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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사겸 평생일기 ◈
◇ 방사겸 평생일기 (제2권) ◇
해설   목차 (총 : 7권)   서문     이전 2권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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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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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교육회 조직한 지도 벌써 반년이 잘 되었다. 지난 반년 동안에 회무는 날로 확장되어 가는 우리의 대동교육회를 이 외따롭고 작은 패서디나에서만 있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작은 생선이 얕은 물에서 지낼 수 있으나 큰 생선은 얕은 물에선 살 수 없으니 불가불 깊고 너른 큰 강을 찾아가야 잘 살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 대동교육회도 창립할 그 때에는 불과 십여 인에 지나지 않던 이 회가 오, 륙삭 동안에 자라서 사, 오십명 회원이 되어 회무가 차차 발전이 되므로 따라서 한인이 거주하는 지방마다 지방회를 두기로 우리 교육회에서 작정하고 우선 순찰위원 한 사람을 뽑아서 상항과 새크라멘토와 프레스노와 나성을 한번 순찰하면서 회원을 모집하기로 동의 가결로 작정을 하고 순찰위원의 중대한 임무를 나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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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 방면에 아무 경험과 연단이 없이 이런 중대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동교육회 창립자로 오, 륙삭 동안 사회에 행사하는 것을 대강 훈련을 받은 이것이 도움 되어서 순찰위원으로 파송하는 것을 겁내지 않고 이 사명을 받아가지고 오, 륙삭 동안 한 집에서 동고동락하던 형제자매에게 섭섭한 상별을 하게 되는 때에 김밀니사 부인께서 자필로 일심단결 영원불망이라는 맹약서를 써서 주면서 사겸씨 이번 각처 동포 순찰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또 의회의 영수 장경 선생께서는 사겸씨는 나의 오른팔과 같이 믿으니 나는 아무 염려치 않고 사겸씨를 보내오 하시면서 회무가 진행되는대로 자주 통신하라 부탁하는 이 분들의 섭섭한 표정을 나타내는 것을 보는 나도 섭섭한 감을 금치 못하고 이 분들과 작별을 하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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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떠나가는 곳은 어딘가. 또 누가 나를 오라고 청함을 받고 가는가? 아니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아무 데나 동포만 있다면 가려고 하는데 금문공원이 있는 상항으로 발길을 돌려놓았다. 상항은 우리 동포가 그 중 많이 거주하며 또 안창호 선생이 창설한 친목회가 번성하여 공립협회로 변경하였을 때이며 이곳 동포 전체의 90%가 공립협회 회원이요 이 회 회원 가운데서 교회와 여관도 설립하고 공립신문도 발행하는 때이었다. 이곳은 공립협회의 중심지가 될 만한 모든 설비와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우리 대동교육회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없고 문경호 목사가 달아난 그 까닭은 그때에 상항 지진 후에 일본 영사가 한인에게 구제금을 준다는 것을 공립협회에서는 반대하고 받지 않아 돈을 받아가지고 동포가 무서웠었다 하는 것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말을 붙이게 되었다. 때마침 문경호 목사가, 주장하던 미미교 목사로 있다가 처자를 두고 달아나서 미미교당은 주장무인하게 되어서 예배일에도 문을 닫고 있는 때에 나는 이 교당의 간사가 되어서 예배당을 목사 책임 외에는 다 하게 되는데 수십 명 교인을 기숙시키는 등사를 하게 되는 때에 이 교인들 가운데도 공립협회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대동교육회원이 되라고 열심으로 권면하여 수십 명 회원을 얻어가지고 교육회 第一地方會를 이 교회 속에서 조직하였는데 이때에 회장은 김찬일씨로 추천이 되었으며 이곳 회원 가운데 장인환 의사가 있었다. 나는 이곳 와서 지방회를 조직하고 파사데나에 있는 총회에 보고를 하면서 신설한 지방회 인준장을 청구하였더니 수일 후에 인준장이 내도하여 완전한 지방회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회원은 나날이 늘어서 벌써 삼, 사십 명의 유력한 회원이 집중되는 때에 하와이 동포가 선편마다 수십 명씩 건너오는 고로 사무가 복잡하여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없는 고로 장경 선생을 빨리 상항으로 나오시라고 하였다. 수일 후에 장선생께서 나오셨다. 나는 모든 중대 사무는 다 장선생에게 맡기고 나는 하와이에서 오는 선편마다 나가서 동포를 맞아들이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배가 오면 나뿐 아니라 공립협회에서도 사람 나가서 새로 오는 동포를 서로 많이 데리고 가려고 어떤 때는 승강이 된다. 하와이로 오는 동포는 다 짐짝이 있다. 고로 우리 회관 번지를 적은 카드를 많이 가지고 나가서 배에 먼저 올라가서 동포의 짐짝마다 카드를 달면 이 짐짝 주인은 다 내가 모시고 우리 회관에 와서 기숙을 우선 공급하며 원하는 대로 각양 일자리를 주선하여 주는 동시에 이 분들을 다 회원을 만들기에 전심전력하는 것이 그때에 교육·공립 두 회의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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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육회 발전이 속도로 내닫는 이런 때에 미미교회 속에 있을 필요가 없다 하고 회관 하나 새로 잡고 파사데나에 있던 총회를 상항으로 옮겨왔다. 이때에 우리 회의 영수 장경 선생이 중국 보황당 강유위와 양계초와 서신을 교환하는 때에 교육을 고쳐 보국이라고 회명을 대동보국이라 한 것은 제국을 혁명하는 때에 제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좀 잘못된 듯하다. 그러나 강유위 양계초를 이용하려는 장경 선생은 짐짓 강유위 주장과 같이 하여야 도움을 받게 될 줄 안 것인 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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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항에 대동보국회 중앙회를 조직하고 중앙회장은 문양목씨가 추천되었고 중앙회에 거관보 대동공보의 주필은 백일구씨였다. 나는 상항에서 보던 일을 다 이 분들께 맡기고 새크라멘토로 나왔다. 이곳에도 하와이로 건너온 동포가 많이 나와서 여기저기 있는 농장에서 들일하는 분들 있다. 그러나 다 만나볼 수는 없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좋은 동지 몇 분은 내가 잊지 않고 늘 기억한다. 김홍균 양주은 하상옥 박영식 이희대 김치환 한의선 강홍범 김계선 윤흥호 고응도 정장손 정국현 정국서 송사원 김필권 김수권 장인명 이 분들을 다 이곳에서 만나 대동보국회 회원이 되어서 이곳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지방회장은 이희대씨가 추천이 되었었다. 회관 내에 기숙사를 설치하고 수십 명이 한 데서 재미있게 지내는 동시에 청년들과 나는 학교를 가서 공부도 좀 하며 회무도 보며 얼마 지내다가 삭도 회무는 장인명 김홍균 황주은 이희대 이 몇 분에게 맡기고 나는 프레스노라는 곳으로 나갔다. 이곳은 공립협회 사람이 많이 와 있는 곳이며 이곳 소산은 포도와 온갖 실과 농사하는 중심이 되어 일이 많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의 친교 김원택이라는 분이 계시고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이 많다. 이 분들의 조력으로 이곳에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조직하고 경찰장은 김원택씨로 추천이 되어 시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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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앙회에 공함을 받아보니 하와이로 동포가 연속하여 많이 건너오는데 이 분들이 일을 구하지 못하여 이 분들이 곤란한 편이 많고 회금을 거둘 수 없어 중앙회관 유지가 문제니 사겸씨는 프레스노에서 노동을 주선하여 이곳서 일 못하는 회원들을 데려다 일을 하게 하여야 회관에 곤란을 면하겠다 하기로 나는 지금부터 노동 주선하는 책임을 맡아가지고 오마일, 십마일 바깥 농장으로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포도 딸 때는 안 되었다. 지금은 四月 중순이니 아직도 넉 달 동안을 기다려서 八月 중순이 와야 포도를 따게 되겠다. 