, 하고 쨍쨍히 들여 쬐는 볕을 따라 문턱까지 날아왔다.
 
344
자기는 이곳에 오직 남편 하나를 믿고 따라온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차츰차츰 자기를 찾아오기도 싫어하는 듯하였다. 어쩌다 오게 된다면 반드시 재일과 함께 왔다가 가곤 하였다. 다소 의논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가슴에 뭉치고 또 뭉쳐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 혼자 삭아지고 말았다.
 
345
이런 것을 생각하고 나니 바람벽을 마주 앉은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346
그는 다시 편지를 끌어내어 자세히 몇 번이든지 읽어보았다. 글자 한자 어 그러지지 않고 분명히 쓴 글씨였다. 이것이 참일까? 남편이 일부러 시험해 보누라고 이런 일을 않았나? 그렇다면 반면에 남편이 자기에게 대한 애정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쁜 일이랴! 고마운 일이랴! 하지만 어디까지 든지 참인듯 싶은 편이 세었다.
 
347
남편의 둘도 없는 친구가 이런 일을 내게 감히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필연 남편과 재일이가 함께 공모해 가지고 어떠한 계책을 내어서라도 자기와 이혼될 조건을 만들어 가지고자 하는 수단같이 보였다.
 
348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설움이 가슴을 올올이 찢는 듯하였다. 그는 책상 위에 폭 엎드려서 흑흑 느껴 울었다.
 
349
문앞으로 지나치던 영실이는 우뚝 섰다.
 
350
“언니 왜 울어?”
 
351
된 햇빛이 내리쬐어 영실의 머리는 시재 타지는 듯하였다. 그는 마루로 올라앉자 책보를 방으로 던지고 달려왔다.
 
352
“왜 울어?”
 
353
옥의 어깨를 흔들었다.
 
354
“공연히 울지 뭐.”
 
355
“언니 공부 준비하지 않우?”
 
356
“해야지.”
 
357
그는 눈물을 이리저리 씻고 나서 책을 펼쳐 들었다. 하나 샘솟듯 나오던 눈물은 뒤를 이어 떨어졌다.
 
358
“에 덥다, 지독히 덥네.”
 
359
영실은 후닥닥 뛰어나갔다.
 
360
옥이는 도로 책을 놓고‘어머니! 나는 어찌라우!’이렇게 부르짖을 때 ‘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번개같이 옥의 가슴을 두드려주었다. 그의 시어머니께서 임종시에 턱을 가불가불 채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부르짖음이었다.
 
361
어린 옥이는 무슨 말인고 하고도, 너무도 또랑또랑한 힘있는 말이매 그의 머리에 꽉 찔려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항상 그는 입 속으로 외우고 있었다.
 
362
‘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다시 한번 불러보았다.‘얼마나 잘 아시고 하신 말씀이랴!’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든든한 의지가 생긴 듯싶었다. 따라서 북받쳤던 설움이 가라앉고 거뜬해짐을 느꼈다.
 
363
이 말 한 마디가 오늘날 옥에 있어서는 얼마나 귀한 보배였는지 몰랐다.
 
364
‘오, 어머니! 당신께서 남기고 가신 그 귀한 말씀은 내 가슴에, 내 가슴에 품었나이다.’ 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365
한참 후에 그는 다시 눈을 떠서 앞에 놓인 곽과 편지를 노려보았다. ‘흥!
 
366
몰랐다! 너희들이 짐작한 그런 어리석은 여자는 아닌 것이다! 시계와 반지로 인하여 일생을 버릴 그런 못난 계집은 아니다. 오! 아니다!’ 그는 벌컥 일어났다.
 
367
봉준이는 저녁을 먹고 문밖으로 뛰어나왔다. 시원한 바람은 그의 머리를 다소 거뜬히 해주는 듯싶었다.
 
368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물먹고 싶듯이 숙희가 그리워졌다. 어젯밤 오래도록 숙희 방에서 놀았건마는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못한 지금에 생각해본다면 몇삼년이나 된 듯이 멀어 보이고 다시는 숙희와 마주 앉아 볼 것 같이 않았다.
 
