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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사겸 평생일기 ◈
◇ 방사겸 평생일기 (제7권) ◇
해설   목차 (총 : 7권)   서문     이전 7권 ▶마지막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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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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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유신덕 여사 일하는 시장통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갔다. 유여사는 나에게서 무슨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왔나 하는 소망을 가지고 나를 맞는다. 지금 저는 외무에 가서 여행권을 얻기로 임장관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왔으니 오늘 오후 한 시 좀 같이 가서 여행권 수속을 하자고 하니 이 유부인께서 매우 반가워하시기 한량없다. 같이 나가 찬관에 가서 점심을 사 먹고 외무로 들어가서 임장관을 다시 만나서 이 부인이 정덕근씨 부인이라고 소리하고 여행권에 대한 말을 하니 자기 비서한테 벌써 말하였으니 비서실로 가라고 하여 우리는 고맙다고 말씀하고 비서실로 와서 유신덕 여사의 도미할 여행권 말을 하니 비서가 우리를 데리고 외무차장의 사무소로 소개한다. 차장의 비서가 여행권을 만들려고 여러 가지 문답을 한 후에는 명토 범가항에 와서 찾아가라고 하여 우리는 나왔었다. 이튿날은 내가 다른 일 때문에 같이 못가고 유부인 혼자 가서 여권을 얻어 가지고 왔다. 우리 정부에서 유신덕 부인께 할 책임은 다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큰 고지 하나를 더 넘어가야 비로소 미국가는 도정에 오를 수 있는 서울 있는 미국대사의 비자 입국허가를 얻어야 도미할 것이다. 그러면 유신덕 여사를 위하여 내가 도와드릴 것은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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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대사에게 비자를 얻어야 되겠는 고로 조카 방창덕을 시켜서 유부인을 모시고 가서 비자 얻는 일을 도와주게 하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올 기한이 되어서 이 유신덕 여사의 일을 더 봐주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게 된다. 떠나기 전에 몇가지 일을 더 봐줄 것은 미국서 조종억씨의 부탁이다. 이 분의 부탁은 본국에 있는 자기 아들을 체신부에 일을 하나 얻어주고 오라 하였기로 나는 체신장관 댁에서 유하고 있는 고로 체신장관 장기영씨에게 말하여 이 분에게 일을 수월하게 열어 주었으며 또 미국 있는 남정은씨 부탁대로 자기 손자를 찾아보고 지금 하는 사업이 변변치 않으면 잘 되도록 가르쳐 주고 나오라고 하였기로 이 분의 손자를 찾아가 보니 자동차에 관한 여러가지를 놓고 파는데 이런 사업이 우리나라에 적당한 사업이기로 나는 별로 가르칠 것이 없기에 좋은 사업이니 계속 발전시키라는 권면 몇 마디 하여 주고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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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유명한 상업가요 자본가인 박흥식씨를 나는 이왕부터 말은 많이 들었을지라도 만나볼 기회는 없었다. 내가 이번 본국 가서 있는 동안에 상류계급의 인사들을 자연히 상종하게 되는 동시에 지용은씨를 방창덕의 인도로 상종하게 된 것은 이 지용은씨는 평양 숭실대학에 교장으로 계실 때에 방창덕이가 이 분한테 훈도를 받고 있었던 관계로 피차 사제지의 분이었던 고로 자주 상종이 있었고 지금 지용은씨는 박흥식씨의 고문으로 계시게 되었는데 나는 방창덕과 같이 화신상회를 수차 구경하게 될 때에 이 분이 나를 박흥식씨한테 소개를 시켜 주어서 서로 알게 되었다. 나를 이 분에게 소개하여 준 지용은씨는 미국의 유명한 서북대학을 마치신 고로 영어를 잘 하시고 한문도 잘 하시는 동서양 학식이 풍부하신 분이요 사람된 자격이 매우 자서하고 천성이 매우 정다워서 한번 상종하여 보면 경외하는 이 분을 자연히 가지게 되는도다. 이 분이 나를 박흥식씨한테 내 소개하여 처음으로 면회하게 되었는데 저를 위하여 맛있는 과자와 커피를 아주 정다히 대접한다. 나는 이 유명한 상업가 박흥식씨와 상업상에 관한 담화를 하여 보았는데 동서양 상업상 물게가 고상한 분으로 나는 존경하게 되는 동시에 이 분도 나를 상업상의 형편을 좀 아는 줄로 짐작하시고 한·미간에 물화 통상할 것을 묻는다. 나는 우리의 물화 어떤 것은 미국으로 가져가면 맞지 않고 어떤 미국 물화가 우리나라에 가져왔으면 상당한 이익을 낼 수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이와 같이 이 분을 심방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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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일 후에 박흥식씨가 나를 다시 한번 만나자고 지용은씨가 자동차를 가져 오셨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지용은씨의 자동차를 타고 화신상회로 갔다. 첫번 이곳을 심방왔을 때에는 화신상회가 얼마나 큰 지 몰랐었지마는 이번에는 지용은씨가 나를 데리고 화신상회 오, 륙층을 다 구경시키는데 미국서 보던 디파트먼트 스토어와 같이 차려놓았는데 별로이 없는 물건이 없고 층층이 온갖 물건이 즐비하게 차려놓고 사람이 꽤 많이 들어오고 나간다. 한편에는 음식 파는 데를 차려놓고 음식을 파는데 양찬도 있고 한찬도 있다. 박흥식씨는 나를 이 식당에서 대접하는데 음식이 다 맛나고 선명하게 장만하였다. 우리는 음식을 다 필하고 삼층에 차려놓은 영화 연극을 한참 구경하고는 박흥식씨 사무실로 와서 앉아서 한·미간에 상업을 통상할 의논을 하는 동시에 화신상회 각 부분에 몇 여자와 서기와 고문관 되는 분들 十여 인을 불러다놓고 나를 소개하는데 이 十여 인 가운데 미국대학 출신과 일본대학 출신이 여러분이다. 