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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나무에 단풍 드는 전남(全南)의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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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9
김영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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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에 단풍 드는 全南[전남]의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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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저 감이 이 하루 이틀 아주 골이 붉었구료. 아직 큰 바람이 일지는 않겠지요. 참, 그보다도 저 감잎 물든 것 좀 보아요. 밤중에 들었는가, 새벽녘에 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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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은 그 첫물 드는 꼭 그 시간을 안 놓치고 보리라 했더니 올해도 또 놓쳤구료. 감잎은 퍽은 물들기가 좋은가 보아, 그러기에 보리라 보리라 벼르는 내 눈을 기어이 속이고 어느 틈에 살짝 물이 들었지. 그 옆에 동백나무는 사시 푸르고만 있잖은가. 만일 동백이란 열매라도 맺지 않는다면 저 나무는 참으로 이 가을철을 모르는 싱거운 나무지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사시 애가 없이 푸르청청하고 있대서 싱겁달 나무는 아닙니다. 그 동백이 바로 그저께부터 십자로 쫙쫙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두꺼운 푸른 껍질이 쫙 벌어지면 까만 알맹이 동백이 토르륵 하고 빠져 쏟아지는데 풀 위에 꿈을 맺는 이슬같이 구르지요. 달밤에 감이 툭툭 떨어져선 깨쳐지는 이슬이 빛나는 것도 좋지마는 동백 한 알이 토록 하는데 그이는 고개를 슬쩍 들고 그 서슬에 나는 흘긋 건너다보고 그 밤은 무던히 좋은 꿈을 꾸며 자는 적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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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타는 꽃의 정열에 비기어 그 알이 하나 빠지는 것은 어찌 그렇게도 고담(枯淡)한가! 하늘에 별이 포감포감 박혔듯이 새빨간 꽃이 포기포기 그 싯푸른 잎새마다 하나씩 맞물고 맞물리우고 있지 않았는가. 동백잎같이 진하게 빨간 꽃은 없습니다. 동백나무를 어느 누가 화초로 가상타 하여 가꿀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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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과 뜻이 자꾸자꾸 퇴색하여 가는 때 다시 물들여 주고 되살려 주는 내 생명의 나무인 것을. 그 동백이 까만 껍질에 싸인 씨가 있고 그 놀미한 씨를 짜면은 기름입니다. 그 기름이 그이의 검은 머리칼을 윤내어 주는 줄은 알지마는 과연 귀여운 요새 여인네들이 바르시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동백잎과 꽃에 그리도 많이 길리운 내 마음이 그 잎과 꽃의 정열보다도 그 알의 고요히 빠지는 정숙을 이다지도 좋아해졌을까 스스로 의심스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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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밝고 바람은 살래살래 흘러드는 서늘한 9월 밤이요, 마루간에 가끔 한 마리씩 쫓기어 드는 모기를 날리면서 핼쓱해져 가는 구름이나 바라고 앉았노라면 밤도 깊습니다. 동백은 바로 풀 위의 이슬 위에 받습니다. 톡, 토륵, 토르륵, 셋이 빠진 듯하면 좀 사이를 둡니다. 다른 놈이 또 빠질 그 사이가 좀 떨어지는 것이 오히려 더 신통하오. 일어서서 안 나아갈 수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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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희고 이슬이 빛나는데 토륵 하는 동백 한 알, 천지의 오묘하고 신비함이 이 밤 그 나무그늘 밑에 있는 듯싶습니다. 