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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붓자식(子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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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7
김명순
1
의붓자식(子息)
 
2
인물
3
성실(星實) : 23세의 단아한 여자 꿈을 보는 듯한 표정 밀짚색의 침의(寢衣)를 입었음
4
부친 : 60세의 완매(頑昧)한 노인
5
매(妹)1 : 22세의 풍부한 육체의 소유자 유행하는 화려한 의복을 입었음
6
매 2 : 18세의 사랑스러운 여자
7
의사 1 : 34,5세의 정직을 표시하는 듯한 남자
8
의사 2 : 25세의 청년. 호리호리한 체격에 회색 양복을 입고 머리를 숙여 자주 삼가는 태도를 가지나 그 행동 언어 심히 민첩하여 상대자에게 감동을 줌
9
여교원 : 25세의 정직을 표시하는 여자 (성실의 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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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인 1
11
여하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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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小童) 1
13
소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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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5
봄날아침(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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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 얼마큼 넓은 침실을 나타냄. 그러나 문창(門窓) 없고 전면의 미닫이만 열어젖혀서 자못 관(棺)을 옆으로 갖다 놓음.
17
배경 : 보이는 전면에 밀짚색의 하늘한 사장(紗帳)을 늘이었다. 우(右)편에는 세장(細長)한 대리석 침대가 놓였고 중앙에는 하얀 견사제(絹糸製)의 보를 씌워서 둥그런 탁자가 놓였고 그 위에는 금 쟁반과 책 한 권과 수선화의 화병이 보인다. 무대 좌편에는 벽을 의(依)하여 호피 위에 피아노가 놓였고 피아노 위에는 앉은뱅이꽃 광주리가 보이다. 막이 열리면 미닫이를 닫은 방 앞에 쪽마루가 보임. 소동 2 말없이 등장하여 좌우의 미닫이를 열어젖힘. 방 안에는 성실이가 침대 위에 잠자고 방바닥에 다다미 깔듯 편 황색 비로드 보료들이 아직 꺼지지 않은 전등에 찬란히 보임. 소동2 말없이 고요히 퇴장.
 
 
18
성실  (몸을 일으켜서 홀로 미소하다가 사방을 휘 둘러보고 입을 삐죽삐죽하며) 아― 또 영호(英湖) 씨의 꿈을 꾸었구나. 어디였든지 이 방 같지도 않고 아주 넓은 곳이었다. 하늘 위도 땅 위도 분간할 수 없이 이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꽃이 참으로 연하게 참으로 향기롭게 피었었다. (홀연 의심하는 표정) 무엇인지 몹시 어렴풋하지만 장례의 노래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런 가운데서 어렴풋하게 영호 씨와 내가 마주 기도하듯 머리를 굽혔다. 아아 오늘은…… 그이가 오실지도 모르겠다. 작년같이 (침대 아래 내려서며 피아노 앞으로 가서 피아노 위에 꽃 광주리를 내리어서 맡아보며) 똑같은 꽃을 주셨으니까!
 
19
매1  (매 2와 등장) 형님 그 꽃이 영호 씨가 주신 것이요. (가까이 와서 맡아보며) 어쩌면 이렇게 좋은 향내가 날까? 지금 이런 꽃이 어디 있었을까? (부러운 듯이)
 
20
성실  궁전에. 호호 나도 몰라요.
 
21
매2  언니들도! 그것을 모르셔요? 온실에서 핀 것이라나요.
 
22
매1  어느 온실에서?
 
23
매2  그거야 누가 안담. (웃다 그치고 꽃 광주리를 들고 맡음)
 
24
매1  형님 (성실에게) 오늘부터 피아노 가르쳐주세요.
 
25
성실  그림은 어찌하고 또 피아노를 시작한대.
 
26
매1  그렇지만 영호 씨는……. (눈물 지음)
 
27
성실  그이는 그림도 좋아하실걸
 
28
매2  둘째언니는 어제 그림 오늘 음악 내일 문학! 참 변덕도 좋으시지 아버지 말씀대로 바느질이나…….
 
29
매1  웬 참견이야 아니꼽게.
 
30
매2  언니 노했어요? (미안한 듯이)
 
31
매1  듣기 싫어. (매 2의 손의 꽃 광주리를 탁 쳐서 방바닥에 떨어침)
 
32
성실  아서요. 일껏 예물하신 것을.
 
33
매1  그럼 잘못되었나 보다. (울며) 형님도 형님이고 그이도 그이지요. 나와 약혼을 해두시고는 형님과만 편지 왕래를 하시고 또 예물을 한다 어쩐다 하니 대체 어찌되는 일인지 알 수가 없어. 오늘은 아버지께 여쭈어볼 테야.
 
34
성실  아서요. 그전부터 아는 이니까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동생의 낯을 보아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내게 예물을 하는지 누가 안담.
 
35
매1  그러기에 언니는 훌륭하세요. 이 남자 저 남자한테서 편지가 오고 예물이 왔다갔다하니까 (우편으로 퇴장하면서) 아니꼽게 피아노나 친다고 그 꼴은 볼 수가 없네.
 
36
매2  큰언니.
 
37
성실  응 편지가 웬 편질까? 별말을 다 듣겠다.
 
38
매2  둘째언니가 또 오늘은 말썽을 피우려나 봐요. 엊저녁부터 잠도 안자고 똑 미친 것처럼 야단이어요.
 
39
성실  …….
 
40
매2  그런데 언니 영호 씨는 본래 큰언니의 친구였지요
 
41
성실  (자성하는 듯이) 내가 어찌했단 말인고. 내가 어찌했단 말인고. (머리를 숙이고 생각함)
 
42
여하인1  큰아씨. 저 마님께서 (세숫물 대야와 양치기를 들고) 큰아씨가 몸 편치 않으시다고 세숫물을 떠다드리라고 해서 떠내왔습니다.
 