그러나 지금부터 농주와 일꾼을 얼마나 원하는지 약조를 하여 두어야 되는 고로 나는 세 곳에 포도 딸 일에 일꾼을 한 九十名 대어주기로 하고 약조기를 만들려는 때에 농주가 약조금 五十元이나 一百元을 나더러 걸라고 한다. 이 약조금은 내가 이십 명이나 三十名을 대마하고 약조하였다 못대면 이 약조금을 농주가 먹는 것이 당연한 사업상 경위인 줄 알고 나는 세 곳 농주에게 一百五十元을 갖다 걸어놓고는 상항 우리 중앙회에 편지를 하였더니 동포가 나를 찾아 많이 나온다. 이곳에 우리 경찰소 회관에 기숙사를 준비하여 놓고 이 분들을 우선 일을 얻어 보낼 때까지 식사와 잔용채를 외상으로 공급한다. 아직은 실과밭에 일이 흔치 못하여 한 농장에 여러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 때에 이 모인 사람들을 내가 지금 무슨 큰 일자리를 주선치 못하면 이 분들은 이곳저곳으로 다 헤어져서 이미 포도농장에 근 百명 사람을 대어주기로 一百五十元 약조금을 걸어 논 이 일이 다 실패될까 염려하고 나는 큰 일자리를 구하느라고 자전거를 타고 사처로 내왕한다. 나는 이러는 동시에 이왕 알던 어떤 백인 친구를 만나서 일자리 구하는 형편을 말하니 이 친구 나더러 왜 철로 회사에 가서 도십장을 찾아보지 않는가? 한다. 나는 철로 일은 생각치 않고 농장일만 구하다가 이 친구의 일러주는 철로 일이 구미가 바싹 나서 나는 다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도십장을 찾아갔다. 이 도십장의 사무소는 사람이 들락날락 분주하여 도십장과 말할 기회가 없어 오래 기다려서야 말할 기회를 얻어가지고 철로 일에 동양인을 안 쓰겠나 물었다.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묻는다. 나는 튼튼한 청년이 한 백 명 가량이 일을 구한다고 하였다. 도십장은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철로 일을 할 줄 아는가? 한다. 나는 서슴치 않고 우리나라 사람은 근실히 일 잘하는 사람들이니 물어볼 것 없이 한번 시험하여 보면 알 것이 아닌가 하였다. 도십장은 히죽이 웃으면서 마침 이곳에서 二, 三 마일 밖에 새로 갱을 신설하니 명일로 八十名을 데리고 나의 사무소로 오면 보낼 주선을 하여 준다고 하기로 나는 반갑고 즐거운 마음으로 회관에 와서 여러 동포에게 철로 일 얻어 놓은 말을 하니 다 반갑게 알고 명일에 철로역장으로 나갈 준비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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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얻어가지고 가는 철로 일은 이 타운에서 삼 마일 밖인데 짐차에서 먹고 자고 철로 노선을 고칠 것은 고치고, 새로 놓을 것은 새로 놓는 일인데 우리를 관할하는 백인 십장 한 사람이 있고 나는 통변 겸 우리 동포의 일한 시간과 날을 적는 타임 키퍼가 되어서 삽자루 들고 일은 아니 하나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 동포들이 일하는 시간에 일은 아니 하고 삽을 땅에 박고 서서 십장이 오고가는 것도 상관치 않고 나태하게 이야기할 때와 객차가 지나갈 때는 일을 하는 척 해야 되는데 우두커니 서서 객차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십장은 나에게 일을 시키라고 몰아대는 것은 지나가는 객차 속에 철도회사에 큰 사무원이나 도십장이 있어서 우리 갱 일꾼들이 일을 안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십장에게 실책 혹 일자리를 잃게 될까 겁이 나서 나에게 누누이 부탁하는 것이 객차 지날 때에는 일을 부지런히 시키라 하여 나는 어디로 객차가 오는 고동이나 연기가 보이면 객차 옵니다 일들 좀 부지런히 하시오 한다고 어떤 동포는 일을 하는 데도 내가 일을 재촉한다고 나를 시비하는 분들도 있고 십장은 내가 일을 시키지 않아서 저같이 객차가 지나갈 때도 삽을 짚고 서서 이야기만 하니 나의 잘못이라고 나를 몰아댄다. 고로 나는 어떤 때는 차라리 삽자루를 들고 일을 하는 것이 편하게 생각한 때가 여러 번이 었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내가 이것을 참고 견딘 것은 다름 아니라 약조한 포도일과 대동보국회의 맡은 사명을 달성하여 보려는 희망과 책임을 가지고 십장과 일꾼 이 둘 사이에서 이 곤란한 것을 참고 견디어서 포도 딸 때까지 지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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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철로 일을 그만두고 프레스노 회관으로 들어가서 수일 쉬어 가지고 세 곳 포도농장으로 갈라 나가서 포도 따기를 시작하였는데 어떤 이는 七, 八元 어떤 이는 十元 이상 번다고 다 만족히 생각한다. 나는 이 포도밭에서도 통변 겸 시간을 적는 책임을 맡은 외에 여러분의 소용되는 것을 타운에 들락날락하며 사다주면서 포도밭일을 보살핀다. 이 포도 따는 일은 일공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도급으로 매 목판에 얼마씩 정하여 가지고 빨리 따는 사람은 많이 벌고 적게 따는 사람은 적게 버니 내가 빨리하라고 채근할 필요가 없고 나는 다만 매일 몇 목판씩 누가 딴 것만 책에 적었다. 농주한테 돈을 찾아서 내가 가질 10%를 제하고 내어주며 또 포도를 다 따주면 농주가 나에게 一百元이나 二百元을 주고 또 맡겼던 약조금도 찾게 된다. 이상에 말한 철로 일과 포도일은 대개 이러한 것이니 이런 일을 하여 보지 못한 동포에게 이런 것을 알리기 위하여 여기 적어 두노라. 이상에 말한 철로 일과 포도농장일을 나와 같이 한 이 분들은 하와이에 이민으로 와서 근검절종하여 간신히 미주 대륙으로 간신히 선비만 장만하여 가지고 오신 분들이라 우리 대동보국회 중앙회관에서 외상으로 기숙을 하였고 입회금과 대동공보 대금 혹은 특별 의연한 이것들 다 적어만 놓고 나오신 분들이었다. 그 동안 철로 일 三삭 반과 포도일 한 달 반 동안 이 두 가지 일을 필하니 어떤 이는 사, 오백원 어떤 이는 三, 四百元씩 벌었으므로 대동보국회에 적어 놓은 각양 의무금과 기숙비 등을 다 나에게 다 주므로 나는 이 돈을 다 중앙회관으로 들여보내니 중앙회 형편이 훨씬 펴게 되었고 이 분들도 수백원씩 수중에 있으니 다른 좋은 일 얻을 때까지 아무 걱정 없이 된 것을 나는 다행히 여긴다. 이곳 경찰장은 송사원씨인데 이곳의 모든 회무는 송사원씨에게 다 맡기고 나는 상항 중앙회관으로 들어왔다. 장경씨와 여러 회원들을 여러 달 만에 다시 만나니 서로 반갑기 한량없었다. 상항에서 몇 주일 지내는 동안에 중앙회에서 나에게 또 순찰원의 중임을 맡기면서 솔트레이크시티 유타주로 가라고 한다. 이곳은 우리 동포가 수삼백 명이 있어 철도 일을 하는데 이 철도 일을 주선하는 사람은 공립협회의 안창호 선생 대임 제二大 인물 金成武 氏인데 이곳 있는 동포 반수 이상이 공립협회 회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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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 이 때 미국에 경제공황이 일어나서 각양 사업은 저락되고 노동은 극히 귀하여 실업자가 처처이 많아서 정부나 민중이 곤란을 당하게 되는 그 원인이 우리 동포에게도 미쳐서 철로역장에서 일하던 동포 수백 명이 솔트레이크시티로 모여 가지고 한인 여관에서 외상 밥을 먹고들 있는 때였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일을 하러 오지 않고 대동보국회에 사명을 가지고 와서 이곳 동포를 대동보국회 회원을 만들어 가지고 이곳에 지방회를 조직하자는 목적으로 왔으니 공황 중에 있는 동포라도 회원이 되라고 권면을 안 할 수 없었다. 며칠동안에 수십 명 동포가 대동보국회에 입회하고 이곳에 경찰소를 조직하였다. 마침 이곳에서 여관하는 사람은 나와 친분이 있는 강정근씨와 김순호 양씨인데 이 여관이 즉 우리 경찰소가 되었다. 그러나 공황으로 인하여 회금은 일푼 거두지 못하고 책에 적어만 두었다. 이곳에 마침 세력을 잡고 있는 공립협회 사람들은 이곳에서 혼자 공립협회를 확장하려고 하는 때에 대동보국회 사람 내가 홀출(훌쩍) 와서 활동하는 것이 응당 밉고 또 시기할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나 할 일만 하기로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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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는 다수 공립협회 회원의 영수되는 김성무 이치겸 양씨는 장차 독립전쟁을 하기로 준비해야 되겠다고 총포탄을 다량으로 사서 원동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하고 철도역장에서 일하는 동포에게 수삼천 원을 걷어가지고 이치겸이가 원동으로 나가서 종무소식이라고 이곳 동포들이 떠들어대는 바람에 공립협회는 좀 타격을 받게 되는 동시에 우리 대동보국회에는 활동할 기회가 더욱이 좋아져서 회원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그러나 회금은 한 푼 걷을 수 없는 형편에 이곳에 오래 있어야 소용이 없는 줄로 깨닫고 있는 중에 김창화라는 동포가 콜로라도 푸에블로 석탄광에서 솔트레이크시티 지방에 일 못하는 동포가 많다는 말을 듣고 이 분들을 석탄광으로 이민하여 가려고 이곳에 내도하였다. 나는 이 김창화씨를 만나 탄광 형편을 물었다. 이 분의 말이 탄광 일이 좀 위험하여 보이나 그러나 월급은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보는 사람마다 가자고 권한다. 