이 분들을 모아놓고 자기회사에서 제조하여 파는 물건들을 갖다놓고 나한테 이러한 물건들을 미국에 가져갔으면 소용이 되겠으며 또 어떤 물건들이 미국 시장에 가게 되면 값은 얼마나 받게 될 것을 나한테 묻는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내가 방물 군자가 아닌 이상에 이 분이 지금 묻는 여러가지 물건의 값을 정확히 다 대답하지 못하였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상업가 집에서 자라나서 실제 시염도 많이 지내보고 미국에 와서 미국 사람들의 온갖 하는 상업도 친히 관찰하였고 또 내가 친히 여러가지 사업을 하여 보았던 관계로 다 근사하게 말하였다고 스스로 생각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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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조카 방창덕이 찾아와서 박흥식씨께서 나를 위하여 큰 만찬을 대접하기로 하였다고 명일 저녁에 가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연회에 가기로 허락하였다. 이튿날 박흥식씨께서 하인과 자동차를 나 있는데 보내었다. 방창덕은 나와 같이 가려고 왔었다가 같이 갔다. 박흥식씨 댁은 반양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잘 지은 집인데 열 칸은 되어 보이고 방방이 차려놓은 것이 서양식인데 화려찬란하게 응접실 식당이 다 미국의 밀리니어의 집에서 못할 것이 없다. 주인공은 우리를 기다리다가 들어가니 응접실로 인도하여 서양식의 물큰하는 교자에 앉히고 우리나라 궐련을 권하기로 한 대 피우면서 담화를 하는 동시에 화신상회 각 부분에서 일하는 사무원 가운데 부사장과 고문으로 계신 지용은씨와 또 박흥식씨 동서되는 金氏와 방창덕과 체신부장관 장기영씨와 주인당과 제가 참여한 연회였으나 그 진진한 재미는 대중이 모인 어떤 큰 연회보다 나았었다. 만찬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약주와 서양 위스키와 맥주가 있어 서로 부어 권한다. 이 연회는 나를 위한 연회이기 때문에 주인공이 술과 음식을 나에게만 좀 권한다. 주안을 이같이 나누기 시작할 때에 주인공이 내당으로 들어가서 부인을 모시고 나와서 나에게만 좀 소개를 시키고 장장관에게도 소개를 시킨 후에 부인께서 맥주를 부어 나에게 먼저 준 후에 장장관으로부터 다른 분들에게도 준다. 우리도 한 잔 부어 부인에게 드리니 우리나라 예절에 의하여 사양하시고 받지 않는다. 장장관이 말씀하기를 부인께서 주시는 술을 우리가 사양하지 않고 받아마셨는데 우리가 부어 드리는 이 회사에 잔을 부인께서 받지 않는다면 섭섭한 감이 없지 않다고 하니 박부인께서 마지 못하여 잔을 받아 마시고 우리에게 또 부어서 권한다. 이 박흥식씨 부인은 일본서 음악을 전공하시고 수년 전에 박씨하고 혼인하여 사는데 연세는 삼십 가량인데 키가 날씬하고 동양 여자의 인물하고는 최상으로 잘난 부인이다. 비단으로 만든 한복을 입으시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우리를 접대하는 그 아름다운 태도는 우리 주위의 마음을 더욱이 기쁘게 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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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상당한 가정에 태어나서 온갖 맛있는 음식을 다 먹고 자랐지마는 오늘 이 연회 식탁에 차려놓은 음식 가운데 이왕에 보지 못한 음식이 많다. 고기로 만든 것이 십여 종류요 채소도 여러 가지가 있고 나중에 잣죽까지 들어온다. 잣죽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먹어는 못 보았다가 오늘 맛을 보니 고소하고도 감미가 있다. 우리는 두어 시간 동안 마시고 잘 먹으면서 담화도 하는 동안에 만찬을 필하고 응접실로 나와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장래에 한·미간에 상업을 경영할 문제도 담화를 하는 동안에 커피와 과자가 또 나와서 한 잔씩 받아 마시면서 설왕설래의 상업에 관한 문제로 피차의 유익될 말을 많이 하고 각각 산회하였다. 주인공께서는 나를 위하여 기념품으로 하나 주신다고 하며 자동차에다 넣어 놓아 주시고 잘가라 하신다. 우리는 각각 처소로 다 돌아왔다. 나는 박흥식씨가 기념으로 주신 그 물건이 무엇인가 하고 잘 봉한 것을 열어 보았다. 이것은 참 귀여운 기념품을 나에게 주셨다. 우리나라 식으로 만든 자그마한 궤짝인데 자기로 꽃단장을 화려 찬란하게 만든 것인데 미국 소용으로는 패물 담아두는 것이 되었고 또 다른 방면으로는 응접실에 한 치장품의 하나로 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마음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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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씨가 나에게 이와 같이 친절히 또 후대를 하는 것은 이 분이 나를 어찌 보았든지 한 상업가로 보시고 한·미간에 무역을 통상하여 보자는 생각을 가지시고 나를 이같이 위대하게 대접하시는 것이다. 하여간 나도 이 분을 한 상업가로 존경함을 마지 않는 동시에 우리 신정부에 상무장관 하나 되리라고 나는 혼자서 생각하게 된다. 이 분은 천연적으로 상업가로 나신 분이 되어 상업상에 관하지 않은 문제는 별로 취미 없이 아시고 보통 상업에 관한 말씀만 하시고 취미 있게 들으신다. 나 역시 상업에 관한 문제를 취미 있게 듣고 또 내가 말 하는 것을 이 분이 아시고 자기의 물건을 다량으로 줄 것이니 미국에 화신상회 지점을 내고 날더러 관할하라고 하여 나는 흔연히 허락하고 와서 우리 정부 상공부장관 윤보선씨를 찾아가서 박흥식씨의 물건을 다량으로 미국으로 갖다 팔아서 한국에 가급적 소용되는 미국 물건을 사 보내 보려고 하니 윤보선 상공부장관께서 좋은 경영이라고 찬성을 하면서 지금 우리 정부에서 L.C. 법률을 준행하여야 한국 물건을 내갈 수 있다고 하면서 L.C. 관계를 설명하여 준다. L.C. 법은 어떤 것이냐 하면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 나라에 물건을 누구나 외국으로 내다 팔려면 물건이 황금은행을 거쳐서 가는데 물건 찾는 지방에서 그곳 은행에 보증장이나 보증금을 가지고 가서야 찾는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의 신법률이 이러함으로 박흥식씨가 방사겸을 신용하여 물건을 준다 하더라도 나의 실력이 이 물건을 찾을 만하여 은행에 보증장이나 보증금을 회수할 수 없이는 본국 물화를 외국에 갖다 팔 수 없다 하기로 박흥식씨가 준다는 물건을 그만 두고 말았다. 