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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와 문학의 정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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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4.29 ~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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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대와 문학의 정신
2
- ‘발자크적인 것’에의 정열 -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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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잡지로부터 문학의 건설 방법에 대한 설문을 받고서 나는 무엇보다도 문학이 통일된 정신을 건립해야 될 것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문학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모든 사정과 상태를 고려하여 통일된 문학 정신의 건립이 여하히 곤란한 것인가를 말한 뒤에 이러한 통일된 정신을 탐색하는 비평가의 과제로서 원리(原理)적인 것의 수립을 위한 작가론, 작품 비평의 중요성에 대하여 일반의 주의를 환기해 보는 데 그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추상적인 절규나 일화(逸話) 나부랭이를 들고 감히 문학 정신의 탐색을 위장하는 것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작품과 작가의 주밀(周密)한 분석과 평가 속에서 어떤 원리적인 것을 찾아보자는 심사이다. 이런 것을 말한지 이삼 개월 동안 나는 신문과 잡지에서 평론가들의 수많은 지시와 제안과 처방을 구경하였다. 그러나 ‘독창성의 창조’니 ‘리얼리즘의 초극’이니 하는 등등의 모든 논책(論策)이 현재의 우리 문학의 평가에 대하여 언급함이 없는 순전한 사변적인 것이거나 또는 고전작가의 ‘맥시므’ ‘에피그람’ ‘포르트레’의 요설적인 주석이거나 일화의 무질서한 나열인 데는 실망을 거듭하지 않을 재주가 없었다. 평론과 비평은 피로하고 있다. 피로한 두뇌의 소산(所産)은 그러므로 히스테릭한 절규가 아니면 때로 왕왕 요설을 거듭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평론이 작가의 존경을 받을 수 없는 커다란 원인인 가고도 생각키인다. 이런 처지에서 지금 나는 ‘시대의 분열과 문학 정신’이라는 제목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제 다시 수개월 전의 안일한 소극적인 방책을 되풀이하고 앉았을 수는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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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적인 것의 탐색을 위한 작가론, 작품 분석의 중요성은 그대로 하나의 방책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것은 되풀이하는 곳에서 만족을 느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면 다른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떠한 적극적인 방책이 가능한, 그리고 모든 것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 정신의 탐구 방책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곳에 솔직하게 고백치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제시할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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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적인 것의 탐색을 위한 작가론, 작품 분석의 중요성은 그대로 하나의 방책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것을 되풀이하는 곳에서 만족을 느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면 다른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떠한 적극적인 방책이 가능한, 그리고 모든 것을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 정신의 탐구 방책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곳에 솔직하게 고백치 않을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제시할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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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책을 제시하든가 그 방법을 제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비평의 성능(性能)의 포기요 평론의 실권(失權)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것은 실로 ‘문학하는 것’의 실격임을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문학하는 것’의 자격과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포기하고 상실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문학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이리하여 나는 스스로 나서서 그것을 감히 제안하지는 못하지만 각자가 모두 ‘문학하는 것’의 의의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끌어가겠느냐 하는 데 대한 일정한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신념과 스스로 자각하는 의의가 무엇이냐를 명확히 말할 수 있을 만치 성숙이 되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명확한 재단(裁斷)에 이르기 전 일종의 성실한 상념(想念)의 애매성(曖昧性)이 때로는 여하한 결론보다도 가치가 있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였다. 이러한 사고나 신념의 애매성--그것은 왕왕 그의 적절한 표현방식으로 ‘고백’을 취한다. 나는 현재 문학에 종사하고 있는 작가와 시인들의 ‘고백’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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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백’은 결코 평론이거나 비판일 수는 없다. 그는 결국 그것만으로는 ‘고백’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일 추상적인 관념의 행사나 허망된 평론가의 요설에서 우리가 애매하게 막연하게 가슴에 품고 있는 상념의 명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을 때에 이러한 ‘고백’에 우리는 중요한 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다. 진실을 이야기하여 조롱(操弄)을 사는 것이 허세를 부리고 난 뒤의 허망된 공감(空感)보다는 훨씬 착하고 ‘문학하는 것’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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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이 글을 하나의 ‘고백’으로 하고 싶다. 제시하거나, 제창하거나, 처방하려고 하지 않는다--이러한 곳에서 ‘문학하는 것’의 의의를 찾는 자도 있다-- 하는 하나의 사고의 참고자료로 되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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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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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동혈(洞穴) 속에 남겨 놓은 제 새끼에게로 달려 돌아 온 호랑이와도 같은 물건이다. 