43
성실  (귀치 안은 듯이) 이 애야 물 떨어진다. 세숫물은 왜 들고 나와 그러니 누가 중병을 앓느냐.
 
44
여하인1  그래도 마님께서 떠다 드리라고 하세요.
 
45
성실  그러면 염려 말고 목욕탕에 갖다 놓아라.
 
46
여하인1  그럼 좀 있다가 마님 보시는데 영감마님 눈에 띄지 않으시도록 합쇼. (퇴장)
 
47
성실  무슨 일일까.
 
48
매2  (머뭇머뭇하다가) 저어 엊저녁에 아버지께서 약주 잡숫고 오늘 언니의 생신이라고 20원을 어머니께 드렸는데 (말을 뚝 그치고 성실을 바라봄)
 
49
성실  아― 살아가는 재미를 모르겠다.
 
50
매2  참 언니. (고개를 숙여 눈물지음)
 
51
성실  어찌할꼬. 몸은 약하고 갈 곳도 없고!
 
52
매2  엊저녁에도 어머니와 둘째언니가 공연히 나를 들볶겠지요. 큰 언니의 비위만 맞춘다는 둥 말질을 한다는 둥. (흑흑 느낌)
 
53
성실  그래 어떻게 하라고 그러디.
 
54
매2  차라리 어떻게 하라고 일러나 주면 좋지요.
 
55
성실  어찌할꼬. (피아노 앞에 가 앉으며) 동생아 저 옆방에 가서 의장에 걸린 두루마기를 좀 갖다 주려무나. (가볍게 기침하고 피아노치며 노래함)
56
동생아 동생아
57
찾아다오 내 방문을 (매2 두루마기를 등에)
58
찾아다오 내 자리를
59
자리는 좋은 자리 이끼 아래 (또 기침)
 
60
매2  (불안한 듯이) 또 그런 노래를 하십니까
 
61
성실  (점점 급히 연해서 기침을 하며 피아노 위에 엎드림)
 
62
매2  형님 또 피아노 아래로 피가 흐릅니다그려.
 
63
성실  오― 괴롭다. 이번에는 손에서 피가 나지 않고 목구멍에서 목구멍에서.
 
64
매2  오오 목구멍에서! 의사를 불러올까요
 
65
성실  그래라 그래라.
 
66
매2  (달음질해서 마루 위를 왔다 갔다 하다 우편으로 퇴장)
 
67
소동1  (우편으로 걸어 나오며) 그러면 큰아씨는 지부(地府) 황천으로 가시려나. 마님께서 밤마다 물 떠놓고 비시더니 점점 가운데아씨 세상이 되어온다.
 
68
성실  (기우에서 일어나며 벌겋게 물들인 건반을 손수건으로 씻고) 이 애야.
 
69
소동1  네―
 
70
성실  나를 목욕탕까지 좀 붙들어다 다오.
71
(성실 소동 1에게 붙들리어 퇴장)
 
72
(부친 의사 1 등장)
 
73
부친  엊저녁에는 머리가 아프다고 밤들어서 선생님을 모셔오더니 오늘은 또 피를 쏟았답니다. 딸인지 무엇인지 어멈도 없는 딸이 30이 가깝도록 제 아비의 속만 태웁니다. 하하하하.
 
74
의사1  그러실 리가 있습니까? 맏따님께서 그저 따님 중에 제일은 못 되지만 아직 어리시고 재조가 용하서서 서울 안에서 다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그저 너무 심려를 하셔서 자주 병석에 누우시는 것이 불쌍하신 일이지요.
 
75
부친  (침대 앞으로 가서 보고) 이 애가 어디를 갔나? 성실아 성실아.
 
76
의사1  (방안을 휘 둘러보다가 피아노 앞에 꽃 광주리가 떨어졌음을 보고) 저기 꽃 광주리가 떨어졌습니다그려.
 
77
부친  (꽃 광주리를 쳐들며) 어이구 이 물. 이 애가 어째 이것을 그대로 버려두었을까?
 
78
의사1  그 꽃은 아마 영호가 장래 제 부인 되시는 그 형님에게 예물한 것이지요.
 
79
부친  댁에 이런 고운 꽃이 피었습니까?
 
80
의사1  네. 영호가 자기 손으로 온실에서 길렀습니다.
 
81
부친  대단히 귀한 것이올시다그려.
 
82
의사1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그런데 둘째따님 아니오? 제 아주머니 되실 이는 요새 무얼 하십니까? 도무지 뵈올 수가 없습니다그려. 부친 꼭 들여앉히었습니다. 그 애는 제 형과는 달라서 가정에 합당하도록 해야 하겠기로 요새는 그림 그리던 것도 그치라고 하였습니다. 제 의복은 많이 지었지요. 그 그런데 (좀 주저함) 혼례를 언제나 지낼까요?
 
83
의사1  글쎄요 댁에서 좋으신 때 하면 저희에게도 좋겠습니다. 당자는 부끄럼이 많아서 아직도 그런 말은 들은 체 만 체하지요마는 제가 무엇이라겠습니까?
 
84
부친  그러면은 이달 안으로 일을 치러버릴까요? 급한 듯합니다마는.
 
85
의사2  그러시지요. 신식 혼례야 구식 혼례와 달라서 간단하니까요. 언제든지 좋으시지요? 아마 그 일에 대해서는 제 안으로서도 부인께 의논할 듯합니다. 매우 가까우신 터이니까요.
 
86
성실  (심히 설운 표정으로 등장)
 
87
부친  이 자식아 좀 어떠냐?
 
