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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무용기(無用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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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0월
김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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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무용기(無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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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수업에 있어서 스승을 갖는 것이 필요한 일인지 아닌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것이나 여태껏 스승을 가지지 못한 것을 후회하거나 한탄해 본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개 문하생이라고 한대도 물론 결코 부끄러울 것은 없을 것이다. 요즘처럼 문단정치가 성행할 때에 기성 선배의 등을 이용하려들거나 혹은 도제 제도의 유풍 같은 길드적 관계의 부활을 꾀하거나 하는 등 사(事)야말로 부끄러워 마땅할 일이다. 대범(大凡) 조선 문단처럼 10년 내외에 세대가 교체되는 고장에 있어서는 새로운 문단에의 등장은 곧 기성의 부정을 의미하게 되므로 문학적 주장이나 기타 정신적 영향 같은 것으로는 스승이 있다 하여도 그 스승을 배반하고 양기(揚棄)하는 입장이야말로 후배에게 요망되어왔다. 그러므로 요즘 우리의 눈에 띄는 신인들의 ‘스승’에의 ‘대접’이나 기타 사제관계의 유행은 신세대의 문학적 무내용 정신적 빈곤과 아울러 생각해 볼 때에 일맥의 상통하는 이유가 있는 듯하여 흥미가 없지 않다. 공연히 건방진 것도 탈이지마는 일정한 주의 주장 밑에 신인이 기성을 부정하려드는 태도에는 일종의 적극적인 면모가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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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시기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환경의 탓인지 불행히(혹은 다행히) 나는 문학 수업에 있어서나 작가 생활에 있어서 한 사람의 스승도 가지지 못하였다. 평양보고 시절에 『월역(月域)』이란 동인잡지를 내면서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동인간에 없지 않았으나 결국 유야무야하였다. 김동인 씨도 주요한 씨도 평양에 있을 시기이고 졸업 임박해서는 양주동 씨도 와 있을 때였다. 동인 씨를 스승으로 모셔도 될 것이었으나 「딸의 업을 이르려」든가 그런 소설을 『조선문단』에서 읽어본 직후라 동인들은 동인 씨에게 그다지 존경이 가지 않았던 모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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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씨와 우리 동인들과는 일차의 교섭이 있었다. 동인 중의 한 분이 그 때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평양 남문통에 와 있던 주시에게 ‘한번 찾아가고자 하는데 형편이 어떠하시냐’고 반신절수(反信切手)를 넣어 편지를 띄웠더니 아무때나 좋으니 지국으로 들르라는 회서가 왔다고 그 편지를 나에게 보이며 같이 가자고 말하였다. 그 때의 문면은 간단하나 퍽 친절하였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주씨의 『아름다운 새벽』의 애독자기는 하였으나 주씨가 축구대회의 심판을 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이 불쾌하게 생각되었던 시기이라 동행하지 않았다. 찾아갔던 우인들의 말에 의하면 주씨에게서는 호감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본론을 가리키면서 “이걸 알아야 요즘은 행세를 할 모양이니 ……” 하고 한탄조로 말하더라고 하는 것처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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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양주동 씨가 숭전 선생으로 왔을 때 동인 중에 씨를 2, 3차 왕방(往訪)한 이가 있어서 권에 못이기어 한 번 따라갔다. 양씨는 그 때 낮잠을 자다가 머리를 툭툭 털면서 중학생들을 맞아주었다. 아랫방과 웃방 새에 바람벽이 있는데 그 바람벽에 구멍을 뚫고 감옥소처럼 문을 달아서 그 구멍으로 앞니에 금니를 한 양씨의 부인이 과자를 올려보내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는 ‘센베이’를 얻어먹으며 씨의 대언장어(大言壯語)를 들었다. 씨는 「적벽부」이야기를 하고 프로 평단을 규탄하고 춘원이 이름만 빌려주면 문예잡지를 해보겠노라고 말하였다. 