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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
◇ 하 ◇
해설   목차 (총 : 2권)     이전 2권 ▶마지막
1941년
김동인
1
편조. 변하여 신돈은 이 너무도 황송하고 놀라운 성은에 울었다.
 
2
"첨의(신돈의 벼슬 이름), 나를 위해서 국정을 도와주오. 그사이 안 부른 것은 첨의를 밉게 봄이 아니라, 내 좀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 그리하였소."
 
3
왕이 신돈은 대궐에 불러서 이렇게 말할 때, 신돈은 어린애 같이 엉엉 울었다.
 
4
"전화, 무에라 말씀 올리리까? 다만 전하께서 간사한 무리의 참소에만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면, 신은 미련하오나 신의 힘이 미치는껏 신의 생각이 자라는껏은, 전하와 고려 생령의 복리를 위해서 이 노구를 아끼지 않으오리다."
 
5
이리하여 왕은 친필로써,
 
6
'사구아 아구사 생사이지 무혹인언 불천명(師救我 我救師 生死以之 無惑人言 佛天明).'
 
7
이라는 맹세문을 써서 신돈을 주고, 신돈은 고려 섭정의 지위에 서게 되었다.
 
8
반야는 잊어버린 존재 같이 되었다. 왕도 반야에 관한 일을 다시 신돈에게 묻지 않았다. 신돈도 이 열적은 말을 다시 왕 앞에 꺼내지 않았다.
 
9
태중이기 때문도 하겠지만, 나날이 아색이 창백해가는 반야를 신돈은 간간 별당까지 가서 위로 했다.
 
10
성욕이 강하기 때문에, 젊은 여인이 가까이 가기만 해도 어지러운 생각을 금하기 어려운 신돈은, 반야의 방에 가면 반야의 이부자리 쪽으로 눈이 갈 기회를 피하고, 반야의 아랫몸에 눈 줄 기회를 피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엄숙한 기분과 경건한 태도로 반야를 대했다.
 
11
자기의 방에서는 젊은 계집들과 음란한 장난을 기타없이 하는 신돈이로되, 바야에게 들어가 볼 때에는 언제든 어깨를 우그리고 근엄한 얼굴을 했다.
 
12
그리고 내실과 별당과의 사이를 엄중히 경계하게 하여, 내실 여인들이 별당에 가는 것을 엄금하고, 하인들도 반야의 하인을 따로 두어서, 반야 하인의 내실 출입을 금하고, 내실 하인들의 별당 출입을 금하였다.
 
13
"장래를 기다리오. 상감마마의 부르시는 날을 기다리오. 태중의 아기가 나오시는 날은 상감께서 부르시겠지."
 
14
어깨를 우그리고 외면을 하고 반야에게 이렇게 말하는 신돈의 태도는 마치 재상가 소저에게 시종드는 늙은 충복 같았다.
 
15
신돈의 보호 아래서 복중의 왕자는 차차 세상에 고함칠 날을 고요히 준비하고 있었다.
 
16
그해도 어느덧 과거장에 말려 들어가고 새해가 이르렀다. 왕의 재위 15년이요, 원나라 지정(至正) 26년이었다.
 
17
그해 2월 신돈의 집 별당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첫 울음 소리를 쳤다.
 
18
사내였다. 대장공주에게 혈사가 없고, 다른 연인은 가까이하지 않은 왕에게는 유일한 왕자였다.
 
19
그러나 아기의 아버님되는 왕은, 아기의 탄생을 알지도 못했다. 신돈은 장차 좋은 기회를 기다리기 위해서 아직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20
아기는 탄생 후 며칠을 지나지 못해, 연령 두 살이라 부르게 되었다. 입춘(立春) 전에 탄생했는지라 입춘은 지나서는 두 살로 세었다.
 
21
그러나 두 살로 세게 되기까지, 아직 아버지의 축복을 못 받은 가련한 아기였다. 아버지의 복을 못 받았는지라, 이름도 아직 못지었다.
 
22
별당 하인들만이 '아기마마'라 불렀다. 신돈이 이렇게 시킨 것이다. 그러나 왜 '마마'라고 부르는지는 신돈과 반야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23
공주를 정릉에 안장한 지도 1면이 지났다.
 
24
공주의 1주기까지는 감히 이럼 말을 어전에 꺼내지 못했지만, 1주기가 지나면서부터 대신들은 왕께 왕비 간택하기를 졸랐다.
 
25
그리고 안극인(安克人)의 따님을 후보자로 들었다. 왕에게 원자가 없는지라, 어서 원자를 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26
왕은 마음에 없는 일이었다. 현재 있는 혜비 이씨며 그 밖의 궁년들도 돌보지 않거늘, 어찌 또 무슨 여인은 맞아들이랴? 그러나 너무도 귀찮게 하므로, 어떤 날 이 문제를 신돈에게 의논하였다.
 
27
"납비하옵시오."
 
28
신돈의 의견은 간단하였다.
 
29
"그러니 지금 혜비도 혼자 공방을 지키는데, 또 한 과부를 만들면 무얼 하오?"
 
30
적적한 듯이 왕이 이렇게 말하매 신돈은,
 
31
"그렇지만 전하께서 거절하오시면 연달아 상계가 들어올 테니, 귀찮지 않사옵니까?"
 
32
하여 무사주의를 취하기를 주장하였다.
 
33
왕은 신돈의 이 의견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34
"반, 무어? 반……."
 
35
거북한 모양이었다. 신돈은 알아들었다. 신돈은 씩 웃었다.
 
36
"전하, 축하드리옵니다. 거 2월에 왕자가 탄생하였습니다. 전하 이하로 고려 천만 창생의 행복이로소이다."
 
37
왕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기쁜 듯한 그러면서도 더 적적한 기괴한 심경이었다.
 
38
왕자가 공주에게서 났으면 얼마나 기쁘랴?
 
39
공주 생존시에 늘 왕자를 보고 싶어하더니. 공주 자신의 몸에서 못 낳으면 다른 여인의 몸에서라도 왕의 혈사가 생기기를 그렇게도 기다리더니…….
 
40
지금 난 왕자가 하다못해 공주 생존시에라도 났다면, 공주도 마음을 놓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공주 임종의 마지막말,
 
41
'마마께 후사 없으신 것이 죄송하옵니다.'
 
42
왕은 문득 물었다.
 
43
"언제요?"
 
44
"네? 네, 2월 ××일이옵니다. 원자께서도 건강하오시고 반야도 산후 평안하옵니다."
 
45
왕은 눈을 굴려서 벽의 건 공주의 진영을 쳐다보았다. 산 듯, 바야흐로 입을 움직일는 듯 왕을 굽어보는 공지의 진영.
 
46
신돈이 퇴궐할 때에, 왕은 원자를 축복하는 뜻으로,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에 옥대를 주었다. 이름은 무니노(無尼奴)라 지었다.
 
47
드디어 안극인의 따님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비극의 주인공인 이 정비(正妃) 안씨도, 첫날부터 별궁에 거처하고 그의 청춘을 외로이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가련한 여성이었다.
 
48
어젯까지도 일개 중에 지나지 못하던 신돈이, 놀라운 세도 자리에 올라가면서 고려의 조정은 물끓듯 하였다.
 
49
왕의 뜻을 받아 신돈의 행한 첫 번 정사가 세신 권족들의 그 얽히고 설킨 뿌리들을 죄다 잘라 버리는 것이었다.
 
50
한미한 곳에서 자란 신돈이라, 나라의 정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될지 이런 복잡한 문제는 잘 처리하기 힘들었다.
 
51
그러나 열(熱)과 성(誠)으로써 여기데 대신하려 하였다.
 
52
세세로 내려온 조상의 위력을 방패삼아 아무 훈공도 없이 높은 자리에서 평안히 지내는 무리, 소위 대국이라는 원나라에 결탁해 원나라의 세력을 빌어서 제 고국에서 세도를 하려는 무리, 왕에게 아첨하여 권력을 얻어 가지고 아래를 누르는 무리, 사병(私兵)을 양성하여 이로써 국방(國防)에 당하지 않고 도리어 개인 세력을 높이려는 무리.
 
53
중 출신의 신돈에게는 꺼릴 만한 아무 인연도 없었다.
 
54
공자 맹자가 인연이 없으니 그의 후배 되는 유림도 꺼릴 것이 없었다.
 