88
의사1  두통은 없으십니까?
 
89
성실  무엇인지 머리가 서늘한 것 같아요. 그리고 조끔 전에는 공연히 목에서 피가 나왔어요.
 
90
의사1  하하 (깨닫는 바가 있던 듯이) 그 안 되었습니다그려. 그런데 혈색은 어땠습니까?
 
91
성실  (괴롭고 귀치 안은 듯이) 모르겠어요.
 
92
부친  그그 저 애 모친이 피를 쏟는다 어쩐다 하더니 저도 닮아서 그런 것이로군. (혼잣말같이)
 
93
의사1  (놀라는 듯이) 부인께서도 그러십니까?
 
94
부친  아니요 저 애 어머니야 어디 있습니까?
 
95
의사1  하하 깜짝 잊어버렸습니다. 그러 그렇겠습니다. 성실 씨 그럼 시방 보아드릴까요?
 
96
성실  네. (침대 위로 올라가며 두루마기를 벗어서 한편에 놓다)
 
97
의사1  (가방에서 체온계를 내여서 흔들다)
98
(무대 한참 고요함. 부친 의사1 침대를 가리어서 진찰함)
 
99
의사1  (진찰을 마치고) 과하지는 않습니다. 시방이라도 치료만 잘했으면 염려 없습니다.
 
100
부친  네 그러면 아직 . 다른 사람에게 전염된다든지 그런 염려는 없습니까?
 
101
의사1  글쎄요. (가방을 접음) 혹이 또 저를 부르시려면 저는 오늘 또 문 밖에를 나가니까 제 대신 영호를 불러주십쇼
 
102
부친  그러지요. 감사합니다.
103
(의사 1 퇴장. 부친 성실 전송함)
 
104
부친  그러기에 그 피아노인지 무엇인지 고만두라니까. 엊저녁에도 공회당에서 그 짓을 하고 오늘은 저 모양으로 앓으니 (성실 침대우에 엎드림) 제일에 새 사돈댁이 부끄럽다 어디 꼴이 되었느냐? 저런 병신을 누가 데려갈 리도 없겠고 딸이라니 늘 부모하고 같이 있는 법도 아닌데 네 몸을 네가 돌보아서 앓지 않을 도리를 해야지 낸들 어찌하란 말이냐 의사의 비용인들 적으냐.
 
105
성실  (엎드려 느낌)
 
106
부친  그리고 이를 때 한꺼번에 일러두는 말이다마는 영호로 말하면 네 동생의 남편 될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좀 주저함) 이를테면 너무 지나치게 친하게 지낸단 말이야. 너희끼리 먼저 사귀었더라도 영호 아주머니와 너의 시방 어머니가 정해 놓은 것을. (성실 흑흑 느낌)
 
107
성실  아버지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그렇게까지 말씀 안 하셔도 다 알아요.
 
108
부친  아는 일을 왜 그렇게 실수를 한단 말이냐?
 
109
성실  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110
부친  고만두어라. 듣기 싫다. 그럼 네 어머니와 동생이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스름스름 퇴장)
 
111
여하인2  (등장) 아이고 아씨 또 우시네. 아씨 동무 학도 상이 오셨습니다.
 
112
성실  이리로 들어오시라 해라. (일어나며 눈물을 씻음)
 
113
여교원  (등장) 성실 씨 왜 어디 편치 않으시오
 
114
성실  용서하시오 이 꼴을 보여서.
 
115
여교원  또 우셨구려. 그저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가시오. 그 가운데서 성실씨의 예술이 배양될 것입니다.
 
116
성실  세라 씨 저는 참으로 울기에도 싫증이 납니다. 제 온몸은 제 눈물에 다 녹아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온대의 생물이 한대로 옮겨져서 늘 사모하던 온대의 사랑을 다시 안 이후로는 또다시 한대에서 살 수 없는 것같이.
 
117
여교원  성실 씨 시방 이리로 오다가 영호 씨를 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신색이 말이 못 되었어요. 저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그대로 머리를 숙이고 지나가시는데 몹시 번민하는 이 같습디다.
118
(성실의 안색을 살핌)
 
119
성실  (말없이 머리 숙임)
 
120
여교원  그런데 성실 씨의 설움은 그로 원인된 것이 아닙니까? 언제 말씀하신 것도 들었지요마는, 저는 작년 가을에 제가 가르치는 학생의 집 이층에서 내려다보다가 그 집 후원 울타리 밖 길에서 성실 씨와 영호 씨가 서로 가다가 마주쳐서 몹시 머뭇머뭇하고 어려워하시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두 분의 얼굴이 파랗던 것 저는 시방도 잘 기억합니다. 감격해서 죽는다는 것은 그러하던 당신들의 지난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무서운 것을 보는 것같이 진저리를 침)
 
121
성실  세라 씨! 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조금 전부터 세상과는 딴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말 사랑은 세상에 드물게 있는 것으로 알아졌습니다. 세상에 자주 있는 소위 사랑이라는 것은 육적 충동과 호기심 만족에 불과한 것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결혼을 꺼립니다.
 
122
여교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멀리하는 것입니다.
 
123
성실  그럼 세라 씨는?
 
124
여교원  그런 생각은 세상에 의붓자식이외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영육이 합일치 못하는 아픔이외다. 저는 일찍이 궁글어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실은 제가 애타게 구하던 사랑을 이 입으로 이 손으로 거절하였습니다. 성실 씨 그 후로는 모든 부랑한 이들과 부끄럼 없는 이들과 광인들과 걸인들까지도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는 볼 수 없어졌습니다. 성실 씨 저는 매일 밤마다 그런 이들이 헤맨 길거리를 찾아다녔습니다. 아무 곳에서도 저는 그를 다시 찾을 수 없었습니다.
 
