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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행 (太平行) ◈
◇ 서, 20 ~ 29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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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6
김동인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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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太平行[태평행]
 
 

1. 서편(序篇)

 
3
일청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그 전쟁에 이겼다고 온 백성이 기쁨에 넘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때였다. 동양에도 이름도 없는 조그만 섬나라 ― 부락과 부락의 전쟁뿐으로서 그 역사를 지어내려 오던 나라 ― 종교와, 예의와, 법칙과, 학문과, 기술을 인국(隣國) 신라, 고구려, 대당(大唐) 등에서 조금씩 꾸어다가 때움질하여 오던 ×나라, 그 나라가 통일이 되고 정돈이 된 지 삼십 년도 못 되는 이때에, 대담히도 세계에 찬란히 이름난 대청국(大淸國)에게 싸움을 걸어서 이겼다 하는 것은, 과연 당시에 온 세계를 놀라게 한 큰 사실인 동시에, 그만치 일본 국민에게는 기쁜 일에 다름없었다.
 
4
그리하여, 온 일본 국민이 넘치는 기쁨을 막지 못하여, 가사를 내어던지고, 영업을 내어던지고, 춤추고 날뛸 때에, 무장야(武蔵野)의 어떤 벌판에 온전히 인간계의 그런 잡된 일을 초월한 듯이 한가히 날아다니던 범나비가 한 마리 있었다.
 
5
그 범나비는 고요하고 깨끗한 자리를 한 군데 찾아서, 거기 몇 알의 알을 쓸어 놓았다.
 
6
알은 벌레로 변하엿다.
 
7
거미와 새, ― 온갖 자기를 해하는 동물들을 피하여서, 이 풀잎에서 저 풀잎으로 몸을 숨겨서 다니던 벌레의 한 마리는, 제 형제의 대부분이 피식(被食)을 당할 때에도 몸을 온전히 하여, 수렁이로 변하게까지 되었다.
 
8
겨울이 이르렀다. 찬 서리와 눈도 그의 생활력을 해하지 못하였다. 얼음과 찬 바람도 땅속에 깊이 숨은 그를 어찌하지 못하였다.
 
9
이리하여 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다시 살아나는 새로운 봄에 그는, 한 개의 아름다운 범나비로 화하여 가지고 세상에 나타났다.
 
 
10
날개의 시험의 며칠이 지난 뒤에, 그는 방랑의 여정을 나섰다. 동에서, 서에서, 그의 아름다운 자태는 무시로 보였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듯이 또는, 봄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는 듯이 남으로, 북으로 꽃마다 잎마다 키스의 자리를 남기면서, 정처없이 날아다녔다.
 
11
이렇게 끝없는 방랑을 즐기던 그는 차차 차차 날아서 팔왕자(八王子)의 촌락까지 이르렀다.
 
12
지금은 그만치 번화한 팔왕자이지만 당시에는 아주 쓸쓸한 한 촌락이었었다.
 
13
이 팔왕자의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는, 어떠한 집 뜰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거기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내려갔다.
 
 
14
그 집 여섯 살 난 어린애는, 어머니가 저녁을 지으려 나간 틈에 방 안에서 혼자 장난을 하고 있다가 뜰로 내려오던 아름다운 범나비를 보고 그것을 잡으러 뛰어나왔다. 그러나, 위만 쳐다보고 나오던 그는 세 걸음만에 그만 불을 이럭이럭 피워 놓은 화로를 박차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15
어머니가 부엌에서 달려왔을 때는 어린애는 얼굴과 온몸이 불로 데어서, 참혹히도 기절을 한 때였었다.
 
 
16
범나비의 아무 뜻도 없는 이 소여행(小旅行)은 여기에 그 첫 비극을 일으켰다.
 
 
17
기차의 기관수인 어린애의 아버지는, 이틀 밤낮을 꼭 자기의 죽어 가는 외아들의 곁을 떠나지를 않고 간호하였다. 그러나 운명이라 하는 커다란 힘은 사람의 손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린애는, 사흘째 되는 새벽, 마침내 풍을 일으켜 죽어 버렸다.
 
 
18
하관(下關)가는 급행열차가 신교역(新橋驛)을 떠났다. 기관수는 죽은 어린애의 아버지.
 
19
눈을 멀거니 뜨고 있는 그의 앞에는, 죽은 애의 형용이 어릿거렸다. 사흘을 한잠을 안 잤지만, 졸음만 안 올 뿐더러 정신은 더욱 똑똑하여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러한 이해력도 없었다. 모든 일이 자기게는 무의미하다는 이해력조차 그에게는 없었다. 마땅히 정거하여야 할 정거장을 그냥 지나려다가 조수에게 주의를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급각도(急角度)에도 전속력으로 가서(차장을 통하여) 손님에게 꾸중을 들은 일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의 그 꾸중이 모두 두 초만 지나면 스러져 버리고 잊어버려져서, 그는 물고기의 눈과 같은 정신없는 눈으로 다만 꺼벅꺼벅 앞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었다. 기차는 한 번도 제 시간에 정거장에 들어서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 기차가 신호(神戶)에 거진 이르러서 어떤 커브를 돌 때에, 가장 큰 비극은 일어났다.
 
20
덜걱! 소리와 함께 기관차는 선로를 벗어나서 뒤에 달린 십여 량(輛)의 객차와 함께 두어 길 되는 벼랑에서 떨어졌다.
 
21
부르짖음, 신음하는 소리, 의미없는 고함소리, ― 일본 철도사에 공전(空前)이요 또한 절후(絶後)일 떨릴 비극은 일어났다. 당시의 신문을 보건대 즉사자 이백칠십여 명,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 백여 명, 그저 중상자 백여 명, 무상자(無傷者) 한 사람도 없었다고 보고되었다.
 
22
그리고 그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 가운데는 조선 사람 서모(徐某) 이십일세라는 이름이 있었고, 보통 중상자 가운데 조선 여자 신함라(申咸羅) 십구세라는 이름이 있었다.
 
