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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沈) 봉사 ◈
◇ 서장(序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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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채만식
1
沈[심]봉사
2
序章[서장]
 
 
3
하늘(天上[천상])도 아니요, 땅(地上[지상])도 아니요 한 회색 허공이었다.
 
4
회색 옷을 입고, 회색 살빛을 하고, 회색 표정을 한 늙은 양주가 나란히 앉아 있다. 인간세계의 운명을 맡아보는 신(神) 양주였다.
 
5
노구(老嫗)가 커다랗게 하품을 한다. 영감이 따라 커다랗게 하품을 한다.
 
6
“아이, 심심해!”
 
7
노구가 그런다.
 
8
“어이, 심심해!”
 
9
영감이 맞장단을 친다. 노구가 말한다.
 
10
“무어 구경거리 좀 없나!”
 
11
“요새는 별로……”
 
12
“하나 좀 꾸며 보시죠?”
 
13
“글쎄, 온……”
 
14
“대체 그, 인간들이 비극이라는 걸 얼마침이나 견디어내는 끈기가 있을꾸?”
 
15
“엔간합넨다.”
 
16
“그래두 한정이라는 게 있지요!”
 
17
“무한정한 것들이 있으니!”
 
18
“그럴까요?”
 
19
“구경해 볼까요?”
 
20
“어디?”
 
21
영감이 눈을 딱 감더니, 앞에 놓인 연상(硯床) 위의, 한 권 낡은 문서책에 손을 얹는다. 운명록(運命錄)이라 희미하게 쓰인 문서 책이다.
 
22
영감은 문서책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이윽고 중간 한 군데를 활짝 펼친다.
 
23
“황주 도화동 심학규.”
 
24
머리에 이렇게 쓰이고, 장님인 것, 안해는 누구, 신분은 무엇, 가산은 어떻고, 성행, 학문, 그 밖에 여러 가지로 자상한 것이 잔주로 씌어 있다.
 
25
“하필, 장님이 걸렸어. 궁하고 자식도 없고 한!”
 
26
영감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노구가 같이 들여다보면서 말한다.
 
27
“신세가 그만침 기구하니, 차라리 부려보기 마찹지요!”
 
28
“딴은 그렇기도 하렷다!”
 
29
영감이 붓을 들어, 넘엇장에다 심학규의 운명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노구가 옆에서 연해 이래라저래라 묘한 훈수질을 한다.
 
30
마침내 마지막 한 절이 기록되었다.
 
31
양주가 같아서, 죽 한번 읽는다. 그리고는 만족히 고개를 끄덕인다.
 
32
“이만하면!”
 
33
영감이 그런다.
 
34
“보암즉할까 보군요.”
 
35
노구가 그렇게 화한다.
【원문】서장(序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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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蔡萬植) [저자]
 
  1944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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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7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