125
성실  (몸서리를 치며) 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이십니까? 그 알지 못하는 이는 자기의 이성으로 자제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126
여교원  그이는 영호 씨와는 딴 사상을 가졌었습니다. 그이는 무엇이든지 체험하여 가려고 하던 이었습니다. 영호 씨는 그이와 달라서 무엇인지 먼저 알고 입을 다무는 이가 아닌지요.
 
127
성실  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이는 결코 말하는 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모르는 이가 아닙니다. 그의 날카로움은 고요하면서도 무서운 큰 힘을 가졌습니다.
 
128
여교원  성실 씨 모든 인생은 움 돋아나온 사랑의 힘의 동그라미 안에서 몸을 맞추도록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129
성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130
여교원  그러나 성실 씨 그는 얼마나 예절을 좋아하고 우둔함을 꺼리고 용서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요.
 
131
성실  사랑을 말씀하십니까? 그래서 세라 씨가 거절한 그이는 두 번째 당신에게 돌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그 후로는 다시 만나지도 못하셨습니까?
 
132
여교원  그 후에도 만나기는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애타서 애소하던 아름다운 그이는 다시 볼 수 없었어요.
 
133
성실  그러나 세라 씨 우리는 어떻게 그같이 짧은 사랑을 자신의 실생활 위에 머무르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마치 추위를 닫힌 유리창에서 그 화사(華奢)한 빙화를 부젓가락으로 긁어내서 본다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닐까요? (여교원 성실 극히 번민함같이 보임)
 
134
여교원  우리는 자기의 사랑을 실생활에 이끌어서 이용할 수는 없다 하나 또 그러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135
성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우리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의 생활에 붙여진 것을 다시 찢어서 돌려오려면 얼마나 그 아름다움을 손(損)해야겠습니까?
 
136
여교원  (한숨) 그러기에 불행한 우리들은 지나온 우리의 귀한 시간을 붙들어 영원을 건설하고 우리의 육체로 그 가운데 수도니(修道尼) 같이 생활케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생활을 자기의 행복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
 
137
성실  (한숨) 단테는 그러한 이의 왕이지요.
 
138
여교원  (자문자답하듯) 그러한 생활에 안정을 얻을 수가 늘 있었으면 좋겠지. 그러나 단테에게도 그 영원한 사랑을 대표한 이에게도 두 사생아가 있었다. 그 육신이 나은 조반니 그 정신이 나은 돌노래. (하품)
 
139
성실  세라 씨 저는 단테의 『신곡』보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모나리자」가 사실이 희미해서 좋습니다.
 
140
여교원  극히 이지적이면서도 신비스러운 것 말씀이지요.
 
141
성실  네. (괴로운 듯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용서합쇼. 어찌 곤한지요 연일 . 복습을 했더니 오늘 아침에는 토혈까지 했습니다. (침대 위에 눕다)
 
142
여교원  그럼 누우십쇼. 그렇게 괴로우신 줄을 모르고 이야기를 많이 하시도록 했습니다그려.
 
143
성실  (침대 위에 누우며) 용서합쇼. (가볍게 기침하다가 점점 급하여짐)
 
144
여교원  (품에서 시계를 꺼내 보고) 그럼 치료 잘하십쇼.
 
145
성실  (작은 음성으로) 언제나 또 뵈올 수가 있으리까.
 
146
여교원  (작은 음성으로) 또 오지요.
 
147
성실  언제라십니까 세라 씨.
 
148
여교원  성실 씨 너무 비탄하지 마십쇼. 또 오지요.
 
149
성실  (몸을 일으키려다가 기침함) 오 괴로워요. 일어날 수 없습니다그려. 이대로 실례합니다. 부디 안녕히…… (기침에 말을 마치지 못함)
 
150
여교원  너무 서러 맙쇼. 또 쉬 오지요. (우편으로 퇴장)
 
151
성실  세라 씨 세라 씨. (몸을 일으키며) 잠깐만 기다립쇼. 벌써 가셨다. (팔로 얼굴을 가리고 다시 눕다) 몹시 아득거리게 하던 때는 갔다. (혼잣말함)
 
152
여하인2  (밥상을 이고 등장 좌편 쪽 마루에서 걸어 나오며) 네기 땀나라 오늘은 서편에서 해가 떠오르지도 않았는데 웬일일까? 노― 식은 밥 데운 것만 드리던 아씨를 급히 차려드리라니 참 그야말로 생일 쇠시겠군. (미닫이 앞으로 와서 어깨를 쭈뼛하고) 아씨 아씨, 진짓상 내왔습니다.
 
153
성실  거기 놓아라.
 
154
여하인2  거기가 어디랍쇼?
 
155
성실  아무데나.
 
156
여하인2  (상을 내려놓으며) 아이고 아씨 또 우시네. 저러지 말고 출가라도 하시지. 밤낮 우시랴 앓으시랴 아씨 다 닳아빠지겠네.
 
157
성실  무엇이라니? (침대에서 일어나며 위엄 있게)
 
158
여하인2  아이고 아씨 노여우셨네. 이다음에는 아니 그러오리다.
 
159
성실  이애.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면 못쓴다니까.
 
160
여하인2  아씨께서 노 앓으시니까 출가나 하시란 말씀이외다. (얼굴을 돌리고 비웃음)
 
161
성실  점점 말답지 않은 말만 하는구나. 어서 들어가거라.
 
162
매2  (달음박질 등장) 형님 왜 그러십니까?
 
163
성실  저 애가 내 감정을 상해서 그런다.
 