55
세족(世族)에게 연분이 없으니 권문도 무서운 바가 없었다. 역사를 안 배웠으니 원나라도 무서운 줄 몰랐다.
 
56
고려에서 높일 사람은 왕 한 분밖에는 없다.
 
57
고려 왕은 공자에게 구속될 것이 아니요, 원나라에 구속될 것이 아니요, 권문 세족에게 구속될 것이 아니요, 유림에게 구속될것이아니요, 만약 구속될 것이 있다면, 단지 고려 백성에게만 구속되어야 할 것이다.
 
58
세태에 무식하기 때문에 이런 용감한 단안을 내린 신돈은, 왕이 맡긴 자기의 권한을 높이 들고 재추에 일어섰다.
 
59
신돈이 이렇게 아무 배경도 없는 한 개의 중으로서 고려 조정에일어서매, 고려 조정에서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60
자기네들끼리 맡아볼 때에는 자기내끼리 서로 깎고 싸우고 했지만, 상대편으로 신돈이라는 중이 나타나매, 그들은 자기네의 쟁투를 중지하고 일제히 신돈과 맞서게 되었다. 자기네들은 그래도 재상가라 유림이라 서로 얽힌 곳이 있지만, 조상 때에 아무 훈공도 없는 일개 중이 일어서매, 일제히 그리로 싸움의 예봉을 돌렸다.
 
61
좌사의대부 정추(左司誼大夫 鄭樞)와 우정언 이존오(右正言 李存吾) 두 언관의 상소가 그 첫 시합이다. 상소문은 대략 이런 뜻이었다..
 
62
그 어떤 날 문수회(文殊會)에서 보매,
 
63
"영도첨의 신돈은 신하의 자리에 서지 않고 전하와 나란히 하여 구경했으며, 영도 첨의의 하명이 내리는 날도 조복(朝服)을 입지 않았으며, 반달이 지나지 못해 대궐에서도 곧추서서 다니며, 말을 탄 채로 홍문(紅門)을 출입하며, 늘 전하와 나란히 하여 호상(胡床)에 앉으며, 자기 집에서도 재상들이 뜰 아래에서 절하는 것을 자기는 방에 않아서 받으니, 이런 외람된 자는 벌하셔야 합니다."
 
64
이 상소문을 왕은 예에 의지하여 신돈과 호상에 나란히 앉아 받았다. 그러나 상소문을 보고 신돈은 안색이 변하여 상 아래 내려 꿇어앉았다.
 
65
"전하, 신이 예절을 모르기 때문이옵니다. 죄하십시오."
 
66
그러나 왕은 내려앉은 신돈을 몸소 도로 붙들어 상에 오르게 하였다.
 
67
"섭정, 내 왕과 나란히 한다는 것은 결코 예절에 어그러지지 않은 일이외다. 오늘 첨의가 세신(世臣)의 일게 상소문에 이렇듯 굴하면 장래 어떻게 국정을 마음놓고 맡기리까?"
 
68
그리고 도리어 정추와 이존오를 불러서 꾸짖었다.
 
69
"첨의는 야생(野生)이라 예절에 서투른 것은 나도 알고 맡긴 바여니와, 그래 몸이 언관(言官)에 있으면서 민정과 와도에 관해서는 진언할 일이 없어서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연변에는 도적이 왕성하고 나라는 가물어서 백성이 농사짓기를 곤란해하는 이때에, 그래 예의의 말절이나 이렇다저렇다 할 밖에는 다른 말은 할 것이 없단 말인가? 그래서 넉넉히 언관의 직책을 다할 수가 있을까?"
 
70
이리하여 정추를 동래 현령으로, 이존오를 장사 감무로 좌천시켰다.
 
71
권족들이 벌(閥)을 짜고 돌아가던 것을 미워하던 왕은, 이리하여 아무 벌력(閥力)이 없는 신돈을 높여 주어서 고려조 대대의 비정을 깨뜨리려 했다.
 
72
서울서 놀고 있는 장신(將臣)들을 차례차례로 변방으로 쫓았다. 이것은 첫째로 변방을 침범하는 도적을 막기 위함이요, 둘째로 장신들을 서울에 그냥 두면 서로 할퀴고 흐리고 뜯고 h함하고 하므로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73
무능한 세족(世族)들의 벼슬을 용서 없이 깎았다. 아직껏은 무능한 줄 알지만, 혹은 학벌로 혹은 족벌로 얽히는 곳이 있어서, 그냥 귀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무능한 명문들을 없이하기 위함이었다.
 
74
'정민추정도감'을 두고 신돈 자기가 판사가 되어서, 민원(民?)을 직접 듣기로 했다. 고려의 정사가 흐리고 권문이 너무 높기 때문에 횡포가 심해서, 백성들은 권문에게 재산을 빼앗기되 호소할 곳도 없어서 참던 것은, 신돈은 호소할 길을 터서 권문들의 횡포를 금하였다.
 
75
아직 정치를 모르고 자란 신돈이 갑자기 대권을 맡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하면 좋은 정치를 백성에게 베풀게 되는지 몰라서 갈팡질팡하면서 노력하는 것을 왕은 가만히 방관하였다.
 
76
권세를 따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이었다. 신돈의 권세가 이렇게 되매, 차차 신돈에게 부회하는 무리가 많아갔다. 이 가운데서 신돈은, 소인은 추려서 자기의 좌우에 두어 몸을 장식하게 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추려서 상당한 관직을 맡겨서 갈충보국케 했다.
 
77
유림의 반대성, 권문들의 아우성 가운데서도 신돈의 권세는 나날이 높아갔다.
 
78
공자밖에는 존경할 줄을 모르고, 원나라 사람밖에는 숭배할 줄을 모르는 유림이며, 권문들은, 이 중 앞에 차마 머리를 숙일 수도 없고, 머리를 안 숙이자니 벼슬을 할 수가 없고 하여, 신돈을 떨구어 버리려고 별 야단을 다 하였다. 그러나 신돈의 세력은 이제는 튼튼해져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림은 주둥이만 까졌지 신돈을 대할 만한 실세력이 없고, 권문들은 자기네들의 내홍 때문에 실력을 단합할 수가 없고, 장수들은 벌써 변경에 쫓겨가서 외구(外寇) 막기에 겨를이 없고, 이리하여 신돈을 거꾸러뜨릴 힘을 합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신돈은 왕의 고적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공주의 영전(影殿)을 설계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79
그해 12월, 종실 덕풍군(德豊君)의 따님을 맞아서 익비(益妃)로 봉하고(성을 한씨라 고침) 왕비 책립의 잔치가 대궐에 크게 있는 날이었다.
 
80
신돈은 외연(外宴)이 끝나고 내연(內宴)으로 들어서게 될 때에, 백관을 거느리고 왕께 축하하는 절을 드린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81
예쁜 여인, 왕께 바쳐서 외따로이 별궁에서 청춘을 보내라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익비 한씨의 얼굴이 연하여 눈앞에 보이므로, 이것을 힘있게 떨구며 내실로 들어와서 신돈을 그의 비대한 몸집을 보료 위에 커다랗게 내던졌다.
 
82
뒤따라 신돈의 심복인 기현의 아내가 들어와서, 먼저 찌 앉은 촛불을 다스려서 밝혀 놓은 뒤에 좀 어색한 듯이 말했다.
 
83
"아까부터 누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84
신돈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기현의 아내를 쳐야보았다. 한쪽만 촛불을 받은 여인의 완숙한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물었다.
 
85
"누구야?"
 
86
"여인이올시다."
 
87
좀 질투하는 음성이었다.
 
88
"여인? 물론 젊은이겠지?"
 
89
"네."
 
90
"예쁜가? 임자와 어떤가?"
 
91
"소인보다 예쁘구말구요."
 
92
신돈은 눈으로 미소하였다.
 
93
"어디 불러들이게."
 
94
기현의 아내가 나가고 잠시 뒤에 문이 다시 열리며 젊은 여인 하나가 들어왔다.
 
95
여인은 문 안에 읍하고 섰다. 신돈은 여인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불이 약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96
"자, 이리 와 앉지."
 
97
여인은 대답이 없었다.
 
98
"여기로 오지 않았다가는 내가 일어설테야."
 
99
계집은 앉았다.
 
100
"좀더 가까이……."
 
101
계집은 더 가까이 왔다. 신돈은 계집의 얼굴에 비치도록 불을 돌려 놓았다. 서민은 아니었다. 스물서넛 났을까? 꽤 예뻤다.
 