그러나 땅 속으로 수십 리씩 내려가서 하는 일을 누가 원하느냐고 하면서 다 거절한다. 이 김창화씨는 실패이다. 이 분이 본시 탄광 주인의 경비를 가지고 사람을 데리러 왔다가 따라갈 사람이 없으니 걱정 중에 있다가 나를 보자고 한다. 이 김창화께서 사겸씨가 사람을 좀 주선하여 줄 수가 없나요 하면서 내가 탄광으로 갈 사람을 몇 십 명만 주선하여 주면 나의 덴버까지 가는 차비를 탄광 주인이 판비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솔트레이크시티 박용만 박재형 계신 덴버로 가려고 하던 차 김에게 이 말을 듣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탄광으로 갈 사람을 주선하여보마 하고 여러 사람 있는데 찾아가서 석탄광 일이 이곳에서 철도 일 하는 것보다 갑절 벌 수가 있고 또 이곳에는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일이 아직 없으니 탄광 일을 가는 것이 이곳에서 외상 밥 먹고 노는 것보다 낫다고 우선 신입한 우리 회원에게 권고하면서 나도 같이 간다고 하니 가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수십이 된다. 나는 김창화를 찾아가서 한 三十명 가량 주선하여 놓았으니 언제쯤 떠나려 하오 물으니 수일 후에 떠나자고 한다. 나는 덴버 박용만씨 계신 덴버로 가지마는 이 탄광이 덴버 근방이므로 이 분들과 같이 탄광까지 가서 평생에 구경도 못한 석탄광도 한 번 구경할 겸 또 신입 회원들의 자리잡는 것도 보고 아직 회원 되지 않은 분들을 우리 회에 입회도 시킬 겸 하여 근 五十명 되는 동포 대중과 같이 떠났다. 우리를 실은 화차는 우렁찬 기적 소리를 힘 있게 한 번 불고는 움직이기 시작하여 슬근슬근 성 밖에 나와서는 잦은 걸음으로 극저거려서 벌써 망망한 벌판을 지나서 꼬불꼬불한 산협으로 들어가서는 화통을 하나 더 달고 산중으로 자꾸 들어가는 노선에 좀 번주군한 곳에 여기저기 집들이 있다. 이것이 아마 석탄 광부들이 사는 마을인가 보다 하였더니 과연 우리가 내릴 석탄광이라고 차부가 고함을 지르고 내려가자 김창화씨도 우리와 내리자 하여 내려갔다. 때는 오, 육시 가량 되었으니 저녁 먹을 준비를 해야 되겠다. 김창화씨는 탄광 회사로 가서 광부가 몇 십 명이 왔으니 기숙할 처소를 잡아 달라고 하는 모양인 듯한데 일할 한인들은 벌써 석탄 캐내는 지하 속을 내려들 가보고 와서는 모두 다 겁이 나 한다. 그래서 왜들 그러시오 하니 잘못 왔다고들 한다. 지하로 수백 수천 척을 내려가서야 일을 한다니 돈에 아무리 게걸이 들었어도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가지고 왔던 짐짝들을 다시 다 싸가지고 김창화 주선자도 오기 전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다 슬그머니 다 달아났다. 어떤 사람은 궤짝은 무거워서 버리고 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달아날 필요도 없고 이곳에서 끝장을 보고 가려고 이틀 동안을 남아 있는 두 사람과 있었다. 탄광 회사의 차비로 근 오십 명 사람이 왔다가 하루도 일을 안 하여 주고 다 달아났으니 탄광 회사에서 한 一千元 잘 손해가 났었다. 물론 김창화씨에게 실책을 돌렸을 것은 사실이다. 우리 남아 있던 세 사람도 떠나서 덴버로 갔다. 덴버에 박용만 박재형 두 분이 여관을 하는데 이곳 한인들도 일을 못하고 三, 四十명이 여관에서 외상 밥을 먹고들 있는데 이곳에서 몇 십리 밖에 있던 촌에서 장작일 하는 동포가 수십 명 있다고 하여 나는 이곳을 찾아갔다. 이곳은 삼림이 무성한 곳에 집도 없고 다만 군막을 치고 군막 속에서 기숙하고 지내는 캠프이다. 나 간 날 저녁에 군막 앞에 무덩불을 피우고 수십 명이 모여 앉은 좌석을 향하여 나는 여러분께 드릴 말이 있노라 선언하고는 저는 대동보국회의 사명을 가지고 여러 곳에 계신 동포를 찾아다니면서 우리 대동보국회를 찬성하여 달라는 것이 저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찬성이라는 것은 즉 여러분께서 대동보국회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외다. 여러분이 다 대동보국회원이 되신다면 우리의 보국회가 일층 더 커지고 유력하게 될 것입니다. 보국회가 크고 유력할수록 우리의 기울어져가는 국가를 바로잡을 날이 점점 더 가깝게 오는 줄 알고 여러분께서는 우리 보국회에 지금 입회하시는 것이 즉 보국회를 크고 유력하게 하여 망하여 가는 국가를 바로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 말을 마치고는 나는 지필을 가지고 여러분께 보국회원 되시기 원하시는 이는 성명과 연령 본국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였다. 이곳에 三十명 동포 계신 데서 二十명이 대동보국회에 입회하기로 허락을 한다. 나는 반가운 중에서 감사한 예를 드리고 그날 밤차를 타고 다시 덴버로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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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씨는 이왕에 상면이 없고 이번에 와서 처음 상종하나 별로 다정히 군다. 저는 처음 만나보나 우리 보국회 영수 장경씨와는 서로 친분이 있는 고로 나에게 이같이 동정을 하는 듯하다. 박용만씨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우리나라 유신운동 때에 유명한 삼만이라는 가운데 한 사람인데 학식과 국가운동에 수완이 상당히 있으므로 우리의 영수 자격을 가지신 분이다. 이상 말한 삼만이라는 뜻은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 이 세 분을 가리켜 가로대 삼만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세 분이 일찍이 동지가 되어서 유신운동을 유력하게 하다가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씨는 미국으로 오고 정순만씨는 아령 해삼위로 가서 혁명운동을 하다 한인한테 맞아 죽고 그 몇 해 후에 三一운동의 결과로 상해에 망명정부가 조직된 수년 후 박용만씨도 원동으로 나가서 군사운동으로 아령과 남북 만주로 다니다가 한인한테 맞아 죽었다. 이 유명하던 삼만 가운데서 한 분이 남아 있다가 최후에 독립 성공하신 이승만 박사 한 분이 남아 있어 이 삼만이 같이 하자던 이 독립운동의 결속을 하였다고 할 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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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평생 지내온 역사를 적는 가운데 이 삼만의 과거사를 장황히 적어 놓는 것은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씨 이 두 분이 우리 대동보국회를 열정으로 찬성하심으로써 대동보국회에서 주장하던 대동교의원 기관보에 이 두 분의 간곡한 서문을 보내주신 것을 늘 감사히 생각하고 이 두 분을 늘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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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 박용만씨 여관에서 한 달여 동안 유하였다. 이 동안에 박용만씨의 찬성으로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이 여관 내에 설립하였으나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회금은 한 푼 거두지 못하게 되니 이곳에 오래 있어야 소용 없기로 나는 중앙회에 모든 형편을 보고하는 때에 여기서 떠나 시카고로 가서 공부를 하겠으니 이미 맡아 가지고 여기까지 온 순찰원을 사면하기로 청원하였다. 그러나 중앙회에서 나의 사면청원서를 접수치 않고 퇴각하면서 아직 순찰원을 사면 말고 그냥 가지고 있으라는 공함이 내도하였다. 나는 수일 후에 시카고로 떠나가기로 작정을 하고 있는 때에 도지수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도지수는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우리집 옆에 사는 사람인데 一千九百年에 나와 같이 미국으로 달아났던 동무로 서흥골까지 가서 나의 사촌 형님한테 잡혀갔던 좋은 친구를 이와 같이 천만 뜻밖에 만나게 되었으니 피차의 즐거운 것은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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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문에는 脫字)는 수일 후에 시카고로 떠나가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돈 五十元 하나를 주면서 노비 하라 한다. 이 분은 그 동안 철공장에서 일을 근실히 오래하여 여러 백 돈 벌어가지고 와서 나에게 적지 않은 五十元을 주는 것이다. 나는 이 돈으로 상항 중국인의 약국집 란당에게 길림삼을 五十元어치 부치라고 하였더니 며칠 후에 五十元어치 홍삼이 왔다. 이것을 가지고 타운 타운 들려서 팔아가지고 시카고를 오고도 남은 돈이 한 一百五十元 가량이 잘 되니 공부할 때에 요긴하니 잘 쓰게 되겠다. 나는 시카고에 와 김진사 승제씨를 만났다. 이 분은 식자도 유여하고 글씨를 잘 쓰는 고로 청인들한테 우대를 받는 분인데 청인의 집에서 숙식을 무료로 하고 지내는 이요 청인을 많이 아는 고로 나를 위하여 청인의 찹수이집 일을 하나 얻어서 준다. 