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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앵(夜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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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7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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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앵(夜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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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를 품은 보드라운 바람이 이따금씩 볼을 스쳐간다. 그럴 적마다 꽃잎새는 하나, 둘, 팔라당팔라당 공중을 날며 혹은 머리 위로 혹은 옷고름 고에 사뿐 얹히기도 한다. 가지가지 나무들 새에 킨 전등도 밝거니와 그 광선에 아련히 비쳐 연분홍 막이나 벌여 놓은 듯, 활짝 피어 벌어진 꽃들도 곱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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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 꽃두 너무 피니까 어지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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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는 여러 사람 틈에 끼어 사쿠라나무 밑을 거닐다가 우연히도 콧등에 스치려는 꽃 한송이를 똑 따 들고 한번 느긋하도록 맡아본다. 맡으면 맡을수록 가슴속은 후련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취하는 듯싶다. 두서너 번 더 코에 들이대다가 이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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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이 꽃 좀 맡아봐.” 하고 옆에 따르는 영애의 코밑에다 들이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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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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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럽긴 메가 어지러워, 이까짓 꽃 냄새 좀 맡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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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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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는 호박같이 뚱뚱한 영애의 몸집을 한번 훔쳐보고 속으로 저렇게 뒤룩뒤룩하니까 코청도 아마,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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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꽃두 볼 줄 모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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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로 이렇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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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꽃 볼 줄 몰라, 얘두 그럼 왜 이렇게 창경원엘 찾아 왔더람?” 하고 눈을 똑바로 뜨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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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눈 무섭다 저리 치어라.” 하고 경자는 고개를 저리 돌려 웃음을 날려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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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있으면 꽃 보는 거냐, 코루 냄새를 맡을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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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는 꽃이지 그럼, 누가 애들같이 꺾어 들고 그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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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아주 모르는구나, 아마 교양이 없어서 그런가 부다, 꽃은 이렇게 맡아보고야 비로소 좋은 줄 아는 거야!” 하면서 경자는 짓궂이 아까의 그 꽃송이를 두 손바닥으로 으깨어가지고는 다시 맡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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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취한다, 아주 어지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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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애는 거기에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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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쥔놈이 또 지랄을 하면 어떡허니!” 하고 그 왁살스러운 대머리를 생각하며 은근히 조를 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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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듣기 싫다, 별소릴 다 하는구나, 그까짓 자식 지랄 좀 허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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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홉 점 안으로 단녀온댔으니까 약속은 지켜야 할 텐데.” 하고 팔을 들어보고는 깜짝 놀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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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서 아홉 점 칠 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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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점이면 어때? 카페 여급이면 뭐 저의 집서 기르는 개돼진 줄 아니? 구경헐 거 다 허구 가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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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는 이렇게 애꿎은 영애만 쏘아박고는 새삼스레 생각난 듯이 같이 왔던 정숙이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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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는 어느 틈엔가 저만치 떨어져서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른의 손에 매달려 오고 가는 어린아이들을 일일이 살펴보며 귀여운 듯이 어떤 아이는 머리까지 쓰다듬어본다. 마는 바른손에 꾸겨 든 손수건을 가끔 얼굴로 가져가며 시름없이 걷고 있는 그 모양이 심상치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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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눈물을 짓는 것이 아닌가? 정숙이가 왜 또 저렇게 풀이 죽었을까? 아마도 아까 주인녀석에게 말대답하다가 패랑패랑한 여자라구 사설을 당한 것이 분해 저러는 게 아닐까? 그러나 정숙이는 그렇게 맘 좁은 사람은 아닐텐데 ─’ 하고 경자는 아리송한 생각을 하다가 떼로 몰리는 어른 틈에 끼어 좋다고 방싯거리는 알숭달숭한 어린애들을 가만히 바라보고야 아하, 하고 저도 비로소 깨달은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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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아이의 등에 엎혀 밤톨만 한 두 주먹을 내흔들며 낄낄거리는 언내도 귀엽고 어머니 품에 안겨 장난감을 흔드는 언내도 또한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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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입에다 빵을 구겨 넣으며 부지런히 따라가는 양복 입은 어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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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깨에 두 다리를 걸치고 걸터앉아서 “말 탄 양반 끄떡!” 