 
23
그 비극의 결과로 생겨난 부산 비극(副産悲劇)은 몹시 컸다. 일청(日淸) 교섭의 어떤 임무를 띤 대관(大官)의 즉사로 대지 문제(對支問題)의 원활히 못 된 일이며, 재계의 거두의 중상으로 바야흐로 진출하려던 일본 무역의 받은 영향 등 표면상에 나타난 문제는 둘째로 두고, 그 가운데는 무론 호주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상속 문제로 분규가 일어난 가정도 있었을 것이었었다. 애인의 무참한 죽음에 발광하여 폐인이 된 젊은이도 있을 것이었었다. 이 사실로 새삼스러이 인간무상을 느끼어 입도(入道)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것이었었다. 비극, 비극, 그리고 또 비극이 낳은 또 다시 비극. 결과는 또한 그 다음 결과를 낳고, 다음 결과는 또 새로운 결과를 낳아서, 지금 일본 ― 뿐 아니라 온 세계에 그 결과의 또한 결과가 얼마나 영향되었는지 그것은 짐작도 못할 배다.
 
 
24
내가 무심히 강물을 향하여 돌을 하나 던진다.
 
25
그때에 그 강물에 생긴 물결이 퍼지고 퍼져서, 넓은 바다까지 이르러, 거기 일어나는 커다란 뫼와 같은 물결에 만분 일(萬分一)의 방해, 혹은 조력을 할는지 그것은 결코 예측도 못할 일이다. 그리고 또한 그 돌이 강바닥까지 내려져서 강바닥의 모래를 움직여 그것이 몇 만 년 뒤에 그 강으로서 십리쯤 동으로 혹은 서로 옮겨가게 할 동기가 될는지도 예측도 못할 일이다.
 
26
이 세상의 한끝으로 생겨 나고 한끝으로 사라지는 백 가지의 일의, 그 가장 변변치 않는 한 가지라도 그 결과의 또 한 결과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결코 숙명의 커다란 힘을 업수이 여기지 못할지니 무장야(武蔵野)의 너른 드을에서 자유로이 놀던 나비 한 마리가 우연히 아무 뜻 없이 팔왕자(八王子)까지 날아온 것이 사흘 뒤에는 벌써 이렇듯 커다란 비극을 일으켜 놓았다. 그리고 그 비극은 결코 거기서 막을 닫치지 않았다.
 
27
나비의 여행, 벌판에서 팔왕자 촌락까지. 그것은 아무 뜻도 없는 것이었었다.
 
28
그러나, 그 나비의 아무 뜻도 없는 소여행(小旅行)이, 삼십 년이라는 기다란 날짜를 지난 뒤에 조선에서 어떠한 결과로 나타났나? 어떠한 비극, 어떠한 희극, 어떠한 활극이 그 나비의 변변치 않은 행동의 결과로서 나타났나.
 
 
 

2. 20

 
30
“참 너도 걱정이로다. 왜 꾸지람을 안 듣도록 좀 몸을 단정히 못 가지느냐.”
 
31
“누님 걱정 마세요. 여편네들한테 꾸지람 듣는 것은 무섭질 않으니깐.”
 
32
허세(虛勢)로도 볼 수 있고 빈정거리는 말로도 볼 수 있는 이 말에 현숙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보고 일성이는 웃었다. 잘게 생긴 앞니가 전등에 반사하여 유난히 반짝였다.
 
33
“왜 눈살을 지세요? ― 대체 여편네란 사내를 모욕하는 것을 제일 통쾌하게 생각치 않아요?”
 
34
그리고는 대답을 요구하는 듯이 현숙이와 영옥이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현숙이는 대답치 않았다. 영옥이는 신문 뒷면을 뒤지었다.
 
35
“네? 안 그래요?”
 
36
“듣기 싫다. 좀 철이 들어라.”
 
37
“하하하하.”
 
38
잘게 생긴 일성이의 앞니가 또 전등불에 반짝였다.
 
39
이러한 가운데서 현숙이는 머리 속에 일어나는 일종의 혼란(混亂)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손아래 동생, 자기가 책망 한 마디만 하면 머리를 긁고 얼굴을 붉힐 줄만 알았던 일성이에게서 현숙이는 어딘지 모를 일종의 ‘힘’을 보았다. 그리고 그 ‘힘’은 불행히 현숙이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었다. 그것은 동생이라 하는 말 아래 숨어 있는 억센 사나이의 그림자였다. 예의를 예의로써 대하고 무례를 예의로써 물리칠 줄 밖에는 모르는 현숙이의 상식으로써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손위 동생. 예외도 없었다. 경우도 없었다.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온갖 것은 그의 앞에서는 그 존재를 잃을 것이었었다.
 
40
그 앞에 당면한 현숙이는 아직껏의 제 인생관과 사회관과 거기서 자연히 생겨 난 처세술에 아직 더 수정을 하고 개방을 하여야겠다는 필요를 느낄 유여도 없이 먼저 그 억셈을 경멸하였다. 그 경멸에는 미움도 섞였다. 똑똑히 지각은 못하였지만 공포(恐怖)조차 섞여 있었다. 일성이의 반짝이는 이빨이 현숙이에게 몹시 불유쾌하게 보였다.
 
