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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의 삼국시대(中國三國時代)에 한나라 오호대장(漢五虎大將) 중에 한 대장으로, 유명하던 장비(張飛)의 부하로서 성미가 불 보다도 더 급한 장비의 무리한 군령(軍令)을 참다 참다 못참아 마침내 장비를 살해(殺害)까지 한 범강(茫疆)장다리라 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고 다리가 길기로 유명하여 지금까지도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사람을 보면 흔히 범강장다리 같은 놈이라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키 크고 다리가 긴 사람은 중국 삼국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옛날 우리 나라에 도 있었으니 그는 바로 영조대왕 시대(英祖大王時代)에 유명하던 의적 박장다리(義賊 朴長脚)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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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래 어디 사람이고 또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으나 아마도 성이 박가(朴哥)요 다리가 유난하게 길기 때문에 세상에서 부르기를 박장다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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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리만 그렇게 유난하게 길뿐 아니라 키도 엄청나게 크고 몸이 몹시 날래서 뜀을 뛰면 무난하게 사오길(四五丈)식을 뛰어넘고 걸음을 또한 잘 걸어서 하루에 사오백리길을 힘 안들이고 왔다 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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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다 또 몸집이 깍지더미같이 장대하고 얼굴이 허울좋게 잘 생기고 힘이 천하 역사이기 때문에 사오 백근의 철퇴를 달걀 놀리듯 하고 말솜씨가 능난하여 옛날 소진장의(蘇秦張儀) 라도 눈물을 흘릴만 하니 어느점으로 보든지 일대 호걸남아라 아니 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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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집이 퍽 가난한 까닭에 언제나 노동(勞動)을 해서 그 늙은 어머님을 봉양 하였는데 효성이 매우 갸륵하여 자기의 손으로 친히 음식을 만들어서 그의 어머님의 비위에 맞도록 하고 또 그 어머님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나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니 일반 사람이 다 같이 큰 효자라고 칭찬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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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그는 의협심이 강한 까닭에 남의 일이라도 의리에 틀린다면 몸을 아끼지 않고 덤벼드는 기풍이 있어서 일찌기 편발 총각 시대에 남의 시비를 가로 맡아 하다가 잘못되어 그 상대자를 죽이고는 법망(法網)을 피하여 그 늙은 어머니를 둘처 업고 깊은 산중으로 도망하여 날마다 나무 하기(伐採)와 사냥하는 것으로 일을 삼어 그 어머님을 봉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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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하루는 마침 큰 도적이 그 산중으로 들어 왔다가 그의 인물이 비범한것을 보고 서로 말을 주고 받고 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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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은 잠간 보아도 인물이 비범하여 그렇게 구구하게 산중에서 썩을 사람은 아니겠는데 어째서 이런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와서 고생을 하고 지내시오. 우리와같이 아무일이나 한번 꾸며 보는 것이 어떠하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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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은 매우 고마운 말씀이오나 나는 집에 늙은 어머님이 계시니까 몸을 자유롭게 행동 할수가 없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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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일이야 무슨 관계가 있겠읍니까, 우리도 저기 저산속에다 근거지를 두고 일반 가족들도 모두 거기에 가서 있을 터이니 당신도 어머님을 모시고 그곳으로 같이 가신다면 안심하고 봉양도 할수 있고 여기보다 적적치도 않을 터이니 속히 갈 준비를 하면 어떻겠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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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간곡히 말을 전하니 듣고만 있던 박장다리는 하도 딱한 기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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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 어머님께서 어디로 가시기를 싫어 하시니 어찌 하겠읍니까, 아무리 당신네가 그렇게 간곡히 권한다해도 어머님 생전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좀 더 참어서 뒷날을 기다려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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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죄송스러운 낯으로 사과의 뜻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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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이 적당(賊黨)이 아무리 그에게 같이 가기를 강권하였으나 그는 자기의 사정을 들어 간곡히 거절하니 도적들도 더 다시 강권치 못하고 많은 돈과 비단등을 주었으나 그는 또한 받지 않으니 도적들은 그의 효성과 의리에 더욱 감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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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 몇해 후에 그의 어머님이 돌아가니 그는 비로소 그 도적의 일당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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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에서도 가장 산림이 무성하고 으슥하기로 유명한 부안변산(扶安邊山)에다 근거지를 두고 삼백여명의 도당을 모아가지고 스스로 두령(頭領)이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의 양도로 돌아다니며 백주에 당당하게 큰 도회지와 시장 등지를 습격하니 누구나 감히 그에 대하여 저항하는 사람이 없고 양호(兩湖)일대가 크게 소란 하였다. 