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악(惡)이든 선(善)이든간에, 세상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듯한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대하고 싶다. 반드시 피로한 신경이 파격적인 자극이거나, 충격이거나 그러한 색다른 맛을 구하여보고 싶다는, 엽기적(獵奇的)인 호기심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닐 게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랫동안 그러한 성격을 탐구하기에 내심으론 적지 않은 노력을 거듭해보았다. 악의 아름다움, 혹은 선의 아름다움 ⎯그것보다도 악이라든가 선이라든가, 그러한 ‘모럴’ 이 개입될 여지가 없도록 우선 강렬한 걷잡을 수 없는 성격의 매력 ⎯그렇게 나는 막연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이나마, 이러한 매력에 휩쓸려서 나 자신을 송두리째 그곳에 파묻고 의탁해보고 싶은, 그러한 욕구 ⎯.
3
어떤 날 오후, 봄이라지만 아직도 추위가 완전히 대기 속에서 가시어버리지 않은 날, 나는 영화 상설관에서 〈페페 르 모코〉를 구경하고 7시경에 거리를 나섰다. 저녁을 먹어야 할 끼니 때가 이미 지났으나, 곧 버스에 시달리면서 집으로 향할 생각을 먹지 않고, 어디 그늘진 거리나 거닐면서 지금 보고 나오는 토키가 주는 아름다운 흥분을, 고즈넉하니 향락하고 싶어서, 나는 발을 뒷골목으로 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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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빈약한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의 상념(想念)의 촉수(觸手)는 카즈바의 소란하고 수상스러운 세계를 헤매고 있었다. 〈페페 르 모코〉가 소프트의 뒷전을 추켜서 머리에 올려놓고, 줄이 반듯한 양복에 색 구두를 신고, 목에는 흰 명주 수건을 얌전히 둘러 감고서, 카즈바의 소굴을 탈출하여 계집을 찾아 부두로 향하던 그림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어깨 너머로, 혹은 그의 눈이 부딪치는 곳에서, 한없이 움직이며 전개되던 카즈바의 괴상한 골목이, 마치 빈약하고 단조로운 이 서울 거리인 양, 나의 앞으로, 지나치는 나의 길 옆으로 자꾸만자꾸만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것이다. 이 카즈바의 헤아릴 수 없는 수상한 분위기 속에 아름다운 〈페페 르모코〉⎯장가방의 얼굴이 기연히 솟아올라 나의 눈을 사로잡아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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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면서 내가 어느 담뱃가게 앞에서 휘어돌려고 할 때에 나는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평상시에 담배를 피지 않는 나로서는 격을 깨뜨린 행동이다. 담배를 사서 갑을 따고 한 가치를 뽑아 입술에 물고서 흡사 〈페페 르 모코〉마냥으로 찍 성냥을 그어 담배에 옮겼을 때 슬며시 나의 옆에 와 서서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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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는 이렇게 물으면서 나와 악수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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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빙빙 돌아서, 이쪽으로 다시 돌아나올 걸, 어쩌자고 그늘진 골목으로 들었던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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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즉 신문 기자인 나의 친구 박군은 영화관에서 나오는 나를 발견하고 뒤를 쫓은 것이라 한다. 내가 두어 마디 되지도 않은 설명을 붙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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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 그저 아직도 카즈바인 줄 알었겠지요. 그러나저러나 오래간만이니 어데서 저녁이나 같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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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친분 있는 박군을 만나 이야기해본 지도 오래 되므로 그의 안내하는 대로 둘이는 명치정 어떤 작은 요릿집 이층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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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방에 앉아서 술과 간단한 안주와 저녁을 주문해놓고 우리는 다소 무료하였다. 아직 산산한 때이라 나는 화로의 숯을 젓가락으로 그을리고 박군은 차를 마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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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문 기자인 박군에게 가끔 이렇게 묻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러면 박군은 외교 문제에서 정치 문제, 그리고는 게재 금지된 사건 같은 것도 간간이 섞어가며 그의 소속인 사회 면에 대한 거, 이러다가 이야기에 진하면 저명 신사 숙녀의 스캔들까지, 들은 대로 조사한 대로 털어놓는 것인데, 이러한 박군의 이야기가 또한 하룻밤 한담거리로는 지나친 흥미를 나에게 던져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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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차차 하고, 그래 〈페페 르 모코〉를 지금에야 본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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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싱글싱글 웃었다. 나는 박군의 이러한 말로 인연해서 다시 여태껏 잊었던 카즈바의 분위기 속에 발을 가까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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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는 다소 연극의 독백조로 중얼거리며 두 팔을 다다미에 세우고, 천장이 바람벽과 닿은 곳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나의 눈이 가 닿는 곳에 <페페 르 모코>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보는 것이다. 