41
“참 이제 이 집에 오는 길에 이런 일이 있었지요. 저 앞에 수도를 고치느라고 구렁을 파지 않았어요? 그리고 거기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한 나무를 하나 걸쳐 논 뿐이지요? 거기까지 와서 막 건너가다 보니깐 저편 쪽에서 여학생이 하나 건너오랍디다그려. 그래서 첨에는 내가 양보를 할까 했지만 그러나 사내가 한 번 냅딘 발을 어떻게 도로 옴쳐요? 더구나 내가 그 다리 위에 발을 먼저 올려놓은 이상에야 말야요. 그래서 막 건너가는데 그 여학생은 퍽 근시안인지 혹은 자기가 건너오면 내가 도로 물러가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당당히 건너옵니다그려. 가운데서 딱 만났지요. 누님, 여편네란 건 그런 게야요? 거기서 딱 버티고 서더니 나를 쳐다보겠지요. 아마 도로 물러가라는 뜻인가 봐요. 꼴이 미워서 나도 딱 마주 버티고 있었구료. 그러니깐 용서하세요 하더니 한 발을 내놓습디다그려. 그래서 어서 가시지요 하고 그냥 서 있으니깐 또 한번 용서하라고 그래요. 너무 어이없고 미워 칵 붙안아서 이편으로 옮겨놓아 주고 말았지요. 혹은 그 ― 옮겨 놓을 때에 어떻게 내 뺨이 궐의 뺨에 건드렸는지도 몰라요. 그랬더니 홱 돌아서면서 내 뺨을 딱 하고 휘갈깁디다그려. 누님 그게 예의야요? 여편네란 사내를 모욕하는 것을 제일 통쾌하게 알 테요. 아마 궐은 인제 한 달 동안은 그 이야기를 자랑하러 돌아다닐걸요.”
 
42
그런 뒤에 일성이는 또 한번 하하하 하고 웃었다.
 
 
 

3. 21

 
44
그 이야기에 부러 대척치 않은 현숙이는 영옥이에게 향하였다.
 
45
“내일 자수 강습회에 갈 테요?”
 
46
영옥이는 겨우 신문을 놓았다.
 
47
“가잖구요. 언니는?”
 
48
“나? 나는 그만둘까봐.”
 
49
“왜요?”
 
50
“사랑방도 좀 치워야겠고 ―.”
 
51
“그게야 아침에 잠깐 다녀와선들 ― 가세요.”
 
52
“글쎄.”
 
53
일성이의 이야기에 대척치 않으려 이야기를 꺼낼 뿐 특별한 목적이며 뜻이 없었던 현숙이는 이만치로 이야기를 끝을 내었다.
 
54
그 이야기의 뒤를 일성이가 받고 일어섰다.
 
55
“영옥 씨, 자수 강습에 다니세요?”
 
56
“네.”
 
57
영옥이는 간단히 대답하였다.
 
58
“불란서 자수예요?”
 
59
“네.”
 
60
“누님도 다시니구요?”
 
61
“그래.”
 
62
“그럼 누님, 넥타이에 수나 하나 놓아 주시구료.”
 
63
이런 뒤에 자기의 수놓은 넥타이를 끌어내어 내려다보던 일성이는 갑자기 제 넥타이의 내력을 자랑할 생각이 난 모양이었었다.
 
64
“누님, 이 넥타이 어때요?”
 
65
현숙이는 힐끗 볼 뿐 대답치 않았다. 일성이는 이번에는 영옥이에게 향하였다.
 
66
“영옥 씨, 어떻습니까?”
 
67
자랑하는 듯이 내어보이는 그 넥타이에 대하여 탄상자의 지위에 서지 않을 수 없은 영옥이는 좋습니다고 하였다.
 
68
“중국 모던 걸이 수놓은 게야요.”
 
69
하면서 일성이는 보아 달라는 듯이 앞으로 내어밀었다. 듣고 보니 어딘지는 모를지나 색채가 있는 듯하였다.
 
70
“조선도 모던 걸이 꽤 생겼지요? 하지만 중국 모던 걸만은 못해요. 조선서는 모던을 일본을 거쳐서 수입하는데 중국서는 직수입을 하니까요. 그만치 ― 조선보다 한층 더 앞선 만치 사내를 업수이 여기는 도수도 더하지요. 쩍하면 구두를 신겨 달라고 발을 앞으로 내어밉니다그려.”
 
71
“그러면 너 같은 모던 보이는 그 신을 신겨 준 뒤에는 그것을 자랑하러 돌아다니더냐?”
 
72
이것은 농담이라기에는 너무 독한 험구였겠다. 그러나 일성이에게 대한 어떤 불유쾌한 반감은 현숙이로 하여금 아무 비판이 없이 이런 말을 하게 한 것이었었다.
 
73
영옥이가 얼른 신문을 도로 들었다. 일성이도 고소하였다.
 
74
“보구료. 누님도 남자를 모욕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지 않나.”
 
75
일성이는 아직껏 여자에게 하던 빈정거림은 온전히 생각도 안하는 듯 싶었다.
 
76
“그럼 네가 아직껏 여자에게 대해서 하던 말은 무에냐? 그건 여자를 모욕하는 게 아니냐?”
 
77
“나요? 그게야 사실을 예를 든 뿐이지.”
 
78
“그만둬라. 영옥 씨가 속으로 욕할라.”
 
79
“영옥 씨가요? 영옥 씨, 절 속으로 욕하세요? 그러진 않으시겠지요.”
 
80
하면서 일성이는 영옥이를 들여다보았다. 영옥이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다.
 
81
“천만에.”
 
82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83
“보세요. 어딜 욕을 하신다구.”
 
84
“영옥이도 네가 흉보는 그 ‘여자’의 한 사람이다.”
 
85
“아 그렇던가? 그럼 전부 취소할까요?”
 
86
일성이는 머리를 긁었다.
 
 
 

4. 22

 
88
일성이의 지식은 광범(廣汎)하였다. 그러나 그 지식은 조잡(粗雜)하였다. 계통과 순서와 숫자가 없었다. 그만치 어떤 편으로 보아서는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고도 할 수가 있었다.
 