호랑이의 등골엔 화살(矢)이 꽂혀 있지마는 그의 치명상 따위에는 눈 (致命傷)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철대산이 없는 새끼를 기르기 위하여 그는 젖을 물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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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유행을 따라 세스토프의 선집을 읽었던 분 중에는 그의 「톨스토이와 니체의 「교의(敎義)에 있어서의 선」이라는 문자의 서문에서, 벨린스키의 인간적 약점을 폭로하는 전술(前述)의 구절을 기억할 것이다. 세스토프는 미친 듯이 추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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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대중이란 지나치게 많이 알아서는 아니 된다. 대중에겐 이상이 필요하니까, 대중에 봉사하려는 자는 어쨌든 간에 이상을 수립해야 한다. 옛날부터 뻔한 수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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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그는 ‘이상’의 뒤에 숨어 있는 모든 인간적인 약점과 사생활의 비밀을 폭로하고 대중에게 전달하여 사회에 봉사한다는 이상주의의 허망을 통렬히 공격하고 조소하는 것이다. “벨린스키에도 그러한 상처가 있었다.”고 그는 말한다.--“그것은 그의 흉포성, 인용된 서간 화투취미 같은 것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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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은 물론 벨린스키 일 개인에 대한 개인적인 항변이 아니었다. 나로드니키적 지도자 미하이롭스키에게나 또는 이상을 내걸고 대중을 이끄는 모든 이론가 사상가에 대한 쎄스토프의 철저한 반항이었다. 로서아 중농주의의 표방하던 이상이 수십 년래의 지식인의 희생을 진흙처럼 짓밟아 버리고 하루 아침 패배의 동혈에서 허망된 몽상으로 달라져 버렸을 때, 허무를 온몸에 품고도 살아나가야만 하는 자기자신을 『비극의 철학』에서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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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영구히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의연(依然)히 살아는 가야만 하겠고, 생명은 아직도 멀었다. 가사(假使) 죽고 싶다 쳐도 죽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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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드디어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의 연구를 거쳐서, 땅위에 일어나는 일체의 배덕(背德)과 불행과 좌절과 추악과 배신을 제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배교자(背敎者) ‘유다’와 같이 감람산을 향하리라 결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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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대를 잃어버리는 것이 회의의 단초이다. 이상주의가 현실의 공격에 대하여 무력하고 운명의 의지에 종용(慫慂)되어 사람이 현실과 충돌하고 아름다운 선천적인 것이 전혀 허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래었을 때 그때에 비로소 회의의 마음이 그의 가슴에 끓어오르고 낡은 공중누각의 벽을 일거에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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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그는 동일한 저술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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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세스토프는 신에의 「신앙을 거부하고 미래에의 신앙을 거부하고 드디어는 악마에의 신앙까지도 거부」함에 이르는 것이나 끝까지 제 목숨을 스스로 끊어버리지는 못한 채 지상의 온갖 치욕과 죄악을 한몸에 지니고 ‘유다’와 같이 저주의 등산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불행히 내가 다시 붓을 들게 된 시기는 우리 문학인 지식인이 세스토프와 흡사한 처위(處位)와 정신적 분위기에 살고 있을 때였다. ‘문학은 일생의 천직일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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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냐? 정치냐?’를 겨우 처리해 보면서 붓을 든 내가, 그 때에 자신의 ‘문학하는 신념’을 토로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발의 정신이었다. 그리고 이 고발 정신의 광범한 과제 중의 하나로 내가 가장 치열히 추급(追及)코자 한 것은 자기 고발의 정신이었다. 그 뒤에 이 년 유여, 그것은 ‘모랄’설정을 경험하였고, 이렇게 해서 다소간 정신적 여유를 얻은 고발의 정신은, 객관적 묘사의 가운데서 풍속을 찾아봄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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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경험해 온 과정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남에게 제시할, 아무 이야기도 습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련의 고발 정신의 준엄한 비판자들에 대한 회고까지도 나의 기억 속에서 축방(逐放)해버릴 수는 없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매언(罵言)을 퍼부었던가? 아직도 나의 귀에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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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정신을 공격한 이는 많았다. 자기 고발의 허망됨을 비판한 이는 많았다. 「유다적인 것과 문학」을 세스토프와 얽어서 통렬히 매도해 버린 것도 훌륭하였다. 도덕론과 모랄의 확립을 소시민의 장난이라고 비웃은 것도 좋았다. 고발 정신과 풍속론과의 관련의 결여와, 나의 인간적 성실의 불충분을 지적하는 것도 좋았다. 그러나 그들의 호령과 절규의 사변을 정지하고 잠시 동안이나마 제가 서 있는 자리를 둘러볼 만한 진실성을 토로한 자는 드물었다. 요설의 뒤에 있는 공허한 마음을 통절히 느끼는 이조차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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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유다’를 속된 기독교도처럼 조소할 줄은 알면서도 일체의 추악과 치욕을 잔등에 걸머지고 감람산으로 향하려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실로 그것 뿐! 나는 지금 제씨의 ‘성실’의 고백을 치열히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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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1939. 4. 29〕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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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 때로 방관을 도폐(塗蔽)하는 때는 이러한 순간이다. 고발문학론과 풍속론에 의한 ‘로만’ 개조론과의 간에 인간적 성실이 결여되었는가 제씨의 비판과 최근의 주장과의 새에 진실성이 얼마나 관류하고 있는가--이것을 증명하기에 실로 얼마나한 세월이 필요하였던가! 역사는 그것을 증명하기에 일 년 이상을 허비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지금 다시 제씨는 여전히 제창하고 비판하고 있다.