기선 오랑 시호(市號)의 갑판 위에 나선 계집을 수갑을 찬 페페가 부두의 철문 안에서 바라다보다가 돌연히 높은 소리를 내어 ‘캬비’하고 불러본다. 이것을 알 턱이 없고, 이 소리를 들을 턱이 없는 캬비는 그러나 그때에 마침 기선의 기적이 귀를 째면서 울려오는 바람에 귀를 틀어막고 선실로 물러간다. 페페의 얼굴에 눈물이 한 줄기 흐르고, 이어서 그는 예리한 칼로 제 배를 가르고 거꾸러진다. 기선 오랑 시호는 이때에 이미 창파를 헤치며 바다로 향하여 검은 연기를 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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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박군의 말에 문득 나는 기겁을 하듯 몸을 일으키었다. 계집은 물러 나가고 박군은 술병을 나에게로 향하여 돌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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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울의 카즈바를 구경시켜 올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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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씽긋이 웃었다. 나는 황급히 술잔을 들고 김이 몰신몰신 나는 노르끄름한 액체가 잔에 담기는 것을 기다려서 박군의 조롱을 물리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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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마주 웃었으나 받은 술을 달게 마시고 젓가락으로 스노모노(어육이나 채소에 식초를 친 요리)를 한 점 입에 넣고서 다시 술병을 들려고 하였을 때에 박군은 스스로 제 잔에 술을 따르며 혼잣말처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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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오. 지금 금방 내가 기사를 써놓고 나왔으니 내일 조간에 나겠지만 신문 기사는 결국 한 편의 사실밖엔 아무 것도 아니 되지만, 그렇게 집어치우기는 아까운 대목이 하나 있으니 그걸 내 지금 김형에게 들려줄테란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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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색하는 것을 기다려 박군은 다시 술 한 잔을 따라 맛있게 들이마시고,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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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야 있든 없든 달 없는 밤에 전찻길 위에 서서 그곳을 쳐다보면 꼭 마천루를 바라보는 것 같으다. 무학재를 마주 서서 왼편은, 금화산(金華山) 밑으로 어둑시근한 감옥이 아파트처럼 엿보이는데 높은 담장의 화살 같은 일직선의 등허리를 태양처럼 눈이 부신 전등이 군데군데 날카로운 불광을 퍼붓고 있다. 이 불광이 희미하게 사라지는 곳에 밀매음의 소굴로서 이름이 놓은 관동(館洞)이 있었고 그 중턱엔 이 또한 이름이 높은 도수장이 끼어 있었다 한편 무학제 좁디좁은 . 골짜구니로부터 유난히 까끕 서서 올라 뻗은 산봉우리는 북악(北嶽)이 되기 전에 우선 인왕산이 되어버렸는데 우중충한 산그림자에 에워 앉아서 그 밑에 별똥 같은 수많은 불광이 마치 높직하고도 무게 있는 마천루의 건축같이 보이는 것이다. 밑으로부터 올려 세면 몇 층이나 되려는가. 질서 없는 전등이 가이 없이 첩첩히 뒤덥여서 그대로 산허리를 넘었고 그것은 뻗어서 독립문을 굽어보는 곳까지 이르러 있는 것 같다. 산허리를 덮어버린 현저동 향촌동의 슬럼 지대, 이곳은 대 경성의 특수구역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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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의 시설조차 변변치는 못하다. 그러나 오다가다 한 집에서 한 두 촉씩, 그것도 다른 문화 시설에 비하면 속옷 벗고 장두칼이다. 길이라 이름붙일 길이 없고 상수도 하수도 대문과 변소가 없는 집이 수두룩하다. 방공상이나 방화상 견지에서 보면 불량 주택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첫째 길이 제대로 뻗어 있지 못하니 작은 손구루마조차 굴러다니지 못하고, 공동 수도가 밑으로 서너 개, 그러나 하수구가 없으니 구정물이 그대로 길 위를 흐르고 겨울이면 빙판이 진다. 불자동차가 통하지 못 할 것은 정한 이치지만 어디다가 호스를 박고, 어느 골목을 휘어돌아 방화수를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냐. 도시 계획이나 구획 정리가 이곳에 와선 군입을 다실 밖에 별도리가 없다. 여름 복허리엔 물난리가 나고, 우물과 공설 수통을 에워싸고 동리와 동리, 집과 집, 사람과 사람의 추악한 승강이 일어난다. 서울의 범죄 구역을 들자면 아마도 신당리, 왕십리 지대와 이곳이 서로 백중을 다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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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이야기한 박군은, 그 동안에 날라다 놓은 밥 반찬에서 안주 될 만한 것을 옮겨놓고 손뼉을 두드려 따끈한 술을 다시 청하였다. 그는 찻잔에서 식은 차를 재떨이에 쏟아버리고 따끈한 술을 가득히 부어 쭉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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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어대는 찻잔을 받아 들고 나도 덤덤히 술이 가득히 담기기를 기다렸다. 박군은 전복을 하나 맛나게 씹어 먹으면서 내가 입에서 찻잔을 떼는 것을 기다려,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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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윤달이 끼인 때문인지 다양한 오후이면 완연한 봄이면서도 해가 질 무렵부터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그날 밤은 겨울에 못지 않게 날이 산산하였다. 밤이 10시가 넘으니까 행인도 드물어지고 거세인 바람만이 거리와 골목을 설레이면서 먼지를 뿌리고 가겟문 유리창 문풍지 할 것 없이 맞부딪치는 것은 무엇이나 한참씩을 흔들어놓고야 어디로 슬쩍 물러나는 것인데 이러한 시각에 영천행 전차에서 서성거리는 어린 계집을 뒤세우고 익숙하니 냉큼 길 위에 내려선 키가 작달막한 사나이가 하나 있었다. 