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누가 망하나 ◈
카탈로그   본문  
1926.7
최서해
1
누가 망하나?
 
2
어느 해 이른 봄 어떤 쌀쌀한 날 저녁편이었다. 나는 고향서 처음으로 올라온 어린 친구를 찾아서 관훈동 어떤 하숙으로 갔다. 오래간 만에 만난 우리는 서울 이야기 고향 소식으로 재밌게 종알거리는데 북창 밖에서 ‘우아’ 하고 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하던 이야기를 뚝 그치고 일어서서 북창을 열었다. 북창은 열었으나 키가 작은 우리는 창 안에 놓은 책상에 올라서서 북창으로 두 머리를 내밀었다.
 
3
북창 밖은 바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골목이다. 건너편으로 여러 집 담벽과 대문이 이어 있다.
 
4
어느새 그 골목에는 사람들이 우 모여섰다. 바로 우리가 내다보는 북창 건너편 커다란 평대문 앞에 순사가 서고 그 앞에 거지가 서 있다. 거지 뒤에 있는 커다란 평대문은 반쯤 열렸는데 안경 쓴 신사가 문안에 뻣뻣이 섰고 어멈인지 낯이 새까맣게 그을은 여편네가 그 뒤에서 방긋이 내다본다. 대문 위에는 전화 번호와 수도전용 패가 붙었다.
 
5
거지는 머리는 갓 깎았는데 아무것도 쓰지 않고 수염이 터부룩하다. 낯빛은 검붉은데 이마에 주름이 가기 시작한 것은 삼십이 넘어 보인다. 몸에는 솜것인지 겹것인지 찢기고 흙투성이 된 것을 걸쳤다. 키가 보통 사람보다 큰 그는 머리를 수굿하고 서서 떨어진 짚세기 신은 발끝으로 땅바닥에 돌멩이를 꾹꾹 밟고 있다.
 
6
“이놈아 바루 말해!”
 
7
뚫어지게 거지를 보는 순사는 소리를 지르면서 거지 뺨을 쳤다. 거지보다 키가 작은 순사는 거지 뺨을 칠 때 토끼같이 똑 뛰는 것 같다. 그때 여러 사람들은 벙긋 웃었다. 뺨 맞은 거지는 머리를 번쩍 들어서 순사를 보면서,
 
8
“아니올시다. 저는 몰라요! 저는 밥 빌어먹는 거지예요! 흥.” 하는 그 눈은 가느스름한 것이 큰 키와 어울리지 않으나 퍽 힘있게 보였다.
 
9
“글쎄 이놈아 왜 거짓말이야?”
 
10
하고 순사는 발길을 들어 거지를 찼다. 거지는 한걸음 뒤로 채여 나가면서,
 
11
“흥 내게 무슨 죄가 있소? 자 때리시오!”
 
12
하고는 순사 앞으로 다가섰다.
 
13
“앗따 이놈 보게 ……. 이런 놈은 단단히 가르쳐야지…… (거지의 뺨과 배를 때리고 차면서) 그래 이놈아 거지면 거지지 너보고 누가 도적질까지 하라구 가르치던? 응 이 이 죽일 놈아!”
 
14
순사는 이를 꼭 깨물고 콧잔등을 힘있게 찡기면서 때리고 찼다.
 
15
“에쿠! 에쿠후!”
 
16
배를 차면 배를 만지고 뺨을 치면 뺨을 만지면서 연방 에구 하던 거지는 순사의 매가 끝나자 이를 빡 갈고 대문간을 보면서,
 
17
“여보! 당신이 언제 봤소 ……. 내가 내가 도적질하는 것을 당신이 언제봤느냐 말이오!”
 
18
하고 발악하였다. 그 모양은 금박 안경 쓴 신사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19
“야 이놈 봐라. 이놈 어따 대고 해거냐? 응 그래 네가 왜 남의 집 마루에는 올라섰어?”
 
20
안경 쓴 신사는 거탈 좋게 말하고 순사를 힐끗 보면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21
“글쎄 마루에 올라서면 도적놈이오? 네…… 마루에 좀 올라서면 뭘 하오?”
 
