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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사겸 평생일기 ◈
◇ 방사겸 평생일기 (제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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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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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사년 윤七月 二十五日 즉 서력 一千八百八十一年 평양성 방정우 가정에 七兄弟 중 五次子로 났으며 위로 매씨 한 분과 아래로 매제 한 분이 있고 또 형님의 소생 자녀가 많은 복잡분주한 가정에 났었다. 부모는 어곽전과 돈변놀이를 하여서 집안은 평양성에서 유명한 부호 가운데 하나 되는 집안인 고로 자친되는 이께서 자식 기르는 괴로움을 면하고 호사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식들을 낳자 즉시 유모 집으로 보내어 길렀다. 나도 유모 집에서 五세까지 자라서 부모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유모의 성명은 명치정이라 하는 이인데 외촌에서 들어와서 ●●●장사를 하여 생도를 하는 인데 위로 노모 한 분을 모시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자의 명은 명봉손이라고 하는데 사람된 자격이 극히 정답고 사랑심이 많은 청년이더라. 나는 유모집에서 五세까지 자라나며 유모 부부에게는 어머니 아버지라고 곧 친부모와 같이 믿고 불렀으며 또 유모의 노 모친과는 할머니라고 하였고 자식 명봉손과는 형이라고 불렀다. 온 유모집 전 식구가 나를 친자식 손자 동생같이 사랑하고 귀히 길러준 것은 나의 친부모보다 못하지 않은 고로 나는 나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지 못하고 상기까지 사모하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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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五세에 유모집을 떠나 친부모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유모의 사랑하던 그 유모의 집만 못하게 생각한다. 부모와 또 형수들이 다 나더러 얻어다 기르는 아이라고 조롱한다. 철 모르는 나의 생각에는 정말 얻어다 기르는 줄로만 꼭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모부 명치정을 나의 친아버지로 늘 생각이 나서 유모 집으로 다시 달아나려고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상거가 먼 때문에 달아나지 못하고 명치정 아들이라는 조롱을 참고 견뎌가며 한 살 두 살 자라서 온갖 눈치와 경위가 발달되어서 집안에 누가 그중 나를 귀히 하고 동정을 하는지 멀쩡히 다 알게 되었다. 나의 자친은 나를 친히 길러내지 않고 남이 길러다준 자식에게 아무 정이 없고 또 나 역시 친어머닌 줄 안다 할지라도 사랑할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아서 어머니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것은 내가 다 기억치 못하나, 그러나 자친에게 그리 정이 가지 않은 것은 내가 잘 기억한다. 이런 가정에서 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부모의 따스한 사랑이라고는 일 점도 받지 못하고 이 몸이 자라난 것은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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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보에 싸여서 유모의 젖을 빨고 아무 철모르는 때에 맏형님 한 분은 자녀 둘을 낳고 청춘에 돌아가셨다 한다. 이 형님의 자식 나의 조카 되는 놈에 나이 두 살 아래가 되어서 나와 같이 자라나게 되었다. 이 놈은 부모를 잃고 조모님의 손에서 길러나게 되었다. 조모님이 이것을 부모 잃은 손자라고 귀히 여기고 사랑하여 주기 때문에 집안 아이들 중에 그 중 대장 노릇을 하기 때문에 삼촌도 모르고 함부로 언행을 놀리고 또 암상하고 악하여서 아자비한테 손질 발질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집어서 던지기가 능사로 삼는데 나는 자친이 무서워서 그냥 버려두다가도 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기회만 만나면 단단히 때려주고는 나는 자친한테 경을 치고는 울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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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정에도 나를 동정하여 주는 형수 한 분이 있었다. 이 분은 강동 땅의 주민 문술덕이란 농촌 부가의 따님으로서 우리 둘째 형님의 아내가 되었다. 맏형님 내외는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 형님과 이 형수가 집안에 맏아들 맏며느리가 되어 집안을 주장하신다. 이 가정에서 그리 나를 사랑하여 주는 이 없고 다만 이 형수님이 나의 억울할 적마다 위로와 동정을 늘 하여주는 고로 어머님 방에서 떠나서 형수님 계신 방으로 가서 자고 몇 해를 지내었다. 이럭저럭 자라나는 동안 나는 칠, 팔세 가량이 되어 세상 물정은 그리 다 알지 못하나 그러나 집에 모든 형편 되어가는 것은 대강 짐작하였었다. 학교에 갈 나이 되었다. 六세에 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 학교라고 우리가 보통 칭하지마는 이왕에는 서당 혹 서재 글방이라고 하였다. 六세에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여서 갑오년 청일전쟁이 벌어져서 평양성은 전쟁 중심지가 되어서 견딜 수 없어 강동가대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서 글을 더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강동 고비소로 피난을 나가서 한 四年 동안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한 곳에 이 四年 동안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기 때문에 서당에를 다시 가지 못하였다. 백씨께서는 평양성으로 다시 들어와서 객주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는 나는 十四세 가량이 되어서 세상 형편과 사업상 물정을 실제로 연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객주사업은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인데 재정출납이 거대한 중심이 수입 지출이 복잡한 사업이다. 이 사업에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형님을 도와주며 이 사업에 실제적 연단이 되어서 어떤 부분에 한 가지를 담임하여 맡아볼 만한 자격이 되었다. 이 때는 十五세에 사업상에 눈이 좀 들 만한 청년이었다. 하루는 백씨께서 돈 받아들이고 내주는 직무를 나에게 맡긴다. 이 직무를 맡아 가지고는 평양성 각양 전방마다 널어놓은 물건 값을 나의 손으로 받아들인다. 또 받아들이는 수로만치 남에게 물어줄 돈이 또 있다. 받은 돈으로 물어줄 돈을 갚고는 저녁 때에 집으로 들어와서 서기와 마주 앉아서 그 날 출납한 문부를 맞추는 일인데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경력을 얻어서 상당히 감당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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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를 가게 되었다. 十六세에 중화 땅에서 무쇠점 하는 김씨의 딸한테 장가를 들었다. 처가는 무쇠점을 하여서 풍족히 산다. 그러나 시골 생활의 집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딸도 시골여자일 것은 물론일 것이다. 나는 대도시 인물 풍채가 화려한 평양성 태생으로 온갖 사치하고 맵시 있는 것을 주장하는 평양성 청년자제의 하나 될 것이다. 