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윤봉춘 일기 (1937년) ◈
◇ 1937년 12월 ◇
해설   목차 (총 : 12권)     이전 12권 ▶마지막
윤봉춘
목   차
[숨기기]
 

1. 十二月一日 (舊十月二十九日) 水

2
아침 九時에 善愛(윤선애)를 데리고 上京하였다.
 
3
日氣가 흐려서 오늘도 撮影을 中止하였다.
 
4
金英纂(김영찬)君을 만나서 늦도록 다니며 놀았다.
 
 

2. 十二月二日 (舊十月三十日) 木

6
英纂(김영찬)君의 말에 의하면 萬餘圓 資金을 가지고 上京해서 着手해 볼 것을 相議하나 나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쉽게 잘 順調롭게 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차라리 五萬圓 가량 가지고 上京하면 일은 잘 되리라고 말했다. 오늘 밤 淸津으로 다시 내려간다고 한다.
 
 

3. 十二月三日 (舊十一月一日) 金

8
오늘 日氣는 좋으나 進行은 果히 좋지 못했다.
 
 

4. 十二月四日 (舊十一月二日) 土

10
오늘도 日氣 不順으로 撮影을 中止하였다. 方漢鐵(방한철)이와 中山(중산)이와 李翊(이익)이는 오늘 午后 四時 車로 渡東하였다고 한다.
 
 

5. 十二月五日 (舊十一月三日) 日

12
創用(이창용)君이 밤에 나와 洪을 초대하였다. 結局 말은 日本 內地에서 資本을 가져올 수는 있으나 朝鮮안에서 보다는 훌륭한 作品을 낼 수가 있겠느냐고 하는 問答이었다. 그리 眞執한 問題는 아니나 많이 參考할 말인 듯하였다. 오늘도 撮影은 못하였다. 全一(전일)이가 上京해서 다시 善愛(윤선애)를 데리고 大田 갔다.
 
 

6. 十二月六日 (舊十一月四日) 月

14
다시 舞鶴町으로 가서 로케이션을 하였다.
 
15
日氣가 좋아서 여러 날 만에 일이 順調롭게 進行되었다. 林(임동원)이 孫(손용진)의 機械를 맡고 今朝에 돈을 치러 주었다.
 
 

7. 十二月七日 (舊十一月五日) 火

17
日氣 不順으로 撮影을 中止했다. 會寧 집과 逢夏(봉하)한테 便紙했다.
 
 

8. 十二月八日 (舊十一月六日) 水

19
白馬까페서 午后부터 撮影을 하였다.
 
20
主人의 親切함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9. 十二月九日 (舊十一月七日) 木

22
日氣가 흐리고 눈비가 내려서 撮影을 中止했다. 創用(이창용)君의 出資로 全昌根(전창근)과 李明雨(이명우)가 무슨 作品을 製作하리라는 말도 들린다. 明治座에서 曉は遠けれと라는 映畵를 보았다.
 
 

10. 十二月十日 (舊十一月八日) 金

24
오늘도 撮影을 日氣 관계로 中止하였다.
 
 

11. 十二月十一日 (舊十一月九日) 土

26
오늘도 日氣가 不順해서 몇 커트 撮影을 進行하지 못했다. 午前 十時에 皇軍은 南京城門을 突入하였다는 報道가 있다.
 
 

12. 十二月十二日 (舊十一月十日) 日

28
市가지 몇 곳을 撮影을 하였다. 午后에 울꺽정을 헌팅했는데 來日 回答한다고 한다. 그런 營業을 하는者 치고는 매우 無識한 사람이었다.
 
 

13. 十二月十三日 (舊十一月十一日) 月

30
欽望亭에서 承落이 없어서 承儀(승의)君과 함과 天香園으로 가서 보았다. 그 곳도 相當해서 撮影하기로 하였다.
 
 

14. 十二月十四日 (舊十一月十二日) 火

32
오늘도 日氣가 흐려서 中止했다. 밤에 人生劇場 初 公演인 白花를 府民館에서 보았다. 아마도 演劇을 보던 中에 第一 못하는 演劇을 보았을 것이다.
 
 

15. 十二月十五日 (舊十一月十三日) 水

34
天香園 別莊에 가서 終日 撮影하였다.
 