22
거지는 두 눈에 피가 올올하여 발악을 하면서 신사 곁으로 달겨들었다. 신사는 무서운지 낯빛이 푸르러지면서 뒤로 주춤주춤한다.
 
23
“어── 그래 남의 집 함부로 들어오고……. 가택 침입한 죄는 없는가?”
 
24
하고 꽁무니 빼는 신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25
“이놈이 왜 야료 야? 응…… 이놈 가자!”
 
26
하고 순사는 거지를 한번 죽으라고 찬 뒤에 팔을 잡아 끌었다.
 
27
“가기는 어디를 가!”
 
28
“이놈아 파출소로 가잔 말이다!”
 
29
“나는 갈 데 없어?”
 
30
“야 이놈 봐라. 어서 반말이야? 글쎄 이놈아 어디서 반말이냔 말이다.”
 
31
하면서 순사는 전신의 힘을 다 들여서 거지를 차고 때린다. 처음에는 움직도 안 하던 거지는 땅에 푹 주저앉았다.
 
32
“때려라. 실컷 때려라. 힘자라는 대로 때려라. 응 경관은 죄 없는 사람두 때리는가? 흥.”
 
33
하면서 주저앉았던 거지는 벌떡 일어서서 순사에게 몸을 실리더니 다시 픽 돌아서서 문간에 선 신사를 와락 잡아 끌면서,
 
34
“이놈아 너와 나와 무슨 불공대천지수가 있니? 응…… 너놈 때문에 내가 이 몹쓸 매를 맞고……. 나두 돈 없으니 거지지 너놈만 못나서 거진 줄 아니? 이놈 어디 네 피를 먹고야…….”
 
35
하고 신사를 땅바닥에 둘려 넘기고 가슴 위에 올라앉았다.
 
36
“아이구! 사람 죽소 …….”
 
37
신사는 안경이 어딘가 벗겨져 버리고 커다란 두 눈이 툭 불거나와서 헐떡 거렸다. 순사는 전신의 힘을 다하여 달겨들었으나 신사의 가슴에 앉은 거지는 태연 부동이다. 한참 만에 순사는 땅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쓰더니 칼자루 잡을 사이도 없이 들고 뛰었다. 옆구리에 찬 칼은 그 바람에 놀란 듯이 그의 볼기 다리 할것없이 절칵절칵 두드린다.
 
38
순사가 뛰어간 뒤였다. 여편네와 사내 한떼가 모여들어서 거지를 때리고 밀치고 야단법석을 치나 거지는 의연히,
 
39
“이놈 네깐놈은 죽일 테다……. 그까짓 순사가 무서워서 너깐놈을 못 죽일 줄 아니?”
 
40
하고 그 힘있는 가는 눈을 굴린다. 깔려서 두 눈이 툭 불거진 신사는 낯이 흙빛같이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뻣뻣이 늘어졌다. 그것을 한참 보던 거지는 입술이 무쇠빛이 된 신사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41
“하하하 파리 목숨만도 못하구나. 흐흐흐.”
 
42
하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웃는 그 웃음은 웃음이나 독살이 잔뜩 흘렀다. 모여 섰던 군중은 낯빛이 파래서 뒤로 물러섰다.
 
43
한참 만에 거지는 일어섰다. 그 바람에 거지를 밀어 떼려던 몇몇 사람들은 쓰러지기도 하고 뒤로 밀리기도 하였다. 일어선 거지는 신사의 허리끈을 잡아서 들었다. 느른한 신사는 소리 없이 거지의 손에 들렸다.
 
44
“잘 먹고 잘 살아라. 몇 날이나 사나 보자!”
 
45
하면서 거지는 신사를 사정없이 대문간에 들이치고 태연자약하게 군중을 헤치고 나갔다. 거지가 금방 나가자 아까 뛰어가던 순사와 같이 순사 네명이 달려왔다. 그네들은 헐떡헐떡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거지의 간 곳을 물었다.
 
