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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숙(玄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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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12
나혜석
1
현숙(玄淑)
 
2
반 년 만에 두 사람은 만났다.
 
3
남자가 여자에게 초대를 받았으나 원래부터 이러한 기회 오기를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동무들의 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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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면하고 보니 향기 있는 농후한 뺨, 진달래꽃 같은 입술, 마호가니 맛 같은 따뜻한 숨소리,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에게 더없는 흥분을 주었다.
 
5
확실히 반 년 전 여자는 아니었다. 어떠한 이성에게든지 기욕(嗜慾)을 소화할 수 있는 여자의 자태는 한껏 뻗치는 식지(食指)가 거리낌없이 신출(伸出)함을 기다리고 있는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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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지 그대의 태도는 재미가 없었어. A상회를 3일 만에 고만둔 것이라든지 카페에 여급이 된 것이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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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더 있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 내게 여급이 적당할 듯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나는 양화가 K선생 집 모델로 매일 통행하였어. K선생은 참 자모여. 선생의 일을 언제나 귀공에게 말하지. 선생은 늘 나를 불쾌하게 하면서 내가 아니면 아니될 일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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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자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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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저기 갖다놓은 홍차를 여자에게 주의(注意)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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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요사이 금전등록기가 되었어. 간단하고 효과 있는 명쾌한 것, 반응 100%는 어딘지,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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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까부는 듯하여 2, 3차 뜨거운 차를 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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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서 반 년 동안 떠난 사이에 퍽 적막했었지? 인제 고만 내게로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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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끔히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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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삼의 색이 희고 목덜미가 드묵하고 몸에 맞는 의복, 여자와 대면해 있는 남자는 어느 신문사 기자. 아직 아침 아홉 시 조조(早朝) 때, 남대문 스테이션 부근 작은 끽다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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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좋은 플랜을 가지고 왔어. 그렇지만 당신이 이전과 같이 무서운 질투를 가져서는 아니되어요. 벌써 시크가 되지 아니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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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어떨는지! 이번에는 당신이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니 무어나 상관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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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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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플랜이라는 것은 끽다점 양점(讓店)이었다. 장소는 종로 1정목, 그것을 인계하여 경영하고 싶으나 4백 원이라는 돈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1구(一口) 10원, 유지(有志:뜻있는 사람)는 10구 이상을 신청할 사, 그녀가 상의하려고 두 사람뿐의 적당한 밤을 기다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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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친했던 사람이 좋지 않소, 그래 몇 구나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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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6구, 모두 불경기라는 말들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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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몇 사람이나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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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큰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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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말이야, 그것이 신사 계약이에요. 누구나 다 자기 혼자만인 줄 알고 있는 것! 당신이야말로 이전부터 손되는 일은 없으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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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깔깔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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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신은 아까 나더러 레시스터 같은 생활을 한다고 했지? 그러니까 예하면 10구의 남자에게 대하여는 10구 정도, 20구의 남자에 대하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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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좋지 못해, 그렇게 서비스가 싫으면 최대 한도의 구수를 가질 것이지. 그러니 30구만 해. 돈은 2차도 좋아…… 어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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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을 누가 하는데, 좋은 패트런이 생겼대지? 패트런을 가지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28
“무어 그렇지도 않아. 부르조아 옹(翁)이 때때로 정자옥(丁子屋) 식당에 가서 점심이나 사줄 뿐이지.”
 
29
그는 역시 그 옹을 생각하였다. 그 옹에게 말하면 다소 뭉텅이 돈이 생길 듯하여. 여자는 이 플랜을 남자가 승인한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가지고 있던 여러 장 편지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30
“거기 러브 레터도 있나?”
 
