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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진만필(甲辰漫筆) 22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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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형(尹國馨)
1
庚戌十月。松都儒生河偉量等上疏。請以徐敬德。從祀文廟。下禮曹大臣收議。回啓。左相李恒福則曰。嘗聞徐敬德。以聰明超邁之資。生絶學荒莽之地。學務窮格知。由思得斯。可謂一蹴而造道者。亦一時豪傑之士也。同鄕多士。聞風而言者。亦必以是也。只恨臣少懶失學。晩雖知悔。粗習經傳。所規規而未能者。不過正坐省愆之末。洒掃應對之節而已。其於尙友評古之見。皆所昧昧。故凡於此等論議。雖有一二管窺處。皆不敢妄主己見。一切欲尋逐前人之說。以爲據的。先王初年。士習大變。宏儒咸集。臣之愚嘗以爲。其時論者衆多。皆非臣滅裂之比。而就於國朝諸儒之中。表出四臣。請祀文廟者。言非草草。意非偶然。遂深信而不疑。常於五賢之數。不敢厭多。亦不敢嫌少矣。後觀近世儒臣之論。以敬德多自得之味。乃與李滉幷稱。其於尊崇。可謂極矣。而至於淡一淸虛之論。則以爲全出於一氣長存之說。有認氣爲理之病。故深以李滉攻破敬德之論。爲深中其病。豈非以初頭思索太過。其於格致之功者。與大學及先儒之說。不同而然歟。此等奧義。臣以末學。耳雖得聞。而未及有得也。今何敢妄有云云。惟是當初論定從祀之列。一時之士。如彼其宏博。而不知當時以何所見。取此而遺彼歟。臣所未解者。正在此等處。今亦不敢妄爲之定論。官雖有大小。見有高下。儒林大政。非循資致貴者所敢獨決。今以此疏。廣詢博訪以定。則庶無所欠。右相沈喜壽則曰。臣少從故校理姜文佑習口讀。文佑嘗歎服其師花潭徐敬德之道德學問曰。天資超邁。玩心高明。實有鞭霆歷覽無際之邃見云。臣今亦懵無知識。況於其時。豈能省其爲何許人也。比壯稍得聞於先生長者之論及斯人。皆以爲孝悌忠信。淸明純粹。不由師傅。慨然自奮。學務窮格。一物不遺。堅苦刻厲。感通神明。崇德廣業。篤實光輝。觀於本集中原理氣等諸說。爲深造自得之妙。發前賢之未發。及其有功於斯文大矣。宜乎海隅章甫之徒宗。仰若山斗。至此而久也。我宣宗大王之大加尊尙。追行褒贈者。極其崇峻。班視向來諸賢。則所當幷議從祀之典。俾無異同之恨。而終乃不然。抑何故也。後生末學。雖未知其詳。而蓋一時宏博之議。有疑斯人之學。似以象數爲主。思索太過。隣於玄寂。一生用力於此事。自謂窮極深微。而終見得理字不透。談奇說妙。未免落在形氣粗殘一邊。與濂洛諸儒之說。頗有不相符處云云。故其崇報之擧。有如是之不均耶。雖然。未有此氣。先有此理。因本然之性。盡窮格之功。畢竟同歸於誠正之域。有何大段逕庭於大學之敎也。邵子內聖外王之學。雖不爲二程之所深貴。以只把元會運世四字。貫盡天地萬物。豈非挺世之豪傑。百世之名儒。亦未聞其不得與周程張朱享孔廟之血食。今當新擧曠典。大闡文化之日。而不能無或取或遺之殊。果可謂儒林之一欠事也。但此實國家重大之擧措也。豈爲援例四十年來萬口同辭一日爲急之五賢臣。而只令寂寥咨訪於數三大臣哉。必須廣收廷議。待其僉同。然後一體擧行。亦爲妥當。完平府院君李元翼。尹領府事承勳。淸平府院君韓應寅。皆請廣收廷議。答曰。事係重大。徐待後日。
 

 
2
경술년 10월에, 송도(松都) 유생 하위량(河偉量) 등이 상소하여 서경덕(徐敬德)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는 예조에 내려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였다. 회계(回啓)에,
 
3
“좌상 이항복(李恒福)은 ‘일찍이 듣건대, 서경덕은 총명이 월등한 자질로, 학문이 끊어진 황무지에서 태어나 학문은 철저히 연구함을 힘쓰고 지식은 사색에서 얻어졌다 하니, 이야말로 단번에 도를 얻은 사람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당대의 호걸지사(豪傑之士)라 하겠습니다.
 
4
같은 고을의 여러 선비들이 그의 유풍(遺風)을 듣고 칭찬하는 것이 또한 이런 까닭이겠습니다. 오직 유감스러운 일은 신이 어려서부터 게을러 학문을 잃었고, 늦게야 후회하여 조금 경전(經傳)을 익혔으나, 애를 써도 능하지 못하고, 다만 바로 앉아 허물을 반성하는 지엽적인 일과 청소하고 응대(應對)하는 법에 불과할 뿐, 그 고인(古人)을 벗으로 하고 옛것을 품평하는 견식은 모두 어두운 바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런 내용의 논의에 대해서 비록 한두 가지 얕은 소견이 있다 하더라도 망령되게 제 의견을 주장할 수 없으므로 일체 전인(前人)들의 설을 따라서 근거를 삼고자 합니다. 선왕(先王) 초년에 사대부의 습속이 크게 변화되고 석학들이 다 모였으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그때에 의론한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모두가 신처럼 지리멸렬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국조(國朝)의 여러 학자 중에서 네 명의 신하를 표출해서 문묘에 배사(配祀)하기를 청한 것도 그 말이 허술한 것이 아니고, 그 뜻도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드디어 깊이 믿고 의심치 않았습니다. 항상 오현(五賢)의 숫자에 대해서는 감히 많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적다고 감히 꺼리는 것도 아닙니다.
 