46
“저편으로 …….”
 
47
하고 누가 가리켰다. 순사들은 그리로 뛰어나갔다. 모였던 군중은 또 그리로 갔다. 우리는 북창을 닫았다.
 
48
“서울도 거지 있소?”
 
49
고향서 온 어린 친구는 물었다.
 
50
“서울에? 서울이 서울이 아니라 거지 천질세!”
 
51
나는 대답하였다.
 
52
“아, 빈민 구제회와 기근 무슨 회가 있어서……. 그리구 공동 숙박소…….”
 
53
하고 어린 친구는 생각던 꿈과 다른 것을 놀란다.
 
54
“흥!”
 
55
나는 웃어 버렸다.
 
56
그 이듬해 초가을이었다.
 
57
나는 어떤 친구를 따라 전라남도 법성포로 갔다. 법성포는 바다와 뫼가 좋은 곳이다.
 
58
때가 마침 음력으로 칠월 보름이라 달이 퍽 좋았다. 원래 법성포의 동령(東嶺) 달은 법성 12경 속에 드는 하나로서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미리 약속하였던 친구들과 함께 달 돋을 때에 갯가로 나아갔다. 스러져 가는 연기같이 푸르고 엷은 안개는 산을 가리고 바다를 덮고 마을을 살근히 싸고 돈다. 밀물이 소리없이 들이밀어서 소드랑 섬과 한시랑 앞까지 느긋한 바다에는 하늘빛과 마을의 불빛이 어우러 떨어져서 한 폭 그림 속 같았다.
 
59
구수산 머리에 밝고 푸르게 비친 달빛은 점점 자리를 옮겨서 구수산 밑둥을 비추고, 바다를 비추고, 우리가 선 갯가를 비추고, 마을의 지붕을 비추었다. 이제는 머리를 숙이면 바다 속에 달이 있고 머리를 들면 하늘에 달이 보인다. 달과 달이 어우러진 속에 선 나는 알 수 없는 미감에 마음이 느긋하였다. 간간이 추월루라는 유곽으로 울려나오는 노랫 가락까지 싫지 않게 들렸다. 서로 말없이 갯가에 오르락내리락하던 우리는 갯가에 둥실둥실 매여 있는 빈 배에 올랐다.
 
60
어느새 달은 천심에 가까웠다. 높은 하늘은 더 높아 보이고 빛나던 별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저편 재덕산 높은 봉우리를 넘어오는 두어 조작 흰구름은 퍽 서늘한 것이 나그네 마음을 천리 밖으로 끌어가는 듯하였다. 맑은 하늘 밝은 달 아래 드는 밀물은 속살속살 가늘고 이쁜 물결을 보인다. 혹은 앉고 혹은 비스듬 눕고 혹은 뱃머리에 서서 하늘을 보고 바다를 보고 물소리를 듣는 여러 사람의 가슴에는 한결같은 정이 떠오르는 듯이 빙그레하였다. 무슨 위대한 신비의 품에나 안긴 듯이 한참 동안 말 없던 여러 사람 가운데서 노래가 나오고 웃음이 터지고 이야기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달 좋고 바다 좋고 바람 좋은데 흥에 겨운 여러 사람은 그저 있지 않았다. 술이 벌어졌다. 이름 높은 법성 굴비 안주에 영광 소주로 목을 축인 사람들은 새로운 흥이 더 돋았다.
 
61
이때 바람결에 노래 소리가 흘려온다. 나는 마시려고 입술에 대었던 달 잠긴 술잔을 입술에서 때면서 귀를 기울였다. 여러 사람들은 그저 떠든다.
 
62
“가만 있게. 노래가 들리네!”
 
63
나는 크게 소리쳤다.
 
64
“어디?”
 
65
하면서 여러 사람들은 하던 이야기를 뚝 그치더니,
 
66
“흥! 나는 또……. 그까짓 노래는 들으나 마나 …….”
 