31
남자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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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러브 레터도 많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야. 당신더러 답장을 써 달라고 싶어 그래. 요새 나는 순정한 젊은 청년들의 편지에 대하여 일행반구(一行半句)도 답이 써지지 않아. 그래 문구를 생각해서 잘 쓰려고 해도 안돼요. 네? 써주어요! 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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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거짓말을 아니했다. 과연 일행반구도 써지지 않아 금일까지 답장을 질질 끌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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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동안에 남자는 편지를 일독하였다. 그 여자와 동숙(同宿)해 있는 남자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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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벌써 오랫동안 참아 왔으나 참을래야 참을 수 없소. 마음에 찬 편지도 금야(今夜) 정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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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의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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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포켓에서 만년필을 뺐다. 동시에 여자는 속히 핸드백에서 레터 페이퍼를 내놓고 곧 쓰도록 현재 자기 여관 생활을 이야기하였다. 청년은 아랫방에 있고 여자는 그 옆방, 그리고 그 옆방에는 노시인이 있었다. 청년은 2, 3개월 전에 지방에서 상경하여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 출품 준비를 하는 중이니 아무쪼록 입선되기를 바란다고 써 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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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레터 페이퍼의 꺾인 줄을 펴가며 써 간다. 과연 추찰(推察:미루어 헤아리다)이 민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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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같이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마는 밝으나 어두우나 빵을 구하기 위하여 바쁩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도 넉넉한 시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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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세하게 그는 여자다운 문자를 써서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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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청서(淸書)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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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되었어. 내 청서할게. 역시 당신은 거짓말쟁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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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짓말쟁이를 이용하는 당신이 더 거짓말쟁이지.”
 
44
여자는 죽죽 답장을 읽었다. 최후에 ‘친구의 여관에서 당신을 사모하며’ 라고 했다. 그 다음에 ……이라고 쓰면 우습겠는데, 그렇게 일행(一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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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 그런 것을 썼다가는 내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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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 아니야. 이걸로 잘 되었어. 그 사람은 이 답장을 호흡을 크게 하며 보겠지. 심장을 상할 터이지. 그때라고 썼으면 우습겠지. 딱 닥뜨리면 그곳에서 처음으로 호흡을 크게 쉬게 될 것이지.”
 
47
“무얼, 반대로 이기면 심장이 더 동계(動悸:심장의 고동이 심하여 가슴이 울렁거림)하는 것이야.”
 
48
“그것은 당신의 육필이니까. 이것은 누구의 대필이라고 생각해서 신용하지 않을 것이오.”
 
49
“그러면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아니해? 그것이 된 대로 기분을 잘 표현시킨 것이니까.”
 
50
여자는 청년의 뛰는 기분을 생각하면 할수록 결국 반대 방향을 향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접은 레터 페이퍼를 서양 봉투에 넣었다.
 
51
이렇게도 변할 수 있을까 할 만치 된 남자의 눈은 그의 시계를 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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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야, 7시경, 종로 네거리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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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두 사람은 섰다.
 
 
 
54
안국정 ○○하숙은 가을 비 흐린 날 어두침침하였다. 노시인 방은 발디딜 곳 없이 고신문 고잡지가 산같이 쌓였다. 시인 자신은 한가운데 책상 대신 행리(行李:짐보따리)를 놓고 앉아 3인 동반의 학생에게 향하여 큰 말소리로 이야기하고 앉았다. 지방 고등보통학교 학생 제복을 입은 학생 3인은 빈궁하고도 유명한 노시인에게 충심껏 경의를 표하는 어조로, “반 년 전에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교가보(校歌譜)가 최근 겨우 되었습니다. S씨의 작곡입니다. 오늘은 저희들이 교우회 대표로 선생님에게 보고하러 왔습니다. 저희는 가서 곧 전교 학생에게 발표하려고 합니다. 선생님 저희들이 불러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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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은 경의를 다하여 작은 소리로 교가를 불렀다. 노시인은 취한 얼굴로 둘째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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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직하게 말하면 노시인은 타인의 노래를 듣는 것같이 자기가 지은 것을 전혀 잊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창한 노래에 흥분되어 2, 3개소 기억되는 문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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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것! 그것! 확실히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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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인은 대머리를 쓰다듬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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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곡조다. 나는 바이런을 숭배하고 있다. 이 교가에는 바이런의 시 냄새가 난다. 한 번 더 불러주오, 나도 같이 배워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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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노시인의 정열적인 말에 소리는 점점 크게 높게 되었다. 노시인은 우쭐우쭐 하여졌다. 그때까지 한편 구석에 전연 무시해 버렸던 엷고 때 묻은 샤쓰 1매의 청년 화가가 벌떡 일어서며,
 