102
"무슨 일로?"
 
103
대답이 없었다.
 
104
"무슨일로? 나를 찾아온 이상에는 무슨 곡절이 있겠지? 대답 안하면 도로 내보낼 테야!"
 
105
"소인 지아비의 구실 자리를 좀 높여 달래러……."
 
106
"지아비의 구실 자리라? 그럼 왜 지아비가 안 오고 임자가 와? 병중(病中)인가?"
 
107
계집은 대답이 없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될 뿐이었다. 신돈은 거듭 물었다.
 
108
"병중이 아니면 절름발인가?"
 
109
"……."
 
110
"절름발이가 아니면 천친가?"
 
111
신돈은 불쾌해졌다. 말이 거칠었다.
 
112
"그래, 서방의 주소 성명은?"
 
113
선부의랑 이 모의 아내라고 계집은 대답했다. 신돈은 그것을 적었다.
 
114
"음, 알았다. 네 서방은 밝은 아침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경외에 내쫓고, 너는 내 집에 있거라. 벼슬을 얻고자 계집을 보내는 놈은, 벼슬도 못하고 계집까지 앍을 것이고, 너는 이미 내게 허락할 생각으로 온 이상에는 여기 있거라."
 
115
신돈이 계집을 좋아하여 집에 많은 계집을 둔 것을 알고, 신돈의 권력을 시기하는 권문들은 고약한 풍설을 많이 퍼뜨렸다.
 
116
신돈은 황음무도하여 계집을 즐기므로, 신돈에게 제 마누라를 바치고 그 덕으로 벼슬들을 얻으려는 무리가 많다. 지금 신돈의 신임을 받고 있는 무리들은 다 제 마누라를 빈 자들이다. 마누라만 바치면 어떤 벼슬이라도 할 수 있다.
 
117
이런 소문이 퍼져서 신돈의 집을 찾아 오는 젊은 여인들이 차차 생기게 되었다. 벼슬에 눈면 사람들의 행사였다.
 
118
본래 색을 즐기는 신돈은 처음 몇 명은 벼슬도 시켜 주었다. 그러나 차차 이런 무리가 너무도 많아지므로, 이런 도리어 너무도 해이된 풍속에 싫증이 생겨서, 그 비루한 행동을 벌하는 뜻으로 계집만 거두고 사내는 벌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집들은 그냥 찾아오는 것이다. 신돈에게서 뜻밖의 선고를 들은 계집의 얼굴은 순간 창백하게 되었다. 몸을 흠쳤다.
 
119
한 각경 뒤, 캄캄한 신돈의 침실 밖에 계집 하인 하나가 어쩔줄 모르고 망설이고 있었다.
 
120
신돈이 알아차리고 누구냐고 물었다. 하인의 대답은 왕이 미행했다 하는 것이었다.
 
121
신돈은 깜짝 놀랐다. 처음은 거짓말인 줄 알았다. 반야의 정체를 안 이래, 다시 왕이 와 본적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대궐에서는 왕비 영립의 잔치가 없어서, 왕이 미행할 까닭이 없으므로 재차 물어보았는데 여전히 왕이 거동하셨다는 것이다.
 
122
신돈은 하릴없이 일어났다. 계집은 버려두고.
 
123
신돈은 나와서 얼른 소세를 하고 사랑으로 갔다. 과연 왕은 내시 두명을 데리고 와서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124
"어떻게 거동하셨습니까?"
 
125
신돈이 절하매 왕은 적적히 웃을 뿐이다.
 
126
"오늘 잔치는 어찌하시고 이렇듯……?"
 
127
"또 가련한 과부가 하나 생긴 것 뿐이오."
 
128
왕은 또 미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는 듯한 미소였다.
 
129
순간 전까지의 음락에서 갑자기 왕의 적적한 심경에 직면한 신돈은, 왕을 위로 코자 얼굴에 미소를 나타내려 했다. 그러나 잘 나타나지 않았다.
 
130
왕이 환관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매, 환관은 무슨 작다란 보퉁이를 하나 왕께 드렸다.
 
131
"아기……."
 
132
"?"
 
133
"무니노에게……."
 
134
신돈은 가슴이 덜컥하였다. 왕이 갑자기 미행한 것은 아기를 보기 위함이었던가? 새 왕비를 맞기 위하여 대궐에서는 울적댈동안, 왕의 적적한 심사는 문득 당신의 유일한 혈육인 무니노 아기를 생각나게 했던가? 얼마나 고적하면 대궐을 벗어나서 이곳까지 미행하셨을까?
 
135
"이리로 모셔오리까?"
 
136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신돈이 바야흐로 일어나서 나가려 할 때에,
 
137
"잠깐 내가 들어갑시다. 겨울 바람이 찬데……."
 
138
하면서 몸소 일어났다.
 
139
환관이 왕을 부액하려 했다. 그것을 왕은 손짓으로 말리고 신돈과 함께 나섰다.
 
140
별당에서, 뜻하지 않은 왕의 임어에 방과 몸을 정제할 동안, 왕은 몸소 손에 보퉁이를 들고, 찬바람에 덜덜 떨며 기다렸다.
 
141
생후 처음 부자의 대면 방이 정제되기를 기다려서 들어가매, 남향하여 왕의 자리가 깔리고, 그 앞에는 강보에 싸인 아기라 분을 뜨고 주먹을 빨고 있으며, 반야가 윗목에 국궁하고 서 있었다.
 
142
왕과 신돈은 들어갔다. 왕은 남향으로 앉고, 신돈은 마주 꿇어 앉고, 반야는 영외에 엎드렸다.
 
143
왕은 힐끗 반야를 보았다. 보았을 뿐, 곧 도로 아기에게로 눈을 돌리고 잠시 굽어보았다. 신돈이 촛불을 정면으로 비친 아래 누운 강보의 왕자는, 주먹을 빨며 무엇이라 둥러둥얼하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144
이 모양을 굽어볼 동안, 왕의 얼굴에는 차차 차차 미소가 나타났다. 음울한 기분이 식어 갔다. 왕은 손을 들어서 강보의 자락을 들었다. 그런 뒤에 당신 손이 찬 것을 근심하는 듯이 몇 번 손을 비빈 뒤에, 아기의 왼편 옆구리를 들치고 들여다 보았다.
 
145
"첨의!"
 
146
만면의 웃음.
 
147
"왕씨의 자손은 반드시 왼편 옆구리에 커단 사마귀 세 개가 있소이다. 자, 이것 보시오."
 
148
굽어보매 거기는 큼직큼직한 사마귀 세 개가 분명히 있었다.
 
149
왕은 그것을 본 뒤에 만족한 듯이 아기를 두손으로 조심이 쳐들었다. 얼굴 맞은편에 높이 쳐들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을 동안, 만족한 듯이 미소가 나타났던 얼굴에 미소가 없어지고, 차차 적적해졌다가 그 뒤에는 차차 우울해지고, 마지막에는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150
"전하, 왜 앙앙해하시옵니까?"
 
151
왕은 덜컥 아기를 놓았다. 흑 하니 느꼈다.
 
152
"전하!"
 
153
"공주가 살아서……."
 
154
"전하, 이미 가신 이는 가신 이올시다. 돌아오시지 못할 분을 생각하시면 무얼 하리까? 전하, 유일의 혈사가 장성하시기까지……."
 
155
"아니, 이 아기의 장성은 보지 못할 것 같구려."
 
156
"그런 말씀이……."
 
157
"아니, 연전(影殿)이나 낙성한 뒤에는 나도 머리를 깎고 공주의 명복이나 빌면서 여생을 보낼까 하지만, 그때까지도 살지 못할 것 같구려."
 
158
"아니올시다, 전하, 전하께서는……."
 
159
"첨의도 모르시지, 내 마음은. 이즈음 강간히 살아는 가지만, 속으로는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드러눕기만 하면 방금이라도 죽을 것 같구려."
 
160
신돈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 하릴없이 손으로 아기의 볼을 쓸어 보았다.
 
161
"나 천추만세 후에 이 아기는 첨의께밖에는 부탁할 곳이 없소이다."
 
162
왕은 눈물을 씻었다. 그리고 가져온 보퉁이를 아기의 강보 곁에 가만히 같다 놓았다. 자식에게 어버이로서의 선사.
 
163
신돈은 그냥 허리를 굽히고 아기의 볼만 쓸고 있다가, 힐끗 영외에 엎드려 있는 반야를 보았다. 행여 왕의 눈이 한 번이라도 돌아올까 하여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 측은하였다.
 