하는 상고머리 어린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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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번화로운 구경은 처음 나왔는지 어머니의 치마 속으로만 기어들려는 노랑 저고리에 조그만 분홍 몽당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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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영애야! 아마 정숙이가 잃어버린 딸 생각이 또 나나 보지? 저것 좀 봐라, 자꾸 눈물을 씻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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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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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는 이렇게 엉거주춤히 받고는 언짢은 표정으로 정숙이의 뒷모양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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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론 더 버쩍 생각이 나나 보더라. 집에서도 가끔 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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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좀 잃어버리고 뭘 저런담, 나 같으면 도리어 몸이 가뜬해서 좋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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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제가 낳은 아이가 보구 싶지 않으냐? 넌 아직 애를 못 낳아봐서 그래.” 하고 영애는 바로 제 일같이 펄쩍 뛰었으나 앞뒤좌우에 삑삑이 사람들이매 혹시 누가 듣지나 않았나, 하고 좀 무안스러웠다. 그는 제 주위를 흘끔흘끔 둘러본 다음 경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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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이나 먹여놓고 잃어버렸으니 왜 보구 싶지 않겠냐? 그것두 아주 죽었다면 모르지만 극장 광고 돌리느라고 뿡빵대는 바람에 쫓아나간 것을 누가 집어갔어. 그러니 애통을 안 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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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래! 난 잃어버렸다 해서 아주 죽은 줄 알았구나. 그러면 수색원을 내지 그래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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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원 낸 진 벌써 이태나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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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두 못 찾았단 말이야? 가만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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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눈을 깜박거리며 무엇을 한참 궁리해본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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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걔 아버지가 누군질 정숙이두 모르겠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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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줄 아니,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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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가 이렇게 사박스레 단마디로 쏘아붙이는 통에 경자는 암말 못하고 고만 얼굴이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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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두! 누긴 걘 줄 아나? 아이 망할 년 같으니! 이년 떼내 던지고 혼자 다닐까 부다.’ 하고 경자는 골김에 도끼눈을 한번 떠봤으나 그렇다고 저까지 노하긴 좀 어색하고 해서 타이르는 어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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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애두 다 본다, 네 대답이나 했으면 고만이지 고렇게 톡 쏠 건 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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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한 대여섯 발 옮겨놓다가 다시 영애 쪽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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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숙이는 혼자 살지 않아? 그럼 걔 아버지는 가끔 만나보긴 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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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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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알면 큰일나니, 모른다게? 너 한집에 같이 있고 그리고 정숙이허구 의형제까지 헌 애가 이걸 모르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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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는 발을 딱 멈추고 업신여기는 눈초리로 영애를 쏘아본다. 빙충맞은 이년하고는 같이 다니지 않아도 좋다, 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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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영애가 먼점에는 좀 비쌨으나 불리한 저의 처지를 다시 깨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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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거 뭘 또 만나니? 말하자면 언니가 이혼해서 내던진걸” 하고 고분히 수그러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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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말이야, 가만 있자 ─” 하고 경자는 눈을 째긋이 감아보며 아까부터 해오던 저의 궁리에 다시 취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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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말이야, 그 애를 걔 아버지가 집어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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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주 큰 의견이나 된 듯이 우좌스레 눈을 희번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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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모르는 소리야, 걔 아버지란 작자는 자식이 귀여운지 어떤지도 모르는 사람이란다, 아내를 사랑할 줄 알아야 자식이 귀여운 줄도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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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주 못된 놈을 얻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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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되구말구 여부 있니, 난 직접 보질 못해 모르지만 정숙이언니 이야기를 들어보면 고생두 요만조만이 아니었나 보더라. 집에서 아내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앉았는데 이건 젊은 놈이 밤낮 술이래. 