61
“선생님 제가 한턱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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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창문을 열고 넣어 있던 5, 6병(원문은 本[본]) 비어를 노시인의 행리 앞에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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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군 수고했소. 마셔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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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인은 실눈을 하고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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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군, 나중에 군에게 많은 주정을 할 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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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인은 L군에게 모델이 되어 있었다. 3, 4일간 서로 시간이 맞지 아니하였고, 오늘은 학생을 만나 좋은 기분으로 모델료 비어를 미리 사서 두는 것이다. 물론 L군은 노시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가지고 왔던 비어를 다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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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노시인의 권고로 한잔씩 했다. 노시인은 더 놀다 가라고 그들을 붙잡았으나 그들은 간다고 하므로 노시인은 취보(醉步)로 3인을 따라 가도(街道)로 나섰다. L군은 혼자 되었다. 어수선히 늘어놓은 고신문은 거칠었다. L은 마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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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충만한 청년들이…….”
 
69
2, 3차 입속으로 되풀이하다가 다시 자기의 희망이 먼 현재의 불행을 느끼게 되었다.
 
70
현숙의 반신(返信)은…… 왜 현숙의 마음을 좀더 일찍이 알지 못하였던고? 그렇지 못해서 그녀의 마음을 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현숙의 반신은 그같이 저를 번롱(翻弄)하여 보낸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볼 때 그는 결코 그녀에 대하여 노할 수 없었다.
 
71
‘현숙은 현숙의 편지 쓴 대로 매우 바쁘단다. 그러나 현숙의 세평은 매우 나쁘다.’
 
72
그는 아픈 가슴으로 때때로 귀에 들어오는 현숙 세평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였다.
 
73
노시인과 현숙과 자기 3인이 이같이 한 여관에서 친신(親身)과 같이 생활해 가는 현재가 우연이지만 불편한 적도 있었다. 노시인은 언제든지 술이 취하여 술값이 없으면 며칠이라도 굶었다.
 
74
“A가 내게 시를 주었다. 술에 기운을 다 뺏긴 것처럼 말하지만 이렇게 늙어도 피는 아직도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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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이 넘도록 독신으로 있는 그는 쓸쓸한 표정을 하였다.
 
76
현숙은 노시인의 시집을 책점에서 사서 애독한 일이 있으므로 노시인의 신변을 주의하고 돈이 생기면 반드시 술을 사서 부어 권고하므로 적막한 노시인의 생활은 현숙의 호의로 명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따라서 3인의 생활은 한 사람도 떼어 살 수가 없이 되었다. 금년이야말로 L이 선전에 입선되기를 기대하면서 노시인은 모델이 된 것이다.
 
77
“모델 노릇을 누가 하리마는 군에게는 특별히 되지. 그래 매일 술이나 줄 터인가? 내가 훅훅 마시는 것을 그리면 내 기분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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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L은 배수의 진을 폈다. 만일 금년에 낙선하면 화필을 던지리라고 생각하였다. 다 읽은 서적과 의복 등을 전당하여 50호 캔버스와 화구와 또 비어 두 타스를 사가지고 온 것이다. 비어 계절도 아니지마는 비어를 보기만 하여도 기분이 흥분되는 까닭이었다.
 
79
1일에 2시간, 비어 3병, 화제는 ‘Y노폐 시인(老廢詩人)’, 그것은 노시인 자신이 선정한 것이다. 최초 4, 5일간은 규정대로 실행하여 호색이 났다. 노시인은 규정대로 3병을 마시고 나서,
 
80
“아, 맛있어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동숙자 3인 중 언제든지 화풍(和風)이 부는 현숙은,
 
81
“네? 선생님, 나는 바느질도 할 줄 알아요, 선생님 의복이 더러웠어요.”
 
82
현숙은 말하면서 더러운 방을 들여다보다가 언덕에 부는 바람과 같이 L의 옆으로 뛰어들었다. L은 그 매력에 취하여 다시 둥글둥글 뒹굴었다.
 
83
“나는 조금 아까 당신 방을 열어 보았어. 무슨 일기 같은 것을 쓰고 있습디다 그려. 다들 그렇게 생각해 주지, 응? 그래 내가 한 반신이 퍽 재미있었지? 정말은 감정보다 회계(會計), 회계 그것 말이야…… 응 무엇을 생각해…… 연애의 입구는 회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좋아. 참 나는 지금까지 감정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실패해 왔어. 그러므로 당신과 같이 순정스러운 청년에게 대하는 것처럼 어렵고 무서운 것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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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현숙씨와 동숙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소.”
 
