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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학도(小說學徒)의 서재(書齋)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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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3
김동인
1
小說學徒의 書齋[소설학도의 서재]에서
2
―小說[소설]에 關[관]한 管見[관견] 二, 三
 
 
3
小說[소설]의 道德性[도덕성]
 
4
「아메리카의 이야기」
 
5
한 청년과 한 소녀가 서로 연애를 한다. 풋사랑이니만치 사랑의 정도 매우 길었다.
 
6
크리스마스가 가까왔다.
 
7
서양의 풍속으로는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서로 무슨 선사를 해야 한다. 부부, 부자지간에라도 무슨 선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물며 애인의 사이에 있어서랴.
 
8
이 이야기의 주인공 남녀도 크리스마스가 가까와 옴을 따라서 무슨 선사를 하여야 할 의무를 느꼈다.
 
9
사내는 생각하였다― 내 애인은 쉽지 않은 美髮[미발]의 주인이다.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그 미발을 장식할 만한 빗[櫛]이 없다. 크리스마스 프레센트로 빗을 하나 사 주면 얼마나 기뻐할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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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생각하였다-내 사랑하는 이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있어서 끔찍이도 애지중지하는데 유감인 것은 시계의 줄이 없는 점이다. 그의 가슴에 황금색 찬란한 시계줄이 번쩍이면 얼마나 그의 풍채가 더하여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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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행히도 이 순진한 相愛[상애]의 남녀는 다 돈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애인에게 무슨 프레센트를 하고 싶은 마음뿐은 남에게 지지 않으나 그것을 살 돈을 못 가진 사람들이었다.
 
12
드디어 크리스마스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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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사내는 제 애인을 방문하였다. 명랑한 얼굴, 명랑한 웃음으로 계집도 역시 명랑한 얼굴과 명랑한 웃음으로 사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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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소 크리스마스 프레센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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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장한 듯이 품에서 무엇을 꺼내어 계집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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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으세요. 변변치 않으나마 저의 성심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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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도 무엇을 꺼내어 사내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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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은 펴보았다. 아주 찬란한 머리의 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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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도 펴보았다. 늘 사고 싶던 시계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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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은 사내에게서 평생 소원이던 빗을 선사로 받았다. 사내 역시 평생 소원이던 시계줄을 계집에게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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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선사를 받은 두 사람은 먹먹히 자기네가 서로 애인에게서 받은 프레센트를 들여다보고 있기만 하였다.
 
22
드디어 계집이 눈물이 글성글성하여지며 지금껏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벗었다. 이것이 웬일이냐. 아리땁게 물결지었던 계집의 머리터럭은 없어지고 수건 아래서는 단발의 女頭[여두]가 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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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시계줄을 사 드리기 위해서 머리를 잘라서 팔았소이다. 빗은 고맙기는 하지만 머리털 없는 제게 빗은 無用之長物[무용지장물]이올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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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의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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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줄도 고맙기는 하지만 나도 당신에게 빗을 사 주기 위해서 시계를 팔았소이다. 시계 없는 내게 시계줄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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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탄식―
 
27
이리하여 막은 고요히 닫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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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메리카 소설 작가 오 헨리의 「The gift of magi」라는 소설의 대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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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소설에 대하여 一無名 寒士[일무명 한사]가 비판을 가한다 하는 것은 참람된 일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의 내용에 대한 불만을 금할 길이 없어서 한 마디 하는 것이다.
 
30
소설이라 하는 것은 무슨 훈화가 아닌 이상에는 그 소설에서 교훈적 의의를 찾아 내자 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겠다. 그러나 소설이라 하는 것이 한개의 奇譚[기담]이 아닌 이상에는 기담 이상의 다른 가치를 가지지 못한 이야기를 우리는 소설로서 용인할 수가 없다.
 
31
순진한 한 청년과 역시 순진한 한 소녀가 자기의 가장 중히 여기는 물건을 희생하여 애인을 기쁘게 하려 하던 그 성심에 대한 보수는 어떤 것이었던가.
 