그 계집과 자기는 동행이 아닌 것처럼 차에서 내리면서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형무소 사식 차입집 옆 골목을 향하여 걸어갔으나 골목으로 바람과 불광을 피하여 몸을 숨긴 뒤에 계집이 제 뒤를 쫓아오도록 잠시 동안을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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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크지 않은 보퉁이를 왼편에 끼고, 그때 마침 바람이 길 바닥 위를 몰아치는 바람에, 바른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몸을 비꼬듯 하다가 앞선 사나이를 잃어버리면 안 되겠다고 머리를 수굿하고 긴 머리채를 잔등과 궁둥이 위에서 흐느적거리며 역시 사식 차입집 옆 골목을 향하여 토닥토닥 고무 신발을 옮겨놓다가, 낡은 중절모 밑으로 물끄러미 기다리고 있는 수염발이 지저분한 사나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계집은 잠시 입 가장에 웃음을 그리려다 지워버린다. 사나이가 그 웃음을 기다리거나 또는 소중히 마주 대하여주거나 그렇지 않고 그대로 계집의 팔을 부윽 끌어 한편에 끼듯 하고 고불고불한 골목길을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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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사람에겐 지척을 어쩔 수 없는 험상궂고 가파른 좁은 골목이었다. 막다른 골목처럼 앞이 딱 막혔다가도 그 집 뜰 안처럼 된 한 귀퉁이를 더듬으면 다시 길 위에 나설 수도 있었다. 절벽 같은 돌바위가 깎은 듯이 앞을 가로 막았다가도 그 옆으로 간신히 허리끈 같은 좁은 길이 기어서 빠져 올라가고 있었다. 해가 내리 쬘 때엔 구질구질하게 녹았던 것이 지금은 다시 얼어붙었는지, 한참씩 빙하처럼 얼음이 덮인 곳이 연달아 나섰다. 이러한 길을 두 남녀는 기어올라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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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가다 그래도 유족히 사는 집이라고 뜰 밖까지 불광이 비친 데선 이 두 남녀가 길을 더듬어 윗동네를 향하여 올라가는 모양이 희미하게 나타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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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는 오십이 가까운 마흔 예닐곱 ⎯키는 작달막하여 다섯 자를 얼마 넘지 못하겠는데 몸은 다부지게 생긴 것을 낡은 능견 두루마리로 두르고 까까머리가 더부룩하게 자란, 위께가 뾰족 나와, 마치 대추씨처럼 생긴 머리에는 때가 재들재들 끼인 회색 중절모를 푹 눌러쓰고 있다. 얼굴은 구레나룻과 턱 아래에 히끈히끈 흰 털이 섞인 잔 수염이 쭉 깔리고 그 가운데 코가 두드러져 나와야 할 것인데 이것 역시 개구리 대가리처럼 앞 머리만 벌썩 들린 것이 굴뚝 같은 들창코가 두 구멍, 코허리는 볼편과 구별이 서지않게 그대로 펑퍼짐한 것이 눈덕을 지나 깊직한 세 줄기의 주름살이 건너간 답답한 이마에 연달아 있다. ⎯그러나 물론 희미한 불광에 그것이 나타날 이치는 없고 오직 불빛이 휘끈 그의 얼굴을 스칠 때엔 어덴가 괴죄죄한 특징만이 그 작달막한 키에 어울려서 인상 깊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성을 권(權)가로 부르고 이름을 명보(命輔)라 하는 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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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권가에게 한 팔을 잡혀서 간신히 길을 더듬어 올라가느라고 가쁜 숨을 연신 포포 내뿜으면서 때때론 사나이의 팔에 몸을 싣고 그대로 주저앉을 듯 하다가도 사정 없이 끌어 당기는 힘에 다시 숨도 돌릴 새 없이 궐렁매지처럼 쫓아가고 있는 계집은 연세는 열 일곱이나 궁둥이며 앙가슴이며 또는 토실토실하니 버즘과 솜털이 떨어지면서 돋아오르는 볼편이며 제법 계집티가 나는 숙성한 년인데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끝에 붉은 인조견 댕기를 매어놓은 것이라든가 친친 감기는 옥색 교직 하비단 치마에 분홍 교직 자미사 저고리를 입은 품이라든가 저는 제법 모양을 낸다는 것이 이마에 더부룩한 머리카락을 헤어핀으로 꾹 꽂아 추켜 올린 것과 함께 시골티를 가시지 못한 그러한 계집이기 갈 데 없었다. 불량한 계집애라든가 결코 바람쟁이 계집년이라든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 낫세 그만 시절이면 서울을 떠나 백 리 이백 리, 고만한 거리에 흩어져 있는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말하자면 시골 농군보다도 서울 멋쟁이 서방님, 허구 헌날 밭이나 논에서 흙과 두엄 속에 썩느니보다도 한 번 눈부시게 찬란한 도회지에 ⎯이렇게 동경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어처구니 없는 고무풍선 같은 바람을 안은 계집이기엔 틀림이 없었다. 어제 오늘 비로소 크림이나 분가루를 문대었는지 살에 배지도 않은 화장이 피부에서 얼룩이 진 채 딴쩍지가 되어 코와 볼편에 발리었으나 파닥지의 바탕은 갸름한 눈과 오뚝한 코와 또 물기가 흐르는 입술과 달걀 같은 윤곽과 합해서 그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만한 얼굴이면 어디다 내놓아도 빠지진 않겠다면 그건 좀 지나친 과장일는지 몰라도 시골서 썩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칠 만은 하겠다고 생각하기엔 그다지 부족을 느끼는 생김새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항용 불러서 언년이 언년이, 하는데 권가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호적등본에는 년 자 대신에 계집 녀 자를 써서 언녀로 되어 있었다. 강원도에 가까운 가평 땅 어느 농촌의 출생이라고 권가가 가진 민적등본에는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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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권가란 사나이와 언년이, 혹은 언녀라는 계집애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권가의 둘째 딸이나 셋째 딸, 그렇지 않으면 무슨 조카딸쯤이라면 꼭 좋겠다. 아버지나 삼촌이나 아저씨가 서울 구경을 시킨다고 오늘 시골서 서울로 데리고 올라왔다 ⎯이것이 제일 자연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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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년이의 성은 첫째 권가가 아니었다. 