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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여쁜 악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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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
이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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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여쁜악마
 
 

1. 1

 
3
명수(明洙) 는 근일에 와서 일과가 하나가 더 생기었다. 그것은 자기 고향에서 올라온 C란 여자를 저녁마다 방문하는 것이었다.
 
4
방문하는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다만 C가 지금까지의 자기의 처지를 버리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생애에 들어가보겠다는 것을 동정하여 그를 가르치려 함이었다.
 
5
C는 자기 시골에서 비교적 이름이 있던 기생이었다. 그는 스스로 지금까지 하던 기생 노릇을 그만두고, 몇 달 전에 서울로 올라와서 S동 고요한 곳에 여관을 정하고, 낮으로는 준비 학교에 다니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명수에게 일어, 산술(算術) 같은 것을 초보부터 배우게 되었었다.
 
6
명수가 이전 고향에 있을 때에 다른 젊은이와 작반하여 S를 찾아간 적이 물론 여러 번 있었다. 그 외에는 별로 깊은 교제는 없었다. 물론 명수도 C에 대하여는 특별히 알음이 없었다. 다만 그가 화류계에 몸을 던진 것을 항상 원통이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지 사람다운 생활을 한 번 해보겠다고 동경을 한다는 것은 고향 친구들에게 들은 일은 가끔 있었었다. 명수는 이런 말을 친구들에게 간접으로 들을 때마다 C에 대하여 어떠한 호기심을 아니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말을 간접으로만 들은 그만큼 친근한 교제는 하여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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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인연은 있었다. C가 지금까지 가지고 내려온 화류계 이름을 버리고, 여학생다운 이름을 하나 지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다른 친구에게 듣고, 명수는 자기가 어떠한 소설 가운데 여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 좋겠다는 것을 그 친구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그 여주인공의 이름이 가장 명수의 맘에 들던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C란 이름은, 즉 명수가 친구들 사이에 두고 지어준 이름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보아도 C란 이름이 명수의 귀에는 특별히 감칠맛이 가지고 들어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한 데다가 C가 필경 새로운 생애에 몸을 던지려고 첫걸음을 내놓을 때에 고향에서 C를 권고하여 아주 결심을 하도록 한 명수 친구 K가 명수에게 C가 단단히 맘을 먹고 서울로 가니, 잘 인도하여 주라 하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C 역시 서울에 가면 여러 가지로 지도를 해줄 사람은 명수인 줄 믿고 왔었던 터이었다. 이렇게 되어 몇 달 동안을 두고 명수는 아주 C의 선생 격으로 밤마다 출장 교수를 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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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오늘 밤에도 밥을 일찍이 먹은 뒤에 여관 문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도 그는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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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째든 새로운 생애에 들어오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뛰어나온 그것만큼 기특한 일이다. 아니 감복할 일이다. 자기가 자기의 환경을 제 스스로 바꾸는 일이 그다지 용이하다 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제가 스스로 자기의 기반을 벗어난 용기 있는 여자라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장래가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이와 같이 결심한 그것을 잘 지키고 못 지키는 대에 달리었다. 아무쪼록 잘 지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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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속으로 중얼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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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에서는 또한 의심이 일어났다. ‘그러한 의협심으로 과연 몇 달 동안의 C 양을 위하여 이만한 부지런을 내게 될까? 또는 어떠한 이기심이 이와 같이 끈기 있게 만들었는가? 이러한 두 가지 의문에 대답하는 것은 전혀 의협심도 아니요, 이기심도 아니요, 그 중간에 엉거주춤한 것을 이름인 것 같다.’는 대답이 양심의 한편 구석에서 곧 알아듣지 못할 만큼 가늘게 부르짖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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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문을 나서면서도 그는 다시 그런 의문을 한 번 내던지고, 스스로 물어보았다. 역시 전날과 조금도 틀림없는 대답이 나올 뿐이었다.
 
 
 