불행히 어찌어찌 소개가 되어 촌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철이 채 들지 못한 十六세의 청년 나는 이 여자한테 장가든 것을 늘 불만족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안채 방에 들어가 자지 않고 차차 차차 사랑방 잠을 자게 되었다. 자친과 형수들은 장가든 처를 두고 사랑방 잠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이해로서 권한다. 그러나 마음이 원치 않는 것이야 황제위라도 사양하는데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이 잘못된 생각으로 굳어졌다. 나의 처지는 이와 같이 된 고로 집에 있기 싫은 생각이 발동되었다. 그래서 외국으로 달아나버릴 생각이 종종 발한다. 그러나 집을 떠나 달아나는 일이 그리 적은 일은 아니다. 그 뒤 하루 이틀에 거부이 떠나지를 못하고 맡은 책임에 일은 여전히 잘 직무를 하여 나가면서 달아날 계획을 파하지 않고 계속 궁랑하는 중에 달아나기 바로 몇 달 전은 섣달 그믐날이다. 이 날을 자고 나면 정월 一日 세배 다니는 날이다. 나도 정월 一日에 웃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한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 또 연갑세라 전방 사원 아이들한테는 세배를 받는다. 세배 받는 아이들에게 돈푼씩 주려고 백동전 돈 백 냥이나 가지고 나갔다. 평양성에 관앞이라 하면 평양성 상업의 중심지이다. 세배를 다니다 관앞 어떤 전방에를 들어가니 그 전방 주인은 없고 청년자제만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상업가의 청년자제들이 모여 풋돈푼씩 대고 눈놀이를 한다. 나도 한 몫 들어서 눈놀이를 하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 二百냥 따가지고 저녁 때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다시 나가니 눈놀이판이 훨씬 커져서 건달꾼들이 많이 와서 등 뒤에서 구경을 하면서 돈 많이 딴 사람에게 개평을 구한다. 이곳 시로 한 복판이 되어 사람이 많이 들락날락하여 번다하여서 유숙으로 옮겨 갔었다. 이 집은 평양성에서 거간하는 김서방의 집인데 김서방의 딸은 방금 객을 보는 기생 딸 하나였다. 이 기생의 명은 연홍이라 하는데 十六, 七세 된 아름다운 기생이다. 지금 기생집에서 눈놀이가 변하여서 투전노름이 되었다. 평양성 유명한 상업가의 자제들이 모여서 이 연홍이의 집을 부자 되게 하였다. 이 집에서 두 주일 동안을 주야를 지내면서 투전을 하였다. 나는 한 三千냥을 잃고 정월 대보름이 되자 투전판은 걷어치우고 각각 상업에 맡은 직무를 하게 되었다. 나는 한 三千냥 버리고 속이 상하고 또 마음이 외도에 들게 되었다. 그 동안 두 주일 동안에 연홍이와 친절하게 되어서 시간만 있으면 연홍이의 집을 가게 되었다. 하루는 가니 연홍이가 서울 진연에 갔다 한다. 나는 마음이 더 들떠서 집에 있을 생각이 없어 우리 집 앞에 사는 조지수씨를 만나 미주로 달아나자고 상론을 하였다. 조지수씨는 노비를 변통할 수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노비를 얼마라도 변통할 수가 있으니 돈은 염려 말고 같이 달아나자고 하였다. 하루는 달아나기로 꼭 작정을 하였다. 이 날은 평양 장날이다. 상업하는 사람들이 돈을 받아서 갚는 날이다. 나는 이 날에 받을 돈이 수십만 냥이다. 또 내가 남에게 갚을 돈도 여러 만 냥이다. 받고 줄 것을 적어 가지고 나와서 그 중 큰 물건값 청인 東順昌한테 지전 판 값 받을 것이 一萬여 냥 돈표를 가지고 아침 열 시 가량에 가서 달라 하였다. 그러나 너무 이르다고 五千兩만 준다. 백동전 三千兩을 세려면 여러 시간을 가져야 되겠는데 세보지 않고 그냥 가지고 오자니 의심을 주겠고 내 손으로 세자니 손이 떨려서 할 수 없기로 조지수씨더러 대강 세어보는 체하고 빨리 가지고 상시구 밖 마목사한테 가서 인천으로 가는 환표를 만들어 달라 하여 가지고 대동강 사원 나드리 주막집에서 나는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빨리 수습하여 가지고 나오라 하고는 나는 흘출 평양성을 등지고 대동강을 순식간에 건너가서 사원 나드리 주막집 토방에 앉아서 조지수 나오기만 고대고대 하고 있다. 따스하던 五月달 해는 서산에 가물가물하며 내려가 없어져 버린다. 평양성을 굽어보니 집집이 저녁 짓는 연기로 아름다운 평양성을 희미하게 덮어서 해 없는 저녁이 더욱이 어두침침하여진다. 오후 두 시 가량에 이곳을 나와 조지수 나오기만 고대고대하고 기다리는 동안이 이 때까지였다. 그러나 상기 나오는 기척이 없으니 무슨 변고나 없나 또 우리 집에서 사람을 보내어 돈 찾는 것을 다 빼앗지나 않았는가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 견디다 못하여 최후에는 이같이 작정을 하여 가지고 평양성으로 밤 중 들어가서 우리 집 앞집 조지수 집이니 잘못된 연고를 알아본다 하고 다시 대동강을 건너려고 나룻배 선창으로 나간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흰 모래 강변으로 나간다. 뱃나루 턱에서 방금 건너온 배에서 내린다. 이는 분명 조지수이다. 참말 고대고대하던 조지수씨가 분명하구나 하고 나는 반가운 중에도 맡기고 온 그 돈 수속을 어떻게 하여 가지고 나온 것부터 물었다. 조지수는 희색이 만면한 태도로 모든 일이 다 잘되었다고 하면서 가지고 갈 돈은 상시구 밖 마목사한테 가서 인천으로 가는 五千냥 환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환표를 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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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는 평양지방대 五百명이 서울로 걸어 올라가고 서울에 있던 평양지방대 五百명이 평양으로 내려오는 환대하는 때가 되어서 서울과 평양 사이에 군사가 연락부절인 가운데 조지수와 나도 여기에 섞이어서 보황으로 걸어서 서흥 골을 당도하였다. 오고 가는 군대가 많아서 서흥 골 주막집에는 가득가득 찬 것이 군대뿐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주막을 얻지 못하고 좀 우측으로 들어가서 농부의 집을 얻어서 이날 쉬고 이튿날 조포까지 걸어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행한다는 정론을 하고 일찌간이 조반을 먹고 농부의 집에서 떠나 대로로 나섰다. 대로변 주막집 토방에 나의 사촌 형님이 일찍이 토방에 나와서 우리가 그 앞으로 지나갈 것을 예상하시고 기다리던 차였다. 조지수는 나보다 몇 보나 앞서 나가다가 나의 사촌한테 붙들렸다. 나는 황급한 김에 촌길로 달아난다. 사촌 되는 분은 넷 보교를 타시고 나오신 고로 보교꾼이 네 사람이 다 나를 따라와서 나도 잡혔다. 할 수 없이 사촌 계신 주막으로 들어가서 사촌 형님을 만나게 되었다. 조지수 봇짐 속에 장착하였던 인천 가서 찾을 환표는 벌써 사촌한테 빼앗겨서 우리 수중에는 간신히 인천까지 갈 노비밖에 없이 되었으니 달아나야 아무 소용이 없이 된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때에 사촌 형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달아나야 네가 고생을 실컷 하고는 염치없이 집으로 다시 찾아들어오는 것보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가자고 할 때에 같이 집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간곡히 권면하기로 나도 생각다 못하여 돈 없이 인천이나 서울로 달아나야 별 수가 없을 것을 알고 사촌과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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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자친과 형수들과 또 금슬이 없는 아내라도 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과 같이 반가워하는도다. 