32
오 헨리 씨는 혹은 이렇게 대답할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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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이렇듯 비참한 희극도 있는 것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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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대답은 결코 오 헨리 씨가 인생 도덕에 대하여 범한 죄에 대한 변명이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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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奇驚[기경]한 사실인들 소설에서 취급치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취급하려면 또한 그럴 만한 특수한 표현 방식이 필요하다. 이런 비참한 장면에 서게 된 남녀 주인공에게 대하여 독자의 마음에서 자연히 동정의 염이 생겨날 만한 특수한 표현 방식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런 점을 잊어버린 오 헨리 씨에게 대하여는 우리는 奇譚師[기담사]라는 명칭 이외에는 더 바칠 양심을 못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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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식의 경박과 아메리카식의 奇驚[기경]- 씨의 소설에서는 우리는 이 이외에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아까 예를 든 그 소설의 말미가 너무도 경박하고 기경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 자연히 우러나와야 할 남녀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을 일으킬 기회를 잃어버린다. 동정하여야 할만한 일을 쓰면서도 일면으로는 독자에게 동정함을 금하는 태도로 붓을 잡은 어떤 物語[물어]는 한 개의 기담으로 존재할 가치가 있을지 모르나 소설로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이것은 인류의 도덕성이라 하는 것을 유린하여 버리려는 불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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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세에 그 명성을 풍미하는 헨리 씨지만 부도덕과 경박과 기경이 유행하는 지금의 세태가 좀 안돈되는 때에는 씨의 명성은 저절로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비상한 천분을 가진 씨를 위하여 동정치 않을 수가 없다. 씨에게 조금만이라도 도덕적 소양이 있으면 20세기의 천재로서 천세토록 불후의 이름을 남길 것을….
 
38
조선에 있어서 오 헨리 씨의 뒤를 밟는 사람 가운데 이태준 씨가 있다. 재고삼고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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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 하는 것은 결코 劇話[극화]가 아니다. 그렇다고 기담도 아니다. 우리에게 도덕적 관념이 생기려는 것을 금하려 하는 종류의 소설을 우리는 소설로 용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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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篇小說[단편소설]의 末節[말절]
 
41
모파상의 「殺親者[살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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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에 한 목공이 있었다. 그 목공이 살인죄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피해자는 그 근린의 유복한 신사로서 남에게 원한질 사람이 아니었다. 가해자라는 목공도 얌전하기로 소문난 사람으로 살인죄를 범하리라고는 아무도 믿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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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목공이 드디어 자백을 하였다―. 자기가 그 신사를 죽였노라. 그 신사는 사실로 말하면 자기의 친부로서 자기는 그 신사의 사생아로다. 그런데 여사여사한 일이 있어서 자기는 마침내 자기의 친부 되는 그 신사를 죽였노라― 이렇게 자백 술회를 하고 맨 마지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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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만당의 신사 제군 나의 행동을 비판해 주시오” 하는 가해자의 최후 일언으로 이 소설은 종결을 지었다. 그리고 이 최후의 일절은 마치 거종의 여음과 같이 독자의 마음에 한참을 계속되어 울리어서 인생의 비극적 갈등의 한 막을 독자의 머리에 깊이 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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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서 생각할 점은 만약 이 소설의 말미에 ‘재판관은 그 목공에게 무죄의 판결을 내렸다’ 는 일 행만 더 가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아직껏 인생의 비극적 갈등 등을 말하던 이 소설은 홀연히 변하여 ‘감정’ 이라 하는 것을 설명하는 소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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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절을 또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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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관도 목공의 심사를 동정하였다. 그러나 법은 굽힐 수가 없었다. 목공은 드디어 사형의 선고를 받았다’ 고 하여 놓으면 그 소설은 또한 홀연히 변하여 ‘법률과 인생 문제’ 라는 또 다른 문제를 말하는 소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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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단편소설을 붓하는 사람이 잊어서는 안 될 중대한 문제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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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이란 것은 가장 압축된 감정의 표현이기 때문에 一字[일자]의 가감도 용허할 수 없다. 무지 혹은 몰이해한 일자의 가감은 그 작품 전체를 별개의 물건으로 만들어 놓기가 쉬운 것이다. 더구나 단편소설에 있어서는 기교상 대개 그 클라이막스를 말미에 두기 때문에 일점 일획의 가감은 그 작품 전체의 가치를 좌우하는 것이다.
 