164
신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왕도 손을 펴서 아기의 머리만 쓸어주고 있었다.
 
165
한참을 이렇게 말없이 지난 뒤에 신돈이 문득 몸을 조금 흠쳤다.
 
166
"신은 차차 늙어서 그러하온지, 밤엔 요통이 심하오니 먼저 물러가기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167
"아니, 나도 환궁하겠소."
 
168
신돈은 뜻하지 않고 반야를 힐끗 보았다. 반야의 몸이 약간 움직였다. 감정의 격동이 있는 모양이었다.
 
169
신돈의 눈을 따라 왕도 반야를 보았다. 그러나 한순간 뿐이요, 곧 눈을 돌렸다.
 
170
신돈은 왕을 모시고 별당에서 나왔다. 별당 밖에 국궁한 반야, 비록 쇠는 안 내지만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171
문 밖까지 왕의 보련을 보낸 신돈은, 내실로 들어가지 않고 사랑에 자리하게 했다.
 
172
승하한 지 만 2년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도 공주를 잊지 못해 앙앙불락하는 왕.
 
173
왕의 돌아봄을 못 받아 적적해 하는 반야.
 
174
두 개의 적적한 혼을 생각할 때에, 신돈은 오래간만에 느끼는 승도(僧徒)로서의 감정, 인간 무상에 얽힌 고적감 때문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175
내실에서는 한 여인이 그의 돌아오기를 기다릴 동안, 신돈은 사랑에서 인간 무상과 가지가지의 인간의 상태를 탄식하고 있었다.
 
176
신돈의 정치적 업적의 제 1년도 지났다. 각 장령들은 변방으로 보냈기 때문에 외구의 침범이 적었고, 관리의 탐욕을 요서 없이 벌하기 때문에 백성의 기운이 얼마간 펴지고, 얽히고 설킨 권문들의 거미줄을 되는대로 끓어 놓기 때문에 떼를 지어 음모 하는 일이 없어지고, 공맹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선비드르이 잔소리가 적어지고, 첫 솜씨로서는 성공한 편이었다.
 
177
세족과 선비들의 아우성은 꽤 심했지만, 이것은 모두 자기네의 개인적 원한을 토로함이었지 서민들은,
 
178
"성인(聖人)이 출현했다."
 
179
고까지 찬송했다.
 
180
이런 1년이 지나고 그 이듬해 여름, 작년 봄에 기공한 공주 영전이 거의 낙성되어 갈 때에, 왕은 영전을 몸소 가서 보고, 다시 헐어버리라는 엄명을 내렸다. 영전의 작고 좁아서, 중 3천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왕에게 불만이었다.
 
181
그리하여 짓던 영전은 그냥 버려두고 마암(馬岩)에다가 굉장히 큰 설계로써 새로이 짓기 시작했다. 왕이 공주를 생각하는 지극한 정성은 영전이나마 전무후무한 것을 짓고 싶었다.
 
182
신돈의 딱하였다. 왕의 심경을 동정하자면 얼마든 광대한 영전이라도 지어드리고 싶었으나, 지금 농번기에 많은 인력을 들여서 또 새로이 영전을 기공한다 하는 것은, 목민자(牧民者)의 차마 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닌게아니라, 벌써부터 민원성이 차차 들렸다.
 
183
새 영전 역사를 시작한 것이 6월. 6월에서 7월, 8월 한창 농번기에 농민들을 사역하는 공사라, 말썽이 차차 높아갔다.
 
184
이리하여 8월 어느 날, 도첨의 시중 유탁(柳濯)과 첨서밀적 정사도(鄭思道)와 정비 안씨의 친정 아버지 극인이 서로 의논한 결과, 왕께 영전 역사를 중지하기를 상소하였다.
 
185
그날도 마침 영전 도본을 상의 놓고, 어떻게 하면 전무후무한 영전이 될까 하고 이리 궁리 저리 궁리할 때에 이 상소가 들어왔다.
 
186
왕은 처음에 무심히 이 글을 보았다. 보다가 얼굴이 검붉게 되었다. 왕은 글을 찢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서 둘러보고,
 
187
"삼사사(三司使) 입직 안했느냐?"
 
188
고 호령하였다.
 
189
어명에 삼사좌사 이색(李穡)이 달려와서 미처 대령한다는 말도 올리기 전에,
 
190
"도첨의 시중 유탁과 첨서밀적 정사도를 당장 순군에 내리와. 동지밀직 안극인은 집에 가서 대령할 것이고, 정비(定妃)는 아비의 죄로 제 친정으로 돌려보내오."
 
191
하여 영이 추상 같았다.
 
192
왕의 천명이며 또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이색은 명령대로 시행하려 나갈 때, 왕은 소매를 떨치고 침전으로 들어갔다.
 
193
왕의 노염이 너무도 컸는지라, 재상들은 노염을 풀고자 연하여 아뢰었으나, 왕은 침전에서 나지 않고 침전에는 누구든 들이지 않았다.
 
194
정비 안씨를 쫓아 돌려보내기 때문에, 안문제까지 되므로, 태후도 근심하여 시신을 보냈지만, 태후의 시신까지도 왕을 보지 못했다.
 
195
그 밤 앙은 통분하여 한잠을 못 잤다. 공주의 신성함을 유린당한 것 같아서, 속이 불붙듯 하는 가운데서 왕은 그 사이 잊었던 3년 전의 일까지 회상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공주 승하한 뒤 처음은 사흘 동안 제사를 안 드렸다. 공주의 장례를 영화공주(仁宗의딸)의 의식에 좇아서 했다. 이 두 가지의 일이었다.
 
196
서민도 죽으면 그 첫날부터 제사를 지내거늘, 일국의 국모되는 공주는 사흘 동안 제사를 못 받았다. 또한 장례에 있어서도 영화 공주는 일개 왕녀에 지나지 못하는 신위(臣位)요, 대장공주는 일국의 국모임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장례를 영화의 의식에 따라서 행한 것이었다.
 
197
그때에도 이것을 도맡아 본 사람을 유탁이었다. 그때의 유탁이 이번에 또한 영전 역사를 중지하라는 상소를 한 것이다.
 
198
유탁에 대한 괘씸한 생각 때문에, 왕은 밤새도록 한잠을 못 이루고, 밝는 날 새벽에 신돈과 몇 재상들을 불러들이고, 삼사좌사 이색에게 명해 유탁을 국문케 했다.
 
199
이때 이색의 지혜만 없었다면 유탁은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색을 유탁을 국문한 뒤에 어전에 엎드려 복계하였다.
 
200
"유탁의 말을 듣사옵건대, 국모 승하하신 뒤에 신자로서 국모를 잃은 애통 때문에 순서를 잃고 부지중 궐제를 한 것이옵고, 장레의 절차는 신축년 난리에 고례문(古禮文)을 죄 잃어서 빙거할 바를 알지 못하옵고, 단지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공주 장의의 절차로 행하였다 하옵니다. 신자의 도리로서 아무리 애통 총망 중이기로 궐제를 했다는 일은 용서치 못할 죄옵지만, 국모상을 당한 망극 중이었사오니 관대한 처분이 계시기를 바라옵니다."
 
201
"그런 말로 면하려고? 내 마음이 굽지 않으니 할 수 없소."
 
202
냉혹한 태도로 왕은 간신히 유탁을 죽일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203
신도도 왕의 곁에 묵묵히 않아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맹렬히 노한 것을 처음 보므로, 어떻다 말을 끼울 수가 없었다.
 
204
무서운 공기가 흐르는 가운데, 군신은 잠시 묵묵히 있었다. 그 뒤에 왕이 또 입을 열었다.
 
205
"유시중의 죄로 말하자면, 첫째로 오래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불의한 일을 해서 하늘이 가무니 이것이 죄요, 둘째는 연복사의 밭을 빼앗았으니 이것이 죄요, 공주 승하 후에 삼일 궐제가 그 셋째요, 장례에 영화공주의 예를 좇은 것이 넷째요. 이렇듯 부르이 불충한 신하니 알아 하오."
 
206
이색이 또 응하였다.
 
207
"그러나 전하, 그것은 모두 기왕지사요……."
 
208
그냥 말을 계속하는 것을 왕이 빼앗았다.
 
209
"여러말 말고, 그러면 유시중이 옳고 내가 그르단 말이지?"
 