85
“그러나 L씨. 나는 근일 내로 이 집을 떠나가려 해요.”
 
86
“…….”
 
87
“실망하는 표정이구려, 실망해서는 안되오. 나는 많은 눈물을 지었었습니다마는, 실망은 아니했어요. 인제 내가 선생님과 당신에게 좋은 통지를 해주지. 나는 지금 퍽 재미있는 일을 계획하고 있어요. 나는 또 나가야 하겠어요. 조금 잊어버릴 일이 있어.”
 
88
한번 더 현숙은 목에 내린 머리를 거듭 [손질]하고 예쁜 눈을 실눈을 하며 거울 앞에서 몸을 꾸미고 있었다.
 
89
“오늘 저녁때 돌아올게.”
 
90
혼잣말로 하고 대문을 나섰다.
 
 
 
91
익조, 노시인은 일찍 눈이 뜨여 담배를 빨고 있으려니 누구의 발소리가 났다. 여자인 듯하여,
 
92
“현숙이요?”
 
93
하고 물었다. 그러나 현숙은 대답을 아니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94
“또 취했군.”
 
95
선생은 “무슨 일이 또 있었군.” 이렇게 말하며 너무 걱정이 되어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선생은 나와 현숙의 방으로 왔다. 현숙은 L이 펴놓아 준 자리에 드러 누워 천정을 쳐다보며 말한다.
 
96
“선생님, 저도 술 마셔도 좋지요? 어찌 마시고 싶었었는지요…… 네?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하여야 좋아요?”
 
97
다 말을 그치지 못하고 옆으로 드러누워 훌쩍훌쩍 운다. 현숙은 작야(昨夜)부터 오늘 아침까지 생긴 불쾌한 일을 잊으려고 하였다. …… 화가 K선생은 현숙과 새로 계약한 것을 파약(破約)하였다. 그것도 그녀의 플랜 배후에 4, 5인의 남자를 상상않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그것보다 돌아온 자기 방에 누가 자리를 펴놓아 준 것이다.
 
98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내 이 눈물을 기억하라고 말씀해 주십쇼.”
 
99
취하여 괴로운지 외로워서 우는지 노시인은 도무지 알 수 없으나 어떻든 밖으로 나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현숙의 이마 위에 수건을 축여 얹었다. 현숙은 찬 물이 목에 흐른다고 중얼대며 물을 뿌렸다.
 
100
“참, 할 줄 몰라서” 노시인은 무참스러워했다.
 
101
그럴 때 L이 들어왔다. 이 기이한 현숙의 취태를 한참 서서 보다가 노시인에게 속살거렸다.
 
102
“대가(大家) K선생이 어디서 무슨 일이 생겼대요.”
 
103
“어쩐지 이상해, K가 그럴는지 몰라, 확실한 것을 알아야 하겠군. 여하튼 타락만은 하지 않도록 해야지.”
 
104
노시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현숙을 노려보았다.
 
105
그 이튿날 오후 노시인은 L과도 상의치 아니하고 사직동에 있는 K대가 집으로 달려갔다. 노시인은 서서히 말을 꺼내어 현숙의 말을 하였다.
 
106
“요즈음 현숙은 매우 변했소. 당신은 여러 가지로 보아 현숙에게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지 아니하면 안되오. 어젯밤은 늦도록 여기서 술을 마시지 아니했소?”
 
107
“아니 당신은 무슨 오해를 하신 양 같소.”
 
108
뚱뚱하고 점잖은 K는 가른 대머리를 불쾌하게 만지면서,
 
109
“그 책임이라고 하는 당신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요?”
 
110
“그런 것을 내게 물을 것이오?”
 
111
“아무래도 당신은 오해한 것 같소. 그 현숙은 여러 화가와 알아서 모델값 3원, 5원, 10원씩 받는다구요. 나는 전연 모른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숙은 결코 내게만 책임을 지울 것이 아니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오.”
 
112
“그런 변명을 할 것이 아니오. 현숙은 얌전한 여성이오. 그래도 남자이거든 그 여자를 사람다운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어떻소. 오늘 아침에 돌아오는 현숙을 보니 그리로 하여 타락해진 것이라고 생각이 들던 것이오.”
 