369
그는 슬금슬금 걷기 시작하여 어느덧 숙희집 문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마침 안으로부터 숙희가 길을 굽어보며 나왔다.
 
370
“재일 군 집에 있나요?”
 
371
숙희는 머리를 들고 봉준이를 바라보았다.
 
372
“오빠는 금방 나갔는데요…… 아마 봉준씨한테 가셨을 것 같애요.”
 
373
숙희는 앞으로 걸었다. 봉준이도 따라섰다. 이 여자가 어디를 갈까? 이런 생각을 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남몰래 달았다.
 
374
“숙희씨!”
 
375
그는 발길을 멈추고 섰다.
 
376
“조용히 저를 만나줄 수가 없습니까?”
 
377
“무슨 볼일이 있세요?”
 
378
“네, 있습니다.”
 
379
봉준은 앞장을 섰다.
 
380
“저를 따라오십시오.”
 
381
“오늘은 제가 바쁜데요.”
 
382
봉준은 모처럼 얻은 기회를 놓쳐 버릴까 하여 쩔쩔매었다.
 
383
“숙희씨! 잠깐만 와주십시오, 잠깐만!”
 
384
그의 음성은 떨렸다. 숙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잠잠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엇보다도 그의 하는 꼴을 보자는 호기심이었다.
 
385
봉준이는 숙희가 따르는 것을 알자 발길이 허공에 뜬 듯이 날아가는지 걸어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따라서‘이것이 꿈인가?’하는 의심도 몇 번이든지 들었다.
 
386
그들은 남산 솔밭 사이로 들었다. 노송나무를 사이로 둘이는 마주섰다.
 
387
“앉으셔요.”
 
388
봉준이는 자기 양복 웃저고리를 벗어 깔아놓았다.
 
389
“앉으셔요, 네?”
 
390
거의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391
“좋습니다.”
 
392
숙희는 여전히 소나무를 기대어 섰다. 아까 거리에서보다는 훨씬 울울함을 느꼈다. 그러나 숙희는 속으로 ‘제가 어떻게 할 테냐! 제까짓 것이!’ 이렇게 스스로 위로받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393
셀 수 없이 들어선 소나무들은 마치 비밀회의로 모인 듯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떨어진 파란 달빛은 봄바람에 떨어진 꽃송이 꽃송이 같았다.
 
394
“숙희씨! 제가 올린 편지는 받아보셨겠지요?”
 
395
“네.”
 
396
“어째서 회답을 주시지 않았나요?”
 
397
자리가 자리인 만큼 숙희로서도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무엇을 깊이 생각하다가
 
398
“회답을 기다리셨습니까?”
 
399
모처럼 고대한 대답은 반문으로 되돌아왔다.
 
400
이렇게 반문하는 뜻도 봉준이로서도 대강 짐작하였다. 그렇지만 이리저리 따져 묻자면 공연한 시간을 허비할 뿐더러 새삼스럽게 과거 일을 탄해 가지고 말썽부리잘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401
“네, 기다렸습니다. 여러 말씀 할 필요 없구요. 이미 숙희 씨가 편지를 통하여 저의 마음을 다 아셨을 테니까요……”
 
402
여기까지 말한 그는 숨이 꼭 막혔다.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잠잠하던 봉준이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403
“한 마디에 달린 것이올시다. 저의 사랑을 받으시겠습니까?”
 
404
봉준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빤히 들렸다.
 
405
숙희의 전신은 오싹하였다. 따라서 이 솔밭이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자 그는 소나무를 맘껏 껴안고,
 
406
“봉준씨는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407
“네, 형식상으로는 있다고 볼는지 모르오나 실은 저는 총각입니다!”
 
408
이 말에 그는 악이 치받쳤다.
 
409
“총각이라구요? 차라리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410
“숙희씨! 당신 앞에 거짓말이 손톱만치나 있다면 당장 벼락이라도 맞겠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속일지언정!”
 