2. 2

 
14
명수는 A동 네거리로 나왔다. 여섯 갈래 길이 방사선으로 갈라진 한 가운데에서 조금 못 미친 곳에 정거한 전차는 벌써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은 바쁜 걸음으로 전차를 향하여 달아난다. 그리고 어느덧 C동으로 가는 길 좌우편 상점에는 전등이 희고 붉게 켜졌다. 명수도 외투 호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어 두 주먹을 쥐고 빨리 걸어 전차에 올랐다. 헐떡 숨을 쉬며, 참으로 열심인걸 하고, 빙긋 스스로 웃었다. 조금 뒤에 전차는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명수는 전차 안에서도 역시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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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데서 이러한 열심과 의협심이 생기었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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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별다른 쾌한 해석은 얻지 못하였다. 어쩐지 가고 싶다는 것이 다만 그 이유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이것은 근일 저녁마다 출장 교수하는 것이 한 버릇이 되어 그대로 집에 있을 수 없는 것이 하나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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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길 네거리에서 남대문행을 바꾸어 타고, 얼마나 되어 S동에 내리었다. 그는 여러 달 다니어 눈을 감고라도 넉넉히 찾아 들어갈 수 있도록 발이 익은의 기숙하는 집으로 찾아갔다 C . 중늙은이 과부는 처음에는 명수와 C 사이를 제법 의심하였었으나, 차차 두고 보아 그렇지 않은 줄을 비로소 알았던지, 근래에는 아무 의심 없이 명수의 오는 것을 환영하였었다. 결국은 그 과부가 도리어 더 명수의 오는 것을 환영하게 되었다. 그는 C를 가르쳐주는 곁에 앉아서, 흔히 “나도 좀 가르쳐주시구려!” 하며, 일어 같은 것의 발음을 흉내도 내어보기도 하고, 혹은 산술 글자 같은 것을 공책에다 끄적거려 보기도 하였었다. 오늘 저녁에도 그 과부 주인은 벌써 명수의 발자취 소리에 앞 미닫이를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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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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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급히 나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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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님! 오늘 저녁때부터 C 아가씨가 한축을 하고 앓아요! 좀 어서 들어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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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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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주인 과부의 말이 막 끝나자 바로 C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전등불은 천장에 높이 매달린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방 아랫목에는 벌써 자리를 펴고 C는 드러누웠었다. 그는 명수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불을 헤치고 일어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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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누워 있구려! 어디가 불편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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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윗목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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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열이 있고, 가슴이 저려서 그래요. 아마 전에 앓던 늑막염이 재발하는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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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는 C의 눈에는 핏대가 섰다. 그리고 입술을 말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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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에 C와 오래 상종하였으나, 그가 전에 늑막염을 알았다는 말은 그의 입으로 직접 듣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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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늑막염을 앓은 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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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깜짝 놀라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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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전인가 한 번 죽을 고생을 하였답니다. 이러다가도 곧 그 증세가 그치는 수도 더러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어요. 어째든 오늘 저녁이나 지나봐야 좌우간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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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쁜 숨을 쉬어가며 C양은 겨우 말하고 가슴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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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과부는 곁에서 걱정스러운 듯 눈을 찌푸리고, 두 사람의 하는 말을 듣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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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조심을 잘해야 됩니다. 객지에서……나는 하노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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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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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주인 과부의 나가는 C 것을 바라보더니, 그가 밀창문 밖에 사라진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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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걸 좀 보세요. 대단히 뜨겁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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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명수의 손을 잡아다 자기의 이마에 댄다.
 
38
명수는 손을 잡힌 그대로 C 양의 머리를 짚어보았다. 머리가 대단히 더웠다. 자기 손을 잡은 손도 대단히 더웠다. 명수의 손은 안팎으로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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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심하지는 않으나, 조금 더운 모양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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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이만큼만 말해서 그의 맘을 조금 놓게 하려는 것이었다.
 
41
“아니에요. 몹시 더워요. 그러면 선생님의 이마 좀 이리…….”
 
42
하고, C는 자기의 불같은 손으로 명수의 이마를 짚어본다. 명수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어떠한 쇼크를 느끼었다. 그리고 그의 핏대가 선 눈에서 어떠한 미소가 띠어 있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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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통 여자와는 다른 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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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생각이 문득 났다. 명수는 새로운 생애에 들어온 이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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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 저녁에는 편히 주무시고, 좌우간 내일 보아서 병원에를 가든지 해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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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이렇게 말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까 한 것이었다. 이것은 차라리 병인을 맘 편케 그대로 쉬이도록 하는 것이, 곁에서 쓸데없는 이야기 하는 것보다 나을 듯해서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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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열이 있고야 어떻게 편히 쉬일 수 있겠어요. 선생님! 좀 오래 놀다가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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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는 핏기 없는 손으로 자기 이마를 다시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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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오래 있으면 되나요? 일찍 잠을 잘 도리를 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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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어디 그렇게 오나요. 오면야 참으로 좋지요만요…….”
 