113
“참 이상한 일이오. 내게는 그런 책임이 없어요. 현숙의 배후에는 여러 남자가 있었는데, 곤란 받을 리도 없어요. 당신은 나만 책하지만 대체 당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소?”
 
114
“무엇?”
 
115
노시인은 두 뺨이 붉어지며 교의에서 벌떡 일어섰다.
 
116
“어떻든 가시오. 돈이면…….”
 
117
K는 약간 때묻은 조끼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냈다. 10원짜리였다.
 
118
“요새 당신의 시도 뒤진 것이 되어 잘 팔리지 아니하니까 무엇이 걸려들까 하는 중이구려 흥흥.”
 
119
이 말을 들은 노시인은 불과 같이 발분하였다. K가 주는 지폐를 찢어서 책상 위에 던지는 동시에 의자 등을 엎어 놓고 문 밖으로 나왔다. 노시인의 가슴은 뛰었다.
 
120
“현숙이뿐 아니라 나까지 모욕한다. 어디 보자, 대가인 체하는 꼴 되지않게…… 남의 처녀를 농락하는 것만이라도 가만 있을 수가 없어…….”
 
121
하며 노기등등하여 가까운 술집에 들어가서 4, 5시간 동안 마시었다. 나중에 가도로 나온 노시인은 건드렁건드렁 취하였다. 자기 숙소로 돌아올 때는 벌써 밤 12시가 되어 현숙과 L은 다 각각 잠이 들지 못하여 애를 쓰고 있는 때이었다. 노시인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서 숙소 문턱까지 왔으나 그의 얼굴과 머리는 붕대를 하였고 두루마기와 버선은 흙투성이었다. 어느 구렁텅이에 빠진 것을 다행히 건져냈다는 근처 사람의 말이었다. 현숙은 드러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노시인의 수족을 훔쳐주고 자리에 끌어다 뉘었다. 그럴 동안 노시인은 반 어물거리는 소리로,
 
122
“그놈, 그놈도 별놈 아니었었구나……. 그놈 예술가의 탈을 벗거든 내가 껍질을 홀랑 벗길 것이다.”
 
123
그렇게 되풀이하며 저주하는 것을 보고 현숙은 직각적으로 알았다.
 
124
‘선생은 틀림없이 K선생 집에를 가셨던 [거]구나’ 하고 현숙은 불의에 눈물이 돌아 금할 수 없게 되었다. 현숙은 노시인에게 자리옷을 갈아입히면서 눈물을 씻었다. 웬일인지 흙이 눈에 들어갔다. 그것은 노시인의 두루마기 자락에 묻었던 것이다. 현숙은 웃었다.
 
125
“무엇이 우스워.”
 
126
노시인은 무거운 취한 눈을 딱 부릅떴다.
 
127
“이것 보셔요. 어느 틈에 선생님의 두루마기 자락으로 눈물을 씻었어요. 이것 좀 보셔요. 이렇게 흙이 묻지 않았어요?”
 
128
현숙은 대굴대굴 구르며 웃는다. L도 옆에서 조력(助力)하며 싱글싱글 웃었다.
 
129
익조에 현숙은 창백한 얼굴로 얼빠진 것같이 창밖을 내다보고 섰었다. 그럴 때 마침 노시인은 자리옷 입은 채로 들어와서 아버지 같은 어조로,
 
130
“가난이란 참 고생스럽지. 개 같은 놈들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고 싫은 것도 하지 않으면 안되지. 그래 일을 생각하여 일찍이 잠이 깨었어. 현숙이도 지금부터는 쓸데없는 남자와 오고가고 해서는 안되어.”
 
131
힘을 들여 말한다.
 
132
“네? 선생님 저는 고로(苦勞)하지 않아요. 엄벙하고 지내요. 그렇지 않으면 살길이 없지 않아요?”
 
133
“응 그렇지.”
 
134
“그러므로 저는 선생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보다 태연해요……. 나라는 여자는 고마운 일이 아니면 울고 싶지 아니해요. 남이 야속하게 한다고 울지 않아요!”
 
135
“응, 우리는 가난뱅이들이니까 울고 싶어야 울지. 울게 되면 얼마라도 가슴이 비워지니까!”
 