89
이것은 그의 생활과 환경과 성격이 낳은 바 결과였었다. 목숨 있는 인형과 같이 아무런 일에도 간섭치 않고 지내는 어머니의 아래서 다른 감독자는 없이 자란 일성이는 그의 인생관과 지식을 온전히 다른 곳에서 얻지 않으면 안 될 자리에 있었다. 그럴 때는 손쉽게 그의 사면에는 불량소년이라 하는 떼가 있었다. 그는 거기서 지식과 인생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있지만 가정의 정이라는 것이 없는 이 소년은 집을 모르고 방랑 생활을 하였다. 활동사진과 연극은 이 소년의 커다란 오락이요 위안처였으며 겸하여 지식의 근원이 하나이었었다. 사회와는 온전히 틈을 그어 놓은 부랑소년의 축에 섞여서 사회를 바라볼 때에 이러한 방관자(傍觀者)로서야 볼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비판도 이 소년의 지식의 하나이었었다. 그것의 부산물인 역관적 사회관(逆觀的 社會觀)도 그의 지식을 활약케 하는 한 힘이 되었다. 사회의 학대와 멸시는 이 소년의 마음을 더욱 비꼬아지게 하는 반면에 더욱 단련시키는 풀무불이 되었다.
 
90
게다가 이 소년에게는 천성에 타고난 화술(話術)과 그 변설을 더욱 빛나게 하는 그 독특한 역관적 사회관과 거기 어울리는 아름다운 눈과 앞니(몹시 반짝이는)가 있었다. 더구나 무기 위에는 사회의 학대의 필연적 결과로서 생겨 난 반역심과 그 반역심을 행동화(行動化)할 수 있을 만한 침착과, 그 침착을 돕는 포학성(暴虐性)이 있었다. 부드럽게도 굳게도 아름답게도 또는 무섭게도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그 무기는 영리한 그의 마음의 깊은 속에 숨어 있어서 주인의 나오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요에 응해서 그 무기를 때때로 꺼내어 쓰면서 사회와 병행하여 헤엄쳐 나아가던 그는 문득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그 무기는 용서없이 여인의 위에 내렸다. 혹은 아름답게 혹은 무섭게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그 무기는 많은 여성을 정복하고 혹은 유혹하는 데 그를 도왔다. 여성에서 여성으로 혹은 제 미모를 이용하여 혹은 공갈로 혹은 변설로 많은 여성을 접하는 동안에 그의 고약한 지혜와 지식은 더욱 늘었다.
 
91
이러한 스무 살이라 하는 열성의 나이는 영리한 현숙이로도 능히 해석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수수께끼였었다. 어린애와 같은 천진한 웃음을 웃는 한편으로는 때때로 억센 그림자가 걸핏걸핏 보이는 것을 현숙이는 기괴한 마음상으로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는 예기하였던 바와 어그러지는 데 대한 불만도 있었다. 모반함을 받은 듯한 노여움도 있었다. 웃동생으로서의 위신이 차차 사라져 가는 듯한 현상에 대한 분만(憤懣)도 있었다. 자존심을 상한 듯한 불유쾌함도 있었다.
 
92
이러한 기분 아래서 일성이의 이야기를 억누르려고 때때로 독설을 하는 현숙이는 그 독설이 여자로서는 굳게 삼갈 것이라고 아직껏 지켜 온 그 교양도 잊었다. 자기는 웃동생이라는 지위에 대한 자각까지 엷어졌다. 그리고 그는 점잖지 못하게 동생과 말다툼을 하여 이기려 하는 철없는 자기를 발견하였다.
 
 
 

5. 23

 
94
일성이는 몹시 이야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었다. 궤변(詭辯), 능변(能辯) ― 어느 편으로라도 붙일 수 있는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일종의 사교술로까지 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이야기는 넘어갔다. 현숙이가 앨써 누르려는 것은 그로 하여금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에든 그는 다 그 이야기에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붙이기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담화술이었었다. 현숙이에게 대한 반항도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그 판단을 증명키 위하여 어떠한 예를 들기를 잊지 않았다. 그 든 바의 예는 대개가 그 독특의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억지의 예라고까지 할 수 있으나 그는 그런 것은 기탄치 않았다.
 
95
그리고 그는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현숙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조차 사양치 않았다. 이야기가 어떻게 하여 불량소년이라는 데 미쳤을 때였다.
 
96
일성이는 문득 영옥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97
“영옥 씨, 세상에서 저를 불량소년이라는데 영옥 씨도 그렇게 보십니까?”
 
98
“천만에.”
 
99
얼굴이 새빨갛게 되며 영옥이는 이렇게 대답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일성이는 뒤를 쫓아왔다.
 
100
“그럼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한 번 속임없는 판단을 듣고 싶습니다.”
 
101
영옥이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다만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으며 침을 한 번 삼킬 뿐이었었다.
 
102
“네? 아무런 말씀을 하셔도 탄하지 않겠읍니다. 말씀해 보세요.”
 
103
“그게야 ―.”
 
104
“네? 그게야 어때요?”
 
105
영옥이는 또 막혔다.
 
106
“네? 말씀해 보세요.”
 
107
이러한 추격전에 현숙이는 조정자로서 들어서지 않을 수가 없다.
 
108
“일성아, 예절을 알아라.”
 
109
“누님은 가만 계시오. 영옥 씨, 어떻습니까?”
 
110
“야 !”
 
111
현숙이는 눈으로 꾸짖으면서 다시 불렀다.
 
112
“왜 이래요. 이건 언론압박이요 뭐요? 남의 말에 가로 들어서 가지고.”
 
113
여기 대하여는 현숙이는 대답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불법과 무례의 앞에 쓰는 대항책은 그는 아직 못 배운 것이었었다. 현숙이의 마음은 노여움으로 떨렸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이 위에 웃동생으로서의 위엄을 쓰려다가는 더 창피한 꼴을 보기는 명백한 사실이었었다. 이것을 청년의 혈기라고 용서할 만한 관대한 마음과 여유를 잃은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으로 일성이를 바라보는 것으로 끊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 대한 대책으로는 할 수 있는 대로 일성이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유일의 방책을 삼으려 하였다.
 