411
그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412
“숙희씨!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 가슴속에 여자의 흔적이 있다면 당신의 환영(幻影)이겠지요. 밤낮으로 당신을 그리워 애쓴 죄밖에는 없습니다.”
 
413
숙희는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언제까지나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만을 듣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 없는 터, 그렇다고 발길을 돌리려 하니 애걸애걸하는 꼴이 불쌍하다 못해 곧 난처하였다.
 
414
“봉준씨, 이 부족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는 것은 제 몸에 지나치는 영광으로 압니다만, 아직 철없는 저라서 사랑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려가십시다.”
 
415
그는 발길을 옮겼다.
 
416
봉준이는 아찔하여 얼핏 소나무를 쓸어안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 비실비실 따랐다.
 
417
멀리 사라지려는 숙희의 치마폭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품겨 있었다.
 
418
정신없이 하숙으로 돌아온 봉준이는 방바닥에 콱 쓰러져 앓는 소리를 꿍꿍 하였다.
 
419
주인 마누라는 어쩐 일인지 몰라 궁금하였다. 금방까지도 저녁 잘 먹고 이야기를 시끄럽게 하던 사람이 무섭게 앓는 소리를 하니 아마도 체했나 보다 하고 건너갔다.
 
420
“어쩐 일이세요? 어디 편치 않으세요?”
 
421
“네, 물 좀 주시구려.”
 
422
봉준이는 시뻘건 눈으로 쳐다보았다.
 
423
“효주야! 물 떠오나라!”
 
424
뒤이어 얼굴 나부죽한 어린 처녀가 두 손으로 시첩을 받들고 나온다.
 
425
“선생님 아프시다.”
 
426
효주는 어머니 뒤에 붙어 앉아 이따금씩 그를 엿보았다.
 
427
“옥이도 오랄까요?”
 
428
“그만두셔요.”
 
429
보기 좋게 꿀꺽꿀꺽 물을 들여마신 봉준이는 바람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430
바람벽에 진 자기 그림자를 보고 외로운 설움이 가슴을 메어지게 하였다.
 
431
하여 모르는 사이에 베개 밑이 척척해졌다.
 
432
멍하니 바라보던 주인 마누라는,
 
433
“물수건 해서 대드릴까요?”
 
434
“수고시럽게…… 요.”
 
435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벽에 걸린 수건을 적시어 머리에 번갈아 대주었다. 훨씬 시원한 맛이 있었다.
 
436
신발소리가 나자 재일이가 성큼 들어섰다.
 
437
“어쩐 일인가?”
 
438
“갑자기 아프시답니다.”
 
439
“어디?”
 
440
봉준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는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떠서 재일을 보자 그의 손을 꽉 잡고 흑흑 느껴 울었다.
 
441
“어디 아픈가? 응?…… 울기는…… 왜.”
 
442
재일은 그의 머리를 짚었다.
 
443
“과다하는데, 옥씨 오셨댔나?”
 
444
“웬걸요, 아프신지 알지도 못할 터인데요.”
 
445
“오라지, 밤에 적적하지 않어?”
 
446
친구를 생각함보다도 자기가 그리웠던 것이다. 매번같이 이 집을 찾게 되면 ‘행여나 옥이를 만날까?’하는 생각이었다.
 
447
“그만두시라니까요.”
 
448
“오라게 원.”
 
449
봉준이는 잠잠히 눈을 감아버렸다.
 
450
요 며칠 동안 재일은 옥이로부터 무슨 회보가 있을까 하여 지나다니는 체부만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가물해져도 따라 감감해지고 자기의 예측한 바와는 지나치게 어긋났다.
 
451
처음 짐작은 며칠 동안이면 옥의 마음을 움직여 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몇 개월이 된 오늘까지도 꿀먹은 벙어리 모양이었다.
 