51
명수는 할 수 없이 그대로 윗목에 펑퍼짐하고 앉았다. 다시 일어나서 위에 높이 걸린 전등을 책상 위로 가까이 내려 걸고, 주인 과부에게 신문을 가져오라 하여 읽으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그날 신문에 열아홉 살 먹은 처녀가 자기 집에서 강제 결혼하라는 것을 거절하고, 서울로 뛰어왔다가 어떤 놈에게 속아서 B정 창기로 팔리어서 죽을 학대를 받다가, 견디다 못하여 자살을 하려고 소동을 일으키었다는 것이 게재되었다. 명수가 여러 가지 기사를 들려주다가 이것을 말하매, C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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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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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러고는 바로 말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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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어째서 늑막염이 든 줄 알으세요? 그 말을 어떻게 다해요. 선생님은 다 알으시겠지만 , 하루는 어둔 밤에 어머니하고 싸우고 도망질을 치다가 문 바깥에서 엎어졌지요. 그래서 든 골병이랍니다!”
 
55
C는 열세 살 되는 해에 자기 고향에서 기생을 들어갔다. 처음에는 아무런 줄을 물론 몰랐다. 고운 옷을 입은 것이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줄로 알던 그는 참으로 기뻤다. 더욱이 기생이 되면 장래에 잘산다는 것을 자기 어머니가 설법을 하였다. 그가 제 철이 나서 자기의 고깃덩이를 팔게 될 때에 자기의 현실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었다. 눈을 뜨기는 떴으나, 역시 분명하게 이 세상을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엷은 사(紗)로 가리고 보는 듯하였다. 더욱이 자기의 갈 길을 분명히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고통 때문의 고통이었다. 고통을 면하기 위한 고통은 아니었다. 그는 육칠 년 동안에 육체적으로 거의 파멸에 들어가고야 말 지경이었었다. 그는 오랫동안 눈을 감고, 모든 능욕을 참아왔다. 제 깜냥으로는 살길을 찾기 위하여 죽는 길을 밟아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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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을 길을 밟는 동안에, 그의 발은 어느덧 죽음의 길에 밟히어 다시 길을 찾게 되고 말았다. 겨우 이 길에 발을 돌려놓은 오늘에도 가끔 그의 발은 미끄러져서 그의 죽음을 찾으려고 하는 때가 종종 생각났었다. 이러한 것을 의식할 때마다 자기의 과거라는 것을 영영 깨끗하게 씻을 수 없을 것을 스스로 슬퍼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아! 첫길을 바로 드는 이의 행복이여!’하고 부르짖기를 몇 번이나 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은 자기의 순결을 지키려 하였으나, 그의 육신은 그것을 부인하였다.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충동을 그대로 세워보려 하던 것이었다. 이 얼마나 C의 전인격의 싸움이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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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을 명수는 생각하였다. 어쨌든 그의 정신에 가실 수 없는 흠집을 내고, 또다시 그의 몸에 지워지지 아니할 낙인을 친 것을 모두 자기 부모의 잘못으로만 아는 그의 어여쁜 치기를 명수는 답답히 아니 여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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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한층 더 부모는 어찌해서 가장 귀여운 자식을 희생치 않으면 안 될까를 생각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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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답답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까지 그가 넉넉히 느끼게 되는 때에, 그가 반드시 갱생하는 때가 되리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적으로 까지 깨치기는 어려운 것인가 생각하매, 적이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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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다시 말을 그만둘까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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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C의 어머니도 그럴라서 그랬을라구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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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꼭 시키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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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병이 들면 누구든지 이와 같이 감상적이 되고 흥분하기 쉽지마는, 가 이렇게 흥분하기는 C 처음이었다. 평일에는 될 수 있으면 자기의 과거와 또는 그의 신분에 화제가 돌아가지 않도록 힘을 써오던 그이로서, 자기의 근본을 스스로 들추어 가지고 이 말 저 말 내는 것은, 그의 신체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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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불쌍한 처지에 생겨난 여성의 불쌍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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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C를 위하여 부르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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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적이 염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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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된 것을 지금 와서 말을 하면 무엇하나요? 그러지 말고 장래에 어떻게 할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영리한 생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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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의 처지로는 이렇게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자기 진심도 역시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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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는 장래지요마는, 어찌 옛날 일이라고 다 잊을 수 있어야지요.”
 
70
C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는, 목이 마르다고 일어나서 물을 찾는다.
 
71
명수는 주인 과부를 불렀다. 그리하여 능금과 배를 사 오라 하였다.
 
72
C는 사 온 과실로 목을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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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너무나 미안해요…….”
 
74
하고, 찬찬히 명수의 얼굴을 바라본다.
 
75
“무얼 그래요. 그런 치하는 뒤에나 하고, 어서 자시구려!”
 
76
명수는 이렇게 위로하였다.
 