50
비교적 산만한 필치에 습관된 장편소설 작가가 어떻게 가다가 단편소설을 쓰게 되면 독자에게 흔히 ‘이것은 아직 미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주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전혀 일구 일자에까지 주의한다 하는 그 노력이 결여한 까닭이다.
 
51
그리고 말미의 일절에 너무도 치중하기 대문에 오 헨리와 같은 사람의 기담도 단편소설로 오인이 되는 것이다. 오 헨리의 작품은 모두 일본의 소위 ‘落語[낙어]’와 같이 최종의 기경한 일구로서 독자를 아연케 하는 종류의 것이므로 단편소설의 최후의 일절(클라이막스)과 동일한 것으로 오인되기가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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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소설]과 人生 問題[인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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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가 하도 오래서 제목은 잊었지만 체홉의 소설에 이런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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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관청에 무슨 청원을 하러 갔다. 당해 관리 앞에 가서 몇 번을 굽실굽실하였지만 관리는 본 체도 않고 무슨 장부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생각한 끝에 그 관리가 보는 페이지 위에 돈 한 장을 꺼내어 놓았다. 그러매 그 관리는 책장을 벌걱 뒤여서 다음 장을 보기 시작한다. 청원 갔던 사람은 하릴없어서 돌아서려 하니까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이 “돈한 장만 더 놓아 보시오” 하고 주의한다. 그래서 다시 돈 한 장을 더 꺼내어 관리가 보고 있는 책 페이지 위에 놓으니까 관리는 그제야 그 책을 접어버리고 머리를 들면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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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경개다.
 
56
러시아 관리 사회의 부패를 여실히 말하는 이 한편― 소설로서 어떤 문제를 제시함에 있어서도 이 정도에 그쳐야 할 것이다. 만약 처음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청원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자기 지인에게 아까의 경과를 이야기하고 관리 사회의 부패를 탁자를 두드리며 설명하는 장면을 이 소설의 말미에 첨가하였다 하면 독자는 도리어 작자의 과도한 친절을 겹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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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톨스토이는 체홉을 가리켜 사진사라 하였다. 체홉은 인생의 사진사지 화가가 아니라 하였다.
 
58
이것은 분명히 톨스토이의 과언이다. 톨스토이의 견해로는 체홉은 인생의 어떤 문제를 보여만 줄 뿐 앞길을 암시하지 않았으니 사진사에 지나지 못한다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분명히 그릇된 관찰이다. 톨스토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채찍을 들고 민중의 앞에서 방향을 强敎[강교]한 일은 없었으나 체홉만치 인생의 기밀한 장면을 후인에게 많이 보여 준 작가가 또 어디 있는가?
 
59
「담배」라는 소설로써 ‘약’은 달아야 한다, 교훈은 ‘친절하여야 한다’는 뜻을 보여 준 체홉은 인생 문제를 제시함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든 친절하였다. 그 판단은 독자의 자유 재량에 맡겼다. 결코 ‘여사여사한 일에는 여사여사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그의 작품을 읽으면 자연히 체홉의 내리려는 판단을 독자 스스로가 내리게 된다.
 