452
“어쩐 일일까? 내 수단 방법이 틀린 것인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453
그는 난생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황금이면 만사에 거칠 것이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의 신념도 다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454
최후의 실낱 같은 그의 희망은 옥의 뒤를 따르다 직접 행동을 취하는 외에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으레 옥의 하숙집을 몇 번이든지 돌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한 번도 기회가 마땅히 없었다.
 
455
방금 옥의 집을 들러 오는 길이었다.
 
456
“곤하신데 나가십시오.”
 
457
눈이 거적해진 주인 마누라를 쳐다보았다.
 
458
“에그 참 졸립니다. 미안하나마 저는 먼저 나갑니다. 앉았다 가십시오.”
 
459
무릎에서 잠든 효주를 깨워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460
“여보게, 오늘 숙희씨를 만나지 않었나.”
 
461
“응, 그래, 말좀 해보았나?”
 
462
봉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463
“말하면 소용이 무언가?”
 
464
“그래, 거절받았다는 말이지?”
 
465
“그럼.”
 
466
“직접 행동을 하여야하지 말만을 누가 무서워 하나. 그래 손 한 번 걸쳐 보지 못한 모양이네 그려.”
 
467
그는 씩 웃었다.
 
468
“그런 일은 난 못하겠데. 바루 성공을 못하면 말았지.”
 
469
“흥! 아직 멀었네. 그렇게 약해 가지고야 일이 되나.”
 
470
“여보게, 자네 힘써 주게나!”
 
471
“물론 힘써 주지. 한데 여자 암팡진 것은 실은 여간 지독한 것이 아닌 모양이데.”
 
472
옥이를 두고 이런 말함임을 봉준이도 짐작해보았다.
 
473
“아무렴 자네 전에는 나더러 비웃댔지. 그리 단단히 지내보게.”
 
474
“자네 옥씨랑 꼭 이혼할 생각이지?”
 
475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묻나?”
 
476
어지간히 몸이 단 것을 알았다.
 
477
“글쎄……”
 
478
빙긋이 웃었다.
 
479
“아무렴 숙희씨를 생각하는 나인 것을 잘 알지, 자네도?”
 
480
“오래.”
 
481
“그러면 묻는 자네가 그른 것 아닌가?”
 
482
재일은 멍하니 전등불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듯하였다.
 
483
봉준은 재일을 사귄 후로 이러한 태도를 처음 보았다.
 
484
언제나 쾌활하던 재일이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으랴 하고 생각하니 그가 불쌍히 보였다.
 
485
“자네도 사랑의 쓴맛을 이제야 보네 그려.”
 
486
재일은 자리 속에서 눈을 뜨자 엊저녁에 날치던 봉준의 꼴이 마치 활동사진으로 보는 듯하였다.
 
487
자기 경험으로 미루어 며칠이나 몇 달이나 갈 줄 알았던 봉준의 상사병은, 자기에게 알려진 후부터도 준 이태가 지나서 올해는 공부까지 전폐하고 봄부터 가을철까지 온전히 전문으로 종사를 하다가도 결국은 무서운 신경쇠약 병까지 얻어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488
그 사이에 지나간 이태는 몰라도 올 봄부터는 재일이도 봉준을 동정하여 숙희를 대할 때만은 다만 한 마디씩이라도 봉준의 이야기를 건네고 따라 숙희를 권면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숙희는 그만그만하였다.
 
489
엊저녁에는 재일도 겁이 났다. 자기의 친구로서 누이동생을 위하여 생사를 분간치 못하기쯤 된 형편이니 어쨌든 난처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옥의 안타까워하는 것이란 사람으로선 못 볼 것이었다.
 
490
그는 자리에서 벌컥 일어났다. 그는 옷을 입은 후 숙희 방으로 건너갔다.
 
491
숙희는 산뜻이 화장을 하고 앞문 앞에 앉아 수를 놓았다. 방문소리가 나자 숙희는 힐끔 쳐다보았다.
 
492
“숙희야.”
 