그러면 권가는 언년이의 외삼촌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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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어찌 되었건 이 사나이와 계집은 지금 현저동 마루턱 가까이 와서 잠깐 발을 멈칫하고 형세를 관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천루를 절반 이상은 올라온 것인데 권가는 어느 으슥한 담장 밑에 서더니, 우뚝 걷던 걸음을 멈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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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다리 아파. 인제 그만 다 왔어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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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에서 손을 떼고 치맛자락을 만져보며 계집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무슨 안 될 말이나 한 것처럼 황급히 몸을 떨쳐, 바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버리는 것이다. 그 바람에 언년이의 ‘아버지’하던 말소리는 ‘지’자를 채 내지 못하고 어리둥절해서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수상한 행동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갈구리 같은 손을 그대로 휙 언년이의 목에다 감아버렸다. 권가는 언년이가 목소리를 내었다고 모진 형벌을 주려는 것일까. ⎯언년이는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적지 않이 겁을 집어먹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목을 둘러감은 능견 두루마기의 팔소매가 부욱 언년이의 목을 끌어당기었다고 생각되던 순간, 언년이의 얼굴은 산듯한 비단의 촉감을 거쳐서 어느 새에 지저분한 수염발을 마주 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가쁜 숨결이 연거푸 언년이의 안면을 삽살개처럼 미칠 듯이 설레인 뒤에 으스러지도록 지금 겨우 탄력이 생기려는 어린 계집의 몸뚱아리는 권가의 가슴팍에서 파닥거리며 접쳐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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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을 놓고 한 번 한숨을 푸 내뿜고난 뒤에 권가는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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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말소리를 내어 언년이의 벌벌 떠는 몸을 앞으로 당기었으나 손을 맞잡고 앞발을 내짚었을 때에, 그가 입 속으로 혼잣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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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중얼거린 것은 물론 언년이의 귓속에까지 들리지는 아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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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둘이는 목적하는 집 앞에 이르렀다. 집은 이 부근에선 좋은 편에 속하는 것으로, 지붕은 함석을 덮고 외짝이나마 삐뚜룸히 대문이 닫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반 칸만큼 대청이 마주 보이고 안방이 칸 반, 건넌방이 한 칸, 그러고는 대문과 붙은 뜰 아랫방이 한 칸 몫으로 넘어져가는 기둥을 찌그뚱하니 세우고 있다. 그러나 물론 집 안의 구조나 외모도 그러한 밤에는 뚜렷이 나타날 턱이 없고 밖에서는 오직 건넌방의 불광이 훤한 것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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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전차에서 내릴 때와는 달리 적지 않이 겁을 집어먹고 사시나무 떨듯 웅크리고 섰는 언년이를 비탈 한 귀퉁이에 세워놓고 권가는 저척저척 걸어가서 뜰 아랫방 들창을 뚱뚱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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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늙은 여인네 목소리가 캄캄한 방안에서 나더니, 그 밑에 대답하듯 기침 소리가 두어 번 밖에서 들리는 것을 암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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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재처 묻는 소리가 길가에 서 있는 언년이에게까지 들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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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권가는 짤막하니 대답하였다. 대문이 찌그뚱하니 열리는데 권가보다도 다리 하나는 없을 만큼 적디적은 늙은 할망구가 깨우뚱 밖을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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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년이는 권가의 손질에 따라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그러나 적지 않이 긴장하여 그들의 뒤를 좇아 뜰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뜰 안에 들어서자 불광이 비치던 방문이 덜렁덜렁 열리면서 젊은 사나이의 상반신이 불쑥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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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치운데 수고했소. 