그러나 객주를 주장하시는 백씨께서도 속으로야 반가워 했을 터이나 그러나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지라도 네가 왜 집에서 달아났던가 하는 말 한 마디와 책망 한 마디를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차라리 한 번 단단히 책망과 벌을 받고 달아났던 잘못된 행동에 용서를 받는 것이 천성에 편리한 것을 나는 잘 알고 매일 고대고대하고 기다렸을지라도 백씨께서는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책망 한 마디가 없으니 나는 자연히 사랑으로 나갈 용기와 면목이 없게 되어 살림하는 안처에서 형수들과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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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객주하는 사무소에서 내가 맡아보던 돈 출납 사무를 다른 사람이 맡아보다가 그만두게 됨으로 사무소에 온갖 곤란이 있게 되는 때에 나와 친절하던 손님들이 나의 백씨에게 권고하기를 달아났던 동생을 다시 직무를 주라고 여러 손님이 말하게 되는 때에 백씨께서도 나를 다시 일을 보게 할 생각이 나서 하루는 저를 사랑으로 나오라 하기로 나는 한 달 동안이나 안방에서 형수들과 세월 보내다가 비로소 처음으로 사랑에 나와서 다년간 우리 객주에 다니던 손님들과 거간들과 총서기 金淳永氏를 다 만나게 되는 때에 이 분들은 우스개 말로 인천과 서울이 평양보다 좋더냐고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인천과 서울은 채 가지 못하였으니 좋은지 어쩐지 알 수 없으나 하늘에 꽉 닿은 듯한 동실령을 넘어서 서흥골은 잘 구경하고 왔는데 이곳은 내가 평생을 두고 기억할 만한 곳으로 생각하게 될 것은 이곳에서 나의 달아나던 계획이 실패를 당하고 붙들려 와서 지금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된 것만은 반갑습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미소함을 마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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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같은 세월은 쉬지 않고 주총알같이 달아나서 서흥골서 잡혀온 지도 벌써 두 해가 되었다. 지난 두 해 동안 진심으로 백씨가 주장하는 객주사업에 그 중 중요한 부분인 각양 물건 판 값을 받아서 남에게 줄 돈을 갚아주는 책임을 맡은 외에 큰 대상들이 오고 가는데 영접과 전송하는 것과 화륜선으로 온갖 물건 오고 가는 것을 내가 부치고 찾아들이는 책임과 또 여러 거간들이 물건을 팔러 나갈 때에 간색을 가지고 나갔다가 다시 들여오는 것을 간색책에 적어 놓는 것이 나의 매일하는 책임이니 내가 몇 가지 사무를 겸하였으며 이 여러 가지 사무를 보는 시간은 매일 보통 十四, 五 시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책임인 줄로만 알고 공투세 한 번 안 하고 전심전력으로 일을 잘 보아 나간다. 그러나 백씨께서는 나에게 한시도 자유를 주지 않고 주야로 자기 절제 밑에 두려고 한다. 동서양을 물론하고 어떠한 일꾼이든지 저녁 먹기 전까지는 일을 하지마는 저녁을 먹은 후에는 자유를 가지고 자든지 나가 놀든지 자유회동이나 노예회동을 물론하고 밤 시간은 자유를 가지게 되는데 백씨 되는 이는 나의 밤 시간까지 자유를 주지 않고 밤에 나가 노는 것까지 금지하니 나는 이런 전제정책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다시 달아나서 자유생활을 하여보자는 생각이 점점 깊어간다. 백씨께서 나에게 밤에도 나가는 자유를 주지 않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잘 안다. 백씨의 생각에는 상업가는 외도와 멀리 해야 된다는 사상에서 비롯하여 나를 밤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평양성은 기생이 많기로 유명한 곳인데 상업가는 재정을 많이 출납하게 되는데 어떤 기생의 집에 내왕하다 재정에 큰 손해를 당하고 보면 상업상 신용까지 잃고 상업이 결단 날까 하여 나를 밤에도 못나가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는 주야로 자유를 조금도 가지지를 못하고 젊으나 젊은 이팔청춘에 부자유 생활은 죽기보다 더 싫은 생각이 날이 갈수록 더 굳어지게 된 이것을 누구나 좋은 말로나 권세로 고쳐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로 나는 다시 달아날 생각을 가지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차에 나의 매형되는 차종호씨가 처가인 우리 집에 놀러와서 몇 달 있게 되었다. 차종호씨는 한문을 많이 배운 학자요 또 영어와 일어를 배웠고 또 우리나라 무관학교까지 마치신 분이었다. 이 분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부하기에 유여하던 집안이 간곤하게 되어서 우리나라 그때 형편으로는 아무리 재간이 많은 사람이라도 세력이 없으면 우리 정부에서 써주지 않고 세력대가에서만 정부의 대소 관직을 얻게 되는 때에 하물며 서북사람으로서 우리 정부에 무슨 기회가 있었으랴. 고로 서울과 평양 사이에 오고 가는데 시간만 허송하고 아무 기회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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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매부되는 차종호씨를 조용히 만나서 미국으로 갈 상의를 하였다. 그러나 매부되는 이는 선뜻 대답을 안 하고 있다가 미국으로 갔으면 좋지마는 나는 일푼 전이 없으니 어떻게 갈 수 있냐고 말씀하신다. 저와 같이 가실 생각만 계시면 노비 걱정은 마시오 내가 둘이 갈 노비를 변통할 터입니다 하니 반갑게 가기로 작정을 하신다. 그래서 나는 모아 두었던 나의 사유자본을 예산하여 본즉 한 五千냥 가량이 잘 되니 미국으로 둘이 갈 선비가 넉넉하여 속히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준비라야 달아나는 판국에 옷이나 행장을 다 잘 수습할 수도 없고 다만 화륜선이 만경대에서 어느 날 어느 시간에 인천으로 떠나가는 것을 알아보고 또 내가 맡아보던 재정출납 사무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세히 분명히 밝혀 놓고는 집안 식구나 사랑에서 일보는 사람들이 일절 모르게 감쪽같이 달아날 준비를 하여 놓고는 매부 되는 이는 먼저 만경대로 나가서 기다리라 하고 나는 장날이 되어서 아직 평양성 전방마다 다니면서 돈을 받아서 사원 아이에게 받은 돈을 주어서 사랑으로 들여보내고는 집에도 다시 들어와 보지 못하고 돈 받으러 다니던 그 길로 나도 만경대로 내려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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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부 되는 차종호씨는 만경대서 나를 무한히 기다리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화륜선은 우리를 데리고 인천으로 가려고 벌써 와 기다리고 만경대 선창에 와서 있다. 매부와 같이 배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몇 순간에 떠나려고 하는 고동을 푼다. 나는 이 고동소리를 듣고는 자연히 집에서 지내던 생각을 안 할 수 없이 된다. 나에게 그리 다정한 사랑을 주지 않던 모친님과 전 가족을 위하여 주야로 사업을 하시느라고 고심초사하시는 백씨와 나에게 늘 동정하여 주시던 형수님과 누님과 또 다년간 내왕하던 손님들이 내게 작은 주인이라고 부르던 생각과 또 동네에 같이 자라나던 동무들과 시간만 있으면 만나보던 기생 연홍이와 소월이와 또 평양성에서 사업하는 사람들과 매일 상종하던 생각이 심각하게 되는 때에는 내가 왜 달아나는가 하는 후회가 나의 지금 달아나는 계획을 방해를 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작정하고 발길을 만경대로 돌려놓았으니 이 발길을 다시 평양성으로 돌려가지고 회정할 수는 없는 사정이니, 에라 청년 장부가 한번 작정한 것을 고칠 수 없다는 결심을 하는 동시에 배는 닻을 감아가지고 뚜뚜 고동을 불면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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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평양성의 전 시가에 난리가 났다. 방사겸 하나 달아나기에 우리 집안은 물론이요 전 평양 상노판이 복잡하게 되었다. 사람 사람이 서로 만나서 지금 둑비전골에서 객주 사업하는 方迺亨 동생이 돈을 많이 받아 가지고 다시 달아났다고 곳곳이 떠들게 되었다. 