내가 미국에서 여러 수십만 원을 보증할 실력도 없고 혹 있다 하더라도 본국서 나오는 물건을 선급 주고 찾기는 원치 않아서 그만 두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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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있는 동안에 김충학이라는 상업가를 만나게 되었다. 이 분은 어떤 이인고 하니 조카 방창덕과 동서간 되는 사람인데 지금 대구 석유회사에 사장으로 있는 이다. 큰 자본은 없으나 우리 나라 돈으로 사, 오백만 원은 가졌다 하는데 대구회사 외에 다른 상업을 겸하는데 한·미간에 무역을 하여 보라는 경영을 가졌으나 첫째는 미국 형편을 모르고 둘째는 미국에 상업을 같이할 만한 친구 없어서 상업을 착수치 못하고 있던 차에 나를 만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알고 한·미간에 무역을 하여 보자고 한다. 이 분은 경상북도 대구에 큰 석유회사에서 사장으로 있으니 대구 근경에 일을 잘 알게 되는 관계로 대구서 머지 않은 포항에 있는 포린 통조림회사가 해방 이후에 문을 닫아둔 것을 알고 이 통조림 회사를 얻어서 같이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해방 전에 일인의 소유이던 것을 지금은 이것을 적산이라 하여 정부에서 가지고 있으나 아직 비어 두고 있는 것을 알고 우리는 이것을 얻을 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김충학씨가 나더러 상공부에 들어가 이것만 얻어내면 나와 같이 하자고 하여 나는 상공부에 또 들어가서 윤보선 상공부장관을 만나보고 포항에 있는 통조림회사를 얻어 볼 말 하였다. 그러나 벌써 다른 사람이 이것을 얻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고 경상북도 국회의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 줄 알게 된 것은 경상북도 위원은 즉 임영신 여사인데 이 분은 무슨 모양으로든지 세력과 재경에 탐심이 많기로 유명하다고 내지에서 지목하는 분이니 내가 이런 분과 경쟁하여야 쓸 데 없다는 자신을 가지고 그만 두고 말았다. 오늘날 현 정부의 당국자들에 하는 모든 행동을 본다면 백성을 위하기보다 자신들만 위하여 척산 가운데 똑똑한 것들은 다 정부에서 일보는 사람 또 이 사람들의 친척들이 다 가졌다고 이외에 백성이 좀 가졌다 하는 것은 뇌물을 바치고 얻은 것들이다. 나는 우리 나라 형편이 이러한 것을 알고 무슨 상업상에 기회가 없을 줄 알기 때문에 다시 더 운동을 아니 하고 장장관 댁에서 누님의 댁으로 옮겨와서 누님과 같이 한 주일 동안을 같이 지내다 十一月 十五日에 김포 비행장에서 비행선을 타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때에 누님과 외조카 순영 순자 오누이와 친조카 방창덕 내외가 비행장까지 나와서 다시 만나보지 못하겠다고 슬피 우는 정형을 볼 때에 나도 슬픈 정서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七十五세나 되신 누님을 이 六十九세 된 내가 머나먼 본국에 다시 나와서 만나볼 것 같지 않은 연고로 나는 일층 더 비감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순간에 떠날 비행선을 안 탈 수 없는 사정이어서 서로 마지 못한 상별을 하고 떠나서 한 사시 가량에 일본 동경에 도착하여 한시 가량 지체하여 비행선은 다시 나라스미야 섬에 잠시 멎었다. 일나스라인쪼려지에 도착하여 온갖 검사를 다 치른 뒤에는 재한국에 있는 미국 대사한테 비자 입국증서는 이곳 이민국에서 거두어 워싱턴 사법부로 보낸다 하여 주었다. 이민조례 지가가 동양에서 들어오는 첫 미국 영지가 된 까닭에 이곳서 모든 이민조례를 오케이가 되면 미국 대륙을 아무 시험없이 입국하게 되어서 나도 상항까지 잘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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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항에 도착하여 한 사, 오일 묵으면서 여러 친구들을 심방하고 나성으로 왔다. 나성에 와서 동지회관 윗층에서 한 주일을 묵으면서 센트루이스에 있는 가족을 데려 나오려고 식구가 살 주택을 하나 사놓고 가려고 이곳 있는 동지 조종익씨와 집 여러 개를 돌아본 가운데 지금 있는 이 집을 장차 사기로 작정하고 센트루이스 집으로 화차를 타고 가서 아침 여섯시 가량에 집에를 들어서니 어른 아이들이 다 죽었던 아버지 남편이 살아오는 듯이 반가워한다. 나도 반가운 중에 오랫동안 심중에 두고 경영하던 본국 심방을 이같이 무사히 마치고 본가로 회경하여 친권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하다고 안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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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센트루이스 집을 팔아야 가주로 나가 살 경영인데 이 일이 적은 일이 아니고 일 가운데 가장 어수선하고도 큰 일이라고 안 할 수 없다. 우리의 집을 사겠다는 사람은 둘인데 다 동네에 사는 사람인 대한사람 약국을 하는 사람으로 우리 집을 아주 헐가로 살 경영을 가지고 우리가 달라는 八千五百元에 절반도 안 주고 사려고 하는데 우리집 맞은편에 사는 아칸사스서 온 여인이 우리집을 다른 사람한테 팔지 말고 자기한테 팔라고 여러 차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고 있었는데 하루는 거관이 와서 아칸사스 여인이 정말 우리 집을 원하니 얼마를 꼭 받겠나 묻기로 八千五百元을 받아야 된다 하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고 저한테 팔라고 하니 집은 꼭 팔게 된 모양이므로 큰 딸 친숙이한테 편지하여 통기한 것은 만일 집 거관이 우리집 매매에 사인을 하여 보내라고 하면 즉시 하여 보내라고 부탁을 하고는 우리집 거관 비어런을 교섭하여 현금으로 다 찾게 하였다. 집 파는 사건은 이만큼 만들어놓고는 나는 二月 十五日께 가주로 나와 지낼 주택을 하나 사려고 들른 차에 나성 동지총회에서 二月 二十日 화부 우리 대사관에서 열리는 미·포 한인대표대회에 나를 북미시보 대표로 참석하라는 대표자 위임장을 보내었다. 그러나 나는 가주로 이사할 일에 총총하여 이 북미시보 대표를 사양하는 공함을 나성 동지총회로 즉시 하였는데 총회에서 다른 사람을 택할 수 없으니 이 대회에 북미 시민대표로 참석하여 달라는 공함이 재차 왔기로 나는 다시 사양할 수 없사와 부득이 二月 十七日에 비행선을 타고 화부에 도착하여 우리 대사관을 찾아가니 장면 대사가 나를 맞는다. 