35
役員들이 親切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16. 十二月十六日 (舊十一月十四日) 木

37
中止했다.
 
 

17. 十二月十七日 (舊十一月十五日) 金

39
李王家 골프장에서 終日 撮影을 하였다. 格鬪場面이었다.
 
 

18. 十二月十八日 (舊十一月十六日) 土

41
李王家 골프장에서 끝낸 엑스트라들의 出演費 問題 때문에 相當히 시끄러웠다.
 
 

19. 十二月十九日 (舊十一月十七日) 日

43
뚝섬에서 격투場面을 撮影했다. 몹시 추운 날씨였다.
 
 

20. 十二月二十日 (舊十一月十八日) 月

45
필름 준비가 못 되어서 오늘은 中止했다.
 
46
朝鮮日報社 社會部 金甲洙(김갑수)가 찾아와서 朝鮮映畵發達史를 論하고 갔다.
 
 

21. 十二月二十一日 (舊十一月十九日) 火

48
오늘도 中止했다. 日氣는 좋았음. 技師들 便에 필름 준비가 되지 못해서 또한 中止하게 되었다.
 
 

22. 十二月二十二日 (舊十一月二十日) 水

50
오늘도 日氣가 不順해서 中止하였다. 朝鮮日報社會部 記者 金甲洙(김갑수)가 와서 다시금 朝鮮映畵發展史에 對하여 討議가 있었고 四十餘枚의 原稿를 써주었다.
 
 

23. 十二月二十三日 (舊十一月二十一日) 木

52
오늘도 撮影을 中止하였다. 오늘 밤 車相銀(차상은)이가 資金에 對한 結果를 通知하러 오겠다고 했는데 아무 消息이 없었다.
 
 

24. 十二月二十四日 (舊十一月二十二日) 金

54
오늘도 日氣가 不順하여서 撮影을 中止하였다.
 
55
團成社가 最近에 빚으로 因하여 經營困難에 빠졌다는 所聞이 돌아다니는데 崔楠(최남)이 便으로 사람이 와서 그것을 相議하였다. 그래서 內容을 詳細히 알아보기로 하였다.
 
 

25. 十二月二十五日 (舊十一月二十三日) 土

57
日前에 뚝섬에서 撮影한 場面이 不完全해서 오늘 장춘단에서 다시 撮影을 하였다.
 
58
英纂(김영찬)君 한테서 便紙가 왔는데 株式會社에 對한 일과 合資會社에 對한 일과 個人製作에 대한 일 等을 詳細히 問議하였다.
 
 

26. 十二月二十六日 (舊十一月二十四日) 日

60
相銀이 便으로부터 능곡서 次回 作品費用金으로 多少間 올 듯 하여 기다려진다. 그러나 確定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61
五人組 撮影도 오늘 全部 끝내고 다음은 簡單한 場面 몇 군데가 남아 있었다.
 
 

27. 十二月二十七日 (舊十一月二十五日) 月

63
英纂(김영찬)君 한테는 株式會社보다 合資會社로 組織하는 것이 有利할 것이라는 말로 回答했다. 金(김영찬)君은 二十一日에 다시 上京한다고 했다.
 
 

28. 十二月二十八日 (舊十一月二十六日) 火

65
金寅奎(김인규) 母親任이 別世하신데 우리 몇 사람은 弔慰次로 가서 보았다.
 
66
崔寅奎(최인규)君을 만나서 여러 가지 討議가 있었는데 合資式으로 朝鮮映畵社와 타이업을 할 計策을 세웠다. 아직은 相絡에 그치고 말았다.
 
 

29. 十二月二十九日 (舊十一月二十七日) 水

68
시골집 場面을 撮影하는데 壽松洞 妓生 집에서 撮影을 하였다.
 
 

30. 十二月三十日 (舊十一月二十八日) 木

70
시골집 撮影은 全部 오늘로 끝냈다. 姜石濟(강석제)는 舞臺劇 할 때보다 演技가 없었고 처음 出演한 金鏡姬(김경희)란 애는 餘望이 있을 것 같았다.
 