그는 그렇게 큰 도당을 모아 가지고 각처로 돌아다니며 많은 재물(財物)을 약탈하였지마는 본래 인물이 비범하고 의협남아이니만치 보통 불한당무리 모양으로 서절구투(鼠窃狗偸)같은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고 어떤 때에는 어떤 고관 대작 모양으로 위의(威儀)당당 하게 많은 거마구종을 갖추어 가지고 백주에 큰 부호(富豪)의 집에 가서 몇백량 몇천량의 돈과 몇백석 몇천석의 곡식이며 금은 보배 등속을 자기손으로 갖다가 바치게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혹은 수십명내지 수백명의 장정(壯丁)을 보내서 큰길가에나 큰 항구에 매복시켰다가 부호대상(富豪隊商)관리 등의 수송하는 물화를 약탈하되 학부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해치 않고 그 도당에게는 엄격하게 계칙을 정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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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일], 국고(國庫)의 구실을 할 돈을 받은 것이나 상납(上納)하는 공금같은것은 절대로 범(犯)하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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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이], 적은 장사나 여행하는 사람의 행장은 범하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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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삼], 농촌의 가난한 사람의 집이나 거리의 주막집은 범하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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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사], 어떠한 경우를 물론하고 남의 부녀는 절대로 범하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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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오], 우리를 살해하려고 강경하게 덤비는 사람이외는 그냥 위협을 할지언정 몽치와 기타 무기를 함부로 대지 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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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며 만일 그 계칙을 범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어떠한 친분이 있던지 과거 어떠한 공로가 있던 사람이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내쫓거나 또는 엄벌하니 그 규칙의 엄격함이 군대보다 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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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통의 도적들은 남의 돈이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분수에 넘치는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이 통례이지만 그는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쓰는 일이 없고 전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며 행여 병자(行旅病者) 구제에 쓰고 자기는 항상 폐포파립으로 가난한 생활을 하니 세상에서 그를 큰 도적의 괴수로 지목 하면서도 의적(義賊)이라 칭호하여 그의 이름이 전국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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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전라도 순찰사(全羅巡察使)로 가는 사람마다 그를 잡을려고 가진 고심을 다하여 좌우병영(左右兵營)과 각진(各鎭)에 토포관(討捕官)을 보내어 엄밀한 기찰(譏察)을 하였으나 그의 부하 도당은 더러 잡었지만 박장각만은 누구든지 한번도 잡아본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있는곳 조차 알아내지를 못하니 일반 사람들이 그를 신출귀몰(神出鬼沒)의 무슨 조화를 부리는 사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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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다가 영조(英祖) 이십 육년 경오(庚午)에 병사 이관상(兵使 李觀祥)이 전주 영장(全州營將)이 되니 그는 본래 인물도 잘났거니와 도적을 잘 잡기로 유명한 까닭에 그때 나라에서는 일부러 그를 전주 영장으로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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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임하는 즉시로 무엇 보다도 먼저 박장다리를 잡으려고 각처로 군교(軍校)를 풀어 놓아 기찰을 하던 중에 하루는 마침 어떤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를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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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박장다리의 무리가 한벽당(寒碧堂 혹은 