벌써 하와이 총영사, 상항 영사, 이우욱 영사, 동지총회 대표, 뉴욕 한인교회 대표, 학생회 대표, 북미시보 대표 나 하여 수십여 명이 모이었는데 이 이번 이 대회가 화부 우리 대사관에서 열리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 한다면 다른 것이 아니고 미·포 동포사회에서 어떤 사회는 남선정부를 봉대하는 반면에 어떤 사회는 남선정부가 반쪽 정부라고 지지하지만 않을 뿐 외파 반대를 하게 되는 언론 미·포사회 기관지 신한민보 국민보 독립신문 이 삼종 신문은 남선정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기 위하여 남선정부에 정책을 반대하는 기사가 연속 불절하여 그들 신문에 기재되는 동시에 태평양주보, 북미시보, 공개편지 이 삼종 신문은 남선정부를 봉대하니 자연 이박사의 정견과 정책 이를 타고 이 삼종 신문에 기재되니 자연히 미·포 동포사회에 출판계 언론이 충돌된다. 이박사께서 이러한 형편을 아시고 미·포 언론기관을 통일하여 보자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미·포 한인 가운데 남선정부 반역을 선동하는 분자들을 취금시켜 보자는 것이요 또 우리 독립운동 당시에 일어났던 한·미협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이다. 이상 삼대 목적을 가지고 이번 대회를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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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대회가 이상 三大문제를 가지고 모인다고 하는데 대하여 이 세 가지 문제가 다 미·포 한인 형편에서 보면 한 가지도 결정할 것이 없다고 이 회에 대표자로 떠나기 전에 나성 동지총회에 편지한 것이 불행히 맞았다. 내가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한 가지도 이 대회에서 통과될 것 없다 한 것은 여좌하다. (一) 미·포 언론기관을 통일한다는 것은 출판자유 언론자유가 있는 미국서 발행하는 신한민보 국민보 독립보 이 세 가지 신문의 언론이 아무리 우리 정부를 반대하더라도 이 신문들을 우리 정부 대통령이나 재미 대사의 세력 범위로서는 반대하는 것을 막는 수도 없고 돕지 않는다고 정간시킬 수도 없으니 이런 문제가 시세형편에 불필요하다는 것이요. 또 둘째 문제 미국 법률을 복종하고 미국 보호 밑에서 사는 한인이 대한 남선정부를 백방으로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남선정부에 세력이 나의 교포 이런 한인을 반대 안 하게 할 수도 없고 잡아다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으니 반동분자들을 취금시킨다는 말도 미·포 우리의 형편에 가당치 않은 말이요. 또 셋째 문제 한미협회 부흥도 재미한인 형편에 불합한 것은 본시 한미협회가 조직되기는 화부에 구미위원부가 설립된 수년 후에 이박사의 친구 스태거스 윌리엄 알니버 박사며 모인사들이 한미협회를 조직한 것 이박사 독립운동에 선전기관으로 우리 운동에 많이 조력하던 기관인데 이 기관에 경비가 매월 평균이 一千五百元으로 二千元씩 예산이 있어야 되는데 이 경비는 九十 퍼센트가 미인사회에 특연으로 지탱하여 오다가 一千九百四十五年에 대한이 해방된 후에는 이 한미협회에서 특별히 할 일 없고 보니 한미협회에 재정으로 돕던 미인사회나 이 기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도 자연히 마음이 식어져서 유명무실의 상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한미협회 창립자들은 이 기관을 유지하여 가려고 한인 서기 한 사람을 두고 이 한미협회 명사라도 유지하여 가려고 김세선을 서기로 두었는데 이 서기의 월급이 매월 二百元씩 주던 것도 지금은 지출할 수 없이 된 이 한미협회를 다시 부흥시키라는 것이 이박사의 정책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미협회 부흥시킬 필요가 없다고 나는 말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 기관을 부흥시키자면 매월 수천 원 경비가 있어야 되겠는데 지금은 미인들 가운데서 우리나라가 독립정부가 수립되었으니 돈을 내어 이 기관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게 사상이 변하였을 것이니 미인의 보조금이 많이 안 들어올 것이요 그러면 미·포 한인에게서 청연하여 이 기관을 유지하여 가자고 한다면 재미한인의 형편은 과거 수십 년 동안 독립운동에 여러가지 모양으로 시달린 동포들이 이 유명무실하게 된 한미협회 부흥시키자는데 나부터 돈을 내기 원치 않으니 한미협회 부흥문제도 이 대회에서 통과될 것이 없으니 이박사께서 이번 화부 대사관에 대회를 소집한 것은 아무 결실이 없고 다만 수천 원 경비만 들었다. 나흘 기간의 경비만 하여도 二百五十元 쓰고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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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싱턴 대회를 마치고 뉴욕으로 전왕하여 자식들을 만나보고 한 주일 묵어서 뉴욕서 공기선을 타고 나성으로 직행하여 지금 있는 주택을 一萬六千五百元 사 가지고 페인트칠 하고 대강 고치고 보니 一萬八千元이 들어갔다. 이 집을 一千九百五十年 三月 초상에 사 가지고 나 혼자서 이 집을 건사하고 한 달 동안을 있노라니 전체 식구가 四月 초상에 다 나왔다. 나는 그간 센트루이스 집을 팔고 이곳에 있을 새 주택을 장만하는 큰 일을 다 마치고 나성에 안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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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성에 와서 수삭 유하며 있을 주택을 장만하는 동안에 여러 친구와 또 우리 동지 회원들에게 너무도 후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것 잊을 수 없으므로 이러한 이곳 여러 동포의 사랑과 관대한 대접을 만분에 일이라도 갚기 위하여 새로 산 주택에 피연을 배설하고 동지회원 일동과 국민회 친구 또 독립신문사 친구였던 단체 사람을 물론하고 친분이 있는 친구는 다 청하여 한 九十명 가량 동포 동지가 모이었는데 새로 산 이 집에 응접실과 식당과 독서실이 ㄱ자 모양으로 연접하게 생겨서 수백 명이 용람하게 되어서 근 九十명 손님을 능히 잘 영접하게 되었고 음식은 턱기와 벡팀과 온갖 채소와 비스킷을 장만하여 가지고 카페테리어 스타일로 서브를 하는 동시에 맥주와 소다와 펀치를 각각 마음대로 마시고 밤이 깊도록 주객간에 흥치있게 노는 동시에 한국 노래와 춤도 추고 온갖 여흥에 들어가서 가장 특출한 것은 안경오씨 부인의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에 육자배기와 조종익 동지의 굿거리장단은 아직도 우리 귀에 은은히 들리는 듯하다.