 

31. 十二月三十一日 (舊十一月二十九日) 金

72
一九三六年은 世界政局으로도 어지러웠으려니와 나의 生涯도 어지러웠다. 애를 써도 보람이 없이 흘렀다. 子息 泰榮(윤태영)이가 생겨서 나의 一生의 重大한 意義를 한 아름 안게 하였다. 丁丑年아 너를 福地로 흐르는 물위에 한 배에 실어 보내니 지나간 歲月일 망정 잘 가거라. 나는 돌려서 새해를 맞으리라.
 
73
今年 一年間은 世界政局으로 보아서 실로 多事多端한 一年이었으니 歐洲에 있어서는 질감스럽게 끄는 西班牙(스페인) 內亂을 에워싸고 獨伊(독일∙이탈리아)와 英佛蘇(영국∙프랑스∙러시아)의 對立이 一觸卽發의 危機를 形成한 中 一月 二日에 英伊地中海協定(영국∙이탈리아 지중해협정)이 있었고 一月 三十日로부터 二月 二十六日동안 獨逸植民地返還에 對한 히틀러獨總統의 宣言과 거기에 대한 이든 英外相의 應酬가 있었고 四月 二十四日 白耳義(벨기에)中立復歸의 國際法手續이 完了되었고 九月 十日 니욘 會議가 열리었고 九月 十四日 地中海協定이 正式 調印되었고 十月 十三日 獨白不可侵條約(독일∙벨기에 불가침조약)이 發表되었고 九月 二十四日 獨伊(독일∙이탈리아)兩國巨頭의 會見이 있었고 十月 十七日 할리피스 英樞相의 獨逸訪問이 있었으며 極東에 있어서는 二月에 支那(중국)國民政府에서 三中全會議를 연 以後 抗日의 政策이 더 一層 甚하여 七月 七日 蘆溝橋에서 北支事變이 發端되고 八月 十三日에 다시 上海로까지 擴大되어 十一月 中旬 上海가 陷落되고 十一月 十三日 南京까지 陷落되어 北으로 天津, 北京, 太原을 잃고 南으로 首都를 빼앗긴 國民政府는 漢口, 重京 等地로 몰리어 간 대신 北支一帶에는 새로운 政權의 樹立을 보았다.
 
74
八月 二十一日 蘇支不可侵條約(러시아∙중국 불가침조약)이 締結되고 英國 또한 支那(중국)事變에 對한 態度가 國民政府를 掩護하려는 것으로 終始되건만 獨逸만은 日獨防共協定(일본∙독일 방공협정) 아래 帝國의 主張을 間接直接으러 援助하여 왔는데 十一月 十七日에 이르러는 伊太利(이탈리아)조차 正式으로 日獨防共協定(일본∙독일 방공협정)에 加擔한 以後 十一月 二十九日 伊太利(이탈리아)가 滿洲國을 承認하는 同時에 十二月 十一日 帝國에서는 西班牙(스페인)의 프랑코政權을 承認하게 되고 뒤이어서 十二月 十一日 伊太利(이탈리아)는 國際聯盟으로부터 脫退할 것을 發表하여 한편으로는 世界的으로 防共戰線의 强化를 如實히 表現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國際聯盟의 無力을 餘地없이 暴露하였거니와 거기 對應하여 英國은 佛蘇(프랑스∙러시아)와 걸음을 같이 하고 米國을 引入하고자 英米通商의 새로운 條約까지 交涉되고 있음에 不拘하고 米國의 루즈벨트 大統領과 헐 國務長官은 平和政策을 堅持하여 最近에 일어났던 國際間의 不祥事인 파네이號 事件도 圓滿히 解決을 이루게 된 터인즉 英米의 完全한 合作은 現在의 狀態로 보아 不可能하게 되었고 英國의 國民政府掩護도 큰 効果를 내지 못하고 만 것이다.
 