拱北樓[공북루]에 와서 술을 먹고 질탕하게 놀고 있으니 시기를 놓치지 말고 잡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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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은 그 밀고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날쌔고 힘이 센 장교 몇십명을 호령하여 당장에 장다리의 무리들을 일망타진으로 다 잡아 오라고 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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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들은 그의 엄명이 한번 내리자 조금도 지체없이 재빠르게 달려가서 한벽당을 네겹 다섯겹으로 철통같이 둘러 쌓고 마치 독속에 들은 쥐 잡듯이 장다리의 무리를 모조리 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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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박장다리만은 그 정자에서 수십길이나 되는 절벽을 비호(飛虎)같이 뛰어 내려 도망을 하고 잡지를 못하니 잡으러 갔던 군사들은 마치 닭쫓던 개가 지붕만 치어다 보듯이 헛수고만 하고 그대로 돌아와서 사실대로 보고하니 영장도 어이가 없어서 혀만 쩟쩟 다시며 장다리의 인물이 비범한 것을 탄복할 따름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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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지 며칠 뒤였다. 박장각은 그동안에 어디에 가서 있다 왔던지 백주에 아주 당당하게 영문밖으로 태연 자약한 태도로 문직이(門卒)를 보고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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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변산(邊山)에 있는 도적 괴수 박장다리인데 잠깐 영장 영감을 만나볼 일이 있어 왔으니 안에 들어가서 내의(來意)을 전하여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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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졸은 그가 박장다리라는데 놀라고 또 체격이 남달리 건장하고 대담 무쌍하게도 영장을 찾는데 더 한층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한참 동안 치어다 보고는 그대로 영문으로 들어가서 장다리가 말한대로 영장에게 알리니 영장도 역시 아무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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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관복을 벗고 편의(便衣)로 바꾸어 입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게 하고 그를 불러 들이니 그때는 마침 삼복(三伏)의 더위가 찌는듯이 무더운때라 영장이 장다리의 들어오는 태도를 살펴본즉 장다리는 과연 평소에 소문을 듣던바와 같이 체격이 엄청나게 장대한데 머리에 쓴 패랭이가 영문의 정문 처마 위에 훨씬 올라가고 메투리 감발을 한 발의 길이는 거짓말을 좀 보태서 말한다면 한강의 나룻배만이나 하고 쇠코 잠뱅이 아래로 벌겋게 들어난 정갱이 길이는 전봇대 만이나 하게 길어서 영문마루 높이보다도 더 높고 윗통에는 다 떨어진 벼적삼을 입었는데 몸집도 어마어마 하게 커서 허리를 억지로 굽혀 가지고 영문마당으로 들어 와서 우뚝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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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은 그를 한번 보자 마자 별안간 벽력같이 큰 소리를 치며 호령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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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 너는 도적놈이요 나는 도적을 잡는 관헌인데 어찌 감히 죽을 곳을 찾아 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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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은즉 사또가 남보다 특이한 재주가 있어서 요전에도 우리 도당 수십여명이 한벽당에서 노는 것을 앉아서도 미리 알으셨다 하기에 한번 인물 시험이나 해 볼가 하고 일부러 찾아온것이지 겁날 것이야 무엇 있겠오. 사또가 아무리 기가 맥힐 정도로 큰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나만은 어찌할 수 없으리다. 내가 이곳에 온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요 여러번이었읍니다. 어느때든지 새 사또가 도임을 하게 되면 그 인물 시험도 하고 나의 마음 속에 간직하였던 모든 일을 한번 털어 놓고 말해 보려고 찾아 와서 면회를 청하면 대개는 먼저 겁을 집어 먹고 군병을 무장(武裝) 시켜서 전후좌우에 펼쳐서 포위를 시킨 다음에 나를 불러들이니 그 인물이 어떠하다는 것도 잘 짐작하겠거니와 피차 수작도 하기 전에 벌써 군졸을 지휘하여 철사줄로 내몸을 결박하고 항쇄족쇄(項鎻足鎻)로 나의 손과 발까지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나 그들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고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급기야 잡아다가 옥에 가두라고 호령 할 때에 비록 기지개를 한번 켜면 몸에 감겼던 철사 줄이 썩은 새끼줄 모양으로 다 끊어져 없어지고 발과 목에 감겼던 칼(項鎻)과 착고(足枷)가 일시에 다 벗겨지고 소위 사또라는 사람의 얼굴에다 침을 한번 탁 배앗고는 몸을 솟아 담을 뛰어 넘어 가면 누구나 감히 뒤를 쫓는 자가 없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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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은 그 말을 듣고 또 칼을 빼어 들고 소리쳐 말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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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이 칼로 네 목을 베면 어떻게 할 터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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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장다리는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이 태연자약한 안색으로 또 껄껄 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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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가 나를 죽일 수 있거든 죽이시요. 