210
비교적 낮은 음성이나, 장차 폭발할 노염을 감춘 음성이었다.
 
211
한 찰나 두 찰나. 왕의 입이 드디어 폭발하려 할 때에 이색은,
 
212
"뿐만 아니오라, 이 일은 영도 첨의(신도)도 아실 일이옵니다."
 
213
고 신돈에게 밀어 버렸다.
 
214
왕은 신돈의 편으로 눈을 돌렸다. 힐문하는 눈이었다. 신돈은 즉시 받았다.
 
215
"신도 아옵니다."
 
216
"그럼, 첨의의 의견도 역사를 중지하라는 편이오?"
 
217
이 힐난에 신돈은 머리를 푹 방바닥에 묻었다. 눈물이 그의 늙은 눈에서 떨어졌다.
 
218
"전하, 성지(聖志)야 거역하리까마는, 민원이 약간 있사옵니다."
 
219
왕은 잠시 뚫어져라 신돈을 보았다. 신돈까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너무도 억울했다. 그래도 신돈만은 공주의 편을 들어 주리라고 믿었는데 그러면 세상이 모두 공주를 배반하고 나를 배반하는가?
 
220
왕은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이색을 불렀다.
 
221
"이시중, 이국새(國璽)를 봉하오."
 
222
순간 모든 사람의 등골에 소름이 일제히 돋았다. 모두 푹 엎드린 채 숨까지 죽여사. 지적받은 이색은 몸만 와들와들 떨 뿐 움쭉도 못했다. 왕은 잠깐 기다리다가,
 
223
"그것까지도 복종할 신하가 없소?"
 
224
신돈이 할 수 없이 이색에게 눈짓하였다. 이색은 얼굴이 차액해지며, 손을 와들와들 떨면서 옥새를 봉하고, '신 이색 근봉' 이라 썼다.
 
225
그것을 보면서,
 
226
"내가 덕이 없다고 내 말을 좇지 않으니, 마음대로 유덕한 자를 구해서 국새를 맡기오. 왕손은 별 종자며 서민은 별 종잘까? 고약한!"
 
227
최후의 말을 탁 내던지고 휙 들어가 버렸다.
 
228
왕이 들어간 뒤에도, 모두 잠시는 죽은 듯한 고요하였다.
 
229
신하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왕을 찾을 때는, 왕은 환관 네 명을 데리고 대궐에서 종적이 사라진 때였다.
 
230
왕을 잃은 대궐은 물끓듯 하였다. 대궐에서 왕을 찾느라고 야단일 동안, 왕은 환관네명을 데리고 정비 안씨궁(정비는 어제 친정으로 쫓았다)으로 공주의 진영 하나만 모시고 가서, 그 앞에서 노무도 통분하여 통곡을 하고 있었다.
 
231
왕의 행방을 알고, 재상들이 옥새를 받들고 행궁으로 갔지만, 댓돌 위에도 올라서지 못하게 해 그냥 돌아왔다. 수라반도 못 들이게 한다고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돌아갈 뿐이었다.
 
232
대신들은 모두 어쩔 줄을 모르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수군거리고 있을 동안, 신돈은 혼자서 널따란 정청을 지키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233
'딱한 일이 생겼군!'
 
234
물론 유탁, 이색 이하 몇몇 사람을 죽여 버리면, 왕의 마음도 풀릴 것이다.
 
235
그러나 신돈의 마음은, 이 재상들은 결코 죽이고 싶지 않았다.
 
236
유탁의 용맹과 과단성, 정사도의 곧은 마음, 이색의 지식과 슬기로움. 모두 일국의 재상으로 그 자리를 더럽히지 않는 인물들로서, 이런 변변치 않은 일과는 차마 모궁을 바꿀 수 없는 인물이었다.
 
237
신돈 자기의 몸을 호화롭게 하기 위해 좌우에 모은 소인배의 무리와 달라서, 이 인물들은 국가 동량의 재로 아껴 오는 인물들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목숨을 해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시켜야겠다.
 
238
두런거리는 대궐에 외따로이 홀로 앉아 있던 신돈은, 저녁이 거의 되어, 왕이 사랑하여 기르는 비둘기들이 모두 제 깃으로 들어갈 때쯤 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군에 명하여 이색을 옥에 내렸다.
 
239
그날 밤도 꽤 어두워서, 신돈은 혼자서 왕이 있는 정비궁으로갔다. 너무도 당돌히 올라오므로 수직하던 내관들도 혹은 어명으로 오나 하고 망설일 동안, 신돈은 어느덧 왕의 침전 안으로 들어 갔다.
 
240
"첨의 신돈 아뢰옵니다. 삼사좌사 이색을 어명에 거역한 죄로 하옥하왔습니다. 신돈 마땅히 대죄할 처지에 있사오나, 지금 이색의 일을 끝내고는 대명하겠사옵니다."
 
241
왕은 신돈이 이렇게 아뢰어도 아무 대답 없이 신돈을 보았다.
 
242
신돈은 거기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의 아까 행동은 오로지 전하를 위함이지,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는 점을 누누이 설명하고, 이색이든 유탁이든, 모두 추호라도 승하한 공주를 소홀히함이 아니라, 모두 전하와 전하의 백성을 위하여 자기 몸이 죽기를 무르쓰고 간한다는 말을 해 이 본시 어진 왕으로 하여금 종내 머리를 끄덕이게 했다.
 
243
이튿날 환궁한 왕은 하옥했던 신하들을 모두 어전에 부르고 술을 주며,
 
244
"내가 너무도 가볍게 노해서 재상들을 욕보게 한 것을 너무 탓하지 말고 이 뒤에도 늘 충성을 다해 주시오."
 
245
하고 간곡히 말했다. 일단 친정으로 쫓았던 정비 안씨도 도로 불렀다.
 
246
그러나 왕의 마음에는 유탁의 과실만은 장래 영구히 잊을 수가 없었다.
 
247
이리하여 이번 사변 때문에 그 뒤로는 다시 영전 역사에 대해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으며, 왕은 또 왕으로서 역사를 처음같이 쳐몰지 않고 천천히 진행시켰다.
 
248
왕의 18년, 19년도 주마등 같이 지나갔다.
 
249
왕의 신돈에게 대한 신임은 그 끝이 없는 듯했다.
 
250
왕은 무니노 아기를 보기 위해, 자주 신돈의 집에 미행하였다.
 
251
신돈의 집은 이 전에 있던 곳이 아니요, 대궐 서남 쪽에 빈터가 있는 것을 신돈에게 주어서 거기 짓게 한 것이다.
 
252
아기에 대한 애정이 나날이 자람에 따라서, 반야를 긍휼히 여기는 생각도 차차 들었다. 공주 이외에는 여인을 보지 않으려는 왕이매, 다시는 반야를 모시게 하지는 않았지만, 쌀을 한 달에 30석(碩)씩 하사하여 용에 쓰게까지 했다.
 
253
때때로 영전 조영하는 데 거동을 하고, 밤에 신돈의 집에 미행하고, 굉장하게 문수회(文殊會)를 차리고, 공주의 혼전에 제사하고, 이런 사사로운 일 이외에는 국정을 온통 신돈에게 일임하고 왕은 간섭지 않았다.
 
254
한 번 왕의 18년 섣달 납일에 공주의 능에 제사치 않았다고(본시부터 유탁을 좋지 않게 보던나마에) 이것도 유탁의 행한 일이라고 유탁을 옥에 가두고 그 집을 적몰했다가, 재추에서'납제'하고는 없다는 석명을 해, 도로 놓아 준 일이 있었다.
 
255
이렇게 전 책임과 전 권세를 한몸에 지고 나라를 꾸려나가는 동안, 이제는 웬만치 자신도 생기고 눈도 떠지기 때문에, 신돈의 정치는 처음의 과도기를 지나서 차차 완숙해져갔다.
 
256
그때에 아직껏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가 얼마만치 세력이 꺾이고, 주원장(朱元璋)이 이룩한 명나라가 커가는 것을 기회로 원나라와의 인연을 끊어 버렸다.
 
257
원나라에 맡겼던 제주도도 다시 찾았다. 각 연변을 침략하던 왜구도 뜨음했다.
 
258
정부도 이젠 안돈되어, 적재 적소에 배치된 정부는, 장차 대고려제국을 건설할 실력을 차차 갖추었다.
 