지금 방학 때 불원하여 학교는 갈 수 없으니 일이라도 오는 개학 때까지 하여 몇 백元 벌어가지고 가는 것이 필요하기로 청인 찬관 일을 얻어갔다. 이곳은 지금 세계적으로 자동차공창이 많기로 유명한 세인트루이스라는 곳이다. 나는 찬관 일이 처음이 되어 어떤 부분에나 다 서투르다. 그래서 종일 고기 써는 일을 두어 달 하면서 온갖 찹수이와 온갖 양찬 만드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내 생각에 온갖 것을 할 듯하게 생각을 가지고 두어 달 더 일을 하고는 학교 개학 때 되기로 시카고로 와서는 휘튼칼리지의 B반 중학반에 입학하여 한 일년 잘 공부하였다. 나의 항상 소원이 웅변가이었기 때문에 중학과정 가운데 앨로큐션 과정을 특별히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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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간 하기방학이 되어 집 있는 학생은 집으로 가고 친척 있는 학생은 친척을 찾아가지마는 집도 친척도 없는 나는 갈 곳이 특별히 없어 시카고로 와서 우트밍하우스에 방을 하나 잡고 가방 두 개를 방 안에다 갖다 놓고는 우선 시원히 목욕을 하려고 목욕탕에 갔다 오니 가방 두 짝을 무엇이 목욕할 동안에 가져갔다. 이 가방 두 짝에는 나의 온갖 살림이 다 든 것인데 졸지에 누가 가져갔으니, 이것이 이른바 피게죽에 탕도라는 말과 같이 나는 어려운 학생인데 변변치 않은 것이나마 내 살림 전부를 다 가져갔으니 나는 거지가 당장에 되었다. 아무리 도적놈이기로 이와 같이 고학하는 학생의 살림 전부를 다 들어갔으니 네가 잘 살 듯하냐 하는 저주를 하는 이것이 도적놈과 인사불상이라는 말과 같으니 이 놈을 저주한들 무슨 용처가 있나. 아! 잊어버리고 말자는 결단을 하고 방에서 나와서 김진사 승제 선생 계신 청인의 전방을 찾아갔다. 김진사는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한다. 나도 반가웠다. 이 크나큰 시카고에 한인이라고는 사오 인에 불과한데 다 일을 못하고 어렵게 지내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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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년에 가서 하던 청인의 찬관의 일을 얻었다. 작년에는 고기 써는 일을 하였고 금년에는 세컨드 쿡으로 나갔다. 다행히 이 찬관에서 매니저로 있는 사람의 성이 方氏여서 나와 커즌 사촌이라고 하며 친절히 군다. 하여간 이 세컨드 쿡이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고 어떤 것은 어떻게 해야 될 문제속을 몰라서 곤란히 지내는 가운데서 차차 경력과 수단이 생겨서 용이하게 견뎌나가게 되는 것을 나는 다행히 여기고 갈리기 전에는 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근 삼개월 동안을 지내었다. 추기 개학 때가 왔다. 그러나 나는 학교로 갈 형편이 못된 것은 전체 살림을 도적맞았기 때문에 옷도 신발도 장만을 다시 하여야 학교로 가게 될 형편이므로 한 일년 이곳에서 일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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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유수같이 쉼 없이 흘러서 삼백육십오일이라는 긴 끝을 찾아 나왔다. 이것이 즉 내가 작정하고 시작한 일년 된 만기이다. 나는 작정한대로 학교로 다시 가기로 하고 시카고로 와서 수일 유하고 있는 때에 하와이 이민시대에 총무로 있던 안정수씨를 만나게 되어서 입학할 사를 말하게 되는 때에 안정수씨께서 자기 공부하는 서북대학에 같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한다. 자기는 핵홀에서 목사 공부를 하고 나는 아직 중학 二年급이 대학에 입학할 수 없고 아카데미대학의 B반 즉 중학과에 입학하였다. 나는 학비를 一百五十元 주고야 공부을 시작하였다. 나는 이 학교에 있을 동안에 매일 안정수씨한테 가서 나의 공과에 모르는 것을 물어보니 나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안정수씨는 목사 공부를 그만두고 시카고의 큰 음식점에 스튜어드로 고빙이 되어 가고 나 혼자 이 학교에서 있게 되었다. 안정수씨는 미미교인으로 미미교에 부속한 이 서북대학에서 목사 공부를 하다가 그만 둔 이유는 에디 부인이 보스턴에서 창설한 크리스찬사이언스라는 신교의 전도를 받고 감화가 되었는데 이 교회에 유력한 교도 에버핫이라는 부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에 일을 얻어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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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학교에서 반 학기 동안을 지나서 성탄절 방학 때에 시카고로 들어와서 안정수씨 있는 곳을 찾아가 만나보는 때에 일을 하라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왕 하던 청인의 찬관 일을 원하므로 안씨가 주선하여 주는 일은 착수치 않고 청인 일을 얻어가지고 갔다. 작년에는 세컨드 쿡으로 갔었고 이번에 퍼스트 쿡으로 갔다. 주방에 일하는 청인들이 나를 보고 희롱하는 청언으로 거년 시에는 세컨드 쿡으로 왔다 금에는 퍼스트 쿡으로 왔으니 이 다음에는 매니저가 된다고 힙스맛시라고 한다. 월급 때가 왔다. 빨간 봉투에 一百五十元 지전을 넣고 방선생이라고 봉투에 쓴 것을 매니저가 갖다 준다. 나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일꾼에게 다 이같이 하는 것인데 서로 얼마씩 받는 것을 모르게 되는데 청인 쿡이 여섯이요 양찬하는 쿡 셋인데 청인 쿡들은 영어를 몰라서 저희 쓸 물건을 저희가 주문을 못하고 내가 청찬 만드는 물건까지 주문하게 되므로 청찬 쿡보다 二十五元씩을 더 받는 이것을 청인들이 알고 시기가 여간이 아니고 나를 이왕보다 미워한다. 그러나 이 찬관원 주인이 나를 여기 보내었으니 나의 일을 빼앗을 사람은 없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한동안 잘 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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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 나는 병이 나서 일을 더 할 수 없이 되었다. 병인즉 이질병을 만나서 무한히 고통을 하다가 버팔로로 가서 병원으로 가서 한 달여간 치료하였으나 병을 거근치 못하고 시카고로 와서 장인명씨가 하는 여관에서 치료하고 있는 때에 장건상 이희경 두 사람이 와서 이 여관을 없이 하기를 주장한다. 그 무슨 이유를 가지고 이 집을 없이 하려느냐고 나는 물었다. 장, 이 양인의 대답은 이 집이 있기 때문에 시카고 한인이 일도 안 가고 외상 밥과 잠을 자고는 청인의 잡기판과 기생의 집에만 다니게 되니 이 집을 없이 하여 이런 사람들을 부지할 곳을 없이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 집 창립한 역사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일찍 이곳에 와서 내가 五十元을 먼저 내놓고 한인들한테 공정 연조를 거둬 가지고 가구를 장만하여 놓고 상당한 사람을 맡기어 기숙 범절을 주장하게 하던 것인데 외상으로 자고 먹는 사람이 많아서 부지하기 곤란하여 시카고 전체 한인이 모이어 회의한 결과 이 집을 장인명씨에게 전권을 주어서 확장하여 가지고 벌어먹으라고 내어맡긴 것이다. 장건상 이희경은 국민회 사람으로 이 집을 세울 그 때에는 이 지방에 오지도 않았고 또 이 집에 돈 한 푼 낸 일도 없고 성외에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인데 이 집을 없이 하고 안 하는 것을 말할 아무 관계가 없는 이 사람들이 이 집을 없이 한다는 주장을 유독 내가 많이 강경히 반대하였다. 이 집을 주장하는 장인명씨는 대동보국회원이요 또 나의 친구인 까닭에 나는 이 일에 극히 반대하기를 주장하고 나가 이 집 없이 한다는 장, 이 두 사람은 나를 원수같이 볼 것은 사실이다. 집 없이 한다는 것이 한 문제가 되어서 시카고 한인 전체 공정회를 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전체 한인이 모인 공동회에서 오늘 모인 것은 이 집 없이 한다는 사건으로 모였다는 취지를 나는 설명을 하고 앉은 뒤에 장건상이가 일어나서 이 집은 잡기와 기생집에만 다니는 사람들의 구혈이니 없이 하여야 된다는 말을 하는데 대하여 모인 청중들은 거의 다 불만불평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일어나서 장건상의 주장을 공격한다. 이 모인 공정회는 잠시 동안 수라장이 되었다가 최후에는 이 집을 그냥 두든지 없이 한다든지 거수로 가부를 결정하기로 하여서 집을 그냥 두자는 거수가 많아서 장건상의 주장이 실패를 당하고 나서도 일행 집을 없이 한다고 야단을 부리면서 미국 법정에 가서 재판을 하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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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상과 이희경은 자기 편을 돕는 사람이 없으므로 시카고 한인 가운데 불량한 한인 몇을 데리고 다니면서 술과 찹수를 사주면서 이 사람들을 은근 끌었다. 