저두 가난하니까 어디 술 먹을 돈이 있겠니. 아마 친구들 집을 찾아가서 이래저래 얻어먹구는 밤중이 돼서야 비틀거리고 들어오나 보더라. 그런데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가 뭐래두 이렇다 대답 한마디 없고 벙어리처럼 그냥 쓰러져 잠만 자. 그뿐이냐, 집에 붙어 있기가 왜 그렇게 싫은지 아침 훤해서 나가면 밤중에나 들어 오고 또 담날도 훤해 나가고 헌대. 그러니까 아내는 그걸 붙들고 앉아서 조용히 말 한마디 해볼 겨를이 없지. 살림두 그러지, 안팎이 손이 맞아야 되지 혼자 애쓴다구 되니? 그래 오죽해야 정숙이언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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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남의 신변에 관한 일을 너무 지껄여놓은 듯싶다. 이런 소리가 또 잘못해서 그 귀에 들어가면 어쩌나, 하고 좀 좌쥐가 들렸으나 그렇다고 이왕 꺼낸 이야기 중도에서 말기도 입이 가렵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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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괜히 이런 소리 입 밖에 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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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왜 미쳤니, 그런 소릴 허게.” 하고 철석같이 맹서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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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오죽해야 정숙이언니가 아주 멀미를 내다시피 해서 떼내 던졌어요. 방세는 내라구 조르고 먹을 건 없고 어린애는 보채고 허니 어떻게 사니, 나 같으면 분통이 터져서 죽을 노릇이지. 그래서 하루는 잔뜩 취해 들어온 걸 붙들구 앉아서 이래선 당신허구 못살겠수, 난 내대루 빌어먹을 터이니 당신은 당신대루 어떡헐 셈 대구 낼은 민적을 갈라주, 조금도 화도 안 내고 좋은 소리루 그랬대. 뭐 화두 낼 자리가 따루 있지 그건 화를 낸댔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그리고 어린애는 안즉 젖먹이니까 에미 품을 떨어져서는 못 살 게니 내가 데리구 있겠소 그랬더니 그날은 암말 않고 그대로 자고는 그 담 날부터는 들어오질 않더래. 별것두 다 많지? 그리고 나달 후에는 엽서 한 장이 왔는데 읽어보니까 당신 원대로 인제는 이혼 수속이 다 되었으니 당신은 당신 갈 대로 가시오 하고 아주 뱃심 좋은 편지라지. 그러니 이따위가 자식색끼를 생각하겠니? 아내 떼버리는게 좋아서 얼른 이혼해주고 이렇게 편지까지 헌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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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래, 그런데 사내들은 제 자식이라면 눈깔을 까뒤집고 들어덤비나 보던데 ─ 그럼 이건 미환 게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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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다마다! 그래 정숙이언니도 매일같이 바가질 긁다가도 그래도 들은 둥 만 둥허니까 나종에는 기가 막혀서 말 한마디 안 나온다지. 그런데 처음에는 그렇지도 않았대. 순사 다닐 때에는 아주 뙤롱뙤롱하고 점잖던 것이 그걸 내떨리고 나서 술을 먹고 그렇게 바보가 됐대요. 왜 첨에야 의두 좋았지. 아내가 병이 나면 제 손으로 약을 달여다 바치고 다리미도 붙들어주고 이러던 것이 고만 바보가 ─ 그 후로 삼 년이나 되건만 어디 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들어보질 못하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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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바본 게로군? 허긴 얘! 바볼수록 더 기집에게 바치나 부드라. 왜 저 우리 쥔녀석 좀 봐. 얼병이같이 어릿어릿허는 자식이 그래두 기집애 꽁무니만 노리구 있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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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아마 그런가 봐. 그런 것한테 걸렸다간 아주 신세 조질걸? 정숙이 언니 좀 봐, 좀 가여운가. 게다 그 후 일 년두 채 못 돼서 딸까지 마저 잃었으니, 넌 모르지만 카페로 돌아다니며 벌어다가 모녀가 먹구 살기에 고생 묵진히 했다. 나갈 때마다 쥔 여편네에게 어린애 어디 가나 좀 봐달라구 신신부탁은 허나 어디 애들 노는 걸 일일이 쫓아다니며 볼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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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있어 뭘 허니? 외려 잘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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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어머니야 어디 그러냐?” 하고 툭 찼으나 남의 일이고 밑천 드는 것이 아닌걸 좀더 지껄이지 않고는 속이 안심치 않다. 그는 경자 뒤에다 입을 돌려대고 몇만 냥짜리 이야기나 되는 듯이 넌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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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 집 주인마나님이 어디 다른 데 중매를 해줄 터이니 다시 시집을 가보라구 날마다 쑹쑹거려두 언니가 말을 안 들어. 한번 혼이가 나서 서방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구 ─” 하고 안 해도 좋을 소리를 마저 쏟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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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거 뭐 있어? 얻었다가 싫으면 또 차내던지면 고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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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쉽지 어디 그러냐? 사내가 한번 달라붙으면 진드기 모양으로 어디 잘 떨어지니? 너 같으면 혹 ─” 하고 은연히 너와 정숙이언니와는 번이 사람이 다르단 듯이 입을 삐쭉했으나 경자가 이 눈치를 선뜻 채고 저도 뒤둥그러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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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럴 테지! 넌 술 취한 손님이 앞에서 소리만 뻑 질러두 눈물이 글썽글썽허는 바보가 아니야? 그러니 남편한테 겁두 나겠지. 허지만 그게 다 교양이 없어서 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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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밸을 긁는 데는 큰 무안이나 당한 듯싶어서 얼굴이 빨개지며 짜증 눈에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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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년, 그래 내가 바보야? 남의 이야기는 다 듣고 고맙단 소리 한마디없이, 망할 년! 학교는 얼마나 다녔다구 밤낮 저만 안다지. 그리고 그 교양인가 빌어먹을 건 어서 들은 문잔지 건뜻하면 ‘넌 교양이 없어서 그래─?’ 말대가리같이 생긴 년이 저만 잘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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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는 속으로 약이 바짝 올랐으나 그렇다고 겉으로 내대기에는 말솜씨로든 그 위풍으로든 어느 모로든 경자에게 딸린다. 입 문을 곧 열었으나 그러나 주저주저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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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무서워서 그러니? 애두! 왜 그렇게 소견이 없니? 하루라두 같이 살던 남편을 암만 싫더라두 무슨 체모에 너 나가라고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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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모? 흥! 어서 목말라 죽은 것이 체모야?” 하고 콧등을 흥, 흥, 하고 울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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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체모두 모르는구나! 아이 별 아이두! 그게 교양이 없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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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때는 이때라구 얼른 그 “교양”을 돌려대고 써먹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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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는 저의 “교양”을 제법 무단히 써먹는 데 자존심이 약간 꺾이면서
 