77
C의 몸이 불편하다 하여 불을 많이 지펴, 평일보다 방이 배나 더웠다. 명수의 이마에는 땀이 젖었다. 그러나 문을 열어놓기는 미안하였다. 훈훈한 방안에는 능금과 배의 향기로운 냄새가 C의 분과 기름 냄새에 조화가 되어 명수의 코를 이상하게도 현혹시키는 듯하였다. 그는 이 냄새가 코를 찌를 때마다 몽둥이로 대가리를 얻어맞는 듯 느끼었다. 이러할 때마다 그의 이성의 날카로운 바늘은 사정없이 그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3. 3

 
79
명수는 밤이 이슥한 때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행길에도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었다. A동 네거리에서 전차를 내리었다. 건너편 순사 파출소 붉은 등 아래에 외투로 대가리를 깊숙이 묻은 경관의 그림자가 오락가락할 뿐이었다. 명수도 외투 깃을 세워 두 뺨까지 파묻고, 바쁜 걸음으로 걸었다. 군밤 장사와 야기이모(やきいも) 장사의 외치는 소리가 이 층 상점 밑에서 처량히 날 뿐이었다.
 
80
여관집은 벌써 단단히 잠겼다. 오늘밤은 특별히 늦었다. 매일 밤마다 문 열라 할 때보다, 오늘 밤의 명수의 혀는 납근을 매단 듯 무거웠다. 행낭어멈은 눈을 부비고 나와 문을 열며,
 
81
“어디서 이렇게 늦으셨어요?” 특별히 묻는다.
 
82
“글쎄, 좀 늦었어…….”
 
83
모호한 대답을 던지고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집주인네들도 벌써 잠이 들은 듯하였다. 밤 아랫목에는 자리가 펴놓였다. 책상 위에는 그가 나아갈 때에 벌여놓은 책과 종이가 그대로 질서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는 그 흐트러진 것을 그대로 두고 자리옷을 갈아입은 뒤에 이불을 무릅썼다. 방바닥의 따뜻한 기운을 흠씬 머금은 이불은 아름다운 사람의 따뜻한 살같이 오는 동안에 싸늘해진 그의 몸뚱이를 녹이어주었다. 그러나 명수의 머리는 휭휭 내둘리는 듯하였다. 과실 냄새와 기름 냄새, 그것은 향기로운 정도가 꼭 같은 듯하였다. 그 두 냄새에 자기의 정신이 얼마나 현란하였을 것을 생각하고, 또한 이를 뿍뿍 갈다시피 어디까지든지 C와 순결을 지킨 것이 자기의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어떠한 프라이드로 생각이 될 때에, 자신의 이성도 이만한 정도에 이르게 된 것을 스스로 기뻐하고 믿음직하게 생각하였다. 옳다! 나는 C에게 아무것도 구한 것이 없이 그의 처지에 동정한 것뿐이다.
 
84
그러나 그의 호듯한 이마와 손에 자기의 이마와 손을 대고, 또한 그의 따가운 손이 싸늘한 자기의 이마와 손을 닿을 때에 자기의 가슴이 이상하게 뛰놀던 것을 생각해보매, 역시 자기의 가슴에 는 정열의 피가 이성을 필경에는 짓밟아버리고 말을 악마와 같은 힘을 숨기어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에는 역시 잘되었다 하였다. 따라서 이렇게 접촉할 기회를 주고 만드는 것은 어떠한 위험성를 띄운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85
C는 모처럼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을 버리었다. 그의 살은 벌써 문둥병 환자나 다름없이 미란(靡爛)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영 가운데에 이 미란을 벗어나서 살아보겠다는 노력의 보배가 다행히 들어 있던 것이다. 육(肉)에서 발효한 독소와 새로 살아보겠다는 욕망의 김이 조그마한 C의 가슴에서 큰 싸움을 이루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될 수 있으면 육의 미란 독소에 중화할 약을 얻고 싶었다. 또 한층 그는 생각이 깊었다.
 
86
그러나 이와 같은 갈등은 C의 전유(專有)한 것이 아니요, 자기의 가슴에도 쉬일 새 없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였다. 모처럼 새 광명을 바라보는 사람의 앞길을 아무쪼록 인도하겠다는 인정다운 생각과 그의 모든 과거의 일을 표면적으로만 생각하고 , 그를 일시의 향락하는 대상을 삼아보아도 아무 관계 없다는 무책임한 생각이 기회 있는 때마다 서로 갈등이 이루지 아니하나 하는 의심히 분명히 있었다. 이런 의심은 결국은 자기 맘에 어떠한 상처를 생겨주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되었던 오늘까지 이러한 생각이 명수 맘속에서 다만 갈등을 이루었을 뿐인 것을 그는 오늘 밤과 같이 어떠한 흥분 상태를 겪은 뒤에는 자기의 한 프라이드로 여기어왔던 것이다.
 