164
매2  이 애 버릇없이 왜 그래 주책없는 년! (성실에게) 형님은 너무 말 없으시니까 저런 것들이 딴 세상 사람같이 여기고 그래요.
 
165
여하인2  (심술 난 듯이 퇴장하면서 우편 마루 끝에서) 온 언! 신식 개화한 아씨라고 짜증이나 낼 줄 안담. 짜증이야 누가 낼 줄 몰라? 짜증을 내려면 계모 양반께나 내보지 공연한 어 양반더러 왜 그러시어.
 
166
매2  형님 그까짓 것들의 말을 탄하지 마셔요.
 
167
성실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생활이 너무 참혹해서 그런다.
 
168
매2  그러니 어떻게 하우. 어서 염려 마시고 진지나 잡수. 언니나 내나 다 어머니 없이 자라나는 탓이지요.
 
169
매1  (먼저와는 다른 표정으로 등장. 그러나 매 2에게 시선을 주지 않음) 형님 좀 어떠세요? 아침에 제가 잘못했으면 용서해줍쇼.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임)
 
170
매2  (성실의 얼굴을 살핌) 새삼스럽게 (비웃음)
 
171
성실  (잠깐 무언) 왜 그러냐?
 
172
매1  형님 내 지금껏 너무 형님께 버릇없이 굴었습니다. 오늘 자성해보니까 얼마나 부끄러운지요.
 
173
성실  그래 지금이 제일 좋은 때라고 동생은 내게 왔나?
 
174
매1  아니요 이렇게 형님 앞에 뉘우치기는 좀 늦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안 그러는 것보다는…….
 
175
성실  아니다 동생은 그 대가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동생은 평시에 교만하고 부끄럼 없던 것을 이런 때 이용했어야 할 것이다. 언제든지 사람은 제3자에게 자기가 누릴 행복을 구하여서는 옳지 않다. 어느 때든지 제3자는 방해자가 아니면 무능력자이니까.
 
176
매1  그러나 형님이 아니십니까? 형님은 내 일에 대해서 제3자란 그런 냉정한 지위에 앉아 계실 수는 없지 않으십니까?
 
177
매2  언니는 어머니 되시는 제일 튼튼한 후원자가 계시지 않으십니까?
 
178
매1  (매 2에게 눈 흘기고) 너는 참견 없다.
 
179
여하인1  (급히 등장) 작은아씨 들어오시랍니다.
 
180
매2  누가?
 
181
여하인1  영감마님께서요.
 
182
매2  거짓말이다. 영감마님께선 벌써 출입하셨다. 큰형님을 그대로 두고 들어갈 수는 없다.
 
183
매1  내가 있지 않으냐? 동생은 마찬가지다.
 
184
여하인1  급히급히 들어오시래요. (성실에게) 큰아씨 작은아씨더러 들어 가라십쇼. (퇴장)
 
185
성실  동생아 되어가는 일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다. 들어갔다가 나오너라. (매 2 입을 비죽비죽하며 퇴장)
 
186
매1  저어 형님 사람이 행복하고 안한 것은 사람의 임의로 못하지요. (천천히 머뭇머뭇 말함)
 
187
성실  글쎄 낸들 알 수 있나! (밥상 앞에서 식사함)
 
188
매1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이성(異性)을 상사(想思)해서요, 어쨌든지 그 이성이 아닐 것 같으면 행복을 못 얻겠다고 달떠질 때 그 이성이 갚아주지 않을 경우에는 그 어떤 사람은 영원히 행복을 못 얻을 것이 아니오니까?
 
189
성실  그 어떤 사람은 눈이 더 밝아질 수가 있겠지.
 
190
매1  눈이 밝아지다니요?
 
191
성실  그 자신과 상대자를 분명히 볼 수가 있겠지.
 
192
매1  그럴 것 같으면 제가 영호 씨를 원한 것은 눈이 밝지 못한 일이지요.
 
193
성실  동생이 그 일에는 지혜를 많이 가졌을 것 같아도…….
 
194
매1  형님, 저는 요새 이 큰 번민 가운데 빠졌습니다. 저는 천치가 되었습니다.
 
195
성실  (밥숟가락을 놓고 한숨) 그럼 영호 씨는 동생과 약혼한 것을 처음부터 찬성 안 했더란 말인가. (혼잣말같이) 그럴 일도 없을 듯한데…….
 
196
매1  영철(永哲) 씨의 부인과 어머니와 합의해서 그랬다나봐요.
 
197
성실  그러면 동생이 어머니께 졸랐나?
 
198
매1  (말없이 머리 숙임)
 
199
성실  그런데 영호 씨가 동생에게 대한 태도는 어떤지?
 
200
매1  길에서 만나도 모른 체하셔요.
 
201
성실  (생각함)
 
202
매1  그이는 부모 없이 그 아주머니 손에 자랐기 땜에 아무런 명령일지 라도 다 들었대요. 그런데.
 
203
성실  아― 그이는 오랫동안 가슴에 복받쳐 오르는 반항을 참았다.
 
204
매1  (소리쳐 느낌) 형님 제게 지혜(智慧)를 빌려주시오. 저는 이 1년간은 영호 씨를 생각지 않고는 제 행복을 꿈꿀 수는 없었습니다.
 
205
성실  (생각함)
 
206
매1  영호 씨는 그 아주머니의 말은 안 들어도 형님의 말은 들을 것이외다. 영호 씨를…… 내게……. (느낌)
 
207
성실  (생각함)
 
208
매1  형님의 말이면 그이는 들을 것이외다. 영호 씨를 내게로 전하여 주시오. 형님 같은 병 앓는 이는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209
성실  (입을 감쳐물고) 나는 영호 씨를 내 소유로 알지는 않는다. 그는 절대로 큰 힘을 가진 한 사람이다. 나는 그를 좌우할 모책(謀策)을 쓸 수가 없다.
 