서성거릴 거 없이 이리 데리고 들어오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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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가는 언년이를 대청에 앉힌 채, 노파의 뒤를 따라 저 혼자만 방안으로 들어갔고,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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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을 그대로 묵살해버리고서 드윽 장지문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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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 있던 젊은 사나이 ⎯그러나 권가에 비해서 젊다는 것이지 그의 연세가 무어 스물 안짝이라던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역시 나이는 사십 줄에 들어서 서른 예닐곱, 눈 가장과 입 가장의 잔주름이 그것을 넉넉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남자답지도 않게 밤 단장이 한창 바쁘다. 단장이라고 하여도 머리는 벌써 찐득찐득한 빠루를 기름이 뚝뚝 흐르게 발라서 올백으로 넘겨 빗었고, 지금은 거꾸로 세수한 끝에 면도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얼굴 생김새가 털 같은 것이 지저분하게 상판대기를 덮을 그런 종류의 파닥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세수도 하고 머리도 빗고 누구를 기다리다 지쳐서 수은이 떨어져서 어룽어룽한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몇 오라기 미꾸라지 수염 같은 것을 입술 위에서 발견하고 이어 허리에서 혁대를 풀어 50전 짜리 면도를 문대고 지금은 그렇게 수염을 깍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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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늙은 할망구가 객쩍은 소리를 하는 품으로 보아 이 사나이는 서(徐)가 성을 가진 모양이다. 아닌게아니라 그의 성명은 서상호(徐相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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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는 면도를 집어 치우고 손바닥으로 발그레한 인중께를 털어 부비더니, 그 다음엔 혁대로 허리 괴춤을 묶었다. 그러고는 날씬한 상반신에 저고리를 걸쳤다. 회색 교직 숙수 마고자의 가짜 밀화 단추가 번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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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가는 윗목에 쭈그리고 앉아서 잔뜩 눈쌀을 찌푸리고 서가의 하는 품을 바라보고 있다. 그 표정은 솔찬히 복잡한 것으로 어찌 보면 무슨 일이 뒤틀 려서 우울해 하는 표정 같기도 하고 또 한편이 으스러진 입술이라든가 이글이글하는 두 눈알이라든가 이맛살이라든가 이러한 것으로 보면 어딘가 질투심 같은 것이 서리어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사실 그는 내심, 눈앞에 보이는 기름달판이 같은 반들반들한 사나이에게 저도 모르는 질투를 느끼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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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녀석이 단장을 하고 그리군 언년이를 집어 삼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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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제 심정을, 저 스스로도 의식할 정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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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편 노파나 서가로서는 권가의 잔뜩 찌푸린 표정에서 그러한 색다른 뉘앙스를 붙잡을 턱이 만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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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나 벗구 편안히 앉으시구려. 무어 일이 생각대로 되질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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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렇게밖에 물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조차 그들에겐 이해키 어려운 일이긴 하였다. 방물장수가 새에 서서 이미 호적등본과 백지 위임장은 받아놓았다 하였고 그래서 계집의 본집에 몇 십 원 들려주고, 또 옷가지 해 입히는 데 돈 10원 든다 하였고, 그러그러해서 합쳐 30원을 가져간 것이 바로 어저께, 오늘 저녁녘에 권가가 스스로 와서 하는 말엔 그 계집이 지금 춘천 차부에서 내려서 어느 관수정 여관에 들어 있다고 했으니 그 뒤에 불과 몇 시간, ‘생각대로 되지 않을’ 그런 사건이 생길 틈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서가로서는 다짜고짜로 그것을 물을 수도 없었고, 또 데리고 온 계집을 종시 대청 마루에 남겨두는 것과 지금 짓고 있는 얼굴의 표정으로 미루어 다소 수상한 기색을 눈치 채고 있지 않을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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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의 말에 권가는 대답이 없다. 두 다리는 역시 쭈그리고 앉은 채, 중절모를 가만히 벗어서 장판 위에 놓았을 뿐이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진득이 내발려 있는 것이 뚫어지게 쳐다보는 노파의 늙은 눈에도 낱낱이 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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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무슨 일이 생겼수. 어디 속이라도 편치 않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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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서가는 제법 근심하는 표정으로 권가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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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서야 권가는 멍청하니 땅바닥을 한군데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는데 그러나 그 머리를 주억거리는 것이 어느 편을 수긍하는 것인지를 마주 앉아 있는 서가와 할망구가 알아차리기 전에 그는 눈을 들어 서가를 쳐다보고 갑자기 표정에 긴장한 빛을 띠면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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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만은 서주사에게 맡길 수 없소. 