5
뒤에 근세 유학자들의 논의를 보면, 서경덕이 자득(自得)한 기미가 많다 하여 이황(李滉)과 같이 거론하며, 그 존숭함이 극에 달했다 하겠으나, 담일청허(淡一淸虛)하다는 논의에 이르러서는, 전적으로 일기장존(一氣長存)의 설에서 나와 기(氣)를 이(理)라고 인식한 병폐가 있기 때문에, 이황이 서경덕을 공격한 이론은 매우 그의 병폐에 적중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어찌 그 첫머리의 사색이 너무 지나쳐 그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에 있어서 《대학(大學)》이나 선유(先儒)들의 설과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깊은 뜻은 신이 천박한 학문으로 귀로는 비록 얻어 들은 바가 있으나, 미처 터득함이 있지는 못하니, 지금 어찌 감히 망령되이 운운할 수가 있겠습니까.
 
6
오직 애당초 문묘에 종사(從祀)할 사람을 논정할 적에 당시 선비들이 그토록 많았는데도 당시 어떠한 의견에 근거하여 이 네 사람을 정하고 다섯 명으로 하지 않았는지 신이 알 수 없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으므로 지금도 감히 함부로 정론(定論)할 수가 없습니다. 관직에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이 있으나 견식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유림의 큰 일은 자급을 따라서 높게 된 자의 독단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상소로써 널리 묻고 찾아서 결정한다면 부족할 것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7
우상 심희수(沈喜壽)는, “신이 어려서부터 죽은 교리 강문우(姜文佑)에게 구두(口讀)를 배웠는데, 문우는 일찍이 자기의 스승 화담(花潭) 서경덕의 도덕과 학문에 탄복하여 말하기를,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마음이 고명(高明)하여 실로 열심히 노력하여 천지를 두루 보는 깊은 식견이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도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당시에야 어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필 수 있었겠습니까. 차차 장성하여 선생과 장자(長子)들이 이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조금 듣게 되었는데, 모두 「효제 충신(孝悌忠信)하고 청명 순수(淸明純粹)하며, 스승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은 철저히 연구하기를 힘써 한 가지도 빠뜨림이 없고, 굳건히 힘써서 신명(神明)에 감통(感通)하며, 높은 덕과 넓은 업적이 독실하고 빛이 났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화담집(花潭集)》 중의 원리기(原理氣) 등의 여러 설을 보면, 깊이 들어가서 자득(自得)한 묘리는 전현(前賢)이 밝히지 못한 바를 밝혀서 사문(斯文)에 끼친 공이 크옵니다. 우리 나라 유생들이 태산과 북두칠성처럼 받들기 지금까지 오래된 것은 마땅한 일이가 하옵니다.
 
8
우리 선종대왕(宣宗大王)께서 크게 존숭하여 포증(褒贈)을 추행(追行)한 것이 지극히 높았으니, 지난 여러 현자들을 돌이켜 보건대, 마땅히 종사(從祀)의 전례(典禮)에 함께 의논하여 서로 차이가 없게 하여야 할 터인데, 끝내 그렇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후생 말학(後生末學)으로 그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오나, 대개 한때의 크고 넓은 의론이 이 사람의 학문은 상수(象數)를 주로 삼아서 사색(思索)이 너무 지나쳐 현묘(玄妙)하고 적멸(寂滅)한 데에 가까운 것 같고, 일생을 이 일에 힘을 기울여 스스로 이르기를, 궁극심미(窮極深微)하였다고 하나, 마침내 이(理) 자의 해석이 불투명하여 기이하고 오묘한 것을 이야기하여도 형기(形氣)의 거칠고 약한 한 편에 떨어져 있음을 면치 못하여 주염계(周濂溪)나 정이천(程伊川) 형제 등 여러 학자의 설과 자못 서로 부합하지 않는 점이 있는가를 의심하는 이가 있다고 하여 숭상하는 일이 이처럼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9
그러나 이 기(氣)가 있기 전에 이 이(理)가 먼저 있다고 하니, 본연의 성(性)에 따라 철저히 연구하는 공부를 다한다면 필경에는 성(誠)과 정(正)의 경지에 똑같이 들어가게 될 것이오니, 무슨 크게 《대학》의 가르침과 어긋남이 있겠습니까. 소강절(邵康節 옹(雍)의 시호)의 학술과 덕행을 겸비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이 비록 두 정씨(程氏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의 매우 귀하게 여기는 바는 되지 못하였으나, ‘원회운세(元會運世)’ 네 글자만으로 천지 만물을 꿰뚫었으니 어찌 일세에 뛰어난 호걸이 아니며, 백세에 남을 명유(名儒)가 아니겠습니까. 또한 소강절이 주염계ㆍ정명도ㆍ정이천ㆍ장횡거(張橫渠)ㆍ주회암(朱晦菴)과 함께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지 못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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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 큰 법을 세워 크게 교화(敎化)를 밝히는 날을 당해서,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차별이 없을 수 없으니, 과연 유림에 있어 하나의 흠이 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이는 실로 국가의 중대한 일이오니 어찌 40년 이래에 모든 사람이 같은 소리로 하루가 급하다고 서두른 5현신(賢臣)의 일을 끌어대어 다만 몇 사람의 대신에게만 물어서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널리 조정의 의론을 모아 여러 사람의 찬성을 기다린 뒤에 일체 거행함이 타당하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11
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영부사(領府事) 윤승훈(尹承勳),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 등이 모두 널리 조정 의론을 모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12
“일이 중대하니, 서서히 뒷날을 기다리오.”
 
13
하였다.
【원문】갑진만필(甲辰漫筆)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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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