75
各國別로 보면 五月 十三日 英國皇帝陛下의 戴冠式과 六月 十三日 蘇聯(러시아) 赤軍 巨頭의 多數가 叛亂罪로 銃殺된 事件이 가장 크니 前者는 英國內의 한 義禮에 지나지 못하지만은 後者는 蘇聯(러시아) 巨頭의 內訌을 意味하는 바로서 國際情勢에 對한 그 影響도 決코 적지 않아 佛國(프랑스)의 信賴가 그로서 减殺되고 極東에 對한 蘇聯의 政策도 그로써 軟化되고 있다. 國民政府에서는 弟三國介入을 極力으로 努力하고 또 그의 援助를 保障코자 하는 計劃 아래 蘇聯(러시아)과도 不可侵條約을 맺게 된 것이나 蘇聯(러시아)은 그 內訌事件이 있은 以後 國內人心鎭壓에 汲汲하여 餘念이 없는 터로 비록 새 憲法의 實施와 아울러 그 選擧의 結果가 政府黨의 大勝으로 돌아갔다고는 하되 아직도 反政府의 氣勢가 潛在하여 있어 輕率히 나오게 되지는 못한다.
 

 
76
一月 五夢女 封切 (京城)
77
二月 人生航路 封切 (金剛·漢陽合同)
78
十一月 沈淸 封切 (記新洋行)
79
五月 나그네 (聖峰映畵社)
80
四月 純情海狹 (大邱키네마)
81
(今年中 制作中에 있는 作品)
82
漢江 (半島映畵社)
83
愛戀訟[頌] (劇硏)
84
靑春部隊 (朝鮮興藝社)
 
85
아버지 萬延 元年 參月 十五日 當 七十八歲
86
어머니 明治 十二年 參月 十六日 當 五十九歲
87
나 明治 參十五 參月 二十三日 當 三十六歲
88
逢夏(봉하) 明治 三十八年 十月 二十五日 當 三十三歲
89
善淑(선숙) 明治 四十一年 五月 二十九日 當 三十歲
90
仙女(선여) 明治 四十四年 四月 十八日(不分明) 當 二十七歲
91
善華(선화) 大正 五年(1916년) 四月 十八日 當 二十四歲
92
大元 一九七二年 六月 十三日 十五時(양력)
93
善愛(선애) 大正 八年(1919년) 十一月 二十四日 當 十八歲
94
相熺(상희) 大正 十二年(1923년) 二月 三日 當 十五歲
95
文壽男(문수남) 大正 二年(1913년) 陰 十二月 六日 當 二十五歲
96
泰榮(태영) 昭和 十二年 陰 四月 十六日 當 一歲 (五月 二十五日 陽曆) 夕八時
97
泰玉(태옥) 昭和 拾參年 拾月 拾五日 陰八月 二十二日 朝十時
98
泰心(태심) 昭和 拾六年 十一月二 十五日生 陰 十月 七日生 朝四時半
99
泰峯(태봉) 昭和 拾九年 七月 二十二日 아침 十時 陰曆 六月 三日生
100
泰姬(태희) 四二八○ 陰十月 二十三日 아침 八時 陽十一月 十六日生
101
泰炳(태병) 四二八三 四月 十一日生 陰二月 二十五日 夕九時
 