내가 혼자서 처리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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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의 낯짝은 휘끈 검은 빛이 지나갔으나 그는 다시 마음의 자세를 바로 잡듯이 어깨를 한 번 추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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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무릎팍을 한 반 걸음 앞으로 내밀었다. 이렇게 물어보는 서상호의 태도는 반드시 일종의 자세를 취하려는 허세만은 아니었다. 서상호가 권명보를 알아오던 상식을 갖고는 지금의 권가의 하는 행동과 말귀를 도저히 알아 차릴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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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가 ⎯그는 돈이면 그만인 사나이었다. 그러나 서가 ⎯자기는 돈도 돈이려니와, 돈보다 못지 않게 호색의 취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이 방안에 앉아 있는 세 사람, 그리고 혹시는 대청 반 칸을 건너서 칸 반 방에 쭈루루 나란히 하여 잠이 들었는지 꿈을 꾸는지 알 턱이 없는 여섯 년의 계집년들까지라도 번연히 알려져 있는 하나의 상식이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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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렇지 않다면 권가와 서가와의 결합이랄까 혹은 시체말로 콤비랄까, 어쨌든 두 사람의 협력은 아예 이루어지지부터 않았다. 권가는 농촌에 지반을 갖고 있는 대신, 서가는 유곽이나 북지 방면에 줄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서로서로의 장기와 단점이 서로 어울려서 비로소 한 쌍을 이루었던 것이 아니냐. 단 한 가지 서가는 계집을 팔기 전에 얼마 동안 제가 마음대로 주물러볼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권가는 이러한 서가의 행동에 일언반구의 불평이 없이 간혹 그런 것을 농간해서 제 앞으로 올 부분 돈을 늘리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두 삶의 관계였다. 그 관계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벌써 꼬박 2년이 계속되었다. 서상호가 지금 권명보의 언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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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묻는 서가의 물음에 권가는 단호한 빛을 띠인 적지 않이 무뚝뚝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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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말할 것두 아무 것두 없소. 저 아인 내가 갖겠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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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마디 말로써, 그리고 권가의 얼굴에 나타난 결연한 표정으로써 서가는 사연의 내막을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단 한 가지 혹시 권가가 이런 연극을 부려놓고 은근히 제 앞으로 갈 몫을 한 부분 늘리려는 흉계는 아닌가, 하는 의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러한 의심마저 너무도 달라진 권가의 표정이 여지없이 지워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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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는 앞으로 내밀었던 상반신과 얼굴을 뒤로 이끌듯 하면서, ‘흠 ⎯’하고 한숨 비슷한 것을 내뿜었다. 그러나 서가의 상반신이 뒤로 물러선 것은 결코 그가 권가의 요구에 대하여 양보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반들반들한 얼굴에도 녹녹치 않은 표정이 정돈되기 시작하였다. 일정한 거리까지 얼굴을 뒤로 물리고 한참동안을 면바로 권가의 낯짝을 바라다보더니, 지금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긴장한 공기를 대번에 휘저어버리려듯이, 그는 갑자기 콧방귀를 ‘흥’하니 뀌어버렸다. 이 돌연스런 콧방귀 소리에 늙은 할망구가 흠칠하고 놀래는 듯한 것도 잠시 동안, 이어서 서가의 꼭 다물었던 입술의 한편 모서리가 이그러지듯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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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이 아마 취담을 허시지. 이러시지 마시고, 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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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아래로 할망구에게 대청께를 가리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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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색시를 데려 들어오슈. 아마 이 권주사가 취담을 허시는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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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망구는 두 사람 사이에 적지 않은 파란이 일어날 것을 직감하고 어떻게 이들의 관계를 원활하게 소통을 시키고 오순도순히 타협을 시킬 방도는 없을런가 하고 쩔쩔매고 있으나, 그러한 묘안이 좀처럼 튀어 나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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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보통 사람들 사이라면 어린 계집을 하나 가운데 놓고 이런 험악한 상태를 만들 필요는 조금도 없을 것이다. 