67
하고 K군이 떠드는 바람에 여러 사람은 또 떠들었다. 그 노래는 그리 명창은 아니나 그때 얼근히 취한 내 귀에는 그럴 듯이 들렸다.
 
68
“저게 누구야?”
 
69
나는 술을 마시고 나서 물었다.
 
70
“그게?…… 요 한 달 전부터 우리 동리에 그런 명물이 하나 생겼다네…….
 
71
괜히 돌아댕기면서 노래만 부르구……. 노래두 노래 같지 않은 것을…….”
 
72
K군은 대답하면서 굴비를 쭉 찢었다.
 
73
“뭘하는데?”
 
74
목포서 올라온 H군도 나와 같이 궁금한지 물었다.
 
75
“앗따 술이나 먹고 이야기나 하세……. 거지야 거지……. 소도둑놈 같은 거지야…….”
 
76
내 곁에 앉았던 B군은 그까짓 것은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툭 쏘았다. 그 바람에 나와 H군은 더 묻지도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술을 마셨다.
 
77
“하하 여러 선생님들 여기 나오셨읍니다.”
 
78
하는 소리가 갯가에서 들렀다. 떠들던 우리는 그리로 눈을 주었다. 달빛이 물 같은 속에 머리벗고 발벗은 키 큰 사람이 섰다. 여러 사람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물끄러미 보는데 K군은,
 
79
“여긴 왜 왔어……. 응…… 가!”
 
80
하고 볼것 없다는 듯이 머리를 돌려 술을 부으면서
 
81
“별 미친 녀석이 다 왔네 …….”
 
82
하였다.
 
83
“그게 누군가?”
 
84
H군은 나직이 물었다.
 
85
“응 건드리지 마라! 거질세. 아까 노래 부르던 거지!”
 
86
하는 B군의 대답 소리도 나직하였다. 나는 거지라는 소리에 그를 한 번 더 보았다. 그는,
 
87
“하하 저두 한몫 끼입시다.”
 
88
하면서 쿵 뛰어서 우리가 앉은 배로 들어왔다. 땟국이 흐르는 홑고의적삼을 입은 그 몸은 그리 크도 적도 않으나 키는 후리후리하다. 거지가 곁에 다가오니 좌중은 흥이 깨진 듯이 잠잠하였다. 의구한 바람과 달빛만이 스치고 비칠 뿐이었다.
 
89
“뭐야? 그러지 말고 어서 가!”
 
90
K군은 나오는 성을 억지로 참는 소리였다.
 
91
“하하 그러지 맙시요…….”
 
92
하면서 펑덩 우리와 같이 주저앉아서 달을 쳐다보면서 크게 웃는 그 낯은 거므데데한데 머리는 터부룩하고 수염은 거칠거칠하다. 그 코가 우뚝한 것이며 눈이 가느스름한 것은 어디서 한번 본 사람 같으나 나는 얼른 생각지 못하였다.
 
93
“자 한잔 먹고 가세 어서…….”
 
94
별로 말없던 B군은 술잔을 들어서 거지에게 주었다. 그 모양은 귀찮은 것을 어서 쫓아 버리자는 수작이다.
 
95
“그건……. 뭘…….”
 
96
K군은 거지가 받으려는 술잔을 받아서 제가 죽 들어 마시면서,
 
97
“그건…… 술이 퍽도 흔타.”
 
98
하였다. 바로 판이나 차린 듯이 펑텅 들어앉아서 술잔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던 거지는 어이없다는 듯이 K군을 한참 보다가 픽 웃으면서,
 
99
“잇따 그리지 맙시요! 나도 좀 끼여 봅시다.”
 
100
하고 K군이 놓는 술잔을 집어들고 한잔 부으라는 듯이 K군을 본다. 그 태도는 아주 낯익은 사람끼리 농치는 것 같다.
 
101
“엑 아니꼽게…….”
 
102
하고 K군이 성을 내면서 눈을 두리니 H군은,
 
103
“이 사람 버려 두게. 경찰에서도 버려 두는 야료쟁인데…….”
 