 
 
 

1. 영사 소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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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千九百五十年 六月 초상에 나성에 주재한 총영사 소환시킨다는 문제가 동지회원 가운데서 일어나 가지고 동지회원 가운데 분열 분장이 일어났다. 이것은 우리 정부와 동지회에 불행한 사건이라고 안 할 수 없이 되었다. 나도 동지회원이요 누구만 못하지 않게 동지회에 온갖 의무 실행을 하는 회원이므로 동지회에서 나 모르게 모든 범사를 처리하는 수 없는 고로 총회임원 허성 송현영 김형식 송철 정귀만 안상학 이 분들이 나한테 수차 찾아와서 영사 소환시킬 운동을 같이 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반대한 것은 동지회는 일개 민단이요 이곳 영사는 이곳 전체 한인을 위하여 우리 정부에서 파송한 영사를 우리 동지회원만으로서 소환시킨다는 것은 이 지방 동포에게 시비만 살 뿐이라 우리 동지회원을 분열분장만 달아놓는 것이니 이곳 영사 소환시키는 문제는 동지회에서 주동할 바 아니라고 나는 처음부터 반대하였다. 그러나 동지총회 임원 몇 사람은 기어이 영사 소환시킨다는 일을 성공하여 보려고 사실이 아닌 이곳 영사가 행정상 잘못하는 것이 많다고 50% 이상 거짓말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에게서 아직 회답은 아니 왔으므로 이 사람들은 발광증이 생겨서 명독기를 만들어 가지고 순량한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영사 소환운동에 성명을 적으라고 하니 아무 생각 없고 남의 정신으로 사는 동지들이 성명을 주었다. 이 분들이 수십 명 동지의 성명을 받은 책을 가지고 나한테도 찾아와서 성명을 적으라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남의 지위를 손상시키는 운동에 나의 성명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하여 보내었다. 지금 허성씨 몇몇 분이 동지들의 성명을 많이 적은 책자를 대통령께 보내어 이같이 영사 소환시켜 달라는 동지가 많다는 것을 나타내어 민영사를 기어이 소환시키자는 것이 이 사람들의 유일한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든지 남의 지위나 명예를 손상시키는 운동에는 참여치 않는 결심을 가진 것을 이 사람들이 모르고 찾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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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부터 영사 소환운동에 불간섭하기 위하여 동지회관에도 자주 내왕을 안 하고 내 집에 앉아서 찾아오는 친구만 접대하기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시비를 피하려고 한 것이었다. 나는 이와 같이 주의를 정하고 아무 데도 출입을 않고 있는 때에 동지회 허성 송현영 김형식 송철 이 사람들이 영사 소환시키는 운동을 나와 같이 반대하던 동지회원 수십 명이 동지회에서 나와 민영사가 불공정하게 소환을 당하게 되는 것을 도와보려고 온갖 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은 이러하다. 안경오씨 내외분 권호택씨 내외분 조승렬씨 내외분 김순권씨 부인 유순지 최덕규 김종림씨 부인 조종익씨 부인 이순기(?-편집자주)씨 부인 이외에도 중가주 동지회원 여러분이 민영사 소환을 당하는 것을 반대하고 민영사를 동정하는 분이 한 십여 명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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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형편이 되어 가지고 영사 보호 하자는 이 분들이 나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다 영사 소환시키자는 운동을 하는 허성 등의 행동을 막아 보자는 계교로 나를 자주 찾아와서 민영사를 소환당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안경오씨 내외분과 전진영 부인과 또 조승렬씨 이분들이 자주 찾아와 민영사 소환사건으로 대통령께 편지와 전보 전화를 하여 달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분들의 청구를 아주 다 거절한 것은 내가 동지회원으로서 동지총회 임원들의 소환운동을 반대하고 나의 성명을 그들한테 허락지 않고는 이제 영사 보호하는 분들을 도와준다면 나 역시 이 시비에 간섭이 되어 동지회에 큰 영향이 미칠까 하고 나는 이런저런 다 간섭을 안 하고 가만히 중립으로 있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六月 초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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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부에 주재하였던 장면대사가 월전에 이박사의 부탁을 받아 본국 가서 있는 동안에 이곳 동지회 사람들이 민영사 소환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이박사께 여러번 가서 이박사를 성가시게 하는 것은 물론 장대사도 잘 알 것이요. 겸하여 이곳 영사소환 문제를 어떻게 조처하라는 대통령의 칙령을 가지고 오셨을 것도 사실이다. 장대사는 六月 초에 나성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동지회원 일동은 장대사를 환영하기 위하여 사, 오십 명 동지가 비행장에 나가 장대사를 맞아가지고 엠비스도 호텔에 사처를 정하여 드리고 당일 저녁에 동지회에서 환영만찬을 엠비스도 호텔 대식당에 배설하고 우리 남녀 동지 한 五十여 명이 회집하여 대성황리에서 장대사를 환영하는 때에 빈직이 서로 즐기는 감상을 가지고 만찬을 같이 나누는 때에 총회장 허성씨가 기립하여 청중에 선언하기를 총회 임원들이 장대사와 의논할 일이 있으니 여러분은 다 나가라 하니 아직 만찬을 다 필하지 않은 오십여 명 청중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다 왔으니 일어나서 나간다. 그러나 나는 좀 불리한 감이 생겨서 나는 나가라는 총회장의 명령을 복종치 않고 일어서서 오늘 여기 모인 남녀 동포는 다 동지회원인데 총회 임원이 장 대사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우리를 다 나가라 하니 좀 모호합니다. 만일 동지회가 일반 동지회원의 동지회라고 할 것 같다면 지금 동지총회 임원들이 장대사와 의논하는 것을 우리가 듣는 데서는 왜 못하고 우리를 다 나가라고 하니 이 동지회가 일반 동지회원의 동지회가 아니고 몇몇 총회 임원의 동지회라고 우리는 생각을 안 가질 수 없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장대사를 환영하는 이 좌석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더 말하지 않고 저도 나가고 맙니다. 듣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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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총회 임원들이 장대사와 무슨 의논을 하였는지 우리는 가서 알 수 없지마는 민영사 소환시킬 문제로 민영사를 헐어서 참소하였을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이튿날은 민영사가 장대사를 환영하기 위하여 만찬을 베푸시고 장대사를 청한 환영회에 저도 와서 같이 참석하여 달라고 민부인께서 우리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못가겠다고 말씀을 하였다. 이유는 지금 영사 소환문제로 우리 동지회가 분열이 되어 동지간에 시비가 많은 오늘에 제가 영사 댁에 내왕을 한다면 저 사람들이 나도 영사 편이라고 공연히 시비하겠으니 못간다고 하니 민부인께서도 저의 사정을 아시고 더 권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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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후 六時에 다시 민부인께서 전화로 우리 내외를 오라고 청하시기로 아까 말씀한 것과 같이 동지회 사람들에게 시비를 돋우는 고로 갈 수 없다고 말씀을 하니 민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전화로 다시 오시라고 하는 것은 민영사께서 청하는 것이 아니고 장대사께서 한번 만나 보시겠다고 청하는 것이오니 오셔야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나는 간다고 허락을 하였다. 