87
그리하여 명수는 오늘 밤 외로운 자리에서 홀로 명상하면서, 이러한 프라이드를 다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입 안으로 부르짖었다. ‘인간은 어디까지든지 악마의 퇴화한 자이다! 적극적으로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분노할 힘을 잃은 악마다. 악마 가운데의 우유부단한 악마다!’하고, 또한 ‘이러한 부르짖음은 자기 혼자를 표준한 것이다.’라고 아울러 중얼대었다.
 
 
 

4. 4

 
89
그 이튿날 아침이다. 명수는 아침밥도 먹은 듯 만 듯 급히 C를 찾아갔다. 무엇보다도 그의 병세가 밤새 어떻게 되었는지 염려가 되었다. 그리하여 허둥지둥 C의 기숙하는 집을 찾아갔다. 명수는 그 집 문 안에 들어서며 걱정을 적이 놓았다. C가 앞마루에서 세수를 하고 있는 것을 본 까닭이다. 얼굴을 씻을 정도면 열이 얼마만큼 내린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올 때에는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되었다. 참으로 늑막염의 재발이라면 시골로 내려가든지, 또는 상당한 병원에 입원을 하든지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모처럼 헤매고 나온 구렁창으로 다시 몰아넣은 셈이다. 또한 그러하다고 병원에 입원을 하기에는 C의 힘이 너무나 부치었다. 여러 가지로 어떻게 하라고 하여야 좋을까 하는 생각이 자기 하숙집 문 앞을 떠나면서부터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금 차도가 있는 것을 보니, 맘이 적이 놓였다. 그러나 어쨌든 의사의 진찰을 한 번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90
명수는 바삐 들어가며.
 
91
“밤새 좀 어떻소?”
 
92
하고, C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93
평일에도 피로한 기운이 그의 눈에서 떠난 일이 없는 C의 눈자위는 더욱 피로해 보였다. 눈두덩이 꺼진 듯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더욱 눈에 뜨이게 나타났다.
 
94
“아침에 자고 나니까 몸은 좀 식었어요. 그러나 가슴 저리는 것은 일반이어요.”
 
95
하고, C는 고적한 미소를 띤 눈으로 명수를 본다.
 
96
그 눈에는 분명히 감사하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 보였다. C는 지금까지의 생활이 생활인 것만큼, 그의 눈은 반사적으로 자기의 감정을 표하는 대신에 가장 예민한 동작을 가졌었다. 즉, 표정이 가장 예민하였었다.
 
97
“들어오세요…….”
 
98
C는 이렇게 말하고 방으로 명수의 앞을 서서 들어갔다.
 
99
“그만하니 다행이요…….”
 
100
하고, 명수도 방으로 들어갔다.
 
101
C는 거울 앞에 앉아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가끔가끔 반사적으로 “아이구!”하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부딪쳤다.
 
102
“그렇게 무리로 일어날 것 없이 편히 누우시구려! 늑막염이면 더욱 안정하여야 할 터이니까…….”
 
103
명수는 민망한 듯 이렇게 말하였다.
 
104
“갑갑해서 누웠을 수가 있어야 하지요?”
 
105
C는 이렇게 말하며 얼굴을 닦은 뒤에 손질을 하고 분까지 발랐다. 그리고 다시 “아이구!”를 발작적으로 질러가며 머리도 쪽졌다.
 
106
모든 화장을 간단히 마치고 난 C의 얼굴은 언뜻 보면 그 전날에 병으로 고생한 것 같지 않았다. 눈가의 피로한 푸른빛도 어느덧 백분 밑으로 다 숨어버리고 말았다.
 
107
“그리고 나니까 암시랑찮은 사람 같구려!”
 
108
명수는 빈정대듯 이렇게 말하였다.
 
109
“하룻밤 동안에 아주 병인이 되어서는 어떻게 되라고요?”
 
110
C는 기쁜 듯 또한 자기의 어여쁜 얼굴에 대한 자신이 있는 듯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111
그리하여 명수는 C와 의논한 결과, 좌우간 병원에 가서 한 번 진찰이라도 해보기로 되었다.
 