259
중의 아래 들기를 꺼리던(문벌을 자랑하는) 고려의 세족이며 유림들 가운데서도, 좀 현명한 사람들은 신돈 아래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
 
260
이러한 가운데, 왕의 19년 4월에는 관음전(觀音殿)을 임시 영전으로 쓰게 하고, 그 6월에는 다시 왕께 간해서, 옛날 짓다가 내버린 왕륜사의 영전을 다시 수리하고, 마암의 대규모 영전은 중지하도록 했다.
 
261
19년 섣달. 신돈이 집정한 지 만 4년 뒤 어떤 날, 왕이 입시한사관(史官) 두 명에게,
 
262
"민간의 이병은 다 내 득실이니 감춤 없이 아뢰라."
 
263
고 할 때에, 사관들은 천하가 배를 두드리며 성대를 축하하옵니다고 아뢸만치 안정 되었다.
 
264
무엇을 깊이 생각하고 있음인지, 이날 왕은 유난히도 바둑이 서툴렀다. 횡수가 많았다.
 
265
한참을 두다가 왕은 한 점을 딱 놓으며, 무심히(인 듯이) 이렇게 말했다.
 
266
"다시 영전 역사를 시작할까 보오."
 
267
"안 됩니다. 아직 안됩니다."
 
268
바둑에 정신이 팔린 신돈은 마주 돌을 놓으며 애고 없이 응하였다.
 
269
"그래도 이제는 민심도 좀 안돈되고……."
 
270
"아직 안 됩니다. 왕륜사에 영전이 있는데……."
 
271
"그건 너무 협소해서……."
 
272
"그만하면 넉넉하옵지……."
 
273
왕은 번떡 머리를 들었다. 허덕였다.
 
274
"첨의까지 공주를 멸시……."
 
275
"멸시함이 아니오라, 공주전보다도 백성이 더 중하옵니다."
 
276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왕은 벌떡 일어섰다. 바둑에 정신이 팔려서 무심히 마음에 있는 대로 대답을 하다가 펄떡 정신을 차리고 우러러보니, 왕은 얼굴이 종잇장 같이 희게 되고, 입술·몸·사지 할 것 없이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277
"전하!"
 
278
깜짝 놀라서 신돈이 엎드릴 때에 왕은 홱 돌아섰다.
 
279
"괘씸한!"
 
280
"전화!"
 
281
신돈은 왕의 옷깃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왕은 뿌리치고 침전으로 돌아갔다. 침전까지 쫓아갔으나, 왕은 내시에게 엄명하여 신돈을 보지 않았다.
 
282
신돈은 밤새도록 집에 돌아와서 근심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밝자 입궐해 왕께 뵙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허락지 않았다.
 
283
노염이 극도에 달한 것이다.
 
284
신돈은 하릴없이 집에 돌아와서 대죄하는 뜻으로 문을 닫고 근신하였다. 근신하면서도 걱정하였다. 자기밖에는 왕이 신임하는 사람이 없는지라, 지금 자기가 노염을 샀으매, 왕의 마음을 풀어드릴 사람이 없었다.
 
285
근신하는 가운데 한 달이 지났다. 6, 7월 더위에 신돈은 문을 굳이 닫고, 죄인으로 자처하고 즐기던 계지도 모두 멀리하고 지냈다.
 
286
어느 날 신돈은 어명으로 드디어 결박되어 대궐로 가게 되었다. 신돈에게는 특별히 친국을 하겠다 하여, 이전에는 말을 타고 출입하던 홍문을 결박되어 들어갔다.
 
287
친국소 앞 뜰에 꿇어앉을 동안, 얼핏 왕을 쳐야보니 그 사이 월여에 무척이도 상했다.
 
288
신돈은 가슴이 송구하였다. 그날 밤 바둑에만 정신이 팔리지 않았다면 좀더 달리 대답할 말도 있었거늘, 정신없이 대답을 했기 때문에 이렇듯 여윈 왕을 보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다.
 
289
그러나 그 죄로는 너무도 어마어마한 경계였다. 죄한대야 과즉견책에 지나지 않을 것을,
 
290
"대역 신돈, 네 죄를 알겠느냐?"
 
291
벽두에 대사성 임박의 호령에 신돈을 깜짝 놀랐다. 대역이란?
 
292
"황공하옵니다."
 
293
신돈은 머리를 흙어 비볐다. 뒤따라 추상 같은 호령이 다시 내렸다.
 
294
"상께서 너를 그만치 우우하사, 네게 과한 직책을 맡기시고 부귀를 주셨거늘, 너는 무엇이 부족해서 기현 최사원(寄顯 崔思遠) 따위와 역적을 도모했느냐?"
 
295
신돈은 가슴이 철썩 내려않았다. 한순간 온천지가 아득하였다.
 
296
"네 도당은 모두 토사를 했으니, 너도 이실고지하고 성은이나 바라거라!"
 
297
'어서 아뢰어라'의 소리가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가운데, 신돈은 너무 억하여 숨이 딱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물만 비오듯 하였다.
 
298
역적 도모라 한다. 도당은 벌써 토사했다 한다. 그 사이 다년간 고려 정사를 맡아본 신돈은 다 알아챘다. 자기가 왕과 불화된 이 기회를 타고, 누가 참소를 한 것이다. 누구라고 그것을 캘 것도 없다. 자기가 왕에게 신임을 받거니, 이 고려의 권문 세가들이 모두 할 수없이 자기에게 붙어 있었다. 그 신임만 없다치면 모두 저편이 되고 중 출신인 자기는 홀로 될 것이다.
 
299
언관은 자기를 극도로 참소할 것이다. 사관(史官)은 자기를 그도로 곡필을 할 것이다. 재상은 자기를 대역자로 몰 것이다.
 
300
어서 아뢰라는 호령과 함께 등으로 빗발치듯 내리는 곤장을 한참 받다가, 신돈은 머리를 조금 들었다.
 
301
"전하께 직소하겠습니다."
 
302
"무에냐?"
 
303
대사정이 대신 물었다.
 
304
"전하, 신은 6년 전 전하께 죽을 죄를 짓삽고, 그때 전하께 바친 목숨이매 어제 거두실지라도 어의에 달렸을 뿐, 그사이의 연명을 사례할 따름이옵니다마는, 오늘 친국의 취지만은 신이 도무지 모르는 바로소이다."
 
305
"네 도당이……."
 
306
임박이 대신 호령하는 것을 신돈이 받았다.
 
307
"전하도 총찰하시는 바, 신의 지위가 인신의 극이오매 무엇이 부족하와 불궤를 도모하옵고, 신이 이미 연로하옵고 신에게 후사가 없으매, 누구를 위해 외람되이 보위를 엿보리까? 이……."
 
308
"그것으로 미루어볼지라도, 너는 자초지종으로 사언(詐言)이 아니냐? 네게는 자식이 있다는……."
 
309
"아니옵니다. 신……."
 
310
"있다!"
 
311
"아니옵니다. 신 본시 유병하와 자식을 못 보옵니다. 무엄한 말씀이오나 신이 7, 8년간에 사(私)한 계집의 수효도 적지 않거늘, 한 계집도 유신하여 보지 못하고 오직 한 계집이 작년에 사내애를 낳았삽는데, 그것은 그 계집의 본 남편의 자식인 것은 그 계집도 알고 신도 잘 아오나, 신이 노래에 너무 적적하와 그냥 신의 아들이라 불러 둔 것이 있사옵지만 그 밖에는 후사가 없사옵니다. 남의 자식을 위하여 성은을 배반하올 신이 아니옵니다. 통축합소서."
 
312
"네 일찍 내게 한 말이 있지 않으냐? 젊은 계집을 많이 가까이 함은 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기를 기르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사했단 말이 또 웬말인고? 그것도 사언이 아니랄까?"
 
313
여기는 할말이 없었다. 눈물만 비오듯 쏟아질 뿐이었다.
 
314
신돈은 왕의 특별히 관후한 처분으로 수원에 유배(流配) 되었다. 그러나 소위 도당들은 모두 죽었다.
 
315
유배되는 길에, 신돈이 이번의 참소자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았다. 선부의랑 이인(李靭)이었다. 몇 해 전에 자기에게 아내를 보내서 벼슬 높여 주기를 청하였거늘, 신돈은 이것을 괘씸히 보고 계집만 빼앗고 청은 안 들어 주었더니, 그 결과가 오느르이 이것이었다.
 