136
그리하여 노시인은 젊은 여성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처럼 미소하였다. 한번 더 아침잠을 자려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현숙은 많이 잔 끝이라 그대로 화장을 하러 일어나며,
 
137
‘얼마나 훌륭한 선생인가.’
 
138
혼자말로 아니할 수 없었다.
 
139
‘아무 말도 아니해서 선생들 하는 일이니 우스우나 만일 지금 내 생활을 선생이 알 것 같으면…… 나는 쓸데없이 번민하나 선생은 내게 대하여 절망할는지 몰라…….’
 
 
 
140
그것은 수일 후 오후이었다.
 
141
“선생님!”
 
142
현숙은 짐짝을 정리하면서,
 
143
“저는 끊임없이 희망을 향하여 열심히 걸어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나가 버리더라도 걱정 마셔요. 꼭 수일 내로 축하받을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144
현숙은 이후에 주소를 알려주마 하고 슬쩍 이사를 해버렸다.
 
145
예상한 일이지마는 L은 정말 실망하였다. 노시인은 술만 먹고 들락날락하여 필경 L의 모델로서는 실패하였다.
 
146
매일 현숙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L에게 주소 성명을 쓰지 아니한 두둑한 편지 한 장이 왔다. 뜯어본즉 두 개 봉투가 있다. 한 장은 L의 성명이 써있고 한 장은 아무 것도 써 있지 않고 지참인 L군이라고 써 있다.
 
147
L은 우선 자기에게 온 것을 뜯어 본즉, “현숙에 대한 일로 꼭 한번 대형(大兄)과 만나고 싶소. 현숙은 형이라면 열정적이오. 명일 오후 3시에 표기처(表記處)로 동봉 편지를 가지고……” 라고 썼다.
 
148
L은 웬 셈인지 몰랐다. 그러나 물론 이 편지 중에는 현숙의 최근 사정이 숨어있는 것을 짐작하는 동시에 어쩔 줄을 몰라 익일 오후 3시 전에 지정소로 갔다.
 
149
그곳에 가 보니 과연 지정한 곳이 있어 문을 두드렸다. 귀를 대고 들으니 인기척이 나면서 미구에 문이 열렸다.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앞에 딱 서는 자는 현숙이었다. 아! 깜짝 놀라 양인은 서로 쳐다보고 섰다.
 
150
“아? 당신이었소? 누가 여기를 가르쳐 줍디까? 내가 알리지도 아니하였는데, 당신이 여기 오니 웬일이오?”
 
151
현숙은 불쾌한 기분으로 말하였다. L은 주소 성명 없는 편지로 인하여 왔다고 변명하려고 한 걸음 나설 때에 현숙은 불현듯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하여 L은 급하게 그 이상스러운 편지를 현숙의 앞에 던졌다.
 
152
문은 닫혔다. 3, 4분간 문 앞에 멀거니 섰다. 불의에 현숙을 이곳에서 만난 것, 현숙이 대단히 노한 것, 웬 셈인지 몰랐다……. 대체 이게 웬일일까…… 현숙은 무슨 오해를 하는 모양, 그렇지 않으면 너무 우정을 무시한는 걸……. 한 번 더 문을 두드려 보고 비난을 해 보려고 하였으나 그는 힘없이 돌아가려고 들떠섰다.
 
153
그럴 때 뒤에서,
 
154
“기다리셔요! L씨.” 부른다.
 
155
L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쫓아온 현숙은 L의 손을 붙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156
“여보셔요. L씨, 나는 꼭 세시에 만나자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과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랬더니 알고 보니 그 사람이 당신을 대신 보낸 것이에요. 자 어서 들어오십쇼. 내가 이야기할 것이 많아요.”
 
157
그리하여 L은 현숙에게 재촉을 받으며 들어섰다. 단칸방에 세간이 놓여 있는 까닭인지 매우 좁아 보였다. 남창에 비치는 여름 기분이 찼다. 현숙은 붉은 저고리에 깜장 치마를 입고 앉아 L을 옆으로 오라고 하였다. 그 옆에는 등(藤)의자가 놓여 있었다.
 
158
“여기는 내 침실 겸 서재이에요, 어때요. 조용하고 좋지요? ……아무라도 이 방에 부르는 것은 아니에요.”
 