104
일본말로 하면서 거지가 잡은 잔에 술을 부었다. 커다란 잔에 달빛을 싣고 점점 차오르는 술을 보던 거지는 B군의 일본말을 알아나 들은 듯이,
 
105
“허허허.”
 
106
웃다가 술이 차니 죽 들이마셨다. 그때 내 머리에는 언뜻 작년 봄 일이 떠올랐다. 나는 거지를 다시 보았다. 그는 확실히 작년 이른 봄에 관훈동에서 어떤 신사를 때려 엎던 거지였었다. 나는 알 수 없이 가슴이 두군두군하였다. 무슨 변이 닥칠 것 같았다.
 
107
거지가 술 마신 뒤에 좌중에도 한 순배가 돌았다. 그러나 거지는 다시 주지 않고 또 한 순배가 돌았다.
 
108
“저 저는 그만 주십니까?”
 
109
하고 좌중을 돌아보는 그 눈에는 알 수 없는 무서운 힘이 달빛에 번쩍하였다.
 
110
“한 잔이면 족하지. 또 무슨 술?”
 
111
K군은 그저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거지를 보았다.
 
112
“흐흐 어디 봅시다. 흥!”
 
113
거지는 비웃는 듯이 한마디 뇌이면서 두 되들이 큰 술병을 들어다가 입에 대인다.
 
114
“엑…… 이.”
 
115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쥔 K군은 소리를 지르면서 거지 뺨을 쳤다. 거지는 태연자약하게 입에 대었던 술병을 떼더니,
 
116
“하하 이놈 봐라! 하하하.”
 
117
하고 K군을 본다. 나직하나 세차게 나오는 그 쇳덩어리 같은 목소리! 가느스름하나 힘있는 붉은 눈! 그러면서도 위의 좋게 앉은 모양 솥뚜껑 같은 손에 술병을 거머쥔 것을 볼 때 범할 수 없는 기상이 보였다. 더구나 작년 이른 봄 일이 머리에 떠오를 때 나는 몸서리를 쳤다. 여러 사람들도 벙벙하여 뒤로 물러앉고 달겨들던 K군도 그저 눈을 부릅뜨고 거지를 볼 뿐이다.
 
118
“하하 여보! 박 서방! 그 사람(K군)이 취했으니 노여 말고 우리 술이나 먹읍시다! 응…… 이 좋은 때에 좋은 술을 대해서 싸워서야 되겠소 ……, 하하.”
 
119
옛날 소설에 나타나는 호협한 청년을 연상케 하는 B군은 쾌활히 웃으면서 거지 손에 쥐인 술병을 잡아 끌었다.
 
120
“하하 노형! 낸들 싸우고 싶을 리가 있소? 여보 친구 술 먹읍시다, 하하.”
 
121
술병을 순순히 놓으면서 B군을 보던 거지는 다시 K군을 보면서 웃었다. K군도 한풀 죽었다. B군이 눈짓을 하면서,
 
122
“자 K군 어서 이 박 서방허구 화해하세…… 이이가 좋도록 말씀하는데 자네가 그래서야 쓰겠나!”
 
123
하고 눈을 꿈벅하는 바람에 K군은,
 
124
“그래 우리 술이나 먹읍시다!”
 
125
하고 앉았다. 이때 좌중이 모두 웃었으나 모두 낯빛은 불쾌하게 보였다. 거지만은 아무 불쾌 없이 승리자의 웃음같이 웃었다. 술은 여러 순배가 돌았다. 병에 술은 다 말랐다. 우리도 취하였거니와 거지도 취하였다. 취한 자리에는 거지도 없고 우리도 없었다. 서로 가릴 것 없이 지껄이고 웃었다.
 
126
천심을 넘어선 달은 깊어가는 밤과 같이 더욱 쌀쌀하고 넘실히 빛나던 물은 빠지기 시작하였다. 마을에서는 잠들었는가? 갯가에는 거닐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간간이 저 위 추월루(秋月樓)에서만 노랫 가락이 은은히 들려 왔다
 
127
“여보! 박 서방……. 박 서방은 왜 이러구 댕기우 응?…….”
 