김관칠 김용오 권시중 김창오 이 네 사람은 주색잡기나 하고 우리 사회나 국가운동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난봉이나 부리는 이 사람들을 사귀어 가지고 자기의 불철저한 주장을 이겨보려고 수차 공정회를 열어가지고 회의할 때에 이 불량한 네 사람은 육혈포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 번은 공정회 석상에서 내가 오늘 다시 모인 취지를 설명하는 때에 이희경이가 나에게 대하여 네가 무엇이기에 번번이 나서서 우리의 주장을 반대하는가 하기로 나는 회장 규칙이요 말하는 때에 이희경이가 규칙은 무슨 규칙 하기로 옳다 규칙이 없다고 한즉 나도 나의 혈기를 안 쓸 수 없다 하고 주먹으로 이희경의 볼편을 한 번 본때 있게 냅다 질러서 당장에 꺼꾸러진다. 좌중은 다 와스스 일어나서 싸움을 말리느라고 야단법석이 일어나니 모였던 공정회는 아무 결과 없이 파회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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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후에 장건상 이희경이가 미국 법정에 재판을 걸어서 우리 편에서 피고자 몇 사람이 와야 된다 하기로 나는 불가불 가야만 될 것은 장건상 주장에 처음부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의 대변자가 되기 때문에 피일과 장인명과 같이 재판정에 가서 우리는 이 재판을 이기고 나왔으나 율사비를 一百元 주었으니 무슨 이익이 있는가. 이 미친놈 장건상 이희경 이 두 놈 때문에 돈 없애고 외국인에게 망신만 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 미친놈들이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된 뒤에 원동으로들 나가서는 외무차장으로 있어서 미주 동포가 보내주는 그 돈으로 배지들을 붙리고 있다가 이번 해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가지고 본국에게 들어가서는 또 이 박사의 모든 정략을 반대하다가 민주공화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공산당 철벽 뒤에 숨어 있는지 근일에는 이 장건상이 찍소리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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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대동보국회 형편이 어찌된 모양인가? 나는 三年前에 상항 중앙회관을 떠나 솔트레이크씨티로 석탄광으로 덴버 이 세 곳을 거쳐서 회원도 三, 四十名을 얻고 두 곳에 경찰소도 세웠다. 그러나 경제공황으로 회금 일푼을 거두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사회에 도움을 주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영어자라도 배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시카고를 온 것이다. 그 동안 하와이에서도 동포가 안 오고 불과 한 一千 명쯤 되는 한인 가운데 두 단체가 일어나서 우리의 실력과 인력이 미약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연고로 이 두 단체 당국자들은 대동보국회와 국민회를 합하자고 말이 오고 가는 때이었다. 마침내 장, 전 양 의사가 스티븐스를 상항에서 총살한 사건이 일어나서 두 회를 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서 두 회 당국이 합하기로 상약된 모양인지 장경씨와 백일구 문양목 이 중앙회 간부 세 분이 나에게 이 두 회가 합동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었기로 나는 여기 대하여 찬성도 반대도 안 하고 다만 바라는 것은 두 회가 공정한 마음으로 두 회에 이왕 회명을 없이 하고 새로 회명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히 지어가지고 합하기만 바란다고 이 세 분에게 답장하고 며칠 있노라니 합동되었다는 기별이 다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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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합한다는데 대하여 반대치 않고 공정히 합한다면 어느 때든지 찬성한다고 우리 중앙회 당국에게 이미 선언한 것인데 오늘 합동하였다는 공함을 볼 것 같으면 내가 원하던 바와는 대상부동하게 틀릴 뿐만 아니라 대동보국회에 대치욕을 당하게 되는 합동이라고 할 것은 이 두 회가 합한 새 회명만 보더라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합동된 새 회명은 大韓人國民會라 하였으니 합하였으나 안 합하였으나 국민회라는 그 명사는 그대로 있고 大同保國會는 은연히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런 합동에 대하여 국민회 회원들이야 응당 만족하였을 것이나 보국회 회원들은 불평을 가지게 될 것은 사실인즉 이런 불공평한 합이 미주 우리사회에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이것은 장래에 반동력의 씨를 심어 놓은 것이라고 여기 말하여 두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를 정말로 진흥시키자고 할 것 같으면 사회의 당사자들이 공평과 정직을 주장해야 되겠는데 여기에서 반하여 간교한 수단으로 남의 것을 정복하여 내 것을 만들려는 이런 불공정을 주장하는 사회는 가장 영리하고 수단이 능한 듯하나 이런 영리와 수단은 오래지 않아서 세상에 드러나서 이런 사회에 큰 영향을 줄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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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는 자래로 미주 한인사회를 혼자서 세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덮어놓고 반대이다. 대동보국회는 간교한 수단으로 합병을 하여 치우고 상해 신정부 때에 이 정부를 개조를 해야 된다고 떠들었고 또 구미위원부에 세력을 잡으려다가 되지 않으니 위원부를 개조해야 된다고 재미 전체 한인의 대회를 불렀다. 그러나 동지회에서는 참석치도 않고 여기 대하여 불간섭하게 되니 위원부 개조 경영도 아주 실패하고 말았다. 또 해방될 임시하여 국민회는 미·포 한인연합회를 불렀으나 동지회와 부인회에서는 응치 않는 고로 국민회 소속 단체 몇이 모여가지고 연합회라 지칭하고 대표자를 국민회 가운데서 김호 김원용 김병연 제씨를 뽑아서 해방된 대한에 파송하였다. 이 사람들은 내지에 가서 무엇을 하고들 있었는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박사가 하는 운동을 방해시켜 가지고 국민회에서 신대한의 권리와 세력을 잡으려다가 다 실패하고 미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은 이 박사의 정부가 연합국의 정식 승인을 얻어 완전한 민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오늘날에 와서는 이것이 남북통일 정부가 아니고 다만 남방 단독정부인즉 우리 국민회에서는 이 단독정부와는 아무 관계를 안 한다고 공개 선언하고는 지금 영공사가 미국에 와서 미·포 동포를 보호하는 이것도 받기를 원치 않으니 장차 국민회가 어찌 되려는가? 이것은 자기들의 고려할 문제인즉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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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보국회 영수 장경 선생은 보국회와 국민회가 합한 후에 나를 만나려고 시카고로 오셨다. 나는 참 반가웠다. 장선생은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또 자기의 오른팔과 같다고 서신 상에 누누이 말씀하신 것을 나는 믿고 이 분을 사회 방면에서는 영수로 숭배하고 사사 교제로는 친형님 같이 대접하였다. 장선생께서 지금 시카고에 오신 것은 수년 동안 온갖 정력을 들이던 사회운동은 하와이에서 건너오던 동포들이 오지 않고 재정상 곤란으로 회무를 발전시킬 수 없는 중에서 장인환 전명운 양 의사의 사건이 발생되어 서로 합동하자는 교섭이 빈번하게 되는 때에 합동한 회명이 좀 불만하나 장, 전 양 의사의 대사건을 순조로이 치러 나가자면 두 회가 합하는 것이 옳다 하시고 합하신 것이 살신성인과 방불하였도다. 오늘날 행세하는 大韓人國民會라고 하는 것은 大字는 大同保國會을 대표한 大字라고 하고 國民會라는 것은 그냥 둔 것을 불공정하게 되었다고 나는 불평을 가지고 이 두 회가 합한 후에는 이 회에 대한 모든 관계를 끊고 시카고에서 후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유학을 경영하던 때에 장선생을 다시 만나서 이곳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장선생께서 시카고에 주택을 하나 얻어놓고 부인과 상항 교의원에서 길러낸 딸 코라를 데려다 살림을 하신다. 나와 유홍도 두 사람은 장 선생 댁에 같이 있어 한 집안 같이 지내게 되었다. 