316
배소로 때날 때, 신돈은 기회를 타서 재상 이인임에게, 왕께 아기마마의 뒤를 거두어 달라는 부탁을 단단히 했다.
 
317
그 귀에, 대간은 다시 상소하여 신돈의 가산을 적몰하고 신돈을 주(誅)하기를 청하였다.
 
318
이리하여 신돈은 수원 배소에서 목 자르고, 그 목을 같다가 서울에 걸어서 구경을 시켰다.
 
319
신돈이 죽은 뒤에 왕은 신돈의 집에서 기르던 무니노를 대궐로 불러서 태후께 알현시켰다.
 
320
동시에 신돈이 죽은 이제는, 다시 간할 사람이 없는 영전 역사를 시작했다.
 
321
왕자 무니노의 생모 반야는, 신돈의 집이 적몰될 때에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322
신돈 죽은 지 한 달, 두 달 간 왕은 무심히 지냈다. 그러나 석달, 넉 달. 날이 갈수록 통절한 고적감을 느꼈다.
 
323
정부에서는, 그 사이 신돈이 세웠던 시설을 모두 없앨동안, 왕의 마음에는 신돈을 그리는 생각이 나날이 간절해갔다. 어떤 대는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이나 거의 같을이만치 애타도록 그리운 때도 있었다. 마음의 괴로움을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알아 줄 사람도 없었다.
 
324
그 사이 신돈에게 맡겼던, 정사는, 신돈이 죽기 때문에 다시 왕에게로 돌아왔다. 그 번거로움!
 
325
정 애탈 때에는, 신돈을 부르면 그래도 신돈에게서는 좀 시원한 말이라도 있었거늘, 이 막히고 빽빽하고 답답한 재상들과 대하려면 정 진저리가 났다. 사사에 공맹을 들고 나오고 송당을 들고 나오고 선왕을 들고 나오고. 이런 가운데서, 왕의 성격을 차차 괴벽해 갔다.
 
326
신돈이 죽은지 1년 뒤, 마암 영전의 종루(鐘樓)가 낙성되었다.가 헐리고(높이가 얕다고) 영전의 취두(鷲頭, 금 6백 50냥, 은은 백냥을 들인)가 된 때쯤, 왕은 온전히 다른 사람 같이 되었다. 대수롭잖은 일엔 성을 내고, 성을 내면 포학성을 띠는 것쯤은 그래도 인간미가 있는 편이요. 때때로는 이틀 사흘 말 한마디도 없이 음침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는, 생각나면 엉뚱한 일을 시켜서, 사람들을 놀랬켰다.
 
327
21년 10월에 왕은 '자제위(子弟衛)'라는 것을 두기로 했다. 그것은 김흥경(金興慶)으로서 두목을 삼은 미소년들의 무리였다.
 
328
홍륜(洪倫),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등 왕의 사랑을 받는 소년들이었다.
 
329
그러는 한편 계집들에게 대한 잔학 본능이 강해져서 계집, 그 가운데서도 젊고 예쁜 계집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는 것을 통쾌히 여겼다. 대궐에서 계집들은 차차 이 괴벽한 왕을 무서워하고 꺼렸다. 어떤 날 왕은 홍륜을 익비 한씨의 방에 몰아넣은 일까지 있었다. 한씨는 반항을 했지만 왕까지 칼을 뽑아 들고 종내 꺽고야 말았다. 그것을 엿보며 기뻐하는 왕.
 
330
왕의 마음은 나날이 어지러워갔다.
 
331
일찍이 어떤 날 청년 시절 개가 몹시 짖는 것을 보고, 저 개가 아마 배가 아픈 모양이라고 약방에 명하여 약을 주게 한 일이 있느니만치, 착하고 인자하던 본성은 어디로 가고 없어졌는지, 지금은 그냥 음침한 가운데서 날을 보내고 날을 맞고, 무슨 잔혹한 일을 본 뒤에야 비로소 약간 음산한 웃음을 얼굴에 띠어 보느니 만치 왕은 격변했다.
 
332
어떤 때 심히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당신의 목이라도 잘라 보고 싶은 기괴한 충동조차 일어났다. 왕 앞에서 술상이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술이 매우 취해서 가까스로 잠이 들면 그래도 좀 나았지만, 깨어 있기만 하면 가슴이 설레고 강박 관념에 눌려, 자시도 마음이 펴지는 순간이 없었다.
 
333
이런 가운데 연달아 생각나는 것은, 하나는 과거 16년 간을 도고 동락한 대장공주의 추억이요, 또 하나는 과거 6년 간을 당신과 나라를 위하여 애쓰다가 도리어 당신께 죽인 바 된 신돈 생각이었다.
 
334
공주만 살아 있었어도 오늘날 이런 미칠 듯한 고경에는 빠지지 않았을 것이며, 공주 잃은 뒤 신돈이라도 그냥 살았다면 어떻게든 당신을 위로해서 이렇듯 괴로운 rd지에까지 빠지게는 안할 것이다.
 
335
나날이 체력이 쇠약해감을 느끼고, 나날이 늙어감(마흔네 살이었다)을 느끼고, 나날이 마음이 더 어지러워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더 산대야 얼마 더 살지 못할 것이요, 오래 산다 해도 그것은 괴로운 시간을 더 오래 누리는 데 지나지 못할 것이다.
 
336
어떤 날 왕은 태후궁에 태후를 뵈러 갔다. 인사 몇 마디 왕래된 뒤에 왕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337
"신의수도 이젠 다하고 얼마 더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태후전마마! 무니노를 당부하옵니다. 아직 아무 철 모르는 어린애옵니다만……."
 
338
"전하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339
"신의 망령이 아니옵니다. 지금 후사를 세우지 않으면 한을 천추에 남길 듯하옵니다. 이 사직도 부탁하려니와 공주 영전의 역사를 뉘 맡아서 승계하리까?"
 
340
태후는 아드님의 초췌한 양을 민망한 듯이 한참을 보았다.
 
341
"영전의 굉장 활한 것이 천하에 무비라고 원성이 많은 위에, 전하는 또 농번기에도 비만 오면 영전 역사에 방해된다고 기청제(祇晴祭)를 드리고 하니, 이것은 임금된 도리에 어그러진 일로 아오. 또 이즈음 들으니, 김흥경 등 소년들을 일야 대궐에 머물러 둔다 하니, 이것도 또한 인자의 효도를 막는 것으로 임금의 취하지 않을 일이오. 전하! 늘 밤이 깊도록 깨어 계시다니 밤이 늦으면 아침도 늦는 법이라, 정사에 게으르게 될 터이니 역시 임금의 피할 일인데 좀 삼가시오."
 
342
왕은 침울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모후의 말이 끝나자 일어서려 했다. 태후는 왕의 옷깃을 붙들었다.
 
343
"전하! 내 말에 대답을 하고 나가시오."
 
344
"네!"
 
345
명료치 않은 대담을 하고 몸을 돌이키려는 왕을, 태후는 그냥 안 놓아 주었다.
 
346
"들으시오? 안 들으시오.?"
 
347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348
"또 비빈(妃嬪)들은 왜 보지 않으시오?"
 
349
왕은 머리를 끄떡하였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350
"공주만한 자 없습니다."
 
351
주루루 눈물이 흘렀다.
 
352
마흔네 살 난 아드님의 눈물을 보고, 태후는 그만 웃었다.
 
353
"사람은 한 번 죽는 것, 전하도 면치 못합니다."
 
354
그러나 왕은 눈을 멍하니 뜨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355
음산한 왕과 남륜의 궁실과 어지러운 정국. 이런 가운데 그해도 또 넘어갔다.
 
356
정치의 중심이던 신돈이 없어지고, 왕 또한 정치를 돌보지 않으므로, 재상들이 제각기 당파를 짜 가지고 제멋대로 놀아나는 고려의 정국은, 다시 수습하기 어렵도록 어지러워갔다.
 
357
이런 어지러운 가운데서, 24년 봄도 가고 여름도 또한 가고 가을이 이르렀다. 그렇지 않아도 음산한 가을 8월 어떤 날, 왕은 꺼질 듯한 음침한 기분으로 환관 최만생의 부액을 받아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
 
358
후원의 어느 곳이라 이전 한때 공주와 손을 마주잡고 안 다녀 본 곳이 있을까? 봄에는 꽃을 따러, 여름에는 녹음을 찾아, 가을에는 낙엽을 주우러, 겨울에는 눈을 보러, 늘 함께 다니던 공주의 생각 때문에, 왕의 푹 숙이고 있는 얼굴에서는 연하여 눈물이 흘렀다.
 