493
그는 바늘을 든 채 재일을 보았다. 아직 이마에는 베갯자리가 있었다.
 
494
재일은 얼결에 이렇게 부르고 나서도 갑자기 어느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495
“왜요?”
 
496
왔다갔다하는 재일은,
 
497
“너 어째서 그렇게 사모하는 김 군을 싫어하니? 무엇 때문이냐?”
 
498
숙희는 눈꼬리가 샐쭉해졌다. 아무 말 없이 바늘 꽂았다 빼는 소리만 잦아질 뿐이다. 숙희의 꼴을 보니 오늘도 틀릴 모양이었다. 재일은 음성을 낮추었다.
 
499
“숙희야! 너의 오빠도 생각지 않니? 오늘만 부대 가자. 가서 잠깐만 앉았다 오자꾸나. 그것이야 무엇이 힘들 것이 있니? 응, 대답해라.”
 
500
재일은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501
숙희는 언제까지나 말이 없었다. 재일은 마음대로 하면 달려들어 실컷 쥐어박아 반쯤 용신을 못하게 만들어 주면 좋을 상으로 생각되었다.
 
502
싯재 펄펄 뛰는 생떼 같은 청년이 자기 하나 때문에 죽겠다 살겠다 하는 판에도 말똥말똥히 무엇을 생각만 하고 앉았는 것이 재일로 하여금 눈에 불나도록 안타까웠던 것이다.
 
503
그러나 꾹 참고,
 
504
“어찌겠니?”
 
505
숙희는 바늘을 저고리 섶에 꽂고 재일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506
“오빠! 제발 그런 말씀 말아 주세요. 세상에는 봉준씨 한 분만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뿐 아니겠어요? 그런 것을 어떻게 일일이 동정합니까? 심하게 말하면 죽는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네, 오빠, 그렇지 않습니까?”
 
507
숙희의 얼굴은 슬픈 빛이 돌았다
 
508
“숙희야! 그러면 너는 봉준 군을 죽이려느냐! 응?”
 
509
그의 눈에는 봉준이가 보였다. 따라 어여쁜 옥이가 보였다.
 
510
“죽는 사람은 약자지요. 못난이지요. 어찌해서 귀한 일생을 일개 미미한 계집 때문에 희생을 버리겠습니까……”
 
511
재일은 분이 왈카닥 치밀었다.
 
512
“야! 사설만 지껄이지 마라. 너도 무슨 사람값에 가니! 에잇, 저런 매몰스런 계집애하고 말하다가는 아주 기막혀 죽겠어! 어데 얼마나 버티나 보자.”
 
513
그는 휙 나가버렸다.
 
514
숙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515
눈물 흘린다는 것은 몇 분 후에 한 방울씩 떨어질 뿐이었다.
 
516
연희가 밖으로부터 황당히 들어왔다.
 
517
“어째 그러니? 또 그 일 때문이냐?”
 
518
연희의 까만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하여 마치 낙숫물 지듯이 흐르는 것이었다.
 
519
숙희는 말똥히 연희의 들먹이는 어깨 위를 바라보며 저렇게 속 시원히 울어봤으면 하고 오히려 눈물 많은 것이 부럽게 생각되었다.
 
520
따라 봉준의 일이 난처하였다. 그러나 어여쁜 아내를 가진 봉준이가 또 자기를 생각하여 죽네 사네 한다는 것은 어쩐지 자기로서는 색마와 같이 생각되었다. 어쨌든 순결치 못한 것이 미웠던 것이다. 돌이켜 한 번도 장가 가 보지 못한, 이름만이라도 총각이 그 지경이 되었다면 장래는 어찌 되었든 우선 그의 순정에 자기의 마음도 어찌 움직여 나갈는지 모를 것이었다.
 
521
무엇보다도 옥에 티가 있을지언정 이십여 년 꼭 봉해 두었던 자기의 흠도 티도 없는 정조를 아내 있는 사람에게 바치기는 암만 눈 감고 생각하여도 못할 일이었다.
 