그 때에 평양성에서 신문이 오늘같이 출간되고 있었다면 방사겸 달아난 이 보도가 신문 첫장 선두에 대서특서로 제목에다 방사겸이가 돈을 많이 가지고 달아났다는 광고가 되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는 호랑이 같은 전제 압박 밑에서 출판자유 언권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이런 전제 정부의 명령대로만 살아가는 때에 신문 출판사업이 정부에나 일반 민중에 어떠한 큰 관계 있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대소 성시를 물론하고 신문사업 할 사상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평양 같은 도성에도 신문 한 장이 없은 고로 아무리 큰 사건이 발생되어도 널리 광고가 안 되어 원근을 물론하고 서로 알지 못하게 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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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말한 바 내가 한번 평양성을 떠나게 되는 동시에 평양성과 우리 집안이 다 한번 경동하게 된 것은 내가 무슨 명예가 고상하다거나 또 무슨 유공한 사람이 되어 일판 평양성 중이 요란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었다. 나는 十七, 八 세 된 청년으로 백씨당께서 하시는 객주 사업에 재정 출납하는 직무를 맡아보던 사람이어서 돈 줄 사람도 나를 찾고 돈 받을 사람도 나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 적지 않은 평양성 전 시가가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북쪽 영문 앞에서부터 남문통까지 한 三十 블럭 가량 되는 전 좌우편에 형형색색한 즐비한 전방마다 우리 객주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외상으로 사다 놓고는 매 장날마다 내가 가서 얼마씩 받아오는 고로 이 상업하는 사람들이 나를 잘 알게 되고 나도 평양성 전체 상업가들을 잘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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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달아나던 날은 평양성 장날이었다. 이 날은 평양성이 적다 하리만큼 사처에서 물건을 팔고 사노라고 지레 모인 날이어서 골목마다 사람이 꽉꽉 차서 들여 붐비고 국수집 장국밥집 떡집 객주집 할 것 없이 팔고 사고 먹고 마시고 하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만들어 가지고 복잡한 날인데 나도 이 복잡한 가운데서 사환애 둘 데리고 전방마다 들어가서 돈을 받아서 중백씨 전방에 적체하여 놓고는 또 다른 전방이나 다른 객주집에 가 돈을 받는 때에 우리가 남에게 갚아줄 것은 내가 찾아다니면서 갚아주는 것이 아니고 돈 받을 사람들은 돈을 받으려고 나를 찾으러 다니게 된다. 나는 이러한 형편에서 홀출 부지거처로 달아나고 말았으니 돈을 나에게 갚을 사람들은 나의 백씨한테 돈을 받으러 오지 않으니 무슨 일이냐 물어 볼 필요가 없지마는 우리한테 돈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를 찾아다니다 만날 수 없으니 자연 백씨 사무소로 들어가서 돈을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백씨 사무소로 돈 달라고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니 자연히 내가 잘못된 것을 의심하게 되어 나를 찾으려고 사람을 많이 내세워서 나를 찾는 중이나 이미 달아난 사람을 평양성에서는 찾을 길 없어서 기생의 집을 다 뒤지고 또 뒷성 너머 남자들 목욕하는 곳에 가서 장번에 벗어들 놓은 의복을 조사한 것은 혹 목욕하다 깊은 물에 빠져 죽었나 하는 의심이 있어서 벗어 놓은 의복을 조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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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는 상사 난 집 모양으로 통곡이 진동하고 큰 야단이 일어났다. 자친님께서는 나와 친절하게 놀던 나의 동무들을 찾아다니시며 나의 생사 여부를 묻게 되었다. 우리집 옆에 사는 金在鉉이라는 사람은 나와 아주 친절한 친구인 고로 내가 아무 날 어디로 달아나니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외아들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자친님께서 이 사람한테 가서 너는 내 자식이 어디로 간 것을 알 터이니 빨리 대달라고 하니 속일 수 없는 형편을 알고 실제대로 만경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차종호와 같이 갔다고 말하였다. 이제는 집에서 더 찾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통곡할 것도 없는 것은 죽지 않고 인천으로 사위와 달아난 것이 분명히 판명되었으니 인천으로 가신을 보내어 찾기로 작정이 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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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경대서 매부와 같이 배를 타고 올라오는데 선중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양반 한 분을 만나 며칠동안 재미나게 담화를 하였다. 이 양반은 이천 군수 이경호라 하는 옥관자를 붙인 양반이다. 이 분은 서울 농동이라는 곳에 집을 두고 평양 기생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진연에 참례하도록 주선하여 주고 기생들의 등을 벗겨먹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하여서 나는 평양 기생들의 이름들을 물어본즉 나는 모르나 관치 않게 많이 아는 듯 하여서 내가 좋아하는 평양 기생 연홍이를 아는가 물으니 지금 진연에 와 있다고 하면서 잘 안다고 하기로 내가 서울 가면 연홍이를 한번 만나보려고 한다 하니 자기 집으로 찾아오면 만나보게 주선하여 준다 하기로 이 이경호씨의 문패를 적어 가졌다. 우리는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우리 탄 배는 벌써 인천항에 도착되어서 하륙을 하였다. 우리는 객주집에 기숙을 정하고 수일 쉬어가지고 인천 시가와 항구 근처를 구경하였다. 인천도 평양보다 좀 번화하고 물산이 들고 나는 것이 과연 조선에는 큰 항구요 또 대도시 가운데 빠지지 않을 만한 인천항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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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으로 간다고 인천을 와서는 곧 미국으로 갈 준비 않고 여러 달 동안 이럭저럭 잘 놀고 흥청거리는 가운데 서울도 내왕하게 되었다. 나는 연홍을 만나려고 서울 가서 이천 군수를 지낸 이경호를 찾아갔다. 나는 이경호 집 집문 밖에서 슴겁지슴게 이리 오너라 하고 한 두 세 번 길게 뽑았다. 한참 있노라니 한 十四, 五 세 가량 된 초립동이 나와서 문을 열어준다. 아마 하인은 없는 모양인 듯 지금 열어주는 초립동이는 아마 이경호 아들인 듯하다. 나는 사랑으로 들어가서 이경호에게 인사를 한즉 자기도 인사를 하고는 앉으라 하면서 담뱃대에 기삼이를 담아 주면서 다정히 대접을 한다. 나는 연홍이를 만나기 위하여 왔노라 한즉 이경호 말이 참 안 되었소 하면서 수일 전에 연홍이가 평양으로 내려갔다고 하는구려 하면서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본다. 할 수 없지요 하고 나는 대답을 하고는 조금 더 앉았다가 서울 구경이나 하고 인천으로 다시 가려 합니다 하고 평안히 계십시오 하고는 문 밖을 나섰다. 그러나 어디로 갈 방향은 모른다. 그래서 슬근슬근 걸어서 농동골로 나온다. 어떤 청년 둘이 앞에 오는데 한 사람은 매우 낯이 익기에 자세히 보니 평양성 함일섭의 아들이었다. 어쩐 일인가. 우리가 다 평양 사람으로서 평양에서 만나기 드물더니 오늘 서울서 이같이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하여간 반갑다. 나는 함씨에 묻기를 서울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즉 벼슬을 하나 얻을까 하고 와 있다고 한다. 대관절 자기 처소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갔다. 매우 어렵게 지내는 모양같이 보인다. 그래도 나를 대접하기 위하여 둘이서 수군수군하더니 찼던 안경을 끌러 친구를 주면서 전당국에 가서 몇 원 얻어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오라는 모양 같아 보인다 한참 있더니 두부와 콩나물과 제육을 조금씩 사 가지고 와서 자기들 손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놓고 먹자고 하기에 같이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더니 나라 감투를 써 볼 생각이 없나 묻기로 감투는 무슨 감투란 말인가 물었다. 