내가 민영사 연회에 가기로 부득이 허락한 것은 내가 일개 평민으로서 우리 정부에 고관대직에 지위에 있는 장대사께서 저를 보자고 오라는 것을 거절하고 안 간다면 내가 너무 거만한 행동인 듯하여 간다고 허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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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지회원으로 수십 년 동지회에 온갖 의무를 준행하여 온 고로 동지회원들께 귀염과 사랑을 무한이 받던 내가 불행히 이곳 영사소환 문제가 일어나 가지고 이 분들한테 좋지 못한 감정을 사게 되는 것을 나는 절대로 원치 않으므로 영사 사건에 아무 간섭을 안 하고 중립으로 꼭 있어 가지고 동지회에 분열분장을 막으려 하던 것이 나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내가 굳세게 나의 주장을 준행치 못하고 민영사 댁에서 장대사를 위한 연회에 참석하게 된 것은 나의 주장이 깨지기 시작이다. 오늘 민영사 댁 연회에 청함을 받아 우리 내외는 영사의 자동차를 타고 갔었다. 벌써 수십 명 접빈이 왔는데 이 분들은 다 영사 소환시킨다는 것을 반대하고 영사 댁에 자주 내왕하는 분들인데 영사 소환시킨다는 분들의 미움을 받는 분들이 다 연고로 내가 오늘 여기 참석하게 된 것은 영사 소환시킨다는 분들의 미움을 받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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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나는 오늘 이 연회에 참석하여 여러분과 장대사도 반가이 다 만나게 되었다. 나는 민영사를 이왕에 두 번 만나본 일이 있었으나 민부인과 그 외 가족은 이왕에 만나보지 못하였다. 오늘이 처음 만나는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민영사도 이왕 두어 번 면회가 있었으나 이 분이 나를 기억하는지 알 수 없으니 나와 민영사 사이에 친절치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여간 오늘 여기 와서 이같이 여러분을 만나서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담화를 하게 된 것만은 반가운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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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장대사께서 저를 민영사 댁으로 오라고 청하신 것은 다름 아니라 이곳 영사 소환문제에 대하여 허성 편에 말만 듣고 또 영사 보호편에 말만 듣고는 어느 편의 말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는 중 방사겸은 허성 편도 아니요 영사 보호편도 아니고 중립으로 있다는 말을 듣고 나를 오라고 청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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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사께서 저를 조용히 보자 하기로 저는 찾아갔다. 장대사께서 제게 이곳 영사소환 운동에 자초지종을 말하라 하기로 나는 나 아는 데까지 말씀을 하여 드리는 가운데 영사소환 운동은 오직 동지회 소수 분자가 소환시켜야 된다고 하는 반면에 동지회 대중은 이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곳 전체 동포를 위하여 나온 영사를 오직 동지회 소수 분자가 원치 않으니 소환시켜 달라는 청원을 대통령이나 장대사께서 들어준다면 이곳 영사소환 운동이 이번만 아니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터이니 우리 정부에서 이 일 신중히 처리하기를 저는 바란다 하였다. 그러나 장대사께서는 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은 알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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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사께서 이곳에 한 五日 동안 유하는 동안 이곳 동지회원 가운데 스마트한 분 가운데 장대사한테 온갖 덤도 준 분이 있다고 하는 가운데 어떤 분은 내지에 있는 자기 동생을 이곳 영사를 시켜 보려고 장대사에게 온갖 운동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여간 장대사는 이곳 영사를 대통령의 명령이라 소환시켜야 된다고 작정이 되어 가지고 민영사에게 사면 청원서를 자기에게 주고 六月 三十日 前으로 귀국하라고 명령하고는 화부로 가고 말았다. 장대사가 이곳 와서 영사소환 문제를 이만큼 하여 놓고 화부로 간 다음에는 영사소환 운동을 하던 그 팀들은 자기들의 세력이 굉장하여 영사를 소환시킨다는 자신을 가지고 현직 대통령한테 편지와 전보를 한 비용이 七百여 元이라 한다.
 

 
 

2. 대통령께 편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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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이같이 되는 때에 영사 보호하는 이 분들이 분한 기분이 일어나서 기어이 이곳 영사가 소환을 당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운동을 하여 보려고 이 분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나를 찾아오는 이 분들의 요구하는 바는 대통령께 이곳 영사를 소환시키지 말고 누완하도록 편지 한 장을 하여 달라는 것이다. 나는 이 부탁에 대하여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내가 이 분들의 부탁으로 대통령께 편지를 하게 되면 나 역시 영사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 허성 그 팀에 시비를 받게 되는 때에 동지회에도 내왕을 안 하게 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스스로 생각할 것은 남의 지위를 빼앗거나 파괴시키는 분들의 미움 받는 것은 나의 양심이 찔릴 것이 없으나 억울하게 지위를 빼앗기게 되는 영사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우리 대통령에게 편지한 전문은 여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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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統領 李承晚 閣下 第二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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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외하시는 선생님 지금 공산 폭도가 발동한 남북전쟁으로 인하여 얼마나 근심 걱정으로 계시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다 상상하고 있는 바이오나 오직 하나님께 비옵는 바는 우리의 중책을 맡으신 선생님의 신혼이 건강하시와 남북전쟁이 속히 결속을 짓고 남북통일이 선생님 지도하에서 원만히 성공되기를 전능하신 상제님께 비옵나이다. 취고사는 다름 아니오라 이곳 총영사 소환문제가 일어나 가지고 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많이 허비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마는 이 사건이 너무도 불공정하게 한편 말만 듣고 아무 실책이 없는 이곳 총영사를 소환하라고 명령을 내리신 이것이 우리 정부에서 한편 보고만 잘못 통촉하시고 충직한 민영사를 불러가고 그 대신에 아무리 상당한 인격자를 파송하신다 하더라도 이 야심가들 때문에 또 오래 견디지 못하고 이런 풍파가 또 일어날까 염려 안 할 수 없는 것은 민영사가 이곳에 처음 오실 때에는 허성씨가 부영사나 서기관 자리를 민영사한테 얻어 볼까 하고 매일 영사관에 와서 온갖 공을 다 들였으되 자기의 욕망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런 비루하고 누추한 이유로 이 사람들이 지금은 총영사를 원치 않으니 소환시켜 달라는 참소를 우리 정부에 한 허성 등의 청원을 믿고 아무 실책이 없는 민영사를 이 달 三十日 前으로 소환해야 된다고 명령하신 것은 너무나 허성 편으로 기울어져서 이곳에 양심을 가지고 지성으로 우리 정부를 봉대하는 동지 대중은 낙심 낙망하는 중에서 영사 보호하는 대중이 저를 뽑아 선생님께 최후로 상서를 하라는 부탁을 가지고 이곳 영사소환 문제가 일어난 그 원인을 대강 말씀하게 되는 동시에 정부에서 이곳 총영사를 파송하실 때에 오직 동지회 몇 사람만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이곳 전체 동포를 위하여 왔다 할 것 같았으면 어찌 허성파에서만 