128
K군은 취안이 몽롱해서 거지를 보고 벙긋 웃었다.
 
129
“허허 좀 좋아요! 이게……”
 
130
거지는 웃었다. 여러 사람은 B군과 거지의 이야기에 하던 말을 그치고 그 두 사람의 입을 쳐다보았다.
 
131
“야! 우리.”
 
132
하면서 B군은 여러 사람을 돌아보고 다시 거지를 보면서,
 
133
“우리 박 서방의 사정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응 박 서방 어디 좀 이야기하우…….”
 
134
하였다.
 
135
“사정 이야기요! 제게 무슨 사정 이야기가 있겠소!”
 
136
하고 달을 쳐다보는 흐릿한 두 눈에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처량한 빛이 보였다.
 
137
“천만에……. 자 말씀하시오…….”
 
138
이번에는 H군이 말했다. 거지는 짤막한 대에 담배를 붙여 물더니 한숨을 쉬면서,
 
139
“나를 세상에서는 도적놈이라고 소도적놈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세상이 망하든 내가 망하든지! 누가 망하든지 끝이 나겠지요!”
 
140
하고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어이없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 바람에 모두 웃었다.
 
 
141
거지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142
그는(거지) 강원도 사람으로 그가 열 일곱 살 때에 서울 어떤 중학교에 다녔다. 그가 중학교 삼년급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소작인 노릇으로 겨우겨우 학비를 대는 아버지가 돌아간 뒤로는 다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어머니 모시고 아내와 같이 남의 집 삯김 삯나무 삯바느질로 연명하였다. 그러는 새에 그 어머니가 마저 돌아가셨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 넷이었다. 그 뒤에 그 아내는 자궁병으로 신고하게 되었으나 물론 완전한 치료를 못하였다.
 
143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면서 달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그때 광경이 보이는 듯이 애처로운 빛이 흘렀다. 한참 만에 그는 말을 이었다.
 
144
“어떤 때는 겨죽도 못 먹은 아내를 뉘여 놓고 삯일을 찾아서 헤매다가 빈 손으로 들어와서 운〔泣〕 일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병으로 뼈만 남은 아내가 내 손을 잡으면서 ‘여보 우리도 잘 살 때가 있지 늘 이렇겠소’ 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합니다. 그때에 나는 그때에 나는…….”
 
145
그는 목이 메인 듯이 기침을 칵 하고 한참 있다가,
 
146
“지금 같으면 도적질이라도 해서 그를 멕였지만 그때에는 그래도 청렴을 생각하고……. 그가 굶어서 앓아 누웠던 일을 생각하면……. 이 가슴이 찢기는 것이 아니라 칼로다 짓이기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게 잊어지겠읍니까? 이 눈에 (그는 자기 눈을 가리키면서) 흙들기 전에야 잊어질 리야 있읍니까?”
 
147
하면서 우리를 휘 돌러보는 그 눈! 눈물 한 점 없이 마른 그 눈은 눈물이 터벅터벅 흐르는 눈보다 더 처량히 보였다.
 
148
“더구나!”
 
149
하고 한숨을 쉬면서 그는 달을 보고 바다를 건너다보면서 말을 하였다.
 
150
“더구나 그가 죽을 때 약 한첩 죽 한술 못 먹고 찬 구들 위에서 그가 죽을 때…….”
 
151
그는 목메인 소리를 가까스로 마치고 한숨을 쉬면서 기침을 하고 나서,
 
152
“ ‘여보! 여보!’ 부르는 나를 몇 번이나 쳐다보면서 그 힘없는 눈에 웃음을 띠우던 것이……. 내 맘을 괴롭게 하지 않노라고 웃음을 띠우던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찢겨서 이 가슴이 무여져서…….”
 