82
‘이년 보래! 내가 쓰는 걸 배워가지고 그래 내게 도루 써먹는거야? 시큰둥헌 년! 제가 교양이 뭔지나 알며 그러나?’ 하고 모로 슬며시 눈을 흘겼으나 허나 그걸 가지고 다투긴 유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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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모는 다 뭐야, 배고파도 체모에 몰려서 굶겠구나? 애두! 배지 못헌 건 참 헐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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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요렇게 잘 뱄니? 그래서 요전에 주정꾼에게 ‘삐루’ 세례를 받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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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가 ‘삐루’ 세례를 받건 말건 네가 알 게 뭐야? 건방지게 이년이 누길.” 하고 그 팔을 뒤로 홉잡아채고 그리고 색색거리며 독이 한창 오르려 하였을 때 예기치 않고 그들은 얼김에 서로 폭 얼싸안고 말았다. 인적이 드문 외진 이 구석, 게다가 그게 무슨 놈의 짐승인지 바로 언덕 위에서 이히히히, 하고 기괴하게 울리는 그 울음소리에 고만 온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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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정숙에게로 휭하게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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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서워! 얘 그게 무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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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뭘까 ─ 아주 징그럽지?”
 
89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며 어린애같이 마주 대고 웃어 보인다.
 
90
경자는 정숙 곁으로 바짝 붙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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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 다리 아프지 않아? 우리 저 식당에 가서 좀 앉았다가 돌아서 나가지?”
 