114
그 뒤부터는 할 수 있는 대로 현숙이는 영옥이와 이야기를 하였다. 영옥이의 이야기가 끊어질 기회를 피하였다. 이리하여 일성이의 입을 봉하려고 하였다.
 
115
그러다가 기회를 엿보아 가지고 어머님이 기다리시겠다는 것을 구실삼아 가지고 영옥이를 큰댁으로 올려보내었다. 일성이도 문밖까지 쫓아나와서 영옥이를 보냈다.
 
116
“영옥 씨, 혹은 오늘 저녁에 제가 실례된 일이 있을지라도 그다지 나쁘게 생각치 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시 제 성미가 예절이라는 건 모르니깐요 ― 그럼 또 ―.”
 
117
“안녕히 계세요. 응 ― 언니 내일 강습회에서.”
 
118
이렇게 영옥이를 보낸 뒤에 남매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제각기 전투를 준비하면서 ―.
 
 
 

6. 24

 
120
“누님 노하셌소?”
 
121
방 안에 들어오면서 일성이는 웃으며 이 말부터 물었다. 현숙이는 대답치 않았다.
 
122
“자미있는 작자인데 ― 누님, 어때요 내 교제술이?”
 
123
“용하더라. 기껏 경멸은 샀으리라.”
 
124
“경멸?”
 
125
일성이는 오히려 의외라는 얼굴을 하였다.
 
126
“좌우간 작자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겠읍니까? 어디 알아보세요.”
 
127
“극도로 나쁜 인상이야 주었지.”
 
128
“만세. 용하외다. 그게 내 목적이니깐.”
 
129
현숙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을 하였다.
 
130
“여자에게는 초대면에 깊은 인상을 줘야 해요. 나쁜 인상이고 좋은 인상이고 간에 초대면에 기껏 깊은 인상을 박아 놓아야 합니다그려. 여자는 인상의 심천(深淺)은 절대로 변경 안하지만 선악(善惡)은 몇 번이라도 변경합니다그려. 인제 작자 ― 영옥이 말이외다 ― 영옥이를 언제 다시 만나서 그 때 좀 내가 아롱아롱해 보구료. 그러기만 하면 아직껏 박혀 있던 나쁜 인상이 확 돌아와서 좋은 인상으로 되지 않나. 아마 전번에는 내가 이 어른을 잘못 봤었나 보다 하고 오히려 제가 미안해하지 않나? 그러니깐 좋고 나쁘고 간에 첫번에 깊이는 인상을 남겨 둬야 합니다그려. 깊게 남기기 위해서는 좋은 편보다 나쁜 편이 더 손쉽지 않아요? 그것도 작자들의 자존심을 꺾는다든가 수치를 준다든가 하면 모르지만….”
 
131
이 일성이의 말에 팔 분의 진리를 인정은 하였지만 ― 아니 인정하였으므로 현숙이는 더 불유쾌하여졌다.
 
132
“언제 영옥이와 다시 만날 기회를 지어만 주구료.”
 
133
현숙이는 거기 대답치 않았다. 그리고 한 걸음 내었다.
 
134
“대체 뭘 하러 상경했느냐? 의논하겠다는 것이 뭐냐?”
 
135
“참, 너절한 계집애 때문에 귀한 일을 잊을 뻔했군. 누님, 돈 좀 취해 주시오.”
 
136
“돈은 웬 돈이냐, 얼마 말이냐?”
 
137
“대체, 이 집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138
일성이는 대답키 전에 다른 문제를 꺼냈다.
 
139
“이 집 재산이야 내가 알겠니? 또 알기로서니 아직 어머님이 생존해 계셔서 모두 잡고 계시고 너희 형님부터가 매달 연구소에서 받는 월급으로 집안을 지탱해 나가는데 웬 여유가 있겠냐?”
 
140
동생에게 대한 불유쾌한 감정은 그로 하여금 이 집안의 재산 상태를 필요 이상 낮게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141
“그래도 필요가 있을 때는 큰댁에서 임시로 얻어올 수 있겠지요.”
 
142
“그건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 처남의 용돈까지는 안 대주리라.”
 
143
일성이는 고소하였다 ―.
 
144
“누님께도 가정을 살 비용을 얼마 맡아 둔 게 있겠지요.”
 
145
“좀야 있겠지.”
 
146
“대체 얼마나 맡아 두셨소?”
 
147
“너는 대체 얼마나 필요하냐?”
 
148
이러한 문답하에 일성이는 겨우 자기의 필요한 금액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 금액은 현숙이의 생각하였던 바와는 너무 액수가 틀리는 많은 돈으로서 현숙이도 그 금액에는 처음에는 자기의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149
십 원, 이십 원, 잘하면 삼십 원까지는 부를 테고 그만하면 거기 절반쯤 꺾어서 주리라고 생각하였던 현숙이에게 천 원이라 하는 돈은 제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는 만한 뜻밖엣 거액이었었다.
 
 
 

7. 25

 
151
이 뜻밖엣 거액을 정신 있는 소리로는 도저히 들을 수가 없은 현숙이는,
 
152
“집을 사려느냐?”
 
153
이렇게 물을 수밖에는 없었다. 거기 대답치 않은 일성이는 다른 말을 꺼내었다 ―.
 
154
“누님, 나는 그 새 인천 있지 않았다우.”
 
155
“그럼 어디 있었냐?”
 
156
“봉천.”
 
157
현숙이의 얼굴은 한순간 변하였다.
 
158
“그리고 대련 ―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지요. 벌써 반 년 전부터.”
 
159
“어머니는?”
 
160
“모르지요. 아마 인천 그냥 있을 테지 ― 그리고 서울 온 지도 벌써 나흘이야요. 나흘 동안을 이 집을 찾느라고…”
 
161
“이 집은 누이한테 돈 천 원을 따내려고?”
 
162
“네.”
 