따님 코라는 그때 十四세 가량 되어 중학교를 시작하고 나는 아직 학교를 못가고 있는데 장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가 돈을 좀 벌어야 장래에 국가운동을 실제로 할 기회를 만들 터이니 우선 몇 해 동안 돈 벌기로 주의하자고 자기는 삼을 몇 백원어치 사 가지고 남양군도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신다 하기로 나는 중미 쿠바로 삼을 사 가지고 가겠다고 서로 언약을 하고 내가 먼저 쿠바로 떠나갔다. 그 후에 장선생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신 뒤에 유홍도는 장선생 댁을 보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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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쿠바국 도성 하바나에 내렸다. 하바나 도성은 그리 크지는 못하나 화려하게 설비하여 놓은 것이 서반아의 제도와 풍속 습관이 아직 있고 서반아 언어를 사용한다. 이 쿠바국은 수백년 전에 서반아에게 정복을 당하여 동화가 된 나라로서 五十年 前에 미·서전쟁에 미국이 승전한 결과로서 자주 독립한 나라이요, 이 나라 인종은 세 가지 인종이 있는데 본토종은 인디언 홍인이요 또 혼합 인종이 있는데 서반아 인종과 홍인과 혼합한 것이며 이외에 순전한 서반아 인종이 있는데 이 서반아 사람들이 정부의 모든 권리와 또 민간에도 중요기관은 다 서반아 사람이 잡고 앉아서 지배한다. 이 나라에 이민으로 온 청인이 여러 만 명 되어 어디를 가든지 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청인이 이같이 많기 때문에 너도 나도 삼을 청인한테 팔려고 온 것이다. 하여간 나는 쿠바에 온 것은 큰 운수가 열리었다고 혼자 생각하였다. 삼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청인들이 환영하고 다투어 사니 벌써 수천 원 어치를 팔았다. 하바나에서 떠나서 타운 타운에 들러서 샌디에고라는 항구까지 가서는 배를 타고 영국 속지 제미가라는 나라 도성 킹스턴에 가 내렸다. 이곳 토인은 전부가 다 흑인이요 생활은 극히 빈궁하여 발에 신 신은 사람을 볼 수 없고 다 맨발로 다니는 것뿐이요 토종 흑인들은 무엇을 하여 생활을 하는지 일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없고 사업 하는 흑인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곳에 이민으로 온 청인들의 조그만큼씩한 장사바치가 사처에 있어 가지고 토인의 식용품 일용품을 파는 것을 나는 가는 곳마다 찾아볼 수 있다. 들은즉 이같이 빈궁한 나라에 와서 푼전 장사를 하여 큰 자본가 된 사람이 여기도 여럿이라고 하니 대체 청인은 어디를 가든지 근실 근검하여 생활이 유족하여 잘 지내는 이것 한 가지는 우리도 청인한테 배우는 것이 옳다고 나는 스스로 자인함을 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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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수삭 유하면서 삼을 좀 팔려고 주선하여 보았으나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간신이 내왕 경비나 얻어가지고 다시 쿠바국으로 와 수삭 동안 삼을 팔다가 하바나 도성에서 배를 타고 뉴욕항에 와 내렸다. 이번 쿠바 와서 삼을 판 도합이 한 六千元 가량이 잘 되었으나 일 년 동안 돌아다닌 경비가 二千元이 잘 된 고로 뉴욕까지 가지고 온 돈이 한 四千元에서 더 되지 않고 삼은 아직 수백원 어치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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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있을 동안에 전명운씨 댁에서 한 주일 동안 유하는 때 방화중 목사를 만났는데 이 방화중 목사는 뉴욕에 와서 수중에 무일푼하여 고생이 막심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남아 있는 삼을 다 외상으로 주면 한 주일 내에 팔아서 삼 값을 갚겠다고 하기로 나는 방목사의 말을 믿고 수백원 어치가 잘 되는 것을 전부 다 주고 一百元만 달라고 주었는데 이 삼을 가지고 보스턴에 가서 여러 백원 어치를 팔았다는 소식이 오나 방목사는 나에게 삼 값을 갚지 않는다. 나는 이 사건으로 수차 편지하였으나 회답도 없으니 나는 더 기달리지 않고 시카고로 오고 말았으니 이 돈 百元은 아무 생광없이 방화중 목사의 잡기와 외도에 쓰게 도와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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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중이 목사라기에 보통 사람보다 신용이 있을까 하고 이 삼을 외상으로 준 것인데 이 목사님의 속은 음탕하고 부잡하여서 한인의 눈 앞에서는 목사인 체 우리 사회에 주장자같이 행동을 하다가 한인 없는 외딴 곳에 가서는 청인의 잡기판에서 노름하기와 기생집에 다니기와 또 하와이 한인 목사로 고빙되어 나가서는 예배 보러오는 얌전한 부녀를 예배당 뒤에서 음란한 행동을 하다가 교인들한테 쫓겨나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사교회에 얼씬 못하고 죽은 목숨으로 지내다 늙어서 일도 할 수 없이 되니 한인 양로원에 가서 구구이 여년을 마치었으니 이것은 자기의 온갖 죄의 값이라고 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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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시카고로 오는 길에 에핑햄에 있는 비셀칼리지를 한번 심방하고 싶어서 내렸다. 이곳은 조그마한 타운인데 이 학교가 있다. 미스터 비셀은 즉 이 학교 설립자요 또 교장으로 있다. 나는 이 분을 찾아가서 면회하기를 청하고 한참 있노라니 자기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하기에 들어갔다. 미국 사람이 찾아간 사람에게 점잖은 태도로 하는 말이 What can I do for you? 라 한다. 이 말은 즉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도와 드리리까라 한다. 예 저는 당신의 미술학교가 유명하다기로 이리로 지나가는 길에 한번 구경하고 가려고 일부러 내려서 찾아왔습니다. 예 아직까지는 미국에 이런 미술학교로는 이 학교 하나밖에 없지요 하면서 나를 데리고 모든 부분을 실제로 보게 구경시켜 준다. 이 미술학교는 포토 앤 그래픽을 가르치는데 이 미술이 상공업을 발달시키는 능력과 미술적 방법을 가졌다 할 것은 이 세상 인류사회에서 먹고 입고 신고 온갖 쓰는 작은 장기로부터 큰 기계와 집이고 공원이고 산하의 경치를 다 본질대로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은 꼭 그대로 만들어 내어 신문 잡지에 천만 장이라도 박아내서 광고를 널리 하여 사람이 모르는 물건을 팔 수도 있게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미국의 유명한 통신 매매상회 씨어쓰오토벅 회사 카탈로그를 볼 것 같으면 천만 종류의 물건을 진경으로 사진을 박아 놓고 전국적 세계적으로 이 책에 있는 물건을 살 수도 있고 팔 수도 있는 것이 즉 이 미술이 만들어 쓴 것이요 또 신문 잡지에서의 세계에 유명한 사람의 언어 동작의 보도를 받고는 즉각으로 이런 사람의 사진을 신문 잡지에 판각하여 공중에 나오는 것이 다 이 미술의 능력과 방법으로 된다. 이 미술은 무엇이고 눈으로 보는 것을 사진을 먼저 박아가지고 이것을 화학으로 새겨 내는 것인데 신기한 방법과 기기묘묘한 생각에서 이 미술이 발명되어 농상공업을 환연하게 발전시키는 미술인 줄 알고 태서 각국에서 출판하는 신문 잡지를 볼 것 같으면 이 미술로 박아낸 사진판이 매장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없는 데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신발명 미술을 아직 믿지 못한 동양의 신문 잡지를 볼 것 같으면 사진판을 박아낸 것을 찾아보기가 힘이 들 뿐 아니라 무슨 시체 옷광고 같은 것을 할 때에 이 미술이 아니고는 그 옷의 맵시있는 모양 그 천의 호불호 혹 색깔을 모르고 살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을 이 미술을 이용하여 판을 박은 광고는 분명히 그 본질을 박았기 때문에 모양과 색깔과 무슨 시체인지 그 박아 논 그림을 친히 보기 때문에 사서 입을 구미가 바싹 나게 만드는 것을 바로 말하자면 좋은 음식을 소반에 담아놓아 여기에서 김이 풀풀 나고 호미한 냄새가 코를 지리게 되면 누구나 이 음식에 구미가 동하여 한번 맛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사람 사람에게 있으리라고 믿는 것과 같이 무슨 물건이든지 아름답게 판을 박아낼 것 같으면 이것을 보는 사람에게 살 의사와 취미를 주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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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학교를 심방하고 시카고로 오려 하는 때에 이 학교장 비셀씨가 나를 대하여 이 미술 공부를 하라고 권고하면서 이 학교 마치면 곧 일을 얻어 보낸다 하며 월급은 매일 八時 동안이요 한 주일에 五日만 하고 七十五元을 받는다 하며 공부 마치기가 바빠서 큰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데려간다 하면서 꼭 자기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권고를 한다. 