522
하지만 눈앞에서 봉준의 꼴을 본다면 자기도 사람인지라 어떻게 될는지 몰라서 아예 가기가 싫다는 것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몇 달 째 눈 딱 감고 모른 체하여 왔다.
 
523
한참이 지나도 연희는 울었다. 숙희는 이상한 생각으로,
 
524
“언니, 일어나라우.”
 
525
그의 어깨를 흔들 때 그의 무릎 아래로 샛노란 들국화꽃 한 송이가 보였다.
 
526
요새 며칠 동안 옥이는 학교도 결석하고 밤낮으로 봉준의 병간호 하기 눈코 뜰 짬이 없었다. 그러나 애쓴 보람이 없이 병세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527
아침도 먹는지 마는지 한 옥이는 영실을 데리고 숨차게 달음질쳤다.
 
528
방안으로 들어서자 봉준의 곁으로 갔다. 두 눈이 푹 꺼진 그는 눈을 들어 옥이를 보다가 영실을 보자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떴다.
 
529
“숙희씨!”
 
530
벌컥 일어났다. 하여 뚫어질 듯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531
“아냐요, 우리 주인집 학생 영실이야요.”
 
532
영실은 겁이 나서 방구석으로 쫓겨가 앉는다.
 
533
봉준은 도루 자리에 푹 꺼꾸러졌다. 그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534
“숙희씨! 나는 총각이야요. 당신에게 무슨 거짓말이 있겠습니까?”
 
535
정신없이 이런 소리를 연거푸하며 돌아누웠다.
 
536
주인 마누라는 미음 그릇을 가지고 들어온다. 옥이는 일어나 받아 가지고 남편 곁으로 갔다.
 
537
“여보셔요. 미음 좀 잡숴 봅시다. 네. 이리 돌리세요.”
 
538
봉준의 머리를 이편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는 옥의 손을 탁 갈기며,
 
539
“너희들은 다 가라! 보기 싫다!”
 
540
미음 그릇은 쏟아졌다.
 
541
“에크!”
 
542
주인 마누라는 안방에서 걸레를 갖다 옥이에게 주었다. 그는 거룩한 미음을 다 훔쳐서 가지고 밖으로 나가자 주인 마누라가 받아 가지고 자기가 나갔다.
 
543
곁에서 보는 영실은 어리둥절하였다. 따라 숙희가 한편으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감정 가진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544
옥이는 끝없이 남편의 살 빠진 돌아누운 편 볼을 바라보고 있었다.
 
545
“여보 옥이, 숙희 좀 오라소 그려. 한 번만 봐도…… 네. 숙희 좀 제발 데려다주.”
 
546
옥이는 성큼 일어났다.
 
547
“영실아, 너 숙희네 집 알지?”
 
548
“응.”
 
549
“그럼, 대문까지만 데려다 주렴.”
 
550
“갑시다.”
 
551
둘은 밖으로 나왔다.
 
552
고래잔등 같은 세마루 기와집 앞에서 영실은 발길을 멈추었다.
 
553
“이 집이냐?”
 
554
어쩐지 옥의 가슴은 선뜻하였다.
 
555
“어찌겠니? 여기 서서 기다리겠니, 가겠니?”
 
556
한참이나 생각하던 영실이는,
 
557
“어떡합니까? 같이 들어갑시다그려.”
 
558
옥이는 다행히 생각되었다.
 
559
“안되었다, 영실아.”
 
560
“언니도 별 말씀 다 하십니다.”
 
561
영실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뚱뚱한 살빛 좋은 부인에게 향하여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562
“오, 영실이 오니?”
 
563
부인의 눈매를 보아 즉석에서 옥이는 숙희 어머니로 알았다. 부인은 뒤에 섰는 옥이를 유심히 보고 나서 머리를 돌렸다.
 
564
“숙희야, 너의 동무들 왔다.
 
565
건넌방 문이 열리면서 숙희의 반신이 나타났다.
 