함씨의 말이 참봉이나 주사가 되기를 원하면 자기가 주선하여 주겠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모르는 것 아니다. 그러나 짐짓 참봉이라니 눈 먼 참봉이란 말인가? 또 주사라니 멀쩡히 성한 사람에게 주사가 소용 있나 라고 나는 웃었다. 자기들도 웃는다. 함씨는 벌써 연전부터 참봉이 되어서 감투를 쓰고 있다. 나는 우스개 말로 여보 함참봉 당신은 눈을 멀쩡히 뜨고서 왜 소경으로 행세를 합니까? 한즉 함씨는 웃으면서 자 조롱의 말은 그만 두고 감투를 쓰고 평양으로 가라고 하면서 자기가 주선한다면 한 一千兩이면 될 듯하다고 자꾸 졸라댄다. 함씨 생각에 우리 집이 평양에서 상당히 사업을 하니까 내가 돈 천냥이나 써도 관계가 없을 줄로 알고 자꾸 달라붙는다. 나는 서양식의 사방모자 감투는 원하되 우리나라 매관매직의 감투는 원치 않는다고 거절하여 버리고 총총하여 인천으로 가야 되겠다고 작별하고 문 밖을 나섰다. 세월은 여루하여 벌써 인천 와 있는 지도 반년이 잘 되었다. 가지고 온 돈은 거의 다 써버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객주와 거래하는 서울 객주하는 이씨를 찾아가서 거짓말을 하고 몇 천냥 당겨쓸까 하고 다시 서울을 나가서 이씨한테 말을 하여 보았다. 벌써 나의 백씨께서는 원산 인천 서울 객주하는 사람들에게 내 동생이 달아났으니 만일 찾아와서 거짓말로 돈을 달라 하더라도 일푼 주지 말라고 우리와 거래하던 곳은 전보를 하여서 일푼전 돌려 쓸 수가 없이 되었고 겸하여 집에서 나를 붙들어 가려고 사람을 인천과 서울에 많이 내세워 가지고 탐문한다는 소식이 있다. 그래서 매부와 나는 걱정을 하다가 한 곳에서 기숙을 오래 못하고 자주 옮기었다. 보통 낮에는 안 나가고 밤에만 나가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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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매부께서 어디 나갔다 오셔서 지금 인천항에 개발회사가 설시되었다고 한다. 나는 개발회사가 무엇이요? 매부한테 물었다. 개발회사라는 것은 별 것이 아니고 미국 영지 하와이 군도에 동양인 이민을 주선하는 회사인데 미국 사람이 주장하는 밑에 일인들이 많이 사무를 본다고 하시면서 매부께서 이 이민에 통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나는 영어를 모르니 통변이 될 수 없고 보통 노동 이민으로 가게 될 수밖에 없다마는 매부 한 분만이라도 통변으로 가게 된 것만은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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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와이 이민으로 가게 되어서 눈 검사를 하게 되었다. 매부의 눈은 좋아서 눈 검사를 잘 치렀으나 나는 눈이 부족하여 여러 날 눈을 고쳐 가지고야 일본 신호를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와이 가는데 눈 검사가 더 심하여 나는 오래 눈을 고치느라고 있는 동안에 벌써 매부께서는 이민동포 七, 八十 명을 대동하고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타고 나를 일본에 떨어뜨리고 혼자 가신다. 나는 이곳에서 매부를 잃고 섭섭한 것보다 외로워서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이렇게 한 달 동안을 혼자서 지내며 눈병을 매일 일본 의사에게 가서 고쳐 가지고 나도 하와이로 가는 이민배를 타게 되었다. 이번 나와 같이 가는 이민동포는 한 五, 六十 명인데 통변으로 같이 가는 이는 이노익이라는 분인데 영어의 에이 비 씨 디 겨우 배워 가지고 통변이라고 따라왔다. 일본에서 세 주일 동안이나 망망한 태평양을 건너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들어와서 호놀룰루항에 도착되자 이곳서 이민 동포를 각 섬으로 분배하여 보내는 직무를 맡은 안정수씨가 선상에 올라와서 우리더러 하와이 섬으로 오늘밤에 다른 배를 타고 간다고 통기를 하여 주고는 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매부께서 어느 섬에 가 계신지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하와이 군도는 여러 섬으로 성립되었지마는 사람이 사는 섬은 하와이섬과 마우이섬과 카우아이섬과 오아후섬 이 넷이 사람 사는 섬들인데 진주만과 호놀룰루항이 오아후섬에 붙었다. 이 오아후섬 진주만은 미국 태평양함대가 활동 공작을 여기서 하게 되므로 이곳에 태평양함대 대부분이 이곳에 집중하고 있는 第一 군항이다. 이번 제이차 세계전쟁에 일본이 이 군항을 파괴하면 미국 해군이 멸망하여 태평양전쟁을 꼭 이길 줄 믿고 일본이 암수적 행동으로 진주만에 폭탄을 던져서 이 유력한 군항에 집중되어 있던 군함 수십 척이 침몰 혹 파괴되어 여러 千萬元 손해를 당하고 분이 바짝 난 미국 국민이 이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사상으로 주야로 상하 국민이 일체 합심하여 두드려 만든 군기가 단기간에 태산과 같이 쌓이게 된 고로 자기가 쓰고 남는 군기 군물을 연합국에 공급하여 이번 전쟁을 이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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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와이섬 길노이라는 농장을 가서 자리를 정하고 일을 나가 시험하여 보았다. 사탕대는 우리네 수수밭 같은 가득 들어선 그 틈에서 사탕대를 꺾어서 놓는 일인데 비를 맞으면서 하는 일이요 구두에 감탕 흙이 잔뜩 달라붙어서 무게가 수십 근이니 발을 옮겨 놓기가 힘드는 고로 나는 할 수 없다 하고 반일만 하고 처로 들어와서는 매부 계신 곳을 찾아 가려고 이 농장에서 떠나 호놀룰루를 다시 나가서 안정수를 찾아서 물어보아야 찾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이럭저럭하여 두어 주일을 이 농장에서 지내었다.
 
 

1. 하와이 신민회에 참섭하여 본 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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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농장에 몇 주일 있는 동안에 평양 사람 송원숙씨의 부인과 김진하씨 두 분이 나에게 친절히 할 뿐 아니라 맛있는 음식도 종종 먹게 한 그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아직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나는 불가불 매부를 찾아야 되겠는 고로 이 곳에 이같이 사랑하는 이 두 분을 작별하고 하와이섬 힐로항에 나와서 호놀룰루로 가는 배를 잡아탔다. 이 배에 일꾼들 전부가 하와이 토종 가나까인들인데 처음 보기에 무서웠다. 나는 수질을 몹시 하므로 배 웃장 한편 구석에 담요를 펴고 새로 사 신은 구두를 벗고 누워서 잠시 잠을 들었다. 깨어나니 벗어놓은 새 구두가 없어졌다. 그러나 찾을 도리가 없어 잃고 말았다. 배는 벌써 호항에 도착하여 하륙하게 되는 때에 꼴을 볼 것 같으면 과연 웃을 만하다. 나는 커다란 가죽 가방을 메고 맨발로 내려서 호항 한인의 신민회관을 찾아갔다. 나는 마침 신민회 개회하는 때에 들어서게 되어 회석에 같이 참례하여 회무 결정을 구경하고 있었다. 신민회 회장은 홍승하씨요 회에서 지금 일어난 변론의 문제는 역적도모라는 문제로 정론을 하는 것인데, 역적도모라는 그 이유는 어디서 생기었는가 한다면 신민회 회장 홍승하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장차 독립하게 되면 누구는 대통령이 되고 누구누구는 총리 외무 군부 통상 공부사업 대신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역적도모라고 명사를 지어 가지고 홍승하씨를 공격하는 기회였다. 이 문제로 홍승하씨를 공격하는데 고수자는 이교담씨였다. 이교담씨는 미주 공립협회 사람이었다. 나는 일찍이 사회에서 연단도 없고 교회에도 다녀보지 못하다가 졸지에 이런 사회에 참례한 것이 스스로 장쾌한 생각을 가지고 이 사람들의 변론하는 것을 취미 있게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큰 상업에서 여러 가지 계급의 사람을 많이 상종하여서 사람들의 시비와 변론하는 것을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이것은 판단할 수 있었으므로 그때 홍승하를 역적도모를 하였다고 공격하는 이 사람들을 신민회 반대자로 나는 스스로 인증하게 되었다.