나는 눈이 어둡지 않아 이렇게 좋을 데가 없소이다. 귀가 막히지 않아 이리 복 될 데가 없습니다. 나는 내 고향이 동백이 클 수 있는 남방임을 감사하나이다. 잎과 꽃의 그 봄이 시들었음이 아니로되, 동백 한 알이 빠져 이 긴 밤의 이리 고요하고 느껴움은 이 철 9월이 주는 은혜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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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나이는 자꾸 늘어 슬픈 일도 되오마는 그 나이를 안 먹고 있으면 보다 더 슬픈 일이지요. 막연하게나마 인생의 깊숙한 맛은 나이가 먹어가야만 정말 맛볼 것만 같소이다. 차차 봄을 떠나는 맛이요, 웃옷 벗고 푸대님으로 거니는 맛이요, 말없이 마루간에 혼자 앉았는 맛이지요. 비록 “옷을 벗어 갈수록 예뻐지는 내 여인아” 하는 그 나체(裸體) 예찬은 아닐지라도 이따금 벌거숭이로 거닐어 보고 싶은 때가 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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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감이나 동백만이 열매이오니까, 오곡백과지요. 뜰 앞에 은행나무는 우리 부자가 땅을 파고 심은 지 17, 8년인데 한 아름이나 되어야만 은행을 볼 줄 알고 기다리지도 않고 있었더니 천만의외이 여름에 열매를 맺었소이다. 몸피야 뼘으로 셋하고 반, 그리 크잖은 나무요, 열매라야 은행 세 알인데 전 가족이 이렇게 기쁠 때가 없소이다. 의논성이 그리 자자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이라 서로 맞대고 기쁜 체는 않지만 아버지도 기뻐합니다. 아들도 기뻐합니다. 엄마가 계시더면 고놈 세 알을 큰 섬에 넣어 가지고 머슴들을 불러대어 가장 무거운 듯이 왼 마당을 끌고 다니시는 것을. 봄에 은행잎은 송아지 첫 뿔나듯이 뾰족하니 돋기 시작하여 차차 나팔같이 벌어지고, 한여름은 동백잎에 못지 않게 강렬히도 태양에게 도전하고, 이 가을 들어선 바람 한 번에 푸름이 가시고 바람 한 번에 온통 노래지고 바람 한 번에 아주 흩어지는데 다른 단풍 같지 않고 순전히 노란빛이 한 잎, 두 잎 맑은 허공을 나는 것은 어떻다 말씀할 수 없습니다. 노령이신 아버지라 말씀이 없고 괴벽인 아들이라 말이 없고 50생남쯤 되는 이 열매를 처음 보고도 서로가 은연히 기뻐할 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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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놈이 “그 은행 익으면 조부님 젯상에 놀래요.” 하는 데는 파흥(破興) 아니할 수 없나이다. 이 아침에 동백이 또 토록 하는 통에 내 맨발로 또 금빛 이슬을 깨칩니다. 청명을 들이마시며 거닙니다. 시 ─ 실 ─ 호 ─ㄹ 호르르르르 ─ 저 대삽(숲) 속에서는 호반새가 웁니다. 벽안흑모(碧眼黑毛) 긴 꼬리를 달고 날면 그림자만 알릉거리는 것 같은 호반새 종다리 소리같고도, 더 맑은 꾀꼬리 소리 같고도, 더 점잖은 가락은 요새 아침마다 연약한 벌레 소리를 누르고 단연 하이든의 안단테 칸타빌레를 노래합니다. 아침마다 참새들은 집에 붙어 있질 않습니다. 고놈들의 넓은 목장이 있는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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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여후여 까까 ─ 후여 새를 몰고 쫓는 소리올시다. 어떤 때는 예사로 멋도 있게 들리는 후여까까, 그 애들의 헐벗은 옷이 축축 늘어진 벼이삭과 함께 아침 이슬에 후줄근히 젖었을 것입니다. 나락을 심어 먹기 시작한 때부터의 이 후여까까 소리, 만리 이역을 가시더라도 이 가을 아침이 되면 귀에 익어 쟁맹할 그 소리는 우리들의 살 속 깊이 스며든 지 벌써 오랜 옛날이외다. 대삽에서 우렁찬 바람이 터져나옵니다. 지용의 ‘청대나무’입니다. 대에 나무를 붙여서 읊는 지용은 용하게도 동백을 춘(椿)나무라 읊습니다. 대나무의 고장인 이곳에선 삼척동자라도 대지, 대나무는 아니합니다. 그 대밭이 하도 많이 큰 게 있어서 한 동리의 한 촌락을 흔히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 대밭을 대삽이라 부르지요. 죽순이 송아지 뿔나듯이 나오면 한 자 자랄녘에 끊어서 나물을 만들어 먹는데 그 맛이 천하일품, 그리하여 평양서는 굳은 큰 대를 잘라서 삶는다는가 봅니다. “이른봄 3월이니 남도에는 죽순이 났겄다”고 하신 시인이 계신 듯하나 죽순은 6월 초에야 지각을 뚫고 나옵니다. 그 놈이 죽순일 때에 다 커버리고 2년이 되면 다 굳어 버리어 설풍을 이겨냅니다. 