566
옥이는 못 볼 것을 보는 것처럼 끔찍하였다.
 
567
“영실이, 옥씨! 어서 들어오세요.”
 
568
숙희는 일어섰다. 연희도 내다보았다.
 
569
그들은 방안으로 들어앉았다. 갑자기 맴돌려다 놓은 것처럼 옥이는 어리둥절하였다.
 
570
앞에도 번쩍 뒤에도 번쩍, 모두가 어른어른하였다.
 
571
그는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어 차례차례로 둘러보았다. 첫눈에 띈 것은 책상 위에 치쌓인 책들이었다. 그리고 대문짝 같은 체경이 죽 둘러놓인 것이 농궤였다.
 
572
“용하십니다, 옥씨.”
 
573
“이렇게 와야 다 반가이 보지요.”
 
574
숙희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숙희는 그를 마주 바라보며 전날 옥이와는 딴판으로 생각되었다. 수양이란 사람을 다시 만들어 놓는 것이다 하였다.
 
575
숙희는 살짝 눈을 돌려,
 
576
“어째서 영실이가 우리집에 놀러 안 왔니? 아마 공부만 열심으로 하지?”
 
577
“공부가 다 무어냐.”
 
578
숙희는 밖으로 나갔다.
 
579
연희는 옥이를 쇠쇠 들여다보며,
 
580
“어떠신가요, 요새는?”
 
581
“글쎄요, 말이 안 나옵니다.”
 
582
한숨을 푸 쉬었다.
 
583
“에그 딱해라! 오작이나 안타까우시겠어요.”
 
584
“무섭던데요.”
 
585
영실은 동달았다.
 
586
숙희는 과일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오목오목한 손으로 배 한 알을 들어 벗겼다.
 
587
“이제 곧 밥 먹고 왔는데요.”
 
588
옥이는 숙희의 손을 보았다.
 
589
“이것이 배부를 것이야요? 일부러 밥 먹은 후에는 배 한쪽씩 먹는 것이 좋대요.”
 
590
상긋 웃었다. 하얀 이가 보였다. 이렇게 천연스레 이야기는 하면서도 가슴은 조급하였다.
 
591
숙희는 주는 배 쪽을 받아 입에 넣은즉 꽤 시었다. 옥이는 억지로 깨무는 척하면서 어떻게 말하여 숙희를 데려갈까, 이번 자기 말에 따라 자기 남편의 운명은 결정되는 듯이 생각되자 온몸에 소름이 쪽 끼치는 것이었다.
 
592
한참이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얼굴을 번쩍 들고 숙희를 똑똑히 보았다.
 
593
“숙희씨! 이런 말 하는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594
옥의 입술은 푸르르 떨렸다. 그리고 두 볼이 화끈 달기 시작하였다.
 
595
그들은 미리 예측한 것인만큼 새삼스럽게 더 놀라지는 않았다.
 
596
“네, 무슨 말씀이든지 하십시오.”
 
597
숙희는 심상스레 말하였다.
 
598
“숙희씨, 잠깐만 우리집에 놀러 가십시다. 긴급히 볼일이 있는데요.”
 
599
“네. 무슨 볼일인지 대강 이야기하십시오. 그래서……”
 
600
말이 채 마치지 못하여
 
601
“숙희씨 당신은 참으로 모르십니까? 한때를 돌아봐 주시지오. 그러면, 그러면 얼마나 고마울는지요……”
 
602
숙희는 잠잠히 있었다. 연희는 왈칵 일어나 숙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603
“숙희야, 옥씨가 오신 생각을 해서라도 이번만은 가야 한다. 응? 숙희야!”
 
604
연희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605
“언니는 미쳤나 봐요 왜 이러셔요.”
 
606
연희를 흘겨보고 나서,
 
607
“옥씨, 나는 당신이 불쌍해서 못 가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없었다면 벌써 가보았을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남편을 사랑하여 저한테 오신 것만큼 저 역시 당신을 생각하여 죽기로써 못 가겠습니다!”
 