 
29
그러나 씨 등의 새로운 제창이 일 년 전의 ‘비판’처럼 기만에 시종(始終)하지 않으리라고는 누가 보증하여 주는 것이랴! 논자에 대한 불신은 이리하여 ‘문학 정신’ 전체에 대한 신의 부정으로 옮아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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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자기 고발의 추궁에서 ‘모랄’ 확립의 단초를 잡으려고 애쓸 때에 방관자와 제삼자의 허세적인 비판을 경계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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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개인이 절실하다고 생각하고 그의 마음이 항상 그것을 가운데 두고 호흡하는 문제가, 역사나 국가나 사회로서도 역시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일런가? 자기는 이러한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자기 개인의 문제로 하고 있는가가 현대 작가에게 있어서는 가장 곤란하나 또한 무엇보다도 긴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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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당사자가 되어야 할 자가 방관자의 입장에서 ‘냉정히 비판하는 것’이 문학에 있어서 의미하는 지는 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천 년 가까운 장구한 시일 동안 동서의 수억의 기독교도가 ‘유다’를 저주하고 그의 죄악을 암송(暗誦)하였으나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는 피녀(彼女)에게 돌을 던지라”는 교훈을 실천하는 자는 드물었다. 더구나 인류의 온갖 죄악과 치욕을 스스로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그대로 등에 걸머진 채 감람산을 향한 자는 몇 사람이나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자기 고발의 비판자들 중에서 자기의 ‘성실’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나는 그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고발 정신은 그의 첫 과제로 자기 고발을 추궁하였다--. --자기 고발은 ‘모랄’의 확립으로 발전하고--이여(爾餘)의 고발 문학은 풍속 관념의 문학적 정착을 얻어 갖고 리얼리즘의 구체화를 꾀하여 ‘로만’개조론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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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과정에서 고발 정신은 성실을 결(缺)하였는가. 오늘은 리얼리즘, 내일은 로맨티시즘, 오늘은 감성, 내일은 지성, 그리고는 생각나는 대로 괴테로! 위고로! 가끔 가다가는 페단틱한 철학적 교설(敎說)로!--과연 씨 등은 어떠한 성실을 고발 정신의 비평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사 고발 정신은 이 이상 제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어졌다. 자기의 행정(行程)을 정지하고 답보(踏步)할 필요는 없어졌다. 신경과민과 신체의 상처를 떨어버리고 자신의 건강과 영양을 가지기 위하여 새로운 계단으로 옮아가야 할 시기에 당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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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건 작건 그것은 ‘모랄’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고 단초일망정 그것은 리얼리즘을 고집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빈약하나마 그것은 ‘세태’와 자기를 구별하고 ‘고현학’과 국경을 명백히 한 ‘풍속’을 획득하여 새로운 묘사 정신을 잡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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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새로운 정열을 그의 위에 부여하는 것은 이 또한 고발 정신의 인간적인 불성실일까! 나는 다음에 이것을 명백히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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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새로운 계단을 향하여 문학의 정신을 풍부히 하고 윤택나게 하는 바 새로운 정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발자크적인 것’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렬한 묘사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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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내가 이 년 간의 내 자신의 문학 과정의 결과에 서서, ‘발자크적인 것’에다 하나의 순간을 허락하려고 할 때에 나는 ‘발자크’적 방법과 관련된 약간의 회고를 이곳에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실로 이 년전 내가 자기 고발을 통하여 문학의 주체 건리베 노력하고 있을 때 이 땅의 평론가들은 부당하게도 작가에게 ‘발자크’적인 객관 묘사를 권하고 있었으니까….