「눈 맞아 휘어진 대의」 시조가 생긴 탓입니다. 9월 중추 명월 이 곳 남녀 젊은이의 성사(盛事)는 〈강강수월래〉의 원무회와 장정들 씨름판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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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녀의 원무회는 새벽 한시경이면 헤어지지마는 시새워서들 성장을 꾸미고 출회하던 양이 볼 만하고 장정들의 씨름판은 밤을 새우고 동천강(東天江)이 되더라도 좀처럼 끝나지를 않습니다. 대개는 5, 6일쯤 같은 기간을 두고 농촌 장정 부녀는 연중 가장 유쾌합니다. 그도 그럴 일이지요. 오곡이 다 익었거든요. 명월은 그렇듯이 젊음을 꾀어낼 만하거든요. 아무튼 이 두 행사는 이곳의 아름다운 정조(情調)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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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9월도 늦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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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의 발을 걷어치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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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말로 하이킹을 나서 볼까, 정병 5, 6인 손끝에 날랜 대창을 지녔소. 곧 산에 오르는 스틱이요, 밤 까는 창이외다. 배낭에 술을 넣을 것은 없습니다. 산중에라도 술잔이나 주는 사람이 없을라구요. 술잔이나 마시면 익혀논 육자배기가 가을 하늘에 높이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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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에서 바라다보아도 그 톱니 같은 산봉우리들, 발밑이 간지러운 월출산(月出山)은 단풍의 불타는 골짜기로 쌓였고 그 천왕봉(天王峰) · 구정봉(九鼎峰)에서는 논 문서를 올려다가 자식들 불러 나눠주고 천만대손손 막등월출산(千萬代孫孫 莫登月出山)하라고 유언하신 군자가 계신 만큼 험한 곳이지요. 윤고산(尹孤山)은 월출산(月出山) 시조로 무던히 사랑했던 곳이요, 그 산뿌저리에 무위사(無爲寺) 있고, 오도자(吳道子)의 벽화가 절품입니다. 정다산(丁茶山)이 계시던 백련사(百蓮寺)는 남쪽 구강 위에 우뚝 솟은 선경이요, 죽도(竹島) 앞에 매일 배타고 일월을 보낸 다산(茶山)의 늠름한 풍모를 그려 볼 수 있나이다. 고래 수백 년이 강물 위를 배타고 적소 참하신 한 많은 선비, 얼마나 많았을까. 남병사영(南兵使營)이던 병영 평야에 경병사병의 조련소리도 그치고 그 뒤 수인산성(修仁山城)도 가을 단풍만 곱습니다. 소속을 장흥(長興)과 다루는 동남의 천관산에 흰 수건 쓴 호랑이 백주에 돌아다니시고 그 산 밑에 청자기 굽던 자리가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그 산 흙을 더러 가지러 오고 채굴 이상 금도 성행하오. 골의 주봉 보은산 우두봉(牛頭峰)에 가을의 정기인 듯 쫙 깔린 산국화를 깔고 앉아 사면을 굽어보면 일폭 산수도에 들어앉은 선인이요, 구강이 하얗게 흘러흘러 제주에 이름을 봅니다. 그대로 외줄기 봉을 타고 백두산 상봉까지 삼천리 기어오를 것 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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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康津)·해남(海南)을 아실 이가 드물지요. 경원(鏡源)·종성(鐘城)을 잘 모르듯이. 그러나 거기서 여기가 꼭 삼천리, 쩔웁고 좁아서 우리의 한이 생겼는 것을 더러 서울 친구들은 지도를 펴놓고 멀다멀다 오기를 무서워하나이다. 고향살이 십여 년, 옛날의 사향가(思鄕歌)·회향병(懷鄕病)은 찾을 수 없소. 오히려 멀리 타향 가 계시는 죽마고우가 그리워지고 그리하여 등산대원이 차차 줄어드는 세상이 되고 보니 고향이랬자 쓸쓸할 뿐이외다. 올해도 강강수월래 씨름판을 못 설 겝니다. 이 가을도 쓸쓸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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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光[조광]》 1938년 9월
【원문】감나무에 단풍 드는 전남(全南)의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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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1년 09월 15일