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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평 가량의 화단이나 씨 값 품값 합해서 십 원 남짓이 먹인 것이 지금 한창 만발한 것을 바라보면 도저히 십 원쯤으로는 바꿀 수 없음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만족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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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화단은 하루를 보아도 좋고 한달을 두고 보아도 좋으며, 하루를 보면 하루만큼의 보람이 있다. 단 하루를 보더라도 들인 품은 아까울 것이 없다. 초목과 사는 기쁨 ─ 인간사에 지쳤을 때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는 듯하다. 한 송이 한 송이의 꽃에는 표정과 동감이 있는 듯하다. 일제히 만발하고 보니 제철 제철의 성격을 가릴 수 없기는 하나 실상인즉 각각 철을 생각하고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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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리트와 양귀비는 봄에 피라는 것이었고, 캘리포니아 포피, 채송화, 봉선화, 프록스, 석죽,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백일홍은 여름을 의미하였고, 카카리아, 비연초, 불란서 국화는 가을에 피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카카리아는 벌써 한 고패 지나고 비연초가 한창이요, 불란서 국화도 포기포기 피기 시작하였다. 꽃이 시절을 재빠르게 당겨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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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꽃으로 비연초 이상 가는 것을 나는 모른다. 대체 푸른 꽃이라는 것이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니 도라지꽃, 시차국, 비연초 ─ 츨츨한 것으로는 여기에 그치는 듯하다. 누렇고 붉은 꽃들이 모두 여름까지의 것이라면 푸른 꽃이야말로 바로 가을의 것이어야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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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꽃 중에서 비연초만큼 가을다운 조촐한 꽃은 없다. 송이 송이 맑고 투명한 그 푸른빛은 그대로가 바로 가을 하늘의 빛이요, 가을 바다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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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흔한 푸른 떨기 속에 붉은 카카리아의 애련한 몇 송이를 듬성듬성 섞어 놓고 그 배경으로 새풀이나 군데군데 심어 놓으면 가을 화단으로는 거의 만점이요, 가을 풍경으로 그 한 폭에 미칠만한 것이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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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풍경이라고 하여도 이것은 아직도 첫가을의 따뜻하고 귀여운 풍경이요, 가을이 짙어 갈수록에 풍경은 더 차지고 쓸쓸하여 간다. 저녁 바다를 등진 야트막한 풀 언덕 위에 활짝 피어난 억새이삭이 바람에 간들간들 흔들리는 정경이란 이슬같이 찬 느낌을 준다. 자작나무 백양나무의 잎도 거의 다 떨어진 수풀 속 물이 잦아들어 돌이 불쑥불쑥 솟아난 개울녘을 한 쌍의 남녀가 하염없이 거닐고 있는 풍경 ─ 에는 더한층 찬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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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뒤숭숭하게 휘날리는 강변에 안개가 자욱이 낀 속으로 햇밤 굽는 냄새가 솔솔 흘러오는 한 폭도 가을의 풍경이어니와 별안간 바람이 불어와 떨어지는 낙엽을 휩쓸어 걸어가는 여인의 치맛자락에 던지는 풍경도 가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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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배치한 가을 풍경으로 나는 가장 인상적이고 대립되는 두 편의 작품을 생각한다. 니일젠의 영화 「가을의 여성」과 뿌우닌의 소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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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차고 이지적이면서도 그 속에는 분화산 같은 열정을 감추고 있어서 그 열정이 이지를 이기고 기어코 폭발하는 수도 있고 이지 속에 여전히 싸늘하게 숨어 있는 수도 있다. 열정과 이지가 무섭게 대립하여 폭발의 일선을 위태스럽게 비치고 있는 것이 가을의 감정이요, 성격이다. 열정이 폭발되고 마는 곳에 뿌우닌의 「가을」이 있고 안타깝게도 이지의 등뒤에 자취를 감추는 곳에 니일젠의 「가을의 여성」이 있으니 가을을 그린 작품으로 이 두 개 같이 선명한 인상을 주는 것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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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고 소슬한 늦가을 저녁때 나뭇잎 휘날리는 병원 뜰 앞을 비련의 쓸쓸한 가슴을 부둥켜안고 홀로 초연히 걸어가는 여인의 자태 ─ 이것이 쓰라린 「가을의 여성」의 풍경이다. 젊어서 남편을 여의고 홀몸으로 상점 조각부의 일을 보면서 베라 홀크는 다만 두 사람의 딸을 기르기에만 정성을 들이며 15년의 장구한 세월을 쓸쓸하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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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은 각각 자라서 이제는 벌써 어른구실을 하게 되고 베라도 겨우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되자 오래간만에 이 사십 줄의 여인은 자기 자신의 신세와 생활이라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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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생활과 싸우노라고 누르고 눌러만 왔던 열정이 드디어 조각가 슈타인 캠프에게로 불길같이 뻗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슈타인 캠프에게는 이미 조강지처가 있었음이다. 다만 남편만을 믿고 그의 사랑에 의지하여서만 살아가는 그 부인의 자태를 볼 때에 베라는 안타까운 번민에 빠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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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희생해서까지 자기 자신의 사랑을 살려야 옳을까, 그렇지 않으면 불측한 열정을 죽여야 옳을까. 무서운 싸움 끝에 불붙는 열정을 드디어 싸늘한 이지의 발끝으로 짓밟아 끌 수밖에는 없었다. 바람 불고 소슬한 늦가을 저녁때 나뭇잎 휘날리는 병원 뜰 앞을 비련의 쓸쓸한 가슴을 부둥켜안고 베라 홀크는 처연히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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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애타는 감정을 참혹하게 죽여 버리는 것만이 가을의 성격은 아니니 뿌우닌의 여주인공은 드디어 파도가 요란히 수물거리는 깊은 밤 가을 바닷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열정을 바치고야 만다.