 
38
〔『동아일보』1938. 5. 6〕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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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년 전에 씨 등이 ‘발자크’적 방법을 표방한 것은 순전히 주체에 대한 성찰과 작가의 자기 분열과 통틀어 사색적인 것 전부를 거부하고 망각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불러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자신의 문제를 완전히 선반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객관세계에 몰입할 것만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면 객관세계는 인식될 수 있고 훌륭한 리얼리즘은 구현된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즐겨서 발자크는 왕통파(王統派)적인 사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훌륭한 객관 묘사의 방법은 당해 사회의 본질을 묘파해 버렸다는 구두선(口頭禪)을 매일처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씨 등의 주장의 진위를 증명하는 데도 역사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씨 등에 의하여 리얼리즘이 얼마나 발전하였는지 씨 등이 리얼리즘의 진전을 위하여 그 뒤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지--여하튼 지금엔 리얼리즘을 부르짖는 자도 없어졌고 지하의 발자크는 일시(一時) 어인 영문을 몰라 고요히 누웠던 잠자리에서 눈을 비비고 박연(駁然)하였으나 실로 그것뿐, 유행의 건망증은 그것마저도 망각의 하천에 던져버리고 태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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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주체를 방기해 버리는 것이 여하히 허망된 것인가를 완강히 주장하며 모랄의 획득 없이는 객관세계의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여 고발 정신의 많은 과제 중의 하나로 자기 고발을 실천하라고 외친 것은 과연 그릇된 수작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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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이 년이란 짧은 시일이 모든 과제를 해결하였다고 생각지는 아니 한다. 자기 분열이 초극되었다든가 주체가 확립되었다든가 모랄이 획득되었다든가, --나는 그 성과를 말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기를 어느 정도까지 리얼리즘의 새 계단 위에 나서게 할 수 있을 만한 심리적인 준비는 치렀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발의 정신은 리얼리즘으로 하여금 풍속을 고려케 할 만한 정신적 여유를 가짐에 이르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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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을 버리라!”라든가, ‘리얼리즘의 초극’이라든가 하는 평론가들의 권유를 완강히 거부할 만한 정신적 준비는 경과(經過)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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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사 리얼리즘은 새로운 발전의 단초에 서 있다. ‘발자크’는 이제사 오래인 잠을 깨고 그 정력적인 거대한 체구를 이곳에 나타내일 시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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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토프적인 것, 지드적인 것,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것, 심지어는 괴테적인 것, 톨스토이적인 것까지도 완강히 거부하며 일로(一路) ‘발자크’의 웅대하고 치밀한 티끌 하나도 용서하지 않는 가혹한 묘사 정신에 젊은 정열을 의탁할 만한 절호의 시기에 당도하였다. 역사의 필연성을 폭로하는 것은 문학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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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정신이 작가적 주관을 완전히 버리지나 아니 할런가? 사색을 통(統)히 잃어버리지나 아니 할런가? 자기 성찰을 그대로 망각해 버리지나 아니할런가?-- 이러한 거개의 외구(畏懼)는 지금에야말로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발자크적인 것’은 고발 정신의 위에 서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작건 크건 ‘모랄’을 거쳐왔고, 자기 고발을 경과하였으니까. 사색은 준비되었다. 인제 그것은 관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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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는 년 그의 1842 인간희곡의 중도에서 감히 이렇게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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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무미건조한 역사라고 불리워지는 사실의 기록을 읽는 이는 누구나, 필자의 실념(失念)이 각각의 시대, 애급(埃及)과 파사(波斯)와 희랍과 라마(羅馬)의 풍속사를 우리에게 주지 못한 것을 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근소한 패트로누 라마인의 사생활 기록은 사람을 초조스럽게만 할 뿐, 그것은 오히려 호기벽(好奇癖)에도 불만을 줄 이상의 것이다.”--“여하히 하면 삼사 천의 인물을 옹(擁)하는 드라마, 일 사회가 제시하는 모든 것을 흥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일까.”--“불란서 사회가 역사가가 되고 나 자신이 그의 비서로서 근무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악덕과 선행과의 조사서를 쓰고, 주요한 열정사실(熱情事實)을 수집하고, 성격을 그리고, 사회의 주요 사건을 선택하고, 유형을 동종 성격과 관련되는 특성의 규합에 의하여 구성하고 이리하여 나는 허다한 역사가가 망실한 풍속의 역사편(篇)을 짤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많은 견인(堅忍)과 용기를 갖고 나는 드디어 19 세기 불란서를 주로 하는 일 서(一書)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희곡 人間戱曲 서문에서)--
 
49
밤 자정에 일어나서 열 여섯 시간 동안 다섯 시간을 겨우 눈 부쳤다가 백웅(白熊)처럼 벌떡 일어나서는 ‘도박자’처럼 다시 열 여덟 시간의 집필, 무녀와 같은 쿠렁쿠렁한 셔츠에 새끼를 동여매고 하루에 사오십 배(杯)의 가배(珈琲를 마시면서 오십 년의 짧은 생애에 그는 백여 권의 소설을 완성하였다. 그의 빈약한 서재의 한 귀퉁이에 세워 놓은 나파륜(奈巴崙)의 조상(彫像)에는 스스로 다음 같은 글귀를 장검 위에 새겼었다고 19세기 문학사조의 저자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50
“검을 가지고 나파륜이 이루지 못한 것을 나는 붓을 가지고 이룰 것이다.”
 
51
〔『동아일보』1939. 5. 7〕
【원문】시대와 문학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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