서상호로 말할지라도 벌써 2년 동안 그것이 쇠통 권명보 한 사람의 덕분은 아닐지 삼아도, 수많은 계집을 제 마음대로 주물러보았고, 그에 대하여 권명보는 이렇다 할 불평이나 또 그러한 향락과 취미를 반분하자든가, 그러한 요구든가를 한 번도 말해본 적이 없었으니, 가다오다 한 둘도 모르겠는데, 이건 그야말로 갓 마흔에 첫버선격으로 처음 요구하는 일이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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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든가, 그렇지 않으면, 좀 세찬 농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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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어, 돈만 아시던 권주사께서 바람이 나셨다. 늘그막 바람은 걷잡을 길이 없다는데 이거 큰일 났는걸. 그러나저러나 환갑되시기 전에 어디 한번 늘어지게 인생의 재미나 맛보아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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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든가 해서, 껄껄껄 웃어버리고 방을 비워주는 게 온당할 것이 아닌가. 그것도 계집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눈 넘겨보고, 그 생김새에 군침이라도 삼켜본 뒤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계집은 내 것이라고 뻗대어도 볼 것이지만 지금 어두운 속에서 뜰 안에 들어선 계집을 눈어림으로 어렴풋이 바라다보았을 뿐, 눈이 세 갠지 두 갠지 코가 모로 붙었는지도 모르는 처지에 도무지 권가와 낯을 붉히고 승강을 할 건덕지가 되지 않을 것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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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편 권명보를 두고 볼지라도 하기는 난데없이 늦바람이 났는지, 돌개 바람이 붙었는지 갑작스레 딸값에나 하는 어린 계집에게 마음이 동했느라고, 토설을 하고서 능청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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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서주사, 그 이번 계집아인 나 한 번 맛봅시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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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명함을 들일 체면이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이리된 바엔 표정을 낮추고 빌붙듯 해서 타협해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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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렇게 생각해봄이,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또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어떻게 화해를 시켜보려고, 언턱을 잡으려고 애쓰는 백전 노장인 늙은 할망구도 그러한 태평한 생각은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두 사람의 성질이며, 또 지금 만들어진 두 사람의 분위기나 호흡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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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기에도 환장을 하였는지 모르나 권가의 계집에 대한 반한 품이 결코 예사가 아니었고, 그것이 누구의 눈에도 역력히 나타나 보이면 보일수록 또 서주사로서는 그대로 넘겨 보내고 싶지 않은 어떤 미묘한 심리가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질투심이나, 성욕이나, 시기심으로 보아 버릴 수 없는 미묘한 심리가 아닌가고도 생각이 되었다. 돈만 알던 구두쇠 권가란 놈이 대번에 저렇게 반해버려 가지고, 입도 변변히 놀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계집애가 아마 절세의 미인이기 갈 데 없다. 하찮은 계집에만 짓물려 돌다가 1년에 하나 맞잡이, 그렇게 얻기 드문 양귀비 뒷다리 같은 계집을 놓친다고야 될 말이냐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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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대드는 것이라면 그건 그대로 화해를 시킬 건덕지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험악한 호흡과 자세 사이에는 일종의 ‘권리의 침해’에 대한 성격적인 항쟁이라고 할 만한 그런 대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세 사람 중에 이것을 ‘권리의 침해’나 ‘지반의 탈환’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나 그러나 의식했건 안 했건, 그것을 온 몸뚱아리를 가지고 직각(直覺)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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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한 번은 서가의 얼굴을 쳐다보고, 다음엔 권가의 표정을 살펴본 할망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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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머, 그렇게 와락부락허게스레 그러실 것이 없이, 어떻게 좀 자분자분허게, 좋도록 이야기를 해보시는 게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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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안 나오는 웃음을 웃어가며, 이야기를 붙여보려고 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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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닌 잠자쿠 계슈. 