영사가 불만하니 소환시켜 달라는 것만 들어주시고 우리들의 충성된 청원은 안 믿어주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낙심 낙망될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이곳 영사문제를 솔직하게 바로 말씀하자면 한편 청원서는 정부에서 파송한 대표자의 지위를 빼앗거나 착탈하려는 거짓 청원이요 이 반면에서 올린 청원은 정부에서 파송한 대표를 보호하기 위한 청원을 안 들어주는 것은 흑백을 분별치 못하는 정책이라고 안 할 수 없사오니 이곳 총영사 소환문제를 우리 정부에서 공정이 처판하시기를 천만복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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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千九百五十年 六月 二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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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 보호 일동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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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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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統領 閣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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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뵈옵지 못한 선생님과 동 부인의 만수건강하시기를 우리 회의 동지는 쉬지 않고 하나님께 비옵는 우리들은 국사에 다사하신 선생님에게 불만 불평을 주는 이런 글은 절대로 써서 올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온데 수삭 전부터 이곳 동지회 가운데서 총영사 소환시킨다는 불량한 사건이 일어나 가지고 동지간에 분쟁이 일어나서 동지회 전체에 큰 영향이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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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영사 소환시켜야 된다는 문제가 일어난 원인을 이미 우리 중에 남녀 동지들이 각기 연명하여 전보와 편지를 선생님께 十日 前에 올리었으니 다시 더 장황히 말씀을 올리지 않고 다만 간단하게 말씀을 올리자 할 것 같았으면 영사소환 문제는 몇몇 분자의 야심에서 남의 지위를 앗아서 사복을 채우려는 행동에서 일어났었으므로 동지회 가운데 양심있고 공리공도를 주장하는 우리 동지들은 야심가들의 이 부정당한 행동을 자연히 반대하게 되는 그 이유는 우리 정부에서 파송한 대표자를 소소분자가 야심을 품고 이곳 영사를 축출시키려는 행동을 우리 정부에서 잘못 통촉하시고 들어주실까 하여 우리 중의 동지 다수는 이 사건을 공정히 바로 교정하여 주시기를 바라옵고 재차 이 편지를 써서 상달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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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총영사 사건에 동지회 가운데서 두 파로 분열된 것은 숨기지 못할 사실입니다. 오늘 이곳 영사소환 문제에 대하여 허성 파는 영사를 소환시켜 달라고 선생님께 여러 차 전보와 편지를 하였을 줄 믿는 영사 보호편 우리들도 이곳 총영사가 이곳 오신 후 아무 실책이 없고 가람한 분이니 소환시키지 마십사 하고 전보와 편지를 두번째 올리게 되오니 선생님께서 양편에 전보와 편지를 받으시고 어느 편이 옳고 그른지 처판하여 주시기를 좀 곤란할 줄 아는 우리들은 재삼 생각하여 가지고 최후로 이 편지를 올려서 공정한 판결이 내리기만 우리는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바로 비유하여 말씀하오면 한 부모가 자식 열을 두었는데 다섯 자식은 야심을 가지고 남의 생도와 지위를 파괴나 빼앗으려는 반면에 이런 행동을 불공정하게 생각하는 다른 다섯 자식은 이 야심을 가진 형제의 행동을 찬성치 않고 반대한다면 자연히 형제간에 불평이 서로 생겨 가지고 양편 자식들이 부모한테 누가 옳고 그른 것을 판결하여 달라는 것과 흡사하게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형편을 당면한 부모가 어떠한 자식이 옳고 그르다 하여 바른 훈계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남의 지위를 파괴나 빼앗으려는 자식이 온당치 못하다고 할 것은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불량한 자식을 도와서 남의 지위를 상실케 한다면 이 책임이 물론 부모에게 있다고 안 할 수 없는 동시에 공정을 주장하는 다른 자식들에게까지 불평을 준다고 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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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목적은 이곳 총영사가 소환되고 안 되는데 우리 개인에게 아무 이해가 없습니다. 영사 보호하는 우리 수십 명 동지들은 무슨 명예도 취치 않고 정부에 속한 일자리도 우리는 자격이 없어서 구하지 않고 다 충성된 마음으로 신국가 건설에 방해되는 일이나 국가 위신이 타락될 행동을 막는 것이 국민된 의무인 줄 우리는 알고 정부에서 파송된 총영사를 지금 우리가 보호하고 있는데 지금 허성 편에서는 영사가 오래지 않아서 쫓겨 간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 있는 우리들은 영사소환 문제를 우리 정부에서 어떻게 조처하시나 하도 우리에게는 소식이 없사와 이같이 상서하오니 영사문제를 어떻게 결정이 된 것을 한번 우리들에게 알게 하여 주시기를 복망. 지금 이곳 영사 보호하는 우리들의 생각하는 바는 이곳에 나온 대사나 영사를 소수 분자가 소환시켜 달라는 청원을 정부에서 받고 정부 대표자들을 소환시킨다면 영공사를 매월 갈아도 부족할 줄 믿습니다. 만일 외국에 파송하였던 영공사를 매월 갈아치면 우리 정부에 경제면으로도 국가 체면으로도 큰 수치요 손해라고 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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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엇을 다 안다고 선생님에게 이런 말씀을 다 드리리요마는 이곳 총영사 사건이 너무나 소수 분자의 야심적 행동이오니 공리와 공도를 주장하는 우리 동지들은 오늘에 일어난 허성 등의 운동을 막아서 후일에 일어날 이런 야심가들을 징계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정부에서 이리 보낸 영사를 보호하고 있사오니 선생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판결을 하신 것을 우리들에게 한번 알게 하여 주심을 천만 바라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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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千九百五十年 六月 二十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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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 총영사 보호 동지 일동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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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長官 林炳稷 閣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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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九月에 본국서 임장관을 만나보고 온 지도 어언간 벌써 근 십삭이 지나간 동안에 내외 정사에 얼마나 분투노력하신 것은 멀리 이곳에 있을지라도 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 은혜 중 소중한 귀체 건강하시오며 지난 총선거 시기에 많이 바쁘게 지내었을 줄 믿습니다. 