나의 생각에도 월급과 시간도 길지 않으니 공부할 의사가 슬그머니 나서 시카고를 갔다가 다시 와서 작정하겠다고 말을 하고는 떠났다. 장경 선생은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삼을 잘 파신다는 편지는 두어 번 받았으나 아직 오시지 않았고 장부인과 딸 코라만 계신 곳으로 짐짝을 가지고 내 집 찾아들어 가듯 하였다. 장부인과 코라는 퍽 반가와 한다. 유홍도는 일도 안 가고 아직 장부인 댁에서 지내고 있다가 나를 보고 반가운 중에 저는 일년 동안 지내온 경과 사항을 말하고 나도 삼상으로 돌아다니던 모든 경력담을 기울여 놓았다. 나는 에핑햄 미술학교로 갈까말까 하고 있는 것은 나의 목적이 대학교를 마쳐 가지고 동포사회에서 근실한 일꾼이 되자던 것을 그만 두고 미술학교로 가서 개인생활에 유족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혼자 말하고는 아직 작정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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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이 학교 교장의 편지가 왔다. 읽어본즉 나를 입학하라고 간곡히 권면한 사연이 아주 점잖고도 정답다. 나는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을 여기저기 쓰게 되니 무엇이든지 속히 작정을 해야만 이 수중에 남아 있는 한 三千元 잘 되는 것을 나의 장래를 위하여 잘 써야 되겠다 고로 생각다 못하여 이 미술학교로 가기로 작정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에핑햄으로 떠나갔다. 교장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입학할 것을 다 수속하여 가지고는 교장이 주선하여 주는 방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이튿날 개학시에 학교 들어가서 미술에 대한 랙추어 하는 말을 듣고는 공부하는 반에 들어가서 선생이 가르치는대로 하면서 하루를 지내었다. 이 학교의 학생은 한 삼백 명 잘 되는데 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경비가 매주일 十元이요 학비가 일년 二百元이요 또 연습하는 동판과 연판 또 여러 가지 케미컬 화학에 관한 모든 것과 종이와 온갖 것을 다 가지고야 이 공부를 하게 되는 고로 입학하는 날 근 일백 원 어치 물건을 샀었다. 이 공부는 물재를 많이 사서 연습을 많이 하여야 이 미술에 성적이 양호하다고 하기로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물재를 많이 가지고 연습을 많이 한 고로 이태 동안에 졸업장을 받아 가지고 나왔으나 어떤 학생들은 연습을 많이 못하고 三, 四년에도 못 마치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여간 나는 이태 동안에 이것을 마쳐 가지고 시카고로 들어올 때에 마음이 무한이 즐거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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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생께서는 남양에서 삼상에 재미를 많이 보시고 미주로 오신 때이다. 피차에 반갑게 다시 상봉하여 장래 경영을 하고 있는 때인데 장선생께서는 가족을 데리고 상해로 나가신다고 하면서 나도 장차 나오라 하신다. 정말로 장선생은 떠나 가신다. 나와 유홍도는 이 좋은 동지요 친구인 장선생을 이별하고 얼마 동안은 심히 섭섭하였다. 장선생은 상해로 나가서 그곳에 식구를 정돈하여 놓고는 중미성쇠출판사에 나를 위하여 일을 얻어놓고 나오라 하신다. 그러나 나는 동양으로 아직 나갈 생각이 없고 이곳에 좀 더 있을 생각으로 장선생의 주선하여 주시는 것을 듣지 않고 미국에 있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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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핑햄 재학 때에 가주 삭도에 있는 동지 김홍균씨가 나를 장가를 가라고 누차 권하는 편지가 연속 내도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시작한 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장가갈 생각이 없어 지금은 장가갈 문제는 생각할 여력과 여가도 없으니 나를 권하지 말고 김형이나 좋은 혼처가 있다면 먼저 장가를 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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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三十六年 前에 하와이 이민으로 온 동포 가운데서 소위 사진결혼이라는 풍기가 하와이에서 일어나서 미주 대륙에게까지 이 풍기가 성행되어 홀아비로 십여년간 고적한 생활로 지내던 동포들은 사진혼이라는 소문을 듣고 가정생활에 뜻이 있는 동포들은 이럭저럭 주선할 길을 얻어서 벌써 몇 분 여자가 사진결혼하여 가지고 내지로부터 미주에 왔다. 이 선참으로 온 여자는 양주은씨 부인과 김병규씨 부인 김홍균씨 부인 이 분들인데 상항에 와서 남편 될 사람을 만나볼 때에 만족한 여자도 있고 불만한 여자도 있었다. 만족한 여자는 다행히 사진만 보고 찾아온 사람이 보기에 괜찮고 나이도 많지 않게 보이니 만족하였을 것이나 불만을 가진 여자는 사진만 보고 찾아온 남편 될 사람을 대할 때에 나이도 많아 보이고 얼굴도 사진과는 단단히 틀리니 잘못 찾아왔다는 후회로 불만히 생각하고 혼례를 하느니 안 하느니 한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최후에는 다 혼례를 하고 아들 딸 낳고 잘들 사니 다행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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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동포 사진혼인에 대하여 별의별 말이 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많으니 나이를 줄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얼굴 못나서 남의 사진을 빌려서 자기 사진이라고 여자한테 보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양서부지하여 결혼하려는 여자에게 친필로 쓸 수 없는 고로 유식한 동포의 손을 빌려서 연애적 편지를 여자가 결혼하기를 허락할 때까지 여자를 속여서 데려온 것들이다. 이러한 형편을 알지 못하고 찾아온 여자들은 다 우리나라 교회방면 학교방면에서 소학 중학을 다 마치고 온 여자들인데 결혼하려고 막상 찾아와 본즉 나이도 틀리고 얼굴도 사진보다 다르고 학식도 자본도 있는 줄 알고 불원천리에 태평양을 건너와 본즉 상상하고 온 희망이 절망되어 낙심 기절한 여자도 있고 결혼을 안 한다고 떠들어댄 여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말에는 다 화합하여 성혼하여 자녀를 생산하면서 잘들 사니 우리 외양에 나온 한인 전도에 다행이라고 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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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사진혼인의 풍기가 미포 동포사회에 성행되는 때에 유홍도씨에게 편지 한 장이 왔다. 이 편지는 북간도 용정에 있는 장로교 목사 김내범씨의 편지인데 그곳에 李萬玉氏의 딸 이살로매 양을 미국에 있는 좋은 청년에게 소개하여 보라고 유홍도씨한테 편지가 왔었다고 하면서 나를 권고한다. 유홍도씨는 이살로매 양을 어렸을 때에 원산교회에서 잘 알게 되었고 李萬玉씨는 물론 친하게 알고 또 이 여자를 소개하는 김내범 목사는 연전에 유홍도씨와 같이 한 이민 배를 타고 하와이 사탕농장에 같이 있다가 김목사는 북간도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유홍도씨는 大同敎育會 때부터 오늘까지 한 동지 친구로 보통하게 지내게 되는 때에 나를 이살로매 양에게 약혼하라고 여러번 권면한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 장가가는 것을 그리 촉망을 가지지 않은 고로 선뜻 작정을 안 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김내범 목사가 이살로매 양의 사진을 유홍도씨에게 보내었다. 유씨는 사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라고 하기에 받아들고 보았다. 피차의 연분인지 이왕에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여자의 사진을 처음으로 대할 때에 어쩐지 이왕 알던 사람과 같이 나의 전신에 실려 있던 사랑 진정에 사랑이 이 여자에게 쏠린다. 이것을 영어로 로맨스라고 할런지 나는 이런 여성에 대한 로맨스를 이왕에 자아내본 적이 없었으니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을 알았든 몰랐든 간에 이것은 인성의 자연적 동기이므로 나에게 적합한 여성을 대할 때에 이 로맨스 즉 연애가 생기는 것은 천연적에서 일어나는 것이 누가 막을 수도 없는 것으로 깨달았다. 이러한 정세를 가진 나는 이살로매 양과 약혼하기로 작정하고 유홍도씨한테 허락을 하였다. 