 
 

5. 5

 
113
N병원 환자 대합실에는 얼굴빛이 유난히 핼쑥한 환자 육칠 명이 걸상에 앉았다. 명수는 C의 곁에 앉았다. 이 대합실 안에서 명수의 얼굴이 제일 생기가 있었다. 여러 사람은 명수와 C를 번갈아 보며 이상스럽게 여기는 빛을 나타내었다 명수는 확실히 . 이 병원에 여러 환자들과 같이 앉을 자격이 없었다. 이 N병원은 호흡기병을 전문으로 보는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이 병원 오는 환자는 대개 폐병 환자나 늑막염 환자, 또는 다른 결핵성을 가진 환자들이었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에는 폐병이 삼 기에나 가까운 듯한 눈이 움푹 들어가고, 광대뼈가 나온 환자도 이삼 인 보였다. 그들은 기침을 할 때마다 수건을 입에 대기는 하였으나, 그의 비말(飛沫)이 명수의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듯하였다. 그의 신경은 대단 날카로워졌다. 결핵균이 자기 폐에 방금 집을 짓는 것처럼 조마조마한 생각이 났다. 거기에 앉았기가 자못 불안심되었다. 곧 밖으로 뛰어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C가 곁에 앉아 있다. 혼자 나오기는 민망하였다.
 
114
이러한 동안에 명수의 머리는 띵하여졌다. 그리고 정신이 흐릿하여지는 듯 하였다. 대합실 안은 벽을 바른 빛이라든지, 또는 기구라든지 모두 단정하였다. 그리고 방 한 켠에는 와사(瓦斯)난로가 소리를 부옥 지르며 보기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파란 불길이 골탄을 빨갛게 태두며 호듯한 기운을 한없이 내뿜었다. 명수는 한참 동안이나 타오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C도 불유쾌한 듯 명수의 소매를 잡아끌며 바깥으로 나가자 한다.
 
115
명수는 C를 앞에 세우고 병원 낭하로 나왔다. 흰옷 입은 간호부와 병원 사무원들이 슬리퍼를 따각 끌고 왔다 갔다 하였다. 두 사람은 한편 구석에 서서 바깥으로 뜰을 바라보았다.
 
116
한참 있다가 일본말로 C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명수는 그 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117
그곳에 간호부가 종이를 들고,
 
118
“C가 누구십니까? 이리 오세요.” 한다.
 
119
C는 그 부르는 곳으로 갔다. 그곳은 진찰실이었다. 그 방에도 난로가 보기좋게 타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편 구석에는 병풍을 쳤었다.
 
120
“체중을 달아보게 이리 오세요.”
 
121
명수는 통역을 하였다.
 
122
간호부는 속옷만 입고, 겉옷을 다 벗어 달아보라 하였다.
 
123
C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주저주저하였다.
 
124
간호부는 눈치를 차린 듯,
 
125
“그러면 이리 오셔서 벗구려!”
 
126
하고 옷 벗어놓은 광주리를 들고 병풍 뒤로 들어갔다. C도 따라 들어갔다. 한참 뒤에 저울추 노는 소리가 떨쿠덩떨쿠덩하더니,
 
127
“당신은 대단 무겁습니다.”
 
128
하는 간호부의 말소리가 들리었다.
 
129
얼마 아니 되어 는 치마끈을 C 허름하게 매고, 저고리끈을 풀은 그대로 얼굴을 조금 붉히어 가지고 다시 방으로 나왔다. 간호부는 다시 C를 인도하여 건넌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방문 위에는 예진실(豫診室)이라 써붙이었다. 명수도 따라 들어갔다.
 
130
간호부는 명수를 향하여
 
131
“이분은 아마 일본말 모르시지요? 같이 오셨거든 통변을 좀 해주세요.”
 
132
명수는 진찰하는 통변을 하러 들어간 것이다.
 
133
예진실 안에는 여러 가지 기구가 나열하였다. 예심실 겸 실험실, 약국 모두 겸한 듯하였다. 시험관이 보기 좋게 책상 위에 늘어놓였고, 현미경도 여러 개 유리창 아래에 유리 항아리 안에 들었었다. 한편 벽에는 약장이 놓였었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회전의자를 타고 앉은 젊은이가 있다. 그는 흰 수술복을 입고 앉았다가, 간호부가 가져온 진찰부를 앞에 놓고, C에게 병세를 꼬치꼬치 묻기 시작하였다.
 
134
나이, 병이 언제서 발생한 것이며, 또는 근일에는 병세가 어떠하며, 기혼인지 미혼인자, 별별 것을 다 자세히 자세히 묻는다. 명수는 일일이 통변을 하였다. 이 통변하는 동안에 명수는 물어보기도 거북하고, 대답하기도 낯이 호듯한 적이 많았다.
 
135
의사가
 
136
“기혼이오, 미혼이오?”
 