92
“그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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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는 아까부터 고만 나가고 싶었으나 경자가 같이 가자고 굳이 붙잡는 바람에 건승 따라만 다녔다. 이번에도 경자가 하자는 대로 붐비는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을 때 골머리가 아찔하고 아무 생각도 없었으나
 
94
“우리 사이다나 먹어볼까?” 하고 묻는 그대로
 
95
“아무거나 먹지.” 하고 좋도록 대답하였다.
 
96
그들은 사이다 세 병과 설고 세 개를 시켜놓았다.
 
97
경자는 사이다 한 컵을 쭉 들이켜고 나서
 
98
“영애야! 너 아까 보자는 꽃이라구 그랬지? 그럼 말이야 그림 한 장을 사다 걸구 보지 애를 써 예까지 올 게 뭐냐!” 하고 아까부터 미결로 온 그 문제를 다시 건드린다. 마는 영애는 저 먹을 것만 찬찬히 먹고 있을 뿐으로 숫제 받아주질 않는다. 억설쟁이 경자를 데리고 말을 주고받다간 결국엔 제가 곱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고 있다. 나종에는 하 비위를 긁어놓으니까 할 수 없이 정숙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99
“언니는 어떻게 생각허우? 그래 보자는 꽃이지 꺾어 들구 냄새를 맡자는 꽃이우? 바루 그럴 양이면 향수를 사다 뿌려놓고 들엎디었지 왜 예까지 온담?” 하고 응원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100
그러나 정숙이는 처음엔 무슨 소린지 몰라서 얼뜰하다가
 
101
“난 그런 거 모르겠어 ─” 하고 울가망으로 씀씀히 받고 만다.
 
102
영애는 잇속 없이 경자에게 가끔 쬐어 지내는 자신을 생각할 때 여간 야속하지 않다. 연못가로 돌아나오다 경자가 굳이 유원지에 들어가 썰매 한번 타보고 가겠다 하므로 따라서 들어가긴 하였으나 그때까지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자가 마치 망아지 모양으로 껑충거리며 노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는 ‘에이 망할 계집애두! 저것두 그래 계집애년이람?’ 하고 속으로 손가락질을 않을 수 없다.
 
103
유원지 안에는 여러 아이들이 뛰놀며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하였다. 부랑꼬에 매달렸다가는 그네로 옮겨오고 그네에서 흥이 지이면 썰매 위로 올라온다.
 
104
그 틈에 끼어 경자는 호기있게 썰매를 한번 쭈욱 타고 나서는 깔깔 웃었다. 그리고 다시 기어올라가서 또 찌익 미끄러져 내릴 때 저편 구석에서
 
105
“저 궁덩이 해진다!” 하고 손뼉을 치며 껄껄거리고 웃는 것이다.
 
106
경자는 치마를 털며 일어서서 그쪽을 바라보니 열칠팔밖에 안돼 보이는 중학생 셋이 서서 이쪽을 향하여 웃고 있다. 분명히 그 학생들이 까시를 하였음에 틀림없었다.
 
107
경자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대뜸
 
108
“어떤 놈이야? 내 궁덩이 해진다는 놈이 ─” 하고 쏘아붙이며 영애가 말림에도 듣지 않고 달려들었다. 철없는 학생들은 놀리면 달아날 줄 알았지 이렇게까지 독수리처럼 대들 줄은 아주 꿈밖이었다. 모두 얼떨떨해서 암말 못하고 허옇게 닦이다가
 
109
“우리가 뭐랬다구 그러시오?”
 