359
한참을 이렇게 거닐다가 문득 변의(便意)가 생긴 왕은, 만생을 데리고 내전으로 돌아왔다.
 
360
매화틀(便器)에 앉아서 왕이 침울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을 때, 곁에 부축하던 화관 최만생이 허리를 굽혀서 제 임을 왕의 귀에 가져야 대고 소곤거렸다.
 
361
"상감마마, 익비께서 유신(有神―― 中) 합신 듯이 들었습니다."
 
362
"뭐! 익비가?"
 
363
"네, 벌써 다섯 달이라고 들었습니다."
 
364
왕은 한순간 기괴한 표정을 했다. 그뒤에 물었다.
 
365
"누구라더냐, 사내는? 들었느냐?"
 
366
"비의 말씀이 홍륜이라 하옵디다."
 
367
"홍륜?"
 
368
황은 잠시 침울한 얼굴을 계속했다.
 
369
"응! 공주 생전에 늘 원자(元子) 없는 것을 근심하더니, 이젠 돼다."
 
370
왕은 일을 끝내고 일어났다.
 
371
"홍륜의 입을 막아야 소문이 안 나지. 내일 청릉에 알(謁) 할 때 독주를 먹일까?"
 
372
그리고는 휙하니 얼굴을 최만생에게로 향했다.
 
373
"너도 내막을 알았으니 살지 못할 줄 알아라."
 
374
만생은 왕의 너무도 침울한 얼굴에 몸서리쳤다.
 
375
여전히 그날 저녁 왕은 술을 몹시 먹고 대취해서 자리에 들면서는 정신 모르고 잠이 들었다.
 
376
그 밤도 어지간히 깊은 때에, 왕이 침전을 향해 발소리를 감추고 가까이 오는 몇 몇의 괴한이 있었다. 최만생, 홍륜, 권진, 한안, 노선 등이었다. 밝는 날 왕께 죄받기 전에 왕을 시하여 자기네의 생명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377
대취하여 업어갈지라도 모를 만치 된 왕의 이불을 벗어던진 가슴에는, 흉한들의 칼이 내리박혔다.
 
378
"도적이야!"
 
379
"역도야!"
 
380
좀 뒤에 침전에서 울리는 아우성. 이것은 역도들이 일을 끝내고 스스로 피하려고 지른 함성이었다.
 
381
그러나 위사(衛士) 한 명도 이 소란한 침전으로 달려오는 자가 없었다. 침전에서 고함지르는 소리에 내전 궁인들도 모두 깨어 일어났지만, 무서워서 나오지 못하고 내전에서 야단들만 하고 있었다.
 
382
이런 소란의 대궐에, 제일 먼저 달려 온 것이 왕의 모후되는 명덕 태후였다.
 
383
모후가 달려왔을 때는 흉도들은 아닌 체하고 왕 앞에서 통곡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384
태후궁에서 단숨에 여기까지 달려온 태후는 숨이 딱딱 막혔다.
 
385
태후 침전에 뛰어들면서,
 
386
"아이고 이게 웬일이오? 전하! 전하!"
 
387
피가 펑 괸 방에 주저앉아, 아드님의 머리를 흔들며 울었다.
 
388
"전하, 전하! 내가왔소. 전하! 너희들은 빨리 가서 대신들을 지급 입내하래라."
 
389
태후의 명으로(아닌 체하고 있던) 흉도들이 몰려간 뒤에 침전에는 태후 혼자서 아드님의 옥체를 흔들며 통곡하였다.
 
390
"전하! 정신을 차리오. 전하!"
 
391
문득 왕의 입술이 조금 떨렸다. 눈이 힘없이나마 조금 움직이는 듯했다.
 
392
태후는 얼굴을 아드님의 눈에 마주 갖다댔다.
 
393
"전하! 내요, 내야!"
 
394
"무……우……우……."
 
395
무슨 말이 나왔다.
 
396
"무어요? 물요?"
 
397
"무……우……니……노!"
 
398
"무니노 말씀이오?"
 
399
왕은 그렇다는 뜻으로 눈을 감았다.
 
400
태후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져 나갔다. 왕의 최후소원. 무니노를 보고 싶다는 그 소원을 들어주자니 태후궁까지 갈 사람이 없었다. 임종의 아드님을 두고 태후는 떠날 수가 없었다. 궁인을 부르자니 실낱 같은 아드님 앞에서 고함지르기가 무서웠다. 마음으로만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나 방도가 없었다.
 
401
"전하! 무니노는 안심하시오. 전하의 뒤는 무니노로 반드시 잇게 할 게."
 
402
이렇게 아드님의 귀에 입을 대고 불어넣은 태후의 심장은, 바야흐로 갈라질 듯 했다.
 
403
"무……우……우……무……."
 
404
"아이구 전하! 이게 웬일이오?"
 
405
보기가 무섭도록 초췌한 아드님의 얼굴에, 태후는 자기의 얼굴을 비벼댔다.
 
406
왕은 드디어 승하하였다.
 
407
"무……우……무……."
 
408
무니노를 보고싶다는 뜻을 몇 번 나타내고는, 보고싶은 무니노를 보지도 못하고 그냥 떠났다. 10년 전에 공주가 간 나라, 또는 4년 전에 신돈이 간 나라, 옛날 친구들이 있는 나라로.
 
409
왕이 운명한 뒤에야, 재상들을 부르러 나갔던 흉도들이 돌아왔다. 부르러 갔던 사람들이 왔으나 재상은 이인임(李仁任) 한 사람 밖에는 오지 않았다.
 
410
태후는 태후궁의 무니노를 불러왔다.
 
411
"자, 절해라. 아버님이시다. 아버님이시다."
 
412
태후가 무니노를 붙잡고 울음 절반 말 절반으로 이렇게 말하매, 이때 10살 난 소년은 난생 처음으로 아버님으로서의 왕의 영해에 절하였다.
 
413
최만생 등의 악계는 날이 밝기 전에 발각되었다. 만생의 옷자락에 튄 핏방울이 날카로운 이인임의 눈에 벗어나지 못해 국문을 당한 결과, 죄상이 명백하게 되어 옥에 내렸다.
 
414
"태후전마마, 신 일찍이 대행 전하께서 강녕대군(江寧大君, 무니노)에 관한 부탁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415
"임종까지도 전하는 무니노를 부르셨소."
 
416
"유지까지 그러하온 이상은 물론 강녕대군으로 입사를 하셔야 겠습지요?'"
 
417
"나도 그렇게는 생각하지만, 대행왕께 혈사가 있었다는 걸 다른 재상이 믿을까?"
 
418
"거기 대해서는 상장군 이미층(李美沖)도 알리이다. 대행께서 이전에 금전을 만드셔서 이 장군을 시켜 신돈의 집에 무니노 아기께 보내오신 일도 있었삽고, 또 시중 이성계에게도 이런 하교가 계신 것을 신도 아옵니다."
 
419
"대행전하 유일의 후사니, 무니노를 두고 딴 사람을 어디서 구하겠소."
 
420
이리하여 대행왕의 영해를 앞에 두고, 태후와 이인임은 강녕대군 우(禑, 무니노)를 제32대 고려왕으로 세우기로 내정되었다.
 
421
이튿날 국상은 반포되고, 또 그 이튿날 11살 소년 왕자는 태후의 축복과 이인임의 알선으로써 고려국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422
선왕 일대의 정과 온 고려의 수(粹)를 다하여 축조하던 공주 영전은, 낙성 임박하여 축조자를 잃었기 때문에, 마지막 한 획을 더하지 못해, 미완성품대로 다시 황폐해갔다. 그러나 영전이나 두고 만나보려던 두 혼은, 지금 사실로 만나게 되었으니 영전의 황폐를 애석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423
후궁에 갇혀서 나비의 돌보기를 고대하고 있던 명화 네 떨기, 혜비 이씨, 정비 안씨, 신비 염씨, 익비 한씨.
 
424
익비 한씨는, 뜻 안한 고약한 소나기에 밟혀 스러져 버리고, 나머지 세 떨기는 그냥 봉오리 채로 끝까지 나비의 발자국을 맞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연년이 가을에는 가지런히 현릉(玄陵, 선왕릉)에 가서 자기네들을 돌보지 않고 가버린 나비의 외로운 혼을 곡하며 그들의 적적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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