동인 중의 시인 한 사람이 시고(詩稿)를 보였는데 양씨 평언이 건방지더라고 불쾌히 생각하던 말을 뒷날 들은 법하다. 양씨는 씨 자신이 초한 『조선의 맥박』이라는 씨의 시집 광고를 보이면서 “광고도 작자가 쓰느냐?”고 놀라서 묻는 우리들에게 “그거 다 그런 거지 어디 자화자찬 아닌 것이 있나”하고 대답하여 소년의 마음에 비로소 문단의 내막을 들려주었다. 나는 다시 양씨를 찾아가지 않았다. 중앙일보 기자 시대에 사내에게 다시 한 번 양씨와 인사하고 그 때 찾아갔던 이야기를 하였더니 시는 기억에 없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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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시대에 교섭을 가질 뻔했고 또 어찌 어찌 했더면 나의 스승이 되었을는지도 알 수 없던 선배들은 이상의 제씨였는데 사제관계를 맺었다면 상방(相方)이 손해를 보았을 것이 분명한 일인지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되길 잘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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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간 뒤엔 내가 적을 둔 학교에는 스승으로 모실 만한 교수가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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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 기요시(三木淸[삼목청]), 다니카와 데쓰조(谷川徹三[조천철삼]), 모리타 소헤이(森田草平[삼전초평]), 도요시마 요시오(豊島與志雄), 사토 하루오(佐藤春夫[좌등춘부], 쓰치야 분메이였으나 별로 유쾌한 시간은 아니었다. 쓰치야라는 사람은 말할 수도 없는 가인(歌人)인데 다시 사토 하루오씨는 뼈에 가죽을 씌운 것처럼 어떻게 더럽게 여위었는지 옆에 가기도 끔찍하였다. 중학 시절에 『전원의 우울』등으로 감상주의를 만끽했던 기억조차 씨의 얼굴을 보고 반감되는 것 같았다. 또 이역의 일개 학생쯤이 다망한 제 선생을 찾아다녔자 공연히 방해만 될 뿐으로 제씨에게서 다못 한 마디라도 잊히지 않는 교훈을 받았으리라곤 믿어지지 않았다. 이리하여 나는 대학에서도 한 사람의 스승을 발견하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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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박영희, 이기영, 송영, 임화 등 제씨도 선배이니까 족히 스승이 될 것이었으나 당시의 정세의 덕분으로 씨 등과는 사제의 정이 맺어지기 전에 우인의 정이 먼저 맺어지고 말았다. 어떤 날 송영과 민촌과 셋이 목도로 배회하던 끝에 송씨가 나를 가리켜 “아들 뻘은 실히 되는 놈하고 너구 나구 하면서 술을 나누게 되었으니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망쳤다!”고 말하여서 민촌도 웃고 나도 웃은 적이 있었다. 그 때엔 이것이 조금도 불손하지 않고 자연스레 어울렸으니 요즘 선배에 대한 아첨(阿諂)이나 기성 권위에 대한 아유(阿諛)가 우리의 눈에 추잡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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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문학을 뜻을 두어 10수 년간 스승 없는 나에게 스승을 역할을 해 온 자는 언제나 동료들이었던 것을 나는 특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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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비판도 그들에게서 받았고 문학 진로의 타개도 나는 언제나 우인 동료들과의 논쟁에서 얻을 수 있었다. 이 밖에는 태서의 고전이 이와 동양(同樣)의 영향을 나에게 주었다. 지금도 나는 우인의 말을 항상 경청하여 나의 문학생활의 다시없는 조언자로 삼아온다. 결국 문학에 있어서는 스승은 무용이고 동료와 고전이 스승을 대신한다는 것은 내가 얻은 결론의 한가닥이다. (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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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 1939년 10월호, ‘스승 무용기 ㆍ 스승 예찬기’ 특집)
【원문】스승 무용기(無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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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천(金南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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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5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