60
필자도 러시아의 소설을 꽤 많이 읽었지만 러시아라 하는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러시아인이 어떤 인종인지를 알기는 체홉의 該小說[해소설]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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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自家[자가]의 의견을 붙이지 않았으나 간단한 사실의 노골적 제시는 독자로 하여금 그 ‘사실’ 의 뒤에 숨은 ‘문제’ 에 머리를 기울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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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디까지든 이러해야 할 것이다. 독자를 강제하려 하는 것은 설교지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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篇小說[장편소설]과 短篇小說[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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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는 흔히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구별을 길고 짧은 데 두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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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오해다. 한자로 쓰는 명칭이 하나는 長篇이요 하나는 短篇이매 그렇게 생각하기도 쉽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특유 명사이지 결코 길고 짧음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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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로 보아서 장편소설은 길고 단편소설은 짧다. 그러나 간간 예외로는 단편소설보다 짧은 장편소설이 있고 장편소설보다 긴 단편소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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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그 구별은 형식에 있다. 어떤 것은 장편이요, 어떤 것은 단편이라고 형식상 엄연한 구별이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장편소설은 비교적 산만한 인생의 기록이다. 그러나 단편소설이란 ‘단일한 효과를 나타내는 압축된 인생 기록’ 으로서 단 한 개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하여 가장 간단한 필치로 기록된 가장 간명한 형식의 소설이다. 그리고 그 단편소설에 직접 간접간 필요없는 구는 한 마디도 삽입되는 것을 허락치를 않고 그 이상 한 구절이라도 더 삽입되면 본시 그 소설이 나타내려는 효과를 전연 파괴해 버리거나 적어도 별물로 변할이만치 압축된 기록이다.
 
68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자면 위에도 말한 바 모파상의 「殺親者[살친자]」의 말미에 일행만 더 첨가하면 지금껏 나타내던 원작의 효과와는 별개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69
이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는 대개 길면 장편이요, 짧으면 단편이라 한다. 이것은 보통 독자 계급뿐이 그런 것이 아니라 문예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도 단편과 장편의 엄연한 구별을 모르는 이가 많다.
 
70
통일된 인상, 단일의 정서, 보다 더 기교적인 필치― 이것이 단편소설의 특징이다.
 
71
장편소설은 비교적 산만된 인생 기록이니만치 정서며 인상의 통일은 필요도 없으며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이 도리어 무리한 일이지만 단편소설에 있어서는 두 가지 이상의 정서며 인상은 존재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72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의 그 구별을 상론하자면 거대한 책자로도 부족하겠지만 간단히 그것을 감정하자면 어떤 소설을 讀了[독료]한 뒤에 독자의 마음에 단일적으로 예각적으로 보다 더 순수하게 감수되는 것은 단편소설이요, 독료 후에 침중하게 광의적으로 산만되게 감수되는 것은 장편소설이다.
 
73
소설의 읽음에 있어서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에 대해서 이만한 막연한 구별점이라고도 알고 있으면 좋겠다. 길면 장편소설 짧으면 단편소설이라는 것은 너무도 무지한 구별이다.
 
 
74
小說[소설]의 文章[문장]과 內容[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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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있어서는 아직껏 소설에 사용되는 문장에 관하여 논란이 있은 일이 기억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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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치 문장이라 하는 것은 閑却[한각]을 당하였다.
 
77
그러나 소설이라 하는 것이 문장예술인 이상 마치 회화의 색채와 같은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다.
 
78
문장이 가지는 리듬과 무드― 이것은 소설의 가치의 그 절반을 결정하는 것으로서 이런 귀한 방면에 관하여 아직 논평이 없는 것은 오히려 기이한 일이다.
 
79
에드가 앨런 포오의 많은 작품에서 그의 세련된 정서 깊은 문장이라 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면 그의 가치는 반감이 될 것이니 내용과 문장이 잘 조절이 되고야 여기 비로소 완전한 소설이 생기게 될 것이다.
 
80
문장은 인격과 동시에 내용도 또한 인격이다.
 
81
체홉의 작품의 내용을 포오의 문장을 쓴다 하면 체홉의 작품의 가치는 반감이 될 것이니 체홉의 작품은 체홉식의 평범하고 솔직한 문장으로 써야 비로소 그 가치가 나타날 것이요, 포오의 작품은 포오식의 순란한 문장으로 써야만 비로소 그 가치가 나타날 것이다.
 
82
내용과 문장과의 조화라는 것은 불가분의 것으로서 아직껏의 문예사를 뒤적여 보면 좋은 내용을 가지고도 그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 문장을 사용하기 때문에 차차 잊어버리는 작가도 수가 적지 않다. 그 예로써 페니모어 쿠퍼 같은 사람은 그 대표적 사람일 것이다. 또 워싱톤 어빙 같은 사람은 비교적 얕은 무의미한 내용의 작품의 주인이지만 그 내용을 살피면 아치 있고 현란된 그의 문장으로써 문예사상에 영구히 그 이름을 남긴 사람이다.
 