110
혹은
 
111
“우리끼리 이야기허구 웃었는데요.”
 
112
이렇게 밑 따진 두멍에 물을 챌랴고 땀이 빠진다. 마는 경자는 좀체로 그만두려 하지 않고
 
113
“학생이 공부는 안 하구 남의 여자 히야까시허러 다니는 게 일이야?” 하고 그중 나이 찬 학생의 얼굴을 뻘겋게 때려놓는다.
 
114
이 서슬에 한 사람 두 사람 구경꾼이 모이더니 나중에는 삑 돌리어 성이 되고 말았다. 어떤 이는 너무 신이 나서
 
115
“암 그렇지 그래, 잘헌다!” 하고 소리를 내지르기도 하고 또는
 
116
“나히 어려 그렇지요, 그쯤 허구 고만두십쇼” 하고 뜯어말리는 사람 ─ 그러나 정숙이는 이편에 따로 떨어져 우두머니 서서는 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117
거기에는 대여섯 살이 될지 말지 한 어린아이 둘이 걸상에 마주 걸터앉아서 그네질을 하며 놀고 있었다. 눈을 뚝 부르뜨고 심술궂게 생긴 그 사내아이도 귀엽고, 스스러워서 눈치만 할금할금 보는 조선 옷에 단발한 그 계집애도 또한 귀엽다. 바람이 불 적마다 단발머리가 보르르 날리다가는 사뿟 주저앉는 그 모양은 보면 볼수록 한번 담싹 껴안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118
‘우리 모정이두 그대루 컸으면 조만은 하겠지!’
 
119
그리고 정숙이는 여지껏, 어딘가 알 수 없이 모정이와 비슷비슷한 어린 계집애를 벌써 여남은이나 넘어 보아오던 기억이 난다. 요 계집애도 어쩌면 그 눈매며 입모습이 모정이같이 고렇게 닮았는지 비록 살은 포들포들이 오르고 단발은 했을망정 하관만 좀 길다 하고 그리고 어디가 엎어져서 상처를 얻은 듯싶은 이마의 그 흠집만 없었더라면 어지간히 같을 뻔도 하였다. 하고 쓸쓸이 웃어보다가
 
120
‘남이 우리 모정이를 집어간 것 마찬가지로 나도 고런 계집애 하나 훔쳐다가 기르면 고만 아닌가?’
 
121
이렇게 요즘으로 가끔 하여보던 그 무서운 생각을 다시 하여본다.
 
122
정숙이는 갖은 열정과 애교를 쏟아가며 허리를 구부려
 
123
“얘! 아가야! 너 몇 살이지?” 하고 손으로 단발머리를 쓸어본다.
 
124
계집애는 낯선 사람의 손을 두려워함인지 두 눈을 말뚱히 뜨고 치어다만 볼 뿐으로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러다 손이 다시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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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참! 우리 애기 이뻐요! 이름이 뭐지?” 하고 또 머리를 쓰담으매 이번에는 마치 모욕이나 당한 사람같이 어색하게도 비슬비슬 일어서더니 저리로 곧장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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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이는 낙심하야 쌀쌀한 애두 다 많군 하고 속으로 탄식을 하며 시선이 그 뒤를 쫓다가 이상두 하다고 생각하였다. 거리가 좀 있어 똑똑히는 보이지 않으나마 아마 병객인 듯싶은, 흰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눌러쓴 한 사나이가 괴로운 듯이 쿨룩거리고 서서는 앞으로 다가오는 계집애와 이쪽을 번갈아가며 노려보고 있었다. 얼뜬 보기에 후리후리한 키며 구부정한 그 어깨가, 정숙이는 사람의 일이라 혹시 하면서도 그러나 결코 그럴리는 천만 없으리라고 혼자 이렇게 또 우기면서도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몇 걸음 걸어나간다. 시나브로 거리를 접어가며 댓 걸음 사이를 두고까지 아무리 고쳐서 뜯어보아도 그는 비록 병에 얼굴은 꺼졌을망정 그리고 몸은 반쪽이 되도록 시들었을망정 확실히 전일 제가 떼어버리려고 민줄 대던 그 남편임에 틀림없고 ─
 
127
“아이 당신이?”
 