 
 

2. 하와이 사탕밭에서 지내던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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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신민회에서 안정수씨를 만나 매부께서 어느 섬에 계신 것을 물어보니 마위섬에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이튿날 마위섬으로 가는 배를 타고 찾아 갔었다. 그리 신체가 크지도 못하고 부하지도 못한 약하디 약한 매부께서는 동포를 데리고 매일 사탕밭에서 일을 감독하기에 고단하여 보이고 또 하와이 따가운 태양 밑에서 얼굴은 좀 까맣게 된 듯하여 보인다. 나는 어찌나 반가운지 손을 꼭 잡고는 아무 말을 한참 동안 못하였다가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고생을 얼마나 하셨습니까? 이제는 나의 소원하던 형님을 찾았으니 늘 같이 지냅시다 하였다. 매부 되는 이께서 한참 있다가 나 역시 자네하고 늘 같이 지내었으면 오죽 좋겠나 하시고는 아무 말씀이 없다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곳에는 농장 순검이 몹시 사나워서 매일 일을 안 하고는 견뎌 배길 수 없으니 자네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하신다. 나는 매부의 이런 근심을 덜기 위하여 왜요 나도 일하지요 매 일을 하면 순검이 아무리 사나워도 매 일하는 사람에게야 채찍으로 몰아칠 까닭이 없지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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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일본 신호에서 서로 갈라져서 지내온 모든 것을 다 피차에 말하게 된다. 밤 시간은 벌써 깊어져서 더 이야기를 더 못하고 매부의 모기장 속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서 곡상간으로 찾아가서 조반을 먹고는 일밭에 나가서 십장이 시키는 일을 시험하여 보았는데 과연 힘들어서 나는 할 수 없이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 낙심이 되어서 처량한 정서가 일어나서 견딜 수 없다. 간신히 하루 일을 마치고는 매부와 같이 들어왔다. 이튿날은 일을 안 나가고 곡상간 창상 밑에 숨었다가 순검이 간 뒤에 나왔으나 그러나 언제 또 올는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나는 생각하기를 매부와 함께 지낼 수는 없이 되었다. 그래 이 농장에서 머지 않은 다른 농장에 변창수가 있다고 하니 이리로 가서 지내면서 종종 매부를 만나보려고 하고는 매부에게 하직을 하고는 변창수를 찾아갔다. 변창수는 내가 평양서 인천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찾아와서 하와이로 오게 되는 때에 일본 눈검사에 걸려서 한 배를 못타고 각각 들어온 고로 이같이 각각 다른 농장에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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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반갑다 창수 너는 아주 좋은 농장에 와 있구나 매부 계신 농장에는 매일 일 안하고는 견뎌 배겨날 수 없는데 이 농장 순검은 괜찮구나 한즉, 참말 농주와 순검이 다 좋다고 하여 다른 농장에 있는 사람이 많이 온다고 한다. 하와이 사탕농주들이 일꾼을 강제로 매일 일을 시키는 이유는 이민으로 데려올 때에 지극히 적은 공전을 주기로 약조하고 데려다 일을 매일 시키기만 하면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순검을 두고 일 안 나가고 처소에 있는 사람은 채찍으로 때려 몰아다 일을 시키니 이것이 무려 노예의 노동이요 자유노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때에 보통 통변의 월급이 二十五元이요 일꾼의 월급은 十五元이었다. 이 극소한 공전을 받아가지고 여기서 먹어야 되고 입어야 되고 잔용처 써야만 되는데 이것이 부족하여서 어떤 사람은 간장국에 밀떡제비만 하여 먹고 매일 일을 하기 때문에 얼굴이 퉁퉁 부운 사람도 많이 보았다. 이런 사람을 밀가루 부대라고 별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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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사탕농주들이 농장에 만물전방을 차려 놓고는 이미 준 이 소공전이나마 다시 회사전방에서 빼앗으니 이것이 노예적 노동이요 또 착취적 정책으로 농주 자기들만 갑부가 되기를 원하고 이민 노동자들이야 굶든 벗든 상관이 없이 생각한다. 나는 이런 착취적 수단으로 이민으로 끌어다 놓고는 노예적 노동시키는 이 중에도 일을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오, 육삭 시간을 뜻 없이 보내는 가운데서라도 일단 정신은 미주 대륙으로 건너가서 공부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가는 곳마다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인격이 도저하여 친구를 많이 얻게 된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아직 악한 세상풍속에 물이 들지 않고 순전한 양심을 가지고 언어 행동이 단정하고 양순하여서 상종하는 사람마다 나를 사랑하였다. 내가 하와이에 五, 六삭 있었으나 일이라고 한 것은 도합 두어 주일에서 더 안 하고는 이럭저럭 친구에게서 얻어먹고 지내다가 미주로 일찍이 건너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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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주로 일찍이 오게 된 것은 내가 돈이 있어 오게 된 것이 아니고 에와농장에 계신 여러 친구가 돈을 모아 주면서 미주로 가서 공부를 하라 하면서 어떤 이는 양복을 사주고 어떤 이는 구두와 갓을 사주고 어떤 이는 돈을 五元 十元씩 주는 이것이 미국 가기에 넉넉하여서 이같이 도와주신 여러 친구에게 감사한 예를 하고는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호항으로 나와서 안정수씨를 찾아가서 미국으로 갈 선표를 사 달래었다. 배 회사에 가 알아보니 미국으로 직행하는 배는 아직 없고 캐나다 벤쿠버까지 가서 여기서 배를 바꿔 타고 미국 시애틀에 가서 하륙할 수 있다고 하기에 선표를 사 달라고 하였었다. 다행히 같이 갈 동행인을 만났다. 이 분은 미국에 계신 안창호 선생의 처숙 김인수라는 진실한 교인인데 연세는 중년쯤 되신 인데 안선생을 찾아가는 분이었다. 같이 배를 타고 한 칠, 팔일만에 벤쿠버항에 도착하여 여러 선객들은 온갖 행장을 들고 하륙한다. 함장이 우리는 아직 하륙하지 말고 배에 있으라고 하니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한참 있다가 해관 검사원이 선창에 올라와서 휴대금이 있는가 묻는다. 우리 수중에 있는 전부 금액은 한 이십원 가량 되는 것을 보였다. 이 검사관 가운데 해관 의사가 우리의 눈을 검사하여 보고는 다 내려갔다. 또 다른 검사원이 올라오더니 우리 행장을 다 움켜 들고는 우리더러 따라오라고 혈지를 한다. 우리는 혼자 생각하기를 미국으로 가는 배로 옮겨주는 줄로 알고 따라간즉 크디 큰 집 속으로 들어가서 이 큰 집 속에 꾸며놓은 방실로 들어가라 한다. 한참 있다 알아본즉 이 큰 집은 해관 공창인데 이민법에 위반되는 선객을 법으로 해결할 동안은 가두어 두는 곳이라 한다. 이 안에 갇힌 우리 두 사람은 바깥만 못 나가지 다른 자유는 있다. 한참 있더니 청인이 우리의 저녁밥을 하여 가지고 와서 먹으라 한다. 밥과 찹수이 종류인데 가히 먹을 만하게 매일 세 끼씩 차려다 준다. 또 눈검사 하러 오는 의사는 매일 와서 우리의 눈을 고친다고 하면서 허일없는 새파란 백반 조각 같은 것으로 눈을 뒤집어 가지고 이것으로 긁어낸다. 이것이 아파서 참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참고 견디어야 미국으로 갈 줄로 알고 매일 한번씩 세 주일 동안을 이것을 견디었다. 이제는 눈병은 다 고친 모양인지 의사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미국으로 보내주지 않고 부자유한 해관 공창 속에서 근 석 달 동안을 청인이 갖다 주는 밥을 얻어먹고 지내니 우선 영어를 모르니 우리를 수직하고 있는 와취맨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보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이것이 처 소위 잘 듣고 말하는 귀먹은 벙어리라고 안 할 수 없다. 이 공창에 삼삭 동안을 갇혀 있는 동안에 청인의 이민배가 세 번이나 와서 이 해관 공창 속에서 수백이 박작박작 하다가는 저 갈 곳으로 다 가버리고 만다. 하루는 하와이에서 미국으로 오는 이동익이가 우리 갇혀 있는 해관 공창으로 우리와 같이 이민 관리에게 잡혀 우리가 있는 데로 들어온다. 이 분이 나와 같이 일본에서 같이 온 우리의 통변인 고로 내가 잘 안다. 서로 반가이 만나서 우리가 갇혀 있는 정형을 말하게 되었다. 이씨는 영어가 시원치 못하나 우리보다는 낫다. 그래서 와취맨한테 가 알아본즉 우리에게 가진 휴대금이 넉넉치 못하여 미국으로 안 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김진수씨가 안창호 선생에게 편지하였다. 안선생께서 五十元을 김인수씨에게 보내었다. 이것 가지고야 미국 시애틀로 오는 배를 타게 되었다. 벤쿠버에서 시애틀 오는데 바다가 광망하게 넓지도 않고 그리 깊지도 않아서 큰 배는 내왕을 못하고 조그만 배로 오는데 날은 청명하고 바람은 잔잔하여 八, 九시 동안 평안히 왔다. 여기서도 해관 관인한테 허달리다가 상항으로 오는 화차를 타게 되니 이것이야 인간에서 모든 시련에 시달리다 천당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안 할 수 없이 기쁘고 상쾌하다.