210
매1  그런 형님이면 다만 두고라도 나와 약혼한 영호 씨를 빼앗지 않는다고만 약속하여주시오.
 
211
성실  그것은 용이한 일이다. 나는 영호 씨와 약혼치 않을 것이다. 결혼 생활, 육적 관계는 내게 큰 금물(禁物)이다.
 
212
매1  그러실 것 같으면 형님은 동생을 위하여 이같이 애타게 구하는 보수를 얻어주시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213
성실  나는 동생의 연애문제에는 제3자이다. 그리고 무능력자이다.
 
214
매1  그러면 형님은 이 동생에게 조고만 지혜(知慧)도 빌리지 않으시고 노력도 안 써주시겠습니까?
 
215
성실  나는 무능력자이다.
 
216
매1  아아 그러면 나는 형님을 천대 만대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곤궁하여졌을 때 조고만 힘도 안 빌린다는 것은 인정이 아니외다.
 
217
성실  나는 네 연애 혹 결혼 문제에는 방해자는 아니나 무능력자이다. 다만 네 눈이 더 밝아지고 네 귀가 더 밝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218
매1  나는 장님이나 귀머거리가 아니외다.
 
219
성실  너는 고요히 너 홀로 생각하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220
매1  나는 그런 불안한 생각을 하려고는 아니합니다.
 
221
성실  먼저도 말했거니와 자기가 누릴 행복은 자기가 얻어야 할 것이다. 제3자에게 구할 것은 아니다.
 
222
매1  세상이 다 캄캄하여진다. (분한 듯 낙담한 듯)
 
223
여하인2  (등장) 큰아씨 진진 다 잡수셨어요? (밥상을 들고) 가운데아씨마님께서도 생각이 있다고 들어오시랍니다. (매 1 하인 2 퇴장)
 
224
(무대 잠간 고요함. 성실 번민하는 듯이 엎드렸음. 무대 뒤에서 2의 울며 부르짖는 소리 들림. 50녀의 꾸짖는 소리도 들림.)
 
225
성실  (머리를 쳐들며 귀를 쳐들며 귀를 기울이고) 저 소리는 동생의 울음소리다. (눈물 지음) 세상에는 저렇게 아프게 부르짖는 사람들 뿐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아아 저렇게 아프게 부르짖을 때엔 몹쓸 매를 맞나보다. 조물주는 확실히 무책임하다. 인간이 모든 책임을 지고 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였다.
226
(기침 다시 방바닥에 엎드림. 기절함. 무대 뒤로 사람 때리는 소리들림)
 
227
부친  (등장. 외출하였던 모양으로) 저 애가 (어깨를 쭈뼛쭈뼛하고 무시무시함을 보임) 죽어 넘어졌나? 저것 (아주 무서운 듯이 걸어가 서서 성실의 몸을 흔들어 봄) 아이고 이 애가 정말 죽었구나. 폐병이란 이렇게 속히 죽는 것인가. 젊은 것이 가엾기는 하다. 그러나 내게 섭섭할 것은 없다. 제게는 내가 야속하게 한 일이 없으니까. (다시 성실의 몸을 흔들고 무시무시한 듯이 가슴을 짚어보고) 아직 온기가 있다. (급히 무대 끝으로 걸어 나오며) 이 애들아!! 이 애들아!!
 
228
여하인1  (우편으로 등장) 네 부르셨습니까?
 
229
소동1  (좌편으로 등장) 네 부르셨습니까?
 
230
소동2  (좌편으로 등장) 네 부르셨습니까?
 
231
부친  큰아씨가 기절하셨다. (소동 2에게) 의사를 불러 오너라. (소동 1에게) 더운 물을 끓여오너라.
 
232
(여하인 1에게) 너는 이리로 와 아씨를 붙들어 상 위로 올리자.
 
233
(소동 1,2 퇴장. 부친 두 팔을 여하인 1 두 다리를 쳐들으려 함. 성실 몸을 비꼬며 소리쳐 부르짖음)
 
234
성실  동생아 얼마나 아팠니? 용서해라 나는 가서 말리지 못했다. 동생아 인생이란 그렇게 아픈 것이다. 기름이 말라서 등불이 꺼지기 전에 우리는 돌아가자. 거기는 자비하신 어머니가 기다리신다. 손을 다오. 손을 다고. 오오 안 믿는다. 어찌하랴 우리들의 사이에 구지레한 때가 격하여 골짜기를 지었구나.
 
235
(부친 여하인 1 간신히 성실을 붙들어 침대 위에 누임. 성실 가위눌린 것같이 고요하여짐. 부친 성실의 머리 편으로 우두커니 섰고 여하인 발치로 혼도할 듯이 섰음. 매 2 얼굴에 상처를 받고 등장)
 
236
매2  아버지. (심술 난 듯이)
 
237
부친  왜 그러니 웬 암상이 일어났느냐?
 
238
매2  나는 인제 참을 수 없습니다.
 
239
부친  무엇을 못 참겠단 말이냐?
 
240
매2  아버지는 장님이로구나. (혼잣말같이 부르짖음)
 
241
부친  이년 버릇없이.
 
242
매2  아버지 아버지 내 얼굴을 못 보십니까?
 
243
부친  울어서 부었구나. 집안이 망하려니까 계집애가 울기는 왜 밤낮 울어. 옷이 없니 밥이 없니?
 