이곳에 동지 方四兼은 그간 수년 전부터 경영하든가 주로 이거하려던 일은 수색권에 원만히 잘되어 지금 나성에 나와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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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우리 동포사회 중심지라 동포도 많고 오색가지 단체가 많아서 서로 모이기도 자주하고 재미있는 연회도 잦습니다. 저는 수년 동안에 우리 동지회에서 대환영 세번을 들었었는데 국회의장 신익희 선생을 각 단체 연합전선에서 환영하였고 그 모임에는 우리 회 군장교들을 동지회 마당에서 대성황에 환영을 하였습니다. 또 일주일 전에는 본국에 갔다 돌아오시는 장면대사를 비행장까지 마중 나가서 엠베스도 호텔로 사처를 정하여 드리고 주일 저녁에 만찬으로 환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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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양심을 가진 동지들은 우리 정부에서 파송하는 대표원들이 이곳 와서 우리를 심방하여 주실 때마다 우리는 무한한 감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과거 근 반세기 동안을 일본 통치 밑에서 부자유의 고통생활을 하던 것을 재상하게 되는 동시에 지금 우리의 자유가 다시 와서 우리 정부 대표가 이곳 와서 우리를 심방하여 주시는 기회에 우리는 이 분들을 환영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무한한 영광으로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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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이곳 동지회 형편과 총영사관에 당면한 정형을 바른 말로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오니 양해하여 처리하시옵소서. 멀리 계신 임장관께서 이곳 영사 소환시킨다는 허성 송현영 파에 전보와 편지도 벌써 여러번 받아보시고 허성 파의 음모에 내용을 대강이라도 짐작하셨을 것은 허성 송현영 김형식 송철 등이 처음 총영사가 이곳 오셨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총영사에게 온갖 척을 하면서 친절한 행동을 한 것은 허성은 부영사 혹 서기관을 얻어 볼까 하는 욕망을 가지고 운동하다 총영사가 자기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니 지금은 이들이 돌변하여 가지고 영사를 소환시켜야 된다는 운동을 동지회 가운데서 일으키어 가지고 동지회원 가운데 남의 정신으로 사는 회원들이 소경 말인 양 소리 듣고 또 찾아가는 것과 같이 이런 분들을 찾아가서 영사 소환시키자는 발기에 성명 적으라고 하니 이하 생각없고 남의 정신으로 사는 동지들은 서명한 그 발기를 아마 이박사께와 임장관한테 보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른바 한편 말만 듣고 송사한다면 잘못 판결이 되는 것과 같이 될까 하여 생각다 못하여 이 글을 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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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러한 불행을 당하고 있는 민영사는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때에 동지회원 가운데 양심있는 동지 다수가 일어나서 허성 등의 야심을 막으려 하니 우선 영사를 보호하게 되니 자연히 이 영사 보호하는 동지들을 원수같이 미워합니다. 이러한 형편을 잘 내다보는 방사겸은 허성씨의 요구하는 저의 서명을 또 영사 보호 편에서도 대통령한테 보낸 청원서에 저의 서명을 요구하는 것을 다 양편에 거절하고 중립으로 서서 동지회 분열될 것을 구하여 보자던 생각만 가지고 있었는데 장면 대사가 이곳 와서 영사소환 문제에 대하여 양편 말을 다 들으신 후에 영사 댁에서 장대사를 위하여 만찬을 베푸시고 영사께서 저도 다 참례하여 달라고 전화하신 것을 저는 갈 수 없다고 사양한 이유는 허성 등이 알면 방사겸도 영사 편이라고 시비도 하겠고 또 나의 중립태도가 깨어지면 동지회 분열도 구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영사 댁 만찬연회에 참내치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립태도를 가지고 있는 이 세 가지 좌우편에 시비를 피하게 되는 때에 장면 대사께서 이왕 화부에서 수차 안면이 있게 된 관계도 있고 또 이 영사 사건에 제가 중립으로 있는 줄 통촉하신 장대사께서 저를 만나보자고 영사 댁에 배설한 연회에 저를 오라고 청하신 것을 제가 거절할 수 없어서 그날 가서 장대사와 민영사 또 여러 남녀 동지들을 반가이 만나서 만찬을 나누고 왔는데 허성씨가 이 소문을 듣고 방사겸도 영사 편이라고 시비를 하고 다니면서 저를 동지회에서 아주 돌려놔야 한다고 야단이외다. 이렇게 되는 형편에서 저도 영사 보호하는 편에 서게 된 것은 허성 편은 남의 지위를 빼앗아 사복을 채우자는 편이니 나의 성명에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도와줄 수 없으나 그러나 영사 보호편은 원래든지 정당한 애국동지들이니 제가 이 야심가들한테 욕을 먹을지라도 정부에서 보낸 총영사와 또 영사를 지성으로 돕는 이중의 동지들을 안 도울 수 없어서 시비를 무릅쓰고 이 사건이 공정히 판결되어 이 앞에는 이런 불행한 행동이 없기를 바라고 우선 이 사건에 대한 자초지종을 대강 기록하여 임장관께 올리오니 아무 바라는 것도 없고 다만 없던 정부가 우리 민족 가운데 선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이 정부를 충성으로 봉대하는 동지들의 이상 충고를 한 마디도 거짓이 없고 오직 진실된 사실이오니 양해하여 보시고 이곳 총영사 소환문제를 지혜 있게 처판하시기를 천만 바라옵나이다. 너무 장황하여 이만 줄이고 그만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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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千九百五十年 六月 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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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회 방사겸 拜
 
50
大統領에게 전화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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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도 안녕하시온지요. 우리 회의 동포는 항상 선생님의 건강을 쉬지 않고 하나님에게 비옵나이다. 지금 장거리 전화를 선생님께 걸게 된 것은 이곳 영사 소환문제는 이곳 전체 한인의 의사가 아니옵고 야심을 가지고 남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음모에서 허성 등이 선생님에게 거짓 보고로 민영사를 소환시켜 달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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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형편에서 이곳 전체 동포를 위하여 파송한 총영사를 동지회 몇몇 분자가 원치 않는다는 그들의 청원서를 접수하시고 이곳 총영사를 六月 三十日 前으로 소환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선생님께서 잘못 통촉하셨다고 영사 보호하고 있는 우리들은 낙심낙망을 무한히 하는 중에서 최후로 전화로 이 사건을 공정히 처판하시라고 충고하옵나이다. 우리들은 정부에서 보낸 분들의 지위를 착탈 관직하려는 마음도 없고 오직 충성으로 우리 정부를 봉대하기 위하여 이 억울한 경위를 당한 영사를 보호하고 있는 우리들의 소원은 오직 이미 영사 소환 하라신 그 명령을 취소하시고 민영사를 이곳에 누안하여 있게 하여 주심을 천만바라나이다.
 
53
一千九百五十年 六月 二十四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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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 보호 동지 일동
【원문】방사겸 평생일기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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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0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