83
위에 소위 문장이 좋아야 한다 하는 말은 결코 미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84
작품 내용과 잘 조화되는 문장이어야 한다 하는 말이다. 위에도 예를 든 바와 같이 체홉의 소설을 미문으로 썼으면 도리어 지기지기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85
조선 신문예가 일어난 지 근 20년, 초창 시대에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는 조선어가 인제는 小說述作[소설술작] 등에도 그다지 불편이 없을이만치 늘었으니 인제는 문장에 대하여 진실한 태도로 연구를 하는 생도가 생겨나야 할 시기이며 문장에 관하여서 논란도 간간 생겨야 할 때이다.
 
86
소설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방면에 대해서도 저절로 관심이 가서 몇 마디 써 본 것이다.
 
87
소설을 쓰는 여가에 잠시 틈을 도적하여 쓴 글이다. 소설에 취미를 가진 동지들에게 사소의 참고거리라도 되면 필자의 만족이 위에 더 없겠다.
 
 
88
小說[소설]과 實際[실제]
 
89
조선이라는 곳만치 소설에 관해서 무관심한 곳은 쉽지 않을 것이다. 얼마전에 어떤 잡지사에서 몇몇 문인에게 최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 무엇이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그때 그 대답에 <新東亞[신동아]>의 무명씨작 「血淚錄[혈루록]」이 최고위를 점했다고 기억한다.
 
90
무론 「혈루록」은 체험록이니만치 그리고 사건이 사건이니만치 필자도 다대한 흥미(흥미라는 것은 좀 잔혹한 말이나마)로 읽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는 것으로 인정할지 심히 기이한 일이다. <신동아>지에도 뚜렷이 장편소설「혈루록」이라 하였으니 이런 기이한 일이 다시 없다.
 
91
검토하여 보면 「혈루록」이 소설적 형태를 갖춘 점을 발견할 수가 없다. 체험기니만치 박진력은 꽤 많이 있으나 그것을 소설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92
만약 그것이 소설일 것 같으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문둥병자가 자기의 병과 및 동행자의 병을 은폐하고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에 사람으로서의 일점의 양심의 가책이 가미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건강체로서 거리를 왕래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극적 증오심이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온갖 곳에 좀더 자포적 기분이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93
사실을 사실대로 쓰면 소설이 안 된다. 존재할 수 없는 사실이라도 거기다가 실재味[미]를 가하면 소설로서 인정할 수가 있는 반면에 실재한 사실 일지라도 소설적 가미가 없으면 이것을 소설로 인정할 수가 없다.
 
94
실록과 소설의 차이가 여기 있는 것이다.
 
95
인생 생활이 전부 소설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인생 생활 중에서 소설도 될 수 있는 것을 추려서 단순화하고 통일화한 뒤에야 비로소 소설이 되는 것이다.
 
96
산만한 기록이며 일기문이 소설과 구별되는 점이 여기에 있다.
 
97
요컨대 실록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는 소설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록에는 또한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되 실록과 소설과는 마땅히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98
그리고 또한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실록 혹은 체험록이 일개 소설보다 박진력이 부족하고 독자에게 부자연한 느낌을 주는 예가 많다. 정사「三國誌[삼국지]」와 소설 「三國誌演義[삼국지연의]」의 예는 둘째로 두고라도 인간 생활에는 의외에 일어나는 일이 있으나 소설에 있어서는 그런 일에도 그럴듯한 정당성을 반드시 붙이는 것이므로 소설이 실록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국 소설가 스티븐슨은 타인의 소설을 읽다가 부자연한 곳이라도 있으면,
 
99
“흥, 이 소설은 모델이 있는 소설이로군.”
 
100
하였다 한다.
 
101
實記[실기]가 소설보다 부자연하다.
 
 
102
<每日申報[매일신보]>, 1934.3.15~17,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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