244
매2  아버지는 장님이로구나. 아이고 답답해라. 나는 인제 살 수 없다. (소리쳐 울음)
 
245
부친  허허 이것 내가 늘그막에 죄를 받나보다. 남의 집 과부를 얻어서 딸 둘을 낳아 데려왔더니 하나는 병신 하나는 독사 같은 년. 또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벌써 18년 전 자살해 없어진 시앗을 못먹어 내게 야단. 허허 이것 내가 죄를 착실히 받는 걸.
 
246
매2  아버지 무엇입니까. 자식 앞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우리 어머니를 죽였지요. 남의 부잣집 과부를 속여서 두 번이나 아이를 배게 하고. 그리고 어머니가 죽으니깐 그 자산을 다 가져다가 둘째언니 모녀만 넉넉히 쓰도록 하시고, 우리는 먹든지 굶든지 매를 맞든지 눈을 흘기우든지 모르지 않으셔요?
 
247
부친  허허 요년이 점점 악독하여가는구나. 제 어멈도 독한 계집이었다. (성실 정신을 차린 듯이 일어남)
 
248
성실  우리 앞에서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그쳐주십쇼. 우리에 대해서 우리 모친은 우리의 고향이고 사랑입니다. (다시 드러누움. 5분간 고요함. 의사 2 고요히 천천히 등장. 부친 기가 막힌 듯이 섰다가)
 
249
부친  영호 군 오랜만일세그려 어째 그 저간에 한 번도 볼 수 없었나
 
250
의사2  네 그 저간 안녕하셨습니까? 무엇하는 것 없이 그리되었습니다.
 
251
매2  (눈물 씻고)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252
의사2  탄실(彈實)이 공부 잘했소?
 
253
성실  (몸을 일으키려다가 탁 쓰러지며) 용서합쇼.
 
254
의사2  병인(病人)이 일어나실 수 있습니까? (진단 가방을 열며 성실의 침대 앞으로 가서 떨리는 음성으로) 좀 어떠십니까? (성실 아주 괴로운 듯이 말하지 못함)
 
255
여하인1  아씨께서 조금 전에 기절을 하셨어요.
 
256
의사2  (주사함) (주사를 맞히고) 탄실이 왜 이렇게 되도록 내게 알리지 않았소?
 
257
매2  아침에도 관계치 않았는데 아마 몹시 놀라셨나봐요. (의사 2 가방을 접어 탁자에 놓음)
 
258
부친  그 애가 폐병을 앓아서 그렇지.
 
259
의사2  그렇기도 하겠지만 몹시 쇠약하셨습니다.
 
260
소동1  (좌편 끝에서) 네기 벌써 끓여가지고 나올 것을 (물주전자를 보이며) 마님 땜에 늦었네. 사람이 죽어간다는데 요것 해라 조것 해라 심부름만 하라니 물을 끓일 수가 있었나. (무대 앞으로 걸어나오다가 어깨를 쭈뼛하고) 노란 병 든 의사가 오셨네. 저이가 가운데아씨 신랑 되실 인가. 신부는 절구통 같고 신랑은 빵대 같담. 큰아씨나 작은아씨 같으면 좋지. 큰아씨는 제비 같고 작은아씨는 꾀꼬리같은데 하필 절구 부인이 좋을까
 
261
부친  이 자식 주절거리지 말고 속히 가져오너라.
 
262
소동1  (물주전자를 갖다가 탁자 위에 놓고 퇴장)
 
263
매2  (의사 2에게) 형님께 더운 물을 따라드릴까요?
 
264
의사2  빨간 포도주가 좋지요.
 
265
부친  (여하인 1에게) 이 애, 네가 가서 찬장에 있는 포도주를 가져오너라. (여하인 1퇴장)
 
266
매1  (성장(盛裝)하고 등장 의사 2에게 정성스럽게 머리 숙임 의사 우두커니 이침(二寢)만 바라봄)
 
267
여하인1  (포도주를 가져옴)
 
268
의사2  (포도주병을 받아들고) 컵이 없습니다그려.
 
269
여하인1  (달음박질 퇴장)
 
270
의사2  컵 가져오거든 이 방이 조용하도록 병자만 남겨놓고 다 나가셔야겠습니다. 가벼운 병이 아니니까 좀 주의시킬 말이 있습니다.
 
271
부친  그러지. (천천히 퇴장. 매 1 퇴장. 매 2 퇴장하려다가 멈칫 섰음)
 
272
여하인1  (컵을 가져오고 퇴장)
 
273
의사2  (컵에 포도주를 따름)
 
274
매2  형님에게 술을 드리십니까?
 
275
의사2  탄실 염려 마오. 형님을 주정꾼을 만들지 않을 터이니. (미소) 이것 마십쇼. (성실에게 줌)
 
276
성실  (떨리는 손으로 받음)
 
277
의사2  (다마시기까지 바라봄. 매 2안심한 것같이 퇴장) 성실 씨 어찌하셨습니까? 엊저녁에 그렇게 몇 천 사람을 느껴 울리던 힘으로 오늘 웬일이십니까?
 
278
성실  불쾌했습니다. 왜 그렇게도 불쾌했는지요.
 
279
의사2  또 집안에 파란이 일어났었습니까? 탄실의 뺨에 상처가 심하지 않습니까?
 
280
성실  저는 아직 모릅니다. 아까 어떻게 했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납니다. 부실(富實)이와 무슨 의논을 하던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혼잣말같이) 그것도 무슨 말을 했던지요.
 
281
의사2  성실 씨 일전에 내가 편지한 것과 같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죽는대도 문제가 아니지요.
 
282
성실  (일어나며) 인제야 정신이 좀 납니다. 그러나 저는 영호 씨의 편지를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283
의사2  (얼굴을 숙임)
 
284
성실  어떻게 하셨는지. (머리 숙여 생각함)
 
285
의사2  성실 씨 요사이 제게 이상한 감정을 가지시지 않으셨습니까
 
286
성실  1년 전부터 그런 일을……. (부끄러움)
 
287
의사2  참 둘이 다 동경서 지날 때엔 기꺼웠지요.
 