608
숙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렀다. 이 말 한 마디에 옥이는 절망하였다. 따라 머리끝까지 치밀리는 분함을 따라 그의 앞은 점점 암흑으로 변해지는 것이었다.
 
609
“숙희야! 너 나를 사랑하지. 내가 만일 죽게 된다더래도 네 힘으로 구원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버려둘 터이냐?”
 
610
숙희는 연해 덤비는 꼴을 바라보았다.
 
611
“언니! 왜 그런 말까지 하여요?”
 
612
“숙희야! 제발 가다오. 가다오. 오작이나 불쌍한 사람이냐.”
 
613
숙희를 잡아 일으켰다.
 
614
“흥! 가기는 어데를 가요.”
 
615
영실은 옥의 손을 잡아끌었다.
 
616
“언니, 가자오.”
 
617
“그래, 못 가시겠다는 말이요?”
 
618
“무엇하러 가요!”
 
619
딱 떼어 버렸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이때껏 고집해온 것이 무효로 돌아가고 말 것 같았다.
 
620
방문이 열리자 숙희 어머니가 들어왔다.
 
621
“무슨 일들이냐?”
 
622
영실은 손을 슬며시 놓고 앉았다.
 
623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야요.”
 
624
숙희는 이렇게 말하고 배 쪽을 들었다.
 
625
그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여러 사람을 휘뚜루 살펴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담뱃대 떠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626
옥이는 더 앉았을 수 없었다. 하여 일어났다.
 
627
“숙희씨, 실례 많이 했습니다. 다 용서해 주시구려.”
 
628
주인은 잠잠히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정신없이 걸었다.
 
629
“언니, 속 태우지 말라우. 곧 낫겠지, 무얼 그래.”
 
630
옥의 애쓰는 꼴이란 그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뛰어오던 옥이는 거리바닥에서 공중 넘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 번씩 돌아보고 씩 웃었다. 아이들이 이리로 달려왔다.
 
631
영실의 두 귀밑이 화끈화끈 달았다.
 
632
“언니 천천히 가요”
 
633
그를 잡아 일으켰다. 옥이는 앞이 아득해지며 재차 넘어갔다. 영실이는 너무 안타까와서 슬그머니 골이 났다. 아이들은 바짝 대들어 숨 답답하리만큼 쳐다보았다.
 
634
그는 겨우 옥이를 일으켜 가지고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635
“언니! 정신 차려요.”
 
636
옥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이맛가에서는 땀이 방울방울 맺혀 귀밑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637
바라보니 붉은 옷 입은 죄수들이 간수들에게 호위되어 지나갔다. 영실은 발길을 멈추고 섰다.
 
638
“오빠!”
 
639
얼굴 긴 사나이가 이편으로 힐끗 돌아보고 말없이 지나치는 것이었다.
 
640
영실의 무섭게 뛰는 가슴은 옥이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641
“웬일이냐? 누구냐?”
 
642
“저기 가는 세째로 선 사람이 우리 오빠야요.”
 
643
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644
“오빠?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오빠…… 그 오빠냐?”
 
645
영실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아 떨어졌다.
 
646
옥이는 그들의 가는 뒷맵시를 바라보았다. 따라서 영실 어머니의 눈물 섞어 이야기하던 마디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리게 하였다. 몇백 명의 노동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해 바친 영실 오빠.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647
“오빠! 내 오빠도 되는 것이다!”
 
648
영실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들이 밟고 간 넓은 길을 끝없이 바라보았다.
 
649
영실이는 눈을 부비치며,
 
650
“언니, 가자우.”
 
651
옥이의 손을 잡았다.
 
652
“봐라!”
 
653
옥이는 우뚝 서서 무엇을 깊이 생각하더니,
 
654
“오빠가 밟고 간 이 길로 우리도 가야 한다! 영실아!”
 
655
그의 음성은 떨려나왔다. 영실이는 멀거니 바라보며,
 
656
“언니 미쳤나 봐, 어서 가자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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