128
정숙이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저도 모르게 이렇게 입을 벌렸으나 그다음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원수같이 진저리를 치던 그 사람도 오랜만에 뜻 없이 만나고 보니까 이상스레도 더 한층 반가웠다. 한참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129
“그동안 서울 계셨어요?” 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130
사나이는 고개를 저리 돌리고 외면한 그대로
 
131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하고 활하게 대답하였다. 그러고는 반갑다는 기색도 혹은 놀랍다는 기색도 그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132
정숙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 앞에 폭 안긴 그 단발한 계집애가 모정이인지 아닌지 그것이 퍽도 궁거웠다. 주볏주볏 손을 들어 계집애를 가리키며
 
133
“얘가 우리 모정인가요?” 하고 물어보았으나 그는 못 듣는 듯이 잠자코 있더니 대답 대신 주먹으로 입을 막고는 쿨룩거린다.
 
134
그러나 정숙이는 속으로
 
135
‘저것이 모정이겠지! 입 눈을 보더라도 정녕코 모정이겠지?’ 하면서 이년 동안이란 참으로 긴 세월임을 다시 깨달을 만치 이렇게까지 몰라보도록 될 줄은 아주 꿈밖이었다. 마는 그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식도 모르는 폐인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제 자식이라고 몰래 훔쳐다가 이렇게 데리고 다니는 것을 생각하면 그 속은 암만해도 하늘 땅이나 알 듯싶다. 뿐만 아니라 갈릴 때에는 그렇다 소리 한마디 없더니 일 년 후에야 슬며시 집어간 그 속도 또한 알 수 없고 ─
 
136
‘저것이 정말 귀여운 줄 알까?’
 
137
“얘가 모정이지요?”
 
138
정숙이는 묻지 않아도 좋을 소리를 다시 물어보았다. 여전히 사나이는 못들은 척하고 묵묵히 섰는 양이 쭐기고 맛장수이던 그 버릇을 아직도 못 버린 듯싶었다. 그러나 저는 구지레하게 걸쳤을망정 계집애만은 낄끗하게 옷을 입혀놓은 걸 보더라도 그리고 에미한테서 고생을 할 때보다 토실토실이 살이 오른 그 볼따귀를 보더라도, 정숙이는 어느 편으로든 에미에게 있었던 것보다는 그 아버지가 데려간 것이 애를 위하여는 오히려 천행인 듯싶었다.
 
139
정숙이는 사나이에게 암만 물어야 대답 한마디 없을 것을 알고 이번에는 계집애를 향하여
 
140
“얘 모정아!” 하고 불러보니 어른 두루마기에 파묻혔던 계집애가 고개를 반짝 든다. 이태 동안이 길다 하더라도 저를 기르던 저의 어미를 이렇게도 몰라볼까, 하고 생각해보니 곧 두 눈에서 눈물이 확 쏟아지며 그대로 꼭 껴안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은 하나 그러나 서름히 구는 아이를 그러다간 울릴 것도 같고 해서 엉거주춤히 팔만 내밀어 머리를 쓰담어주며
 
141
“얘 모정아! 너 올에 몇 살이지?”
 
142
또는
 
143
“얘 모정아! 너 나 모르겠니?”
 
144
이렇게 대답 없는 질문을 하고 있을 때 저만치 등 뒤에서
 
145
“정숙이 아닌가?” 하고 경자가 달려드는 모양이었다.
 
146
“그럼 요즘엔 어디 계셔요?”
 
147
정숙이는 조급히 그러나 눈물을 머금은 음성으로 애원하다시피 묻다가 의외에도 사나이가 사직동 몇 번지라고 순순히 대답하므로 그제야 안심하고
 
148
“모정이 잘 가거라 ─” 하고 다시 한 번 쓰담어보고는 경자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전에 그쪽을 향하여 휭하게 떨어져간다.
 