288
성실  에― 참 그때는 공일날마다 기숙사에 오셨지요 그 뒤잔등만 부옇게 된 교복을 입으시고요.
 
289
의사2  저는 그땐 토요일이면 잠을 못 자고 좋아했어요. 종다리를 찾아서 구름 위에나 올라가는 것같이 그 기숙사 옆길에 벌써 들어가면 성실 씨의 피아노 소리가 들렸지요. (피아노를 가리키며) 그때도 저 피아노였지요.
 
290
성실  에― 그때 저는 피아노 치고 영호 씨는 다른 학생들과 술래잡기 하셨지요. 얼마나 몸이 빠르셨는지요. 한 번도 범은 안 되셨지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속아서 한 번 되셨지요.
 
291
의사2  그때 성실 씨는 사람이 나쁘시던 것― 지금도 저 혼자 웃어볼 때가 있어요. 그때 어찌했습니까? 자백해보시오. 에이 성실 씨.
 
292
성실  무얼요. 무라카미 상이 눈을 뜨고 숨으시오는 것을 보았지요.
 
293
의사2  네 잎 클로버 찾기 내기할 때도 안 속이셨소?
 
294
성실  호호.
 
295
의사2  하하 내가 따놓은 것을 그때 어떤 가느다랗고 긴 손이 와서 집어갔지요. 그리고 언제는 또 당신이 네 잎 클로버를 많이 따서 책갈피에 말리었다가 동무들에게도 나누어주고 무라카미 상의 오라버니에게까지 주었다가 뜻 있는 것이라니깐 대경실색(大驚失色)하셨지요.
 
296
성실  그땐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였지요.
 
297
의사2  시방은? (성실 의사 2 머리 숙이고 웃다가 점점 슬픈 표정으로 변함) 저나 당신같이 쓴 생활 가운데도 한때 기꺼움은 있었지요.
 
298
성실  네. 가냘픈 그림자같이요.
 
299
의사2  제가 성실 씨를 뵈온 것은 음악 절계(節季)였지요. 그 곡조는 무엇이든지 오라 그것은 슈 - 만의 사육제의 희롱이었지요.
 
300
성실  그 가운데는 영호 씨와 같은 고독한 영혼이 번잡한 길거리를 걸어가지요.
 
301
의사2  당신과 같은 그림자가 지나기도 하지요! 그때부터입니다. 내의 고독을 향락도 못하게 된 것이…….
 
302
성실  같은 말씀을 몇 번 하시는지요? (잠깐 고요함)
 
303
의사2  나는 참 성실 씨의 의사로 왔습니다.
 
304
성실  ……미움이 조금씩 다른 사람들의 세상에 영생을 주려고 의사로 오셨습니까?
 
305
의사2  기다리시지요. 나는 시방 우리의 지나온 뒷길을 한 번 더 돌아다보아야겠습니다. 3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성실 씨를 크신 뒤로 처음 뵙기는 그때였습니다. 음악회를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에 무라카미상의 소개로 나와 인사를 하고 세 사람이 그 우에노 공원을 지나올 때 빨간 동백꽃이 많이 떨어진 것을 보고 무라카미 상은 연애하는 처녀 같다고 하니까 당신은 연애란 추악한 것이라고 앵둣빛 같은 얼굴을 숙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생각과 같은가 안 같은가를 알아보려고 어째 그러냐고 물었더니, 어두워지니까 마비(魔痺)해지니까 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용기를 훨씬 내어서 무엇으로 그런 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로는 매 공일 성실 씨를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실 씨는 내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너무 친절히 할까봐 겁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일이 있어도 한 공일에 두 번은 만나주시지 않으셨습니다.
 
306
성실  저는 제 행동에 아무 의미를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먼저와는 다르게 극히 이지적으로 보임)
 
307
의사2  당신은 그런 어려운 표정을 짓지 않으실 때가 오겠지요. 성실씨는 즉금(卽今)도 그때 맘을 조금도 변치 않으셨습니다그려, 저는 성실씨의 의사로 왔습니다. 성실 씨는 전지(轉地)하셔야 될 것이외다. 빨간 동백꽃이 떨어진 것을 연애하는 처녀로 보지 않는 곳으로, 사람들이 각종의 아름다움으로 기분 따라 변하는 곳으로, 마비(魔痺)란 것과 어두움을 모르는 곳으로, 미워하는 이 세상을 위해서는 한마디 풍설도 남기지 않고 가셔야 할 것이외다.
 
308
성실  내 가슴에 미동하는 병균일지라도 남기지 않고 가겠습니다. (엎드려 흑흑 느낌. 의사 2 포켓트에서 가루봉지를 꺼내서 손 빠르게 컵에 넣고 포도주를 따름)
 
309
의사2  때가 지났습니다. 이것을 마시고 주무십쇼. 그러면 이 경성 안에서는 다시 못 뵈옵겠습니다. 새로운 땅에서 다시 뵈옵시다.
 
310
성실  이리 주십쇼. 이리 주십쇼. (컵을 받아서 주저 없이 마심) 저는 먼저 갑니다. 영호 씨이…….
 
311
의사2  안녕히 주무십쇼. (급히 퇴장) 곧 가겠습니다.
 
312
성실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침대 위에 사지를 주욱 펴고 바로 눕다)
 
313
(천천히 막)
 
 
314
《신천지》제3권 제7호, 1923년7월.
【원문】의붓자식(子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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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순(金明淳)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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