18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 그의 연백(蓮白)한 행복의 향기에 숨찬 피곤한 얼굴이 불멸의 천녀의 얼굴과도 같이 맑고 아름답게 보인다. 여기에 나타난 가을 풍경은 장엄하고 깊고 어둡고 처량하면서도 무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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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에서는 바다가 무섭게 수물거리고 건너편 바위 위의 울창한 백양나무 숲이 소란하게 웅성거리며 푸른빛을 띠인 별들은 검은 구름 사이에 명멸하고 있다. 바다가 차차 훤하게 수평선을 드러내게 되자 모진 파도는 요란하게 언덕을 물어 뜯으며 흰 물결을 날린다.
20
그날 밤 거의 자정이 되어서 그 집 객실을 나올 때에 ‘그 여자’ 의 눈동자 속에 간직한 열정의 불꽃을 보고 온 ‘나’ 는 마침내 ‘그 여자’ 와 손쉽게도 뜻이 맞게 되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기 시작한 소녀와도 같이 서먹서먹한 표정을 띠인 여자는 밖으로 나왔을 때 벌써 사흘 밤이나 집을 비워서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뜻을 말하면서도 ‘내’가 바다로 가자고 권고하였을 때 첫마디에 응낙하고 마차를 탔다. 어둠 깊은 가을밤의 열정이다. 여자는 남편이 있으나 넘치는 열정을 어쩌는 수 없어 그도 모르는 결에 어둠 속에서 정리의 길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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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두 사람의 마음을 잡아 흔들던 그것이 그날 밤 돌연히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차 속에서 두 사람은 때때로 얼굴을 마주칠 뿐 별로 말도 없이 ‘그 여자’ 의 손을 집어 올려 ‘내’ 입술에 대었을 때 그는 말없는 가운데에서 굳은 악수 속에 은근히 감사의 뜻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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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풍이 불고 와사등이 떨리는 거리를 지나 인기척 드문 행길을 달릴 때에 마차 바퀴 밑에서 별안간 행길의 널판이 부서지며 그 서슬에 마차가 출렁거렸다. 흔들리며 쓰러지는 ‘그 여자’ 를 ‘나’ 는 모르는 결에 팔 안에 안았다. 한참이나 앞을 노리더니 이윽고 ‘나’ 에게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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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이 마주쳤으나 그의 눈에는 벌써 조금도 수물거리는 표정은 없고 다만 긴장된 미소에 서먹한 빛이 약간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나’ 는 거의 무의식 속에서 그의 입술을 구하였다. 그 또한 내 손을 굳게 잡은 채로 번갯불같이도 날쌔게 내 입술에 대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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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멀리 바다가 짐작되며 근처에는 모진 바람이 불어 메마른 옥수수 잎새를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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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요 묻는 눈동자가 밝게 빛나며 행복의 표정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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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저쪽 별장으로.” 대답하고 ‘나’ 는 말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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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단둘이 숫제 이 어둠 속에 꺼져 버렸으면……어떻게 된 연유로 대체 이렇게 이런 사이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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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도 꼭 들려주실 것이 하나 있어요 ─ 지금까지도 오늘밤 이전에도 저를 생각해 주신 적 있으세요 ─ 아니 그것보다도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내일은 모레는 대체 어떻게 되나요. 당신은 어떤 분이며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지금 초면으로 대하는 것 같아요. 그렇듯 마음이 즐겁고 마치 꿈꾸는 듯도 해요.”
29
‘나’는 모진 바람을 한껏 마시며 그 깊은 밤과 어둠이 대담한 용기를 줌을 깨닫는다. 어둠과 바람 속에 그 무슨 큰 위력이 숨어 있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열정에 뜻밖에도 불을 지른 가을의 마력인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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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드디어 바다로 와서 별장을 지나 높은 언덕에 이르렀다. ‘나’는 그의 손을 붙들고 위태한 언덕을 내려가 파도 전에 선다. 단 두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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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에 한없이 행복이라는 것을 꿈꾸었지요. 그러나 한번 결혼해 본즉 날마다 날마다가 똑같고 모든 일이 싫증이 나서 견딜 수 없게 되었어요. 제 평생에 꼭 한 번의 기회인 오늘밤의 행복이 그러기에 도리어 죄 많은 것으로 생각되어요. 내일이 되면 오늘밤 일이 얼마나 무섭게 생각날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까짓 아무렇게 되거나 말거나…… 이렇게 당신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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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하늘에서 별이 깜박거렸다. 바다는 점점 훤해지면서 수평선이 드러나고 모진 파도가 요란하게 수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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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창백한 행복의 향기에 숨찬 피곤한 얼굴이 별빛 아래에서 불멸의 천녀의 얼굴과도 같이 맑고 아름답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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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폭발된 사랑이다. 한번 폭발한 열정은 물도 불도 헤아리지 않는다. 그 무더운 열정 앞에 이지는 조각조각 부서진 창백한 파편이다. 그 열정이라는 것이 참으로 마음의 탓이다. ‘어둠과 바람의 위력’에서 솟은 것이다. 늦가을의 열정은 처량하면서도 무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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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우닌의 「가을」은 가을의 성격의 무더운 면이며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선 ‘그 여자’의 자태는 유난하게도 인상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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