102
• 今年度 下半期로부터 나의 映畵的 態度
103
옛말에 拾年이면 江山도 變한다는 말이 있었다. 朝鮮映畵界가 創始된지가 벌써 拾有餘年이나 된다.
104
外國 같으면 그 동안 不完全한 것이나마 어떠한 基礎는 定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이곳의 映畵事業이란 拾年을 하루같이 내려 왔고 變動이란 조금도 없었다. 多少 進展이 있다면 俳優들의 演技가 進展되었다 할 수 있고 카메라맨의 技術이 進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監督術도 完全하지 못하고 시나리오 라이터도 아직 없다. 撮影所라야 京城撮影所가 있지만 本格的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分島(분도)가 自身이 利用할 必要가 있을 때마다 한 작품씩 만드는 것이 있고 崔南周(최남주)의 朝鮮映畵株式會社가 創立 途中에 있어서 그 結果를 아직 未知數에 둘 수밖에 없고 聖峰映畵社를 議政府에 세운다 하지만 그것도 資金 없이 着手한 일이니 알 수 없다. 이러한 組織이야 해마다 있었지만 아침에 머리를 들었다가 저녁에 숙어드는 것이어서 믿을 수가 없다.
105
더욱 今年철 들어서는 日支事變 때문에 外畵輸入을 禁하고 國産品을 장려한다 해서 絶對의 映畵製作이 必要한데도 不拘하고 이곳의 映畵生産이란 今年度에도 四五本 밖에는 生産치 못하였다.
106
더욱이 貧弱한 우리映畵界에서 藝術映畵를 만든다고 비싼 돈을 多大히 들여서 製作한다. “人生航路”가 無聲版임에도 六千圓 以上이 들었고 “沈淸”은 토키로 一萬五千圓이 들었다. “나그네”도 애프터 레코드로 된 것인데 一萬圓이 넘었고 漢江도 끝내면 一萬六千圓 가량 들게 된다. 이런 費用을 들여서는 六十餘 興行場所 밖에 없는 全國興行에는 損을 볼 것은 明確한 일이다. 映畵도 企業的이 아니면 계속할 수가 없다. 珠盤에 맞아야 한다. 아무리 生覺해 보아도 이때에 무슨 特別한 계획이 없이는 안 될 것이다. 別다른 計策이 서지 않는 곳에서는 自然히 映畵事業은 무덤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나는 當分間 나의 態度를 變하기로 하였다. 一个의 映畵排優였던 것을 資本主의 態度도 가지고 興行師도 되고 監督이라도 되어서 나의 心算에 맞는 預算과 作品을 내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을 生覺하였다. 世人이야 무어라고 하던지 그것에 귀를 기울일 必要가 없다. 내 뜻대로 進行하기로 하였다. 값싼 필름에 短時日에 撮影할 것과 興行成蹟이 있을 映畵를 製作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철에 朝鮮興藝社란 看板을 걸고 製作한 것이 “靑春部隊”다.
107
資本 二千圓 가지고 끝냈으니 朝鮮內 興行에 三四个場所만 封切하면 二千圓은 쉽사리 나올 것이니 반드시 利金을 보는 作品이다. 收入을 보니 作品을 계속할 수 가 있고 監督이나 俳優들은 生活을 유지할 수가 있는 同時에 演技를 더욱 練磨시킬 수 있고, 作品이 나오니 面目이 있고 이러한 生覺으로서 當分間 계속하여서 完全한 資金이 積立되면 作品도 會社도 問題 없을 것이다. 卽 다시 말하면 映畵道에서 生活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生活을 보장시키고 技術을 단련시켜 두었다가 完全한 機會에 完全한 態度를 가지겠다는 것이다. “자버러지가 꼬부라지는 것은 장차 펼 장본이다”. “爲政之策은 寸을 굽혀서 尺으로 편다”. 이러한 말을 되풀이 하면서 나는 아득한 우리 映畵界를 내려다본다.
 
108
• 重要記
109
始面回 ●月 五日 私 一人 泰心(태심)
110
二次面回 ●月 二十日 家族 六人 泰心(태심)
111
三次面回 ●月 十五日 私 一人 泰心(태심)
112
四次面回 七月 二十二日私 一人
113
五次面回 九月 二日 私 一人 泰心(태심)
114
六次面回 九月 二十一日私 一人 泰心(태심)
115
七次面回 十月私 一人 泰心(태심)
116
八次面回 十月 二十六日私 一人
117
九次面回
 
118
• 親族名簿
119
泰峰(태봉)檀紀 四二七七 / 七月 卄二日生陰 六月 三日 / 巳時朝 十時
120
泰姬(태희)檀紀四二七九 / 陽 十一月 十六日陰 十月 卄三日生 / 辰時朝 八時
121
泰炳(태병)檀紀 四二八三 / 四月 十一日陰 二月 卄五日 / 午后 九時 十八分
122
林成白(임성백)西紀 一九四四 / 七月 二○日陰 五月 二十九日 / 해시午后 九時
123
尹大元(윤대원)西紀 一九七二 / 六月 十三日陰 五月 三日 / 미時午后 三時
【원문】1937년 12월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미분류〕
▪ 분류 : 개인기록물
▪ 최근 3개월 조회수 : 188
- 전체 순위 : 396 위 (2 등급)
- 분류 순위 : 5 위 / 105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참조
  1937년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기록물 > 개인기록물 해설   목차 (총 : 12권)     이전 12권 ▶마지막 한글 
◈ 윤봉춘 일기 (1937년)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0년 10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