어서 저 색시나 데려 들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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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서가의 서슬이 엿보이는 말투가 다시 헝클어지려던 무거운 공기를 더욱더 긴박하게 만들고야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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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할망구는 다시 또 한 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암칠암칠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 그러나 그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작달만한 능견 두루마기의 다부진 몸뚱아리가 불쑥 방안에서 솟아오르고 이어서 그것은 장지문 앞에 가로 서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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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의 두 눈이 뱀의 눈처럼 무서운 살기를 띠고 한참을 치올려다 본다. 그러나 날씬한 그의 몸뚱아리도 벌떡 전등을 흔들며 방가운데 솟아올랐다. 불이 흔들리어 두 그림자가 바람벽 위에 움직였으나 두 사람의 몸뚱아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회색 마고자의 팔 토시가 번개처럼 능견 두루 마기의 앞깃을 감아 쥐었으나 그 순간 권가의 바른손에는 칼자루가 불빛에 번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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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신문 기자인 박군은 이야기를 이 대목에서 뚝 끊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취하여 팔을 술상에 올려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다보다가, 그가 말을 뚝 끊었을 때에 침을 들컥 삼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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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소. 이 밖에 것은 신문에 게재될 기사의 영역이니 더 말하지는 않겠 지만, 대단한 상처를 입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모두 경찰에 체포가 되었소. 그날 밤으로 권명보란 놈은 계집을 끌고 골목을 뛰어내려오다가 붙들렸고, 그의 자백으로 오늘 오후 서상호의 일당, 그리고 그 집에 유괴되어 매각될 시일을 기다리던 여섯 명의 계집 등이 모두 끌려왔소. 그런건 아무 흥미도 없는 내일 아침 조간의 영역이오. 이 두 사나이의 성격이 어떻소. 소설이 꽤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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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에는 대답치 않고 박군의 노력을 감사하기 위하여 술병을 들었다. 그가 술을 쭉 들이켠 뒤에 나는 나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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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성격이 함께 합친 것만큼, 그런 것이면 나도 홈빡 반해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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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말이 아주 끝나버리기 전에 박군은 몸을 뒤로 젖히면서 깔깔깔 대소하였다. 어인 영문을 몰라서 내가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박군은 웃음을 거두며, 다시 한번‘아하하’하고 하품 비슷한 웃음을 남긴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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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그 말이오. 여보 김형, 그 강렬한 성격에 대한 갈망이란 게, 더두 말고, 바로 현대인의 피곤한 심경이란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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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이 방금 구경하고 나온 〈페페 르 모코〉. 우리가 카즈바의 매력에 취하여버리는 것이 모두 이러한 심경이 아니오. 파리의 생활에 권태를 느낀 부르주아의 계집이 알제리의 카즈바에 흥미를 느끼고 대부호의 첩 생활에 지친 캬비가 카즈바의 왕자, 희대의 대강도 페페 르 모코에게 반하는 것이 모두 그것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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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의 얼굴은 땀발이 잡힌 것이 전등에 빛나 표한한 기색을 띠었다. 그는 새로운 에네르기를 느끼는 듯이 바른손으로 찻잔을 꽉 쥐었다가 불쑥 그것을 나에게로 내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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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술을 잔에 넘치도록 가득히 부었다. 내가 잔을 들어 입에 대도록, 그는 안주도 아무 것도 들지 않고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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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단김에 찻잔 하나를 다 들이켜고 갑자기 취기를 느꼈다. 내가 사시미 한 점을 장에 묻혀 박군의 입 앞에 가져갔을 때 그는 입술로 덥벅 그것을 받아서 입안으로 굴리면서 이 역시 취기가 몸을 휘도는지 목을 척 늘어뜨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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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즈바, 페페 르 모코, 악에의 매력, 강렬한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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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집이 떠나가라고 하, 하, 하, 하, 웃어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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