유홍도씨는 즉시 김내범 목사에게 편지를 써놓고 나의 사진 한 장을 동봉하여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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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나의 사진을 이 여자가 받아보고 만족하여 나와 약혼을 하겠는지 이런 권력은 나에게 있지 않고 오직 이 여자에게만 있다고 상상되니 이 사진 혼인이 꼭 되리라고 믿을 수 없다. 하여간 나는 편지 한 장을 감히 써서 이살로매 양에게 부치고 나의 희망하는 대로 회답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세월은 여류하여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나가서 편지 올 기한이 되었다. 지금 같으면 비행 우편으로 일주일이면 편지가 북간도에 넉넉히 갈 수가 있지마는 그때는 비행 우편이 아직 발달이 못 되어서 다만 화륜선으로 우체수를 실어다 분전하게 되는 시일이 근 일삭 가량이 잘 되는 고로 본국에 편지를 하고 이 답장을 보려면 두 달 동안을 잘 기다려야 되는 때이어서 이살로매 양의 회답을 두 달을 잘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동양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왔는데 이것을 개봉하기 전에 이 편지는 분명히 이살로매 양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구나 하고 개봉하여 사연을 읽어보니 꿈에도 보지 못한 나의 사진과 나의 편지 한 장을 보고 나와 약혼할 것을 흔연히 허락하였다. 나는 이러한 편지를 받고 반갑고 즐거운 것을 다 형언하여 말할 수 없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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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 여자를 북간도에서 상해로 나오게 하여 가지고 미주로 데려오는 것이 나의 책임이므로 나는 북간도에서 상해로 나올 노비를 부치고 상해에 계신 장선생 댁으로 인도하였다. 나와 약혼한 이살로매 양은 혼자서 길을 떠날 수 없어서 자기 오라버니 준필씨와 같이 청차를 타고 위험한 길을 무한한 고생을 하면서 상해 장경씨 댁을 찾아와서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반가운 중에라도 애처로운 정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젊은 여자가 머나먼 험한 길에 여러날 청차를 타고 상해까지 찾아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또 이것이 오직 나 때문이다 하고 나는 더욱이 애처로운 정세가 일어나서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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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까지 무사히 온 것만은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신 은혜라고 하나님에게 감사를 올리었다. 장경 선생과 장부인 또 코라, 헬렌 두 따님과 피터와 애거 두 아들이 다 나와 약혼하고 온 여자와 처남 될 사람에게 다정히 대접하는 것은 옛날 동지요 친구가 되어서 고락을 같이 한 그 의분으로라도 안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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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나는 시카고에 있는데 오마하에서 찬관업 하는 고성태라는 동포가 그 찬관을 부지하여 나가기 불능한즉 유홍도씨가 와서 도와주기를 구청하였다. 그러나 유홍도씨는 나더러 가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마하로 가서 그 분들 하는 사업을 수일 구경하였는데 사업은 잘 되는 자리를 가지고 할 줄들 몰라서 빚을 잔뜩 걸머지고 빚단련에 견딜 수 없이 된 형편인 것이 사실이다. 이 찬관은 고성태의 찬관만이 아니요 학생 사, 오인이 합자하여 차려놓은 찬관인데 고성태씨는 매니저였었다. 이 분들이 나와 동사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자본이 없으니 동사를 할 수 없다고 하니 자본이 없어도 동사를 하여 달라고 간청하기로 허락을 하고 나의 의견대로 좀 개량하여야 되겠다 하니 마음대로 개량하라고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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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관 전방은 크고 좋은 집인데 윗층은 방이 없고 다드 평창한 통방이다. 이 사업에 첫 정책은 경비를 줄여야 부지하여 가지 지금 경비를 그냥 두고는 누구든지 부지하여 가기가 힘들다고 하겠다. 이 사업의 동사인이 四人이요 또 나까지 하면 五人이다. 이 五人이 여관에서 방을 매일 매인이 一元씩을 주고 자니 매일 五元이요 한달 一百五十元이다. 이것을 무슨 모양으로든지 없이 해야만 될 줄로 나는 알고 목수를 불러다 빈 윗층에 우리가 잘 방 다섯 칸을 초사로 꾸며 놓고 우리 다섯 사람이 자게 만들어 놓았다. 둘째로 할 정책은 이 집세가 매월 一百五十元이 많아 보이니 집주인을 잘 교섭하면 五十元 하나를 감함직 하기로 집주인을 찾아가서 五十元만 감하여 달라고 사정을 하나 안 된다고 내버틴다. 나는 다시 감하여 달라고 사정을 이렇게 하였다. 이 찬을 시작한 사람들은 공부하는 외국 학생들인데 학비나 조금씩 벌어가지고 대학교에 임하여 보려고 푼푼이 모아 가지고 이 찬관 시작한 것인데 경비가 많아서 돈을 남길 수 없는 것보다도 이 사업을 부지하여 가기가 곤란한즉 五十元만 감하여 주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사정에 우 사정하였다. 집주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허락을 한다. 나는 감사한 예를 하고 와서 동사인들한테 집세 五十元 감한 것을 말하니 일반이 다 대희한다. 아직도 한 가지 정책 있는데 이것은 일꾼 상 심부름하는 여자가 밤낮 여섯을 넷으로 줄일 수 있어 보인다. 이 여자들의 월급은 매주일 十五元씩인즉 여자 둘을 줄인다면 매주일 三十元이요 한달에 一百三十元이다. 이상에 말한 방세 一百五十元 집세 감한 것 五十元 일꾼 둘 줄이는데 一百三十元 이 삼종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얻는 이익이 매월 三百三十元인즉 매달 지출하는 경비 총액에서 줄었으므로 이것을 이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워낙 빚을 많이 걸머지고 여러달 내려온 까닭에 한 두 달에는 다 갚을 수 없고 한 일년 곤욕을 하여야 빚을 다 청당하게 되는 형편인 고로 동업인 가운데서 세 사람은 그냥 내던지고 나가서 일을 하고 오직 남아 있는 사람은 고성태와 나뿐이다. 그래 이 일을 감당하기 힘이 들어서 시카고에 있는 유홍도 정이용 양씨를 빨리 오라고 편지하였다. 수일 후에 이 두 분이 왔다. 이 두 분이 오자 고성태씨까지 나가고 만다. 이것을 최초에 차려놓았던 사람은 다 나가고 우리 세 사람이 하게 된 것은 이 시작한 사람들 생각에 수태 진 빚을 다 갚고 돈맛을 보려면 한 일년 동안 일을 죽도록 하여도 돈 한 푼 가지지 못하고 일만 하는 것보다 이것을 내리고 나가서 일을 하면 매일 사, 오원으로 五, 六元 벌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 나간 것이다. 나는 이 사업에 주장자가 되어 보는 일이 여러 가지다. 물건 사는 것 돈 받는 것 문서 하는 것 분주한 때에는 상 심부름을 하여 가면서 매니저 노릇까지 하니 시간이 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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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편지가 왔다. 뜯어보니 한 일삭 후에는 상해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다고 약혼한 이살로매 양이 편지를 하였다. 나는 반갑고도 기뻤다. 이 편지를 유홍도씨를 보라고 주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오래지 않아서 상항으로 나가 이살로매 양을 만나야 되겠는데 이 빚을 단박 지고 간신이 지탱하여 가는 찬관 돈을 가지고 노비를 할 수가 없다. 나는 부득이 린콘에 계신 안재창씨를 찾아가서 一百元 하나를 취하여 주어야 상항에 나가서 약혼한 여자를 만나 데리고 오겠다고 한즉 두말 않고 一百元을 준다. 이 돈을 가지고 상항으로 나와서 윤혁씨 여관에서 유숙하면서 아무 날 아무 배에 이살로매 양이 실려서 상항에 도착한다 하였기로 이 날을 고대 고대하여 기다려서 이날 아침에 상항 부두에 이대위 목사와 같이 나가 기다리는 중 큰 배 한 척이 선창에 들어서니 선객들이 와스스하니 다 하륙하는데 상해로 오는 한인 오인이 내리는데 나와 약혼한 여자는 없다.
【원문】방사겸 평생일기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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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0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