163
불유쾌에서 노여움으로 노여움에서 다시 불유쾌로 ― 이렇게 움직이는 현숙이의 마음은 여기서 다만 경멸의 생각 밖에는 남지 않았다.
 
164
“누가 주겠다디?”
 
165
“누님이 주지요.”
 
166
어떤 확신을 가진 듯이 일성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167
“천 원을?”
 
168
“네.”
 
169
현숙이는 어이없어서 웃었다.
 
170
“천 원은 대체 뭘 하겠느냐. 논을 사겠느냐 밭을 사겠느냐.”
 
171
“마누라를.”
 
172
“무얼?”
 
173
“그 새 대련서 어떤 중국 처녀하고 약혼을 했는데 혼례 비용이 없어서 나왔읍니다.”
 
174
“그래서 그 혼례 비용을 나한테 따내겠단 말이냐?”
 
175
“네, 말하자면 ―.”
 
176
“나는 아직 천 원이란 돈을 쥐어 보지도 못한 사람이다. 또 설혹 있다 해두 그런 데는 내줄 수 없다. 그만치 알아 둬라.”
 
177
“누님한테야 없다 해두, 용언 형님한테야 있겠지요?”
 
178
“얘 ― 야, 네가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너희 형님을 어린애로 아느냐?”
 
179
“아 ― 니오. 당당한 어른으로 신사로 알지요. 그러기에 처남의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에는 천 원은 내줄 줄 알고 찾지요.”
 
180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현숙이는 대척치 않았다.
 
181
“안 줄까요.”
 
182
“줄 듯싶으냐?”
 
183
“그러면 만약 누님의 일신상의 중대한 문제라면 그래도 안 내줄까요?”
 
184
현숙이는 대답치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벽장을 열고 거기서 손철궤를 꺼내어 소절수책을 얻어내어 가지고 거기다가 오십 원을 써서 도장을 찍었다. 이것은 현숙이로서는 커다란 용단이었었다. 그 돈은 현숙이의 마음대로 쓰라고 맡겨 둔 돈이었었지만 그는 아직껏 남편과 의논이 없이 돈을 찾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차차 불유쾌함이 더하여 온 그는 얼른 이것을 주어서 일성이를 쫓아 보내려는 마음에 다른 생각은 할 여유도 없었다. 천 원 청구에 십 원 내외로써 물리칠 수 없은 그는 오십 원을 쓴 것이었었다.
 
185
현숙이의 내어주는 소절수를 받은 일성이는 먼저 그 금액을 보았다.
 
186
“오십 원이얘요?”
 
187
“응.”
 
188
“나머지 구백오십 원은?”
 
189
“모른다.”
 
190
현숙이는 잡아떼었다.
 
 
 

8. 26

 
192
“몰라요?”
 
193
“몰라.”
 
194
“언제 주실 테야요?”
 
195
“몰라.”
 
196
일성이의 얼굴은 문득 험하여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헤헤 하고 웃었다.
 
197
“누님 왜 그러우?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아니오? 용언 씨로 말하더라두 최 씨 집안에서 처녀를 하나 데려온 이상에야 그 집안에 다른 처녀를 데려들이는 데 반대는 없겠지요.”
 
198
누이를 팔아서 안해를 얻겠다는 말로밖에는 볼 수 없는 이 말에 현숙이의 성은 마침내 폭발하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여졌다. 입술과 손이 떨렸다. 숨이 허덕였다.
 
199
“누님, 성낸 얼굴이 제일 이쁘오. 용언 씨 앞에서도 늘 성을 내구료.”
 
200
현숙이는 하나 둘 셋 넷 속으로 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서른까지 셀 동안에도 그냥 성을 삭이지 못한 그는 서른하나 서른둘 또 세었다. 그리고 쉰한까지 센 뒤에 고즈너기 동생에게 명령하였다.
 
201
“사관으로 가라.”
 
202
“구백오십 원은?”
 
203
“가!”
 
204
“구백오십 원은?”
 
205
“행랑 아범 불러서 집어내기 전에 썩 가거라. 아직 철없는 애라고 마지막에는 별 소리가 다 나오는구나 ― 싫을 것 같으면 그 오십 원도 도로 두고가라.”
 
206
일성이는 아직 쥐고 있던 소절수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
 
207
“이게요? 이게야 약조금이지요. 나머지는 언제 줄 테야요?”
 
208
“받을 재간만 있거든 받으려므나.”
 
209
“동생 하나 있는 것 너무 업수이 여기지 말우. 못쓴다우 ― 그리고 얼른 승낙해 버리는 게 당신께도 상책이겠소.”
 
210
마침내 일성이의 말에는 협박의 색채가 띠기 시작하였다. 혹은 이 협박을 하려고 부러 누이의 성을 돋우었는지도 모를 것이었었다.
 
211
“넌 나를 협박을 하느냐?”
 
212
“협박이야 무슨 협박이겠소. 남 듣기도 흉하게.”
 
213
“그럼 그게 무슨 말이냐?”
 
214
“그저 그렇단 말이지. 사람이 추어 내자면 흠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215
비단 당신뿐이 그렇단 말도 아니오.”
 
216
일성이의 태도는 차차 침착하여졌다. 그 침착한 가운데 현숙이는 무서운 폭력을 보았다. 마주 앉은 사람은 현숙이의 동생 일성이가 아니요 이전 학생시대에 활동사진에서 본 일이 있는 한 협박자이었었다. 일성이의 얼굴이 유난히 이뻐보였다.
 
217
현숙이는 입술을 떨었다 ―.
 
218
“그래 내게 무슨 흠이 있단 말이냐. 말해 봐라. 내게 그래 그래 그래 ―”
 
219
현숙이는 자기의 지위와 교양을 모두 잃었다. 비상한 노력으로써 일성이에게 달려들려던 마음을 누른 것이 최대의 인내였었다. 얼굴의 피가 모두 눈에 모인 듯하였다.
 