 
 

3. 상항에 하륙하여 안창호씨 만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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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서 탄 화차가 한 十二시 동안 굴러서 상항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김진수씨는 안창호 선생을 찾아가지마는 나는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한인의 기숙사가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기숙사 주인은 황국일이란 인데 초면이라도 정다이 구니 이것이 아마 동포애인가 하였다. 기숙사에 동포가 한 십여인은 잘 된다. 안창호 선생께서 수년 전 이곳에서 친목회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미주로 오는 동포를 친목회로 인도하는 때였다.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몇몇 동포와 담화를 하고 있는데 여러 동포가 와스스 일어서며 선생님 오십니까 하고 자리를 내어준다. 안선생께서 저와 정면에 앉아서 희색이 만만한 분이 말씀을 시작하신다. 이 청년이 김인수씨 하고 같이 오신 분이지요 하시며 저를 다정한 표정으로 바라다 보신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김인수씨와 동행하여 왔습니다 하고 안선생님의 말씀은 일찍이 본국에서부터 들었사오나 뵈옵기는 지금이 처음이올시다 하고 인사 올렸다. 안창호 선생은 과연 애국자요 웅변가요 도덕가요 동포애가 그 진심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누구나 다 그 분의 언어 동작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누구든지 이 분과 마주 앉아서 담화를 하게 된다면 이 분에게서 감화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자연히 이 분을 존경하고 숭배하게 되니 가히 우리 민족적 영수가 될 만하다고 나는 자인하였다. 안선생께서 나에게 무엇을 목적하고 미국에 오셨나요 하신다. 나는 공부하러 왔습니다 하였다. 공부를 하려면 우선 돈을 좀 버는 것이 좋으니 일을 하나 구하여 주신다고 하시고 가신다. 이튿날이었다. 안선생께서 저를 위하여 일을 얻어 주시겠다고 찾아오셨다. 나는 안선생님을 따라가서 아주 수월한 일을 얻었다. 이 일은 안선생이 하시던 일인데 저를 위하여 주시는 듯 이 일은 술 도매회사인데 술을 병에 채워 넣는 일이다. 가느다란 무대소로 만든 호스 파이프 한 끝은 술독에 넣고 한 끝은 입에 물고 빨면 술이 독에서 올라올 때에 입에 물었던 끝을 병에다 채워 넣는 일이 수월한 일이다. 안선생께서 저를 생각하고 주신 것이 나는 감사히 생각하고 나의 평생 역사에 적어 놓는다.
 
 

4. 장경 선생을 처음으로 만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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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한 주일 동안 하면서 한인 기숙사에 처소를 정하고 있다. 하루는 어떤 한인 한 분이 나성이라는 곳에서 상항에 내도하여 기숙사 한인을 심방하는 때에 나도 이 분을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장경이라는 인데 이마가 훨씬 벗어지고 신수가 참 잘 생긴 신사이다. 나는 이 분과 한참 앉아서 온갖 담화를 하였는데 유지신사요 애국자로 알고 초면이라도 무한히 존경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장선생께서 한참 있다가 미주에 오셨으니 장차 무엇을 하시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별로 다른 방면으로 대답할 것이 없어 공부하러 왔습니다고 하였다. 장선생께서 공부를 하려면 상항은 분요하여 좋지 못한 곳이니 내가 조용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려 하니 수일 후에 같이 가자고 묻는다. 나는 장선생을 처음 만났으나 애국지사로 알고 장선생의 권고하는 말을 믿고 들었다. 그러고는 장선생께서 이틀 후에 이곳에서 떠나자고 말씀을 하고 나가신다. 이 기숙사 주인과 또 다른 한인들이 내가 장경씨하고 수일 후에 가는 줄로 다 알게 되었다. 동시에 안창호 선생께서도 아시고 나를 찾아와서 타처로 가지말고 상항에서 우선 돈을 좀 벌어가지고 공부를 하라고 권면하신다. 그러나 나는 벌써 점잖은 장선생과 같이 가기로 허락하였으니 어린애 모양으로 언약을 배반하고 상항에 주저앉을 수 없다. 이럭저럭하여 二日을 지내니 과연 장선생께서 오셔서 떠나자 하시기에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나요 물었다. 남가주) 로스엔젤레스라는 곳으로 간다고 하시면서 모든 것이 상항보다 좋고 일기가 회양 온화하여 살기가 좋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시간이 촉급하여 빨리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정거장에 나가니 나성으로 가는 화차는 벌써 와 있는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 우리가 화차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자 곧 우렁찬 기적소리로 뚜 하고는 한번 움직여 본 뒤에는 연속하여 굴러서 성 밖에 나가서는 잦은 걸음으로 내닫는 것이 마치 우리나라 굿거리 장단 같기도 하고 스포츠의 마라톤 선수가 월계관을 타려고 내달리는 것 같아 차중에 앉은 우리는 흥치가 안 난다고 할 수 없이 상쾌하다. 때는 마침 봄이었다. 내닫는 화차 노선의 좌우편은 이화 도화 앵화 모든 실과나무에는 오색이 영롱하게 꽃이 피어서 향기를 날리고 초록 같은 벌판을 뚫고 나가는 화차는 땅을 주름을 잡는 것 같이 앞에 까맣게 보이던 산과 들과 집들이 순식간에 닥치고 하니 오래지 않아서 목적지 나성에 다다르게 되었다. 나는 화차 달아나는 정형에서 사상을 돌려 가지고 내가 장차 공부할 것을 장선생에게 물어 보았다. 장선생께서 말씀하기를 지금 돈이 없으니 불가불 집일을 몇 시간씩 하여 주고 기숙할 처소부터 얻은 후에는 소학교에 입학하여 초등과부터 배워야 된다고 유리하게 설명을 하여 주신다. 아아 차가 아까보다 더디 가는 것을 보니 아마 나성에 거의 다 온 모양 같아서 앞을 내다보니 아니가라 나성시에 거의 다 들어와서 연합 정거장에 들어와 선다. 승객들이 와스스 일어나서 행장들을 들고 화차에서 내려들 가는 틈에 우리도 섞여서 내려갔다. 여기서 전차를 타고 패서디나라는 곳으로 나갔다. 이곳은 二, 三萬 명 가량 인구를 가진 타운이나 유명한 호텔이 三, 四 개가 있고 미국 동방 부자들이 많이 쉬고 놀고 하는 유명한 곳이요 이곳을 다녀간 우리 동포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이 근경의 높은 산세는 평안도 성천이나 용강 골 같이 산세가 아름답다. 일기는 청명하여 위생이 가히 살 만할 곳일 뿐 아니라 이곳 산상에 미국의 제일 크고 유명한 외스추를 넘어 천문대가 있어서 세계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들러 모이는 곳이더라. 장선생께서 자기 부인 계신 데를 가자고 하여 따라갔다. 장부인께서는 서양 집에서 음식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찾아갈 임시에 마당에나 거느리시는 때였다. 나는 멀리서 장부인을 바라보고 퍽 기뻤다. 이것은 내가 우리나라 부인을 오래간만에 만나게 되는 연고이다. 장선생께서는 벌써 장부인한테 가서 나를 상항에서 만나 데리고 온다는 말씀을 하시고 나를 부인에게 소개를 하여 주시고는 장선생은 나성으로 볼 일이 있어서 다시 가신다. 장부인께서 저와 주방으로 들어가자고 하시기에 따라 들어간즉 시장하겠다고 음식을 장만하여 상에다 차려놓고 먹으라고 권한다. 나는 사양치 않고 잘 먹었다. 그러나 좀 미안한 것은 이 집주인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 음식을 얻어먹고 앉아 있는 것이 이 집에서 일하시고 계신 장부인께 무슨 방해나 안 될까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 집 주인은 내가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매우 점잖은 집안인 듯 싶다. 내가 주방으로 들어온 줄을 아는 주인들이 주방에 얼씬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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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인께서는 전화 들고 어떤 곳에 전화하시고 앉으시면서 내가 일하여 주고 기숙할 집을 벌써 전화로 얻어놓고 번지를 적어서 나를 주면서 찾아갈 수가 있는지 묻는다. 여기서 과히 멀지 않다니 찾아가지요 하고 잘 계십시오 다시 뵙겠습니다 하고 나와서는 이리저리하여 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벌써 나 오는 줄도 알고 영어도 잘 못하는 줄 다 알고는 나를 맞아들인다. 