153
하면서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느껴 운다. 돌아앉아서 이야기 듣던 모든 사람들도 가만히 슬프게 앉아서 그 모양만 보았다. 처음은 흑흑 느껴 울던 그가 나중에는 소리를 쳐서 크게 운다. 숨이 지는 듯이 흑흑 하는 느낌 속에 구슬프게 흐르는 울음 소리는 푸른 달 아래 구슬피 떠서 잠든 산천을 구슬피 울리는 듯하였다.
 
154
B군은 그의 팔을 잡으면서,
 
155
“여보셔요! 참 우리가 몰랐읍니다. 우지 마시오!”
 
156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157
“아, 가만 계셔요! 울게 버려 두시오. 이 가슴이 풀릴 때까지 나는 울어야 시원해요. 나는 몇 번이나 울려고 해도 못 울었더니 오늘밤에 울음이 나는구려.”
 
158
하면서 그는 운다. 한참 울던 그는 울음을 그치고 주먹으로 눈물을 씻더니 우리를 보고 비참하게,
 
159
“허허허.”
 
160
웃더니 다시 진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61
“나도 세상이 날 욕하는 줄 잘 압니다. 참 잘 압지요. 그러나 세상은 이래야 줘요! 인의(人義)? 염치? 그거 다 지금 세상에는 소용없는 말이에요! 내가 내 어머니 돌아가실 제 내 아내가 병들어 누웠을 제…… 여러가지 사정을…… 글쎄 뼈가 보서지게 일을 해 줄께 좀 도와달라고까지 여러 군데 사 정을 해야, 들어주는 놈이라구 없어요. 혹 들어준대야 진종일 땀흘린 값으로 좁쌀 한 되가 되나 마나……. 나는 아내가 죽은 뒤에 죽자구 했지요! 그는(아내) 굶어 죽이구 나 혼자 무슨 면목으로 잘 살아요? 글쎄! 또 산대야 한푼 없이 어떻게 살아요? 그래 우리 고을 앞바다 가에까지 갔다 왔지요? 그러나 바닷가에 가다가 생각하니 그런…… 죽는 것처럼 미련한 일이 없이 생각되겠지요! 글쎄 생목숨을 왜 끊어요? 네 생목숨을? 내가 죽는다고 누가 나를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내가 죽어두 사람들은 그저 배부른 놈 배 만지고 배 고픈 놈 쓰러질 거! 그뿐입니까? 내가 죽었더라도 오늘밤 저 달과 이 바다와 이 바람은 그저 있겠지요! 또 당신네두!…… 내가 살아야지! 내가 살아야 하고 나는 돌아왔지요!”
 
162
그의 낯에 흐르던 처량한 빛은 훨씬 개이고 구슬프던 목소리는 힘있게 조리있게 울렸다.
 
163
“나는 그 후부터 이렇게 떠댕깁니다. 나를 도적놈이라구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 도적질한 일이 없어요. 나는 달라고 해서 먹고 달래서 안 주면 그 사람 보는데 집어는 먹지만 남 못 보는데 훔치지는 않았읍니다. 글쎄 있는 음식을 먹는 것두 죄요? 없어서 배고파서 먹는단 말을 하고 그 사람 보는데 먹는 것이 무슨 도적이며 못 할 짓입니까? 나는 그 때문에 도적놈이라고 매도 많이 맞고 ○○도 하였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겠으니 먹지 않으면 어째요? 세상이 망하나 내가 망하나? 누가 망하나? 나는 보고야 말겠읍니다.”
 
164
하고 일어서는 그의 낯에는 엄연한 빛이 돌았다. 우리는 서로 보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165
달은 서천에 기울고 먼촌에서는 닭이 첫 홰를 울었다.
 
 
166
그 뒤에는 벌써 사 년이 되도록 그 거지 박 서방을 못 보았다. 그러나 나는 어디서든지 거지를 보면 박 서방 생각이 나서 유심히 보게 되고 동시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원문】누가 망하나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2
- 전체 순위 : 7139 위 (5 등급)
- 분류 순위 : 861 위 / 88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누가 망하나 [제목]
 
  최서해(崔曙海) [저자]
 
  1926년 [발표]
 
  소설(小說)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본문   한글 
◈ 누가 망하나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