나도 또한 살 도리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게 된다면 피차에 손해만 있고 이익은 없을 터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내가 들은즉 옛말에 천금을 가진 사람의 아들은 앉어도 마루 아래에는 앉지 않는다 하니 나같이 구구한 천한 사람은 아무짓을 하여도 상관이 없지마는 사또와 같으신 귀하신 몸으로서 어찌 자중자애 하실줄을 모르고 그까짓 필부(匹夫)의 쓸데 없는 용기를 내실려고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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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영장은 그의 대담무적한 기개와 의협 또는 헌하 같은 웅변에 감탄하며 탄복하여 그만 손에 잡었던 칼을 땅에 던지고 다시 태도를 고쳐서 흔연한 안색으로 뜰 아래까지 내려가서 장다리의 손을 잡고 맞아 들이며 조용한 방에다 앉히고 서로 술을 나누면서 의리로 타일르니 장다리도 또한 그의 인품과 말에 감복하여 그만 귀화하기로 맹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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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은 그 자리에서 즉시 장다리로 하여금 포도군관(捕盜軍官)으로 임명하되 그 도당을 잡아오라하고 융숭한 대접을 하여 돌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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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는 간지 서너달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으므로 그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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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이 역시 꾀가 많은 장각에게 속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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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속지 않았으니 좀 더 기다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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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아니하여 과연 장각은 그 부하 수백명을 데리고 와서 귀순(歸順)하므로 영장은 일일히 불러서 문초한즉 그들은 무슨 대답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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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首領) 박장다리가 다시 무슨 말이 있기 전에는 아주 양민이 되기를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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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영장도 또한 그들이 그전까지 저질러 놓은 죄를 전수 특사하여 석방시켜 모두 양민(良民)이 되게 하니 여러해를 두고 호남일대를 소란하게 만들어 놓았던 것도 그만 일시에 평온 무사하게 되고 백성들이 안도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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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이 영장은 전주에서 갈려가게 될때에 다시 장각을 불러서 술과 기생을 데려다 놓고 후한 대접을 한다음에 손목을 꼭 잡고 물어 보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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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간 뒤에도 그대는 계속하여 양민이 되겠느냐 또는 딴 마음을 먹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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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하니 그는 개연히 한숨을 쉬고 대답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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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가 한번 세상에 낳았다가 불우한 까닭에 잠시 장난질을 치다가 다행히 사또같은 좋은 분을 만나 한번 마음에 허락한 바에야 어찌 또 다시 다른 마음을 먹을 리가 있겠읍니까. 그러나 사또가 이 고을 떠나신 바에야 누구를 믿고 이곳에 있겠읍니가 나도 이길로 떠나서 아무 곳이나 마음 내키는데로 가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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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가더니 그는 그뒤 충청도 온양군(忠南溫陽郡) 어떤 촌에 가서 짚신 장사를 하다가 두해만에 어디론지 가서 종적을 감추고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었는데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으면 그는 그때 보은 속리산(報恩俗離山)으로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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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불우한 호걸 남아, 이 박장다리같이 불우한 남아가 과거에 그 얼마나 많었을가 하고 생각을 하면 다만 비분강개의 눈물을 금할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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