주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매일 내가 할 직무를 가르쳐주고 나 있을 방을 윗층에다 정해주고는 주인 부인은 하층으로 내려가 버리고 만다. 나는 있을 방을 돌보니 침상과 체경이며 글쓸 만한 상도 있고 매우 정결하게 차려 놓아서 마음에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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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이 동양인을 스쿨보이 갖다 두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상당한 수입이 없는 가정에서 일꾼을 상당한 월급을 주고서 둘 수는 없는데 집안에 많은 일을 일꾼 없이 하자니 괴롭고 힘드는 고로 이런 형편에 처한 가정에서 먹이고 재우기만 하고 도움 받을 스쿨보이를 구하게 된다. 백인들은 스쿨보이 같은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동양인 우리에게만 이것이 생겨서 동양인 고학하는 학생들이 이런 일을 많이 하게 되는 가운데 나도 한 사람이 오늘부터 되었다. 나는 오늘부터 이 집에 매인 사람이 되었다.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영접실에 먼지를 치우고 식당에 주인 식구가 내려와서 조반을 먹게 다상을 차려놓고는 주방에 들어가서 커피를 만들어 놓으면 주인 마님이 내려와서 먹을 것을 만들어 놓고는 나더러 들여오라고 한다. 나는 빵떡 두 자박 하고 커피나 한 잔 얻어 먹고는 학교로 갔다가 점심 때에 무엇이고 좀 얻어먹고는 또 학교로 갔었다. 파학 후에 다시 집에 와서는 온갖 일을 도와주다 저녁 때가 되면 주방으로 나가서 주인 마님 저녁 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감자도 벗기고 그릇도 씻고 비질도 하다가 저녁이 다 되면 식당에 갖다주면 다 먹고 영접실로 나가 앉으면 나는 먹은 그릇을 들어내다 씻고는 상에서 남아 나온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아무 것으로나 충복하고 내 방으로 올라가 쉬든지 장부인을 찾아가 놀다 오든지 저녁 후는 내 시간이다. 이 일이 보기에는 힘들지 않는 것 같으나 그러나 여러 가지로 잔걸음을 많이 하는 일이 되어 고단할 때가 많고 또 토요일은 학교에 가지 않는 고로 이 집에서 종일 일을 하여주고는 일요일은 예배당에 갈 시간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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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럭저럭하여 이 집에서 두어 달 지내는 동안에 방학할 때가 되었다. 나는 이 일을 그만 두고 나가서 돈을 좀 벌어서 의복 신발도 사야 되겠고 용처도 써야 되겠는 고로 이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잘 얻어도 먹지 못하는 일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장선생을 찾아와서 이 일을 그만 두고 돈 좀 버는 일을 구하여 봐야 되겠다고 하니 장선생께서도 방학 때에 돈 좀 버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시기에 나는 주인한테 와서 일을 그만 두고 방학 때에 돈을 좀 벌어야 되겠다고 한즉 오는 九月에 개학하면 다시 오라고 하면서 여기서 나가서 좋은 일을 얻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잘 가라고 한다. 이 집 주인은 어떤 사람인가? 사업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별로 큰 수입이 없어 보이는 중 아들 삼형제를 동방 어떤 대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킨다 하며 진실한 교인의 집안인 것만은 잘 알게 되었다. 이런 형편에 처한 이 집에서 나를 잘 먹이고 또 돈을 줄 수 없는 사람들인 줄 알고 나는 이만큼이라도 이 집에서 노주간에 화합하게 잘 지내다 나오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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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생은 내가 이 일을 그만 두고 나오겠다는 말을 듣고는 벌써 일자리를 구하여 놓고 나를 기다리시는 모양이다. 나는 장선생을 만났다. 여러 날만에 뵈오니 반갑습니다. 장부인께서도 안녕하신가요 며칠 찾아뵙지 못하여 섭섭합니다 사겸씨 잘 나오셨소 지금 좋은 일자리를 구하였으니 같이 가서 봅시다 하신다. 나는 반가워서 장선생을 따라갔다. 이 일자리는 호텔 그린(Hotel Green)에서 영접실과 사무소와 보석 구름다리 이것을 매일 마른 행주로 먼지가 있을까 하고 슬슬 다니면서 행주질 하는 일인데 아주 수월하고 별로 할 것이 없고 참 싱거운 일이다. 월급은 매월 四十元씩을 준다고 하는데 먹이지도 않고 재우지도 않는다. 그러나 매월 二十元 하나는 저축할 수 있다. 이 일을 하기 시작한 후에는 장선생을 매일 저녁마다 만나게 된다. 장선생을 만나게 될 적마다 이 분은 사업상이나 다른 물욕에 대한 담화가 일절 없고 오직 우리나라가 망하여 가는 것을 어떻게 해야 바로 잡을까 하는데 자주 말씀을 하신다.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집을 하나 잡고 우선 우리 둘이서 기숙하게 되면 경제도 되고 지내기 편리하게 지낼 수도 있고 또 각처에서 내왕하는 동포를 만나볼 수도 있고 이곳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고 집 잡을 것을 필요하게 말씀한다. 나도 집을 하나 잡고 여기서 자고 해먹고 다니는 것이 좋다고 찬성하였다. 장선생께서는 집 하나를 보아둔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같이 가 보자고 하시기에 가 보았다. 방은 세 칸인데 한 방은 넓고 커서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서 쓸 수도 있을 만하고 한 칸은 침방으로 쓸 수 있고 한 칸은 주방으로 소용된 집이 혼자 외따로 놓여서 조용하고 작지마는 보기에 아름답다. 집세도 많지 않고 매월 十元씩이라 한다. 이 집을 얻었다. 그러나 이 집 속에는 아무 것 한 가지 없는 빈 집이니 침상 주방기구와 또 객실상과 문갑 같은 것을 사다 놓아야 잘 수도 있고, 하여 먹을 수도 있고 찾아오는 동포도 접대할 수 있겠는 고로 나는 그 동안 일하여 모았던 돈으로 이 집에 요구되는 가구를 대강 장만하여 놓고 제법 내 집에서 자고 먹고 매일 일을 하니 자연이 취미가 나는도다. 차차 우리가 이곳에 집을 잡고 있다는 소식이 각처에 전파되어서 동포가 하나 둘씩 찾아와서 벌써 한 십여인이 모이었다.
 
 

5. 남가주 파사데나에서 大同敎育會 조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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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장선생께서 파사데나에 있는 한인 전체가 우리 집에서 모이자고 광포하신다. 이곳에 있는 한인은 대개 장경 장부인 방사겸 이병준 유홍도 상해서 방금 건너온 김밀니사 부인 이외에도 새로 오신 이가 六, 七人이 있었는데 성명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도합 十四, 五인이었다. 이 많지 않은 사람이나마 일석에 모이니 보기에 금금하다. 이같이 모인 가운데서 장선생이 일어나서 오늘 이곳에 전체 한인이 회집하게 된 취지를 설명하신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는 오래지 않아서 망하게 되는데 우리 회의에 나온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망하는 것보다 우리나라를 구할 운동을 해야 되겠는데 일개인으로는 할 수가 없으니 우리는 무슨 단체를 먼저 조직하여 가지고 기울어가는 조국을 바로 잡자고 하시면서 우리는 먼저 할 것은 배워야 되겠은즉 우선 우리는 오늘 저녁에 교육기관을 조직하고 이 기관의 명칭은 大同敎育會라고 칭하는 것이 여러분의 의향에 다 어떠합니까? 하고 가하거든 거수하시오 하는데 대하여 아무 이론이 없이 가하다고 일제히 다 거수하여 大同敎育會가 북미주 패서디나에서 一千九百三年 九月 十五日에 창설되었는데 회장은 장경씨가 되어서 일반 회무를 이 분이 주관하게 되었더라. 회를 조직한 지 수삭 동안에 나성 한인들이 응하여 회원이 四, 五十명에 이르러서 제법 사회에 자격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
【원문】방사겸 평생일기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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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0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