137
하고 물을 때, C의 얼굴빛은 무엇이라 대답하여야 좋을는지 당황해보였다. 그의 이름은 처녀나, 성적으로는 기혼이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138
명수는 얼핏 미혼이라 대답해주었다. C는 명수가 대답한 것을 몰라 답답하였던지
 
139
“무엇이라고 하셨어요?”
 
140
하고 묻는다.
 
141
“처녀라고요!”
 
142
명수는 대답하였다.
 
143
C의 얼굴은 조금 붉었다. 그리고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144
또 의사는 월경이 언제부터 있었으며, 도수는 어떠하며, 월경할 때에 고통같은 것이 없냐고 묻는다.
 
145
명수는 얼굴을 붉히면서 통변을 하였다. C는 그 묻는 말을 일일이 대답하였다. 말하는 그의 얼굴빛이 또 붉었다. 의사는 일일이 받아쓴다. 명수는 괜히 이런 통변을 하러 온 것이라고 후회하는 생각도 났다. 그러나 잘 왔다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146
예진을 다 마친 뒤에 그 진찰부를 간호부가 가지고 나갔다. 얼마 아니 되어 간호부가 나와 C를 다시 불러 데려갔다. 명수는 또 진찰실로 따라 들어 갔다. 그곳에는 외형으로 보아도 박사인 듯한 늙은 의사가 안경을 코 중턱에 걸치고 들어오는 사람을 안경 위로 한 번 보더니,
 
147
“저 처녀가 C씨?”
 
148
하고, 곁에 있는 간호부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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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부는 그렇다 대답하였다. 늙은 의사는 한참 동안 진단부의 예진에 기록한 것을 바라보더니, C의 곁으로 가까이 와서 C의 저고리를 벗으라 하고는 전신을 한참 주물러본다. 그리고 턱과 목의 길이를 자로 재기도 하고, 또한 머리의 각도를 컴퍼스로 재기도 한다. 명수는 지금까지 여러 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바라보기도 하였지만, 이렇게 자세히 싫증이 나도록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청진기를 C의 가슴과 등에 빈 데 없이 이리저리 대고, 한참 동안을 듣는다. 그리고 무어라고 독일말 악센트로 부른다. 그 곁에 앉은 조수는 늙은 의사의 부르는 대로 그것을 진료부에다 적어 넣었다.
 
150
명수는 이러한 광경을 곁에서 한참 보고 있었다. C의 시선은 늙은 의사를 한 번 보고는 반드시 명수에게로 왔다. C의 그 분통 같은 살결을 주름살이 더 핀 쭈글쭈글한 손으로 함부로 주무르는 것이 명수에게는 아까운 듯한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가슴에 두렷하게 고운 선을 그리고 붙어 있던, 옛날 그리고 조각을 대한 듯한 젖통 사이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상아의 청진기가 그 곱고 보드라운 살에 조화가 되는 듯하였다. 명수는 문득 어떠한 쇼크를 느끼었다.
 
151
늙은 의사는 C를 한 번 이렇게 진찰한 뒤에, 그 건넌방으로 오라 한다. C를 따라 명수는 또 들어갔다. 그 방문 위에 X선실이라 하였다. 엑스광선으로 진찰하는 방이었다. 방안에 들어서매 여러 복잡한 기계 장치가 바로 앞에 나타났다. 방 안은 캄캄하였다. 어느 한편 구석에서 유령이 곧 뛰어나올 듯하였다. 온 방 안이 모두 검은 칠을 한 것처럼 답답하였다. 그리고 한편 구석 책상 위에 전등 한 개가 삼면을 가리고, 앞만 환하게 비치고 있다. 그 앞에는 한 사람이 책을 놓고 앉았다. 어떠한 마술실에 들어온 듯하였다.
 
152
C는 방 안에 들어서며 깜짝 놀래었다. 그러며 명수의 손을 두 팔로 꽉 안으며 머리를 명수의 가슴에다 파묻고,
 
153
“아이구, 무서워…….”
 
154
하고, 가늘게 부르짖었다.
 
155
C의 보드라운 손이 팔에 닿고, 그의 머리털이 아래턱을 싹 스칠 때에 몸이 부르르 떨리었다. C의 행동이 어떠한 공포에 무의식적으로 일어 나왔다 할지라도, X광선실이 어떠한 것을 미리 알고 들어와서 그다지 두려움이 없는 명수에게는 큰 쇼크를 다시 일으킬 수 없었다. 명수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C의 상반신을 얼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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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냄새,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를 때에 명수의 맘은 엑스광선실보다 더 캄캄해지고 말았다. 그는 일종의 현훈을 느끼었다. 전등불이 하나 켜졌다.
 