159
L은 전등을 켜면서 한 번 실내를 휘 둘러보았다. 노시인의 옆방과 달라 여기는 밝고 정하였다. 보기좋은 경대가 하나 놓여 있어 거울이 가재(家財)처럼 비치고 있고 대소의 화장병이 정돈하여 있다. L은 어쩐지 이것을 볼 때 기분이 좋지 못하였다.
 
160
“여보셔요. 내가 이 편지를 보고 알았어요. 나는 당신이 간 줄 알고 뛰어 나갔어요. 참 잘되었어, 당신이 대신 와서. 이 편지가 당신에게 갔었대지? 이 사람은 벌써 나하고 절교한 사람이에요. 이 편지를 좀 읽어 보아요 네?”
 
161
현숙은 L이 던져준 편지를 그에게 억지로 보였다. 3, 4매의 편지는 꾸겨졌다. 현숙이 불끈 쥐어 꾸긴 것 같았다.
 
 
 
162
나의 현숙 씨!
 
163
나는 별안간 영남 지방을 가지 않으면 아니되게 됐어요. 때때로 상경하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지내던 재미스러운 것은 못하게 되었소. 더구나 명일 오후 3시에도 가지 못하게 되어 섭섭해요.
 
164
그러나 나는 생각하였어요. 현숙 씨의 좋아하는 청년, 사랑하는 청년 L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L을 사랑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현재 생활에서 그와 접근하는 것을 피하고 있소. 그리하여 나는 현숙 씨와 L군 사이를 가까이 해 놓으려고 생각했어요.
 
165
현숙 씨!
 
166
이만한 권리는 당연히L에게 있지 않소. L은 당신을 일로부터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이것이 L의 기득권이에요. 이 기득권을 실행하려는 것이에요. 분명히 현숙 씨는 손뼉을 치며 L의 권리를 기뻐해 줄 것이오. 당신도 사람일 것 같으면 이것이 마음에 맞으리라고 상상하고 마음으로부터 미소를 띄우게 되었소.
 
167
현숙 씨! 이 편지는 그 의미로 내가 가지고 온 것이오. 나는 지금 두 사람을 위하여 만강(滿腔)의 축복을 다하오. 브라보! 브라보!
 
 
 
168
현숙은 창 앞에서 편지를 읽는 L의 옆에 섰었다. 그 점화(點火)한 강한 눈은 문자를 통하여 있는 L의 눈을 멀거니 기대하고 있다. L의 검고 신선한 눈이 일기 경사면(一氣傾斜面)을 쏘이는 쾌적한 순간을 생각키어 현숙에게 쇄도하였다.
 
169
두 사람은 포옹하였다. 벌써 전부터 계기가 예약한 것 같이.
 
170
“네? 언제 내가 말한 회계의 입구가 이렇게 속히 우리 두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 둘의 감정은 벌써 충분히 준비되었던 것인데!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어떻게 감정 과다라도 관계치 않아요. L씨, 나는 인제 L씨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그 대신 브라보를 불러드리지요. 브라보 브라보!”
 
171
그런데 L의 인후(咽喉)에는 무슨 큰 뭉텅이가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 알 수 없는 환희였다. 그는 지금 그것을 삼켜버릴 수밖에 없다.
 
172
“그리고 당신은 오후 3시에 여기 와주셔요! 언제든지 열쇠는 주인집에 맡겨둘 터이니. 우리 둘이 여기서 살 수는 없어요. 당신은 잘 노선생을 위로해 드리세요. 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을 당분간 선생에게는 이야기 아니하는 것이 좋아요. 우리 둘은 반 년간 비밀 관계를 가져요. 반 년 후 신계약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우선 우리가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어요.”
 
173
“그렇게 말하면 우습지.”
 
174
L은 쓸쓸한 환희에 떨며 미소하였다.
 
175
“그런 일은 물론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176
현숙은 두 팔을 벌려 뜨거운 손을 L에게 향하여 용감히 내밀었다.
 
177
『三千里[삼천리]』 (1936. 12)
【원문】현숙(玄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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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숙 [제목]
 
  나혜석(羅蕙錫) [저자]
 
  삼천리(三千里) [출처]
 
  1936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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