149
경자는 활갯짓을 하고 걸어가며 신이야 넋이야 오른 어조로
 
150
“내 그자식들 납짝하게 눌러줬지. 아 백줴 내 궁덩이가 해진다는구먼. 망할 자식들이! 내 좀더 닦아셀래다?”
 
151
“넌 너무 그래, 철모르는 애들이 그렇지 그럼 말두 못하니? 그걸 가지고 온통 사람을 모아놓고 이 야단이니!”
 
152
영애는 경자 때문에 창피스러운 욕을 당한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썩 분하였다.
 
153
그런대도 경자는 저 잘났다고 시퉁그러진 소리로
 
154
“너는 그럴 테지! 왜 너는 체모 먹구 사는 사람이냐?” 하고 또 비위를 거슬러놓다가 저리 향하여
 
155
“정숙이! 아까 그 궐자가 누구?”
 
156
“응 그 사내 말이지? 그전에 나 세들어 있던 집 주인이야 ─”
 
157
정숙이는 이렇게 선선히 대답하고 다시 얼굴로 손수건을 가져간다.
 
158
‘자식이 그렇게 귀엽다면 그걸 낳아놓은 아내두 좀 귀여울 텐데?’ 하고 지내온 일의 갈피를 찾아보다가 그래도 비록 말은 없었다 하더라도 아내도 속으로는 사랑하리라고 굳이 이렇게 믿어보고 싶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병까지 든 걸 보면 그동안 고생은 무던히 한 듯싶고 그렇다면 전일에 밤늦게 들어와 쓰러진 사람을 멱살잡이를 하여 일으켜서는 들볶던 그것도 잘못하였고 술 먹었으니 아침은 고만두라고 하며 마악 먹으려 드는 콩나물을 땅으로 내던진 그것도 잘못하였고, 일일이 후회가 날 뿐이었다. 저의 아버지를 그토록 푸대접을 하였으니 계집애만 하더라도 에미를 탐탁히 여겨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더욱 큰 설움이 복받쳐오른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는 일찍 찾아가서 전사일은 모조리 잘못하였다고 정성껏 사과하고, 그리고 앞으로는 암만 굶더라도 끽소리 안 하리라고 다짐까지 둔다면 혹시 사람의 일이니 다시 같이 살아줄는지 모르리라고 이렇게 조금 안심하였을 때 영애가 팔을 흔들며
 
159
“언니! 오늘 꽃구경 잘했지?”
 
160
“참 잘했어!”
 
161
“꽃은 멀리서 봐야 좋은 걸 알아, 가깝게 가면 그놈의 냄새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 않아? 그렇지만 오늘 꽃구경은 참 잘했어!”
 
162
영애가 경자에게 무수히 쏘이고 게다 욕까지 당한 것이 분해서 되도록 갚으려고 애를 쓰니까 경자는 코로 흥, 하고는
 
163
‘느들이 무슨 꽃구경을 잘했니? 참말은 내가 혼자 잘했다!’
 
164
“꽃은 냄샐 맡을 줄 알아야 꽃구경이야! 보는 게 다 무슨 소용 있어?”
 
165
하고 희짜를 뽑다가 정숙이 편을 돌아보니 아까보다 더 뻔찔 손수건이 올라 간다. 보기에 하도 딱하여 그 옆으로 바싹 붙어서며 친절히 위로하여 가로대
 
166
“그까짓 딸 하나 잃어버리고 뭘 그래? 없어지면 몸이 가뜬하고 더 편하지 않아?”
 
167
그때 눈 같은 꽃이파리를 포르르 날리며 쌀쌀한 꽃심이 목덜미로 스며든다.
 
168
문간 쪽에서는 고만 나가라고 종소리가 댕그렁댕그렁 울리기 시작하였다.
【원문】야앵(夜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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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정(金裕貞) [저자]
 
  193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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