220
일성이는 또 헤헤 웃었다.
 
221
“게다가 약속도 있고 ―.”
 
222
“그래 언제! 무슨 약속!”
 
223
“말해 볼까요?”
 
224
“말해라!”
 
225
“그럼 ―.”
 
226
일성이는 점잔을 빼는 듯이 기침을 한 번 기쳤다.
 
 
 

9. 27

 
228
“그렇지만 동생의 정의로서 준다면 나도 받기도 쉽겠고 받은 뒤에도 마음도 편할 걸 왜 꼭 약속을 이행한다는 형식 아래에 주랴고 그러우?”
 
229
“난 그런 약속은 한 일이 없다.”
 
230
“없에요?”
 
231
“없어.”
 
232
“그럼 할 수 없지. 그럼 말하리다. 오 년 전 ―.”
 
233
이렇게 말하고 일성이는 제 말의 효과를 기다리는 듯이 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234
“그래.”
 
235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으로 일성이를 바라볼 뿐이었었다. 일성이는 한마디 더 보태었다 ―.
 
236
“여름.”
 
237
“그래.”
 
238
그러나 이렇게 대답할 동안 현숙이의 얼굴빛이 좀 변하였다.
 
239
“봉천 송죽여관(松竹旅館)에서.”
 
240
만약 이 말을 최후의 거탄(巨彈)으로서 일성이가 던진 것이라면 일성이의 던진 탄환은 그 예상 이상으로 맞았다.
 
241
이 한 마디의 말은 명약 이상의 효력이 있었다.
 
242
현숙이는 허둥지둥 방바닥을 양손으로 짚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몸을 벽에 의지하였다. 거기도 아직 부족한 그는 머리까지 벽에 의지하였다.
 
243
“생각납니까? 생각 안 나면 끝까지 말하리까?”
 
244
일성이는 마치 쥐를 놀리는 고양이의 태도로 현숙이에게 대하였다.
 
245
그러나 현숙이는 거기도 아무 대답도 못하였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일성이를 건너다볼 뿐이었었다. 그 눈에는 증오도 안 나타나 있었다. 무서움도 안 나타나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그 눈은 다만 눈을 감기가 귀찮아서 뜨고 있다는 것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246
일성이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미소하였다. 잘게 생긴 앞니가 옥과 같이 반짝 하였다.
 
247
이삼 분의 시간이 흘렀다. 현숙이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똑똑히 하는 그 말은 일성에게뿐 아니라 현숙 자기에게도 뜻밖엣 말이었었다 ―.
 
248
“자, 이게 내 대답이다. 이것은 내 오라비 최일성이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협박자 부랑자에게 하는 말이다 ― 나는 역시 그런 약속은 한 일이 없다. 그러니깐 물론 거절한다. 그리고 이 집은 부랑자가 발을 들여놓을 집이 아니니깐 당장에 나가라.”
 
249
순간 일성이의 얼굴은 다시 험하여졌다.
 
250
그러나 곧 헤헤 웃었다 ―.
 
251
“그럼 오 년 전 여름 송죽여관에서 생긴 일을 서용언 씨한테다 이야기를 해도 좋습니까?”
 
252
“좋다!”
 
253
“그러면 최현숙이라는 여자의 일생이 망하게 될 터인데 그래도 좋습니까?”
 
254
“좋다!”
 
255
“누님 왜 그러시오. 그게 누님의 본의가 아닐 테지요? 할 수 없이 그렇게 대답했지 본의는 아니지요? 난 그렇게 압니다. 그리고 구백오십원은 승낙하신 걸로 봅니다.”
 
256
현숙이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257
“구백오십 원은 여자의 손으로는 적지 않은 돈이야요. 그것도 나는 알아요. 그러니깐 오늘로 달라는 것도 아니외다. 사흘 후 ― 사흘도 부족할까 ― 넉넉히 잡아서 한 주일 뒤에 주세요. 어떻습니까?”
 
258
“―”
 
259
“주시겠지요? 네, 그럼 그러겠지요.”
 
260
일성이는 말을 혼자 주고 혼자 받은 뒤에 벌떡 일어나서 제 모자를 집어 가지고 나갔다.
 
261
현숙이에게는 한 가지의 비밀이 있었다.
 
262
세상의 많은 비밀이 대개 두세 사람의 관여자가 있으며 더구나 남녀의 비밀에는 반드시 상대자라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나 현숙이의 비밀은 이 너른 세상에 자기 혼자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현숙이는 굳게 믿고 있던 것이었었다.
 
263
용언이와의 혼약이 성립된 뒤에 현숙이는 이 비밀을 곧 용언이에게 다 이야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차마 그때에 자백을 하지 못한 그는 그 뒤에 다시 자백을 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결혼을 하고 부부생활이 시작되어 오늘까지 이른 것이었었다.
 
264
그 비밀이 ‘죄’ 라고 부를 성질의 것인지 어떤지는 현숙이는 몰랐다. 알고자도 아니하였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에게 자기의 처녀를 바치지 못한다 하는 커다란 비극은 그로 하여금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생각하며 판단을 내릴는지를 잃게 한 것이었었다.
 
265
그는 다만 자기의 잃어버린 정조 때문에 남몰래 고민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란 일생을 통하여 비밀히 하여야 할 자기의 임무(?) 때문에 고민하였다. 그보다도 또한 더욱 큰 고통은 자기와 남편의 새에 어떤 비밀이 누워 있다는 데서 나온 마음의 아픔이었었다. 어떠한 사소한 일이라도 남편을 속인다는 것과 남편에게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불유쾌하게 생각하는 그가 여자의 생명인 정조 문제에 관하여 일생을 통하여 남편을 속인다는 것은 그에게는 과도한 짐이었다.
 