157
C는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잡았던 명수의 팔을 놓고, 의사의 지휘대로 X광선이 방사되는 진공관 앞에 섰다. 의사는 위치를 자세히 살피더니 무어라 군호를 하였다. 커졌던 전등이 탁 꺼지며 “윙윙 쉬쉬”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의사는 현광판(現光板)을 C의 가슴에다 대었다.
 
158
그 현광판에는 검은 부분과 희고 묽은 부분이 분명한 촉루의 그림 한 장이 나타났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염통의 부분이 움직이어 보이었다. 의사는 손가락으로 앙당한 갈비뼈를 짚어가며, 역시 이상한 악센트로 무어라고 중얼대었다. 그것을 한 조수는 한편만 밝아 보이는 등불 아래에서 기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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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저 앙당한 뼈가 바로 이삼 분 전에 나의 가슴에 덥석 안기던 C의 뼈라 할 때에 어떠한 이상히도 환멸을 느끼었다. 저래도 사람! 몸이 으쓱하였다. C의 눈은 그 촉루 위에서 반짝거리었다. 이때의 빤작거리는 눈은 어떠한 유령의 눈 같았다. 촉루가 검은 보자기로 춤을 추는 듯하였다. 이것이 사람의 정체인가 하는 생각을 할 때에 모든 사람을 한 번 X선 앞에다 놓고 보고 싶었다. 한참 있다가 X선 진찰이 끝난 뒤에 다시 진찰실로 들어왔다. 의사의 말이 이러하였다.
 
160
“그다지 걱정할 것은 없소. 늑막염이 조금 비후(肥厚)하였으니까, 잘 조섭만 하면 더치지는 않을 것이오. 아무쪼록 공기 좋은 곳에서 자양물을 먹고 지나는 것이 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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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래 진찰한 결과가 겨우 이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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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는 C를 앞에 세우고 N병원 문을 나왔다. C의 여관까지 가는 동안에 그이 머리에서 공기가 좋은 곳, 자양물 많이 먹을 것, 공기가 더러운 도회, 맛없는 여관 밥, 늑막염, 폐결핵, 번갈아 가며 그의 머리에서 휙휙 소리치며 돌아다니었다.
 
 
 

6. 6

 
164
병원에서 진찰을 한 지 사오 일 뒤다. 그 사오 일 동안 병에도 별다른 증세는 없었으나, C는 만날 때마다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중인 태도가 보였었다. 이러한 얼굴을 대할 때에 명수는 그의 심중을 짐작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병든 몸을 어떻게 치료할까 하는 경제 문제인 것으로 짐작을 못 하는 것은 아니나, 그에 대한 방법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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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C에게서 편지 한 장이 왔다. 그리고 피봉에는 “경성을 떠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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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썼었다. 명수는 참으로 의외이었다. C가 병원에서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자양물을 많이 먹고 요양하라는 진단을 받은 뒤로는, 그가 준비 학교에도 가지 않고, 또한 저녁에 다른 공부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수는 날마다 문병 겸 한 차례씩 가는 외에는, 별로 C를 만나본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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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편지 내용은 대강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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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여러 가지로 지도를 하여준 것을 감사히 여긴다는 것과 또한 모처럼 결심하고 새로운 생애에 들어가려 할 때에, 또한 이러한 병마가 다시 엄습한 것을 저주한다는 것을 센티멘털한 문구로 늘어놓았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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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어쨌든 살고 싶어요. 제가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것을 죄악처럼 여기고, 새로운 생애를 한 번 하여보자는 것도, 한 번 잘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한 병이 들어 그대로 죽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어떻게 하든지 살아야 하겠어요. 제가 살자면 돈이에요. 돈만 있으면 저의 병을 건질 수 있어요. 무엇보다 돈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뿐 이에요. 그러나 저에게는 돈이 없어요. 저는 여러 날 밤을 새워가며 생각하여보았어요. 어째든 목숨을 이어가야 되겠어요. 선생님! 할 수 없는 여자라고 노하지 마세요. 저는 돈 때문에, 아니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염려는 마세요. 제가 다시 종전과 같은 생활은 않겠으나, 이 몸의 건강을 다시 회복하여줄 사람에게로 가겠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살아야 할 터이니까요…….” 하였었다.
 
170
명수는 편지를 한참 보았다. 손에 들었던 물건을 떨어뜨린 것같이 허퉁하였다. 문득 부르짖었다.
 
171
“어여쁜 악마!” 하고.
 
 
172
《동광》, 1927년 1월
【원문】어여쁜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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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상(李益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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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