266
그때에 돌발적으로 생긴 그 사건은 현숙이에게는 책임이 없을 성질의 사건이었었다. 상대자의 이름은커녕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도 그 사건이 현숙이에게는 ‘책임’ 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단이 된다. 따라서 그 사건은 완전한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이었었다. 상대자는 상대자가 혼자서, 현숙이는 현숙이 혼자서 제각기 가지고 있는 절대적의 비밀이었었다. 이제 어떠한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선다 할지라도 그때의 그 사건의 관계자로서 서로 알아볼 수조차 없는지라 따라서 현숙이 혼자만 비밀히 하면 영구히 표면에 나타날 기회가 없는 사건이었다. 현숙이는 그것을 의심치 않고 믿었던 바였었다. 처음에 용언이의 혼약이 성립된 뒤에 그 비밀을 용언이 앞에 드러내어 놓으려던 그는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차차 용언이와 가까워 가면서 용언이가 자기의 처녀성을 절대로 시인하는 태도를 볼 때에 현숙이는 마침내 용언이 앞에 그 문제를 내어놓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종내 결혼식까지 거행되었다. 여기 미쳐서 현숙이는 방침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녀간에 그 정조라는 것을 중대시하는 용언이의 성격도 현숙이로 하여금 그 방침을 바꾸는 동기에 큰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너른 세상에 자기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는 커다란 비밀을 일생을 저 혼자서만 알고 거기 대한 책임이며 고통을 저 혼자만 지려고 결심하였다. 남편과의 새에 어떤 비밀을 두고 그것을 일생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은 현숙이의 성격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남편에게까지 알게 하여 남편의 마음에 일생을 꺼림칙한 불유쾌한 생각의 그림자조차 띄어 주지 않으려 그는 결심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오로지 남편을 사랑하는 것으로써 사건의 속죄함을 받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써 그 고통의 위안을 삼으려 하였던 것이었었다.
 
 
 

10. 29

 
268
그것은 청천에 벽력과 같았다.
 
269
이 뜻하지 않은 벽력에 맞고 정신을 잃고 있던 현숙이는 문득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치 새암과 같이 눈물이 그의 눈에서 솟았다. 고요한 밤은 그의 울음을 더 도왔다. 발작적(發作的) 울음을 실컷 운 뒤에 그는 일어났다. 그리고 옷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씻은 뒤에 다시 소매에 넣고 문갑 앞에 가서 문갑을 의지하고 앉았다. 이제 운 그 울음은 얼마만치 그의 마음을 평정하게 하였다.
 
270
당연한 순서로서 현숙이는 일성이에 대한 선후책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생 방책이 생각나지 않았다. 허공 같은 그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커다란 무서운 그림자가 왕래할 뿐이었었다. 어떠한 일에든 그 처결을 주저한 일이 없고 판단을 그리친 일이 없는 현숙이로는 그 문제뿐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271
천 원 ― 일성이의 청구하는 바의 이 돈을 주지 않으면 일성이는 오 년전의 그 사건을 남편 용언이에게 다 말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272
현숙이는 오늘 처음으로 일성이를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 때 들은 바 제 아버지의 면목을 발견한 것이었었다.
 
273
만약 그 사건이 남편의 귀에까지 가면? 현숙이는 ( )갑 위에 놓여 있는 용언이의 사진을 끄을어당겼다. 현숙이가 만든 비단틀 속에 들어 있는 그 사진의 주인공은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관대하고 온화한 가운데도 엄격함을 잃지 않는 그 사진의 얼굴은 오늘따라 무엇을 심문하는 듯이 현숙이를 바라본다. 현숙이는 그 사진의 눈을 피하면서 몸을 떨었다.
 
274
관대한 남편은 혹은 그 사건을 알고라도 안해를 용서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랑까지 계속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었었다. 한 걸음을 양보하여 사랑이 그냥 계속된다 할지라도 안해에게 대한 꺼림칙한 감정 뿐은 결코 그의 일생을 통하여 없어지지 않을 것이었었다.
 
275
여기서 일어나는 남편의 경멸에 생각이 미칠 때에 현숙이는 뜻하지 않고 또 다시 몸을 떨었다. 그 생각의 그림자와 같이 그의 머리에는 일성이의 모양이 나타났다. 그림자의 일성이는 잘게 생긴 앞니를 내어놓고 씩씩 웃었다. 거기 향하여 현숙이는 증오에 불붙는 눈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276
“너는 무슨 권리로써 네 누이의 행복을 깨뜨리느냐!”
 
277
현숙이는 그 그림자를 책망하였다. 그림자의 일성이는 그냥 웃음을 계속하였다 ―.
 
278
“아녜요 아녜요. 나야 내 행복을 위해서 그러지.”
 
279
현숙이는 보이지 않는 총을 들어서 일성이를 쏘았다. 그러나 일성이는 그냥 뻣뻣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이 험상지게 되었다 ―.
 
280
“여보, 나만 죽이면 당신 비밀이 없어지는 줄 압니까? 비밀은 영구히 남아 있어요.”
 
281
현숙이는 그 그림자를 지워 버리려고 눈을 다시 남편의 사진 위에 부었다. 사진은 역시 온화한 눈으로 현숙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현숙이는 그 사진과 자신의 새에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방해물이 박혀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순전히 일성이에게 있는 것이었었다.
 
282
즉 거대한 날개와 같이 천 원이라 하는 돈이 그의 머리를 내려눌렀다. 그리고 그 천 원이라는 돈의 저편 쪽으로 희미한 서광조차 보였다.
 
283
“천 원! 천 원!”
 
284
현숙이는 그 사진틀 속에 천 원이 있는 것같이 그 사진을 흔들면서 고민하였다.
 
285
그때에 문득 그는 자기의 형 인숙이가 생각났다. 가세가 그다지 부유하달 수는 없으나 홀몸으로서 한 집안을 주관하며 지내는 형에게는 그맛 돈은 있기도 쉬울 것이었었다. 현숙이는 형을 힘입으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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